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0526b 다니엘9장 27절(지옥으로 출근)-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30526b 다니엘9장 27절(지옥으로 출근)-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와 이어져서 여기 칠판에 써놨죠. [위험한 상황 : 내 것이 생기는 상황] B공간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은 내가 죽는 상황 또는 가난한 상황, 그런 상황이 아니고 내 것이 생기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 한 예가 사렙다 과부, 엘리야가 찾아갔던 사렙다 과부 있잖아요. 그 과부를 찾아간 타이밍에 아들하고 과부가 마지막 남은 가루와 마지막 남은 기름가지고 이거 먹고 죽자고 했을 때에, 그때 죽는 순간에 그 기름과 밀가루가 누구 소유입니까? 과부 소유죠. 자기 거죠. 그런데 그걸 홀라당 엘리야가 빼앗아 먹었잖아요. 그럼 과부는 이제 정말 자기 것이 없이 되어버렸어요.
그리고 난 뒤에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에게 밀가루 통이 마르지 않고 기름이 다하지 않도록 계속 채워줬죠. 자, 그럴 때 그 밀가루와 기름은 누구 것입니까? 그 과부 가정은 자기 것이라고 여긴 거예요. 좋은 선지자 만나서 우리가 이제 더 잘 살게 되었다는 거예요. 가뭄 때문에 어려운 시기에 잘 살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장독을 빤질빤질하게 물로 씻은 셈이 되죠.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죽죠. 아들이 죽으니까 그렇게 엘리야에게 호의를 갖고 있던 과부가 길길이 뛰면서 정말 멱살 쥐고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달려들었잖아요. 당신을 안 만났으면 내 아들이 안 죽었을 건데 당신 만나서 멀쩡한 내 아들 죽게 되었다 할 때 엘리야가 죽은 아들 위에 세 번 엎드려 부르짖고 아들 살려냈잖아요. 그렇다면 그 과부 아들은 누구 것입니까, 이제는? 하나님 것이죠.
그러니까 B공간, 천국공간에서 제일 위험한 것은 뭐냐? 내 것이 생기는 상황이죠. 그러면 주께서 B공간을 B공간답게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 것이 생기는 이 위험한 상황에서 내 것이 생기는 것을 내 것을 제거해주는 것, 이게 복이 되는 겁니다. 내 것을 제거하는 것.
또 한 예를 들게요.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잖아요. 그 포도주는 누구 포도주입니까? 그 혼인잔치 주최 측의 포도주죠. 그 다음에 마리아가 예수님보고 포도주 떨어졌다 할 때 마리아가 요구한 포도주는 어느 쪽 포도주입니까? 이 혼주 쪽에 필요한 포도주, 우리 포도주가 필요하죠.
주께서 포도주를 줬습니까, 물 줬습니까? 물 줬죠. 물을 준 거예요. 물을 항아리에 담은 아이디어는 그 주최 측, 혼주 측 어느 누구의 아이디어에 그런 게 없어요. 물을 갖다 줬다 이 말이죠, 손님들에게. 물이나 먹으라고 물 갖다 준 거예요. 그렇게 먹었을 때, 그걸 퍼먹으니까 그게 포도주 되었죠. 그때 손님들이 한결같이 칭찬하기를, 이 포도주 어디서 구했냐 하는 거예요. 그럼 이 포도주는 어디서 구했어요? 예수님에게 나왔죠. 예수님에게서.
처음에 혼주 측 포도주로 시작했던 이야기가 예수님이 개입해서 어떻게 된다? 내 포도주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온 주님의 포도주로 그들을 먹인 거예요. 물이 뭐로 변했습니까? 포도주로 변한 거예요, 물이.
그런데 처음부터 주께서 포도주로 왜 안 줬습니까? 그냥 포도주를 주면 그들은 자기상실이라는 기회를 놓쳐버려요. 내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기회가 없어져버려요. ‘내게 필요한 것 주께서 더 주셨다’가 되어버립니다. 그건 A공간이에요. A공간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정도 됐죠. 그럼 세 번째 응용문제 들어갈 때 여러분이 맞춰보세요. 이건 여러분들이 맞추는 겁니다. 성경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 있죠. 자, 문제입니다. 문제: 여기 내 휴대폰이 있는데 커피 마시면서 휴대폰을 책상에 놔뒀다 합시다. 그런데 정신 좀 이상한 사람이 와서 “내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할 때, 여기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에요. 하나는 Yes. 하나는 No. 제 질문은 Yes뒤에 뭐가 붙고 No뒤에 뭐가 붙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출제자가 자기 마음대로에요. 답은 나 혼자 알고 있어요. 비겁한 거예요.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Yes.” 힌트는 뭡니까? 주께서는 어떤 사태를 만드는데 내 것이 생기는 상황을 제거하는 사태를 만들죠, 일상에서.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Yes.” 그다음에 뭡니까? “내 것이 아니니까.” 그러면 “No.”뒤에는 뭡니까? “가져가지 마세요.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니니까.”
쓸데없이 동냥하고 돈 도와주고 하지 마세요. 유니세프 같은 거 돈 내지 말고. 내 돈입니까? 주의 돈인데 왜 함부로 써요? 왜 혼자 기분 내고 자기 착한 척해요. 이걸 충실히 했던 자가 사도행전 3장에 나옵니다. 어떤 거지가 사도 두 사람보고 “돈 주세요.” 하니까 그 사도가 정말 참 기쁜 소식을 이야기했죠. “나 돈 없다. 돈 없지만 내게 있는 걸 줄게. 주의 이름 줄게.” 참… 돈을 아끼는 방법도 여러 가지에요. 돈을 절약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죠. 네가 원하기 때문에 No!가 되는 거예요.
전에 서울 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어떤 같은 교회 집사님이 있는데 자기 애 이야기하면서 “우리 애가 지금 불치병에 걸렸는데 불치병 치료비 500만원인데 우리 집에 돈도 없고 나보다 빨리 천국가게 돼서 말로 다할 수 없이 너무 기뻐가지고 너한테 자랑하려고 한다. 치료비 없어서 곧 사흘 뒤에 죽는데 나 너무 기뻐.” 이거 무슨 뜻이에요, 이게? 뭐 돈 빌려달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사람 심리적 압박을 하면서 말을 합니까?
그러면 “아이고 당신 집에 경사 났네요.” 무슨 뜻입니까? 아래쪽에 No죠. 당신 그 소리해서 내 돈 넘볼 생각마라. No잖아요. 그런데 “불치병인 자식을 500만원 들여 살려놔야 당신 죄가 더 들추어질 것 같아. 그 애가 죽는 것보다도 살아있어서 당신을 더 괴롭힐 필요가 있어. 옛다 500만원. 애한테는 무작정 손해지만, 좀더 사니까 손해지만, 부모가 죄를 깨닫기 위해서 더 살 필요가 있다고 난 생각해. 가져가세요. 왜? 내 것 아니니까.”
모든 건 주의 것이에요. 주께서 쓰실 때 반드시 쓰시는 용도가 뭐냐 하면 우리는 어떤 내 것을 가질 자격도 없다는 것을 반드시 들추어내면서 그걸 쓰시는 거예요, 주께서.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 (고전 10:31) 주의 것이니까 주께서 쓰시는데 그 쓰시는 용도는 B공간에서는 나를 부인하는 식으로 부인하는 데에 필요한 비용으로 들어간다 이 말이에요.
변화산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의 영광을 보았죠. 아주 신났죠. 신났어. 그런데 변화산에 영광 본 것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에요. 왜냐하면 이걸 보고 갑자기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이 산 위에서 같이 살겠다고 제안을 했다는 것은 지금 주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자기부인할 수 있는 절차를 경유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축구시합을 하는데 결과는 2:2로 끝나는 것을 주께서 아셔요. 그런데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0:2로 만들어요. 20세 이하 월드컵 대회 이야기입니다. 어제 했어요. 0:2해놓고 뒤에 2골 넣게 했어요.
자, 0:2는 뭡니까? 졌어, 졌어. 끝났다, 끝났다. 갑자기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 편을 들면서 아까 공부했던, 인정받고 싶은 자기인정, 자기긍정, 역시 우리나라는 아~대한민국 최고야. A공간에서 사는 보람이 자기긍정에 있거든요. 내가 편든 우리 팀이 0:2로 지고 있으니까 끝났다, 졌다 했는데 나중에 자다 깨서 보게 되니까 2:2되었어요. 그나마도 다행이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
왜 0:2로 만드느냐? 주께서는 반대로 갑자기 베드로하고 붕 떴어요. 마치 예수님, 엘리야, 모세 그다음 옆에 누가 있다? 베드로가 마치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변화산 상황과 십자가 상황이 동일하게 위험한 상황이에요.
사실은 어느 상황이 효과적입니까?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앞에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0:2에요. 아니 0:5에요. 주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아시겠죠. 주께서 왜 우리 기도대로 안 해주시는지 이유를 알겠죠. 그것이 바로 이레입니다. 우리가 아는 어떤 시간도 아닌, 상상도 못한 새로운 시간이 이레에요.
그럼 이제부터는 이레가 무엇인가? 이레라는 시간, 7년의 의미가 뭐냐? 이걸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미리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자신이 투여한 양만큼 비례해서 변화를 나타낸다]
이게 원금+이자가 복리로 계산될 때에요. 1000만원 예금했는데 이자가 2%다, 그럼 200만원되죠. 그럼 그다음 1000만원에 200만원 이자 주는 게 아니에요. 1200만원에 2%가 추가되죠. 자기에게 투여한 양만큼 비례해서 변화된다는 겁니다.
[이레라는 시간은 그(이레) 시간에 해당되는 사건투입이 전제되고 그 전제된 사건에 비례해서 그다음 사건이 전개된다] 이게 이레입니다.
*두 번째 강의 15:20-24:40 오일러 상수(자연 상수, e)에 관한 내용은 첨부한 이미지 파일로 대체합니다.
오일러의 수(Euler's number) ℯ=2.71828…도 그렇고요. π 있잖아요. 3.14159… π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거 중요한 겁니다, 원의 둘레와 지름 사이의 비율이에요, 비율. 비율이 3.14159… 쭉 나오잖아요. 그처럼 비율이 1이 되는, 지수에 어떤 수를 넣어도 값(비례상수)이 1이 될 수밖에 없는 밑(ℯ)을 위하여 다른 규칙이 있다는 겁니다.
3.14159… ‘그 많은 숫자가운데 왜 3.14159…라는 숫자만이 원과 지름 사이의 비율을 나타내느냐?’라고 질문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지름과 원둘레 사이는 3.14입니다, 이게 아니고, 이 세상에 숫자가 많잖아요. 7도 있고 46도 있고 567000도 있는데 ‘왜 하필 3.14159가 그 많은 숫자가운데 왜 이 숫자가 지름과 원둘레 사이의 비율이 되느냐?’ 이것과 ‘그 많은 복리계산에서 2.71828이라는 이 특수상수만이 왜 동일한 비율로 변화율을 드러내느냐?’ 라는 거예요.
이게 상수에요, 상수. 어떤 함수나 변수 x, y 뭐든 관계없어요.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고요. 마치 π처럼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는 거예요. 방금 했던 오일러 수 ℯ라는 의미가… 밑이 2일 때와 8일 때 비례상수가 몇 배 차이라 했습니까? 3배 차이였죠. 2³=8이니까. 비례상수가 1이 되는 경우는 지수함수의 밑이 ℯ일 때인데, 비율로 8은 2의 3제곱이 되고 2는 8의 ⅓제곱이 되니까 값이 ⅓이 되는 딱딱 들어맞는 이런 규칙성을 갖고 있는 경우처럼 ℯ라는 수를 밑으로 사용했을 때 어떤 변수를 집어넣어도 비례상수는 1로 드러난다는 거예요.
π를 사용할 때는, 어떤 원이든 작은 원이든 큰 원이든 엄청난 원이든 간에 비율은 한결같이 3.14159…. 그래, 그게 맞지. 수학자는 ‘맞지’가 아니라 ‘왜 6, 7, 8, 2466, 4550 많은 숫자가 있는데 왜 3.14159가 비율을 나타내는 유일한 숫자로서 그게 들어가느냐?’ 그것을 문제 삼는 거예요.
수학자들도 참 골치 아픈 사람들이죠. 비율이 그렇게 된다, 그럼 끝날 걸가지고 문제 삼는 거예요. 왜 다른 숫자는 안 되고 3.14159만 되냐는 거예요. 그럼 관점이 뭡니까, 관점이? 우리가 편리하다는 관점이 아니라 숫자에 미친 거예요. 3.14159, 원이 작고 크고 다 다른데 왜 비율은 한결같이 딱 그렇게 3.14159냐 이 말입니다.
제가 수학이야기를 왜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이레라는 딱 하나의 시간 개념을 왜 집어넣느냐는 거예요. 그 많은 시간 개념이 있는데, 왜 이레인가? 그리고 그게 한결같죠. 언약에서 한결같이 적용시키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숫자 이야기를 한 결론입니다. π이야기와 오일러 수 이야기.
ℯ, 특수한 상수가 들어가버리면 비율이 똑같이 되는 거예요. ℯ가 들어가면 어떤 변수를 넣어도 1.0000이 나오니까. 그렇게 해서 수학자들이 ℯ를 집어넣어 계산을 하면 굉장히 편리해요. 도함수라는 말을 안 꺼내려고 했는데 도함수를 꼭 설명해야 돼요. 자기 자신을 쪼개면 쪼개지고 쪼개진 비율이, 처음에 쪼개졌던 비율과 어떻게 그렇게 1.0000. 똑같은가 하는 겁니다. (도함수(derivative): 특정 순간에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나타내는 순간 변화율)
작은 원, 큰 원, 작은 원, 큰 원, 그렇게 있더라도 원의 크기와 관계없이 어떻게 비율이, 비율입니다, 3.14159…이냐 이 말이죠. 무리수가 나오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수학자들은 복잡한 계산들을 아주 편리하게 수식을 세워서 수식대로 자기 논리를 전개시키거든요.
이 세상에 많은 초(秒,second)도 있고 날(日,day)도 있고 분(分,minute)도 있고 시(時,hour)도 있고 시간단위가 많잖아요. 왜 하필이면 이레냐 이 말이죠, 언약에서는. 이 이야기하려고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이야기를 끄집어낸 거예요. 규칙성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언약적 규칙성을 부여했는데 그게 시간적 표현이었다. 이레라는 시간적 표현을 가지고 집어넣었다.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주께서 이레를 집어넣고 집어넣은 그 자체를 이레로 또 거기다 처발라버리죠. 이레로. 그러면 이레의 핵심부분을 보자는 거예요. 그건 아까 우리 봤어요.
70이레로 시작해놓고, 원이 커요, 큰 원 안에 작은 원이 있는 거예요. 70이레 가운데서 조그만 원, 이 원이 1이레가 되겠죠. 1이레가 반으로 쪼개지는 거예요. 이미 쪼개졌다 할 때는 아까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시간적 개념은 더 이상 접근 불가에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해요. 도저히 이해가 안돼요. 어떻게 시간이 쪼개져요. 시간은 변화되는 것이지, 쪼개지는 게 아니잖아요. 시간은 쪼개지는 게 아니란 말이죠.
어떤 사람이 ‘영숙’이라고 부르니까, 사람들이 ‘영’은 어디가고 ‘숙’은 어디 갔냐고 묻는 거예요. 이게 말이 돼요? 영숙이가 한 사람 이름인데 아니야, 영이라는 사람이 있고 숙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신이라 하는 것은 전부다 통합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주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게 무슨 뜻이에요? “우리 다른 신 안 찾아요. 신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나를 못 알아본다, 그러니까. 쪼개지는 거? 내가 쪼개진 모습으로 올게. 내가. 너희들이 아는 신과 시내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내가 알려줄게.” 그게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게 언약의 시작이죠, 언약의 시작.
그렇다면 이 이레에서 인간들이 접근할 수 없는 시간의 원천이 여기서 시작될 때 ½+½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½에 뭘 했는가? 보면 알겠죠. 다니엘 9장 27절,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자, 언약의 핵심이 한 이레에 일어나는 겁니다.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0:2죠. 온두라스와 한국팀, 0:2. 초반부터 인간의 모든 제사와 예물은 금지됐죠. 그럼 이건 뭡니까? 율법으로 의롭다 할 자는 없다, 가 되죠. 율법으로 의롭다 할 자는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선악체제 인식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죠. 제가 묻습니다. 여기서 사람이 중요합니까, 의로움이 중요합니까? 제가 묻는 겁니다. 뭐가 중요해요? 의로움이죠. 의로움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거죠.
아까 수학자들이 문제를 이렇게 했죠. 왜 많은 숫자가운데 3.14159만이 왜 원의 비율로 들어가는 숫자이어야 하는가, 할 때 그 수학자는 사람위주로 생각하는 겁니까, 사람보다 더 위에 있는 숫자위주로 생각하는 거예요? 숫자가 인간보다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숫자를 이용하면 되지, 가 아니라 숫자에 어떤 신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신비를 캐내는 우리는 종으로서 머슴으로서 수의 비밀을 캐내는 것이 진정한 수학자들의 마음자세죠. 종교입니다, 종교. 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거예요.
피카소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그림이 나를 그리게 한다.’ 이런 말을 했어요. 그림이 나를 그리게 한다. 그리고 ‘그림이 그리라면 난 어쩔 수 없어.’ 이런 말했거든요. 완전히 미술이 종교라니까요. 타인을 즐겁게 하는 것? 피카소는 없습니다. 타인을 즐겁게 할 생각이 피카소는 없어요. 그걸 모더니즘(modernism)이라 해요. 모더니즘이라 하는 것은 정통적으로 내려오던 모든 인간들의 예술 감각을 뒤엎는 게 모더니즘이에요.
바깥의 사물을 어떻게 정밀하게 그리느냐, 우리는 그런 미술 안한다. 나의 마음 속 혼란스러움, 불안하면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림이 모더니즘이에요.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있잖아요. 두 손으로 얼굴 감싸 쥐고 비명 지르는. 영화에 나오는 이런 거. 그림이야 뭐야? 애들 장난이야? 얼마나 욕 얻어먹었다고요, 그 당시에. 그러면서도 미술가들은 그걸 수집했어요. 돈 되지 싶어서.
인간은 이미 신을 믿는 게 아니에요. 인간에겐 인간을 종 부리듯 하는 신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게 수학이고 그게 예술이었어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뭐냐? 자기 가문, 족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죠. 자기 족보에요. 우리 집안이에요. 우리 집안을 빛내기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우리 집안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어요. 우리 가정.
그래서 사람들이 어릴 때 자기가 부모로부터 딸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천대받고 새엄마한테 얻어맞아서 가출했던 그 아줌마가, 내가 나중에 결혼해서 딸 낳으면 난 이렇게 안 키운다 해서 악착같이 20대부터 고물상해서 지금은 고물상 크게 해요, 남편 따라서. 아들 둘, 딸 하나 낳았습니다. 갑자기 인간극장 이야기를 여기서 왜 하고 있는가. 복수하는 거예요.
A공간에서 인간은 복수하는 겁니다. 내가 이미 신봉하는 신이 따로 있어요. 성경에서는 그게 마귀죠. 선악과를 먹으라고 한 마귀지만 인간은 마귀는 모르고 나는 나의 이상형이 있어요. 내가 신을 믿는 게 아니고 신이 나를 인도하고 믿게 하는 거예요. A공간에서도 종교는 똑같아요. 그게 마귀 종교이지만 어쨌든 간에 종교는 종교에요. 신봉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거예요. 헌신하는 재미로.
B공간에서는 주님 공간에서는 그 신과 싸웁니다. 싸워서 져요. 패배해버려요. 그 패배한 자리,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새로운 모퉁이 돌로 시작되는 겁니다. (행 4:11) 따라서 성령을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겪었던 절차를 똑같이 그걸 밟게 만들어요.
다시 다니엘 9장 27절을 보면,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1이레이니까 쪼개면 뭐가 돼요? 0.5되죠. 0.5이레니까 3.5년이죠. 3.5년 동안은 철저하게 율법이고 뭐고 모든 것이 주의 율법이 유린돼요. 유린되고 나머지 3.5는 비어있습니다. 3.5는 박살나고 박살난 3.5와 또 플러스 3.5가 있는 것이 아니고 3.5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여기 겹쳐져 있는 3.5가 있어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서 한때 두때 반때, 0.5. (계 12:14) 이걸 시각적으로 보자 이 말이에요. 더하지 말고. 더해도 되지만 시각적으로 펼쳐봅시다. 펼쳐진 것을 한꺼번에 합쳐버리면 뭐가 돼요? 3.5(년)=42달=1260일. 요한계시록의 한때 두때 반때의 비밀이 이렇게 풀리는 거예요.
이미 천국, B공간이 형성되어있기 때문에 A공간은 B공간의 영광을 위해서 철저하게 모든 것이 유린되어야 되고 파괴되어야 돼요. 지옥다워야 돼요. 그것도 아주 철두철미하게 지옥다워야 돼요.
그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 보세요. 사는 의미 없습니다. 사는 의미 없어요. 직장 들어가면 뛰쳐나와버려요. 상사가 나한테 갑질했다고. 왜 상사가 너한테 갑질하는데? 나 일 못한다고 나한테 갑질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에요? 아무 의미 없어요. 사는 자체가 아무 의미 없고 그때 그때 즉흥적이에요. 방탄소년단만 찾고 있으면 돼요. 보랏빛 옷만 입고 봉 흔들면 되는 거예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왜 의미가 없느냐? 계속 의미 없으니까 비어있는 그 갈급함, 결핍을 더 짜릿한 의미로 계속 채우는 일, 그래서 그게 의미 있다는 거예요. 채우는 것.
그러면 이 반 이레(3.5년) 기간의 실선이 있다면 뒷배경으로 반 이레(3.5년)가 점선으로 겹쳐있겠죠. B공간에 의해서 A공간이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거예요. 이것은 B공간이 B공간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율법을 지켜서 이 땅에서 고난을 겪는다고 B공간 넣어주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B공간에 들어간 사람은 뭐냐? 바로 A공간에 유린당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기상해서 출근하는 사람. 이걸 성경에서 ‘소자’라 합니다. “제가 언제 주님을 섬겼습니까?”하고 되묻는 사람들. 제가 언제 주님을 위해서 했습니까, 하고 되묻는다는 것은 나에 대한 관심사가 없죠. 나에 대한 생각이 없어져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말씀으로 이 두 겹친 공간을 주니까요. 그때 소자는, 소자가 성도죠, 성도는 무엇을 경험하는가? 이레를 경험합니다. π를 경험하고 오일러 수 ℯ를 경험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똑같은 법칙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똑같은 법칙으로.
그러니까 주님의 똑같은, 언약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확고한 원칙을 위해서 수시로 나에게 변화를 유발시키는데 변화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바로 이 소자, 성도한테 있는 겁니다.
만약에 성도의 일상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자기가 동일한 게 곧 언약이 동일한 걸로 착각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까불었다가 때로는 은혜 받았다가 때로는 분노하다가 날마다 매일같이 천장에 달린 등잔처럼 흔들리는 가운데서 변화하는 가운데서, 붙들어주는 변하지 않는 그 축과 우리 사이의 비례관계, 이레라는 비례관계, 그 관계 속에 언약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거예요. 이레 안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러면 실제로 이렇게 규칙이 되는지를 한번 봅시다. 확인해보면 되죠. 전체 흘러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가운데 하나님께서 땅을 안식하기 위해서 70년을 끄집어냈다 했죠. 70년인데 갑자기 다니엘 9장에 와서 70년이 뭐 됐어요? 70년이 아니고 70이레가 돼버렸죠. 70이레가 됨으로써 70년 지나면 71년, 72년, 73년 이렇게 우리는 다시 본국에 돌아간다는 희망은 이제 끝입니다. 없습니다. 만약에 70년 지나고 70년 후에 돌아가면 이것은 장독을 물로 씻은 거예요.
어렵게 이야기해서 인간은 율법의 연속성 안에서 구원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율법의 연속성은, 전에는 율법을 못 지켰지만 지금은 우리가 70년 동안 벌 받았기 때문에 벌섰기 때문에 반성했기 때문에 후로는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 이게 바로 바리새인이고 이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기 소유의 인간이 계속 살아있죠.
그러나 주님은 뭡니까? 율법을 끝내버려요. 율법의 연장선이 아니고 70년에서 70이레로 바뀌어버려요. 그러면 70년뿐만 아니고 그전에 있던 시간, 후에 있던 시간, 이 모든 시간은 하나님 언약적 시간으로서 탈락입니다. 탈락이에요. 인간은 기존의 시간 속에 A공간 속에 자기 몸을 어떤 식으로든 긍정하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입니다. 희미한 갈색등불 아래, 커피 잔 두고 앉아있다 보니까 갑자기 자기가 옛날에 사랑했던 남자가 생각난 거예요. 그것과 비슷한 노래가 인가 있죠. 조용필이 부른 노래 있잖아요. 그 가사도 그렇잖아요. 커피는 식어가는데 그 사람은 오질 않네.
희미한 갈색등불 아래 싸늘히 식어 가는 커피잔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고 나만 홀로 남은 찻집
아무런 약속도 없는데 그 사람 올 리도 없는데
나도 몰래 또 다시 찾아온 지난 날 추억 속의 찻집
우리는 나란히 커피를 마시며 뜨거운 가슴 나누었는데
음악에 취해서 사랑에 취해서 끝없이 행복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대는 떠나고 갈색 등 불빛만 남아
외로운 찻잔에 싸늘한 찻잔에 희미한 갈색추억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에 그 찻집
마른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긴 밤이여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이게 뭡니까? 자기부정입니까, 아니면 시간 속에서 계속 자기가 살아있는 거예요? 자기가 살아있는 거예요, 시간 속에서.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디에 집어넣습니까? 이레 속에 집어넣습니까, 시간 속에 집어넣습니까? 0:2로 시작돼요, 0:2로. 그래야 주님이 함께 있는, 주님이 하시는 언약적 규칙성이 내 힘으로 안 되는 걸 주께서 하게 하심을 느끼게 하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시간 속에 살아서 축축한 과거에 늘 잠기게 해요. 특히 비오는 날이라든지 날씨 흐린 날, 시간이 정지됩니다. 흘러간 팝송이나 들으면서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죠. 눈물도 찔끔 나고.
그럴 때 복음 들었는데 ‘A공간! 가라, 지옥으로!’ 하면 ‘주님은 저를 왜 찾아오십니까?’ 이런 고백이 막 튀어나올 때, 그 사람은 겹쳐진 거예요. A공간, B공간이 하나의 육신을 중간에 두고 둘이 비어있는 거예요. 내가 몰랐던 나를 B공간 안목에서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이게 우리 육신이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다니엘이 아직도 고생해야 될 이유고요. 그러나 다니엘은 70년이 아니고 70이레를 알았죠.
우리가 육신으로 있는 이 시간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깨어져야 되고 우리 성도는 깨어질 때 같이 깨어지면서… ‘이 육신은 복음의 이름으로 온갖 핍박을 고난을 받아야 될 그 시간 속에 육신을 집어넣어놨구나.’ 하지만 우리는 저녁에는 천국으로 퇴근하고 아침에는 지옥으로 출근해서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에게 채우기 위해서 아직도 육신을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언약 속에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사오니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저희들, 알아듣지 못하는 육신과 예수님 영에 의해서 알아듣는 두 가지가 겸비되어 있는 생활을 하게 하여 주시고 반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