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출 20:23-26 (복과 하나님의 이름)
Re..출 20:23-26 (복과 하나님의 이름)
이름 : 이근호(IP:)
복과 하나님의 이름
2005년 2월 27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20:23-26
20:23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20:25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0:26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복'이라는 단어 눈에 확 들어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임하시겠다'하는 것이 주목이 됩니까? 사람들은 복은 원하시면 하나님과 늘 함께 사는 것은 부담스러워하고 거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미 '복'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이라 아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모든 세계를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복이라는 것도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해소하고 행복된 삶이 제공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따라서 무엇이 고통이라는 것을 본인이 알고 또한 그 고통이 사라지는 환경도 자신이 짐작할 수 있으니 자연스럽게 고통을 줄이고 복을 얻고자하는 방식도 자기 쪽으로 창안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23절을 통해 짐작케 해줍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라고 말입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꼼지락거리면서 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것이 신과 어떤 식으로 연결을 꾀하게 된다는 겁니다.
신을 자극할만한, 그리고 자신의 행위가 신과 접촉을 시도하겠다는 의지가 있음을 알리는 그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에 대해서 하나님은 금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지 않는 다른 방식의 복을 오직 하나님이 원하는 자에게만 제공하고 문을 닫아버립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과는 달라서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만 하나님의 작업을 적용시키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복이라는 것도 사람들이 미리 짐작할 수 내용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실시되는 일을 통해서 비로소 공개될 뿐입니다. 즉 복이란 사람 머리 안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안에만 은폐된채 감추어져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리는 작업이 따로 있기에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해서 하나님께서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들의 음성에 의해 호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 자체가 실제로 활동하는 능력이 따로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노아 본인의 아이디어서 방주라는 것이 나온 것이 아니라 노아 방주에 같이 동승하신 그 하나님의 아이디어에 의해서 노아 방주라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물론 방주 안에서 복이요, 방주 밖에는 극렬한 홍수의 무서운 저주가 실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같은 경우에 이미 십계명이 알려진 마당에서의 복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리시는 일이란 더 이상 방주라는 물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죄로 인해 죽어야 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제사를 명령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 인간 세계에 벌리시는 일은 기존의 인간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삭제하고 제거해 버리는 일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제사란 제물이 있어 그 제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문제는 그 제물이 불 속에서 없어져버린다는데 의의가 찾습니다. 제물의 있음과 불의 있음을 상호 만나게 하는 겁니다. 제물은 인간 쪽에서 드리는 정성어린 인간의 노고를 말하는 것이고 불이란 하나님 편에서 그것을 단호하게 무효로 돌린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제물과 불의 만남은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이요 인간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의 만남입니다. 이것은 인간 목숨과 하나님의 진노와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목숨은 죽은 목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만남을 주선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지켜보는 것 가운데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비로소 성사되는데 그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복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이란 인간의 죽음이 없으면 성사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의 불이 없으면 성사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중재되지 아니하면 나타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는 모든 일이 이처럼 죽음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시는 분이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믿어지고 이것이 느껴지고 이것이 인정되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의 이름에 의한 복을 받은 사람에 한해서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왜 죽이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지닌 본질이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형식을 띠고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제사란 제물이 주인공입니다. 비록 인간에 의해서 바쳐지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그 제물은 자신과 동일시해 버리십니다.
그렇다면 그 제물의 운명은 곧 인간들과 관련될 하나님의 이름의 운명에 해당됩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인간은 곧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하느냐부터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들은 생각하는 신이란 늘 가짜라서 하나님의 진노만 유발시킬 뿐입니다.
인간들이 신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모른다는 것은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의 근본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범죄행위가 됩니다.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엉터리로 인생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엉터리 같은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처벌을 받는가는 제사를 통해서 확연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제물이 되는 양과 소는 죽어야 될 인간의 운명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을 대신하여 산 채로 희생되고 그리고 불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바로 죽어야 될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나타나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럴 때 그 복이란,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제공되는 복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이름'이 제공한 은혜로 인해 얻어지는 복인 것입니다.
이 제단을 만드는데 있어 인간의 노동의 상징물은 '징'으로 제단을 아름답게 마감처리해서는 아니됩니다. 제단 위에서 죽어야 된다는 이런 복의 장치는 결코 인간의 아이디어의 산물이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은 순전히 이 '하나님의 이름'의 공적과 은혜성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우리가 죄인됨을 더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를 하여금 더 훌륭한 사람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많이 전파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원했는 복이 아님을 명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스스로는 쓸모 없는 인간에 해당됨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