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계명
Re..마 22:34-40 (큰 계명)
이름 : 이근호(IP:)
큰 계명
2005년 2월 27일본문 말씀: 마태복음 22:34-40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이 있다는 것은 그 배후의 그 율법을 주신 신이 계시다는 사실을 아울러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지 결코 인간이 제정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살기좋다는 낙원, 에덴동산에 추방되고 난 뒤에는 모든 것이 귀찮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는 형편에 계속적으로 고통이 찾아들기 때문입니다.
환경 자체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그 뿐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나 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신의 법'도 인간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나름대로 정돈을 하려고 합니다. 즉 환경에서 오는 고통만 현실로 인정하고 신으로부터 오는 신의 법은 아예 못들은 걸로, 혹은 아예 없는 걸로 삼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인간들에게 주신 이유는, 인간을 살려내기 위함이 아니라 "왜 너희들은 그 살기 좋은 낙원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한지 그 이유는 얼겠느냐"하는 식으로 추방의 정당성을 위해 제공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자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나름대로 조치를 취합니다. 즉 범죄자로서 행동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일종의 피해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조치를 위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고 있다는 겁니다. 이 저주받은 환경 속에서 생존과 생계에도 힘겨운 마당에 하나님의 말씀까지 추가적으로 주시니 이것이야말로 2중고, 3중고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온 정리책이 바로, 신의 법을 해석하기를, 인간의 고통을 축복으로 바뀌게 하는 기회를 부여한 것으로 이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정말로 신의 법을 주셔서 인간의 구원할 의사가 있다면 처음부터 에댄동산에 추방시킬 필요도 없고, 설사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켰더라도, 나중에 뜻을 철회하여 "그래 내가 좀 과했지 그지. 이제 천국 문을 활짝 열어놓았으니 하나님은 누구나 구원받기를 원하신단다. 다 들어와"하지만 그만입니다.
힘겨운 율법을 줄 필요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법을 주시고, 그것은 하나또 빠트리지 말고, 그것도 항시 준시해야만이 축복을 주시겠다고 나서시는 것은, 현재 인간들이 처해 있는 환경을 단순히 운없는 고통의 질곡이라고 여기지 말고 아예 본인 자신이 범죄자이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왜 우리가 범죄자인가 하는 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점을 따지고 싶어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들은 인생을 고통의 차원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을, 자기 생애에 깔려 있는 고통을 완화하는 비책을 사랑의 하나님께서 제공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복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져서 도리어 축복으로 전환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율법 전체의 구조를 아는 것이 합리적이겠지요. 그래서 대표적인 계명이 무엇이겠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모든 설교가 율법을 어떤 핵심에다 두고 해석하느냐를 따져 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의 중심 되는 말씀이 곧 그들이 처음부터 범죄자임을 공개하는 말씀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히라.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인간으로서는 실현하기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의 하나님의 질투 개념을 낳을 수 있는요건을 갖춘 사랑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신명기 5:9에 보면,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은 곧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질투란 일방적으로 사랑한 적이 있는 행위자에게 속한 권한이 됩니다. 즉 "내가 너를 사랑하댔다는데 왜 너는 나만 주목하지 않고 한 눈 파느냐"라는 주장이 성립됩니다.
즉 상대방으로 사랑을 받았기에 나오는 사랑에는 질투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요건은 먼저 사랑하는 쪽으로 구성해 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상대의 의사나 의견을 고려하지도 않은채 밀어붙이기 식으로 사랑했다면 여기에는 필히 '질투'가 성립됩니다.
그러나 율법의 중심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자신을 범죄자로 보지 않고 단지 억울하게 고통받은 사람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자기 사랑과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2:25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여기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서 자기를 구원시킬 요량으로 자기를 미워한다고 마음 먹는다면 이것은 진정한 자기 미움이 될 수 없는 겁니다. 단지 예수님을 이용하겠다는 심보입니다.
결코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기 사랑'의 또다른 형태에 해당될 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제일 중심되는 계명조차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랑'개념이 항상 '자기 사랑'에서 붙잡혀 있는 셈이 되고 그런 형편에서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한다할지라도 이웃은 단지 '자가 사랑'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만 차용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은 어디있는 겁니까? 로마서 5:8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우리가 고통받을 때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말고 따로 인물을 보내셔서 그 분을 대신 벌하셔서 우리에 대한 저주를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만이 사랑입니다. 이 십자가 사랑 안에서 우리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있는지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비쳐 나오는 하나님 사랑 앞에 할 말을 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자기 중심적으로 좁게 보지 말게 하시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크게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