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7장 29절 (극단맨) 2300620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7장 29절 (극단맨) 2300620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과거는 미래와 대결하는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와 대결하게 되지요. 그러면 미래조차도 과거와 연속성을 가진 과거의 것에 포함됩니다. 아무리 2030년 50년 돼도 과거는 과거에요. 주님이 떠나버리면. 오히려 반대로 그들이 주님을 밀쳐버린 속성이 2030년 50년 돼도 동일하게 거기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첫째 시간에 그렇게 모든 것이 주의 날에 불로 된다면 그러면 주님 쪽에서의 대책은 뭐가 있는가? 다 불질러놓고 다 태워버리고 그러면 뭐 천국은 전부 다 천국은 아무도 없는 게 되지 않느냐. 성경에서 죄인이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죄인은 무슨 수로 구원 받습니까? 어떻게 그 천국에 갑니까? 그런 문제가 있지요.
죄인이 천국을 가는 게 아니고 우리가 독일 가는 게 아니고 독일이 오지요. 이미 완료된 인자의 나라가 완성의 의미로 이곳에 오게 됩니다. 그날이 뭐냐? 그것이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 ‘성령 안’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주께서 결국은 불로 다 싸질러버리는 이 세대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미리 앞당겨서 성령 받는 사람을 이 세상에 출현시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렇게 살아가면 되지요. 불 속에서 살면 돼요. 참 쉽지요. 불 속에서 살면 되지요. 불 속에서 산다는 말은 그냥 내 모든 일을 불과 관련해서 바라보는 거에요. 불과 함께 불과 관련지어서 모든 것이 불타버릴 수밖에 없음을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것들이라고 느끼는 것.
그럼 불 속에서 산다는 말을 이걸 풀이해보면 이거는 종말이죠. 끝이죠. 불 속은 끝입니다. 심판입니다. 심판 속에서 살면 되지요. 불 속에서 산다는 말은 이미 심판을 다 완료 받은 받을 심판 다 받은 사람으로 살면 되는 겁니다. 갑자기 굉장히 수월해지지요. 불 속에서 살면 사람의 날에 살았던 기억이 반복해서 소환되고 반복해서 제거된다. 사람의 날에 살았던 기억이 반복해서 소환되고 반복해서 제거돼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은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주님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그 주님의 의가 죄 바깥에 있거든요. 죄 세계 바깥에 있는 주님의 의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그걸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내가 너희에게 해주는 것이 싸그리 불로 타버릴 이후의 없어질 이후에 새로 만든 거야 라는 새로 만든 가치를 위하여 그들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기억을 반복해서 소환시키고 반복해서 제거, 피로써 또는 불로써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제거해주는 거에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무의미하잖아요. 무의미를 뭘로 바꾸느냐? 탈의미로 바꿉니다. 탈의미라 해가지고 얼마 전에 제가 강의, 제가 언급한 적이 있어요.
무의미, 의미가 없는데 거기서 의미 없는 것을 다시 의미를 끄집어내버리면 기존의 의미체제에서 탈출했다. 탈의미가 생겨요. 탈의미. 왜? 주님이 탈출했기 때문에. 모든 의미는 최종적으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그 세계에서 모든 의미가 완료가 됩니다. 그 완료된 의미가 이 세상에 살게 되면 우리 같은 경우는 죄인인데 졸지에 의인이 되었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기존의 체계에서는 오는 체계를 상상도 못합니다. 예상도 못하죠. 그래서 “너 죄인이야? 그러면 너 지옥 가” “난 아니야. 나 의인이 되었어.” 할 때 “의인이 뭔데?” “나도 몰라.” 다만 중요한 것은 죄인 되었다는 것은 나쁜 짓해서 죄인 된 게 아니고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죄인 되는 거고 새로운 피조물이란 이유 때문에 의인된 거에요.
그러면 그 사람이 묻지요. “도대체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예수님이 만들었지.” “예수님이 누군데?” “몰라.” 예수님을 언어로 모르면서 어떻게 설명해요. 그분이 하셨는데요. 소통이 환장할 지경이에요. 저보고 닦달하면 안돼요. 이게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평소에 예수님께서 말이 안 되는 말씀을 계속 했는지요.
마태복음 17장에 보게 되면 17장 20절에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이게 극단맨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극단맨이에요.
네가 믿음이 있으면 동전을 옮길 것이요. 동전 옮기는 것은 사랑과 영혼에 나오는 그 영화 보면 귀신이 동전 옮겨요. 그 정도는 해요. 그게 아니고 동전이 아니고 산이라니까요. 산.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한다. 아니 말이 되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말입니까 막걸리입니까? 어떻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합니까. 바늘구멍 특수제작해서 커다란 구멍이면 몰라도 안 되잖아요. 안 되는 말만 하는 거에요. 안 되는 것.
멸망 대상이 알아서 뭐할 건데. 알아서 구원받는다 없습니다. 알아서 구원받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의 앎을 극단으로 하여튼 극단맨은 모든 게 극단이에요. 내가 안다는 것은 불 심판 받을 이 세상에서 알았던 거고요. 그러면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세계에서 안 것이 나를 구원한 거죠. 주님이 알아서 나를 구원한 거에요. 주님이 알아서.
열왕기상 18장 38절에 엘리야가 제단 쌓고 바알과 아세라 하고 배틀, 하나님 응답 배틀하는 그 장면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하나님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납니까? 불로서 나타나가지고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증거가 뭐에요? 핥듯이 전부 다 태워버리는 게 여호와의 나타나심이에요. 인자의 날이 그래요.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베드로후서3장 있지요. 전에는 물로서 심판 받았지만 노아의 홍수때 물 지나가고 난 뒤에 살아남은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물 지나간 자국에. 답변해보세요. 노아 홍수때 물이 지나간 뒤에 살아남은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도 없지요. 노아 방주는 물 위에 떠있었으니까 해당사항 없고요. 물이 지나간 뒤에 살아남은 거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없애버리는 거에요. 하나님의 뜻은 모조리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말 궁시렁 궁시렁 하지 말게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7장 26절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온다는 말은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왜? 처음부터 없애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없어지라고 태어난 거에요. 그들이 나를 밀치고 나를 버리라고 그들을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쏘시게 되기 위해서 만든 거에요. 인간이라는 것은.
그것 때문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겁니다. 형상 자체가 갖고 있는 심판, 그 심판에 인자가 하나님의 형상이 심판 대상이 되고 또 심판주가 되는 거에요. 참 이런 이야기가 기존 인간 세계에서는요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니까요. 체계가 완전히 달라요. 본인이 본인을 때리고 본인이 때린 본인을 구원하고 이게 말이 돼?! 그게 말이 되냐 이 말이죠.
진정한 저주라고 하는 것은 이겁니다. 내어버려두는 거에요. 그냥 살도록 내어두는 게 저주에요.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내어버려두사”. 저주받아요. 그러면 주께서 천국의 자기 백성 할 때 내어버려둔다의 반대는 뭡니까? 기어이 간섭한다 이렇게 되겠지요. 기어이 간섭한다. 간섭하는 이유는 간섭하는 방법은 주께서는 이런 아이디어를 냈어요.
뭐냐 하면은 자신이 택한 백성 이마에 도장을 찍어놓고 본인이 특정 인간에게 도장 찍어놓고 이마에 도장 찍어놓고 자기가 찍은 도장 찾으면서 가만 놔두지를 않는 거에요. 여기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나옵니다. “내 다리 내놔.” 자신의 피로 이마에 표시를 해놓고 에스겔 9장 44절과 46절에 천사가 와서 이마에 표시를 해요. 십자가 모양 표시를 하는데 그건 뭐 큰 의미를 두시지 마시고 그걸 신약에 와서 요한계시록 22장 “그들의 이마에 주의 이름이 있느니라” 그들 이마에 주의 이름이 있느니라.
원래 이마는 레위기 13장에 보면 이마는 저 사람이 문둥병 걸렸다 안 걸렸다를 어떻게 표시하느냐 하면은 이마에 색깔이 좀 이렇게 변하면 대번에 제사장들이 “문둥병 걸렸다” 하고 선언해버려요. “나가 진 밖으로 나가. 나가. 나가. 이스라엘 살 자격 없어. 나가.”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요?”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서 색깔이 없어질 때 그 때 들어오는데 그냥 못 돌아오고 문둥병자가 회복됐을 때 드리는 제사가 있어요. 율법의 제사. 율법 제사 드리고 들어와.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아시지요. 새 두 마리 잡아서 한 마리 죽이고 피 바르고 피 발린 새는 공중으로 날아가는. 너는 피 때문에 산거야. 다시 말해서 네가 피 때문에 고침을 받은 게 아니고 피를 내가 되찾은 거야. 피를 되찾는 하나의 매개체로서 어떤 멀쩡한 인간을 문둥병 만들었고 문둥병 된 인간을 하나님께서 치료시킨 거에요. 인간은 주의 일의 시다바리인데 자체적으로 인간은 아무 의미 없어요. 자체적으로.
사람들은 그러지요. 이 세상에서 더운데 참 열심히 삽니다. 열심히 사는 건 인정하겠는데 그게 의미가 없어요. 열심히 사는 게. 그러면 의미가 있을려면 어떻게 됩니까? 의미는 애초부터 없어요 인간은. 그러면 천국 가는 건 뭡니까? 탈의미. 기존의 의미에서 구멍이 나야 되죠. 탈의미. 기존의 인간체계의 의미체계에서 버림받아야 되지요. 누구처럼? 인자처럼. 예수님처럼 버림받아야 되지요. ‘미쳤구나. 돌아도 저렇게 미치는 수도 있구나’ 이런 식으로 욕 얻어먹어 가면서.
아까 제가 글 쓸 때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의 죄를 소환시키고 하는 말 했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인간의 모든 기억을 주의 말씀이 다 뜯어냅니다. 없앤다는 말이 아니고 탈의미라는 것은 덮어씌우는 거에요. 골로새서 한번 보겠습니다. 2장 14절, 15절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우리가 하는 것에다가 파스를 갖다 붙이지요. 죄보다 많은 털이 있는 거기에 파스를 딱 붙입니다. 그 다음부터 여러분 아시지요. 파스 뗄 때 파스만 떼어졌습니까? 털 뽑혔습니까? 탈의미. 나의 개성, 나의 나됨이라는 것이 완전히 다 뽑혀버렸죠. 다 뽑혀버린 거에요.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은 최후의 날 이후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게 성령이에요.
성령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 이미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시켰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영이에요. 일을 마무리한 성과를 듬뿍 담은 영이에요. 불이 내리는 곳에 성령이 내려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불이 내리는 것은 심판이잖아요. 그런데 심판 받아야 될 그곳에 성령의 불이 와버리면 어떻게 돼요? 심판도 완료되고 구원도 완료되지요. 나는 더 이상 너한테 물을 죄 값없다 이렇게 되지요.
그걸 골로새서 2장에서는 죄를 도말하는 거에요. 뽑아버려요. 완전히 우리를 대머리 만들어 버려요. 털이 홀라당~완전히 대머리를 만들어요. 대머리를. “이것 봐, 이 죄 없는 것 봐 반들반들 모습 한번 봐.” 지금 주님 뭐라고 하십니까? 성령의 파스를 갖다 붙여버리면 우리의 죄가 없는 게 아니고 어디 달라붙어 있어요? 성령 파스에 붙어있어요. 우리는 그 성령 파스 보고 “어! 내 죄가 저기 다 달라붙어 있네” 저기 다 붙어있어요.
매일같이 소환된다고 했지요. 매일같이. 계속 죄 생산되면 매일같이 성령 와서 매일같이 뜯어내는 거에요. 도대체 파스 몇 장이에요? 연세 많으면 파스도 많이.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도말하시고 도말하시고 도말하시고 뜯어내시고 뜯어내시고 제거하시고 제거하시고 계속 하는 거에요. 성경 공부도 죄고 기도하는 것도 죄고 선교, 전도, 헌금 다 죄거든요.
그 죄를 계속해서 극한보다 넘어서는 완료된 성령께서 와서 그것을 ‘이거는 내가 가져갈게.’ 왜? 예수님의 예수님의 피 됨을 증거하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주님 가져가셔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의의 관계 의를 생산하는 대상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의는 우리의 소망이다? 아니다? 주님의 소망이죠. 천국은 우리의 소망이다? 아니죠. 주님의 소망이죠. 내가 양이 되는 게 소망이다? 아니죠 목자의 소망이죠.
내가 나를 잃어버렸다? 아니죠. 요한복음 6장 39절 “아버지께서 택한 자를 주께서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억력이 별로 안 좋아 다 잊어버려요. 휴대폰도 잃어버리고 다 잊어버리는데 주께서 우리를 잊어버리지 않고 챙겨주십니다. 주께서. 문제는 불쏘시개 같은 이 세상에서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네가 왜 그게 믿어지니?’ 이 질문을 하게 되어있어요.
이렇게 답변하죠. ‘내가 해도 해도 너무 했지? 그렇지? 나도 이걸 못 믿겠어.’ 그게 정답이에요. ‘너는 어떻게 믿었어?’ ‘아니 아니 난 안 믿었어. 내가 믿어질 거 같으면 내가 믿었지. 이건 내가 믿지 못할 일이 나한테 일어난 거야.’ 믿지 못할 일이 나한테 일어난 거야.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장기판의 알입니다. ‘장기 알’.
장기판의 장기 알은 주체가 따로 있고 숨어 있는 주체의 활동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체로부터 움직여지는 거에요. 광주의 목포의 장로님이 질문한 댓글에서 질문한 유명한 말.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걸 내가 어떻게 지킵니까? 어떻게 지키는 게 아니고 우리가 누구의 장기 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장기 알의 특징이 있어요. 특징이 뭐냐 하면은 늘 달라요. 왜냐하면 장기 알은 그 놓여있는 지점에 의해서 전체 판에 배치도가 다 그때그때 다 달라요. 다 달라요. 분명히 주일날 국수 한다 했잖아요. 더워서 냉면 한다. 왜? 국수 한다 했는데. 배치가 달라.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고. 이 말은 뭐냐? 자기 행동에 내가 책임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내 행동에 내가 책임질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면 적절해요.
자, 불은 여호와죠. 여호와가 불이라는 것은 여호와가 뭐다? 심판주가 된다. 좀 더 깊이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는가? 그 정답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아들 되신 예수님이 심판받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심판받는 아들이 하나님 형상이에요. 인간은 그 형상대로 만들어졌거든요.
심판받고 심판받아야 되는 피조물로 만들어진 이유가 하나님의 아들, 세상을 통일하실 에베소서 1장 10절 통일할 그 분이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일한 그 모습이 심판이고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일어난 일이 원형이에요. 다른 원천은 없어요. 그분만이 원형이고 원천이고 형상이라는 거에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성령이라는 파스를 붙인 사람 외에는 몰라요 이게. 제가 파스라고 한 이유는 우리가 성령을 소유한 게 아니고 갖다 들러붙어서 떼이지도 않아요. 떼이지도 않아요 파스는 너무 단단해서. 시중에서 파는 파스 말고 병원 파스. 정형외과 파스는 되게 독해요. 그것보다 좀 못한 게 한방파스. 약간 약해요. 써보니까.
우리는 우리를 극단까지 몰아넣을 능력이 없고 극단으로 몰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요령껏 살고 싶어요. 적당하게 균형 맞춰서. 너무 밀면 자빠지는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를 그 규칙을 내가 정해요. 갑자기 장기 알 됐다가 자기가 장기판 자기가 잡아당기는 것과 똑같아요. 네가 장기판으로 한번 맞아볼래? 네가 구조로 한번 맞아볼래? 네가 이것 잘못했다 저것 잘못했다가 문제가 아니라 구조를 왜 잊어버렸냐고. 구조적 차원에서 맞는 수가 있어요.
그걸 우리는 세 자로 이야기합니다. ‘망했다’. 나 망했다. 개인적으로 잘못해서 망한 게 아니고 네가 속해 있는 영역, 환경, 그 구조를 왜 놓쳐버리느냐 이 말이죠. 이거는 미래의 구조가 아니고 새로운 구조에요. 새로운 세계의 구조. 물 심판, 불 심판 이후에 모든 심판이 끝나고 난 뒤에 생성되는 그 구조의 인물인데 왜 구조를 놓쳐버리니까 주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를 줄 수밖에 없지요. 장기판으로 맞아보세요. 퍼래요. 눈탱이 밤탱이 퍼렇습니다. 너 차 맞았나? 포로 맞았나? 말로 맞았나? 하면 판으로 맞았다. 구조로 맞았다. 구조.
그러니까 회개한다는 말은 구조를 이해한다는 거에요. ‘다시는 안 할게요’ 가 아니고 내가 완전히 다른 체제인지를 모르고 ‘내가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았는데 내가 나쁜 짓해서 벌 받았구나’ 이런 체제 자체가 바로 우리가 지금 잘못, 이 자체에서 관계없는 사람이란 걸 잊어버린 거에요. ‘내가 그때 행동 똑바로 했으면 이런 사단이 없었을텐데’. 아닙니다. 행동과 관계없어요.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이죠.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식상하기 때문에 같은 예를 들지는 않겠습니다만 아싸! 호랑나비. 김흥국이 독실한 불교 신자거든요. 지옥 갔을 때 본인이 했으면 본인이 남긴 호랑나비 다 회수해서 가야하는데 자기는 죽었는데 호랑나비는 남아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본인이 호랑나비 부른 게 아니고 주께서 부르게 하신 거에요. 주께서 태어나게 해서 호랑나비 히트 치게 만들었어요.
지옥의 구조와 심판의 구조. 구조로 때리는데 구조로 때리는 장소가 그 공간이 바로 지옥이라는 겁니다. 구조적으로 맞아요 구조적으로. ‘네가 이렇게 불 뜨거운 세계에 올 줄 네가 왜 몰랐나’ 이 말입니다. ‘내가 분명히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떨어지게 했지. 알아 몰라?’ ‘창세기 19장 성경에서 본 적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믿었어?!’ ‘난 그때 뿐인 줄 알았지요.’ 그때 뿐인 줄 알았다는 거에요.
자기가 주체가 돼서 그래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소리 들었지?’ ‘네 들었습니다.’ ‘왜 그거 안 믿어?’ ‘예수님이 해당되는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이게 성령이 안 와버리면 그 구조에서 오는 파스가 오지 않으면 혼자 살아요. 사실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악마의 말을 들으면서 살지만.
자, 이제 더 나가봅시다. ‘탈의미’. 탈의미가 될려면 예수님을 심판주로 봐야 돼요. 심판주니까 재판관이죠. ‘재판관’. 재판은 이미 끝났어요. 재판은 알 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재판은 그걸로 끝났어요. 안 버린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아담 안에 있는 자는 다 예수님을 싫다고 내치게 되어있어요. 그건 죄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 재판 끝났습니다. 살려주세요.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재판을 했으면 이 세상 재판 있지만 집달리라고 하는 게 있지요. 집달리. 집을 차압했을 때 압류했을 때 빨간 딱지 이런걸 TV나 고가의 물건에 갖다 붙이잖아요. 그거 하는 법원 행정 직원이 집달리잖아요. 집달리. 이 사람들이 뭘 하느냐 하면은 죄인들 가운데서 이마에다가 딱지를 붙여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여버려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가장 큰 저주는 뭡니까? 딱지가 안 붙어있는 게 저주에요.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어차피 끝난 인생’ 어차피 끝난 인생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그 자체로 지옥가야 되지만 할 수 없지.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마에다가 주의 이름이 붙어있어요. 요한계시록은 이마에 붙어있지요. 그 사도 바울에서는 마음속에 성령이 찾아온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걸 성령의 인 받았다. 장소를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같은 구약적 표현을 썼기 때문에 이마에 탁해요. 이마.
그런데 왜 이마에 하느냐? 악마가 이미 선점해서 악마가 자기 사람 이름에다가 마귀 이름을 숫자를 전부 이마에다가 박아놨어요. 666. 숫자를. 찜한 거에요. 내 사람이라고. 찜한 거에요. 마태복음 24장인가 보면 24장 24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누구를 미혹하게 한다? “택하신 자들”, 택한 자들도 했다는 말은 이미 다른 사람들 다 수중에 넘어갔다는 뜻이에요. 다 넘어간 거에요.
베드로전서 5장에 8절에 봐도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그 다음에 뭡니까?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은 삼킬 자를 찾아서 삼키는 일을 하는 거에요. 이게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는 거에요. 그러나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고 배후에 있는 악마가 지금 이렇게 보이는 세계를 만들었고 나타나는 세계를 만든 거에요.
보이는 세계, 나타나는 세계 그 배후에 주님도 계시고 악마도 있는 거에요. 여자의 후손도 계시고 뱀의 자손도 있는 거에요. 주께서 말씀을 해줘야 알지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는 자기 일상 생활하는 거 외에는 없잖아요. 그것만 생각하지 뭐 다른 거 생각합니까? 오늘 날씨 덥지요? 그것만 생각하잖아요. 에어컨 좀 높이면 안 됩니까? 이런 것만 생각한다고요. 카메라 이거 불타는 카메라에요. 항상 불과 관련시키세요. 어떤 사람이 옷 잘 입는다 할 때 불 잘 타는 옷 입고 잘 가고 있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벤츠 타고 가거든 불타는 벤츠타고 불타는 밤을 즐기기 위해서 불타는 데로 가는 거에요. 나이트 가서 불타라.
이게 얼마나 극단적입니까. 극단적 사고방식이에요. 북한에도 이런 극단적 사고방식 없겠다. 얼마나 극단적이에요. 주님께서 성도에게 부탁하는 것은 모든 극단적인 건 다 끌어모아라. 모든 극단적인 것은. 왜? 너도 망하지만 남들도 같이 망하니까 위로 삼아라. 다 망하니까. 별로 섭섭지 않지요? 다 망하니까.
성령으로 인을 박아버리면 그 사람은 주의 것이 그 사람에게 도달했습니다. 고객님 하면서 오지요. 여기는 택배. 고객님 택배 문 앞에 놔뒀습니다. 고객님. 번쩍번쩍 이모티콘 막 날리지요. 우리가 주님의 이 땅에 보내는 택배 물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인 줄 알고 불덩이에 들어오는 거에요. 다니엘 세 친구처럼. 불 속인 줄 알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지요. 우리가 생각도 못한 일을 합니다. 그게 뭐냐? 원수를 사랑해요. 원수를. 다들 사랑해봤지요? 원수를 사랑합니다. 그래 많이 저주 짓 많이 해라. 너 끝났어. 너 끝났어. 원수를 사랑하라. 그걸 아주 실제적으로 표현하면 원수에게 친절을 베푸세요. 친절의 친절을. 심지어 어떻게? 원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고 그러면 원수 머리 위에 숯불을 피워올라가지고 원수가 미안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요.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이왕 나온 상견례 마음껏 사돈 내외를 칭찬해주세요. 어차피 저주받을 거. “딸내미를 어떻게 이렇게 잘 키워놨습니까. 세상에 머리 좋지 인물 좋지 착실하지.” 그러면 사돈이 미안해서 “아이고 우리 딸 그렇게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은 우리 딸이 교회를 안다니는데.” “아이고 교회 다니면 뭐합니까. 나는 교회 안다녀도 우리 며느리로써 최고입니다.” “아니 장로님께서 어떻게 그런 말을.” “아이고 장로고 뭐고 진짜 최고입니다.” “혹시 없는 소리하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어차피 맛이 갔는데 뭐. 극단적으로 맛이 가버렸는데 뭐. 당신 며느리도 같이 불 탈건데 뭐.
여기서 사람들은 이제 묻고 싶지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준비된 정답이 있습니다. 준비된 정답.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나머지는 누가 책임진다? 나머지는 내가 책임질게. 네가 몸이 아파? 몸이 아픈 것도 뭐다? 그 나라와 의를 위한 적절한 장기 알의 배치입니다. 네가 시험에 또 떨어졌어? 그것도 그 나라와 의를 위함이다.
구하라고 되어있지요. 이건 십자가 전에 산상설교에서 한 거죠. 그러면 십자가 이후는 뭡니까? 주께서 이 말씀을 우리 속에다가 성령 속에다가 그걸 박아서 우리 속에다가 파스로 발라버리죠. 너는 이제 그 나라 의 외에는 다른 의미가 너한테 없어. 그 나라 의를 위하여 예수님 이 땅에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갔다 어떻게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기존에 있는 이 세상의 의미는 탈의미가 되요. 다 그 의미가 불이라는 심판과 더불어서 그 현장에서 전부 다 탈락하는 겁니다. 탈락돼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좋은 일이 있으면 갑자기 뭐 목돈이 생긴다든지 갑자기 돈이 20억 생긴다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아이고 20억 생기면 뭐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게 그 나라와 의라면 제가 마지못해 20억 받겠습니다. 그 나라 의라면.’ 그런데 반대로 20억이 날라갔어. ‘아이고 어떻게 살지. 아니지 그 나라 의를 위해서 필요한 조치라면 그것마저 제가 감사하겠습니다. 고마워하겠습니다. 죄인 주제에 그동안 밥 먹고 살아온 것만 해도 어딘데요.’
그래서 다 같은 인간이지만 주의 날의 의미가 우리한테 덮치는 거에요. 이걸 어떻게 총괄적으로 정리하느냐. 총괄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거에요. 자, 사람의 날과 주의 날이 대립되어있습니다. 사람의 날은 체계가 선악체계입니다. 선악체계. 선악체계는 사람의 날이에요. 그런데 인자의 날은 무슨 날이냐 하면은 선악체계의 반대말은 뭡니까? 나무 두 가지 있잖아요. 안 다친 나무 뭡니까? 생명체계입니다. 생명체계. 우리가 어느 장소에 어떻게 사는지 간에 하나의 생명과 연관된 생명에서 창조한 인물로서 그 현장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오늘 본문으로. 누가복음 17장 26절 “노아의 때” 라고 되어있지요. 노아의 때라는 것은 인자의 날. 노아의 날. 자, 노아의 날이 무슨 뜻이죠? 노아에게 언약이 주어졌는데 그 언약이 빈말이었다 농담이었다 장난이었다 아니지요. 뭡니까? 노아의 날이 발생된 거에요. 노아와 맺은 언약이 말씀대로 성공하고 성취된 날.
그러면 노아는 노아의 날 때 노아가 그전에 홍수 이전에 노아는 누구와 동행했습니까? 여호와와 동행했지요. 그걸 창세기 6장에서 그걸 의인이라고 합니다. 동행했다는 것 때문에 의인이에요.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의인된 것은 아 참 말 극단적인데 말 알아들으시고 의인된 것은 여러분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가만두지 않아서 그래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성도와 성도가 만날 때 왜 상대방을 존중 안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주님이 그 사람을 때렸기 때문에 그래요. 뭘로? 장기판으로. 장기판으로 때렸기 때문에 그게 최고의 성도입니다. 주님한테 얻어맞고 사는 사람 최고의 성도입니다. 주님이 손댄 사람이에요. 어디 감히 인간이 평합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맞을 때 나도 주께서 때려주는걸 영광인줄 알아야 되지요.
그래서 대구강의하면서 “자녀들아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할 때 그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뭐겠어요? ‘자식들아 내가 하나님한테 많이 맞았다.’ 많이 맞았다. 내가 너희에게 남겨줄 것은 내가 많이 맞았다는 이야기. 주님 살아계시다 이 말이에요. 맞았다는 말은 기존의 내가 의미가 있는 의미를 탈의미, 그 의미가 선악체계에서는 의미 있었지만 생명체계에서는 그런걸 아예 묻지도 않는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그래도 믿음이 있어요. 나는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그러다가 맞은 거에요. 나쁜 짓 해서 맞은 게 아니고 현재 본인이 속해있는 누구의 소속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주께 맞는 거에요. 내가 그런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 했어? 안했어?! 손 내. 맴매. 내가 너 잘잘못에 네가 초조해하라 했어 하지 말라 했어. 내가 다 이루었다 했어 안했어?! 근데 네 인생을 왜 네가 걱정하는데?!! 맞아. 2000만원 돈으로 맞아. 너 돈쭐 맞아야 돼. 추가 2000만원 더 때려. 보너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4000만원 준다. 주의해! 네 알겠습니다. 이런 거에요. 이게 완전 미친 거죠. 극단을 넘어서는 거에요. 극단을. 예를 들어도 극단을 넘어선 예를 들어요.
그 다음에 28절 봅시다. 노아 때 여러분들 이해하셨습니까? 노아는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함께 있기에 홍수 이후의 존재가 되는 거에요. 홍수 이후의 존재가 노아 홍수 이전의 존재에서 사람들에게 홍수 이야기를 선포한 거에요.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같이. 사람들 몇 명 설득 당했습니까? 단 한명도 설득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존 체계의 극단 넘어가기를 거부합니다. 망했지 뭐. 할 수 없지. 원래부터 인간은 망하게 되어있는데.
그 다음에 롯 봅시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여기는 운율을 맞춰야 돼요. 그게 재미있어요. 시작!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 짓고 얼쑤~~” 이렇게 돼요. 이게 뭐냐 하면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날씨 덥다. 얘야 문 좀 열어줘. 서로 다 납득되는 이야기들. 다 납득되는. 여름인데 옷을 한번 바꿔 입을까? 다 납득되는 이야기. 아줌마 이거 콩나물 얼마에요? 이러면 못 알아듣습니까? 보기는 보아도 못 깨달아요? 2천원입니다. 대번 이야기하지요. 다 알아듣는 이야기. 다 그렇게 순환되는 이야기.
의미가 탈의미가 아니고 있는 의미가 소통이 원활하게 잘 통하는 그 세계. 그게 뭐냐?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주택 집 짓고 농막 짓고 전원주택 짓고 여행가고 밥 먹고 사우나 하고 느그 서장하고 같이 다 했지요. 마 이 정도야. 허세 떨고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마약하고 그때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자, 질문 하나 들어갑니다. 롯이 유황불 오는 걸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어요. 왜 몰랐는가? 아직 유황불이 안 왔거든. 나갈 때 유황불이 안 왔어요. 그러니까 이걸 롯의 믿음이라고 하는데 롯의 믿음이 아니고 주님의 믿음이에요. 우리는 일체 믿음 없습니다. 동행하시는 분의 믿음이 우리 믿음을 대체하고 대신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장기 알이라니까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이 세상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소급해서 지금껏 내가 태어나서 어느 초등학교 어느 중학교 전부 다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뺑뺑이 부딪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손길이었어요. 옛날에 은행에서 이렇게 돌려가지고 당첨하듯이 중학교 학군 배분을 그렇게 했거든요. 그때 간절히 기도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간절히. 가까운데 되라고. 그거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주님 마음대로입니다. 마치 우리의 운명이 내 마음 선에서 떠난 것처럼.
지금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주의 날을 살고 있습니다. 박탈당한 탈의미된 운명. 그게 나의 운명이라는 말이 탈락 되서 주님의 운명으로 바뀌어버린 그런 탈의미된 상태에서 주와 살고 있습니다. 불과 유황불 오는 것 그거는 우린 놀랄 일이 아니지요. 왜? 말씀이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말씀을 믿어버리면 다른 것은 실제로 되고 안 되고 기다려보자는 게 성립이 안돼요. 기다려보자는 것은 말씀을 못 믿는다는 뜻이니까.
지금 성경말씀 기다리자 하지 말고 지금 내가 하루하루 감사하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께서 파스 붙여가지고 주님의 가신 길 있잖아요. 죽고 부활하신 그 길로 주님이 어떤 길로 가서 어느 골목으로 가서 어디로 빠졌느냐 그 좁은 길로 이끄신다는 것이 새록새록 날마다 느껴지고 동시에 내버려둔 자들이 불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뻔해도 너무 뻔하게 보이는 것.
나타난 것 보이는 것 그 배후에 안목 가지고 이 나타나고 보이는 것을 이렇게 볼 수 있는 것 이거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고 내가 해명할 수가 없는 찾아오신 거저 주시는 생명, 영생의 효과입니다. 움직이는 영생 덩어리에요 구원 덩어리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을 주님의 공로를 증거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아쉬워서 내뱉는 말이 다 부질없는 의미 없는 말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아쉽다 하지 말고 뭐를 주셨는가를 찾아가면서 감사의 감사를 더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