20230710b 부산강의 : [시편]60(44:9)-그러나 이제
20230710b 부산강의 : [시편]60(44:9)-그러나 이제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첫째 시간 끝에 인간은 항상 선악구조 때문에 나쁜 일을 해도 그걸 조종해요. 어지간한 벌칙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벌칙을 감수한다 치고 내가 죄를 짓되 벌칙은 내가 마땅히 감수하겠다는 조건 하에 인간들은 어떤 완벽을 추구하는 겁니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그 징벌도 내가 받음으로서 그게 죄로 미끄러지지 않고 여전히 의의 영토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과시하고 싶은 거예요. 선악체계에서. 그래서 바리새인에게는 고난주간이 있는 겁니다.
내가 그것을 사도 바울의 로마서, 갈라디아서 편지에 의하면 내가 행한 모든 행함에 대해서 보상을 받는 것으로 나의 의가 어떤 경우라도 확인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행한 것이 비록 악이라고 나중에 드러나더라도 내가 처벌을 달게 받겠다고 돼버리면 이거는 악이 아니고 악에서 의로, 선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거예요. 언제든지 악이 들어가도 선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것 회개, 반성이죠.
회개, 반성을 할 각오로서 내가 살아가게 되면 어떤 악이라도 다시 어느 구역으로 올 수 있느냐 하면 선과 악 중에서 악은 선으로 오기 때문에 나의 행한 것은 항상 의라는 보상으로 주어지게 돼 있다, 이래 주장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마귀가 이래 주장하지요. 그런데 지금 고라 자손이 그걸 알면 질문을 안 해요. ‘그러나 이제는’ 말 안 해요. 그 정도는 인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 원칙이 깨어져버렸다는 거예요. 이게 다인 줄 알았는데 선악지식을 아는 인간들은 뭐든지 선과 악에 균형 맞추면서 항상 선한 쪽으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내다보는 게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 자기가 살 수 있는 희망을 갖는 구조인데 그 구조가 깨어져버린다는 거예요. 그 구조가 깨어져버렸어요. 그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전부를 총동원해도 지금 상황은 설명이 안 되고 해명될 수 없는 지경으로 주께서 보내셔버린, 주께서 왜 이스라엘을 이끄십니까, 이래 되는 거예요.
회개해도 소용없고, 반성해도 소용없는, 그러면 그 세계는 알 수 없는 세계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게 고라 자손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고라 자손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고라 자손이 씨가 말랐어요. 다 죽었어요. 그때, 민수기 16장에서.
다 죽었는데 주께서 거룩한 성전의 문지기로 세워준 겁니다. 레위 지파가 해야 될 일을 유지시켜준 거예요. 연결시켜준 겁니다. 오벳에돔과 더불어서. 그 사람들은 이방민족에도 불구하고 언약궤를 모셨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지속적인 일과 떨어지지 않고 그 안에 편입되어서 일할 수 있게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고라 자손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야곱의 정신이 씨가 말린,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 했으니까 씨가 말린 고라 자손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말짱 망해버렸는데 이런 시편 44편을 언급했고 그것이 성경으로 남아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야곱의 정신, 처음의 히브리 민족을 이스라엘 되게 했던 그 정신이 씨가 말려버린 고라 자손, 모세에게 대들었던 그 자손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 이것은 이런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나로 표현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쉽게 생각할 겁니다. 주머니 속의 송곳. 추울 때 주머니에 넣었는데 아파. 왜 아프냐? 가장 편안한 자리라 생각하고 손 넣었는데 거기에 뭐가 기다렸습니까? 송곳이 기다린 거예요. 이 말은 외부적으로 이방만족과 우리 이스라엘의 차이점만 생각했던 이스라엘이 고라 자손의 이런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이게 외부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내부문제로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이어가는 거예요.
언약이 바깥에서 와서 뭘 관통한다? 이방민족 쳤다. 아까 우리가 1절에서 8절까지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동안 이방민족을 쳐서 우리의 활도 아니고 우리의 칼도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쳐서 너무 고맙습니다, 라는 우린 그걸 놀라운 기적으로 여깁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증거로 봅니다. 했는데 그러나 이제잖아요.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어디로 갑니까? 이스라엘 지켜줌으로 스톱이 되는 게 아니고 멈추지 않는 주님의 언약이, 주님의 언약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될 때까지, 그것도 육신이 그냥 육신이 아니고 어떤 육신? 죄 있는 육신 될 때까지. 하나님이 죄 있는 육신 될 필요 없잖아요. 육신 자체가 피조물이고 거기다가 죄 있는 육신을 가질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있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이 알고 있는 선악의 지식, 그걸 능가하는 거예요. 인간이 기껏 아는 선악, 인간은 선악과만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 너머를 알아요, 몰라요? 생명나무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그리고 알 필요도 없고. 그런데 생명이 어디로 들어온다? 선악과 지식 속으로 드디어 침투해 들어오는 거예요.
바깥이 내부로 함몰한다. 내가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헬스클럽에 가면 그런 것 있지요. 운동기구 중에 하나인데 손잡이 들고 있는 것 있지요. 캐틀벨. 바깥에 있는 손잡이 이거는 쇳덩어리 안의 내부에 있잖아요. 한 번 상상을 해보는 거예요. 바깥에 있는 것을 안에다 집어넣는 겁니다. 이게 물컹물컹하다 치고 찰흙으로 만들어서 얼마든지 이게 조작에 의해서 집어넣었다 치면 어떻게 되느냐? 그림이 이렇게 되지요. 바깥에 있는 손잡이 구멍만 남기고 안은 편평해지겠지요. 외부가 내부로 들어가 버린 거예요.
고라 자손이 질문하기를 주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지켜주기 위해서 바깥에서 지켜주는 걸로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거는 이방민족들이 각자 우상들이 있잖아요. 그 우상들이, 신은 인간보다 더 훨씬 커요. 크기 때문에 인간은 작잖아요. 큰 것이 작은 것에 들어올 이유도 없고 들어올 필요 없다 생각하는 거예요. 바깥에서 보호하면 되니까. 교회 나올 때 다 사람들이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하나님 크신 분이잖아요. 하나님이 작은 내 속에 크신 분이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또 들어와선 안 돼요. 왜? 워낙 자기가 쓰레기통, 더러우니까.
바깥에서 지켜주고 훈계나 하고 잔소리만 하면 되지 굳이 안까지 들어올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안에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왔다는 흔적만 두 개 남지요. 두 개만. 그러면 바깥에 손잡이가 안에 들어왔다면 바깥에 있는 기능이 안에서도 그냥 멈출까요, 작동할까요? 안에 들어오면 작동하지요. 그게 뭐냐? 말씀이 하나님이 사람 속에 들어온 거예요. 이제 사람들은 죽었어.
제가 어제 낮에 설교했잖아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다 하니까 왜 그리 상상들을 많이 하는지. 자비롭고 어질고 사랑이 많고. 하나님은 나쁜 놈들은 심판하고 착한 사람은 구원해주고. 상상들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그 멀리 있던 하나님이 직접 유대사회에 들어왔을 때 그 당시 직접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 만났던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뭐였습니까? 그 거리가 멀리 있으니까 좋은 이야기는 다 했는데 막상 가까이가 아니라 함께 있을 때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단호했습니다. 죽여 없애버리는 것.
이 말은 왔을 때 십자가에 죽였잖아요. 그러면 그걸 다시 한 번 뒤로 비디오 장면을 뒤로 돌리는 거예요. 뒤로 돌리면 멀리 있던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오해했다는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서로가 서로한테 거울상으로 반사되듯이 그냥 타자를 통해서 나 자신을 알게 된 거예요. 정작 하나님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역사와 전통으로 내려왔던 신학이나 철학, 학문 그런 것으로 주워들어서 그걸로 나를 구성한 거예요. 그러니까 신학이란 게 얼마나 거짓말인지 아시겠지요.
주님이 속에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왔으니까 속에서는 난리가 난 거예요. 빨리 어떻게 합니까? 토해내지요. 바깥에 빨리 토해내야 돼요. 어울릴 수 없는 자가 들어왔으니까 내 생활이란 게 없잖아요. 나보다 못된 인간 그렇게 많은데 하필이면 나한테 암이 걸리고 이런, 하나님 나한테 왜 그랬어요? 저한테 왜 그럽니까? 그때 이십대에 예쁘다고 선보겠다고 의사, 판사 줄을 섰는데 주님 나한테 왜 그랬어요? 아무 볼 것도 없는 남자와 결혼해서 빼도 박도 못하고, 주님 나한테 왜 그랬어요? 이게 뭐예요, 내 인생. 무르고 싶다, 정말.
주님은 우리의 송곳으로 우리 안에 들어온 거예요. 나를 찌르는. 여러분들 그런 것 생각해보세요. 아주 청순한 십대 소녀가 항상 예쁜 것 좋아하고 꾸미기 좋아하고 분홍색 좋아하는 애들이 머리 하고 투피스에 허리를 짤룩 들어가고 십대는 아무리 밥 먹고 허리 안 나와요. 원피스 짧게 하고 밑에 치마는 무릎을 살짝 덮는, 그리고 귀여운 척하면서 춤추다가 지뢰 밟아보세요.
우크라이나 전쟁 가서 춤추다가 러시아 지뢰 밟으면 그 원피스, 투피스 다 찢어져버리는 거예요. 뭐가 돼요? 예쁜 것, 귀여운 것 다 어디 갔어요? 라라라라랄랄라 하다 지뢰 밟아 발, 다리 수술하고 그 귀여운 것 다 날아갔지요. 여기 14절에 그 흔드는 것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후입니다. 그건 9절이죠. 14절을 보고 있다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고라 자손 주도 하의 이스라엘에게.
여기 11절 보면,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그냥 값어치도 없이 그냥 노예로 팔려나갔다 이 말이죠.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우린 값없이 취급당했다 이 말이거든요.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그다음에 뭐냐 하면,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14절)
머리 흔든다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아니야, 아니야.”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저들과 같지 않아서 참 다행이야, 라고 이방민족들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이고, 우리가 생각해도 참 안 됐다. 불쌍해도 저렇게 불쌍하냐. 집안 망해도 저렇게 망하느냐.” 이순신 장군이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아직도 배가 몇 척 있다? 열두 척. 열두 척도 없어요. 일어설 기미가 다 부셔졌어요, 없어요. 뭐 딛고 일어설 게 아무것도 없어요. 지팡이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때는 뭐냐? 손가락 흔드는 거예요. 아니지. 인생 저래 사는 게 아니지. 저렇게 되면 안 되지, 라고 이방민족들이 즐거워하는 거예요. 천만다행이라고 못 된 가정을 보면서 반대급부의 자신의 다행스러움을 하루하루의 즐거움을 찾는 거예요. 이걸 뭐라 했어요? 주머니 속의 송곳을 맞이한 겁니다.
전에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1절부터 8절까지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함께 있어 이방민족들을 심판하시고 우리 민족은 이기고 그들은 칼과 활 있었지만 우리 민족에 패배해서 너무나 신나요. 너무 좋아요. 좋아요, 막 누르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 너무 좋아요, 사랑해요.” 이랬던 그들이 이제는 뭐냐 하면 악재를 만난 거예요. 신났지요. 신났는데 그 주머니 속의 뭐가 찌르는 거예요.
바깥에 계셔야 될 도와주실 주님이 막상 우리한테 근접해서 우리 속까지 들어오니까 우린 그때부터 어떠한 전환이 일어나느냐 하면 주님의 혜택을 입는 쪽에서 주님이 당하는 수난과 함께 당해야 될 그래서 한 패밀리, 한 자족이 되고 같이 희생당해야 될 민족으로 주님의 일에 합류되는 지경에 이른 겁니다. 나는 놀고 희생은 주님만 하시면 고맙다 이야기해주겠습니다, 라는 그렇게 꼼수를 부리던 우리가 이제는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걸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관객이요 관람객이라면 쳐다보면 되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에 박수치면 되니까.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선수로 뛴다. 그냥 결과만 보고 100:0 박수만 치고 감사하면 되는데 나로 하여금 선수로 뛰게 만들었어요. 이건 아주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전에는 내 편과 네 편, 이렇게 이방민족과 경계였는데 그러나 이제는 경계가 아니고 지평이다. 경계라 하는 것은 그냥 가만있어서 이쪽만 바라보면 되는데 지평이라 하는 것은 지평선이 나올 때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지평선은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리 가도 지평선 거기 있지요. 주와 함께 주의 가신 길을 가게 만들어버려요. 아아, 주와 함께.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구약입니다. 지금 구약하고 있어요. 괜히 또 마음에 부담되어, 지금 구약입니다, 구약.
구약 이스라엘이에요. 신약 아닙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우리 사람 취급 안 해요. 지금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택한 민족이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 죽을 때까지 계속 끌고 가시는 거예요. 그 안에 살아가는 거예요. 동행해서 가는 겁니다. 그게 주와 함께 주님 홀로 죄 있는 육신의 길로 가는 게 아니에요. 자기 백성을 끌고 고라 자손을 끌고 가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이건 제가 읽을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읽어야 돼요. 16절, 17절 누가 읽어보세요.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여기 보세요. 이게 방금했던 16절, 17절이 누구 이야기처럼 들립니까, 신약에 와서? 바로 십자가 지기 위해서 예수님이 평소에 했던 예수님 자기 보이스, 자기 목소리잖아요.
집단화돼 있던 이스라엘이 하나의 개인으로 응축되는 거예요. 주머니 속에 송곳 있다 했지요. 나중에 주머니의 공기를 압축시키니까 뭐만 남습니까? 송곳만 남은 거예요. 예수 믿고 내 인생 따로 있고 주님 인생 따로 있는데 주님께서 바람을 확 빼니까 내 인생은 폭이 줄어지고 먹든지 마시든지 전부 다 누구 인생만, 누구 스토리, 누구 이야기만 나와요? 하루하루가 주님 자신의 이야기, 다 이루었다는 이야기만 나와요. 주님 이야기만 응축되는 겁니다.
그런데 고라 자손은 아직도 이걸 몰라요. 이걸 몰라서 대든다기보다도 뭐라고 자꾸 뭔가 모순되니까 이게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일과 자기에게 일어났던 이스라엘에 일어났던 일이 이거는 약간 틀린 게 아니고 완벽하게 반대가 되니까 그 갭을 줄일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선악지식들이 동원됩니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내가 어디서 그렇게 못됐습니까? 제가 잘못한 것에 대해 처벌을 감수한다고 했잖아요. 집사와 싸웠으면 그날 밤에 모기한테 쏘이는 것 다 하겠는데 이건 아니잖아요, 주님. 지금 나한테 주어지는 고생은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까지 내가 악하게 산 기억이 없습니다, 주여.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7절,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는 주님 언약을 배반한 적이 없는데 왜 결과는 마치 주님을 배반한 것처럼 왜 이런 결과가 주어졌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 답변은 간단하지요. 네가 아니라 네 속에 들어온 주님이 언약을 위반한 자에 대한 지옥의 처벌을 받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너무 한가해요. 한가하고 주님은 너무 바빠요. 우리는 희희낙락 인생 즐기기에 바빴지요. 주님은 언약을 위반한 자가 당해야 될 처벌을 십자가까지 받기 위해서 애썼고 그것을, 아까 그림을 다시 봐야 돼요. 아까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이라 했잖아요. 신약에서는 그냥 불신자가 덮고 있다. 지옥 백성들이 이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기 때문에 없어요. 없는 우리를 주께서 다시 이 땅에 구원시켜놓고, 아까 방향이 위에서 뚫고 올라가잖아요. 이건 내려가는 거예요. 내려가면서 어제도 다 이뤘고 오늘도 다 이뤘고, 내가 이룬 게 아니고 주께서 다 이뤘음을 확인 차에서 지옥 백성 뚫고 지나가면서 여기서 차이를 발생시키는 겁니다. 불신자와 차이가 아니라 나를 포함해서 인간과 예수님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나 아니요 주의 은혜입니다,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구약의 고라 자손 같은 경우에는 내가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이 없습니다. 내가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니고 아무 잘못했지만 이 정도까지 내가 이런 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 갭이 뭡니까, 그 차이를 어떻게 좁힐 수 있습니까, 하는 게 구약의 예언이지요. 구약 성도들이 그런 걸 했다면 신약 성도는 구약 사람들이 몰랐던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뭐냐 하면 자신의 과거를 우리 육신의 미래로 만들어내요. 우리가 내년의 삶이 우리 육신이 지니고 있던 우리의 과거 삶이에요. 내가 살았다 치고 행할 수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인생 98세까지 겪어보시렵니까? 98세까지, 너무 욕보여 미안합니다. 또 72세 하면 얼마 안 남았네, 해서 겁나고. 95세로 우리 정리합시다.
나의 과거를 내 선에서 지나간 과거가 아니고 나의 미래가 나의 과거로 만드는 것이 주님의 기억이에요. 주께서는 거쳐 왔고 우리는 안 살았기 때문에 못 거친 것을 주님의 기억 안에 담긴 게 뭐냐를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면서 그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됩니다. 해답은 끝났어요. 다 이루었다. 네가 무슨 욕을 먹고 뭘 당해도 다 이룬 거예요.
그래서 어제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 2절 본문에 보면 나와요. 네가 하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디모데후서 4장에 이런 말씀 나와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이 거쳤던 이 지옥세계에서 네가 어떠한 모욕과 수모를 감수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걸 감수해야 돼요. 너 죽고 나 살자, 이래 나오지 마시고 하여튼 죽은 인간이 별짓을 다하고 있군,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고요.
타인을 죽은 자로 본다면 더 이상 우리가 타인에게 주눅들 일은 없습니다. “딩동, 계십니까? 가스검침 왔습니다.” 가스검침은 산 사람이 오지 말고 죽은 귀신이 가스검침 왔다고 보면 돼요. 죽은 자가 이 동네를 설치고, 죽은 자가 US오픈 마지막 라운드 치고, 모든 게 죽은 자들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죽은 자들의 대통령하고 있고, 죽은 자들이 오염수 태평양에 방류하고 있고. 모든 것이 죽은 자들이 서울~양평 고속도로 취소시키고 있고요.
그것 때문에 흥분하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들의 게임 판에 놀아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그걸 겪게 하는 거예요. 이거는 내가 얼마나 고생 더 했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가를 보게 합니다. 아아, 참 주님께서 심각하게 고생하셨구나, 발견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걸 할 수밖에 없는데요. 여기 18절에 보면,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니까 고라 자손은 자기반성에 나서요.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게 있을 거야. 욥의 친구들처럼. 잘못한 게 있는데 아무리 해도 내 잘못과 지금 주어진 우리의 삶의 환경과 이게 매치가 안 돼요. 남들은 회개하라고 반성하라고 닦달 내는데 반성하고 회개할 게 있어야지요. 내가 아는 방식은 아니에요.
여기서 뭔가 해답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다. 해답을 지금 제시해드리겠습니다.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환경이 달라서 그래요. 주님이 계신 나라 천국하고 우리가 사는 지옥의 환경이 달라서 그래요. 지옥에는 선악체계에요. 끝까지 선악체계를 고집한 자가 악마거든요. 악마는 선악체계에 의해서 벌 받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선악체계 완성자가 주님입니다. 주님이 선악체계 완성자거든요.
그런데 악마와 그 속한 인간들은 선악체계로 완전하지 못했어요. 주께서 지옥에 대해서 소개한 대목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지금 난해한 게 남아있어서 그래요. 지옥이 나오는 데요 마태복음 5장 25절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그다음에 뭡니까? 26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옥, 나오지 못한다, 이 둘을 합하면 지옥 돼요.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 17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돼 있거든요. 그러면 인간의 입장이나 악마 입장이나 하나님 보기에는 완전하게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다 지옥 갑니다.
참 우리 자신을 알아야 되는 데요. 우리 자신을 이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합시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은 이미 죽은 것으로 확정 났다. 이게 바로 나에요. 나는 이미 죽은 것으로 확정 났어요. 죄 값으로 이미 죽은 것으로 확정 났다고요. 살려고 한다는 자체가 이거는 터무니없어요.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에 살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요. 자신의 말씀 성취를 다 드러내는 그 날이 온다는 거예요. 뭘 했고, 뭘 했고, 뭘 했고 이것을 온전히 공개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6장 39절, 40절에 나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인데 아버지의 뜻은 내가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려내려 함이라, 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교회에서 서로서로 보잖아요. 네가 택한 백성이야, 아니면 내가 택한 백성이야? 당신은 아닌 것 같은데, 하잖아요. 그러나 그런 것은 인간은 몰라요.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그 뒤의 말씀이 뭐냐? 마지막 날에 주님이 다 살려내요. 하자 없이 오류 없이 빠짐없이 다 살려낸다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는 것이 내 일이 되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이게 내가 구원받는 것이 철저하게 처음과 중간과 끝도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마지막 날에 본인이 한 마무리 된 모든 성과를 주께서 놓치지 않고 다 끄집어내는 겁니다. 같은 이야기가 히브리서 9장에 나오지요. 사람에게 죽는 것은 이미 확정된 것이고(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뭐 과격하니, 너무 단호하니, 이상하니 이렇게 하는데 히브리서 9장 이야기잖아요. 이미 사람이 죽는 것은 결정 난 것이고 그다음에 그 이후에는 뭐가 있으리니?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주가 누굽니까? 인간이 관여됩니까? “판사님, 이야기할 것 있습니다.” 그런 말을 피고가 말할 게 없어요.
피고는요 주께서 창세전에 정한대로 집어서 구원받기 때문에, “저 할 말 있는데요. 제가 이런 일을 했습니다.” 자꾸 그 입 다물라. 왜? 우리는 망해야 마땅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주께서 이미 심판이 있으리니,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마지막 때에 재림 날에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오신다는 거예요. 주님으로 시작한 자기 성과를 자기가 건져가겠다는 거예요. 자기 업적을, 자기 과제물을.
드라마 보면 그런 게 가끔 나오는데 실제 사회에서 그런 게 있어요. 위에 높은 상사가 어떤 과제를 줍니다. “이번 바이어 오는데 프레젠테이션, 네가 설명을 해서 바이어 마음에 들도록 해서 이번 구매 따네. 구매자의 마음에 흡족하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성과 내는 거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자 대리가 그냥 버티는 식으로 능력도 없으면서 지 어려운 살림살이 챙기기 위해서 그냥 회사에서 갑질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할 줄도 능력도 없으면서.
그런데 새로운 신입사원이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지한테 시켰는데 신입이한테 다 시키는 거예요. 지가 엄마 아프다고 가버리고 신입이 밤새도록 해서 다 했어요. 그다음 날 프레젠테이션 설명회 하는데 지가 마치 한 것처럼 설명해서 사장님도 흡족해서, 저 과 능력 있다고 했을 때에 드라마니까 그렇고 실제로도 그런 일 많아요.
그런데 “김 대리 네가 했어, 아니면 신입사원이 했어?”라고 물을 때 제가 했지요, 라고 나올 때 그 신입이 사실은 회장님 아들이라. 바닥부터 직장생활이 어떤가를 재벌 상속자가 바닥부터 생활하는 거예요. 그분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에요. 드라마에서 예수님 찾아내야 돼.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님은 우리의 궤휼을 아시고 우리가 어떤 존재고 어떤 성질이고 어떤 인간인지를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거예요. 주께서 모르는 게 없기 때문에 나보고 기도하라 하신 거예요. 네 애로사항 다 겪었다는 겁니다. 주님은 이거는 모를 거야, 그런 게 없다는 거예요. 왜? 겪었으니까 바닥부터 했으니까. 사람의 종으로 시작해서 죽기까지 종으로 해서 나중에 만유의 주가 되셨잖아요. 빌립보서 2장에.
드라마도 그런 드라마 없지요. 상속자가 말단 사원이 된 거예요.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주님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아무도 가지 않는. 인간은 말단에서 대리되면 성공했다고 치지요. 주님의 성공은 뭐냐? 아무도 가지 않은 십자가에 죽은 것이 주님의 방향이었어요. 주의 하신 일입니다. 가다보면 스쳐지나가요. 내 가는 쪽은 이쪽이고 주님 가는 곳은 저쪽이고. 저 사람은 왜 저기 가지? 이상하게 의아해하죠. 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길로 가지? 왜 죽는 길로 가지?
지금 고라 자손의 질문이 그거에요. 바르게. 바르게. 바르게 매일같이 바르게 언약을 지키고, 말씀 지키고. 그런데 주어진 상황은 엉망진창, 주여 왜 그렇습니까? 외부에 있던 주의 이름이 어디로 왔습니까? 내부로 왔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이 정도까지 아셨으니까 어려워도 여러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시 44편, 44편 3절을 다시 봅시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해서 여기 5절에 보면,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그다음에 무엇으로 밟으리라 돼 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돼 있지요. 이게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출애굽기 15장은 난리도 아니었지요. 홍해 건너고 보니까 홍해 바다 근처에 뭐가 떠내려 왔습니까? 애굽 군사들의 갑옷과 수레가 떠내려 온 거예요. 그걸 쳐다보고 미리암이 모세 누나가 가만있을 수 없었어요. 너무 좋아서 찬양을 시작한 거예요. 그 찬양 가사가 바로 이 가사와 똑같아요.
주의 오른손의 능력으로 주께서 친히 용사가 되사 우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된 거예요. 방금 뭘 지켜줬다고요? 우리. 누가요? 주의 이름이. 그 방식은? 오른손의 능력으로. 이때 우리, 주의 이름, 오른손의 능력은 출애굽기 15장의 상황에서 기껏 인간들이 아는 한계는 여기 우리가 그 당시 이스라엘로 볼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마지막에 말씀이 육신이 될 때까지 어떤 경로가 있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경로가 주변을 뚫고 지나온 거예요. 뚫고 지나올 때 여기 뚫히는 자들이 누구라 했습니까? 주변에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이스라엘이 아닌 흔히 있는 역사적인 인간의 보통 열방들이죠. 이방나라죠. 그냥 세상들이죠. 세상에서 히브리인들이 뚫고 올 때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 될 때 그 이스라엘이 히브리 자기 나라인 줄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의 이름이 도와줬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잘못이었어요. 이게 나중에 말씀이 육신이 될 때 왜 잘못인지 아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주님이 아니에요. 주님은 주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그냥 채택한 거예요.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지 사나 죽으나 우리의 것이 아니에요. 방금 이 이야기 들으면 목사님 그렇게 흥분할 필요 없고 다 아는 이야기인데 뭐 흥밋거리입니까. 하나도 어렵지 않고 쉬운데요, 이렇게 하지요. 이게 쉬운 이야기 아니에요. 얼른 들으면 쉽게 들리지만 쉬운 이야기 아닙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나무가 있지요. 나무 둥치를 자르면 이게 있지요. 이걸 나이가 드는 테, 나이테가 있지요. 나이테 제일 바깥이 뭡니까? 이걸 표피라 해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세요. 이 나이테 특징이 나와 너와 이게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처음에 나무 심을 때 이래 왔지요. 그러면 나이테를 해보면 봄, 여름, 가을, 겨울 해서 견고한 재질과 약한 재질에 따라서 틀어져서 테가 생기잖아요.
표피는 어떻게 됩니까? 표피는 외부로 자꾸 밀려나가죠. 나가 있고 네가 있는 게 아니고 같이 나와 너 구분이 안 되고 나라고 여긴 곳에 타자, 너라고 하는 주님이 들어와 버리면 나는 바깥에서 계속 밀리고 내 안에 부풀어져요. 처음에 할 때는 나, 너가 있어요. 이스라엘에는. 이스라엘은 나고 하나님은 너가 되셔서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오해였던 겁니다. 주의 이름이 바깥에서 도와준다는 거예요. 아까 했지요. 바깥에 있는 것이 안으로 들어온다고요. 주의 오른손의 능력이 살아 있는 우리를 도와준 게 오른손의 능력이라 본 거죠.
그러나 주님이 되면 능력이 뭐냐 하면 마귀와 죽음과, 마귀나 사탄과 죄와 율법에서 우리를 끄집어내는 능력이 주의 능력이에요. 이것은 나, 너를 붕괴시키는 능력이에요. 나, 너 따로 있다는 것에서부터 끄집어내주는 능력이 오른손의 능력이고 주의 능력입니다. 하나 됨을 너는 왜 자꾸 주님을 너와 나 둘로 나누느냐 이 말입니다.
주님은 창세전부터 하나였는데 너는 왜 자꾸 주님이 날 도와준다고 나를 왜 자꾸 그걸 지키려고 하느냐 이 말이죠. 하나인데.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아버지와 나와 하나인 것처럼 너희들도 나와 하나가 된다. 아가서에 나오잖아요. 솔로몬의 아가서. 처음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다가갈 때 술람미 여인이 자꾸 오해하는 거예요.
“너는 내 스타일 아니라고. 나 당신 안 좋아해. 왜 자꾸 오는 거야. 나, 흑인 여자야. 볼품없어. 오빠 농장에서 일했거든요. 오빠 농장에서 일해서 햇빛에 얼굴 시커매. 당신은 왕이잖아. 신분 차이가 나는데 너, 나 갖고 놀라고 했지? 당신과 나 어떤 사이인데 왜 자꾸 다가오는 거야.”
처음에는 술람미 여인이 기피했어요. 그런데 솔로몬은, “내가 너한테 다가가고 싶어 다가가는 게 아니야. 네 속에 나 있다.” 네 속에 나 있다,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다, 정말. “네 속에 나 있다. 나는 나를 찾아가는 거야. 너 찾아가는 게 아니야. 너는 표피야.” 네 안에 들어온 나를 찾고 싶은 거예요. 그게 뭘 이겼다? 아가서 8장에 죽음을 이긴 뭐다? 사랑. 사랑은 율법을 이겨요.
율법을 줌으로써 우리 형편이 네가 처한 형편이 율법에 갇혔다는 거예요. 죄에 갇혀있는 거예요. 저주에 갇혀있는 거예요. 율법 줘가면서 사랑이 율법보다 세다는 것을 계속해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그냥 찾아다니는 거예요. 놓치지 않아요. 세상에 스토커도 그런 스토커는 없습니다. 집안에 옷 벗고 있는데 찾아가요. 그러니까 여자가 말하기를, 옷 벗었으니까 오지 말라 하는 기라.
그런데 솔로몬은 그렇게 네가 문을 못 열어준다면 이거나 먹어라 해서 몰약을 줘요. 사람이 아프고 늙어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좀 예쁘다, 낫다 하지만 주님 십자가와 비교해보세요. 우린 십자가 생각 없습니다. 숯검정처럼 다 떼고 싶어요. 복음이고 십자가 복음 다 떼고 싶어요. 나는 나이고 싶어. 남한테 멀쩡한 내가 되고 싶어.
이거 병든 거예요. 병든 자에게 뭐가 필요하지요? 의사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의사가 갑질을 안 해. 전혀 우릴 고칠 그런 믿음이 안 가요. 그 정도로 우리는 독하게 선악체제에 갇혀있습니다. 마귀에 갇혀있어요. 그런데 주께서 찾아오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그러나 이제는’ 내게 문제 있음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 왜 주님께서 저를 떠나지 않는 겁니까? 십자가 다 이루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걸 이룬 게 아니고 주께서 이루고 싶은 것을 나를 재질로 사용해서 죄인으로 사용해서 주의 다 이루심이 얼마나 놀라운 작품이 되는가를 주께선 우리를 자기의 신부로 맞이해서 혼인잔치까지 끌고 가십니다.
그래서 시편 44편에 26절,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그다음에 뭡니까? “우리를 구원하소서” 처음에는 주의 이름으로 하다가 마지막에 주의 이름이 우리에게 결국 제시될 건 뭐냐? 주님의 사랑, 끈질긴 사랑, 그 사랑이 아가서 8장의 말씀처럼 죽음보다 더 센 사랑, 더 이상 우리가 죽음에 기죽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과의 차이가 뭔지를 보이게 하옵소서. 우리가 보이는 게 아니고 우리 안의 주께서 늘 보여주면서 우리의 지나온 주님의 과거가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다 이루었다 십자가의 복음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