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7장 19절 (정오의 그림자) 2300606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7장 19절 (정오의 그림자) 2300606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7장 11절에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초점이 주께서 물으시는 것이 뭐냐? 9명 “어디 있느냐” 분명히 예수님이 볼 때 10명 왔어요. 10명 왔는데 9명은 없고 10명이 몇 명 됐느냐 하면은 1명 되었어요. 여기 빠진 사람이 9명이 빠졌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런 뜻이에요. 잃어버리고 난 뒤에 보이는 것. 이 9명의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게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건강한 자기 모습을 만나러 온 거에요.
그 말은 인간이 예수님을 그 현장에 같은 시대에 같이 있어도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는걸 방해하는 게 뭐냐 하면은 본인이 기대한 희망이 예수님 만나는 것을 차단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괜찮아진 자기 자신을 만나고 싶었던 거에요. 그래서 오늘 여기 17장 11절 12절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과연 만났느냐 하는 겁니다.
만나서 예수님한테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듣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언어를 듣는 거죠. 언어를 듣고 지시를 따랐는데 과연 예수님을 만났느냐? 잠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만은 만나고 곧장 헤어졌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0명의 문둥병자가 올 때 주께서 그들을 그들 자리로 돌려보냈습니다. 마치 나아만 장군이 왔을 때 엘리사가 안 만나고 그냥 돌려보내는 것처럼요. 나 만날 필요 없다. 그냥 가거라.
그러면 그 9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할 때 무엇을 원했는지. 어떤 것을 원했는지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안 만나주고 돌려보낼 때 그때 확실하게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 드러나는 거죠. 여기 19절에 보면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라고 되어있는데 예수님을 만날려면 그냥 못 만나요.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9명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병 낫고자 할 때 그게 믿음이 아니었다 라는 것을 한 명이 돌아옴으로서 들통나버린 거에요. 믿음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면 이 차이점, 9명과 1명의 차이점을 의도적으로 주님께서는 분리를 시켰습니다. 주님께서 조치를 해가지고 9와 1사이를 갈라낸 거에요. 주께서 갈라낸 거에요.
자, 갈라냈을 때에 1명과 9명의 그 차이점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왔을 때 그들은 무엇을 자인했느냐 하면은 자신이 스스로 병 고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찾아 도움 받으러 왔지요. 무능력자. 이 무능력함을 주님께서는 뭘로 바꾸느냐 하면은 불가능함으로 전환시킵니다.
어렵지요. 무능력하고 불가능하고 같은 말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같은 말이 아니에요. 이게 무능력은 불가능이 아니에요. 나는 안 되지만 주께서 가능할거라고 생각해서 찾아 온 것이 무능력함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 9명의 문둥병자가 무능력함으로 왔는데 주님께서 이걸 뭘로 바꿨다 했습니까? 방금 뭐로 바꿨다 했지요? 불가능함으로 바꿨어요. 내가 무능력한 자가 아니고 내가 불가능한 자라는 인식으로 전환되어버린 거에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능력함에서 불가능함으로 이것이 제물,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되는 거에요. 지금 여기 누가복음 17장 14절에 보면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했지요.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 하는 것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8장이나 이런데 보면 나오는 거 있어요. 레위기 14장 같은 경우에. 무능력함을 불가능함으로 전환시키면서 구약에서 이 불가능함을 어떻게 묘사하고 표현됐느냐 하면은 제물로 표현했고 그 제물은 피를 흘릴 제물이에요. 거기서 피를 생산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흘린 피, 제물의 피 또는 어린양의 피, 피라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인간은 무능력으로 시작하거든요. 내가 능력이 없으니까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그 말 자체가 이게 어느 세계냐 하면은요 믿음 밖의 세계에요. 믿음 밖의 세계. 믿음 밖의 세계인 거에요. 하나님이 능력 있는 분이니까 어려울 때 도와주세요 이게 전혀 믿음이 아니었던 거에요.
그럼 믿음의 수준이 될려면 뭐냐? 무능력함에서 어디까지 나와야 해요? 내가 불가능함에 들어가야 해요. 불가능함이 되어버리면 무능력하면 “도와주세요”가 되잖아요. 불가능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도와주세요” 라고 할 입장이 안 되는 걸 발견하는 게 불가능함이에요.
믿음은 어디서 생기는가? 거대한 톱니바퀴. 엄청나게 큰 톱니바퀴. 톱니바퀴의 특징은 무정하다는 것. 감정도 없고 봐주는 것도 없고 무심코 그냥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톱니바퀴 속에 손가락을 이렇게 집어넣으세요. 그러면 기계가 주의하세요 손가락 들어갔습니다 이런 말을 해줍니까? 안 해줍니까? 안 해주지죠. 그냥 거대한 기계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는데 톱니바퀴는 인정사정 없이 그대로 들어간 손가락을 완전히 절단시켰습니다.
그때 생기는 것이 뭐냐? 믿음이에요. 믿음은 이 세상 모든 일이 일체 나의 일이 아닌 것을 발견하는 게 믿음이에요. 이 세상 모든 일이 나의 일이 아닌 거에요. 나의 일이 아닌데 인간은 주제넘게 하나님의 일에 끼어든 거에요. 인간은 불가능한 세계인데 자기 아쉬운 거 있다고 부탁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 무능력함을 불가능함으로 옮겨서 제물로 보여줬어요. 제물이 될려면 율법에 의한 제물이거든요. 율법이 있어줘야 돼요.
율법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율법이 피로서 이 땅에 등장하는데 제물을 보이라 할 때에 오늘 14절에 “주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무능력함을 호소하면서 도와달라고 하지요. 13절 14절에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했어요.
자, 제사장에게 몸이 보이라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제사장들은 율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문둥병자가 치료되고 난 뒤에 치료된 문둥병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있습니다. 흐르는 물 위에서 새 두 마리 잡고 한 마리 잡으면 피 생기죠. 피를 한쪽에 하면 새는 좋다고 피 바르고 그냥 창공으로 날라가는 그 모습이에요. 제물이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새가 두 마리에요.
자, 새가 한 마리 아니고 두 마리 되어버리면 처음에 있는 새와 나중 새와 처지가 달라요. 차이가 납니다. 왜 문둥병자가 문둥병 됐는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깨끗하게 되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문둥병 되는 것도 본인의 잘못이 아니고 첫 번째 새에서 두 번째 새 사이에 절차가 과정이 발생돼요. 과정이. 이렇게 했는데 이렇게 된다는 그 간격을 보여주는 거에요. 간격 보여줄려면 한 마리가 되면 안 되고 두 마리를 보여줘야 되지요.
그러면 문둥병자가 나 문둥병 걸렸다 할 때 문둥병자는 뭐 생각하느냐 하면은 ‘나 나아야 돼. 이 저주 받은 병 이거는 나아야 돼.’ 자기 생각하겠지요. 자기 생각하는 거 믿음입니까? 믿음 아닙니까? 믿음 아닌 거에요. 믿음은 뭐냐 하면은 그 간격에 간격을 보여주는 기능자로서 하나님의 일에 편입될 때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용당했어. 내가 이용당했어. 주님한테 완전 철저하게 활용당했어. 뭐야 내 신세.
그러니까 남들은 멀쩡한데 본인은 문둥병 걸렸다. 그래서 자기는 답답했는데 하나님께서 문둥병 걸리게 해놓고 그 다음에 낫게한 거에요. 전도서에 나오지요. 3장에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 있고 태어날 때 있으면 죽을 때 있고” 태어날 때 죽을 때 간격 생기잖아요. 태어날 때 죽을 때 간격 뭐냐 하면은 나 태어났다 나 죽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살려줬다. 지금 본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모든 것이 누구 일이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 거대한 톱니바퀴는 너무나 자체적으로 완벽해서 우리가 거기에 끼어들면 안돼요. 안돼요. 이게 믿음입니다. 믿음하고 난 뒤에 알지요. 우리가 끼어들면 우리는 손가락 부러집니다. 산재 신청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냥 들어가면 부러져요. 부러짐으로서 새삼스럽게 우리가 아는 사실이 뭐냐 하면은 내가 이 세상에 내가 할게 아무것도 주님께서 주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내가.
여러분 이 이야기 듣고 속이 시원합니까? 아니면 찝찝합니까? 이게 속이 시원해야 돼요. 그동안 여러분 뭐 했습니까? 용을 썼지요. 무슨 용? 9명 문둥병자처럼. 저 무능합니다 부족합니다 온갖 겸손의 들은 멘트는 다 해가지고 낮추고 또 낮춰가지고 하나님 제 형편이 이 지경됐는데 어떻게 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낫게 해주실 수 있잖아요. 안합니다.
“네가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 제사장이 뭐라고 합니까? 당신들 여기 왜 왔습니까 하면 예수님이 가라 했어요. 그분이 왜 가라고 했지? 혹시 문둥병자와 관련된 어떤 제물 있습니까? 아! 그 대목이구나. 레위기 14장 문둥병자가 병 들었는데 누가 와서 하나님의 긍휼이 낫게 해줬을 때는 깨끗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두 마리 새를 잡아라 하는 아 그 제물과 관련해서 예수님이 그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라는 것을 기대하면서 예수님께서는 10명 보고 가라고 한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문제 낼게요. 10명이 다 제사장에게 갔습니까? 아니면 한 명이 돌아왔습니까? 한 명이 돌아왔지요. 왜 돌아오지요? 한 명이 왜 돌아옵니까? 뭘 발견했느냐 하면은 이걸 발견한 거에요 한 명이. 진리는 우리 행위들을 통과하면서 우리 자신을 철거한다. 철거한다 이거 별표 두 개. 진리는 우리 행위들을 통과해요. 통과. 통과하니까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우리는 배관이 되겠지요. 배관. 수도관 배관 있지요.
우리를 통과하면서 우리가 구멍이 뚫리지요. 통과하면서 진리가 통과하는 거에요. 통과하면서 우리 자신을 뭐하느냐 하면은 철거해버려요. 철거가 안 된 사람이 몇 명? 9명. 철거된 사람은 몇 명? 1명.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누군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9와 1을 나눠요. 분리를 시켜버립니다.
그리고 돌아온 1명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믿음이라고 이야기했어요. 믿음. 그렇다면 9명이 문둥병 걸렸으니까 도와주세요 라는 이것은 믿음입니까? 믿음 아닙니까? 이건 믿음이 아니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게 아니고 괜찮게 나아져버린 철거할 필요 없이 철거를 왜 해 더 좋게 됐는데. 병 나은 괜찮아진 자기 자신을 예수님을 통해서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거에요. 본인이 철거당해서 온 게 아니고 더 훌륭해진 나를 예수님을 통해서 건지기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 만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게 아니고 더 훌륭해진 자기 자신을 만나고 바라보고 싶은 거에요. 그걸 얻고 싶은 거에요 인간은.
방금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1번과 2번으로 나누어보겠어요. 1번 나에게 손해되는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2번 주님 나는 어떻게 해야 무너질 수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무너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철거될 수 있습니까? 1번과 2번 문장. 1번과 2번 문장이 확연하게 차이나지요. 어느 것이 좋다고 묻지를 않겠습니다.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걸 묻지 않겠어요. 제가 차이 나냐고 물어보는 거에요. 분명히 차이 나지요.
세상 사람들은 2번을 통해서 1번이 되고자 하는 거에요. 세상 사람들 특징은. 9명의 특징은 2번을 통해서 1번이 되고자 하는 거에요. 그런데 1명은 1번을 통해서 2번이 되는 거에요. 여기 1명이에요. 이 방향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해서 19절에 뭐라고 합니까? 구원. 구원은 내가 주님이라는 진리가 통과하는 배관통이 되는 거에요. 배관통. 하나의 통로가 되는 이게 구원이에요.
나는 어떻게 하면 무너질 수 있습니까? 주님의 대처는 뭐냐? 너에게 손해되는 일이 일어나면 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내가 문둥병 환자가 되는 거에요. 문둥병 환자가 되는 것. 물론 10명 다 예수님을 만난 줄은 몰랐어요. 둘 다 똑같이 1번에 관한 거에요. 나에게 손해되는 일 일어나면 안됩니다. 무너져서라도 나에게 이익이 돼야 됩니다 라는 이런 계산. 내가 무너지더라도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일어나야 된다.
무너지는 것이 고난이라고 한다면 고난 감당하지 뭐. 결과적으로 나한테 잘되면 되지. 숫자 보세요. 9:1입니다. 9는 거의 대부분이고 1은 거의 드물다는 아까 이야기한 무능함에서 불가능함을 표시한 거에요. 불가능함.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거에요. 불가능함이 예수님을 경유하니까 주께서 불가능함이 가능해졌는데 이것은 처음에 우리가 생각한 불가능함이 아니고 애초부터 우리는 불가능함 속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예수님을 통해서 발견한 거에요.
너무 어렵게 했는데 쉽게 하겠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있는데요 인간 주변에 배치 물건, 집, 사물 여러 가지 가구 사람들 이 배치는 이 모든 배치는 나를 증명하기 위함이에요. 인생 살아오면서. 우리 집에 저런 가구가 있어.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다. 이런 내 배치를 통해서 나란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고 내가 누구냐를 다지기 위해서 배치를 해요. 인간은 그래요.
그러면 이렇게 인간이 자기를 증명하면서 배치를 하다보면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 주변의 배치를 우리가 가로막히는 거에요. 예수님이 예수님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냥 예수님 찾으면 되지.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 찾아버리면 멀쩡한 잘난 나를 위해서 멀찍이 예수님을 여기에 배치를 해버려요. 이것은 내가 설치해놓은 구조에 예수님은 숟가락 하나 놓는 식으로 그냥 이런 일인데 이런 일은 예수님의 일이 아니지요. 이건 나의 일이죠.
우리가 나 하나 증명하고 변론하기 위해서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주변에 배치하는데 온 신경을 여기 다 쓰는데 그거 신경쓰다보니까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배치되어 있지? 이거는 우리가 지금 관심이 없어요. 여기 누가 있느냐 하면은 바로 한 명의 문둥병. 제사장에게 가라고 했는데 말도 되게 안 들어. 제사장에게 가면 되는데 안가고 누구한테 왔습니까? 예수님께 와버리죠.
‘제사장한테 갈 거 뭐 있노. 예수님이 죽은 제물이잖아’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래. “제사장에게 가라.” “예.” 가는데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신 그 말씀, ‘왜 가라고 했지? 혹시 가라고 하신 그분이 바로 진짜 오시리라 하는 그 율법의 완성된 제사장이 아닐까’ 하고 고상한 말로 빠꾸해가지고 돌아온 거에요.
돌아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는 당신의 배치물이 되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배치물로 나는 내 인생 더 이상 끝내겠습니다. 예수님의 한 일에 나는 손가락 하나 들어갈 필요조차 없다는 사실, 내가 문둥병 되도 주의 일이고 그걸 낫게 해도 주님의 주님 되기 위한 간격을 보여주는 일에 저희를 사용해주신 것에 대해서 고맙고 감사하고 기쁘고 그래서 온 거에요.
그러면 9명과 1명의 차이는 뭐냐 하면은 다른 사람은 자기 원하는 대로 몸 나았다고 기뻐하며 돌아갔고 이 한 명은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께 고맙고 주님께 기쁘고. 고마운 분이 나타났고 나는 그 고마운 분 옆에 있기만 해도 좋은 배치물이 되었다는 이 사실. 이게 바로 믿음의 관계입니다. 이게 믿음의 관계에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미리 보게 되면 20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2절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라고 되어있지요.
지금 까지 이야기한 것을 이것과 연관시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인간끼리의 어떠한 삶의 조건은 아무 문제거리가 안돼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빌딩에 사는 사람이나 낮은 쪽에 사는 사람이나 지금 이게 아무 문제가 안돼요. 안되고 재림해서 주께서 인자의 날, 재림의 날 바라보면 이게 이 사람이 어떤 조건에 있던지 어디서 전세 사기를 당했던지 월세 살던지 상관없이 이 조건은 문제될 게 없습니다. 문제될 게 없잖아요. 이게 인자의 날이란 말이죠.
문제될 게 없는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닦달하고 우리 자신에게 시비 겁니까? 이게 뭐야 내 인생. 이게 뭐야. 남들은 저렇게 잘 사는데 왜 우리 자신에게 화를 내고 분노하고 왜 시비 걸어요? 지금 믿음이 없어서 그래 믿음이 없어서. 주님의 옆에 배치물로 있으면 되는데 자기가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그 고집이 있어요. 예수님 이용해서 자기가 획득할 것 얻겠다는 식이에요. 그거 얻어서 뭐 할 건데?
오늘 유투브 두 번째 강의, 강하게 될려는 자와 약하게 될려는 자 그것에 대해 말씀드렸어요. 세상 전부가 못 강해서 환장을 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고 날마다 예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죽은 내 몸에서 뭐가 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피어난다. 이것은 방향이 약해져도 괜찮다는 거에요. 동영상보면 나올 겁니다. 유현상 씨가 불렀던 ‘여자야 약해지면 안돼’ 해놨어요.
왜 예수님이 인자의 날에 주님께서는 인간들끼리의 조건은 묻지도 않는데 왜 우리가 이 조건을 우리에게 묻느냐 이 말입니다. 자, 거기에 대해서 쉬운 듯이 어려운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과거에서부터 내려온 모든 기억들이 층에 쌓여서 현재가 되어버리면 과거는 기억 속에 사라지니까 현재 기억만 표피처럼 있어요. 현재 기억 밑에 과거 기억 들어갑니다. 그런데 과거, 더 과거, 더 더 더 과거 어디 쌓이느냐 하면은 이 밑에 쌓여요. 더 더 더 과거는 이 밑에 쌓이는 거에요. 계속 쌓여나가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들은 지금까지의 축적된 기억에 바탕을 둔 욕망으로서 세상을 읽는다. 이게 세상관, 현실관, 인생관입니다. 인간들은 지금까지 축적된 기억에 바탕을 둔 욕망으로 그 자기 시대를 읽어버려요. 그러니까 12살 때 옛날 집에 살던 천막에 앉아 살던 그걸 여러분들이 지금은 기억 안 나지만 꿈속에 보면 나와요. 그때 삼촌과 같이 까불고 놀고 강아지 키우면서 있을 때 그때 여러분들 꿈속을 놓치지 말고 한번 찾아보세요. 물어보세요.
너 지금 존재 의미가 무엇이며 너 사는 목적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가 그걸 물어보세요. 물어보면 나옵니다. 나 공부만 열심히 할래. 또 물어보세요. 왜 공부 열심히 해? 공부 열심히 하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나 공부 잘한다고 굉장히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칭찬해 라고 할 거에요. 그게 성경에 나오는 존재의 의미입니까? 아니지요. 아닌 거에요 이거는.
인간은 자기가 살아온 만큼만 봐요 세상을. 요새 20대 30대 살아가는 거 보세요. 복음 전해도 안 받습니다. 누적된 게 있어요. 유투브 보면서 컴퓨터하면 게임하면서 누적된 자기 희망사항이 있어요.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욕망. 외부에 흐르는 욕망인데 그 욕망은 뭐냐? 남한테 인정받는 거라고 했지요. 내가 수백 번 이야기했어. 내가 남한테 자랑거리가 되고 인정받는 욕망을 본인이 거부를 못해요.
그러면 문둥병자 10명 왔습니다. 그냥 마음속이 비어있겠어요 아니면 그 사람이 살아왔던 모든 과거의 축적된 것이 담겨서 예수님을 찾는 욕망으로 작용했겠습니까? 예수님 찾을 땐 자기 욕망 있을 거잖아요. 욕망이라는 것을 나쁜 의미로 생각하지 마시고 나는 세상 이렇게 사는데 그 세상 예수님이 좀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단 말이죠. 12살 애가 교회 갈수도 있어요. 여러분 가운데 기독교 가정 같으면 갔잖아요. 가서 기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어서 제 목을 치세요 이런 거 안했잖아요. 그런 거 안하잖아요. 이번에 시험 반에서 1등 하게 해주시고 이런 거 좋은 옷 입게 해달라 하고 그런 거 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은요 인간의 현재 속에 지금 나에게 체험된 것이 기껏 여기 쌓여요. 여기 쌓인 이 체험 이걸 누가 마중을 나오느냐 하면은 밑에 있는 과거의 기억이 이걸 딱 붙들어요. 그래서 둘이 결합을 해요. 둘이. 그런데 이걸 붙들면 뒤에 여기에 발목 잡듯이 그 과거의 과거 더 과거 욕망을 또 붙들어요. 그걸 또 옆에서 붙들고 있다고요. 마치 시추하듯이. 옛날에 있었던 것이 다 기어나오는 것처럼. 다 나오는 거에요 이게.
그래서 제 말은 인간은 자기를 못 벗어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못 벗어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 일만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 일만 생각한다. 그러면 이게 아까 이야기한 무능력함이죠. 무능력함이 불가능함. 너무 말이 비슷해서 어려워요. 제물 십자가의 피로다 완성하거든요. 그러면 어디까지 오느냐 무능력함에 머물고 있습니다.
무능력함에서 불가능함으로 들어가버리면 여기서 뭐냐? 인간은 자기 일만 생각한다 이 자체가 손가락이 절단됩니다. 손가락이 절단될 때 이 브릿지 이 다리가 뭐냐 하면은 믿음이에요. 내가 내 자체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거에요. 이런 식으로 12살 30, 40, 50, 70이 되도 그건 시간만 보냈을 뿐이지 다 부질없는 것, 아무 소용없는 거에요.
내가 소용 있어버리면 내가 의미가 있어버리면 내 안에서 내가 무능력함은 보이겠지만 이건 겸손이거든요. 불가능함이 내 속에서 내게서 발현되지를 못합니다. 불가능함이.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일만 생각하니까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들은 변하는 것들만 해석한다. 인간들은 변하는 것들만 해석한다. 자기 해석이죠. 문제가 뭐냐? 인간은 자꾸 해석한다는 거에요.
20대 30대, 걔들 고민 많습니다 지금. 왜 고민 많은 줄 알아요? 해석을 하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욕망과 현실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고민 되게 많이 합니다. 집에서 논다고 노는 게 아니야. 고민 늘어지게 고민. 얼마나 고민했던지 밥도 못 먹고 야위어가요. 그런데 이 고민은 뭐냐 하면은 이 무능력함에서 불가능함으로 들어갈 생각 안하고 무능력함에서 드디어 능력 있음으로 돌리는 거에요. 능력 있음으로. 이게 9명이에요. 9명. 봐! 나 이제 문둥병자 아니잖아 하고 돌아갑니다.
자, 그러면 지금까지 문제만 이렇게 했는데 해결책을 지금부터 제시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해결책을 어떻게 제시하는가. 일단 그림을 하나 그릴게요. 십자가에서 칸막이 쳐져있고요 여기서 뭐가 뿜어져 나오느냐 하면은 세상에 있는 모든 연관된 모든 관계망들이 결국은 십자가 하나와 보이지 않는 막을 통해서 배후에 십자가와 연결되어있어요. 모든 게.
이 땅에서 어떤 심지어 마귀조차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다 연결되어있어요. 다 연결되어있다고요. 여기 007 영화나 미션 임파서블 보면 그 주인공이 레이저 피한다고 막 용을 쓰잖아요. 금고 터는데. 촘촘하게 막이 되어있습니다. 여기 걸리면 이제 감전되는 거에요. 걸려드는 거에요. 자, 걸릴 때 어떻게 걸리느냐? 여기서 한방치료가 시작됩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말씀을 가지고 침을 놔요. 그러니까 복음이 침입니다. 침을 놔가지고 우리 마음속에 딱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을 때 뱅글뱅글 돌리면서 집어넣어요. 침을 딱 넣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틱틱 하고 뭔가 침을 넣는데 여기서 구라 들어갑니다. 구라. 한방 구라 들어갑니다. 침을 넣게 되면 치료가 되는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그 맥 또는 기 구조의 혼돈과 무질서를 침을 통해서 감지해내는 거에요. 감지하는 것. 어디서 지금 조화가 안 된다. 뭔가 삐걱거린다는 것을 침을 집어넣어가지고 파악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아프기 때문에 병원 왔거든. 아프기 때문에 병원 왔지요. 건강한 사람은 병원 안 올 거 아닙니까. 딱 집어넣어가지고 이쪽에 깨어져버린 구조, 체제. 건강체제가 깨어졌잖아요. 깨어짐과 침이라는 그 물질 사이에 만남을 통해서 능숙한 의사는 그걸 감지해내는 거에요. 영화에 보면 나와요. 걸음걸이만 봐도 아 저 사람은 임신했다. 임신 안했다 대번 알데요. 영화니까.
주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아까 그림 봤지요. 십자가에서 다 이뤘어요. 다 이뤘는데 우리는 과거의 욕망에 있어가지고 우리는 다 이룸이 멀었어요. 우리는 내 욕망이 무한이에요. 이거는 세상 전부해도 욕망 채우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내 선에서 해결할려고 끙끙 앓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 다 이루었다에서 여기 베일이 있어가지고 안 보여요.
모르는데서 오는 말씀의 관계망에 딱 걸린 겁니다. 걸리면 침이 말하죠. 네가 문제 많다. 너 안에 철판 들었네. 안돼 그거 뽑아내야 돼 라고 진단 들어가죠. 진단. 그 진단 누가 하겠습니까? 침을 집어넣은 말씀을 주신 예수님이 하신 거에요. 예수님이. 그러면 건강한 사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건강한 사람이 없어요. 이게 중요해요.
예수님의 말씀을 집어넣으면 아무도 건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십자가 졌다는 것은 그 누구도 나 이렇게 착실하게 살았어요 내세울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은 뭐냐? 우리에게 축복은 뭐냐? 십자가와 연결된 말씀이에요. 자칫하면 이 성경 말씀이 사람은 해석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도로 나한테 가져와요. 이건 본인이 본인을 치료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이거든요.
베일에 가리웠다. 가리워진 그 뒤에 숨어있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 대해서 뽑아져나온 여기에 감전이 되어버리면 우리 속에 있는 죄가 먼저 반응을 나타냅니다. 관절에 반응하는 것처럼. 우리 속에 있는 반응을 나타내요. 아주 극렬해요. 그걸 제가 교재에 이렇게 했어요. 대항력. 대항력이라는 말을 어디서 배웠느냐 하면은 바로 경부울 물건 나오는 동영상에 나와요. 먼저 선점했던 쪽이 경매 받으면 대항력이 있어가지고 해야 한다는 그 이야기.
대항력 반응을 나타내요. 걸려들었어 너는! 침을 딱 놓으니까 거기서 격렬한 반발이 탁 일어나죠.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참 이 세상의 책들을 다 수집하고 압축해서 진리를 뽑아 놓으면 딱 이 진리에요. 예수는 나와 상관없다. 원초적으로. 이게 바로 우리의 본심이었어요. 이게 본심이었습니다. 모든 인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이 죄인 되지요. 성경에 나와 있잖아요.
그러면 그걸 아 성경 믿습니다 하지 말고 말씀을 가지고 침을 찌를 때 그 티를 내야 돼요. 우리 죄인 됨의 티가 나야 돼요. 그 티가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은 그냥 나 도와주면 되지 근원적으로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입니다 라는 본심이 말씀에 의해서 낚아채야 돼요. 걸려들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진짜 내 얼굴을 봐야 돼요. 진짜 내 모습, 내 얼굴을 봐야 돼요. 나는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했지 예수는 예수고 나는 나였구나 하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본의 아니게 주의 하시는 일에 내가 시건방지게 목사라고 하면서 장로, 집사라고 하면서 내가 주의 일 한다고 손가락 집어넣은 거에요. 목사가 일합니까? 안합니다. 집사가 일합니까? 안합니다. 장로가 일합니까? 어느 누구도 주의 일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하면 안돼요. 왜? 우리는 무능하고 또 무능에서 머물지 말고 우리는 주의 일을 하고 싶어요 해도 이게 주의 일에 보탬이 안 되는 불가능한 자에요. 이게 믿음이에요. 이게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수십 년 오십 년 신앙생활해도 이거 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진짜 신학자 중에 물론 없고요 목사 중에 이거 아는 사람 없어요. 당신 목사인데 뭐합니까? 나 내가 아무것도 안 해요 이런 발언할 수 있는 목사 물론 여기 그런 목사 몇 명 있어요. 있습니다. 사회생활 해야 돼요.
내가 쓸모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옆의 배치물이기 때문에 그런 고백이 나오는 거에요. 주께서 자신의 일만 일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무 일도 안함을 알고 있는 자들을 배치물로 자기 주변에 둠으로서 예수님이 예수님 다 이루심을 만끽하면서 드러내시는 거에요. 뭘 주의 일을 해요. 뭘. 주의 일을 못하는데.
자, 지금까지 한 것 다시 정리해봅시다. 다음에 인자의 날은 너무너무 어려워가지고 이것 정리하고 10분 쉽시다. 병 고치러 왔다 주께서는 죄 사함. 이 원리입니다. 병 고치러 왔다. 왜 네가 병 고쳐야 되는데? 주께서는 병 고치러 온 사람을 죄 사함으로 이끕니다. 무능한 자를 불가능한 자로 만들어버려요.
그럼 내가 구원받은 것을 남한테 이야기할 때 너 어떻게 구원받았어? 하면 이 이야기하면 돼요. 불가능함 이야기하면 돼요. 나 불가능했어. 그럼 어떻게? 그냥 주님의 다 이루심에 감전됐지요. 치익 치익 감전됐다는 순한 말이고 내 손가락 날라갔지요. 내 모든 자존심, 자존감 다 날라가버렸어요. 아무것도 못하고 불가능한 자로 주께서 말씀으로 이어지게 했을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