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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강남-누가복음 17장 2절 (상대역) 23005223a-이근호 목사자유게시판누가복음

강남-누가복음 17장 2절 (상대역) 23005223a-이근호 목사

17장 1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연자 맷돌 옛날 사람들 곡물 갈 때 빙빙빙빙 가축 동원해서 돌리는 거 있어요. 야무지게 갈립니다. 그 무거운 연자 맷돌, 아주 무겁지요.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작은 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자는 차라리 자기 목에다가 무거운 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차라리 낫다. 1절과 2절을 보게 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말씀은 폭력을 동반한다. 폭력을 동반해요. 폭력 없는 주의 말씀은 없습니다. 폭력적이죠. 폭력은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깨버리는 것.

따라서 여기에 작은 자, 아주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실족케 하거든 그런 일이 벌어지거든 그런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는데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우고 바다에 자진해서 빠지는 것이 낫다. 스스로 말씀의 폭력을 뒤집어쓰라. 그렇더라도 말씀은 사라지지 아니한다. 이 말씀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을 시범 보일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뜻이죠.

따라서 1절과 2절에 대한 우리들의 나올 수 있는 반응은 제가 쓰겠습니다. 야무지게 빠지자. 다시 바다에서 기어 나올 생각 말고 야무지게 빠지면 돼요. 그래야 말씀이 실현돼요. 말씀이 표현되니까. 주의 뜻입니다. 야무지게. 다시 기어 나와가지고 애들 저녁이나 챙겨주고 들어가자. 아니 아니 그러지 말고 힘차게 망하자.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씩씩하게 빠지자. 깊은 물속으로. 뭐 하나 더하면 신나게 빠지자. 그냥 빠지지 말고 목에다가 뭘? 두 번 다시 바깥으로 기어 나올 수 없도록 단단하게 촘촘하게 다 감고 물에 빠지시면 됩니다. 그러면 누가복음 12장 2절 우리를 통해서 주의 말씀 실현 됩니다. 그러니까 이게 말씀 지키는 게 굉장히 쉬워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중요한 것은 이렇게 야무지게 빠지게 되면 그 빠진 자리에 주님도 같이 빠져있다. 주님을 만났는데 거기서 만나요. 바다 속에서 만나는 거에요. 주님을 만날 때. 바다위에서 기웃거리면서 주님 어디 가셨나? 주님 거기 빠져있는데 찾긴 뭘 찾아. 주님을 어디서 찾는데? 주님을 말씀 속에서 찾아요. 주께서 말씀을 내뱉을 때는 그 말씀 안에 본인을 담아서 본인의 죽음을 담아서 말씀을 던진 겁니다.

세상에 이런 판사가 어디 있어요. 이런 판사가. 세상 판사는 자기는 의자에 앉아 가지고 피고는 이러고 있지요. 이거는 세상 판사고 주님은 피고가 받는 형벌 속에 본인이 먼저 선점해서 먼저 앞장서서 피고가 받을 그 형벌 속에 자신이 거기에 가담하고 이리로 오라는 거에요. 그래야 네가 말씀을 지키지 말고 말씀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거에요. 말씀 속에 들어가면 주님 그렇게 대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말씀을 어디서 만나느냐 하는 거에요. 자, 누가복음 12장 2절 말씀을 세상에 딱 던졌습니다. 던지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여기서 본능적으로 “나 하나님 안 믿어.” 대번 보이콧합니다. 자동적이에요. 이게 모든 인간의 기본이에요. 인간의 기본 들어갑니다. 인간의 기본. 인간의 기본은 ‘하나님 없이 홀로 사는 것’, 이게 기본입니다.

물론 이 인간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고요. 인간들은 하나님 없이 홀로 사는 것이 기본이에요. 하나님 없이 사는 거에요. 어릴 때는 부모 간섭받지요. 부모를 떠나면 이제 홀로 사는 것이 자기의 잠재되어 있던 자기 본성의 발현. 펼쳐지는 거에요. 네가 신처럼 되리라 하는 그 본성이 어디 가겠어요. 그대로 발현됩니다.

하나님 없이 홀로 살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 없이 혼자 살았으니까 네가 함부로 살거나 경솔하게 살았던 것이 그게 혹시 들킬까 싶어서 자기 관리에 충실해요. 하나님 없이 사는 건 기본인데 그 기본에다가 하나님 없이 너 혼자 살면 얼마나 엉망으로 살겠느냐 라는 소리가 들릴까 싶어서 경솔하게 살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 관리에 만전을 다한다.

여러분 주변에 안 믿는 사람 보세요. 이렇게 사는 거 맞지요? 이게 인간의 기본이에요. 인간의 기본. 하나님은 안 믿지만 나름대로의 내가 살아가는 철칙만큼은 내가 확고하다. 이것을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 형편을 연구를 해 왔어요. 그 연구한 것 그들이 그렇게 많이 연구한 것 이 시간에 짧게 제가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것을 이성의 능력. 인간의 깨달음의 능력. 정신병자 말고 제대로 된 정상적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는 기본양식, 소양, 상식은 갖추고 살아가는데 인간의 기본은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홀로 살면서 막 산다는 소리를 들을까 싶어서 나름대로의 자기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철칙을 세우는 것 이것을 세상 학문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게 인간의 이성의 능력이라는 거에요. ‘이성의 능력’.

그렇다면 그 다음에 이성의 능력이 역설, 모순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떤 모순인지 제가 한번 적어볼게요. 이성에 의하면 이성이라는 말은 깨달음 이런 거죠. 항상 생각하는 것.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항상 생각해서 양식대로 합리적으로 생각. 이성에 의해서 납득되지 않는 것을 배제한 총체성을 이성은 현실 전체로 보는 역설. 이성에 의해서 납득되지 않는 것은 배제하고 뺄 거 빼고 나머지 총체성을 이성은 뭐냐? 현실 전체, 현실 그 자체로 보는 역설이죠.

이게 왜 역설이냐 왜 paradox냐 하면은 뭘 뺐잖아요. 중간에 뭘 뺐어요? 납득되지 않는 걸 뺀 거에요. 이성에 부합되지 않는 것, 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인간은 용서가 안 됩니다. 그딴 걸 왜 믿어. 그딴 걸. 그건 미신이지. 그딴 걸 왜 믿어. 인간의 기본은 하나님 없이 살면서 이성으로 사는데 그 이성이라는 것이 경솔하게 사는 게 아니고 함부로 사는 게 아니고 정신 바짝 차려가지고 남들 보기에 흠 잡히지 않도록 자기 단도리하면서 살아가는 그게 이성인데 그 이성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무엇인가? 납득되지 않는 것을 다 뺐어. 다 뺀 거에요.

비빔밥 먹으면서 나물 다 빼고 먹는 것처럼. 나물 다 빼면 비빔밥이 아니지. 자기한테 안 맞는 것 고사리 같은 거요. 고사리 다 빼고. 전주비빔밥에서 나물 다 빼면 무슨 전주비빔밥이에요. 세상 전부를 안다? 모른다? 모르지요. 다 뺐으니까.

자, 그러면 지금 우리가 누가복음 하는데 누가복음 성경이죠. 누가복음은 신약이고 구약에서 출애굽기 19장 17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모세는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을 만나러 산에 왔다” 이거에요. 한번 보세요. 인간의 기본은 하나님 없이 이성으로 살아요. 자기가 반듯하게 산다는 것을 날마다 자기를 바라보고 사는 건데 출애굽기 19장 17절에서는 모세는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 만나러 시내 산에 왔다.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빼놓고는 이렇게 살아요. 하나님 없이 내가 반듯하게 살면 된다. 반듯하게 사는 그 총체성을 현실이라고 하고 거기 빠져있는 분을 모순되니까 모순되지 않기 위해서 뭘 보충하느냐 하면은 신을 섬기는 거에요.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는 신을 섬기는 거에요.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는.

인간이 하는 것에 대해서 참 제대로 하네, 반듯하게 하네, 바르게 하네, 열심히 하는구나 최선을 다하는구나. 도와줄게. 인간이 납득이 되는 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아주 특수한 민족이에요. 이거는 하나님이 만든 민족인데 모세가 사람들을 데리고 어디 가느냐 하면은 하나님을 부르는 게 아니에요. 모세가 하나님을 부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있다는 산으로 가요. 그럼 그 외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은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남이죠.

이건 뭐냐? 상대. 상대가 있어요. 성경말씀은 상대가 있어요. 이 성경 말씀이 “이 소자 중에서 네가 실족케 하면 네 목에다가 돌을 매고 바다에 빠져라” 할 때에 이 말씀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말씀이 아니고 나도 그 말씀에 나도 끼어들게. 그 말씀 실현 장소가 나 말고 하나님이 상대역으로 상대자로 거기서 같이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놀라운 면이에요. 특수한 면이에요.

인간은 홀로 살지요. 이스라엘은 상대자가 있습니다. 이 상대자 어쩔 거에요? 어쩔 거에요? 상대자 없이 성경 말씀 지키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이성의 능력이에요. 성경을 이성적으로 보는 겁니다. 이성적으로 보고 이성적으로 지키고 이성적으로 나는 신자라고 확고한 자부심을 갖고 싶어 할 때 이성의 능력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시내 산에 갔거든요. 거기서 돌판 주고 깨졌습니다. 깨진 돌판. 돌판이 깨졌어요. 하나님이 “이리와.” 하나님이 불러놓고 내가 내 것을 이야기해놓고는 돌판이 깨지는 것을 유도해서 깨져버렸어요. 돌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너희들 사이에 이렇게 관계가 깨어졌다.

이 말은 너희들이 홀로 사는 것이 문제 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원래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했는데 깨어져버린 상태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에게만 너희들은 알고 있어야 된다. 알고 있어야 되는데 그 알고 있으라는 그 말씀을 그냥 “알고 있어라 당부한다.” “예” 이게 아니라. 깨어져버린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으면서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끝까지 깨어졌습니다. 깨져버린 거에요.

그 깨어짐의 극한이 뭐냐?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아를 죽여버린 거죠.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지금 인간의 기본은 하나님 없이 홀로 사는 거에요.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이 말씀은 너희들이 아무리 홀로 살고 싶어도 너희들 제자들한테는 내가 가만 두지 않겠다는 거에요. 홀로 살고 싶더라도 그 깨어진 돌판을 극복하고 그 깨어진 관계 넘어서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버렸다는 사실을 네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에요. 하나님과 인간관계는 깨졌어요. 말씀 줘봐야 인간은 못 지킵니다.

누가복음 17장 “화 있을지로다 연자 맷돌 해서 빠뜨린다” 이거 인간이 못 지킵니다. 못 지키니까 그 못 지키는 자리에서 내가 너와 만나마. 그러니까 당당하게 물에 빠지고 다시 기어 나올 생각하지 말고 용감하고 물에 빠져버려. 문제는 뭐냐 하면은 내가 물에 빠져서 화가 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홀로가 아니고 상대자로서 주님이 우리를 함께 있다는 것, 만나게 했다는 것 이 사실이 구약 이스라엘 원칙을 그대로 이끌고 있는 거에요. 구약 이스라엘의 원칙을.

다시 말씀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부르면 돼요. 그들은 실제로 애굽 나올 때 여호와 불렀어요. 주님께서 “너 아니야 그거 아니야. 너희들이 부르는 여호와는 너희들의 망상이고 상상이고 내가 진짜 여호와께서 어떻다 하는 것을 내가 보여줄 테니까 너는 사람들 데리고 시내 산까지 와” 와서 뭐했는데? 돌판 줬고 돌판 깨졌습니다. 돌판 주고 돌판 깨졌어요.

거기서 모세와 하나님하고 대화하는 게 나와요.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출애굽기 34장 7절에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죄는 용서해주는데 죄 없다 하지는 않겠다는 거에요. 미치겠어 진짜요. 그동안 우리가 뭘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는 자꾸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하잖아요. “주님 죄가 너무 아파요. 용서해주세요.” “용서했다.” “감사합니다!” 도망가기 바빠요. 왜?? 대구강의에 나오는데 실속 챙길 것을 챙겼으니까. 얻을 거 얻었으니까 도망가면 끝나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이리 와. 도망가지 마. 네가 죄 짓고 도망가는 것은 좋은데 네 죄를 네가 다 갖고 가. 갖고 가.”

구원은 받았는데 죄는 그대로. 왜 그래야 되는가?? 로마서 5장 10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이게 기본입니다. 인간의 기본은 하나님 없이 나 홀로 반듯하게 사는 게 기본인데 성경의 기본은 뭐냐 하면은 로마서 5장 10절 “너희는 내 원수”였다는 겁니다. 내 원수. 너희는 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그까짓 것 연자 맷돌해서 바다에 좀 빠져도 너 불평하지 마. 그것 가지고 원망하지 마. 하나님 원수인데 원수 값을 해야지.” 원수니까 물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원수인 주제에 밖에 나와서 까불고 돌아다니지 말고.

그러니까 오늘 누가복음 17장 하는데 17장에서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상대로 어떤 유도리 또는 협상, 타협, 융통성 얄짤 없습니다. 일체 일절 협상이란 게 없습니다. 딜 없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은 주님이 이 말씀에 의해서 주님이 자신이 던진 말씀처럼 바다에 빠지기 때문에 그래요. 스스로 화를 저주받은 자는 어떤 모습인가를 예수님이 스스로 그 말씀에 이런 자는 저주받는다. 알았지? 내가 저주받을게 하고 그 저주받은 말씀을 실효성 있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 저주의 자리에 주님이 먼저 그 말씀 속에 자기가 던진 말씀 속에 자기가 들어가버린 거에요.

그래서 말씀은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은 함께 하는 거에요. 주와 함께 그 말씀 속에 주님이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같이 체험하는 것. 이게 바로 폭력적으로 나온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 폭력은 우리 때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 아들 때려버리죠. 아들이라고 봐주는 거 없어요. 그냥 말씀이 주는 폭력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 된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가지고 꼼수부릴 생각하지 마세요. 바쁜데 교회 못 가는 거 좀 봐주세요. 고3인데. 모가지에 돌 해서 바다에 빠질라고 수능을 왜 치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의 내 때죠. “내 때”. 때가 이르렀으니 나는 잡히러 간다. 실컷 누가복음 17장에서 소자 실족케 하면 뭐 바다에 빠진다 아주 폭력적으로 해 놓고는 실제로 폭력을 먼저 말씀에 의한 폭력을 먼저 당하신 분은 예수님 본인입니다. 나는 드디어 때가 되매 46절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은 그렇게 산상설교 쏟아놓고 쏟아놓고 쏟아놓고서는 다 이루었다 하는 코스는 우리는 완전히 재끼고 주님 홀로 그 말씀을 다 이룬 거에요. 죄 용서를 다 이룬 거에요. 부자청년이 잘못된 것은 안 망가지고 영생 얻을려고 한 거에요. 부자청년이 잘못된 것은 이성의 능력으로 영생을 획득할려고 한 거에요. 이성의 능력으로.

말씀 속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말씀을 지켜버려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습니다. 말씀에 폭력이 있다는 것은 생각 못하고 오히려 내가 말씀 잘 지키면 하나님 주신 폭력에서 내가 피할 수 있다고 그게 나한테 도달되지 않을 수 있다고 꼼수를 부리면서 내가 내 몸 사리면서 영생은 영생대로 획득할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이성의 능력으로 영생까지 얻을려고 시도하는 것. 그거는 돌판이 깨어졌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거에요. 돌판이 깨진 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건널 수 없는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거에요.

아까 그 이성의 능력이 뭐냐 하면은 인간이 납득이 안 되는 것은 뺀다고 했지요. 인간이 납득되지 않는 것은 뺀다 할 때 그 빠진 게 뭐냐 하면은 그 빠진 것을 베드로전서 2장에서 이렇게 합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 이렇게 나와요. 건축자들의 버린 돌. 너희들이 뺐지? 너희들이 너희 자신에게 납득이 되고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에이 이건 필요 없어 하고 빼버렸지. 그 쓸데없는 그 돌, 그 돌이 인간에서는 도저히 건너올 수 없는 천국을 이룹니다. 인간의 이성의 힘으로 갈수 없는 천국. 우선 인간들이 뺐으니까 나 이것은 도저히 못 믿겠다고 뺐으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오면 조치를 하지요. 우리가 안 믿으면 그만이죠.

제가 하나의 예를 들테니까요 저의 질문에 답변을 해보세요. 어떤 말기암 환자가 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의사도 이제 포기했어요. 당신은 일주일내에 죽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지났는데도 안 죽었어요. 보니까 가을철인데 창밖에 잎새 하나가 분명히 떨어져야 하는데 그 다음날도 안 떨어지고 그 다음날도 안 떨어져요. 누가 스카치테잎으로 붙여놔서 희망을 이어가도록 그렇게 했겠지만.

자, 어떤 사람이 말기암 환자인데 창밖에 있는 나뭇가지 저거 떨어지면 나 죽는다고 했는데 떨어지지를 않네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자, 질문입니다. 1번 우리가 그 병원에 간다. 2번 안 간다. 몇 번입니까? 우리가 그 병원 그 사람 구경하러 간다. 2번 안 간다. 안 가지요. 남들이 마지막 희망을 북돋우던 말던 나는 내 일 있잖아요. 그게 무슨 관계있습니까.

예수님이 버린 돌이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마지막 잎새. 그럼 우리는 그 십자가 우리 관심사가 없어요. 왜? 나는 돈 버는 일에 바빠. 아무 관심 없어요. 나는 이성적으로 살 거에요. 혼자서. 이성적으로. 뭐 연자 맷돌 이 성경 안 보면 되고 안 믿으면 돼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홀랑 따먹으면 되잖아요. 그거 쉽지요. 어디서 우리한테 겁박질이야 하고 그냥 선악과 그냥 삼키면 되잖아요. 이제 없지?! 하나님 삼켰으니까 없지요?! 또 다시 우리를 협박하기만 해봐. 지금 이런 형편이라니까요. 이런 형편.

왜? 우리는 이성적으로 사니까. 나 잘난 맛에 살아가거든요. 이스라엘 관심 없습니다. 이 성경도 관심 없고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뭐 관심도 없어요. 언제 하나님 보고 싶어했습니까. 나 살기도 바쁜데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이성 중심의 삶에 주께서 포기하겠습니까? 포기 안하겠습니까? 포기할 주님이 아니지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오늘 누가복음 17장에 나옵니다.

17정 2절 “이 작은 자 중에 하나”. 예수님보고 노골적으로 욕했습니다, 욕은 안 했습니다 라는 말은 소용없게 만들었어요. 이 세상 속에 주님과 연관되어서 관련된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주께서는 돌출하게 출현하게 만듭니다. 일종의 이 땅에 지뢰를 깔아놓아버린 거에요. 지뢰를.

예수님은 너무 위대해서 너무 고귀해서 말을 해도 조심히 말하고 공손하게 공경하며 말해야 된다. 백날 해봤자 주님과 연관되어 있는 상대역, 상대자. 주님과 상대적으로 엮어있는 자를 건드리는 것은 주님을 건드린 게 됩니다. 인간은 예수님이 안보여도 인간은 예수님의 말씀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되어있어요.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의기양양하게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러 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 나사렛 예수잖아.” 너는 지금 나를 믿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 곧 나를 핍박하는 것이고 그게 너에게 뭐로 돌아가느냐? 폭력으로 돌아간다는 거에요. 네가 지금 맨발로 가시를 밟으면 가시가 아프겠어? 네 맨발이 아프겠어?? 맨발이 아프죠. 네가 지금 자진해서 스스로 폭력을 지금 부르고 있다는 거에요. 폭력을. “작은 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이게 뭐냐 하면은 이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자, 대수롭지 않은 자, 있으나 없으나 무시하는 자 신경 안 써도 될 만한 자, 그 자의 상대역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이 작은 자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가느다라한 줄이 연결되어있었던 거에요.

이 시점에서 공식 하나 쓰겠습니다. x+(-x)=0 맞지요? x는 사라지지 않으려는 나. (-x)는 예수님. = 0. 주님께서는 사라지신 분이 아직 안 사라지는 나에게 들어붙어서 나로 하여금 제로, 없어지게 만들어요 이 땅에서. 없어지게 만들어요. 뭐만 남기고 없어집니까? 말씀만. 누가복음뿐만 아니고 로마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됐다” 이런 거 있잖아요. 말씀만 남기고 사라지는 거에요. 이럴 때 노래 하나 나와야 하는데.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가느냐. 얄미운 사람’

주님은 이렇습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폭력이 작동하고 있었는데 그 폭력의 제공자가 누구냐? 예수님 자신이라는 거에요. 이 세상에 절에 가든 성당 가든 교회 가든 모든 인간은 제거, 사라져가고 있다는 거에요. 너희들은 이성적인 능력으로 악착같이 살고자 하는 것은 있는데 왜 살고자 하는데 왜 살아지지. 아는 게 전혀 없어요. 왜? 나를 살아지게 하는 그것을 내 이성에 납득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다 뺐거든요. 다 뺐는데 뺀 것이 전부 다 복음만 다 뺐어요. 어떻게 빠져도 복음만 삭삭 빠졌는지.

자, 여기까지는 쉽습니다. 이제 어려운거 나옵니다. 어렵습니다. 어렵다고 분명히 예고했어요. 인간의 몸이 있지요. 거울에 비치면 보입니다. 맞지요? 거울에 몸이 비치는 것 맞지요? 거울에 내 자아가 비칩니까? 안 비칩니까? 거울에. 거울 비치니까 영어로 s-e-l-f라고 글자가 막 뜹니까? 그거는 귀신들린 거고. 없지요. 몸만 반사될 뿐이에요. 자아는 거울 봐도 안 비춰요. 셀프. 거울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아는 거울에 안 비치니까 자아는 없는 건가? 자아가 만들어내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인간의 자아를 만들어내요. 시간이 흐름이. 시간 감각이 나는 내가 거울을 보지만 시간은 날마다 나를 보고 있어요. 시간이. 아이고 머리 많이 빠졌다. 많이 늙었다. 좋은 화장품 발라도 피부에 잘 먹지도 않지. 자아가 어떤 거냐 하면은 몸은 이렇게 합니다. 숟가락 들고 밥그릇에 밥 퍼서 숟가락에 실어서 입에 넣는다. 이건 몸이에요 왜? 거울 보면 보이잖아요. 거울 보면 밥 뜨는 거 보인다고요.

그럼 자아는 뭐냐? ‘내가 밥을 먹는구나’ 이게 자아에요. ‘벌써 저녁이 되었네’ ‘어! 6시네’ 뭡니까? 시간 감각. 시간에 휘둘리는 게 자아입니다. 시간에. 그래서 자아는 초조감을 느끼고 자아는 또 언제 죽는가? 또 언제 내가 좋았던가를 생각해요. 이것을 가지고 아까 마태복음 26장에 나왔어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것을 때라고 해요 때. ‘time’. ‘때’.

인간은 때에 묶여있어요. 시간에 묶여있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이 세상도 떠나겠지. 몸은 이야기 안 해요. 내가 이야기해요. 내가. 죽으면 세상 끝나겠지 그래서 자살해요. 그러나 인간은 자살해도 때를 못 벗어나요. 왜냐하면 때는 주님이 그 매듭을 주님이 쥐고 있어요. 내 때. 모든 것은 주님이 꽉 쥐고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의 때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때를 경유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판타지라고 해요. 우리말로 하면 ‘환상’.

앞에 피아노 있지요. 피아노가 실제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니면 환상입니까? 피아노 만지면 소리 나고 있다 하잖아요. 그거는 내 때가 이야기하는 거에요. 내 때가 볼 때는 피아노가 환상이 아니고 사실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의 때를 경유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피아노가 있다 할 경우에만 피아노가 사실이 되고 예수님과 관계없이 피아노는 이것은 주님 보시기에 이것은 환상입니다. 환상이에요. 어렵지요. 잘 이해가 안 되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피아노가 환상인가 실제인가 하다가 가다가 미끄러졌어요. 엎어졌어요. 엎어져가지고 벽에 부딪혀서 머리에 충격 받았어요. 충격 받았어요. 충격 받아가지고 충격 받은 상태에서 기어가가지고 피아노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건 뭡니까? 이게 뭐더라? 이게 뭐더라? 몰라요.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환상이 아니고 실제라는 것은 나를 경유해서 나한테 의미가 될 때에 실제가 되거든요.

내가 피아노라고 할 때 피아노가 되었다 할 때 의미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언어에서 나와요. 인간 언어.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세상을 구성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린애들 보면 언어를 통해서. 그래서 인간이 언어를 붙인 것은 다 진짜 있는 것이고 언어를 붙일 수 없는 것은 인간들은 환상으로 간주해요. 귀신, 성령, 악령, 천국, 에덴동산 전부 환상이에요. 인간세계에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용서받는다? 미쳤어! 내 죄는 착해야 분량 나눠서 나쁜 것보다 착한 게 있어줘야 플러스 마이너스 해가지고 착한 거 많이 남아있을 때 착하다 하는 거야. 착한 일보다 나쁜 일 많이 남아있으면 나쁘다 하는 거야. 이거는 인간이 자기가 알고 있는 선악체제, 그 윤리도덕 그리고 거기서 교육받은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그렇게 그걸 현실의 총체로 본거에요. 아까 했지요. 이성은 뭐다? 납득 안 되는 것은 빼버리고 납득되는 것만 전부 다 끌어 모아서 현실의 전부로 본 거에요.

거기서 무슨 귀신이 나오고 무슨 악령이 있습니까. 악령은 언어를 못 붙여요. 왜? 있어야 붙이지. 있어야. 피아노는 언어를 붙였잖아요. 주님의 때는요 잘 들으세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의 때는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원수에게 주고 되받아오면서 획득한 의미에요. 따라서 인간은 피아노라는 말할 자격이 없어요. 왜? 목에 돌 묶어서 바다에 빠진 인간이 더 이상 피아노란 말은 피아노를 왜 지금 나한테 물어. 본인이 켁켁 하고 있는데. 내가 땅에 살아야 피아노고 컵이고 의미가 있지 내가 지금 죽을 판에 없지요.

성경 말씀에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모든 저주는 모조리 거기에 달려 질주하고 있어요. 우리는 저주의 대상이 되는 거에요. 저주의 대상이 피아노, 걸상, 의자에 앉았다, 기타가 있다 이게 무슨 우리한테 의미가 있습니까. 자기도 죽을 판인데. 불 속에 들어갈 판인데요. 그럼 어쩌라고 우리 보고 어쩌라고 이렇게 하겠지요. 저 피아노가 있는데 주께서 주신 피아노다 이러면 된다 이 말이죠. 모든 것을 여기 카메라 있는데 주께서 주신 카메라.

그러면 이 말은 점점 더 응용하면 이 몸은 어떻게 돼요? 주께서 주의 말씀을 말씀대로 말씀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쓰여지기 위해서 주신 몸, 이러면 내 몸은 판타지가 아닙니다. 환상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실제가 되는 거에요. 뭐 그리 복잡해 하면서 짜증낼 거에요. 이스라엘이 복잡했어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그렇게 복잡했다고요.

배고프지? 예. 만나줄게. 예. 안식일날 만나 먹으러 가지 마라. 복잡해요. 그냥 배고프지? 예. 나 사랑의 하나님 먹을 거 줄게 이러면 게임 끝나잖아요. 그 만나가 만나가 아니고 말씀이랍니다. 왜 그 의미가 왜 거기 붙습니까? 어디를 경유해서 의미가 또 추가해요? 요한복음 6장의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은 모세를 통해서 하늘에 내려온 만나를 먹었지? 그건 생명의 떡이 아니야. 주님께서 복잡하게 이야기해요. 복잡하게. 좀 알아듣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복잡하게 이야기한다고요.

생명의 떡은 뭡니까?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하는 말이 “사람이 사람의 살을 먹어요?” 박수 또 치게 됩니다. “바로 그거야. 너희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이성적인 능력을 가진 자들은 두 번 다시 예수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리라’ “우리 예수 빼고 가자. 빼고 갑시다.” 주님께서 베드로 보고 제자들 보고 “너희도 갈래?”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도 몰라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모르거든요.

마태복음 16장 한번 찾아봅시다. 16장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자, 이성의 능력으로 혼자 살려고 하는 인간이 이걸 왜 고백합니까? 이걸 왜 고백해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분리시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베드로야 네가 한 거 아니다. 너는 이성의 능력이야. 네가 한 거 아니야. 그건 내 아버지께서 하게 하신거야”

그럼 베드로는 뭡니까? 고백을 했는데 이 자아, self, 자아가 한 게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자아는 또 있어요. 왜? 고백한 당사자가 나니까. 이 말은 뭐냐? 시몬이 아니에요. 뭐냐? 시몬 베드로. 시몬에서 베드로 변할 때 누구를 경유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하나님의 원수로 정죄하면서 그 죄를 죄대로 그대로 두면서 죄 사함을 주는 거에요.

베드로로 하여금 성령 받고난 후에 베드로가 갑자기 요한 되고 이런 거 없어요. 베드로가 성령 받아도 요한이 안 된다는 사실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너는 나중에 원치 않는 곳으로 갈 것이다 하니까 베드로가 그 다음에 옆에 보더니만 누구부터 봅니까? “쟤는요?” 이랬다고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베드로하고 요한하고 같지 않아요. 따로 있어요.

따로 있는데 ‘서로 사랑하라’ 했다고요. 이건 어딜 경유하느냐 하면은 상대역, 너도 주님의 소자고 나도 주님의 소자인데 이게 주님의 소자가 돼야 돼요. 너는 내 똘마니 되고 이런 거 하면 안돼요. 당신은 내 부하고 이런 거 하면 안돼요. 반드시 주님을 경유해야 우리는 돌 목에 매고 바다에 허우적대고 있다는 것을 아주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어요. 죄 그대로 있으니까. 앞에 계속 죄가 나오니까.

나는 누가복음 17장 2절의 말씀 못 지키고 못 지킨 그 자아, 다시 말해서 죄가 있는 자아를 십자가를 경유해서 새로운 자아로 내가 눈이 띄인 거에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어느 말씀 하나 나보고 못 지킨다고 지킬 수 없다고 주신 말씀이에요. 왜? 하나님의 원수니까. 여기 무슨 협상이 있고 무슨 타협이 있습니까? 좀 더 쉬운 거 주면 지키겠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이거 하고 첫째시간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1장 하나님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로마서 1장 32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아멘. 자, 사형에 해당되는 거에요. 사형. 사형에 해당되는 것 29절에 불의, 추악, 탐욕, 모든 인간 다 포함돼요. 사형이죠.

그런데 그 사형에 사형을 받는 것을 성도는 왜 기뻐하느냐 하면은 주님의 십자가 의미로 경유해서 ‘구원받는 나’가 되기 위해서 그 사형 받은 자리에 주님이 먼저 가있고 우리 보고 우리 자신을 너는 사형 받아야 합당해. 왜? 말씀이 그거니까. 끌어당겨서 주님을 증거하는 상대자로 삼아줬을 때 이 로마서 1장 32절은 너무나 자랑스러운 말씀이 되는 겁니다. 너무나 당당한 말씀이 되고 고마운 말씀이 되고요. 어제부로 죽어야 되는데 또 사형수 하라고 또 살게 하는군요.

어떤 분들은 옷을 입을 때 이렇게 세로줄 있지요. 그거 말고 가로줄 입은 사람 있어요. 주로 각 나라의 죄수들이 이런 옷 입어요. 가로 줄. 흑,백, 흑,백 가로줄. 세로줄은 주로 바리새인들이 입어. 사형수로서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죄 아닌 구석이 없다는 것을 웃으면서 당당하게 살아가시면서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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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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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