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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강남-누가복음 17장 29절 (극단맨) 2300620a-이근호 목사자유게시판누가복음

강남-누가복음 17장 29절 (극단맨) 2300620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7장 24절이요.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인자의 자기 날, 22절에서 제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전혀 다른 체계를 생각해야 돼요. 전혀 다른 체계. 인자의 날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인자의 날에 나타날 그 구성 요소가 지금의 구성 요소하고 완전하게 다르다는 뜻입니다.

인자의 날과 뭘 대비하느냐 하면은 사람의 날이죠. 사람의 날.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상 이상적인 체계와 인자의 날은 달라도 너무 달라요. 사람들은 이 누가복음 17장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상 사람의 날을 살다가 나중에 인자의 날이 오게 되면 인자를 맞이하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지 못한다고 하는 말은 달라도 너무 달라서 현재 사람의 날에 익숙한 그러한 입장에서라면 그 인자의 날에서 배제된다는 거죠. 인자의 날에 갈수가 없다. 그래서 인자의 날은 사람의 날하고 완전히 다른 요소, 다른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완전히 다른 요소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일상 속에 있으면서 완전히 다른 요소라면 인자의 날을 그럼 어떤 식으로 우리가 파악을 해야 되는가?

주의 날이 인자의 날 또는 다른 말로하면 주님의 날이 인간의 날에게 소급적으로 적용된다. 소급적으로 적용된다. 이런 말들이 강의에 나오니까 조금 이게 어렵지요. 사람의 날 살다가 인자 오시면 그냥 슥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소급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 뭐냐?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미완료 속에 완료가 이렇게 미리 앞당겨 와서 주입되는 겁니다. 주입되는 거에요.

완료된 것이 미완료에 주입되어버리면 이 세상 인간의 세상은 이건 미완료로 드러납니다. 살아도 소용없다 이 말입니다. 이 땅에서 산 것은 인자의 날에 짤린다는 그런 뜻이에요. 인자의 날에 완전히 이 세상은 거부당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24절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7장 24절에 나옵니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번개 특징은 사람들이 예상 못한다는 거죠. 우발적이고 우연적입니다. 번개가 없다가 아니라 있는데 예측 못한다 에요. 번개가 아예 없는 게 아니에요. 일상 속에 주의 날의 징후가 없는 게 아니에요. 있는데 번개 같아요. 뭔가 쓱 왔다가 쓱 가버렸어요. 쓱 왔다가 가버렸는데 뭐가 왔다 갔지? 왔다 갔는데 별일 없네. 우린 그냥 살던 대로 그냥 살자 하고 그냥 안일하게 가지요.

그런데 그 날이 되게 되면 인자의 날과 사람의 날이 인자의 날 오게 되면 현재 사람의 날 이거는 완전히 인자의 날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됩니다. 그 파괴되는 것이 어떤 식으로 파괴되는가? 29절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9장 29절 그 날은 어떤 날이냐? 하늘로서 불과 유황불이 비 오듯이 하여 나타나는 날.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한번 물어볼게요. 소돔과 고모라에 불과 유황불 내려왔잖아요. 누구한테 떨어졌지요? 그 불과 유황불이 누구한테 떨어졌습니까?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떨어진 장소가 저 사막에 떨어졌습니까? 저 깊은 산중에 아무도 없는 곳에 떨어졌어요? 누구한테 떨어졌어요? 불과 유황불이 나름대로 노림수가 있었지요. 누구한테 떨어졌습니까? 사람 살던 곳에 떨어졌지요. 사람 살던 곳.

그러니까 인자의 날은 그냥 나무나 산이나 바위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인자는 누구하고 상대한다? 사람을 상대해서 겨냥해서 쳐들어온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뭘 가지고? 불과 유황불을 가지고 쳐들어오는 거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사람이 있다는 말은 인자로부터 공격 대상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럼 그날 되면 그날 오겠지 라고 하는데 아니죠. 소급적으로 적용해요. 소급적으로. 그러니까 완전히 체제가 우리가 사는 발상, 일상을 살던 발상하고 완전히 다른 발상이 돼야 돼요.

예를 들면 두 딸이 독일 가는데 두 딸이 독일을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있으면서 나오는 발상이죠. 두 딸이 간다. 독일이 여기 오면 되지 않습니까? 이거는 완전히 발상이 완전히 다르지요. 독일이 여기로 오면 되잖아요. 그리면 우리는 그럴 수는 없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가 인자의 날이 오는 겁니다. 그런 일은 없다. 그럴 일은 없다.

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우리가 납득되고 예측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가? 너무 일상의 사람의 날에 길들여졌어요. 그런데 사람의 날에 길들여졌을 때 그 사람이 뭐냐? 별 다칠 일이 없을 거라고 여기는 사람들. 크게 문제없을 거라고 여기는 사람들. 불과 유황불로 떨어지는 것은 주께서 하늘에서 사람을 겨냥해서 이 사람의 일상을 겨냥해서 사람 세계를 겨냥해서 떨어지는 이유는 너희들이 평소에 인자의 날을 생각 안하고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인자의 날을.

지금 내가 사는 것하고 완전히 사고방식 체계가 전혀 공통점이 없는 달라고 너무 다른 그 세계를 너희가 상상하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하는 게 문제라는 거죠. 어떻게 바뀝니까?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는데 질문을 두 개를 해볼게요. 1. 인자의 날에 어떻게 바뀝니까? 라고 묻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바뀝니까? 질문은 던지지만 은근히 답을 얻고자 하지만 속셈은 이겁니다. 2. 꼭 바뀌어야만 돼? 그냥 살던 대로 살면 안돼? 꼭 바뀌어야 돼?

예를 들어서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온다 하면 사람들은 선뜻 나오는 질문이 “언제 옵니까?” 이거지만 속셈은 ‘꼭 와야 돼? 안 오면 안돼?’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그것이 그 정답은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17장 25절 “번개가 떨어지듯이 인자의 날이 오는데” 인간이 기다리든 말든 그냥 와요. 완전히 체계가 달라요. 상상도 못한 체계입니다 이거는. 인간은 상상도 못한 체계,

그 구성 요소를 가지고 그 체계가 이 땅에 등장합니다. 덮칩니다. 덮치는 방법은 불과 유황불로 덮쳐요. 상당히 극단적이죠. 그런데 극단적이라는 말조차도 전혀 다른 체계를 충분하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극단적이다 그 이상입니다. 달라도 그 세계가 너무 다릅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이런 거에요. 전혀 다른 세계에 인자의 날에 이미 포함이 된 그러한 존재가 여러분들이라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고 저주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들은 맛이 갔기 때문에. 그들과 견주거나 경쟁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에. 친절의 친절을 다 베풀어줍니다. 친절의 친절을. 직장에서 친절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날에 속했기 때문에. 사람의 날에. 우리가 저주하지 않더라도 지금 열심히 저주받고 있는 상태이게 때문에. 친절의 친절을 다 해주는거에요. 가라 독일로 뭐 이렇게. 아주 친절하게 독일로 보내주세요. 독일을 가든지 오든지. 그들이 예상하고 있는 체계 안이잖아요. 그들이 움직이는 것은 예상 안의 체제. 장충 체육관 안에서 이동하는 거에요.

그걸 가지고 여러분들이 잘 아는 용어 쓰겠습니다. 여행이라고 합니다. ‘여행’. 여행을 하는 이유는 내가 어떤 상황에도 내가 변하지 않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행가요 인간은. 여행하는 이유는 바깥 환경이 바뀐다할지라도 나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처럼 철옹성이고 변함이 없음을 내가 이렇게 굳건하게 살아감을 낯선 사람, 낯선 나라, 낯선 환경 속에서도 그걸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배낭 메고 해외여행갑니다. 자신감 있다 이 말이죠.

탄자니아 거기 가도 나는 내 자신의 동질성을 나는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에요. 내가 사는 환경에서 맞춤 내가 아니라 나는 글로벌한 세계적으로 어딜 가도 나는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존재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행갑니다. 그러니까 아휴 참 돈만 날리고 건강 날리는 거죠.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그렇다면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그런 사람에게 “나는 어딜 가도 변하지 않아. 나는 확정되어있어.” 하면 그 확정된 정체성은 동일성 당신은 언제 구성했어? 언제 만들었어? 지금! 이렇게 하거든요. 지금 나는 여행가기 전에 나는 어디 가도 나는 나다움을 나의 개성을 잃어버리지 않을 거다. 주일날 설교 했잖아요. 인간의 행복은 개성을 살리는 게 행복이라고요.

돈 없고 몸이 아파도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이 ‘나는 나다’ 할 때, 나의 개성을 유지할 때는 행복하고 아무리 돈 많고 아무리 잘 살아도 개성 잃어버리면 사람은 악!!!!! 하고 고함지릅니다. 절규. ‘절규’ 그 그림처럼 미쳐버려요. 영화배우로 여배우로 인기 있다가 재벌 집에 시집 가보세요. 못 견딥니다. 재벌 집에 잘난 체하는 전통 가문에 1년에 제사 10번 지내고 이러면 미쳐버려요. 차라리 내가 너하고 이혼하고 다시 영화배우 할래. 뛰쳐나왔어요. 꼭 누구라고 고현정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이 개성 잃어버리면 다 잃는 거에요. 그래서 20대 30대가 개성 하나 믿고 살아가는 거에요. 여행 다니면서. 말 안 듣지요. 부모 말 안 듣지요. “얘~~밥은 먹고 사나?” “엄마 밥 먹고 사는게 중요해? 나다움을 잃어버리는 게 나에게는 불행이야” 이러고 달려드는데 뭐. 엄마 때하고 달라 이러거든요. 그러면 묻고 싶어요. ‘그 개성은 언제쯤 구성했어? 완료했어요?’ 물으면 ‘지금!’ 이러거든요.

아까 장로님 노트에 있던 campus mate 노트 있지요. 그걸 왜 물어봤냐면 어릴 때 노트에 한국말로 써 있는 노트. 옛날에 초등학교 없고 국민학교 있었거든요. 국민학교 때 그 노트를 하면서 희망사항이 뭐냐 하면은 삼촌 고모들이 영어로 써있는 노트를 쓰고 있는 것이 그게 희망사항이었어요. 왜? 꼭 대학생 된 기분이거든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 반에서 선생님만 바뀌는 그러한 환경에서 대학교는 자기가 캠퍼스 찾아가서 강의실을 찾아간다는 그게 얼마나 낭만적인지요. 캠퍼스 낭만인가. 그게 그렇게 낭만적이고 그게 부럽고 노트도 영어로 된 노트. 누구나 아는 한글 말고 배워야 아는 영어. 그거 끼고 그것도 가방에 넣지 않아. 옆에 끼고 흘러도 끼고 가야돼. 버스 타면서도 막 흘려. 우리한테는 그게 희망이었습니다. 대단했지요.

인간은 얼마나 일방적 해석을 하고 있는지. 나의 개성, 나의 나답다가 얼마나 이거는 편향적인지요. 그래도 대학 졸업하고 백수 되고. 오라고 해도 회사 안 간다하고 나의 개성을 살려주는 직장 간다고. 그런 직장이 어디 있어요. ‘나는 돈에 얽매이는 그런 사람 아니야’ 그거는 집안이 좀 살 때 하는 짓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여기 25절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그다음에 인자의 날이 와요. 자, 그러면 인자의 날과 사람의 날 사이가 왜 벽이 되었으며 왜 그게 끊어져 있는지를 또 의도적으로 끊게 하신 이유가 어디 쪽에 있느냐 하면은 주님 쪽에 그 이유가 있는 겁니다.

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것만 알면 돼요. 사람의 날과 인자의 날이 왜 이어지지 않고 끊어졌느냐? 왜 인자의 날이 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느냐? 왜 번개같이 오느냐? 예상도 못하느냐? 어떻게 해서 그런가? 그 사이에 뭐가 끼어있기에 인자의 날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뭐냐? 사람들은 인자의 날이라고 하면 이천 몇 년도에 옵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서기 이천 몇 년도 몇 월 달에 옵니까? 1998년 10월 18일에 온다고 하다가 사단난 거. 본인은 안 믿었죠. 왜냐하면 적금을 넣었으니까. 재림 이후 것까지 미리 넣었어요. 한복입고 그때 한복장사 대박 났어요. 한복입고 마지막 날이라고.

인간의 날에서 시간 계산해서 인자의 날까지 관통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시간계산 징후계산 전부 다 차단시키는 것, 도대체 그 차단의 위력이 어느 정도기에 그걸 모르느냐? 그 이유는 인자가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으심이 칸막이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칸막이로 되어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런 뜻이에요. 사람의 날 속에 있는 그 어떤 인간도 주님이 용서할 생각이 없다. 용서할 생각이 없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죄와 용서를 고대하는데 인간이 생각하는 용서와 사죄마저도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해요. 누구 좋으라고 용서해요. 인간은 뭐를 모르느냐 하면은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기도와 간구와 갈구도 본인이 안고 있는 죄를 취소할만한 선행이 되지를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인간의 날, 이 세상 우주지요. 이 우주를 불바다로 아주 갈아먹어야 그래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 값과 이게 같이 상쇄가 돼요. 너 같은 거 갈아먹어도 속이 시원치 않다 이런 거 있지요. 하나님께서 불과 유황불을 내리는 이유는 인간들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인간들이 적극적으로 죄만 계속 생산해오고 있었던 거에요.

그 죄를 생산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신이시여 용서해달라는 거에요. 불쌍히 여겨달라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했잖아요. 완전히 체제가 다르다고. 인자의 체제는요 인간의 체제와 완전히 달라요. 인간이 이 세상이 문제되는 것은 그게 인간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있을 때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계속 죄를 만들어내요. 끊임없이 만들어낸다고요.

25절에서 먼저 고난을 받으면서 이 세대에서 예수님이 먼저 버린바 된다는 이 말은 이 세대가 세상의 날 또는 사람의 날이 인자를 버린 거죠. 그래서 인자의 날과 세상의 날은 완전히 벽이 쳐져있지요. 그런데 주께서 말씀으로 인자의 날에 온다고 했어요. 소급적으로. 소급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주께서 십자가 죽기 전에 먼저 말씀을 던진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입장에서 인자의 날 입장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인자 입장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인자하고 인간하고 완전히 대치되어있다는 것은 아시지요. 로마서 5장에서 한쪽은 아담 출신이고 한쪽은 마지막 아담이기 때문에. 기존의 아담 출신들은 마지막 아담을 내치게 되어있어요. 모든 인간은 아담에 소속되어 있고 예수님만 아담에서 벗어났거든요. 아담의 죄가 아니고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그래서 인자의 날. 진정한 사람이다 이 말이죠. 오늘 동영상 두 번째 그거 들어보시면 알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행적의 행함은 인간이 이해됨과 전혀 상관없이 움직여버립니다. 전혀 상관없이 미리 이야기한 거에요. 21절에 보면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분명히 있다고 해놓고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분명히 있는데 보지 못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이제부터 그 뜻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여기 문장을 몇 개 쓰고 제가 질문을 한번 던져보겠습니다. 1. “얘야 문 좀 열어줘.” 엄마가 짐 들고 들어갈라고 하는데 손이 모자라서 문 좀 열어달라고 했어요. 2. “오늘 날씨 덥지요?” 3. “늦기 전에 빨리 가자.” 네 번째 “김치 볶음밥에 스팸 넣어줄까? 오뎅 넣어줄까?” 자, 질문합니다. 이 네 가지 문장 중에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게 있습니까? 다 이해되지요.

그러면 이 문장을 해결해 볼게요. 성경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너무 안일하게 봐요. 히브리서 11장 3절, 제가 지어낸 게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겁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볶음밥에 스팸 넣을까? 이거하고 전혀 다르지요. 성경에서 뭐냐? 보이는 것은 뭐고 나타나는 것은 뭐냐 이 말이죠? 이게 보이는 것과 나타나는 것을 구분했잖아요. 같이 안 봤다 이 말이죠.

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왜 합니까? 보이는 것이나 나타나는 것이나 동일하게 생각할 때 그게 아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이걸 풀이하면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것에 의해서 나타났고 보인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럼 사람들은 그럼 보이지 않는 것은 뭡니까? 보이지 않는 것은 뭡니까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에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막혀 있으니까. 그러면 믿으란 말인지 믿지 말라는 뜻입니까? 왜 네가 예수를 믿고자 하느냐 이 말이죠. 그게 죄다 이 말이죠. 네가 알아서 안다고 해서 네가 불과 유황불에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목사님은 너무 극단적이라고 하는데 극단적이라는 말도 모자라요.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극단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 끝까지 절벽 끝까지 가는걸 극단이잖아요. 끝까지 가봤자 십자가에 막혔는데 그 극단조차도 말이 안돼요. 오늘 제목을 극단맨으로 할까. 그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보고 어쩌라고” 바로 그 말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해서 주의 날을 소급적으로 본다. 이미 나중에 그게 과거 지나면 현재되고 현재 지나면 뭡니까. 미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시간에서는 미래에서 과거를 미리 본다 할 수 있잖아요. 그 미래는요 과거 현재와 연결된 미래이기 때문에 그것도 틀린 말이에요. 인자의 날은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자의 나타남 자체가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를 적용할 수 없는 식으로 오는 거에요.

우리는 그러면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이렇게 하지요. 우리가 그렇게 극단에 대해서 반발하지요. 다 아는 이야기만 주저리 주저리 다 아는 이야기만 주고받는 거에요. 미리 이야기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주의 날에서 이 사람의 날을 보는 안목이 있으면 돼요. 주의 날에서. 그럼 주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제가 말씀드렸듯이 인간의 날과 주의 날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예수님의 고난으로 막혔다 했지요. 벽이 있어서 통과를 못하잖아요.

그러면 주의 날의 안목, 그 관점에서 본다면 그 사람은 지금 어디 가있는 거에요? 뚫지 못하는 벽을 뚫어버리죠. 그런데 인간은 이 벽을 뚫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의 집단이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에. 딴 사람은 버려도 저는 안 버렸습니다란 말하면 안돼요. 베드로가 지금 자기도 모르는데 그런 이야기했어요. “다 버릴지라도 저는 버리지 않습니다” “아니야 다 버려야 돼” 그래야 내가 주님의 일이 성공이 돼요. 베드로마저 버려야 돼요. 가룟 유다도 물론 버리고. 다 버려야 돼요.

그러면 다 버리는 상태에서는 내가 벽을 통과해서 주의 날에 또는 천국에, 예수 안에 또는 성령 안에 내가 있어가지고 내가 봐야지 라는 그러한 계산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치 나는 빼주세요 라는 것 밖에 안 되니까 그런 건 없어요. 그러면 뭐냐?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져야 되지요. 재료는 죄인입니다. 죄인을 가지고 주께서 의인을 만들어줄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를 새로운 피조물로 주께서 만들어버리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나는 인간의 세계에서 죽었고 주의 날에 새로 살았다는 안목을 갖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에요.

나를 어디서 출발합니까? 새롭다 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고 어디서 출발해요? 나는 죄인으로부터 출발하지요. 죄인으로부터. 내가 파악하지 않는 죄인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죄는 인간세계에서 파악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주님의 안목하고 전혀 상관없습니다. 지가 스스로 훌륭하게 잘되고자 하나의 계속 변증법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일보후퇴가 이보전진 이런 의식에서 나온 거에요. 반성하면 뭔가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그런 사고방식은 인간세계에요. 인간세계에서 나온 겁니다.

사도 바울 표현대로 ‘성령 안’, 같은 말이 ‘십자가 안’ 또 같은 말이 ‘예수 안’ 또 같은 말이 ‘언약 안’. ‘다 이루었다 안’. 똑같은 거에요. 그 안에서 “예수 안에서 너희는 의인이 되었나니” 이 말이거든요. 한번 적어볼게요. 너희가 의인된 것은 예수 안에서 라는 구성요소 안에서 뭐냐 하면은 의인이 되는 거에요.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의인 되니까 이 의인은 어디의 통제를 받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안목과 예수님의 생각에 통제를 받고 지배를 받는 그러한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겁니다. 전에 내가 세상에 살았던 그 안목은 여기 완전히 죄 된 것으로 드러나지요. 주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여 죄가 많습니다. 죄를 용서하소서. 이건 다 뭐가 돼요? 아직까지 살아볼라고 주님 덕분에 죄 용서받고 천당 갈라는 그 얄팍한 심보를 가진 그런 사고방식은 예수 안에서 용납됩니까? 용납 안 됩니까? 어디서 수작질이야. 어디서 요령 부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내 일은 내가 결정한다. 내 의지로 결정 한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어린애들이 철딱서니 없을 때 철없는 어린애 특징이 뭐냐 하면은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전혀 이해 못한다는 거에요. 자아가 생성하고 어른 되고자 시도할 때 계속 자기 아픈 것만 생각하고 자기 불편한 것만 생각했지 자기 돌보는 어른들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은 몰라요.

지난 주일 오후에 손녀가, 날씨가 좀 더웠거든요. 그래서 제 아내가 오늘 날씨 덥기 때문에 국수 안하고 냉면 한다 하니까 손녀가 하는 말이 할머니 싫어! 분명히 약속했잖아. 주일날 오후에 국수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딸내미 가정 위해서 된장찌개하고 냉면하고 국수하고 세 가지를 했어요. 왜 더울 때 국수 못하느냐 하면은 열기가 확 올라오거든요. 그런데 손녀는 약속대로 하라는 거에요. 약속대로. 어른 약속을 지켜야 된다는 의식이죠. 물론 그것까지 따지지는 않지만. 제 아내가 내가 많이 참는다.

어린애의 특징은 타인의 고통을 몰라요. 젊은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자기 아픈 것만 생각하고 주의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희생하고 고통하는 것을 전혀 몰라요. 이 말은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몰라요. 내가 내다버린 자의 고통을 몰라요. 그거 아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 고통의 값은 불과 유황불로 온 천지를 불바다 만듭니다. 인자의 날은 우주 철거하는 날이에요. 우주를 철거해버려요. 죄 생산 공장을 철거해요. 불과 유황불로.

그런데 거기서 용서해달라? 네가 너를 알아? 네가 너를 뭔지나 알고 용서해달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네가 너 자신 지키고자 하는 얄팍한 수작이잖아. 그거 수작이거든요. 극단까지 가보지를 않은 거에요 사람들은. 극단을 피해가버려요. 극단 가다가 stop 해버려요. 멈춰버려요. 아 이러다가 내가 망할 수 있겠다. 아니 인간은 태어난 그 자체가 이미 저주에요. 그 자체가. 욥 이야기 있잖아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고요.

여러분 알파고라는 말 들어봤습니까? AI 인공지능이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둑 프로그램인데 지금은 알파고가 많이 진화했어요. 재미있는 건 뭐냐 하면은 프로 기사가 둘이 앉아서 바둑을 두잖아요. 바둑을 두는데 여기 많은 해설자와 많은 사람들이 지금 어느 정도 유리한지 두 사람은 정확히 몰라요. 그런데 누구한테 물어보느냐 하면은 이 인공지능한테 물어본다고요. 사람은 자꾸 타인의 말을 듣고자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에 대해서 인간은 의존적이고 기댑니다. 인공지능아 지금 누가 몇 퍼센트 이기는데? 이런 식으로. 전지전능한 인공지능아. 그게 전지전능하거든요. 현재 누가 유리한데? 해설가가. 인공지능에 의하면 이렇게 둬야 유리합니다 이렇게 말한다고요 인공지능이. 이 말은 인간은 평소에 어릴 때부터 계속 커가면서 계속 누구의 말을 수집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말을 정제하고 듣지 않는 사람들이 간혹 있어요. 그걸 가지고 네 자로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정신병자의 특징은요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소통이 되는 말인지를 전혀 감을 못 잡아요 그냥. 그야말로 대구 경상북도 의성 말대로 주끼는 대로 해요. 욕 아닙니다. 사투리입니다.
주끼는 대로, 욕으로 막 들리는데

정신병자는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해요. 어떤 말도 듣지 않아요. 그런데 정신병자 빼놓고는 전부 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의 반응에 대해서 몸 사리고 바들바들 떨면서 늘 불안 불안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뜻은 너희들이 죄 용서해달라 긍휼히 여겨달라 그 소리할 때 배후에 너보고 그런 소리하라고 하는 그 괴물 나오라해. 그 괴물 나오라해. 이미 이 괴물이 이 세상을 장악했습니다. 지배했습니다.

그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하고 엘리야하고 모세한테 제안을 했지요. 제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이렇게 했지요. 모시겠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어떤 생각이냐 하면은 이 세상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 세상에 불과 유황불로 완전히 철거된다는 사실을 전혀 감 잡지 못합니다. 왜? 이 세상 자체가 철거되면 극단적이라도 너무 극단적. 어느 정도 극단적이냐 하면은 내가 애 키우고 애 열심히 공부하고 뭐 직장생활 하는 이 자체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앙생활하는 자체가 아무 의미가 자체가 없어요. 너무 극단적이라서. 자체가 붕괴한다는데 그 안에서 뭘 무슨 내용을 담아서 기도하겠어요. 그저 50억만. 아무 소용없어요. 지금 불로 싸지른다는데.

하나님이 구약에서 분명히 출애굽 시내산에서 내가 인간을 만든 것은 인간이 나의 불쏘시개 되기 위해서 만들었다. 왜? 나는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에. 신명기 4장 24절. 신명기 5장 한번 봅시다. 지금 어떤 극단적인 말을 해도 지금 실제하고는 많이 거리가 있을 정도에요.

신명기 5장 24절에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직접 특정 공동체에게 한 것이 시내산에서 처음이고 마지막이에요. 집단적으로 보이지 않는 형태에서, 육신이 아닌 형태에서. 천사 보낸 거 말고 했단 말이죠. 그럴 때 말씀을 그냥 보낸 게 아니고 불에 담아서 보냈어요.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곧 뭐를 받는다? 불덩이를 받는 거에요. 이게 주의 날이 소급해서 먼저 도달한 거에요. 주의 날이.

주의 날은 주님 나타나는 날이에요. 어떻게 나타나느냐? 불로 나타나요. 불로써. 누가복음에도 그런 말씀 나오지요. 누가복음 12장 49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아직 불이 덜 붙어서 계속 하겠다 이 말씀이거든요. 불을 던지러 왔다. 불을 끄러 오신 분이 아니고 불을 싸지르려고 오신 거에요 주께서. 여호와께서 말씀을 던지실 때 불과 함께 불로 더불어서 말씀을 던지는 것처럼 예수님 말씀도 불과 함께 던진 말씀이었던 거에요. 왜? 여호와가 주님이시기 때문에. 불을 번지게 하시는 분이에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불같은 오순절 성령이 와가지고 그들이 성도들이 바빠요. 왜? 세상 불 싸지르기 위해서 바빠요. 빌립 집사가 바쁘고 스데반 집사가 바빠요. 불같은 성령의 말씀으로 그냥 싸질러버려요. 어떻게 할까요 하지 마. 왜? 의미 없다는 거에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 고넬료 만날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계시해줬거든요.

“먹어라” 베드로가 먹는 건줄 알았어요. 보니까 전부 다 못 먹는 거에요. 레위기 11장에 보면 못 먹는 항목 있지요. 레위기 11장에 보면 메뚜기는 먹을 수 있어요. 메뚜기하고 비슷하게 생긴 것들, 곤충. 날개는 있는데 기는 것은 못 먹어요. 부정, 가증해요. 그것처럼 가증한 것들만 담아놨어요. 이거는 뭐 베드로가 즉각적 반응해요. 주님이 날 시험하는 모양이구나. 안 먹습니다. 못 먹습니다. 체제 자체가요 완전히 달라야 돼요. 체제 자체가.

지금 하나님은 우리가 깝죽대는 우리와 상대해주는 분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상대하고 있다고 착각들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과 상대하지 우리하고 상대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제 행동 보세요. 행동이 지금 반듯하지요?! 어제도 제가 회개했습니다. 제 회개 어때요? 괜찮은 회개죠? 맨날 이러고 있어요. 자기 스타일 관리하고 있어요 지금 인간은. 천사야 불 질러라. 머리부터 홀랑 대머리 만들어버리죠.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 이런 말씀 하셨어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8장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는 곳에 왔어요. 그리고 머리 둘 필요도 없는 곳에 오셨습니다. 머리 안 둘 거에요. 떠날 거에요. 주님께서 떠날 거에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7장 29절에서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그런데 그 날이 이미 소급해서 앞당겨서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질 뿐이지 실제 인자의 날이 되면 그 소돔과 고모라의 맛배기로 보여줬던 그 순간의 날이 마지막에 우리가 믿던 안 믿던 기다리던 안 기다리던 관계없이 그냥 사그리 해서 다 옵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버렸으니까 너희들 불바다 되도 너희들은 할 말 없다. 이유는 딱 그거입니다. 하나님 뒤끝 있지요. 뒤끝 있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못 알아봤다. 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너희들은 보이는 거고 너희들은 나타는 거고.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 것을 설명하거나 해석할 수 없다. 너희들이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 말을 그동안 내가 너희에게 해왔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불 타 없어질 이 세상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굉장히 쉽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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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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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