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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30612a 부산강의 : [시편]59(43:2)-경악스러운 사태자유게시판시편

20230612a 부산강의 : [시편]59(43:2)-경악스러운 사태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43편 하겠습니다.

짧으니까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1~5절)

중요한 단어 열거하면 이렇습니다. “경건치 아니한 나라” 경건치 아니한 나라가 구성돼 있는데 거기에 불의한 자가 통치하고 있다. 그러면 이 신앙인은 지금 어느 나라에 있느냐 하면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있어요. 그런데 이 나라에서 고통을 당하는 겁니다. 불의한 자 때문에 고통, 압제를 당하는 거예요. 고통을 당할 때 신앙이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면 제단에 가요. 하나님의 제단에 갑니다.

그러면 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경건치 아니한 나라’ 따로 ‘제단’ 따로 이렇게 되지요. 고통이기 때문에 슬픈데 제단에 가서 해결합니다. 제단에 누가 기다리고 있느냐 하면 ‘극락의 하나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극락의 하나님이 기다린다 했으니까 이건 뭐냐 하면 고정적이죠, 고정적. 고정적인 분이 제단에 있어요. 극락의 제단, 또는 거룩한 산의 성산.

이렇게 극락의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여기서 이쪽으로 가는 방향이 경건치 않은 나라에서 소속되어서 고통과 슬픔을 당하고 해결책으로 제단에 가는데 거기에 극락의 하나님이 있다. 이런 방향은 어떤 신앙인의 마음속에 불안을 초래했습니다. 그런데 이 극락의 하나님을 알고 거꾸로 이렇게, 이렇게 과정을 통해서 경건의 제단에 갔을 때 여기는 뭐냐 하면 어찌 기쁨이 돼요.

기쁨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찬송한다고 돼 있고요, 끝에. 그냥 찬송이 아니고 수금으로 찬송한다, 찬양한다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 신앙인이 내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기쁨이 기쁨 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현상이 일어나야 돼요? 불안해야 되지요, 신앙인이. 불안해야 이게 기쁨으로 찬양으로 바뀌니까요.

그런데 이 불안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나라가 선제돼야 되는가? 경건치 아니한 나라가 선제돼야 돼요. 경건치 않은 나라가 있어줘야 신앙인에게는 해결책이 뭐냐 하면 고통의 해결책이 제단을 찾는 거예요. 성산을 찾는 겁니다. 이게 신앙인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제단을 찾아요.

제단을 찾으면 제단에서 뭘 얻느냐? 고정된 하나님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마치 이거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어떤 사나이가 도시에 가서 돈을 흥청망청 막 날릴 때 주변의 친구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쟤 끝났어. 돈 떨어지면 끝나는 거야.”라고 누구나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그 돈 쓰는 사나이가 어느 날 돈 떨어지고 돼지 치는 데 아르바이트 하다가 그것도 너무 신세가 서글퍼서 어느 날 사라졌어요.

어디로 사라졌겠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서 어디로 사라졌지요? 아버지 집으로 가지요. 그게 바로 탕자 이야기라는 겁니다. 아버지 집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 집은 이사 갔습니까, 고정됐습니까? 아버지의 집이 고정돼 있어요. 이사를 간 게 아니고 그 아버지 집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 탕자는 뭐냐 하면 원래 있던 자기 자리를 벗어나서 다시 아버지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 탕자 비유잖아요. 그럼 그런 이야기라면 원래 아버지 집에서 방금 잘 이해하셨겠지요.

그럼 탕자 비유 내용을 다시 하게 되면, 아버지 집에는 두 종류의 아들이 살고 있다는 뜻이 돼요. 하나는 뭐냐 하면 마음에 불안애서 집 나가고 다시 돌아오면서 전에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도저히 상상도 못하고 생각도 못한 찬송과 기쁨이 발생된 채로 돌아온 아들이 있고요. 집을 나가야 찬송이 되고 기쁨이 돼요, 집을 나가야. 여러분 집을 안 나가봤잖아요. 질문 자체가 문제가 있다. 문제가 있는 질문이에요. 여러분 집을 안 나갔는지, 아니면 아예 아버지 집에 애초부터 없었는지 그건 모르겠고요.

집을 나가야 찬송과 기쁨이 되는데 또 한 아들은 뭐냐? 집을 나갈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집을 나가지 않으니까 무엇이 생성되지 않는가? 찬송과 기쁨이 생성되지 않고 아버지의 고정됨의 의미를 그 큰아들한테는 이 고정이란 말이 뭔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나가봐야 아는데 안 나가봤기 때문이 이 고정이란 것이 뭔지 모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큰아들의 문제는 뭐냐? 아버지 집을 집이란 사실을 없애버리고 그게 누구 집이냐 하면 나의 집이 돼버린 거예요.

예수님께선 아버지 집에 서로 차이 나는 두 종류의 아들을 설정했으니까요. 나의 집을, 탕자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느냐? 여기서부터 뭐하느냐 하면 경건치 아니한 나라를 설명해야 되고, 하나님 보시기에 불의한 자가 어떤 자냐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자, 이걸 아셨으니까 불의한 자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징후를 또는 활동을 지우고 자기 PR, 자기 활동에 주목하는 자, 이게 불의한 자에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지우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하나님이 죽었고 하나님이 없다고 확정되었을 때 그다음에 나타날 인간의 행동은 어떤 행동이 나올까요? 하나님이 없고 아예 하나님이 애초부터 없었고 사라졌다고,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다고 그게 확신이 들 때 나오는 행동과 말은 그 초점이, 그 성향이 어떤 성향이겠어요? 자기 PR, 자기 자랑이 나오겠지요. 자기한테 관심 두겠지요.

시편 43편을 설명하기 위해서 현실이라는 게 있는데 현실은 아버지 집에 이렇게 집 나가서 기쁨으로 돌아온 자식과 원래부터 나는 아버지 집은 없고, 아버지 집이 있든 없든 내가 여기 기거하는 자기 집으로 여기는 두 종류의 완벽하게 차이 나는 둘 사이에 서로 소통이 될 일은 없어요. 완벽하게 차이 나는 두 종류의 아들을 설정하는 것, 왜 이게 자기 자랑하고 불의한 자 있어야 되느냐? 그래야 시편 43편이 현실화되기 때문에. 시편 43편이 현실화되려면 불의한 자가 있어줘야 돼요. 경건치 않은 나라가 있어줘야 된다고요.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니까 불의한 나라가, 경건치 않은 나라가 필수적으로 있어줘야 기쁨의 찬송으로 천국 간다는 사실을 그걸 놓쳐버리고 자기 편한 데로 자기가 편하게 사는데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어요. 경건치 않은 나라가 분명히 있어줘야 되는데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고 행복만 생각하니까 이 세상 자체가 시편 43편 데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시편 43편을 봐야 알지요. 사람이 성경을 안 보고도 자기를 안다고 우기는 거예요. 이건 아시니까 다 지웁니다. 칠판의 면적상.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강의가 전체적으로 여러분 이걸 알고 강의를 하겠습니다. 경건치 않은 나라부터 분명히 들어갑니다. 주님을 버린 대가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해요. 주님을 버린 대가로 나를 찾으려합니다. 어떤 나라가? 경건치 않은 나라에서. 주님을 버린 대가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소홀히 한 대가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뭐냐? 그때 얻어진 나는 어떠한 나냐, 에요. 내가 얻을 수 있는 나는 어떠한 나냐?

지금 이 사람은 뭐를 놓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놓친 게 아니에요. 뭘 놓쳤느냐 하면 경건치 않은 나라를 놓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버린 게 아니고 이 세상이 지옥이란 사실을 놓치고 있는 거예요. 지옥에서 출세해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건 뭐냐? 지옥, 천국은 하나님에서 나온 아이디어지 내가 만든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버리면 뭐도 날아간다? 지옥, 천국도 같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없애고 지옥, 천국을 없앰으로서 도대체 뭘 얻고자 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뭘 얻고자 하는지를 인간들은 불행하게도 몰라요. 에드거 앨런 포라는 미국 작가가 쓴 단편소설 가 있습니다. 전에 여기서 잠시 소개한 적이 있는데 자기를 찾으려하다 보니 신경 쓸 수도 없지요.

가 뭐냐 하면 이런 내용이에요. 왕비가 혼자 있는데 왕이 봐선 안 되는 비밀스런 편지 같은 걸 보고 있는데 그때 왕과 장관이 한꺼번에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왕비가 놀라서 허겁지겁 아무데나 툭 버리잖아요. 편지 읽다가 들어오니까 너무 놀라서 혹시 내가 읽는 편지에 남편 되는 왕이 주목할까 싶어서 난 몰라, 난 관심 없어, 하고 툭 던져놨단 말이죠. 그걸 장관이 간파해서 자기에게 있는 편지와 그 편지를 바꿔치기해버려요. 바꿔치기하니까 왕비가 불안하게 된 거예요. 뭔가 고통이 된 겁니다.

인간의 고통은 뭐냐 하면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감추는데 실패할 때 고통스러워요.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 주님이 귀하게 여기는 건 안중에 없어요. 내게 귀한 것을 내가 제대로 감추지 못할 때 우리는 고통이 찾아오는 겁니다.

예를 들면 회사 다니는 아가씨들이 아침에 버스 탈 때 보면 방금 머리 감았어. 축축한 머리로 버스 타고나서 화장하고, 늦잠 자서 출근시간 늦었다 이 말이거든요. 왜 아침에 출근할 때 머리를 감을까? 그거는 인간은 수치스러운 것은 감추고, 수치스러움을 감췄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돋보이고 싶은 부분을 빛을 내는 거예요. 그게 빛이 나는 사람이에요. 임영웅이. 빛을 내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고통스러우냐 하면 내가 감추고 싶은 그것을 그러니까 일찍 일어나서 말리고 오지 왜 회사 들어와서 하느냐고 회사 상사가 이야기한다면 지금 회사 상사가 뭐를 훅 치고 들어왔느냐 하면 내가 돋보이는 것을 통해서 감추고 싶은 것을, 오늘 늦잠 잤다는 것을 감추고 싶어 것을 감추는데 그 사람이 방해 놓는 거예요.

여기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만 고통에서 인간의 고통이 있어요. 인간의 슬픔이 있다고요. 인간의 고통은 어디서 나오느냐? 이게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서 제공된 것이라는 것이 시편 43편에서 언급하는 겁니다. 네가 평소에 불행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고 아픔을 느끼는 것은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네가 속해 있는 나라 자체가 불의하고 경건치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거기서 네가 배운 것은 그것밖에 배우지 않았다는 거예요.

나의 수치를 어떻게 하면 교묘하게 감출까? 감춘다는 말은 고정적이 아니고 늘 들킬 가능성이 있는 심적인 불안을 조성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네가 속에서 어떻게 불안하여 하는고. 참 이게 어려운 게요 이 세상은, 어렵지만 여러분 감당해야 돼요.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제단 있다는 말은, 아까 제단을 고정적이라 했지요. 그러면 이 세상이 지옥 간다는 것은 고정된 제단에 의해서 결정된 사항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지옥 가는 것은 확정된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 확정된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의 제단을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걸 확정됐다, 고정됐다고 생각하지 않고 뭔가 희망과 꿈과 기대를 자꾸 만들어내니까 나중에 낙이 있을 것이라는 비 고정적이니까 여기서 뭐냐 하면 꿈 때문에 불안감이 생기는 거예요. 확정되고 고정적이지 않는 자꾸 뭔가 시도하면 다른 걸로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자체가, 기대 갖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 기대 갖는 순간 내가 불안해서 못 살아요. “나, 이렇게 될 자는 아닌데…….”

그만큼 제단이 고정됐다는 말이 중요한 말이에요. 제단이 고정되면 짝을 이루는 이 세상은 경건치 않은 세상은 고정적으로 멸망하게 돼 있습니다. 한쪽이 고정이 되면 이쪽이 고정이 돼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지요.

그래서 왕비가 불안하니까 그다음에 뭔가 대책이 나오지요. 자기가 감추고 싶은 것을 확실하게 감추기 위해서는 빨리 도둑을 맞았으니까 그 편지를 가져간 장관의 집에서 자기 편지를 찾기 위해서 경찰 복장해서 장관 집에 가서 편지 찾으려했어요. 분명히 장관은 중요한 편지라는 감을 잡았기 때문에 분명히 깊숙한 곳에 했을 거라고 샅샅이 뒤져도 도대체 그 편지를 찾을 수 없어요. 그래서 안 돼서 뒤팡이라는 사설탐정에게 맡겼어요, 왕비가.

사설탐정은 머리가 좋아서 거리에 소동을 피워서 장관이 그걸 보는 사이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편지를 하나 갖고 온 거예요. 그게 진짜에요. 아무렇게나 놓여있다는 말은 숨김의 대상이 안 되는 거예요. 숨김의 안 되는 대상이 안 된다는 사실을 가지고 진짜 숨길 곳을 숨김의 대상이 아닌 것에 숨겨버린 거예요. 어렵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편지의 내용이 뭔지를 몰라요. 모르는데 이 세상의 주인공은 편지다. 인간은 자꾸 편지를,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편지가 위치하는 데 따라서 내가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는 것. 인간은 경건의 세계에서 이 편지가 중요하다고 소문난 여론에 의해서 풍문에 의해서 소문난 것들을 인간들은 자꾸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 편지가 저기 있다고 하면 우르르, 여기 있다 하면 우르르, 여기 명품 떴다 하면 우르르, 저기 고급차 있다고 하면 우르르.

뭔가 뭐가 중요한지를 확정되지 않은 채 거기에 뜨내기처럼 계속해서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 왜 중요하냐? 내 수치심을 커버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제대로 완벽하게 내가 대단한 존재란 걸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찾아 헤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아무도 몰라요. 편지 내용은 아무도 몰라요. 편지 가는 곳에 전부 다 우르르 다 따라가고 있어요.

사설탐정 고용돼 있고, 장관도 거기에 대해서 권세 행사하고 있고, 경찰국장은 거기에 따라서 같이 덩달아 열심히 찾고. 도대체 인간세계는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사셨습니까? 누가 카더라는 이야기는 있는데 그게 뭔지를 본 사람도 없고, 이것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걸 본 사람도 없고요, 그걸 갖고 있는 사람도 없고요, 떠도는 풍문에 의해서 헤매고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세계다? 경건치 않은 세계에요. 하나님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게 떠도는 소문이거든요.

누구 천당 가봤어요? 왜 천국을 가려고 하는가? 성경을 봐야, 봐도 모르지만. 성경에 보면 나의 수치를 드러내놓기 위함이 아니고 감추기 위함으로 천국 가는 거예요. 드러내놓는 게 아니고 감추기 위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어렵다면, 이 한 마디로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왜 망가지려 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복음적으로 이 땅에 왔을 때 경건치 않은 세계에 예수님이 망가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본인은 그걸 믿습니다, 하면서 왜 망가지지 않으려고 합니까? 망가지는 대신 예수님 믿음으로써 안 망가지려고 교회 나오는 거예요. 이건 뭐 십자가 안 믿는 사람이 모독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안다는 자가 십자가를 모독하고 있어요. 왜 망가지지 않으려고 하는가? 이제 그 이유를 본문을 통해서 풀어나가야 되겠지요.

그 이유는 딱 하나 있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의심하되 나는 나에 대해서 의심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슬픔이 있고 고통이 왔을 때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원을 찾든지 기도를 간절히 해요.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기도원에 간다는 것은 남한테는 속여요.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도한다고 속입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뭐냐 하면 나를 의심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도와주는지, 안 주는지 시험하고 의심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구약에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기도하느냐 하면 다른 나라가 와서 망가뜨릴 때 기도해요. 배부를 땐 기도 안 해요. 왜? 자기가 행복하고 넉넉하니까 자기 의심에 위기가 안 찾아오니까 하나님을 도입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뭔가 적들이 오게 되면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안 했어요. 적들이 올 때는 자기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요. 뇌물을 바치든지 곡물을 갖다 바치든지 이렇게 해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하다 안 되면 마지막에 하나님 도와주이소,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재미있는 사실은 뭐냐 하면 누가 주변의 나라를 공격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주변에 셰퍼드 열 몇 마리 풀어놨거든요. 이방민족을 확 풀어놨어요. 그래서 “물어, 물어” 이러면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 시키는 대로 이방민족은 이스라엘을 확 물어버려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뭘 느낍니까? 슬픔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겠지요.

그 고통이 뭐냐? 언약적 고통입니다. 나의 고통이 아니고 언약적 고통, 장차오실 예수님의 고통을 체험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언약이 실시되는 현상, 그 순간이에요. 하나님의 십자가가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나의 고통과 겸비해서 주님의 고통을 아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왜 고통이냐, 왜 아픔이냐? 딴 건 다 의심해도 내 몸이 아프고 내 마음에 불안한 것은 내가 속일 수가 없어요. 내가 유발한 사태가 아니거든요. 내가 만든 사태가 아니에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들의 방법은 뭐냐? 아까 말씀드렸지요. 자기의 고통이 왔으니까 굉장히 나는 나를 의심하지 않아요. 절대자에요. 의심하지 않는데 뭔가 흠집이 났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아픔만큼 보상 기대하는 거예요. 코로나 끝나고 난 뒤에 고급명품 쇼핑이 잘 됐지요. 왜? 보복 여행, 보복 쇼핑이 일어난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해가 쉬울 건데 어떤 미국의 유복한 가정에서 돈이 많은 가정에서 한국 사람인데 캐나다로 미국으로 자기 아들을 유학을 보냈어요. 엄마가 사업을 크게 했어요. 그래서 한 열여섯 살 때 유학을 가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 육칠 년 동안 돈이 안 왔어요. 왜냐하면 유학 보내고 난 뒤에 엄마 사업이 망해버렸어요. 망했으니까 자기는 빚쟁이한테 쫓기지요. 화장실도 없는 단칸방에 살면서 무슨 돈을 보냅니까?

얘는 청소년 때 자살하려했어요. 얘가 자살할 직전에 가만 생각해보니까 “내가 지금 죽어버리면 그동안 몇 년 동안 돈을 보내준 엄마가 얼마나 실망하겠는가? 사는 보람이 없지 않느냐.” 그래서 악착 같이 아르바이트 해서 거기서 버티고, 버티고 하는 거예요. 결국은 지가 버티면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보니까 식당 아르바이트 하는데 카운트테너의 노래가 들려와서, 내가 저 가수처럼 되련다. 해서 팁 받은 걸로 열심히 공부했더니만 나중에 음악대학 지원했는데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오라했어요. 그래서 성공해서 왔는데 엄마를 7년 동안 못 봤으니까 김포공항에서 엄마는 하염없이 그냥 울어요. 네가 이렇게 성공해서 오다니 대회 나가서 상을 타고.

자, 여기서 봅시다. 자식 키운 내가 이렇게 고생한 보람 있다 했거든요. 여기서 여러분 뭘 놓쳤는지 보세요. 사업을 잘했다. 그런데 그다음에 사업이 망했다 했지요. 지금 초점이 뭐냐 하면 내가 사업이 망해서 힘들게 살아도 자식은 번듯하게 잘 자라서 고맙다, 이거잖아요.

여기서 빠트린 게 뭐냐 하면 사업이 잘 되다가 파산함으로써 빚쟁이들이 연쇄적으로 빚쟁이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 마음의 고통을 피해를 입었는지 여기 이 이야기에 등장합니까, 등장하지 않습니까? 다 빠졌지요. 세상은 그런 거예요. 지 고생한 것, 지 성공한 것, 어려운 가운데서 극복한 것 그런 이야기만 하지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피해본 이야기는 완전히 다 날아가 버려요. 방금 한 이야기가 누구냐 하면 카운트테너의 이동규란 사람의 이야기에요. 잘 모르지요. 찾아보면 나와요. 비슷한 이야기를 또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머리 부분으로 국밥 만드는 것 하는데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회사는 네 시간 동안 고우지 않습니다. 열두 시간 동안 고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48시간 고아서, 도가니탕이에요. 우리는 48시간 고아서 도가니탕을 만들어낸다 했어요. 자, 여러분 인간이 하는 일이 이거에요. 48시간 고았으니까 이거는 괜찮은 품질 좋은 도가니탕이 되지요.

이것에 대해서 자기에 대해서 의심합니까, 의심하지 않습니까? 자기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지요. 이런 자기 PR, 자기를 의심치 않는 세계를 무슨 세계라고요? 경건치 않은 세계, 다른 말로 불의한 자가 되는. 이 사람 이거 48시간 고아서 망하려고 하는 것 아니잖아요. 어쨌든 간에 내가 안 망가는 쪽이 어느 쪽인지 탐구하고 연구하는 게 경건치 않은 세계에요.

자, 그러면 여기에 43편에 우리가 봐야 될 것은 1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라 했으니까 경건치 아니한 나라를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그룹으로. 그룹하면 집단, 단체, 모임 이렇게 되겠지요. 경건치 않은 그룹에서 조직체에서 조직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서 불의가 나오는 겁니다. 이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나라한테 최종적으로 망했지요? 남쪽, 북쪽인데 남쪽 나라가 마지막 망하는데 남쪽 나가가 어느 나라한테 망했습니까? 바벨론 나라한테 망했어요. 저는 빨리 묻고 빨리 답합니다. 여러분들이 또 모른다는 수치를……. 바벨론 나라가 믿던 신이 마르둑 신이에요. 마르둑 신의 신전을 유적지에서 해서 삼차원으로 그린 동영상을 보게 되면 마르둑 신의 신전의 특징은 안에 침대가 있고, 살림집으로 지어놨어요. 그리고 거기에 경건한 사람들이 마르둑 신의 사자들이 아침마다 뭘 하느냐? 싱싱한 과일을 마르둑 신 부엌에다 갖다 바칩니다. 그리고 처녀로 해서 거기서 살림 차리도록 해줘요.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 했어요? 이스라엘은 어느 나라한테 망했다고요? 바벨론에게 망했어요. 그런데 바벨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마르둑 신이 여호와 신을 이겼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신과 신 사이에 어느 것이 진짜 신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누가 힘세서 이기느냐를 결정이 났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뭐냐, 예수님이 뭐냐? 그런 것을 의심하지 않으려면 내가 원하는 힘이 되는 것이 주게 되면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믿지 말라고 해도 믿어준다는 거예요. 이게 신이 뭐냐, 경건치 않은 세상에서.

시편 43편에서 지금 그것을 신앙인은 그걸 불의하다고 생각하고요 그걸 슬프다고 이야기해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자기중심입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인데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한테 잘해주는 데 그게 왜 슬퍼요? 자 봅시다. 자기중심이죠. 그러면 그다음에 나는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지요. 그러면 내가 나를 의심하지 않으니까 나는 나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겠지요. 그죠? 나는 나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누굴 믿느냐? 하나님을 믿잖아요. 하나님 믿고 예수 믿잖아요. 그 하나님, 그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이라고 내가 의심하지 않는 거예요. 이게 바로 불의한 자에요. 이게 불의한 자라고요. 지금 사달이 어디서부터 사달 났느냐 하면 왜 나는 나를 의심 안 하고 있느냐 그게 사달이거든요.

왜 나를 진짜 하나님 앞에 내가 망해버려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안 받아들여요, 왜 수용을 못합니까? 왜 수용하면 안 되지요? 왜 나는 아프면 안 되고 건강해야 되고, 나는 왜 망하면 안 되고, 그런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뭡니까?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에 대해서 몰라요. 그 이유가 바로 그룹, 이 세상 자체가 경건치 않은 세계, 지옥이죠.

지옥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의 파생물로서 이 땅에 출생한 겁니다. 지옥 사람으로 태어난 거예요. 내가 맨날 노래 부르는 것 있잖아요. 지옥에서 태어나서 지옥에 누워~ 그냥 지옥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걸 성경에서 육이라 하지요. 그냥 지옥에서 태어난 거예요. 지옥에서 태어나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어떻다가 아니라 네가 속해 있는 나라가 왜 지옥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평생을 살게 만들어요.

평생을 살게 만들어서 우리가 마주하는 우리가 접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 그 티를 내게 만들었어요. 우리 속에 있는 관심사.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수치스러움을 더 깊숙이 감추기 위해서 보상으로 인하여 내가 힘들고 어려운 것에 대해서 자꾸 보상을 원하는 거예요.

다른 예를 들면 사람이 집에서 화투를 친다. 십 원짜리, 그걸 도박이라 하지 않지요. 화투를 치는데 집에서 남편과 치다가 슬슬 동네 노인정에 가서 친다. 백 원짜리. 갑자기 확 올랐습니다. 돈 내기 해야 재미가 있지 내기 안 하면 재미없어. 그래서 발전해서 산속에 텐트 치고 했다. 이천만 원짜리.

자, 사람은 처음에는 화투를 갖고 놀지요. 그런데 조금 보면 화투가 나를 갖고 놀아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은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환경에 주눅 드는 식으로 기거에 환경이 요구하는 쪽으로 변신되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욕망은 힘든 인생에 보상을 요구하기 때문에. 힘든 인생이란 고통의 세계잖아요. 이 세상 자체가 고통의 세계다.

고통의 세계니까 여기서 보상을 기대하면서 뭘 하느냐? 마르둑 신, 신 같은 것, 나한테 잘해주면 나는 신에게 잘할 용의가 돼 있다. 내가 원하는 걸 주면 하나님을 섭섭지 않게 해주겠다는 마음이 우리 속에 있어요.

그런데 시편 43편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 자체를 경건치 않은 세계라고 규정을 해버려요. 이 신앙인은. 규정을 하면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소속이 어딘지 보는 거예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이런 내용이 참 중요해요. 경건치 않은 세계에 여기에 어떤 고정된 위치를 갖고 있다, 자리를 갖고 있다 했지요.

이걸 무슨 자리라 했습니까? 이게 무슨 자리? 여기서 고정된 제단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신앙인은 두 개의 세계를 알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두 종류의 세계가 내 안에 구성돼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누구 이야기에요? 예수님 이야기에요.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언약적으로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 안에 있으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어요. 그러면 어디에? 세상 안에 있는 거예요.

세상 안에 있는 것과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 예수님 자기 안에 둘로 구성돼 있어요. 육의 요소를 갖고 있어야 주님이 지옥을 만들 자격이 있고요, 영의 요소가 있어야 주님이 천국을 만들 자격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옥의 증거자도 되고 동시에 천국의 증거자가 되는 겁니다. 두 개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가 되는 거예요. 그 예수님 이야기를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 시편 43편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봐야 된다. 그건 인간에겐 있을 수 없어요. 인간은 자기를 부정할 수 없어요. 자기를 부정하는 괜찮은 자기를 또다시 긍정하기 때문에 인간은 있을 수 없어요. 성경을 봐야 될 이유는, 내가 이 세상이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돼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게. 세상이 끝나고 시작대로 가는 이것이 내가 거기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는 거예요. 다만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그건 이 세상의 주관자에 의해서 그냥 주어질 뿐이에요. 내 인생을 내가 결정 안 해도 되는 거예요.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좋은 결정이 온다고 용쓰지 마세요. 그 자체가 아직도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아까 했잖아요. 내용 없는 편지가 주인공이고 날아다니는 편지를 쫓아다니는 나는 하나의 종이, 노예가 된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것에 따라가는 것, 경건치 않은 세계가 지옥이라면 인간은 지가 주인공이 아니고 지옥 자체가 주인공이에요, 이 땅에. 이 세상의 주인공은 지옥이에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니까요. 경건치 않은 어떤 불의한 게 있어요. 그 불의한 것은 이 세상에 진정한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이 등장해야 맞은편에서 와요.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지 않으면 뱀의 후손은 자기 정체를 노출하지 않습니다. 뱀은 자기의 정체를 노출하지 않아요.

이미 우리는 시편 43편 세계 속에서 빼도 박도 못하고 있습니다. 허우적댄다고 해결책 나오는 것 없습니다. 우리 현재 살아온 자체가 해결책이 되게 하세요. 그거는 주께서 되게 하십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하면 주께서 네가 주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렇다하고, 지옥 갈 사람한테는 지옥 가려고 고생한 거예요. 똑같은 고생을 해도 평가가 이거는 오야 마음대로에요. 우리 주님 마음대로에요.

아버지 집에 아들 둘이 있는데 나중 되면 두 아들 같이 살아요. 한쪽은 천국백성으로 살고 하는 지옥백성으로 사는 거예요. 탕자가 돌아왔을 때는 자기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기쁨을 갖고 돌아온 거죠. 왜? 집을 나가봤으니까. 물론 여러분들이 가출하기를 추천을 해드리겠습니다만 가출하는 것도 주님의 허락이 가출이 되지요. 그렇지 않고 그냥 돌아다니는 것은 가출해봐야 지옥에서 떠돌아다니는 거예요.

인간의 삶이란 기존에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무한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고 바꿔보고, 바꿔보는데 계속 있는 것을 다른 있는 것으로 교체하면서 세월 다 보내고 있어요. “사업 망했지만 내 아들이 잘 됐잖아.” 그걸로 교체해보는 거예요. 그래서 뭐하려고? 힘든 인생에 보상 받아보려고. 그게 보상이 될 거라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경건치 않은 것으로 경건치 않은 것을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중요하니까. 주인공이 자기에요. 나 말고 다른 분이 이 세상에 주인공이란 것을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습니다. 10분 쉬면서 조금이라고 생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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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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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