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30518a 요한일서 1장 8절(주체 박탈)-이 근호 목사
서울강의20230518a 요한일서 1장 8절(주체 박탈)-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1장 5절에서 10절까지 하겠습니다. “(1:5)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1:6)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1:7)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8)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성경말씀은 우리를 무능하게 만듭니다. 성경말씀이 여기 10절에 보면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한다 했는데 말씀이 있는 경우라면 어떤 경우냐? 다음 문장을 보게 되면 어떤 경우에 말씀이 있다, 라고 할 수 있는가가 드러납니다.
[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므로 하늘이 있다.] 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므로 비로소 하늘이 거기에 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보입니까? 안 보이죠. 하늘이 안 보여요. 하늘은 공간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새가 하늘에 있다가 떨어질 때, 사람들은 새는 하늘을 날고 다녀야 그게 새다운 거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새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 우리는 이것을 이상스럽게 여깁니다. 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이상스럽게 보는 일은, 하늘이 하늘다워야 된다는 생각에서인데 하늘이 하늘답다는 생각의 내용이 뭐냐? 새가 안 떨어져야 돼요.
갑자기 새가 떨어지면 ‘저 새가 병들었나? 무슨 약을 먹었나?’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배경으로 할 때냐 하면 하늘을 배경으로 할 때, 새가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는 하늘의 존재가 자각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새를 우리 인간으로 보자 이 말이죠. 인간으로. 인간으로 봐버리면 인간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냥 인간이 있다고 해요. 누구와 같이 있는 존재로 인간이 아니고 ‘인간은 그냥 인간으로 있다. 평소에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수요일에 설교하면서 제가 초반에 굉장히 강조한 게 있어요. [사는 것은 사는 것이다.] 사는 것은 그냥 사는 거예요. 산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는데 하나님까지 챙겨야 살지 않느냐?’ 그런 생각은 이 세상사는 사람에게 거의 없어요. 그걸 요구해서도 안 되는 겁니다. 존재의 이유도 사는 것이고, 사는 목적도 사는 것이고, 살아야 될 원동력이 제공되는 것도 그냥 사는 그 자체가 사는 것의 원동력, 하나의 추진력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내가 산다’ 해버리면 그걸로 인간에 대한 평가는 끝이에요. 끝났습니다. “너 요새 어떻게 지내?” “그냥 살아. 됐냐? 그 정도 하면 제대로 사는 것 맞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산다는 것은, 인간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더는 필요치 않은 최종적인 평가 기준이 뭐냐? “너 살아?” “응. 살아.” “됐네.” 끝났어요.
“사는데 좀 재미나게 살아보지.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고.” “아니, 좀 바빠, 나.” 하나의 액세서리죠. 떨어져나가면 그만이에요. 왜냐하면 산다는 그 자체가 완료기 때문에 거기다 좀 감미료 치듯이 ‘사는데 심심하니까 교회나 나가보자. 하나님 믿어볼까? 예수 믿어볼까?’ 이거는 하나의 조미료 탁탁 치는 거죠.
하나님 믿는 것이 굳이 할 필요 없고 해도 뭐 별로 나쁜 건 아니지만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행여나 하나님 믿고 예수 믿는 것이 진짜 내 존재 이유, 사는 데에 요만큼이라도 지장이 되면 우리는 분노합니다. 우리는 화를 내죠. 하나님이 뭔데, 내 사는 데에 지장을 주냐. 분노하죠. 내가 인간성이 좋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 믿는 게 불편해도 내가 워낙 인간성이 좋기 때문에 교회 나가주는 거죠. 워낙 인간성이 좋으니까. 워낙 배려심이 많아서. 하나님에 대한 배려심이 많아서 하나님 믿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교회 안다니고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에게 우리들은 전혀 분노하지 않습니다. 부러워하죠. 세상에, 하나님도 안 믿는데 우에 저렇게 잘 살지? 하나님 믿지도 않는데 애들 공부를 왜 그리 잘해. 하나님도 믿지 않는데 비트코인 좀 하니까 40억씩 팍팍 들어오고. 세상에, 아이고 부러워라. 우리 능력 있는 하나님 뭐 하노? 나한테 그런 혜택 줘야지.
이 모든 이야기는 뭐냐 하면 내가 산다는 우리 존재의 배경 색깔은 ‘나는 살아야 돼. 그리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어.’ 그걸로 종결됐습니다. 그걸로 끝났어요. 그러니까 오늘 요한일서에서는 그 배경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우리가 ‘살아있냐?’ 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네가 ‘네 배경이 빛이냐?’ 고 묻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거죠. 그런데 이 당황스러운 것도 이거 뭐 요한일서에 대해서 관심이 좀 있어야 당황스럽지, 사는데 바쁜 사람한테는 성경이 뭐라고 하든 전혀 never never 전혀 당황스럽지 않습니다. 참 잔소리도 되게 많다, 뭐 그런 걸로 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나온 사람들은 빛을 배경으로 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고 나 살아가는 데에 지장 없기를 바라면서 교회 다 나오죠. 살아가는데 지장 없기를. 이왕 사는 거 풍성하게 살 수 있는….
그러니까 사는 데에 하나님 쪽에서 뭔가 보탬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는 그러한 노림수를 가지고 교회 나오잖아요. 교회 자취하려고 나오지는 않죠. 교회 하숙하려고 안 나오죠. 자기 살 집은 교회가 아니고 자기 살 집은 어디냐? 자기 집, 아파트 따로 있어요. 일주일 동안 어느 쪽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지, 자기 아파트에 사는지 교회에 사는지 한번 구분해보세요. 자기 아파트에서 살죠.
‘나는 이제 교회 갈 필요 없어. 왜? 우리 집이 교회니까.’ 뭐 이정도 신앙 같으면 그건 뭐, 짝짝짝 칭찬을 해줘야죠. 그렇게 생각안하고 ‘교회는 한 500m 떨어져 있어. 여기는 내 살 집이야.’ 말을 무심코 내뱉지만 이미 저울에 달아보면 교회는 시답잖고 내 사는 곳은 이만큼 무게감이 거기로 기울어져 있어요. 강력하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궁금할 거예요. 여기 성경 요한일서에서는 빛이 배경으로 되어 있고 우리는 그냥 일상적으로 사는 게 배경으로 되어 있을 때에, 일상적으로 사는 게 배경으로 되어 있는 내가 빛을 배경으로 존재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없겠는가? 성경대로. 그 방법은 우리 성경에서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새가 떨어지면 되죠.
새가 안 떨어지면 새는 하늘을 생각하지 않고 날고 있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아이, 신난다. 오늘 공기 기분 괜찮네. 오늘 나는데 굉장히 가볍게 날 수 있네.’ 하는 것처럼. 새는 바람이 불어주게 되면 자기 사는 데 수월했다는 것 때문에 한껏 자기 산다는 것, 공중을 난다는 것에 대해서 대만족을 하고 있죠. 하늘을 생각하지 않고 날고 있는 자기 새 본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인간은 완전히 새 됐어. 인간은 완전히 새 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새보고 떨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떨어지게 되면 비로소 ‘아, 내가 저 하늘에 있어야 되는데 내가 왜 얼굴 터져가지고 피나면서 땅에 빌빌 기고 있지? 나는 새 아닌가? 공중을 날아야 될 내가 벌레도 아니고 왜 땅에 떨어져?’ 했을 때 비로소 하늘의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새가 땅에 떨어졌을 때요.
그게 8절에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10절에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우리가 범죄하지 않을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하나님보다 내가 우선입니다.’ 이게 우리가 범죄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하지만 나보다는 덜 중요합니다. 내가 더 중요해요.’ 이게 인간에게 범죄하지 않는 경우에요. 왜냐하면 평가하는 주체자가 여전히 나로 쥐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에요.
거짓말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는 인간은 누가 평가하기를 원하느냐 하면 내가 나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고집부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인간도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게 되면 자기가 죄인입니까, 죄인 아닙니까? 죄인 아니죠. 의로운 자죠.
이 험악한 세상에서 이만큼 살아내는 것도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한 일입니까. 인간이 새처럼 피곤한 인생을 살면서 그 피곤함을 이겨내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대견하게 계속 느끼면서 스스로 자기를 훌륭하다고 느끼면서 버티는 것, 그것만이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그러면 교회 가서 할 일은 뭔데? 교회 가서 할 일은, 내가 지금 나에 대해서 좋게 내리는 그 평가에 대해서 주님이 격려해주면 되죠. 하나님이 격려해주면 된다는 거예요. 장하다. 잘했다. 하나님은 내 편 되어줄 경우에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에요. 내가 나를 계속해서 평가하도록 후원해줄 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하나님께 소정의 사례금을 제시할 수 있어요. 내가 나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정당화해줄 때.
그런데 내가 하는 내 평가를 만약에 하나님이 빼앗아간다면 하나님은 나를 모독하는 하나님이에요. 모독하는 하나님. 나를 모독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두 주먹을 딱 쥡니다. 한번 해보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나오는 거죠. 한번 해보겠다는 겁니까.
십일조를 딱 하면서 자, 내가 하기 힘든 십분의 일, 요새 교인들 십일조 하는 사람 없는데 나는 합니다, 던지면서 십일조까지 해줬으니까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계속 추천해줄 거죠, 하나님? 이게 교회 나오는 이유에요.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이런 인간들의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그런 자세를 가지고도 나와 사귄다고 지금 우기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1장 5절-10절에서 몇 가지 중요한 단어를 끄집어내라면 첫째는 ‘사귐’입니다. 둘째는 ‘속인다’는 것이고. 첫째는 사귐이고 둘째는 속인다는 것이고 제일 마지막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빛’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빛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선포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빛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 빛이 되느냐? 너희들이 나를 속일 때 비로소 나는 빛으로 나타난다. 너희들이 나를 속일 때.” 새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 하늘은 하늘답게 비로소 제 가치가 드러난다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인간아, 네가 태어난 이유는 딱 하나, 나를 속이는 자가 되는 바로 그 기능을 위해서 너희들이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나를 속여라.
이것은 창세기와 좀 다르죠. 창세기는 뭡니까? 악마가 인간을 속여서 그때부터 하나님과 인간은 결별됐죠. 갈라서게 한 겁니다. 악마가 인간을 속였다 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이 빛이 빛으로 드러나기 위해서 악마로 하여금 인간을 속이게 했는데 하나님께선 그걸 허락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속임이 없으면 빛이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그걸 달리 하게 되면 ‘너희들이 범죄하지 아니하면 나는 너희에게 빛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뜻이에요. 너희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여러분, 이 소리 듣는 순간 진짜 제대로 이 소리에 대해서 알아듣는 사람 같으면요. 이 이야기 듣고 여러분 이 자리에서 만세 불러야 돼요.
그동안 수십 년 살아오면서 내 인생이 힘든 이유가 밝혀졌어요. 내가 안 속으려고 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거예요. 바르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거예요. 바르게 사는 것은 인간이 태어난 이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할 몫이지, 인간이 할 몫이 아니에요. 바르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할 몫이거든요.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숙제지, 선악을 아는 그 테스트를 인간 네가 왜 훔쳐가냔 말이죠, 쓸데없이. 선생님 임용고시 치는 시험지를 학생이 왜 갖고 가요? 그거는 선생님의 승진시험이지, 왜 애가 자기 승진시험도 아닌데 자기가 치를 숙제도 아닌데 자기가 왜 빼앗아갑니까? 빼앗아가놓고 야, 이거 문제 어렵네. 안 풀리네. 안 풀리지 그럼. 그건 네 담당이 아닌데. 선악은 예수님 담당이지, 자기가 왜 남의 시험지를 빼앗아 가가지고 자기 능력을 테스트한다고.
그럼 저한테 이럴 거예요. ‘목사님, 그럼 우리 인간은 뭐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그냥 빛 안에서 아무것도 안하면 돼요. 아무것도 안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하는 것.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속 편한데요. 이게 속 편한데 왜 아무것도 안하기가 힘드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평가해서 그런 거예요.
평가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빛 되신 분이 평가하는 거예요. 어디서? 빛 안에서. 빛 안에서 평가할 때 ‘바르게 살았냐’를 평가하는 게 아니고 ‘네가 빛 안에 있나, 아니면 빛이 없고 네 혼자 사느냐’ 지금 그걸 평가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오해를 해가지고 빛 안에서 빛답게 살려는 거예요. 빛답게 하는 그 담당자는 그 역할은 주님이 빛답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빛답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어두움답게 살면 돼요! 갑자기 흥분해서 일어났는데… calm down. 마귀와 결별하는 방법은 내가 나를 평가 안하면 되는 겁니다. 평가할 능력도 없고요.
그러면 어쨌든 간에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고 자기 의 잘난 체하고 그렇게 돼버렸는데 이제 와서 뭐 어떻게 주님의 빛과 사귈 수 있고 그런 형편이 되느냐? 우리도 한 고집 하는데…. 처음에 했잖아요. 인간의 사는 목적은 그냥 사는 거예요. 항상 밤에 잘 때 평가는 뭡니까? 오늘도 잘 살았나? 이거잖아요. 그 외에는 없어요. 오늘도 잘 살았어? 오늘 무탈하게 잘 살았지? 그것뿐이라니까요. 그 외에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왕 버린 몸인데 우리가 스스로 빛으로 들어가고 자시고 할 그럴 능력도 없는데 하나님이 주신 조치가 뭐냐? 그것은 사귈 수 있는 상대를 만나게 합니다. 사귈 수 있는 상대.
아까 했죠? 첫 번째, 사귄다는 것, 두 번째는 속이는 것, 세 번째는 빛 개념. 이게 중요하다 했죠. 사귄다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이 본문에서. ‘사귄다’로부터 들어가지 않으면 빛의 세계로 나올 수가 없어요. 사귀는 것부터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혈육과 사귀었어요, 혈육과. 누구냐 하면 자기의 가족 될 사람이나 자기와 이미 가족이 된 자기 자식이나 이미 태어나면서 알게 된 가족, 자기 부모와 사귀었습니다. 그 사귐을 교체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가족끼리 혈육과 사귀어버리면 여전히 내가 주체가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고 평가도 내 행동의 점수를 내가 채점해요. 그러니까 빛을 배경으로 내 삶의 환경으로 해서 거기에 있고 싶지도 않죠. ‘나는 내 안에, 외톨이가 되든 내 안에 있으면 그만이지. 그냥 사는 거지, 세상사는 게 뭐 있어? 이렇게 외롭게 사는 거죠.’ 하고 은둔생활, 도피생활, 피신, 그렇게 되는 겁니다.
피신이라 해서 어디 뭐 산속에 들어가서 자연인 되는 게 아니고 군중 속에서 인간은 고독이에요. 아파트 옆집도 사귀기 싫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식이고 우리 부모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귀는 관계를 끊어버려야 돼요.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한 것은 또, 인간이 가능치 않은 이야기가 또 나올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기존에 사귄 것을 왜 끊어버려야 되는가? 기존에 인간이 우리가 사귀었던 그 모든 사귐들이 내가 나를 평가하는 데에 더욱더 기여하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나보고 무조건 좋게 해달라는 그 이야기가 아니고, 좋게 하고 나쁘게 하고 뭐 비난해도 좋은데 어쨌든 최종 평가는 내가 어떤 존재냐 어떤 인간이냐 평가는 결국은 내가 나에게 내린다는 것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걸 동조하고 그걸 긍정해준다면 그 사람은 나와 사귀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물론 친구가 그럴 수 있지만 친구는 돈 떨어지면 날아가요. 그렇잖아요. 친구 아이가? 다 이거 술값 나올 때나 친구지, 술값 떨어지면 친구 다 떨어져 나가잖아요. 어떤 경우라도 끈질기게 내가 나를 평가하는 데에 대해서 그걸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것은 부모님밖에 없습니다. 부모님이고 형제고 그리고 자식이고. 그러니까 그 혈육과 헤어질 수 없죠. 헤어질 수가 없습니다.
뭐 교회에서 갑자기 목사가 돌발행동을 하는데, 옆에 사람들하고 여러분, 교회라 하는 것은 코이노니아, 뭐 또 헬라어도 모르는 게 헬라어 하나 떡 해가지고, 서로 교제가 되어야 교회고 예배도 있고 에클레시아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우리가 교제하니까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노래 한번 부릅시다. ‘사랑하는 형제들이~’ 그 사랑하는 형제, 돈 문제 개입하면 다 떨어집니다. 그 이벤트 소용없어요. 이벤트 소용없습니다.
옆에 있는 김 집사나 옆에 있는 박 집사가 사랑하는 형제~ 하면서 할렐루야 했죠. 그런데 그 박 집사가 내 가족, 나의 자식에 대해서 험담을 했다. 끝났습니다. 사랑이고 뭐고 끝났습니다. “내 새끼 왜 건드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내 새끼 왜 건드려?” “애가 너무 폭력적이라서 당신 애가 내 애 건드렸잖아요.” 이걸 학폭이라 안하고 교회폭이라 하는 거죠. 주일학교 때 건드렸잖아. 그러면 “바보 등신같이 얻어맞기는 왜 얻어맞노? 체력이나 키워라. 우리 애한테 얻어맞지 말고. 가자. 야, 앞으로 주일학교 안 나와야 되겠다.”
그러니까 이 평가, 내가 분노하고 싶을 때 분노하고 내가 되게 좋아하고 싶을 때 좋아한다는 그 평가의 잣대에 대해서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라도 예수님이라도 어느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시비 걸지 마세요. 이러한 고집으로 교회 4,50년 다녀서 장로, 권사 다 됐습니다. 그 고집으로 버티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그런 건 뻔하거든요.
10절에 보면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되어 있죠. 그럼 주님 쪽에서의 조치는 뭐냐? 주의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친밀한 혈육적인 관계를 말씀을 가지고 토막내버려요. 단단한 혈육, 도저히 내 힘으로 끊을 수 없는 혈육관계에 주의 말씀이 딱 들어와버리면, 빛이죠, 말씀이 딱 들어와버리면 이 관계가 혈육관계가 원수관계로 돌변합니다.
뭐 그런 예는 쉬워요. 어릴 때 형제간에 서로 강가, 바다 뛰어다니면서 또 집에서는 이불 위 뛰어다니면서 그렇게 장난치고 서로 친하게 지낸 형제들, 결혼해서 색시 만나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결혼해서 색시 만나면 그걸로 끝나고 거기다 더 끝나게 하는 방법은 ‘형님, 보증 한번 서주소.’ 하면 다 끝나요. 다 끝나버렸어. 그것도 안 끊어진다? 더 세게 끊는 방법은 ‘형님, 좀 여유 되는데 우리 애 공납금 한번 내주소.’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이제 와장창 다 깨져버려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할 때, 여러분들은 대부분 다 오해했을 거예요. ‘아, 우리가 교회 와서 복음을 알아들으니까 복음 안 믿는 형제간이나 동생들하고 다 끊어지는구나.’ 이렇게들 오해하셨죠? 나만 오해했나? 그렇게 오해하셨죠? 제 말의 취지는 그게 아니고, 어두움과 어두움, 둘 다 어둡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말씀이 들어가는 거예요.
둘 다 빛은 아니고 둘 다 서로가 서로를 속여 왔다는 것을 부자지간에 형제지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관리하십니다. 그러니까 누가 성도냐 하면, ‘난 복음 알았어. 난 빛이야.’ 이게 성도가 아니라 빛이 나로 하여금 내가 어둡다는 사실을, 그동안 내가 어두움 아닌 척했지만 사실은 어둡다고 폭로시킬 때 비로소 여러분들은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은 빛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빛과 사귀게 되었어요.
비로소 그 사람한테는 9절이 적용됩니다.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게 적용돼요. 뭐 죄를 지어야 불의가 깨끗케 되지, 죄도 없는데 깨끗할 건덕지가 없잖아요. 그렇게 되면 빛을 알아서 내가 어둡다는 걸 아는 사람 같으면 요한일서 1장 8절이 확 가슴에 와닿죠.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주여, 저는 평생 주님을 속여 왔었습니다. 평생을. 내가 최종적인 나의 평가자로 나를 평가하고 싶은 이 평가를 나 말고 주님한테도 양도할 생각이 없었음을 저는 자인합니다. 내가 훌륭하고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이 보람에 내 최종적인 목적인 그냥 사는 것, 그냥 사는 데에 힘이 될까 싶어서 나는 열심히 나를 그동안 격려해왔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믿는 것은 내 격려에 하나님도 같이 힘 보태달라고 교회 나왔습니다. 십일조 드리고 선교하고 전도하고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태초에 내가 몰랐던 악마가 나를 속였던 악마의 속임수였습니다. 속았어요. 속았어요. 악마한테 속았어요. 그래서 그 속임수에서 이왕 속인 것, 내 힘으로 그 속임수에서 벗어날 재주는 저한테는 없습니다. 없다는 거예요. 나한테는 그럴 능력이 없는 거예요.
거기에 반응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간단해요. [생각하지 말고 움직여라.] 생각하지 말고. 자꾸 생각하지 마라. 생각하면 계획이 나와요. 여기 목적이 나오죠. 목적(goal)을 향하는 것을 목표(aim)라 합니다. 하여튼 간에 생각을 하게 되면 계획이 나오고 목표가 수립돼요. 목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목표가 달성될 때 나한테 사는 재미를 더욱더 추가할 것이라는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생각함으로써 내가 살아있다. 살아있는 자는→생각한다→그 생각의 결과는→더욱더 살아있다, 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더욱더 살아있다. 완전히 빛이라는 배경을 내가 다 가려버리는 거죠. 내가. 이 잘난 내가 다 가려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논리에 의해서 내 생각은 결국 나한테로 귀환하는데요. 이러한 처지를 이런 문장으로 설명하면 여러분들에게 이게 더 쉬운지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만 더 어려울 수 있는데 문장으로 써볼게요. [우리가 추적하는 사람(대상)은 늘 우리 자신이다.]우리가 추적하는 대상은 늘 우리 자신이에요.
범인을 잡는 형사가 잡고 보니 형사 본인이 범인이에요. 그러니까 악마가 얼마나 인간을 농락질 했는지 아시겠죠? 악마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목표로 잡아야 될 대상으로 악마가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회전목마 같아. 평생을 살았는데 제자리 뛰기에요. 평생을. 빌딩 짓고 뭐 대단한 사업하고 했는데 백날 해봐야 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약을 올리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거기다 뭐라 하느냐 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어떻게 자기를 부인해요? 자기 십자가 지고. 자기 부인이 안돼요. 교회가나 집에 가나 추적대상은 나에요. 내가 나한테 닦달했다니까요. 똑바로 살아. 똑바로 살아. 남한테 욕 안 얻어먹고. 네가 행동 잘못하면 우리 집안 너 때문에 다 욕 얻어먹는 거야. 우리 집안의 명예를 생각해야지. 네가 아빠야? 그럼 너만 생각하면 안 되지. 네가 잘못하면 네 자식들이 너 때문에 욕 얻어먹어.
이러한 연결고리. 내가 사귀는 혈육적인 관계. 나를 귀히 여기기 때문에 귀하게 사귐과 만남의 관계를 갖는 그 관계. 그 관계 관리를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수색하고 탐색하고 추적하고. 그리고 닦달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놓고 세상 탓을 이렇게 합니다. 참 세상,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 한 사람도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한테 관심 있는데 관심이 들어올 수가 있어요?
여기서 예수님 방식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순환이죠. 내가 나에게 나에게 오는 거예요. 마치 뱀이 자기 꼬리를 무는 것처럼. 자기 꼬리만 아파요. 앙 물었는데 자기 꼬리라. 꼬리가 좀 길어요, 뱀이.
그럼 빛의 세계는 뭐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버렸어요. 예수님이 예수님한테 돌아오는 거예요. 주로부터 시작하여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오는 거예요. 두 개의 공간이 생겼습니다. 이게 아까 낮에 안양 강의할 때 서로 다른 공간이라 했죠. 이 공간A(나의 순환구조). 이 공간B(예수님의 순환구조). 서로 다른 공간이죠.
이 공간인데 여기서 어떻게 되느냐? 이 둘이 합치지를 못해요. 이게 참… 부산 강의에서도 했고 여러 번 하고 있는데 이게 너무 중요해서 또 안할 수가 없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다른 편에 예수님이 있잖아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분석하고 탐구하고 연구했어요. 그 말은 뭐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간격이 있었던 겁니다.
간격이 있는데 예수님 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희생을 이야기하고 대속을 이야기하고 속죄를 이야기하고 사죄를 이야기하고 대신 죽으심, 대속이죠,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 이야기는 제자들이 간격을 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자기 몸으로 간주했을 때나 효과 있는 내용이에요.
예수님은 그런 이야기했는데 제자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런 효과를 내가 얻게 된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희생, 구원, 생명, 영생, 천국, 지옥가고 천당 가는 거 전부다 나한테 주어진다는 거예요. 어떻게? 주님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탐구하면.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신학이잖아요. 신학은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신학 자체가 이게 악마의 죄라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이 구원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에요. 신학을 하지 말라, 가 아니라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신학의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오면 안 되고요. 생각 없이 움직이면 되는 거예요. 신학 하는 움직임, 성경 보는 움직임. 그 움직임은 빛 가운데 움직이는 거죠. 주께서 움직이게 하는 거죠. 주께서 움직이게 하는 것.
제가 젊었을 때 그때 처음 교회 다닐 땐가 젊었을 때 본 영화의 영어제목이 에요. 우리말로 하면 이라는 영화였습니다. 데미 무어하고 남자 주인공 패트릭 스웨이지가 주연으로 나오는데 거기에 신기했던 게 뭐냐 하면 분명히 귀신인데 물리적 실체가 없어요, 그런데 동전을 움직여요, 동전을. 동전을 움직인다고요. 지하철 타는 대목도 나오는데, 동전이 공중으로 띄워졌어요. 보니까 아무도 가하는 직접적 힘은 없는데 동전이 원격작용 때문에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성도라면 주님의 원격작용으로 움직이면 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걸 가지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하는 거예요. 주께서 뭐하기 위해서? 내가 되기 위해서? 아니죠. 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주로 가면서 희생, 대속, 영생, 속죄, 사죄, 이것은 주님이 주님에게 돌리는 겁니다.
그 순환구조에 성도는 생각하는 게 아니고 움직임으로 거기에 휘말려 들어간 거예요. 하나의 움직임으로 휘말려 들어간 거예요.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내뱉은 자기의 말씀을 예수님 자기가 과정을 다 투입하고 성취시키는 겁니다.
히브리서 7장부터 10장까지 보게 되면 거기에 제사장들이 있어요. 제사장들이 제물을 드리고 하잖아요. 그 제사직이라는 순환구조가 제사장들이 실패해요. 그 실패하는 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연약해서. 율법을 지키는 데에 온전치 못했다 그런 뜻이죠.
율법의 내용에 대해서 율법 내용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출제한 법에 대해서 선생님끼리 치는 시험을 애들이 빼앗아가면 안돼요. 그런데 이미 악마가 동원돼서 시험지를 인간이 빼앗아가도록 악마가 했죠. 그 시험지를 딱 제시하니까 인간은 율법을 풀지를 못하는 거예요. 왜 못 푸느냐? 출제의 취지를 모르니까 문제를 못 푸는 거예요.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저는 평생 사람 죽인 적 없는데요. 이렇게 푸는 거예요. 땡! 빵점이다. 간음하지 말라. 바람피운 적 없는데요. 땡이에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 말은 주님께서 로마서 7장에 보면 인간을 환자로 눕혀놔요. 일반 내과나 그런 데에서 환자들은 그냥 이야기하잖아요. 어떻습니까, 이러는데 치과에 가면 더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아예 눕혀놓고 아주 보지도 말라고 눈에다가 안대를 하는 치과도 있어요. 눈뜨지 마세요. 그냥 뽑아내는 거예요.
주께서는 율법을 왜 못 지키는지 그 이유를, 인간 속에서 율법이라는 기회를 통해서 거기 달라붙어 있는 악마, 죄의 속성을 그냥 들춰내는 거예요. 율법이. 여기 여기 붙어라, 이 악마야. 죄야, 여기 붙어라. 죄를 더욱더, 지남철에 철가루가 더욱더 많이 붙도록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믿씁니까, 해야 돼요. 믿습니까. 성경을 안 보면 자기 죄를 몰라요. 성경을 안 보면. 자기가 자기 꽁무니 쫓아다닌다고 바빠요. 자기가 지금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도 몰라요, 그냥.
속죄, 대속, 영생,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죄인의 몸으로 온 거예요. 죄인의 몸으로 와서 율법을 만났어요. 그러면 율법 안에 속죄, 대속, 이런 게 다 있거든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다 들어 있잖아요. 그것을 예수님 홀로 이루었다는 게 중요해요. 홀로 이룬 거예요, 홀로.
그래서 제자의 몸은 필요치 않아요. 예수님 몸으로 합세되어야 되죠. 그래야 한 몸이 되니까. 한 몸이니까 이제는 다른 몸이 필요 없어요. 몸과 몸 안에서 서로 사귐이 있으면 되는 거예요. 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내 자식과 부모 다 챙겨야 돼요.
그러나 이제는 사귈 수 있는 몸이 없어지고 주의 몸으로 대체되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몸이 됐어요. 그런 몸들, 몸의 지체들이 성령께서 찾아오심으로써 같은 성도들끼리 발생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어두우며 나는 떨어지는 새에 불과하며 내 쪽에서 생각을 해서 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을 쓴 사람이 요한일서, 이서, 삼서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그 용어들이 유사하죠. 유사한 게 아니라 똑같죠. 여기 보면 요한복음 15장 17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혈육대신 새로운 사랑의 대상자가 나타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이야기하죠. 그게 다가 아니에요. 소유하고 싶은 욕망도 있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진짜 인간의 욕망은 뭐냐? 인간의 욕망은 누구하고 대화하고 싶은 거예요. 말하고 싶은 거예요. 말 통하는 사람끼리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일방적으로 잔소리 듣는 거 말고, 그 사람은 이야기하고 나는 듣고 이게 아니고, 나도 말 좀 하자.
사귄다는 것은 서로 말을 던지고 사귀는 거예요. 사귄다 해서 교인끼리 갑자기 이혼하고 둘이 동거하고 이게 사귀는 게 아니고, 복음이 나오는 것. 복음으로 서로 주고받는 게 이게 사귐이에요. 복음으로. 우리 둘이 얼마나 쪼다 같으면 주께서 죽으셨는가. 그 이야기를 하는 그게 사귐이란 말이죠. 사귐.
전에는 내가 주체가 됐는데 내가 주체가 되면 나는 그냥 내 중심이기 때문에 친구끼리 한 15년 사귀다가 돈 문제, 뭐 여러 가지 문제생기면 ‘우리 절교하자. 우리 헤어져.’ 하고 끝나버려요. 언제 뭐 너하고 사귐 자체를 위해서 사귄 적은 없어. 나 잘났다는 것을 네가 늘 동조해주고 후원을 해줄 때 우리 친구아이가? 하면서 친구인 줄 알고 했는데 어느 날부터 당신이 슬슬 그동안 너 잘난 척하는 거 내가 보조 맞춰줬으니까 이번에 뭐 하나 상품개발 했는데 우리 돈 좀 보태줘, 이렇게 나오면 끝나는 거예요.
돈 문제 들어가면 다 끝나는 겁니다. 이건 가족도 마찬가지고. 사람이 공짜가 없잖아요. 그만큼 비위 맞춰줬으면 비위 맞춰준 거 돈 이자로 계산해서 자기는 다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 생각이 문제에요. 내가 너한테 얼마나 해줬는데. 그런 거죠. 이거는 혼사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얼마나 해줬는데. 물어내. 반띵하자. 결혼해도 마찬가지죠. 친정에서 너한테 얼마주고 시가집에서 얼마주고 이거 다 계산하죠. ‘너 그거 다 기억하고 있었나?’ ‘기억하고 있지.’ ‘그걸 어떻게 기억해?’ ‘그것만 생각해. 나.’ 그것만 생각해.
그러니까 사랑으로 한다는 것은 둘 다 서로를 이용한 적이 없는 상태에서, 아니 이용할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 잘못했네. 말 잘못했는데 말 잘못한 게 굉장히 지금 기분 좋아요. 중요한 말이 나왔기 때문에. [서로가 주님으로부터 거덜나서 더는 서로 이용할 게 없는 상태가 사귐의 상태]에요. 사랑으로.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부부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는 사랑이 아니었음을. 부모 자식도 마찬가지고. ‘내가 너 공부시킨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한 달에 100만원씩 내놔.’ 이런 거. 그럼 자식은 더하죠. ‘어머니께 100만원이 뭡니까. 200만원 드리겠습니다.’ 이 짠돌이가 왜 이러지? ‘그 대신 애 둘 키워주세요.’ 이런 거. 애 둘 키우면 조선족도 250만원 받는다, 야. 가만있는 조선족까지 거론해요.
모든 관계가 더는 이용할 가치가 없기에 편하게 만나는 거예요. 서로가 그래요. 서로가 다 그렇게 거덜났어요. 왜냐하면 서로가, 나쁜 짓을 한 게 아니고 서로가 하나님 앞에서 속은 자로 살아가다가 들통났다는 그러한 동창생, 그런 공유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누가 하느냐? 성령이 그렇게 하시죠. 너희들 다 죄인이야. 문제는 2분 넘었다는 사실을 내가 왜 몰랐을까.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