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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강의20230615a 요한일서 2장 2절(말씀과 맞교환)-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일서

서울강의20230615a 요한일서 2장 2절(말씀과 맞교환)-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6절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2: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저 안에 거한다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지금 1절부터 6절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이걸 아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을 인정하지 않느냐 하면 [죄라는 것은 인간이 인간임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것을 여러분이 모른다 치고 인간이 인간을 자각하게 되면 여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행위의 돌려막기]를 시도하게 돼요. 자기 행위. 내가 누구냐를 알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을 함으로써 내가 나를 찾아가는 여정, 내가 누구냐를 확인해보고자 하는 여정, 인간은 이걸 행하는 거예요.

A에서 B, B에서 C, C에서 D, D에서 A, (A→B→C→D→A) 원래 출발했던 그것을 그대로 되돌아오는 겁니다. 인간의 돌려막기입니다. 평생을 다 가도록 이 일만 인간은 하게 되어있죠. 자기라는 그 폐쇄구조에서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고 벗어날 방법도 모릅니다. 방법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일체, 인간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인간은 지움, 삭제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여기 요한일서에 나오는 모든 인간은 자기가 인간이라고 여긴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에요. 인간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가 인간이라고 여기면 1절부터 6절까지 한 마디 한 마디 무슨 말인지를 전혀 못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예를 들면 “나의 자녀들아” 이것은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의 자녀라는 것은 어울리지 않겠죠.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할 때 죄라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인간은 죄를 몰라요. 죄를 모르니까 2절에 화목제물도 모르는 거예요. 죄를 위한 화목제물도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온 세상이 죄라는 것도 몰라요. 온 세상이 다 죄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죄도 있지만 선한 것도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 인간은, 여기 인간이라는 것은 그냥 인간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 있는 나를 가리켜서 인간이라 하는 거예요. 세상이 몽땅 죄라면 거기서 태어난 나가 자동적으로 뭐가 돼요? 죄가 되죠. 그걸 우리는 용납 안하죠. 단박에 거부하죠. ‘세상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만큼은 죄 아니라고 빼주세요.’ 이렇게 돼요, 인간은.

네가 하는 것이 나쁘다 하면 B로 교체하면 되고요. B 그것도 네가 문제 있다 하면 C로 또 바꾸면 되잖아요. 인간은 행위의 돌려막기, 돌려치기 아닙니다, 돌려막기. 자기 행위의 돌려막기를 해요.

이 카드사에 빚졌으면 다른 카드사로 돌려막기 하듯이 계속 돌려막기하는 겁니다. 지키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이 죄라고 할 때, ‘인정할 테니까 나는 거기서 빼주세요.’라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게 되죠.

죄 모르니까 화목제물 모르죠. 화목제물 모르니까 세상이 전부 죄라는 것을 인정 못하죠. 그걸 못하면 뭘 모르냐? 계명이라는 것을 모르죠. 계명을 모르게 되면 무엇을 모르냐? 거짓말이 뭔지를 몰라요, 4절에. 거짓말이 뭔지를 모르죠. 거짓말이 뭔지를 모르면 진리가 뭔지를 모르죠. 진리 모르면 그다음에 사랑이라는 것도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요한일서 2장에 들어오려면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중지하고 달리 출발해야 됩니다. [인간과 말씀을 맞교환]해야 됩니다. 인간과 말씀 사이에 치환(置換, replacement, transposition)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치환이라 하는 것은 어떤 두 개의 대상 가운데 하나를 다른 걸로 바꿔서 표기하는 것을 치환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철수, 영희, 영철이가 있다면 이걸 치환할 때는 뭐냐? 철수를 A라 하고 영희를 B라 하고 영철이를 C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이걸 기호로 바꾸는 것을 치환이라 하잖아요. 이런 걸 어려운 말로 기표(記標, signifiant)라 하는데 이렇게 하면 더 어려워지고…

하나의 문자 A, B, C로 해도 되고 더 치환을 확실히 하는 것은 숫자로 하는 거예요. 철수를 ①로 하고 영희를 ②로 하고 영철을 ③으로 한다면 여기서는 철수, 영희, 영철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세 사람이 있어요. 세 사람이 여기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불만이 철수의 개인적인 자존감 같은 건 찾을 수 없죠. 영희의 자존감, 영철이의 자존감은 여기선 거부당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말씀을 치환하라는 겁니다. 치환해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인간의 구조는 말씀의 구조로 치환]되죠. 말씀의 구조로 치환되는 겁니다. 인간의 구조가 뭐가 이렇게 말썽이고 문제가 되느냐? 인간의 구조가 유지되어버리면 여기서 사적인 분류를 시도해요. 사적인 분류. 분류 또는 분간. 내가 내 주변에 있는 상황들에 대해 분류를 시도한다니까요. 너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너는 나한테 이익인 사람, 나한테 손해인 사람, 나한테 필요한 사람, 나한테 쓸데없는 사람. 자꾸 인간이 사적인 분류를 해버리는 거예요.

사적인 분류를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한테는 이 분류가 옳다는 겁니다. 이런 사적인 분류가 나한테는, 방금 뭐라고 했어요? 옳다고 했죠. 올바르다. 자기한테는 올바른 거예요. ‘저건 나한테 해코지할 사람, 나가. 이 사람은 도와주는 자야, 이리 와.’ 분류했잖아요. 분류가 자기의 선택과 결정은 올바르다는 거예요.

문제는 이게 진리입니까? 이게 진리냐 이 말입니다. 진리가 아니죠. 그러면 이걸 뭐로 분류해야 돼요? 분류를 하되 사적인 분류를 금지시켜야 되죠. 금지해야 되죠. 사적인 분류를 금지하는 것. 사적인 분류는 이게 사적이니까 개인적인 가치를 유지하잖아요. 그 개인적인 가치가, ‘너는 왜 분류해?’ ‘나는 사람이니까 분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 라고 하겠죠.

인간이 인간임을 자각하는 그게 뭐라고요?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네가 뭔데? 이렇게 되죠. 네가 뭔데. ‘나 요한일서 볼 거야.’ 보지 마! 네가 왜 그걸 봐? 너 볼 자격 없어. 나 마태복음 읽을 거야. 그거 읽지 마! 넌 읽을 자격 없어. 왜? 보면 그걸 분류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것은… 이 인간세계, 인간세계라 했는데 제가 오늘 표현하기로는 인간구조라 했죠, 인간구조로 바꾸면 인간구조에서 하나님께서 제시한 것은 [없는 계명의 출현]이에요. 없는 계명의 출현, 이걸 주께서는 골로새서(1:26-27, 2:2, 4:3-4)나 에베소서(1:9, 3:3-6, 3:9, 5:32, 6:19)에서 고린도전서(2:7, 4:1, 14:2, 15:51)에서 ‘비밀’이라 해요. 비밀.

그래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의 근원적인 문제가 뭐냐 하면, 나는 내가 사람이라는 이 인식 자체가 이게 죄고 문제 있다는 생각을 안 가지고 나는 요한계시록 백독을 했니 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벌써 열독을 뗐니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표현하기에 이건 뭡니까? 자기의 성경 보는 행위의 뭐 막기? 돌려막기. 계속 돌려막기하는 거예요. 돌려치기 아닙니다, 돌려막기입니다.

뻔히 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경 보면 나중에 결론은 뭡니까? 나온 해석이 뭡니까? 뻔히 아는 것. 결국 뻔한 것이 시도해서 나오는 것은 뻔한 것. 뻔뻔이에요. 뻔뻔. 뻔한 것에서 출발해서 뻔한 것. ‘나 천국 가고 싶어요.’ 성경 읽어서 결론은? ‘역시 나는 천국 갔다.’ 이게 뭐에요?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일반 사람들이 교회 가서 “목사님, 저 교회 나왔으니까 천국 보내주세요.” 목사님께서 “성경말씀 이렇게 있는데 성경말씀 여기서 믿습니까?” “믿습니다.” “천국 갔네요.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봅시다.” 이게 뭡니까, 이게. 인간구조에 갇혀있는 거예요. 인간굴레에 갇혀있는 거예요. 처음부터 뭔가, 뭔가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다는 인식을 우리가 갖고 있어야 돼요.

마태복음 4장 봅시다. 4장 19절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 자, 베드로가 다른 사람을 낚을 때 뭐로 낚느냐 하는 겁니다. 말씀으로 낚는다? 아니죠. 말씀의 구조로 낚는다. 말씀의 구조로.

저는 이걸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말씀의 방사망]. 말씀에서 뻗어 나와서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촘촘한 망. 낚시가 아니라 그물. 그럼 그물은 촘촘하게 씨줄 날줄이 교차되어 있죠. 이걸 뭐라고 합니까? 그물 고(罟)죠, 그물코. 이걸 영어로 하면 node. 이 코와 나를 1대 1로 치환하고 맞교환을 해버리는 거예요.

나는 나다, 가 아니라 어떤 말씀이 나를 생산하고 구성하느냐를 보는 거예요.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어느 말씀이 나로 하여금 지금의 나로 표출되게 했는가? 어떤 말씀이 나를 하나의 인간존재로서 생산하게 만들었는가? 왜 그러느냐 하면 말씀은 운동력이 있으니까. 활동력이 있거든요.

말씀을 익혀서 말씀을 배워서 내가 구원받겠다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돌려막기에요. 자기 속이는 거죠. A에서 B, B에서 C, C에서 D, D에서 A. 평생을 교회 다니면서 말씀 연구해봐야 그것은 자기구조죠. 말씀의 구조가 아니고 자기구조입니다.

내가 나를 자각하기 위해서 말씀을 수단으로 도용한 거예요. 수단과 목적도 구분 못합니다. 평생을 가도 수단과 목적을 구분 못하죠. 인간이 수단이 되어야 될 텐데, 말씀이 수단이 되고 자기가 목적이 돼버린 거예요. 뭐에요, 그게? 장난친 거죠. 말씀 가지고 장난친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우리가 말씀 돌려막기를 한다는데 좀 하면 어떻습니까? 마음의 위로만 된다면 그거 좀 하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거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장난입니까? 죽기 위해서 말씀 보면 제가 이해하겠어요. 그게 아니고 살기 위해서 말씀 보니까 문제가 된 거예요.

예수님은 죽기위해서 말씀을 봤잖아요.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시켰잖아요. 예수님과 달라도 너~~~무 다른 거예요. 너무. 가는 방향도 다르고. 그걸 가지고 갈 길이 달랐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갈 길이 다른 거예요, 갈 길이. 방향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성경공부해주고 성경 봐주는 것이 뭐 아주 큰 유세에요, 유세. 큰 행세를 하고 있는 줄 알아요.

문제가 뭐냐 하면, 무슨 수로 우리가 자신의 구조에서 말씀구조로 빠져나갈 수 있느냐? 이게 제일 큰 난관이죠. 성경에선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없는 계명의 출현, 이게 비밀이란 말이죠. 말씀의 방사망은 비밀이에요.

그 누구도 말씀에 대해서 아는 바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독단적인 성취에 의해서 깔아놓은 방사망이기 때문에 촘촘한 말씀의 그물망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몰랐어요.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른 세계로 비밀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라인(line)으로 표현합니다. [주님은 어디 계신가? 라인 뒤에 계신다.] 라인은 누가 만들었는가? 인간이 만들었죠. 예수님을 추방했으니까요. 핍박하고 추방했으니까. 저리 가, 하고 밀어냈으니까. 인간이 밀어내서 형성된 그 경계선, 그 너머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걸 베드로전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해요. “건축자들의 버린 돌” (벧전 2:7). 건축자들이 버려버린 돌. 건축자들은 인간들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행위를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 건축자들의 건축행위에 대해서 다른 인간들은 동조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동조함으로써 건축자들의 행위는 인간들에게 인정받았어요. 인간들에게 인정받는 범주, 범위, 그 라인 뒤에 버린 돌로 누가 계시다? 예수님이 계시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비밀이 어디 있는지 가고 싶습니다.’ 하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자기가 추방해놓고 뭘 이제 와서 딴 소리, 헛소리하고 있어요. 뭘 보고 싶어요? 네가 보고 싶으면 쫓아냈겠어요?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직장에서 나의 생활공간에서 우리는 걸핏하면 예수님을 나의 라인 밖으로 추방시켜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돌려막기,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자각하는 데에 방해되는 것을 인간은 모조리 처단하기 때문에 그래요.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죠.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자기가 시도하는 그 앞길을 막아서면 공격하거나 죽이거나 파괴시키는 거예요.

심지어 두 살 먹은 아이도 아빠, 엄마가 눈에 뵈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노리고 손에 쥔 초콜릿을 먹는데 그걸 저지한다? 앙, 하고 물어버리죠. 엄마 손인지 아빠 손인지 그걸 구분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 일을 방해하는 존재, 거기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공격 성향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애들을 키우면서 한 열댓 번 물려봐야, 아~ 자식 키웠다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엄마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손이 두 개가 있어요. 물린 손 말고 다른 한쪽 손이 애 등짝을 때려버리죠. 이게 인간세계 구조에 남아있는 훈육방법이에요. 이걸 교육이라고 하는 거예요. 너는 어디까지나 인간세계의 사람으로 남아야 돼. 그러려면 기존의 인간구조에 네가 편입되어야 되고 거기에 충실해야 되고 종속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 표현에 대해서 요한복음 19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인간을 얼마나 놀리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을 결정적으로 놀리는 방법은 요한복음 19장 21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패에 이 글자가 쓰였어요. 요한복음 19장 21절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어요. 유대인들이 앞에 뭘 하나 더 붙여야 된다고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자칭’입니다. 21절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자칭.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으로 그냥 갔어요. 그냥 가자, 유대인의 왕으로.

자, 유대인들, 인간들 구조는 자칭이라 합니다, 자칭. 자칭을 더 어려운 말로 하면 참칭(僭稱, 분수에 넘치는 칭호를 스스로 이름)이라 하는 거예요. 참칭이라 하는 것은 거짓되면서 진실인 것처럼 위장하는 걸 참칭한다 하죠. 쉽게 말해서 이건 도용(盜用)한다는 말이죠, 도용.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말은 메시아를 뜻해요. 그러면 지금 기존 유대인이라는 나라의 인간구조에서는 메시아의 올 자리가 비어있거든요. 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의 주장은 ‘기다릴 필요 없이 여기 내가 왔다’ 가 돼요. 왔다.

내가 왔다 함으로써 이 유대인의 인간구조 안에 있는 이 중에서 IQ가 190이고 인격이 훌륭하고 성격 좋고 아침에 일어나서 남의 집 앞까지 쓸어주는 그러한, 성실하고 자비하고 인자가 많고 동정심이 많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이 자체 모두가 부정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자체가. 이런 것들이.

유대인들이 혹(인간구조의 실선에 추가적으로 붙어있는 점선으로 된)처럼 메시아를 기다리잖아요. 제 말 한번 잘 들어보세요. 메시아를 기다린다고요. 그럼 그들은 눈에 보이는 실선과 눈에 보이지 않는 메시아와 그들 마음속으로 결합이 되어 있어요. 결합이 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자리에 유대인의 왕으로 왔잖아요. 오니까 메시아를 떨쳐낸 거예요. 자칭, 어디 참칭해서 메시아도 아니면서 메시아인척 해?

쫓아냈다는 말은 메시아만 받겠다는 말이 아니고 메시아와 연결된 이 전체가 전부다 가짜란 뜻이에요. 누구 보기에? 예수님보기에 가짜가 되는 거예요, 이거는. 아무리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이건 소용없는 거예요. 구조상 이 인간구조 전체가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구조에서 대립관계에 있는 겁니다.

제가 글을 쓸 테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보세요. 두 개의 글을 한번 비교해보겠습니다. 첫째,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먹을 것 입을 것 말이죠,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게 첫 번째 문장입니다. 두 번째는, 7남매 가운데 제가 둘째 딸입니다. 자, 두 문장의 차이점은?

두 번째 문장이 그렇게 어려워요, 이 문장이? 이게 편하죠? 저 7남매 가운데 둘째 딸입니다. 이게 막 분노를 유발해요, 이게? 화를 막 돋우게 만듭니까? 뭐? 7남매 중 둘째 딸이라고? 당장 하옥하라! 이렇게 되는 겁니까? 아니죠. 왜 이 말에 격노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겁니까? 왜 분노하지 않아요?

인간구조 안에 들어 있잖아요, 인간구조 안에. 건축자들이 버릴 돌이 아니라고요, 이거는. 우리는 남들과 소통이 편하게 유지될 수 있는 그런 말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져 있어요. 친근하게 녹아져 있다고요. 이런 2번 말을 하면서 분노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친구가 듣고 있다가 너 둘째 딸 아니고 셋째 딸인데? 아~ 맞다. 잘못됐다, 잘못됐다. 내가 나이 많아서 착각했나봐. 수정, 내가 셋째 딸입니다. 나이 들면 다 그러네요. 셋째 딸로 수정했어요. 이게 뭡니까? 아까 인간은 자기 행위를 무슨 막기? 돌려막기가 가능해요, 돌려막기가. 그 사람은 자기가 셋째 딸인데 둘째 딸로 잠시 착각했다. 그럼 이거는 반성이고 회개가 되는 거예요. 반성하지 뭐. 회개하면 되죠.

그런데 첫 번째는? 첫 번째는 인간 2번에서 보면 이건 도박이에요! 이거 도박입니다. 그 나라 의를 구했는데 먹을 거 입을 거 안 주면 누구만 손해 보기 때문에? 나만 손해 보죠. 나만. 아니, 내기할 걸 내기해야지. 이 터무니없는 걸 어떻게 내기해요?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1번이 2번에 섞인다, 아니면 추방됐다? 몇 번입니까? 추방되죠. 말씀의 구조는 인간구조에 의해 추방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은 ‘없는 계명의 세계’ 또는 생산. 없는 계명의 생산입니다. 인간세계에는 있어도 추방하니까 없는 게 되는 겁니다. 인간세계에는 말씀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1번이 2번에 들어오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지금 우리가 공부해야 될 것은, 2번이 1번으로 들어가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2번이 1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고 2번에 1번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2번에 1번을 집어넣으려면 2번은 어떻게 하느냐? 그 나라 의를 구하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주더라 하는 이러한 사례들을 돌려막기 해야 되겠죠. 이제 여기서 구라가 시작됩니다. 간증집회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7남매 둘째 딸이 아주 넉넉하게 살아가요.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게 집에 넘쳐가지고 처리 곤란해요.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그 나라 의를 구하면 먹는 것, 입는 것을 주신다 하면 이게 막 땡깁니까? 아, 그런 수가 있네. 그렇게 먹고 사는 방식도 있네, 하고 막 땡깁니까, 아니면 귀찮습니까? 아휴, 알았어요. 알았어요. 집에 지금 있는 것도 천지여서 다 먹지도 못하는데… 알았어요. 먹는 거 입는 거 지금 홈쇼핑해서 원피스 이만큼 쌓여가지고 그것도 지금 다 못 입고 누구 나눠줄 판인데… 집이 세 채나 되가지고 돌려막기로 자려고 해도 관리비가 막 나간다. 지금 돈 많은 사람한테는 전혀 먹히질 않는 거예요.

그럼 이건 어떨 때 먹히느냐 하면 거지들, 빌어먹고 있는 인간들. 그것도 관심사가 그 나라 의가 아니에요. 일단 먹는 것, 입는 것 챙겨주신다면 뭔들 못하리. Love is 뭔들. 먹을 것 준다면 뭔들 못하리, 이래가지고 찾아온 사람들이에요. 내 병만 고쳐준다면 예수가 아니고 뭐라도 다 찾죠. 자기 병만 고쳐준다면. 이런 식이에요.

중요한 것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할 때 그 낚는 게 뭐냐 하면 말씀의 구조로 낚아요. 말씀의 그물망입니다. 말씀의 그물망은 인간구조와 이렇게 연결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다. (마 9:17) 이게 세트가 돼서 와야 돼요. 포도주만 있으면 담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새 포도주는 거기에 합한 새 부대까지 만들어야 새 포도주가 빛이 나게 되어 있어요. 가치가 윤곽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오려면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우리의 인간구조는 존재하면 안 되겠죠. 그럼 우리가 말씀구조의 일부가 되어야겠죠. 말씀구조의 일부. 글쎄, 그걸 어떻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말은 쉬운데. 우리가 인간구조 포기하고 말씀구조의 일부로 그물코, node, 말씀구조의 일부로 어떻게 그게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비밀인데요. 그게 될 수가 없는데요. 말씀과 나를 교체하면 참 좋겠죠. 교체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 교체하는 방법, 있습니다. 오늘 강의 여기서 끝낼까.

[유한과 무한의 만남], 다시 말해서 말씀세계 무한에는 유한한 것, 제한된 것, 한계 있는 것, 자기폐쇄구조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 유한성, 그 유한성과 접속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연결고리가 마련되어 있어요. 이걸 두 자로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약.

주께서 언약가지고 유한한 우리 자기백성을 연결하게 되면 연결된 지 안 된지를 확인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연결되고 싶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진짜 연결됐구나를 어떻게 아느냐? [성도는 새로운 규칙에 눈을 뜨게 된다.]

바로 이 점입니다. 새로운 규칙에 눈을 뜨면 돼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 말고 다른 규칙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돼요.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그런 건 몰라도 괜찮아요. 하여튼 새로운 규칙을 발견하고… 이제 한번 정리해봅시다.

성도가 됐으면 [1번, 새로운 규칙에 눈을 뜨게 되고 2번, 그 새로운 규칙이 왜 인간으로부터 저항당했느냐. 거부당했느냐.] 왜 인간으로부터 거부당했는지. 이 두 개의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그 사람은 새로운 규칙에 들어온 이미 합류된 성도이고 천국백성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규칙도 중요하지만 그 규칙이 인간으로부터 왜 저항과 거부를 당했는지, 이유가 있어야 되겠죠. 그 이유가 뭐냐? 바로 인간의 기대와 의지 때문에. 인간의 기대와 의지로 인하여 새로운 규칙이 공격을 받았어요.

인간의 기대와 의지라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자각하고자 하는 본능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나이고 싶다. 나는 인간이고 싶다. 그게 그냥 ‘인간이고 싶다’로 끝나는 게 아니고 나는 인간, 내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뭘 하면 되지? 라고 뭔가 시도를 한 거예요. 시도, 기대, 의지.

이것을 종교적으로 한 자들이 바로 유대 지도자에요. 유대지도자와 유대나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 의와 기대와 의지를 거기다가 뿜어넣는 거예요. 이 뿜어넣은 결과가 뭐냐 하면 새로운 규칙을 거부하게 만들고 저항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그렇지만 여기 누가 포함되느냐 하면 열두 제자들도 여기에 포함이 돼요. 열두 제자에 성령이 오니까 어떻게 되었어요? 눈을 떴죠.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눈을 뜬 거예요. 눈을 떠보니까 본인이 하는 짓거리가 비로소 파악이 된 거예요. 주님 중심이어야 될 이 새로운 규칙과 새로운 세계에 겁도 없이 내가 주인공처럼 설쳐댔다는 그 회한, 후회가 막 밀려오는 거예요. 그럴 때, 나는 인간도 아니다. 정말 하나님이 만들었다 하는 자체가 부끄럽다. 나는 인간도 아니다.

그러니까 새 부대가 뭐냐 하면 옛 부대에서 새 부대로 바뀌었는데 그 바뀐 게 옛 부대에 주님께서 피해 본, 인간으로부터 맞아죽었죠, 얻어맞아 죽었죠, 그 십자가 죽음사건이 여기 옛 부대에 묻히게 되면 그 사람은 새 부대가 되는 겁니다. 참 쉽죠? 굉장히 쉬워요. 뭐 돈을 교회에 갖다 바치란 말이 아니고 선교하란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가 의미 있게 나한테 묻히면 되는 거예요.

문둥병자가 치료되었을 때 그 제물이 뭐냐 하면 날갯죽지에 죽어버린 동료 새의 피가 창공을 향해 날아가는 자유를 만끽하는 새에 그 피가 묻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새가 날아가면서 ‘나는 살았다’가 아니에요. 피가 산 거예요. 언약이 살아있는 거죠.

예수님의 죽음이 한번 사건으로 종결된 게 아니고 그 죽음이 무한의 연결망을 자기 새로운 새 피조물을 통해서 확장되는 겁니다. 피 묻히고 네 마음껏 돌아다니란 말이죠, 피 묻히고. 다 이루었다는, 그 다 이루었음의 흔적을 지니고 너 하고 싶은 멋대로 하라. 너 하고 싶은 멋대로. 네 행위에 구애받지 말고. 냉면을 먹든지 물만두를 먹든지. 체해서 활명수를 잡숫든지. 하여튼. 그냥 멋대로 해. 피 묻히고 멋대로 해.

이제 서서히 요한일서 2장이 감 오십니까? 유한과 무한이 어떻게 만나느냐. 무한을 어떻게 만나는가. 방금 제 이야기가 뭐냐 하면, 여기 피가 묻어있죠. 이게 유한의 끝, 유한의 마감, 유한의 경계선에서 주님은 주님 피로써 우리를 마중 나오시는 겁니다. 피로써. 새 언약이죠. 내 살과 내 피로써 마중 나오는 겁니다.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레위기에 17장에 보면 피채 먹지 말라 했어요. 피가 묻은 채로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 율법에 있어요. 레위기 17장 10절, 뭐든지 먹을 때 피채 먹지 말라.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보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 했어요. 이것은 노골적으로 레위기 17장 10절을, 율법을 위반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 인물 못났다고 미워하는 게 아니에요. 귀담아 들어요. 저 사람이 율법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모세가 단독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율법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메시아 될 후보감으로 내가 넣어줄게, 라는 만발의 마음 준비가 되어 있어요. 말씀대로 한다면 왜 당신을 내칠까요? 그렇지 않고 합력하여 그 나라 의를 위해서 노력할 가능성이 그러한 마음자세가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위반한 정도가 아니고 도발한 정도에요. 이거는 인간이 생각하는 율법체제 전체에 대해서 발라버리는 겁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고? 그러면 영생이 있다고?

그러니까 무한이 유한을 찾아와서 무슨 이야기했어요? 피 이야기했죠. 피 이야기하니까 그 많던 제자들이 다 떠나가고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오병이어 몇 명 먹었어요? 남자만 삼천 명이지만 삼천 명 다 따라온 건 아니고 한 백 명 따라왔다 합시다. 예수님이 백 명보고 이야기하고 글자 쓴 거예요. 뒤에 있는 줄 알고. “여러분, 내 살과 내 피를 마시고…” 뒤돌아보니까 아무도 없어요. 다 갔어요. 뭐에요?

뒤에 보니까 열두 제자만 있는 거예요. 열두 제자만 남았다는 말은 다 갔다는 뜻이에요. 이 사람들은 안 간 이유가 예수님 피 이야기 들으려고 온 게 아니고 예수님이 선택해서 들러붙어있는 거예요.

열두 제자는 남아있는 인간의 유한의 한계점을 보여야 될 임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옛 부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해서 예수님 증거해야 될 그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해서 열두 제자는 없는 계명 생산에 대해서 증언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인간세계에서 철수해갔습니다. 아예 없습니다. 계명 없으니까 지킬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지킬 게 있는 것은 뭐냐? 자기가 한 자기 행위를 거두는 걸 가지고 인간들은 그걸 말씀 지켰다고 우겨대는 그 세계, 인간구조만 남아있어요. 전부다 소용없는 짓거리만 하는 거예요. 전체가 다. 인간세계 전체 다.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 50년, 60년 신앙생활해도 아무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 쪽에서 철수해나갔습니다. 철수했죠. 철수하면 그걸로 바이바이 끝났네요. 피 이야기하니까 삐쳐가지고 제자들 다 가버렸어요. 열두 제자도 가버리고 따라온 제자들도 가버렸어요. 따라온 사람들을 제자들이라 했거든요.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돌아보니 다 갔어요.

그럼 남아있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이죠. 그럼 예수님이라도 이뤄야죠. 예수님 본인이 아버지의 계명을 이뤄야죠. 그럼 이 계명은 단독으로 성취시킨 계명이 되는 겁니다. 단독. 이 새 계명의 특징은 둘을 용납하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어요. 저도 지켰습니다, 가 용납 안 되는 계명. 오직 예수님만 지켰고 우리는 그냥 들러리입니다. 주의 증인이라는 뜻이죠. 우리는 그냥 들러리로 갖다 붙어있습니다, 그런 의미를 뿜어내는 계명. 그 계명만 생산된 거예요.

가라 가라 다 가라. 하지만 아버지의 뜻은 너희들 없어도 나 혼자 달성할 수 있고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있다. 그런 주님의 자신감과 실효성. 성취. 그래서 주님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드디어 누리호 성공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데에 1단계, 2단계 다 성공했어요. 자, 그 성공의 결과가 뭐냐? 그것은 10분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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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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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