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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230615a말3장8절(보편성과 특수성)-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안양20230615a말3장8절(보편성과 특수성)-이 근호 목사

환경이 우선이고, 그 환경됨을 위하여 배치물들이 여기에 발생된다. 또는 생겨난다. 환경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하고 협의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환경을 조성해 버려요. 그런데 그 환경은 하나님의 절차, 하나님의 약속과 그 완성에 절차 속에서 환경이 필요할 때마다 그 때마다 환경이 변천을 해요. 환경이. 점점 더 다른 모습을 띄고 있는 거예요.

그 네피림이라는 게 등장하게 된 것은 천사와 인간이 관계에서 발생된 자식입니다. 혼종이지요. 천사와 인간의 혼종이에요. 제가 이야기한 게(6.14일 수요설교) 그게 창세기6장1절~4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자식을 낳았다. “천사가 어떻게 자식을 낳습니까?” 하는 것은 과학적 발상이고, “도대체 그런 환경이 어떤 환경입니까?” 묻는 것은 약소 복음적 질문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께 당부합니다. “과학적으로 어떻게 해명합니까?” 묻지 마시고,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환경이 어떤 환경입니까?” 라고 질문을 해야 돼요.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 배치물이 그 앞에 발생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환경을 위하여. 그 환경은 창세기6장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하나님의 신이 인간과 함께 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의 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이 인간과 함께하지 않은 거예요. 다른 것은 다 함께해요. 인간과 함께 하지 않아요.

창세기1장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창세 때 천지 창조 때 이미 하나님의 신이 흑암 가운데 있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요. 하나님은 약속대로 진행되고요. 그 약속대로 진행되는데 맹탕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고 그 속에 배치물들을 발생시키면서 약속은 앞으로 죽죽죽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신이 함께 있지 않을 때에 이것은 뭐냐 하면 개판돼요. 개판입니다. 왜 이 엉망진창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홍수. 홍수 심판에서 모조리 다 이 인간들을 물속에 잠김으로 말미암아 환경이 더 나은 앞으로 가는 환경으로 이게 전환되는 계기가 돼요.

하나님의 신이 인간과 함께 하지 않는 환경을 A라고 한다면, 그 다음 후에 노아 이후를 환경B라고 합시다. 환경 A → 환경 B로 가면서 주께서 여기에 집어넣는 것은 뭐냐 하면 노아 홍수 심판. 노아 홍수 심판을 집어넣어서 환경B로 당겨버려요. 진척을 한다고요.

그리고 천국은 뭐냐, 최종 언약. 새언약. 예수님의 살과 피를 집어넣어서 환경B가 새로운 새하늘과 새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머리가 더 뛰어나게 되면 예수님의 새하늘과 새땅,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투입된 것은 바로 언약이었다. 그렇다면 언약을 집어넣으면 환경이 바뀐다. 인간은 배치물이니까 인간은 신경 쓰지 맙시다. 나, 어떻게 구원받아요? 그런 거 신경 쓰면 안돼요. 환경이 중요하니까.

그렇다면 환경에서, “언약과 환경의 관계에 있어서 환경이 새로운 환경이 됐다면 그러한 사례가 예가 구약 때 뭐가 있습니까?” 이리 물어보면 돼요. 거꾸로 질문을 하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환경이 A → B 로 바뀌면 B 환경에서 A를 설명할 수 있는 발상이 없어요. 다 죽었으니까.

환경 B에서 우리가 생활하는 방식이 환경A는 적용이 안 됩니다. 진화론은 이걸 몰라요. 환경A가 기본인 줄 알아요. 기본이 아닙니다. 기본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본이에요. 진화론이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어요. 예수의 살과 피가 어떻게 우리에게 영생을 줍니까. 그들은 모호하지요. 그게 말이 되냐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떻게 물위를 걸어? 말이 안돼요. 왜냐, 그건 기존의 자기가 살던 환경의 법칙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새하늘과 새땅에서는요, 예수님의 피로 의로움을 받아요. 그러나 새언약 이전의 모든 것은 뭐냐, 본인이 선한 행동을 해야 돼요. 본인이 선한 행동을 하게 되면 구원을 받지도 못할뿐더러 나름대로의 스스로 위로를 할 수 있지요. 나 그래도 착하잖아. 의롭잖아. 이게 선악구조가 그대로 유지하는 한 이런 환경에서는 예수님의 살과 피는 그들과 완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겁니다. 적대 관계에 있어요.

주님이 새하늘과 새땅 만드시고 예수님의 살과 피로 할 때, 이쪽의 환경에 있는 사람 다 죽여 버려요. 다 죽인다는 말은 다 심판해버린다는 겁니다. 선악과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잖아. 천국에 못 온다. 이러면 그대로 지옥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신이 언약을 따라서 같이 이동하면서 환경 조성에 나서게 되면서 왜 노아홍수 때 모든 인간입니다. 심지어 노아까지 포함해서 모든 인간을 다 죽여버리지요. 여기서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개입한 거예요.

개입해서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배제대상이 된다. 모든 인간은. 그러면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신이 따로 뽑아놓은 노선이 있나? 있지요. 에녹의 동행이었습니다. 그럼 에녹만 동행이고 노아는? 노아도 동행이었어요. 창세기6장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동행했어요. 동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지 않는 자들과의 극단적인 차이점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심판이 와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 자체가 저주고 심판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의 삶의 특징은 뭐냐, 그들이 바로 네피림 거인이에요. 강한 자지요. 그럼 이 강한 자는 노아 홍수 때 몰살됐으니까 더는 강한 자, 거인족이 없었느냐, 아닙니다. 언약은 언약의 새로운 환경의 요소를 옛날 환경에서 끄집어내요. 그래서 이 가인족. 가인은 죽었는데 가인족, 네피림족, 약속의 땅에 그 원주민들로 다 살아있어요. 왜냐, 새로운 필요한 배치물들을 계속해서 이전 환경에서 하나님께서 전례로 삼기 위해서 그들을 창조해내기 때문에, 배치물로 생성시키는 거예요. 언약을 위해서.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새언약, 새시대에는 더 이상 천사들은 시집, 장가가지 않는다는 말은 그 시집가지 않는다는 그 말이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도 천사와 동일하게 됐다. 예수님의 새언약 환경에서는 천사나 우리나 성도나 전부 다 시집 결혼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식을 놓을 필요가 없게 된 그런 세대다.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성경 전체를 그런 식으로 배치한 겁니다. 질문 됐지요. 오늘 본문 들어가도 되지요.

자, 이제부터 오늘 본문 이야기하겠습니다. 말라기3장5절,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죄의 리스트가 나오지요. 아까 한 거 지우고요.

아까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뭘 준비해야 됩니까, 라는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지금 이 둘러싼 환경이 주께서 어떤 식으로 했기에 환경이 바뀌어졌느냐, 새로운 환경이 오느냐가 중요하니까요.

같은 취지의 입장에 3장5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나오는 죄의 리스트의 항목을 해보겠어요. 제일 먼저 나온 게 마술이지요. 마술, 간음, 거짓 맹세, 횡령, 갈취, 우상숭배 이런 것들이에요. 자, 여기서 이것이 죄라고 이야기했어요.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술하는 게 이게 죄거든요. 이게 전부 다 죄 맞습니다. 죄인데, 이 죄 아닌 게 뭐냐, 마술 안하기, 마술 안하기가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이게 죄가 돼요. 간음 안하기. 이게 죄가 돼요. 갈취 안하기. 이게 죄가 됩니다. 횡령 안하기. 이게 죄가 돼요.

그러면 죄 아닌 게 뭐냐, 그냥 주기! 타인에게 그냥 넘겨주기! 희생이지요. 사랑. 신약에서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이 말라기3장5절을 보게 되면 본색이 탁 나와 버려요. ‘야~~ 구약 때 이스라엘이 이런 죄를 지었구나! 그렇다면 와! 요 항목 나오네. 요거 죄니까 요거 안하면 되겠네.’ 이게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은 구약의 정통적인 사람들이에요. 바리새인은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느냐, 이렇게 보면 돼요. 우리민족이 왜 망했느냐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 왜 망했느냐 하면 우상숭배하고 안식일 제대로 안 지키고 여러 가지의 간음이나 살인이나 이런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사회적 벌을 했기 때문에 망했다. 그 다음 그들 생각은 무슨 생각이에요? 바리새인은 성령을 안 받은 겁니다. 악령 받은 사람입니다.

악마가 그들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그들이에요. 악마가 통제할 때 그들의 나오는 아이디어가 뭐겠습니까? 어떻게 죄를 안 지으느냐가 이게 그 도착지점이 아니고 어떻게 내가 속해 있는 환경과 나를 내가 어떻게 계속 유지하느냐 그게 목적이에요. 이스라엘을 우리 손으로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느냐가 목적이에요. 내 나라, 내 겨레. 갑자기 노래가 막 튀어나오려고 하는데. 송창식 노래거든요.

내 나라, 내 겨레를 어떻게 후손에게 물려주느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나 하나 희생하면 좋다. 하지만 내 국가는 손대지 말라. 이게 여러분들이 결혼을 해서 알겠지만, 가정을 지킨다고 할 때 부모의 심정이 그 심정이에요. 나 하나? 까짓 거 자식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지. 그러나 뭐는 손대지 말라? 내 자식은 손대지 말라. 가정에 험담하지 마라. 나한테 욕해도 좋은데 내 가정에는 욕하지 마! 우리 뼈대 있는 가문에 대해서는. 글쎄 그 뼈대는 무슨 사골인가? 무슨 사골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뼈대 있는 우리 집안 욕하지 마라. 나한테 욕하는 걸로 됐다. 이리 되거든요.

전통에 인간은 그만큼 강렬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죽었다 말이에요. 손에 죽었잖아요. 바리새인과 하나 들어가요. 사두개인과 하나 더 들어가요. 장로들. 특히 국회의원들한테 죽었어요. 국회의원들이 71명이지요. 하나 더 추가해서 대제사장 포함해서 72명 돼요. 일종의 상원의원이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들의 손에 죽어야만 했습니까? 그것도 정식으로 재판 받아가면서 죽은 이유가 뭐예요? 재판을 했다는 말은 법적으로 공식적으로 우리는 선언한다. 너는 이단이야. 너는 귀신 들렸어. 그걸 공식화 시켰다 말이지요. 개인적인 감정 안 들어갔다 말입니다. 감정 빼고 이성적으로 봤을 때 예수님은 이성을 갖고 있는 정상적인 고상하고 교양 있고 합리적 사고방식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 눈에 보기에 예수님은 뭐였다? 완전히 사기꾼이었다.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이 예수님 믿는다 하니까 아우, 저 사람은 저렇게 대단해. 왜 예수님 믿습니까? 합리적으로 따져볼 때..., 합리적으로 따져서 믿는 건 바리새인보다 더 뛰어나지를 못해요. 양심적으로 볼때에...,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무슨 일을 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살해 당했느냐 말이지요. 이 전체 체제를 다 무너뜨렸기 때문에, 허물어트렸기 때문에. 이 전체 체제를.

율법의 완성은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거예요. 지금 들어도 예수님께서 엄청나게 도발적인, 사람을 믿으란 말인지, 믿지 말라는 말인지, 엄청난 발언을 해버린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이 이야기하면 더 엄청난 걸 알 거예요.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왜? 죄가 사람을 매개로 해서 죄를 짓는 거예요. 이 이야기 한 거예요. 이 이야기를. 이건 인간을 개무시해도 보통 무시한 게 아니에요. 요건 죄, 요건 나쁜 것. 나쁜 것은 안하고 착한 것은 할게. 이게 인간이잖아요. 이게 짐승이 아니고 인간들의 상식 있는 인간들 모습 아닙니까. 할 수 있는 모습.

사도바울도 역시 비난받을 만한 이야기를 한 거예요. 율법이 옴으로 어떤 죄가 생겨났다. 지금 이 이야기를 로마서7장에서 하고 있다고요. “너, 착해?” “착해.” “그럼 율법 줄까?” “그럼 더 착해지지.” “아니. 율법을 주는 순간 너는 이제부터 착한 것은 무효였어.” 그럼 상대방이 “어째 그런 일이?” “너는 잠복된 죄에 대리자니까.” 잠복된, 잠재되어 있는 죄의 대리자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은 죄를 모른다는 거예요. 죄를 모르면서 죄를 안 지으려하는 그 자체가 그게 자기 의를 유지하려는, 만들어내려는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내려는 하는 그 작품이 죄에요. 자기 의. 그 의가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죄의 앞잡이가 되거든요. 이걸 어려운 말로 인간은 죄의 매개자라 하는 거예요. 앞잡이가 되어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건드리지요. 점치는 자들, 마술이지요. 점치는 자들, 점치는 자에게 내가 너희에게 임한다. 임할 때에, 주께서 임할 때에 무시무시하게 임하는데. 3장2절에 보면, 그 임할 때에 누가 당하리요, 임한다는 말은 참혹한, 처절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저주는 죄 있는 자에게 다 퍼붓는다고 단언하면서 그 죄에 대해서 점치는 자라고 나왔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배후에 죄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매개자 입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점을 안치면 되지. 점을 안치면 될 게 아니냐. 주께서 “기껏 그게 반응이야? 그 정도밖에 다른 반응은 못 보여? 못 보이느냐 이 말이야?” 말씀에 이게 죄라 하니까 죄를 안 짓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서 거룩하게 영광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죄를 안 짓겠다는데 이게 뭐가 나쁘냐, 이렇게 대들지요.

아까 질문과 관련해서 지금 그렇게 대드는 인간들은 뭐냐 하면, 자기 환경을 따로 만들려고 해요. 환경 속에 자기가 놓여있다는 생각은 못하고 자기가 환경을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일단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보편성을 이루는 보편성 속의 일개 구성원이에요. 인간은.

그런데 인간은 이 보편성을 생각 안하고 뭐냐 하면, 본인을 특수성으로 이해합니다. “내가 내 돈 주고 내가 사는데 니가 왜?” 이걸 특수성이라 해요. 애가 좀 크면 지가 방에 문 잠그고 게임한다고 밥 먹으라고 하면, 게임 다하고 할게. 이게 무슨 뜻이에요? 특수성이에요. 엄마는 가정이라는 보편성을 생각하는데 키워놓으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특수성으로 가는 겁니다. 이 특수성 안에 뭐냐, 나만 바르게 살면 되지. 나만 바르게 살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보편성의 원천이 인간의 특수성은 주께서는 인정을 안 해요. 보편성을 이루는 원천은 언약, 예수님에 의한 보편성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뭐가 되느냐 하면, 유일한 특수성이 됩니다.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세례요한이 그걸 발견했어요. 세례요한이 알게 되었어요. 요단강에 세례 받을 때 특수성이 나왔어요. 유일한 특수성이에요. 보라, 그 다음이 뭡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이리 되어있지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사람이 두 사람입니까? 세 사람입니까? 몇 명입니까? 단 한 명이지요. 특수성이지요. 단 한 명이지요. 다른 사람은 세상 죄를 지고 갈 수 없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은 뭐냐, 세상 죄의 구성원이지요. 세상 죄의 구성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렇게 충격적인 발언을 한 거예요. 세례요한도 그런 이야기했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자기 자신을 본다는 것은 너그들 잘하나 못하나 상관없이 이미 다 죽었어! 그런 뜻이에요.

너희들은 이미 죄의 일부에요. 죄의 일부. 그래서 구호를, 구호를 제가 만들었지만, 구호를 외치는데 구호를 빨간 걸로 외쳐야 또 폼 날 거 아니겠습니까.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라.’ 이 말은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라는 아예 만나지 마라가 아니라 사람한테 요만큼도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왜? 그들은 특수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나를 해꼬지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러한 안목과 태도가 있어 줘야 세상 죄에서 나온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사람을 아예 상대를 안 하지요. 가게에서 하루에 손님이 수백명 오지요. 수백명 오잖아요. 수백명 상대해줘도 사실은 단 한 명도 상대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한 명도. 그럼 우리는 누구하고 상대하나, 사람하고 상대하나? 누구하고 하나? 우리는 예수님과 상대해야 돼요. 왜? 새로운 환경에, 새로운 보편성에, 특수성과 관련성이 있는 사람이에요.

심판은 확정된 거예요. 말라기3장2절에.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심판의 날에 너희들이 알아서 잘하면 내가 안 오고, 잘못하면 올게. 이게 아니고 이미 결정 났어요. 그냥 들이닥치는 거예요. 그냥 닥치는 거예요. 그러면 주께서 생각할 것은 뭐냐, 왜 이 세상을 심판해야 되고, 저주해야 되느냐, 그 당위성, 그 당위성에 필요한 배치물들만 이 땅에서 계속해서 생산해내면 그게 무슨 일이다? 그게 주의 일이고, 그게 무슨 일이다? 주의 의가 되는 거예요.

“내가 바로 심판받을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그게 주의 의가 돼요. 이게. 주께서 하지 않으면 그게 주의 일이 오지 않으면 그런 고백이 나오지를 않아요. 성도가 아니면 그런 고백이 안 나와요. 그게 누가복음18장이잖아요. 예수님께서 누가 의인이 있는가 하고 있는데 바리새인이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했습니다. 십일조 했습니다. 하니까 세리는 고개를 못 들겠습니다. 순회 재판하잖아요. 죽 돌아다니면서. 그걸 수시모집이라 해요. 미리 하는. 너, 합격이야! 내 심판의 취지에 부합되는 생산물이에요.

예수님은 뭐가 부합되느냐 하면 예수님은 자기 빼놓고 심판해야 부합돼요. 육으로 났기 때문에. 성도 안 죽이는 게 아니라 성도도 죽이고, 성도도 심판하고 저주해요. 성도를 저주할 때, 심판으로 저주할 때는 십자가 사건의 취지로 말씀으로 심판해버리고 십자가로 심판해 버리고. 저쪽은 뭐냐 하면 십자가 외곽으로 심판해 버리지요. 그걸 행함이라 합니다.

이쪽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때려버리지요. 죽여버리지요. 지렁이가 꾸물꾸물하니까 모기가 바들바들하니까 쳐버려요. 쳐버리는 이게 사랑이에요. 나의 이름을 칠 때, 이 치는 손바닥이 뭐가 적히느냐, 주의 이름이 새겨지는 거예요. 이제는 니 이름보다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게 하는 거예요.

주의 손바닥으로 치면 그러면 피 흘리고 모기가 거기에 붙어있겠지요. 요 모기가 성도에요. 모기는 자기를 특수성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손바닥이라는 보편성 속에 하나의 주님이 만든 보편성에 주님만이 특수성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 옆에 붙어있지요. 온통 피투성이로 피 터져가지고 달랑 붙어있지요. 이걸 주의 증인이라 합니다.

어제 수요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을 찾으라 하면 바로 핍박받는 자를 자기 백성으로 삼는다는 거예요. 그 대목이에요.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자기 백성으로 삼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치고 하나님을 핍박 안한 사람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게 바로 제사장으로서의 희생자로서의 왕이에요. 백성이 없으면 왕이 안 되잖아요. 왕이 왕 되려면 백성이 있어야 되는데 그 백성은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핍박자를 백성으로 모집해서 예수님이 왕이 되어버립니다. 그 핍박받는 대상이 될 때 예수님은 희생물, 제사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은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자, 그러면 좀 더 진도 나가봅시다. 예를 들어서 횡령 같은 경우 봅시다. 착취 횡령. 착취 안하는 것이 의로우냐, 아니에요. 횡령 안하는 것이 의가 아니고, 횡령을 통해서 상대방이 달라할 때 줄 수밖에 없는 대상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거예요. 산상설교에 나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에게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속옷을 주어라. 횡령을 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요, 그건 선악체제고. 복음체제에서는 상대방이 달라할 때 그냥 줘버리는 거예요. 줘버리면 어떤 의미에서 누가 누구를 횡령한 거예요? 상대방이 내 것을 횡령한 셈이 되지요. 그럼 나는 피해자가 되지요. 횡령이라는 그 횡령하지 말라는 그 말씀은 횡령이라는 말씀 때문에 피해자가 되는 거예요. 가해자가 피해자로 전락되는 겁니다.

달라 할 때 주라. 이게 산상설교 말씀이잖아요. 좀 더 여기서 몇 말을 더 붙일 필요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달라할 때 줘야 하느냐, “나 같은 자에게는 전혀 줄 필요가 없습니다.” 또는 “나 같은 자는 가질 필요 없습니다.” “나 같은 자는 더 살 권한이 없습니다.” 하는 자가 할 때 줘 버리라.

그럼 아까 보세요. 달라할 때 주라 해놓고는, 방금 이 말 나같은 자는 살 권리 없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한테 달라고 하겠어요? 달라 하지 않겠어요? 달라고 하지 않지요. 여기서 이제 깊은 게 나와요. 나는 있는데 어떤 사람이 앞에 와서, “나 같은 것은 살 가치도 없고 나는 남한테는 필요 없어요. 나는 그냥 죽을래.” 라고 할 때에 나라는 사람이 A라면, 나한테 온 사람은 B가 되겠지요. 나는 A가 되겠지요. 여기서 C가 등장해요. 누구냐 하면, 주님이 등장해요.

그래서 주님이 등장해서 어떤 사람이 여기서 나와 줄 때에 나는 이 사람에게 줄 때, 이 사람에게 준 게 아니고 주님에게 준 게 돼요. 내가 목마를 때 언제 주었습니까? 내가 배고플 때 언제 주었습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 했지요. 2항에서 어디까지 간다 말입니까. 3항까지 가줘야, 세 가지 항이 있어줘야 이게 말씀의 완성이 돼요. 이 말은 뭐냐, 이런 뜻이에요. 도움을 요청한 사람에게 절대로 도와주지 말라는 말이에요. 여러분, 기쁘지 않습니까.

자식이 도와 달라 해도 도와주지 마세요. “나는 엄마, 아빠 나 같은 거 안 도와줘도 돼요.” 할 때 도와주세요. ‘엄마, 아빠한테 애를 먹여가지고 엄마 아빠한테 도와 달라할 염치도 없고 나 같은 것은 굶어죽어도 괜찮아. 라고 하면 엄마가 도와주겠지.’ 이런 자식은 도와주지 마세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도와줄 사람이 드물어요. 거의 없어요. “니만 잘사나, 같이 살자.” 이런 것은 도와주는 것은 주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니는 옷도 잘입고 나는 추리닝 하나밖에 없다.” 이리 나올 때 아프리카 가면 추리닝 입으면 중산층이에요. 이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에서 나와요.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나와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러분이 그 이야기 다 아시지요.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데 세 사람이 지나갔잖아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 도와줬다. 왜 이렇게 이야기가 되지 않고, 앞에 제사장 그냥 패스했지요. 레위지파, 요새로 하면 집사지요. 목사 지나가고 집사 그냥 지나갔어요. 이 이야기를 거기다가 왜 배치를 하느냐 이 말이에요. 그 이야기가 왜 배치를 하느냐 하면 지금 사마리아사람. 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주제넘게 자기가 끼어들 자리도 아닌데 끼어버린 거예요. 끼일 자도 아닌데.

그래서 “사마리아사람처럼 우리가 남을 도와주세.” 라는 교훈은 거기에서 나오면 안 돼요. 어려운 사람 도와주자. 어려운 사람이 이렇게 했으니 너도 자비를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주의 말씀 듣고 자비를 베풀 자를 찾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 자체가 그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줄 때에 내가 자비를 베풀 사람이 아님을 본인이 알기 때문에 도와준 거예요. 내가 자비를 베풀 그런 잽이 못 되고, 그런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도와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과 자기를 동격화시키는 거예요. 강도 맞은 거예요. 법적으로 하면 강도 잡아라! 되잖아요. 그러나 그 이후에 강도가 나타나지 않아요. 희한하게. 나쁜 강도가 나타나지 않아요. 피해 입은 사람과 피해 입지 않은 사람만 있을 뿐이에요.

자,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해서 세상은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있잖아요. 주님은 이 2항을 뭘로 바꾸느냐 하면, 피해 입은 자와 피해 입은 자를 도와주는 자로 이 구조를 이렇게 바꿔버려요. 그러면 선한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해 입은 자를 도와주는 자만 존재해요. 그러면 피해 입은 자를 도와주는 이게 예수님께서는 자비라고 한다면 그러면 자비는 무엇이 먼저 등장해야 자비가 등장해요? 피해 입은 자가 등장해야 자비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나 모든 인간은 본인이 피해자이고 싶지를 않아요. 피해자 되고 싶지를 않습니다. 내가 뭐가 못나서 이렇게 지질이 못난 피해자 노릇을 해? 나 그렇게 어리벙벙한 인간 되기 싫어. 이게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 땅에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말씀이 왜 등장했느냐 하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이 등장하면서 그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율법을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이웃을 두지를 않습니다. 지 이용물이지. 이웃이 없어요. 자기가 특수자인데 무슨 이웃이 있습니까. 자기가 특수자인데. 그 이야기는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처럼 될 사람은 있다? 없다? 없다. 그게 예수님의 모든 말씀입니다.

말씀을 던져놓고 나처럼 지킬 사람 아무도 없다. 그래서 너희들은 전부 다 저주받아 마땅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너희 배후에는 죄가 있고, 너는 죄의 매개자일 뿐이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여기에 나옵니다. 5절에 보면,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아까 그 말씀대로 하면 억울하게 하며, 억울한 것. 아~ 사람의 심정에서 아무리 참아도 진짜 참을 수 없는 게 딱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억울한 거예요. 이건 분노가 안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어요.

주께서 우리의 분노를 끄집어내려면 간단해요. 억울한 일을 당해버리면 분노가 확 튀어나옵니다. 거기 있었나? 분노! 확 나오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이 땅에서 억울한 자는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억울한 자가 없느냐 하면 모조리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복수를 노리기 때문에 복수자만 많이 퍼져있지 진짜 억울한 자는 없습니다. 억울한 자는 주님 밖에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일본말로. 요시. ‘두고 보자. 복수할 거야. 니가 나한테 그렇게 해놓고 니는 니가 멀쩡하게 살 것 같애? 내 다 기억해 놨어.’ 이리 되잖아요.

여기 고아와 과부가 억울하다는 것은 인간나라에는 이런 게 없습니다. 고아와 과부도 마찬가지에요. 사기당한자도 마찬가지에요. 50만원 빌리고 7억 갚아야 될 사람도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억울한 사람 아니에요. 진짜 억울한 사람은 복수할 잽이 못 된다. 복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진짜 억울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 어디 있어요? 없어요.

지금까지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계속 없다는 이야기했거든요. 없다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 강조하느냐,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없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 없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출애굽기4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장자로 보는데 아닙니다. 장자 아닙니다.

레위기에서 말라기에서 장자가 되려면 반드시 레위지파의 언약을 준수해야 아들이 돼요. 장자가 돼요. 레위지파의. 그런데 말라기에서 언급한 자체가 레위언약이 깨어졌음을 알려기 위해서 한 거거든요. 이제 이야기가 십일조로 들어가요. 이렇게 해놓고 십일조로 들어가야 돼요. 십일조.

제가 강의 전에 미리 읽어보시라 했지요. 십일조를 남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여러분이 해보라 했지요. 십일조가 뭐냐, 십일조가 어려울 때는 결론부터 답부터 먼저 보시면 좋아요. 수학 문제 안 풀릴 때는 수학정석 뒤에 답이 있잖아요. 답보고 슬슬 이제 거꾸로 추적해 나가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 시간이 절약되니까. 십일조는 아들입니다. 아들. 십일조는 성도도 아니고 아들이에요. 그냥 아들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아들. 여자의 후손이지요. 아들이에요. 이게 십일조에요.

무슨 논리가 비약적으로 이렇게 갑자기 등장하느냐, 그동안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돈으로 봤거든요. 십일조를 돈으로 본 거예요. 수입의 십분의 일로 본 거예요. 수입의 십일조가 십분의 일이라고 간주한 이유는 본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스스로 그렇게 간주했어요. 본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십일조 하라는 레위언약을 아직도 유효하게 우리가 그 언약 속에 있을 만한 자격이 된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들의 그 허구. 말도 안 되는 망상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십일조를 언급해 버린 겁니다. 말라기 하나님께서.

십일조가 유지된다는 것은 레위언약이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왜 나라가 망했지요? 왜 제사장 나라가 망했느냐 말이지요. 제사장 나라는 레위언약이 살아있을 때 제사장 나라에요. 지금 사단이 어디서 났느냐 하면, 내가 이스라엘인가에 대해서 본인이 스스로 의심하거나 묻지도 않았던 게 문제에요.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과 율법가지고 주고 받을 그러한 잽인지 그러한 대상자인지를 스스로 하루에 몇 번 물어봤습니까? 물어보지를 않는 거예요. 왜 물어보지를 않았느냐 하면 다른 민족과 비교해서 그런 거예요. 다른 민족에게는 율법이 없다. 우리는 율법이 있다. 다른 사람은 성경도 없는데 우리는 안다. 우리는 성경을 안다. 그들은 성경을 모른다. 따라서 우리만큼은 특수한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아들 장자다. 이렇게 그냥 밀어붙인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우습게 본 거죠.

3장 보기 전에 호세아를 한 번 봅시다. 호세아 선지서에 나올 때에 하나님의 전략이 뭔지를 우리가 미리 간파합시다. 하나님의 작전이 뭐냐, 그 호세아 1장에 보면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등장하지요. 여러분이 잘 아시지만 설명 들어갑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담은 대리인입니다.

이 호세아가 결혼을 해요. 누구와 결혼을 하느냐 하면 간음한 여인과 고멜과 결혼을 합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네피림 민족이 그대로 살아있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의도적으로 살려낸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간음한 여인을 아내와 혼인해서 하긴 하는데 이유가 있어요. 뜻이 있어요. 자식을 놓는 거예요. 자식을 낳는데 아들 둘, 딸 하나 놓지요.

첫째 아들 이름은 이스르엘, 둘 째는 딸을 낳는데요. 6절에 고멜도 임신하여 딸을 낳는데 이름을 로루하마라 했지요. 로루하마라는 뜻은 긍휼을 입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셋째 아들을 낳는데 로암미로 되어있어요. 로는 아니야. 영어로 not이라는 뜻이에요. 부정적 어구지요. 내 백성이 아니다.

자, 하나님의 전략을 보세요. 지금 이스라엘은 자기가 이스라엘로 보고 있어요. 정통적으로 율법 지키고 여호와 믿으니까 곧 죽어도 이스라엘로 알고 있어요. 자기들이. 왜? 어디를 봐도 자기 민족 같은 이스라엘이 없으니까. 자기가 이스라엘 유일하니까요. 아까 배웠던 용어는 특수적. 이스라엘이 특수성을 지금 쥐고 있는 거예요.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다. 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력은 뭐냐, 간음한 여인과 혼인을 시켜버려요. 그러면 그 정통적인 아브라함의 혈육에서 율법의 위반요소가 들어오지요. 율법으로 유지되는 나라에 율법 위반요소가 들어와서 거기서 그냥 결혼만 하는 게 아니고 자식을 낳아버려요. 그럼 자식을 낳으면 그 이스라엘은 자식 이후의 남은 이스라엘은 호세아가 선지자니까, 이스라엘을 대표하니까, 이스라엘 대표한 자의 난 자식이 이스라엘이 아니다가 되어버려요.

자, 이스라엘이 아닌 상태에서 레위언약은 과연 온전하게 성취될 수 있느냐, 수행될 수 있느냐를 묻습니다. 당연히 안 되지요. 안되는데 그들은 뭐라고 우깁니까. 우리는 여전히 레위인이 있고 제사장이 있고, 율법이 있고, 우리는 이스라엘이라고 우기게 된 거죠. 그 우김.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거예요. 착각해 가지고.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본인이 이스라엘이 아닌 자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율법을 그걸 지키려고 했을 때 나오는 현상과, 장차 진짜 이스라엘 되시는 예수님이 율법 지키실 때에 그 때 나오는 현상, 또는 성도, 성령 받은 성도가 율법대로 완성될 때 나오는 그 현상의 격차를 주께서 구약을 끝내면서 신약을 맞이하면서 그 격차를 크게 벌리시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율법 지켰다는 인간들. 문제는 뭐냐 하면 니가 누군지를 니가 알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어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렇다면 말라기는 왜 줬는가, 소급해서 줘요.

말라기에서는 니가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 혹독하게 주님께서 말라기를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어제 수요일날 설교 끝부분에 이런 이야기했지요. “내가 나의 끝물이다.” 화투에 이런 게 있잖아요. 첫끝발이 개끝발이다. 라는 말이 있잖아요. 내가 나의 끝끝발. 나를 망치는 것은 누구다? 내가 나를 망치고, 내가 나를 최후로 망하게 하는 장본인이 바로 나다. 그게 바로 갈라디아서2장20절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나에서 나온 말과 어떤 행위에 대해서 더 이상 내가 거기서 신경 쓰면 안돼요. 그래서 제가 아까 그랬잖아요. 사람하고 상대하지 말라고 했지요. 여기에 급진적으로 나갑시다. 나는 누구와 상대하면 안 된다? 나하고 상대하지 말라. 나는 나하고 상대하면 안돼요. 니 말 왜 그리했어? 니 행동 왜 그리했어? 신경 쓰지 마!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나한테 신경 쓰면 안돼요.

나는 주님과 먼저 관련되어야 돼요. 그게 뭐냐, 3항이에요. 3항. 저 사람 도와줄까요? 말까요? 그건 내 소관 아니에요. 왜? 내가 내 돈도 아니고 나하고 상관할 문제가 아니니까.

그 사람 도와준다고 도와주면 안돼요. 덜렁 돈 주고 하면 안돼요. 줄 돈도 없지만. 하면 안 되지요. 왜 건방지게 내가 나한테 지시 받습니까? 내가 뭔데 나를 지시해요. 내가 이미 내게 아닌데. 나는 배치물이거든요. 새로운 환경의 배치물이 왜 내가 왜 특수성을 지가 특수부대도 아닌 게 지가 왜 특수성을 발휘합니까.

우리는 일개 보편성 중의 하나인데요. 더 하면 안 되겠지요.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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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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