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2b 울산강의-역대기상(21강) 18장 6절 : 언약의 사람
20230602b 울산강의-역대기상(21강) 18장 6절 : 언약의 사람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겼던 다윗, 맞아요. 표면상으론 이겼습니다. 그리고 암몬과의 전쟁에서도 지금 이기고 있는 중입니다. 요압이 전쟁을 잘하거든요. 전쟁을 잘한다, 똑똑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똑똑하지 못한 자들은 굴복 당한다. 그래서 요압에 속한 이스라엘은 승자가 되고 다른 나라는 패자가 된다. 법적으로 보는 인간세계 안목은 그것까지입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서 부자 되고 잘 먹고 잘 산다. 그것까지입니다.
그것의 최고 자리에 앉았던 자가 누구냐? 다윗이죠. 다윗은 느긋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셨으니까. 자기는 당연히 하나님 편에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후 결전,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다윗이 갖고 있었던 법적인 체제는 구원에 아무짝도 소용없었고요 도리어 방해가 된 거예요. 그것이 사무엘하 11장, 12장에 나옵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나단 선지자가 등장해요. 나단 선지자가 누굴 공격하는가? 다윗을 공격합니다. 다윗은 최고자에요. 모든 걸 이기게 해서 승자에요. 자기를 더 이상 공격할 어떤 위인이 없습니다. 인간의 포부,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났을 때 유일한 소망은 뭐냐? 자기가 최고의 자리에 앉는 거예요. 어떤 것도 자기 적수가 되지 않는 상태, 인간은 비록 자기 처지가 어떻든 그건 고려하지 않고 어쨌든 간에 저 높은 곳을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인간의 야심이란 그래요.
그런데 12장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공격합니다. 다윗은 당연히 방어하지요. 임금님, 어떤 사람이 자기는 양떼가 많은데 양이 하나밖에 없는 종이 있었는데 어떤 손님이 왔습니다. 자기는 부자고 종은 가난한데 자기의 많은 양은 놔두고 하나밖에 없는 그 양을 잡아다가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그런 인간에 어떤 조치를 내리시겠습니까? 이스라엘 왕으로서 조치를 내려 보세요. 우리나라에 그렇게 악한 자가 있다니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했어요.
자, 첫째 시간에 공부한 것 다시 해보겠습니다. 승자가 된다는 것, 승자는 마땅히 살 자에요. 마땅히 산다는 것은 마땅히 의로워야 돼요. 마땅히 의로운 자에요. 승자는 마땅히 살고 마땅히 의로운 자에요. 그러나 승자가 승자되기 위해서 반드시 승자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반대편에 패자가 있어줘야 돼요. 패자는 마땅히 뭐가 되겠어요? 반대니까 마땅히 죽을 자고 마땅히 죄인이어야 되고 살려두면 안 되는 거예요.
이 승자와 패자의 구조가 어느 구조라 했습니까? 율법, 법의 구조에요. 법의 범위 안에 들어있을 때 반드시 나오는 인간의 의식이고 사고방식이 이겁니다. 잘된 자는 잘될 만해서 잘됐고, 못한 자는 마땅하게 비리비리해서 죽어 마땅해서 그만큼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거는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승자는 동시에 의인이라는 그런 호칭까지 얻게 되고, 패자는 가난 플러스 가난해서 가난할 만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이걸 뒤바꿉니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부자가 가난한 자를 이렇게 학대했습니다. 하니까 임금이 그 부자를 마땅히 죽여 버려야 된다, 라고 여기서 다윗을 투입시키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다윗이 말한 율법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법이에요. 하나님의 법, 다시 말해서 인간 대 인간의 2인 관계, 2자 관계, 두 사람의 관계에서 율법은 제3자 관계로 형성하는 것이 우리 이스라엘의 여호와의 기능이다, 역할이다, 위치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알고 있었어요.
마치 교회 좀 다닌 사람이 하나님의 위치가 어느 정도 있는지 아는 것처럼, 중보자가 없으면 구원이 안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중보자, 예수님, 십자가, 나 예수님 좋아요, 주님을 사랑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는 받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자기 위치가 어느 위치입니까? 자기 내부 안에 그런 고백을 할 때 자기가 어느 위치에 마땅히 있다고 생각합니까? 마땅히 구원돼야 되고, 마땅히 승자가 되고, 마땅히 의로워야 된다는 그런 의식을 지니고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개념들을 자기한테 다 끌어당기는 거예요.
우리는 부족해서 천국 못가지만 주님이 중보자 되셔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시비 거는 거예요. “너 누구야? 네가 너를 알고 있어?” “나는 마땅히 구원될 자지요.” “누가 그렇게 이야기해? 누가 마음대로 그렇게 생각해? 네가 마땅히 구원될 자란 걸 누가 이야기하던데?” 그건 내가 이야기하죠. 인간은 내가 그런 마음 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다윗을 뭐로 바꾸느냐? 다윗언약으로 바꿔요. 다윗은 다윗언약으로 바꿔집니다. 여기서 다윗₁과 다윗₂가 결별해야 돼요. 헤어져야 돼요. 내가 나하고 자아가 자아와 나와 나가 헤어져야 돼요. 갈라서야 돼요. 법의 구조, 법의 범위 안에 있던 나와 새로운 나가 갈라서야 된다고요. 십자가 강도는 법적으로 마땅히 강도질했으니까 죽어 마땅하지요. 거기서 구원되려고 하면 안 돼요. “예수여, 우리를 구원하면 이제부터 당신을 믿겠습니다.” 그런 짓하면 안 돼요. 강도 짓했으니까 마땅히 죽어야 되고 죄 지었으면 저주받는 게 마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가 주어지냐? 언약이 주어져요. 그다음에 다윗이 어디로 갑니까? 다윗 홀로 있다가 다윗언약으로 나아가야 된다고요. 여러분, 명절에 동그랑땡 하잖아요. 동그랑땡 그냥 만듭니까, 계란으로 피 막 입힙니까? 전 구울 때. 다진 고기에 밀가루 입히고 동그랑땡에다 계란을 입혀줘야 이게 맛이 나잖아요.
다윗이란 그 죄인, 여기에서 주님의 다윗 때문에 희생된 자, 우리야 장군의 피막을 발라버리면 다윗은 자기로 인하여 자기 죄로 인하여 희생과 만남이 이뤄지는 겁니다. 나와 희생의 만남이 그게 언약이 돼요. 무슨 언약? 다윗언약이 된다고요. 전에 어떤 강의나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노아 홍수 일어났을 때 노아 살던 가옥과 전토에 물이 들어왔습니까, 안 들어왔습니까? 들어왔지요. 이 말은 노아 너도 마찬가지에요. 너도 물에 잠겨야 될 인물이에요.
그러면 노아도 마찬가지로 심판 속에 있는데 노아 역할은 뭐냐? 우리가 심판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임무 때문에 방주 안에 있는 거예요. 그 방주가 신약에 예수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 안, 성령 안. 우리가 착해서가 아니라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주께서 캡슐로 계란 막으로 동그랑땡을 휩싸듯이 휘둘러버린 거예요. 이것을 예수의 증인이라 해요.
예수의 증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임해야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돼요. 성령이 임해야 돼요.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돼요. 혼자 까불락 대고 예수 믿고 소용없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돼요. 혼자 구원받겠다는 것은 나단 선지자가 왔을 때 다윗이 율법 거론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나라에 그런 못된 사람이 있어? 그거는 용서 못하지.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이렇게 하니까 거기 사무엘하 12장에 나단 선지자가 17절에,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내가 그 인간 잡아 족치지. 내 눈 뜨고는 그 인간 도저히 용납 못한다. 당신입니다. 당신이 당신을 체포하세요, 범인으로. 체포하고 당신은 당신과 결별하세요. 승리하기 때문에 의롭기 때문에 내가 구원돼야 된다는 그 발상 버리세요. 당신은 율법 안에서 저주받는 사람이었지 당신은 율법덩어리였지 저주덩어리였지 결코 구원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손잡이 와서 캐틀 벨을 쥐어야 돼요.
다윗에게 누가 왔는가? 이거는 2자 관계, 다윗과 밧세바, 아랫사람 밧세바와의 관계에 누가 끼어들었습니까? 우리야 장군, 밧세바의 남편이 끼어들었어요. 남편이 여기 끼어든다는 것은 2자 관계에서 3자 관계고 확산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타인이 통해서 우쭐되고 싶은 것이 인간의 타고난 품성인데 그 우쭐되는 것을 주께서 우쭐되게 허락을 해요. 평생 육신이 있는 한.
우쭐되고 싶은데 우쭐대는 그걸로 인하여 오히려 나의 높아짐을 인하여 낮아지신 분을 서로 가는 쪽이 다른 차이를 느끼면서 발견케 하는 거예요. 나는 높아지는 이것이 구원 불가능성이고, 낮아진 주님을 주께서 부활시켰다는 것은 저렇게 낮아질 때 이것이 바로 구원으로 가는 쪽이 저쪽이구나. 높아지는 쪽이 구원 쪽이 아니고 낮아지는 쪽이 바로 천국이 거기 있었던 거예요. 십자가에 있었던 거예요.
다윗은 자기 손으로 우리야 장군을 죽였습니다. 이로서 우리야 장군과 본인이 이제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됐어요. 쉽게 말해서 우리야 장군의 피가 다윗을 선택하고 다윗에게 찾아든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피가 우리를 지목하고 우리에게 터치한 거예요. 우리를 잡아챈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그래서 성도는 오직 피만 쳐다보고 사는 거예요. 주님과의 떨어진 그 단결된 관계에서 피만 연결돼 있으니까요. 마치 동방박사가 별 찾아왔지요. 별 보고 왔잖아요. 딴 거 안 봤어요. 우크라이나 전쟁 그런 것 신경 안 썼어요. 오직 별만 보고 찾아왔다고요.
그 별만 보고 찾아온 거기 동방박사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왜? 헤롯 왕이 동방박사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동방박사는 자기가 죽는 자리인지 어떤지 모르고 또 그런 것 알 필요도 없고, 그리고 내가 죽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주님만 바라보고 오는 거예요. 별 따라 주님만 찾아온 거예요. 지금 누가 날 수배령을 내렸는지 그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가는 거예요. 왜? 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요. 최종 승리가 나한테 와야 된다는 그 따위도 신경 쓰지 않아요.
인간은 법으로 해서 법으로 말미암아 법으로 돌아가고, 그 앞에 뭐라 했습니까? 육이라 했지요. 육은 육 같은 행동을 하고 육으로 돌아오죠. 그 육의 행동이 뭡니까? 항상 뭘 해도 나한테 돌아올 이익이 무엇이냐, 늘 계산하는 이런 속성을 유감없이 감출 길이 없어. 그냥 가족관계라도 튀어나와요. 참 오죽 했으면 이런 말씀 했습니까.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제가 왜 가족 이야기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0장 35절에,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님께서 왜 굳이 이 말씀하시느냐 하면 인간의 육이라 하는 것이요 그 인간의 육이 혼자서 하는 게 아니고 집안이란 상황 속에서 인간의 육이 단결돼 있어요. 참 이거 시간이 가더라도 우리의 육의 구조를 제가 지금부터 그림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부모 밑에서 인간은 땡땡하게 자아를 형성합니다. 이 자아 안에 들어있는 그 내용물들이 뭐냐 하면 부모형제의 따가운 시선이에요. 이걸 언어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은 언어의 반응하는 신체를 갖게 됩니다. 언어에 반응하는 신체.
아무리 맛있는 요리를 먹고 싶어도 누가 옆에서 밥 먹는 걸 쳐다보면 갑자기 신체가 반응을 나타내요. 누구의 시선에 반응을 나타내서 동일한 영양소를 먹어도 야위어가요. 바짝바짝 에벼갑니다. 15년 동안 군만두 먹은 사람, 살졌겠어요? “누구야 너?” 영화에 15년 동안 군만두 먹었을 때에 그게 맛있겠어요? 누가 줬는지, 그러니까 군만두를 보는 게 아니고 누가를 의식하면서 군만두를 보는 거예요.
인간은 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줬느냐? 누구와 함께 밥 먹고 식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거예요. 왜? 어릴 때부터 육신이 신체가 그런 식으로 반응과 발작을 드러내는 신체가 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학으로 신체를 파악해서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과학은 눈물의 화학식은 밝혀내도 왜 저 드라마 보고 찔찔 짜기는 왜 짜느냐 말이죠. 실제로 저거 가족은 울지도 않으면서. 드라마 나오는 것 보면 감정이입 해서 폭포수처럼 우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의 몸은 어릴 때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른이 되더라도 어릴 때 그 감정에서 한없이 마음 터놓고 울고 웃고 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 해요. 그것이 인간의 신체 내부에 정보화돼 있는 겁니다. 각인돼 있는 거예요. 자아가 따가운 시선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나중에 한 45세 되어 어디 카페에서 누굴 만난다. 누굴 만날 때 누가 봐도 그 사람은 한 사람이고, 저 사람도 한 사람 만나고 이렇게 돼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눈에 점선에 보이지 않는 온 식구들 대동하고 만나는 거예요. 저쪽 사람은? 저쪽에 살아오면서 만났던 친구와 친척, 가족들 온 식구 대동하고 만나는 거예요. 집안과 집안의 배틀이에요. 그냥 누가 봐도 사진 찍어보세요. 혼자 일 대 일이죠.
여기 가까운 식구만 해도 형제간이 여덟 식구가 되고 삼촌까지 합해서 20명이라면 이쪽은 단출해서 세 명밖에 없어. 이야기해보세요. 20명과 살아왔던 그 이야기들 털어놓지요. 이쪽에는 달랑 세 명 살면서 털어놓을 게 없잖아요. 한쪽은 엄매 기 살아, 이쪽은 엄매 기죽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럴 때 우린 이 사람의 내부 마음을 들여다보자.
이쪽에 있는 사람은 가족이 많은 사람들, 그림이 좀 흉측하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가족이 많은 사람들은 애가 커나가면서 자아가 커나가면서 외부적인 정보 같은 게 오잖아요. 새로운 지식이라든지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새로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꾸 플러스, 혹처럼 불어날 때에 부모가 “그거 마약이야 하면 안 돼. 술 하면 안 돼. 옳지 좋은 친구, 공부 잘하는 친구는 사귀어야 돼.”라고 조정을 해주니까 이게 불룩불룩 튀어나오다가 대패처럼 이걸 밀어줘요.
밀어줘서 우리 집안에서 선망하는 우리 집안 기대하는 하나의 일원, 집안의 일원으로서 다듬어지는 거죠. 다듬어지니까 이 사람이 세상에 나가서 어떤 일을 만났을 때는 잘 다듬어진 걸로 자기 뜻이 아니고 자기 집안의 후원을 받으니까 잘 대처가 돼요. 그런데 집안 식구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새로운 정보는 받아요.
이걸 구획별로 나눈다면 현재 내가 어릴 때 이랬었는데 A라는 정보도 받고, B라는 정보도 받고, C라는 정보도 받고, D라는 정보도 받는데 누가 쳐주는 사람이 없어요. 쳐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게 중간에 무슨 뜻인지 의문표가 일어나는 거예요. 여기 C 있고 D가 있고 여기 또 E가 있고, 의문표 있고. 의문표가 있으니까 나중에 의문표 모르니까 지워지는 거예요.
지워지게 되면 모습이 어떠냐 하면 흉측해요. 이거는 가족이 많으면 땡글땡글하죠. 이거는 정서적으로 찢어져요. 이렇게 안정감이 없는 거예요. 이 빈자리는 빈자리 채워야 동그랗게 되는데 빈자리가 허전하니까 여기에 대해서 과도한 방어, 방어력, 대항력을 갖고 돼요. 그러니까 뭡니까? 인생을 심각하게 자기 인생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봐요. 이쪽은 뭡니까? 어떻게 돌아가도 편안해요. 누가 만나도 싱글벙글 감사하고. 이쪽은 저 사람이 나를 해코지할까 심각하지요.
인생을 심각하게 느낀다는 것은 지금 그 사람은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예민한 반응을 나타내요. 빈자리를 놔두지 않고 메우잖아요.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지면 메우는 것이 다 증발하고 없어요. 다시 울퉁불퉁하게 돼요. 이쪽은 땡글땡글하게 돼서,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둘 다 구원에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쪽은 화목하게 지옥 가고, 저건 찢어진 채 지옥 가는 것뿐이에요. 구원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너의 원수가 누구다? 집안 식구니라. 보세요. 이렇게 화목하고 단란하고 땡땡한 게 이런 가정에 있는 사람이 자기를 무능하고 아무 쓸모짝 없고 천하 죄인인 것을 본인이 자각하겠어요, 어떻게 하겠어요? 마냥 행복한데요? 다윗이 마냥 행복해요. 못하는 게 없습니다. 모든 게 용납되고 허락되는 자기 세계에요.
주님께서는 다윗을 찢어버립니다. 그게 뭐냐? 다윗과 언약의 만남 또는 다윗과 다윗언약의 만남. 그걸 구체적으로 다윗과 하나님과의 만남. 다윗이 아는 하나님, 율법의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나를 건드리는 하나님, 나를 찢어버리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었어요. 내가 승자, 내가 패배자가 아니고 승자가 되고,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영웅이 되고, 남의 모범이 되고. 모범 되는 나를 찢어버리는 거예요. 말로 해서 될 문제가 아닌데.
여기 제가 ‘모범’ 썼잖아요. 모범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모범적인 인간, 이것 주님이 용납 안 합니다. 훌륭한 인간, 용납 안 해요. 남한테 칭찬받는 인간, 용납 안 합니다. 수요일 설교한 것처럼 하나님 맞아죽었는데 그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거든요. 그런데 그 맞아죽은 하나님 앞에서 어디 지 자랑하고 있어요. 지금 엉뚱한 하나님 찾고 있는 거예요.
탱글탱글하게 화사하게 웃고 늘 안정적인 정서적으로 안정된 마음을 가진 것, 그것과 구원과 무슨 상관있습니까? 그건 어릴 때 그런 가정 출신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늘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어려울 때 찾아와. 다 도와줄게. 모든 걸 도와주고. 애 낳았나? 내 키워줄게.” 세상이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어요. “내가 다 키워줄게. 푼돈 들어가는 것 내가 다 해줄게. 집 없어? 집 사줄게. 차 없어? 차 사줄게.” 그런 부모, 최고에요. 애 키워주고 집 사주고 차 사주고 최고 아닙니까, 최고. 지는 뭐고? 쇼핑만 하는 거예요. 지는 지중해 산토리니 섬, 하얀 집 있는 거기에 놀러 가면 되겠지요.
육에서 온 게 육으로 가고 육으로 마지막 가게 되고, 법으로는 법 안에서 법으로 가요. 주께서는 언약이 와서 어디로 가겠어요? 언약으로 시작해서 어디로 갑니까? 언약으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로 오시지 않고 독수리가 낚아채듯이 우리를 낚아채서 자기 집으로 가요. 언약으로, 언약의 집으로. 이게 바로 중보자입니다. 죽은 우리야가 다윗의 중보자에요.
최근에 상영된 영화에 가 있어요. 분노의 질주에 보게 되면 그 악한 자가 엄청나게 큰 쇠뭉치든 폭탄을 로마 시내에 굴려버려요. 높은 데서 굴린다고. 그러면 그 영화에서 착한 쪽, 머리 홀라당 깎고 우락부락한 착한 쪽, 맨날 차 운전만 하던 그 주인공 쪽에서 팀을 만들어서 이 폭탄을 정지시켜야 되는데 로마의 높은 산에서 굴린 폭탄의 목적지가 어디냐 하면 바티칸 성당이에요.
거기 나온 대사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이 폭탄을 로마에 굴려서 바티칸을 작살내는 이 아이디어 멋지지 않나.” 악한 대장과 부하들과 저희들끼리 대화하면서. 그러면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티칸을 폭파하는 데 신나는 일 아니야?” 그런데 이 폭탄을 개발한 자는 지옥 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 저희끼리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대사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어요.
바티칸 성당을 부수는 게 왜 지옥 가지요? 악한 자가 왜 그런 마음이 들지요? 바티칸 성당을 부수는 게 농담이지만 왜 지옥 간다고 왜 그런 생각을, 그런 약간의 공포심을 왜 갖는 겁니까? 인간은 이미 구원받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냈어요. 거룩한 것을 만들어놓으면 거룩한 것이 나를 구원한다는 그런 희망 같은 것을 인간들이 이미 설정해놨거든요.
그리고 그 설정해놓은 종교적 희망을 비록 악하지만 옛날에 어린애 어렸을 때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가정이니까 외국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나쁜 짓하고 성당 신부님 말 안 들으면 지옥 간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땡글땡글하게 들었겠지요. 그러니까 비록 지금 나쁜 짓해서 바티칸 성당을 폭파시키는 그 폭탄을 제조하고 그걸 실행에 옮기면서도 마음속은 뭐냐? “야 이거 바티칸 성당 부셨다고 날 지옥 보내는 것 아니야,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그런 감은 느끼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그러면 교회 부수면 지옥 갑니까? 물어봅시다. 어떻게 하면 지옥 갑니까? 우리가 무슨 수를 하면 지옥 갑니까? 무슨 수를 하면 천국 가냐는 그런 질문은 많이 했으니까 하지 마시고 질문을 바꿔보는 거예요. 내가 어떤 노력을 하면 지옥 갈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고린도전서 6장 7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 하냐” 이렇게 돼 있어요.
뭔 뜻인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끝부분에,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 하냐” 그러면 지옥 가는 방법은 절대로 불의한테 지지 않고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아니하면 어디 간다?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남자건 여자건 태어난 본성이 지고는 못 살잖아요. 속고는 화가 나서 못 견디지요. 불의한 인간들에게 당한 것만 생각해도 울분이 터지지요. 사람이 승자가 되면 자애를 베푸는 게 아니에요. 승자는 더 심하게 패자한테 굴욕감을 안겨주는 것이 우리의 타고난 악마성입니다.
지옥 가는 방법은 누구한테도 속지 아니하려고 애쓰는 거예요. 나한테 속지 아니하려고 애쓰는 거예요. 불의한테 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러면 그 불의한 자도 지옥 가고, 지도 지옥 가고 둘 다 지옥 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천국 가는 방법은 인간에게 있다, 없다? 없어요. 이스라엘 역사는 그걸 말해주는 거예요. 다윗이 구원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는 걸 보고 생각하기를 다윗이 그때 저녁 때 산책을 안 갔으면 좋을 뻔한 것 아닌가. 산책 가더라도 위만 주님만 쳐다보지 아래를 안 봤으면 좋았을 것 아니냐. 아래를 보더라도 여자가 옷 다 입고 봤으면 좋았을 걸, 이런 것, 이게 뭐냐 하면 안 속으려고 하는 거예요.
나는 속으면 나만 쪼다 된다는 그게 기분 나쁜 거예요. 내가 남한테 지면 그게 굉장히 속상한 겁니다. 남한테 지고는 못 살고 속상한 것은 용납 못해서 사람들은 지옥 가는 거예요. 내가 남한테 속아 넘어가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는 겁니다. 참 이런 쉬운 이야기를 해도 표정이 어두운 이유를 모르겠다.
주님의 언약은 이 세상을 다 둘러서 폭탄처럼 다 뭉개버려요. 바티칸 성당이고 다 뭉개버려요. 물론 영화에선 바티칸 성당 부수면 안 되니까 테베레 강에서 주인공이 차를 이렇게 운전해서 멈췄어요. 거침없이 달리는 것, 그러니까 언약 자체가 이 세상 모든 것이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불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거침없이 달려요. 그걸 저는 분노의 질주라 해요. 언약이 벌이는 분노의 질주, 분노의 질주 제12탄.
굴러가는 폭탄을 누가 감당합니까? 언약 앞에 누가 감히 거기다 멈춰요? 그 언약에 깔렸기 때문에 다윗은 구원받은 거예요. 주께서 다윗이 산책할 때 벌거벗은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게 하셨고, 반하게 하셨고 동침하게 하셨고, 다윗은 자기의 죄를 감추고 알리바이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휴가내서 밧세바의 남편 있는 걸 알고 암몬 나라와 전쟁 중에 불러내서 동침하도록 주선했지만 우리야 장군은 지 부하와 술 먹는다고 집에 들어오질 않고 합궁했다는 어떤 증거가 없이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플랜에이가 실패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요? 플랜비가 동원된 거죠. 플랜비가 뭐냐? 다윗은 기어이 요압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 내용이 뭐냐? 이 편지를 지니고 있는 자를 죽여라. 내용이 편지 안에 있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보고 있는 자를 죽여라.
주님께선 성경으로 우릴 죽이십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5장 39절에 이 모든 성경은 인간을 위한 성경이 아니고 내게 대한 성경이다. 나 예수에 대해서 쓰인 책입니다. 이 성경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필요한 예수님의 자기의 자서전이에요. 자기 책이었습니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죽는다.
지금 암몬 전쟁 중이고 뭐고 관계없어요. 다윗은 언약과 마지막 최후의 결승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기느냐, 다윗이 이기느냐? 나단 선지자가 바로 당신입니다, 라고 했을 때 다윗은 깨끗하게 자기의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이거는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내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로 태어난 것을 이제야 발견한 거예요.
그전까지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가지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죽인 우리야 장군 앞에서, 요새 같으면 십자가 죽은 예수님 앞에서 제대로 내가 누구인 것을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죽으셨는가를, 피 흘리셨는가를 사실을 예수님 앞에서 단독으로 발견한 거예요. 그럴 때 다윗은 훌륭한 사람 되는 게 아니고 다윗은 다윗언약이 되는 겁니다. 노아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노아가 방주 안의 사람인 것처럼 이제는 다윗은 다윗언약 속의 다윗이 된 거예요.
그럼 다시 역대상 18장 13절, 오늘 몇 번 이야기하지만 다시 한 번 봅시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자, 이 구절 다시 봅시다. 묻습니다. 다윗이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이겼지요.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에게 이겨야 돼요, 져야 돼요? 져야지요. 그러면 최종 승자는 누굽니까? 다윗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죠.
그 하나님이란 것을 기념하는 증거가 어디 나오느냐? 바로 여기 18장 8절에 나옵니다. 누구 읽어볼까요? 글자 어렵지만 읽어보세요. 시간 가니까 제가 읽을게요. “또 하닷에셀의 성읍 디브핫과 군에서 심히 많은 놋을 취하였더니 솔로몬이 그것으로 놋바다와 기둥과 놋그릇들을 만들었더라” 이렇게 돼 있지요. 솔로몬이. 솔로몬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나중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이걸 할 땐 솔로몬 이후지만. 다윗 이야기하면서 거기서 솔로몬 끄집어냈어요.
솔로몬은 뭐한 사람인가? 성전을 만들었지요. 그러면 솔로몬은 성전 중심입니다. 솔로몬 아버지가 누구지요? 솔로몬 아버지가 다윗입니까, 다윗언약입니까? 이제는 여러분 답변해야 돼요. 다윗언약이죠. 다윗언약의 특징은 뭐냐? 자기 아들이 되지 못한 자라 할지라도 다윗언약 속에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돼요. 그게 사무엘하 7장 14절에 나옵니다. 내가 친히 내 성전을 지었는데 그 성전은 곧 나의 아들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언약이 와야 되고요 언약으로 다룰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다시피 아들이 누구냐? 예수님이 아들이죠. 그럼 우리가 아들 되고, 그럼 아들이 두 명입니까? 아니죠. 그러면 아들 안에 들어온 아들, 예수 안에 들어온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이 우릴 덮칠 때 어떻게 덮칩니까? 예수님의 피로 덮치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뭐라고 반항하고 대항하느냐? 나한테는 육신의 가족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육신의 가족이 있다는 말은 식구가 많다는 뜻이 아니고 이 자아는 누구 작품이다? 태어날 때 육신의 가족이 부모가 집어넣은 내용물로 탱글탱글하게 만든 그 자아를 아직도 이 나이까지 계속 지탱하고 유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모 다 돌아가셨지만 어느 자리에서도 부모님의 명성과 부모님의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면서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합니다. 이게 자아에요. 우리의 자아라고요. 내가 행동 잘못하면 누구 욕 먹인다? 돌아가신 부모님 욕 먹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걸 생각해서 하는 거예요. 내 안에 돌아가신 부모가 있는 거예요.
근데 그거는 뭡니까? 그거는 법적 체제지요. 육에서 와서 육으로 말미암아 육으로 가는 체제에요. 자아에요. 그 자아로는 예수를 믿든 하나님을 믿든 그것은 어머님의 기도 못 잊어, 아버지의 기도 못 잊어, 이렇게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한 그 육적 본성에다가 구원을 탐을 내는 방식이죠. 내 부모로부터 받은 육 자체가 우리 집안이 하나님의 원수란 생각이 없고 주께서 나를 삼대 째, 사대 째 기독교 집안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란 이런 생각이에요.
다윗이 밧세바를 만나지 말았어야 돼. 그러면 더욱더 훌륭한 영웅적인 이스라엘 왕이 될 텐데, 라는 생각을 다윗의 밧세바 그 대목 본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 “우째 이런 실수를 했나, 그 훌륭한 분이.” 성군이라 하지요, 성군. 그거는 성경을 보면서 다윗을 높이는 것은 사실은 본인이 다윗처럼 높고자 하는 자기의 본심을 간교하게 감추는 거예요. 아까 후딱 지나갔지만 강조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강조합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세요. 여기서 옛 자기라 하는 것은 남들한테 안 지려고 남한테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내 잘남과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 이만큼 살아왔는데 지금까지 남한테 욕 얻어먹을 짓 한 번 안 했다는 그 의젓함, 그게 바로 최종 승리를 결국 내가 최종 승리자로 가져오겠다는 악마의 마음입니다. 성경과 구원과 아무 상관도 없는 자아를 가지고 본인이 대견해 여기고 있는 거예요.
주님한테 빼앗겨야 돼요. 빼앗겨서 동그랑땡을 계란 막으로 휘둘린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찢어지고 개판이고 엉망이라도 그 둘러싼 계란이 이쁜 노란 계란, 그 얼마나 이뻐요. 케첩 쳐서 먹으면 맛있다고요. 그렇게 주께서 가치도 없는 걸 언약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다윗이 되면 우리도 되는 거예요. 다윗이 살인자지요, 간음자지요. 그런데 다윗은 지금 어디 가있습니까? 사도행전에 보세요, 다윗이 어디 가있어요? 지금 하늘나라 가있어요. 하늘나라에 그런 사람이 가있어요.
주께서 언약의 폭탄이 다윗을 깔고 뭉갠 겁니다. 그 뭉개는 모습이 바로 밧세바로 다가왔고 다윗은 자기 자신이 오점이 생기면 안 되니까 자기는 모범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죄를 감추기 위해서 온갖 수작을 다하지요. 자기 알리바이를 나는 어떤 경우라도 정당하고 어떤 경우라도 의롭고 어떤 경우라도 남한테 욕 얻어먹어선 안 되는 그게 바로 나야. 다윗 본인만 그래요, 우린 안 그래요?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성령은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길을 발견하는 동시에 내가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무기력한 강도임을 무능한 강도임을 동시에 발견하지요. 언약 안에서. 마치 노아가 방주 밖에는 심판의 바닷물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방주와 관계 지어서 내가 어디 안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 믿는다가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존재냐를 알면서 예수님과 결합돼 있어요. 연결돼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나를 증거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솔로몬은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 성전에 놋그릇 다 들어가요. 그리고 자기 왕궁에도 놋그릇 다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것이 다 들어가요. 그러면 솔로몬 안에서 누가 계속 승자가 나와요? 하나님만이 최종 승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뭐냐, 솔로몬은 뭐냐? 하나님 승자 되는데 필요한 종이, 일꾼이 되는 거죠.
솔로몬은 종이 되고 주님은 다윗 같은 승자가 되고. 바로 그 관계를 미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범조로 다른 민족과 연결해서 미리 그걸 보여주고 마지막에 이스라엘 자체, 다윗 자체를 하나님과 대결구조로 가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항복케 하는 겁니다.
그럼 역대상엔 이게 왜 빠져있는가? 왜 사무엘하는 암몬 전쟁에서 11장에서 다윗이 우리야 장군 죽이고 밧세바 간음하는 게 있는데 역대상은 왜 그게 없는가? 있어요. 16장에 나옵니다. 지난번에 했거든요. 16장에 보면 시가 나와 있지요. 다윗의 기도 나와 있지요. 그 기도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에 두고 언약궤 앞에서 이런 시를 지은 겁니다. 그 시의 내용이 뭐냐 하면 모든 승리를 오직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된다는 고백이죠.
그게 16장 25절, 26절, 27절,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 처소에 있도다” 그다음에 33절에 보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주께서 땅을 심판하려 오실 것임이로다”
그러니까 역대상에서는 16장이 사무엘하 12장의 내용을 완성된 입장에서 대체해서 집어넣은 거예요. 다윗이 바로 내가 그 사람이고 죄인 맞습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 율법이 아니라, 율법이 아니에요. 율법이 아니고 다른 범주에요. 뭡니까? 자비의 범주, 사랑의 범주, 그냥 용납함의 범주, 그냥 들어와, 들어와 범주, 방주 안에 들어와. 그냥 아무 소리하지 말고 강도라도 좋고 창기 괜찮아. 그냥 들어와.
동그랑땡을 그냥 피 막으로 달걀로 한 것처럼 그냥 들어오는 그거는 그 자비의 범주에서 일체 인간은 법적으로 어떤 것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도 우리가지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언약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윗과 더불어 일하시는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다윗이 승리할 때 많은 사람이 부러워했지만 다윗은 알았습니다. 이것이 나의 승리가 아니라 주를 위한 주님의 승리인 것을 저희들도 같이 공감해서 주님만 쳐다볼 수 있고 별을 찾아온 동방박사처럼 주님만 생각하는 십자가만 생각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