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15b 부산강의 : [시편]58(42:5)-실패한 희생물
20230515b 부산강의 : [시편]58(42:5)-실패한 희생물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어떻게 해서 이 신앙인이 찬송하게 되었는가? 절망 가운데 찬송하였는가?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시편 42편 9절과 10절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라는 말을 절망적인 단정 지음, “하나님이 날 잊었어, 날 버렸어” 그렇게 말한 계기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공격을 당했기 때문인 거예요. 원수의 등장이죠.
그다음에 원수가 가만있으면 원수가 아니지요. 누굴 압제하는가? 신앙인을 압제하는 거예요. 신앙인이라 하는 것은 잘 아시다시피 사람은 사람인데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신앙인 되겠지요. 홀로 있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해도 앞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누굴 공격하게 돼 있어요? 저 사람이 나를 공격하는 걸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절망에서 찬송, 희망이라 했는데 성경대로 찬양하고 찬송하고 감사할 때는 반드시 필수요소로 뭐가 등장해야 되느냐 하면 원수가 등장해야 돼요. 하나님의 원수가. 그러면 이 말은 육에서 영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기서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해야 돼요. 문제는 나의 원수가 아니라는 거예요. 누구 원수? 하나님에 대해서 원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이게 나의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인 걸 알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원수를 자기를 공격하는 원수로 오해를 하게 돼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 얼마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아등바등 애쓰면서 살아왔는가를 완전히 표시를 다 내고 있는 거예요. 아까 했지요. 출생 자체가 사태고 사고라 했지요. 왜 사고냐? 우리가 출생한 게 하나님의 원수 노릇하라고 출생했거든요. 이것을 본인은 몰랐어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비로소 내 자체가 원수 편에 합세해서 함께 누굴 공격한다? 하나님을 공격하는 그 편에 같이 한 패가 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시편 42편은 누구 이야기다? 결국 이거는 예수님 이야기에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잖아요. 예수님 자기 이야기에요. 감히 이 시편으로 나한테 적용시킬 수 없어요. 내 자체가 원순데 뭐, “하나님 저를 지켜주옵소서. 하나님 잘 믿었는데 저 앞집에 원수가 와서 나를 괴롭히니까 저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이런 결핍은 소용없습니다. 주인공이 예수님으로 바뀌어서 이 말씀이 완성되는 것이지 내가 주인공 해서 내가 아쉬운 것을 주님이 들어주는 그런 내용은 아니에요.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지 우리가 될 수 없는 겁니다.
두 번째 시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원수가 뭐냐 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원수가 우리에게 나타나느냐? 원수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가? 제가 그림을 하나 그려보겠습니다. 손잡이 두 개, 문이 따로 있습니다. 자, 어느 쪽이 남자화장실이고, 어느 쪽이 여자화장실입니까? 똑같은데 어느 쪽이 남자화장실이고 어느 게 여자화장실이죠? (남자가 들어가는 곳이 남자화장실…) 이거는 사회에서 정하기 마련이죠. 이게 남자, 이게 여자라고 앞에 다는 이걸 사회적 기능이라 해요. 사회적 기능이 원수입니다.
육의 세계의 확산을 위해서 인간들이 만나서 의견을 모은 것이 사회에요. 바벨탑 있지요. 바벨탑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에요. 인간들은 흩어져도 흩어진 적이 없어요. 인간들이 흩어져서 지구의 어디에 살더라도 항상 그들은 마음은 한 결 같이 똑같이 하나님의 원수였고 지금도 원수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지 않고 이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이걸 사회라고 해요. 이 사회에서 우리가 출생했잖아요. 이 사회 안에서. 그러니까 출생 자체가 이게 사고가 일어난 거예요. 우리가 출생했으니까. 어느 게 남자냐, 여자냐? 그건 모르지요. 이쪽은 남자 선이라고 정하면 이게 바로 남자화장실, 여자화장실 정한 거예요. 인간이 정한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언어라고 합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뭐했습니까? 무엇이 육신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지요. 이 말씀은 인간의 사회 이전에 천지 창조할 때 천지 창조에 개입하신 그 말씀을 말하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요 그 이후에 인간의 범죄 한 상태에서 나타난 것은 그냥 말이에요. 말의 세계에서 인간들이 정하기 나름이죠. 질서를 위해서. 우리는 그 세계 속에서 사회적 기능 속에서 나름대로의 질서를 위해서 선과 악의 지식을 총동원시킨 겁니다.
자, 그렇다면 제가 어렵다 이야기했거든요. 어느 정도 어려운가? 지금 이 강의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걸 어렵게 해야 돼요. 원수가 뭔지를 알려면 어렵게 해야 돼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그냥 설명보다도 그냥 적어놓고 하겠습니다. 감옥의 의미는 두 종류로 나눈다. 내용과 표현으로 나눈다. 내용은 또 나누는데 형식과 기질로 나눈다. 표현도 형식과 기질로 나눈다. 지금 언어세계입니다. 인간이 만든 언어세계에요. 언어세계는 이렇게 구성돼 있는 거예요.
예를 들겠습니다. 감옥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감옥이란 개념, 의미가 있다면 내용은 유형적이에요. 표현은 무형적입니다. 내용은 형태가 있고 보이고, 무형은 형태가 있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거예요. 내용에 대해서 형식이 있는데 형식은 뭐냐 하면 수감된 자, 죄수들이죠. 죄수들이 눈에 보이는 형체의 내용으로서 죄수들이 형식을 갖추어져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식은 그냥 감옥이에요. 이게 죄수들. 죄수들의 집합. 이게 기질, 안에 속에 있는 내용. 무형적인 표현의 형식, 감옥과 관련해서 형식은 뭐냐 하면 형법이에요. 그 내용은 뭐냐? 비행 사실. 비행이란 날아다니는 게 아니고 나쁜 행동, 나쁜 범죄 이것이 기질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해놓고 설명에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서 감옥의 의미가 뭐냐? 이게 인간과 인간끼리 통하는 언어지요. 인간은 말을 해야 통하지요. 음으으으 이래서 수화로 잘 안 되잖아요. 말을 해, 말. 말할 때 ‘감옥’이란 단어를 썼다. 개념을 사용한 거예요. 그 내용이 눈에 보이는 유형과 무형으로 나누는데 유형이 내용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걸 표현이라고 해요. 그 내용이 표현만 있는 게 아니고 내용 자체가 형식 따로, 그 안에 있는 속에 기질 따로 있는데 형식이 뭐냐? 그냥 감옥이에요. 대표해서 감옥이 되고, 기질은 뭐냐? 죄수들의 집합이에요.
만약에 감옥이 아니고 이게 대학이라면, 대학교하면 형식은 뭐냐? 대학교고, 기질은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집합체가 되겠지요. 이게 눈에 보이는 모습이잖아요. 캠퍼스 가보세요. 학생들 보이지요. 교수들 보이지요. 정문에 수위 보이잖아요. 그걸 사람들은 뭐라 합니까? 저거 대학교인 모양이라. 대학생 모임이죠. 대학이죠, 대학.
그런데 감옥에서 이들만 모여 있으면 됩니까? 이들을 집합시키는 게 뭐가 있어요? 형태는 없지만 무형적인 형식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들은 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까? 어디에 근거해소? 형법에 근거해서. 그러니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이게 다 들어있는 거예요. 법이 들어있는 거예요. 형법이. 형법이 있는데 그럼 형을 언도한다 하면 안에 속성이 있어야 되거든요. 속성이 뭐다? 나쁜 범죄 했을 때는 형법에 처하여 어디에 집어넣는다? 감옥에 집어넣는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곳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재판 받을 때 감옥입니까, 감옥 아닙니까? 그건 재판소지 감옥이 아니에요. 재판소는 형법도 있고 그것도 다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결과로 들어가는 곳은 감옥에 들어가는 거예요. 아까 대학교 같으면 형식은 뭡니까? 한국 교육부 형식이 되겠지요. 그 속성은? 속성은 수능 치르고 들어와야 돼요. 수능을 치르는 그 행동, 수능시험지는 있지만 그건 눈에 보이지만 수능을 치르는 것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회는 결국은 뭡니까? [눈에 보이는 것+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러면 여러분, 이제부터 쉬워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자, 아담의 몸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있지요. 만져지지요. 선악과 손에 만져지니까 따먹었을 것 아닙니까. 목에 넘어갔지요. 이게 전부 다 뭡니까? 이 모든 것이 내용이 되겠지요. 그리고 누가 꾀었어요? 뱀이 꾀었지요. 뱀도 눈에 보이지요.
그런데 주께서는 너희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다가 주께서는 뭘 보느냐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네가 사용하는 이 사회 질서를 맺어주는 언어의 관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너희를 지배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선 뭘 이야기하느냐?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후손을 이야기합니다. 뱀의 후손이 누구겠습니까? 악마지요. 보이는 것은 뱀인데 보이는 것의 후손 같으면 역시 보여야 된다고 생각하지요. 안 보여요. 악마는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왜? 천사기 때문에 눈에 안 보여요.
보이지 않는 것이 뭘 지배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세계를 지배하는 거예요. 그걸 에베소서 같은 경우에 보면 이 세상 신이 인간을 지배한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도 이 세상 신이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거예요.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2절에는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악마라는 거예요.
[인간은 전체성을 소유할 수 없다.] 저게 뭔 뜻일까요? 인간은 세계를 온전히 주관할 수 없다. 이게 뭔 뜻일까요? 나는 세계 전체를 다 안다, 할 수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말하는 주관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건 지우겠습니다. 이게 세상 전체라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 가냐 하면 일부를 뜯어먹고 살아요.
“집사님, 어느 동네 삽니까? 부산 살아요.” “그러면 우크라이나 잘 압니까?” “그걸 왜 알아야지요? 내가 부산 출신이라니까. 우크라이나 출신 아니고 부산 출신이야, 부산 출신. 내가 그걸 왜 알아야 돼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지요. “실례지만 어디서 왔습니까?” “그러면 네팔은 어떤 나라인데요?” 내가 독일에서 왔다니까 네팔 이야긴 왜 해요.
인간의 자기 주관적 세계는 좁아요. 좁습니다. 좁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들어도 자기 이익 되는 것, 자기의 좁은 식견으로 전체를 믿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전체를 알아요? 몰라요. 모른다고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는데 또 예를 들고 싶습니다. 제 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데, 오늘 여기 와서 못 데려다줬어요.
가면서 자기 이야기를 끄집어내는데, 왜 아빠는 아이들 먹는 앙팡우유를 먹느냐는 거예요. 내가 그 이야기 듣고 그것과 세계 평화와 무슨 상관있어요? 아빠는 어른 우유 먹어야지 왜 아이들 먹는 우유를 먹는지 그게 납득이 안 된다는 거예요, 납득이. 납득 안 되지요. 아홉 살 애니까. 그럼 우리는? 육십 넘었든 칠십 넘었든 오십이 넘은 세상에 대해서 납득 됩니까? 부분을 뜯어먹고 살아. 태어났다, 죽을 때까지 이것밖에 몰라. 전체를 모른다니까, 전체를 몰라요.
여기서 뭐냐 하면 진리를 논하고 내가 성공을 논하고 실패를 논하는 거예요. 자기 세계밖에 모르면서. 문제는 전체를 다 알아야 되는데 자기 세계에 골몰하고 골똘하고, 내가 인생 망했다, 좋다, 잘 됐다, 뭐 없다 자기 계산한다고 자기 인생 이익 본 것 계산한다고 전체를 놓쳐요.
그럼 전체를 보는 방법은 뭐겠습니까?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 그 원칙을 가지고 부산 살면 이걸 박살내야지요. 때려봐야지요. 때려보면 부산 태생이란 내가 날아가 버렸지요. 부산 태생을 뭐로 바꾸느냐? 이렇게 바꿔요. 예수 안으로 바꿔버려요. 내가 부산 안에 살았다는 걸 예수 안으로 바꿔버려요.
그러면 예수 안으로 오면 어떻게 됩니까?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전체를 통일시키지요. 유일하게 전체를 주관할 수 있는 분은 누구밖에 없다? 예수를 믿는 거예요. 예수님이에요. 따라서 예수 안에 있으면 세상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 집중돼 있다는 발견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조차 주님의 권세가 작용해서 작동해서 예수 믿게 되었다는 걸 고백하지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세계와 내 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거예요. 신랑과 신부가 혼인하게 되면, 아가서에 나옵니다. 아가서에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안을 때 술람미 여인이 고백했어요. 그이의 오른팔로 나를 안았다. 그러니까 김밥 말 때 어떻게 말지요? 김으로 말아버리지요. 김으로 말아서 오른팔로 안아버리니까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이 뭐냐? 두 사람이 분명히 유형적으로 두 사람이지만 그거는 무형적으로 한 몸 같이 삽니다.
따라서 잠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과 떨어져있을 때 그때 솔로몬이 참지 못해서 술람미 여인 집에 가지요. 갔는데 술람미 여인이 들어오시면 안 돼요, 하고 손을 내미는데 문이 잠겨서 손이 문에 낀 거예요. 꼈는데 거기서 나 이것 가지러왔어요, 라고 하면서 그 남자가 손을 펼치니까 거기서 사랑의 몰약이, 몰약 하니까 동방박사가 예수님께서 드린 몰약이겠지요, 치료제. 치료제 이걸 받아주세요, 라고 그 치료제를 놓고 가지요.
그리고 난 뒤에 술람미 여인이, “괜히 문 닫았어, 괜히 문 닫았어.” 후회해서 그 뒤에 허겁지겁 자기 친구들하고 예루살렘을 순례하면서, “그이 못 봤나, 그이 못 봤나, 그 사람 못 봤어요?” 찾아다닌다는 것은 비록 몸은 떨어져있어도 마음은 연결돼 있지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우리 서로 사랑했어요~ 이 노래 알아요?
, 백지영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우리 이제 헤어지네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차가운 바람이 손끝에 스치면
들려오는 그대 웃음소리
내 얼굴 비치던 그대 두 눈이
그리워 외로워 울고 또 울어요
입술이 굳어버려서
말하지 못했던 그 말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우리 이제 헤어지네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눈물이 입을 가려서
말하지 못했던 그 말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우리 이제 헤어지네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혹시 알고 있나요
뒤돌아서 가슴 쥐고
그댈 보내주던 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
그 사람을 사랑해줘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언젠가는 돌아와줘요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우리 이제 헤어지네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미국 가도 같은 하늘이잖아요. 이게 전체성이에요. 전체성이 주관성 안에서는 비록 몸은 떨어져있어도 서로 I'm missing you, 그리워하는 점에 있어서는 같은 하늘 안에 있는 겁니다. 내 안에 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예수님을 끌어당긴 게 아니고 내가 예수 안에서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도 오히려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해 보는 거예요.
이 전체성이 성령을 통해서 한꺼번에 우리에게 덮치는 거예요, 밀려오는 거예요. 사랑이 덮치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동안 어느 안에 있었는가 알아야 돼요. 우리는 무형적인 것, 세상 안에 있다, 그거는 물리학자들이 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이고, 우리는 어디 안에 있었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뱀의 자손 안에 통제를 받고 지시를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걸 오늘 시편 42편에선 뭐라고 하느냐 하면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죠? 불안해한다. 불안,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낙망하는 게 눈에 안 보이지요. 그냥 똑같아요. 똑같은데 왠지 불안하고, 똑같은데 왠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이거 유형이 아니고 무형적인 기이한 사태가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 믿어라 해서 믿었고, 말씀 믿어라 해서 다 믿고 다 해요. 교회에서 시키는 것, 또는 성경말씀 시키는 것 다 하는데 내 영혼이 왜 그리 불안하고 두렵고 결핍을 느끼고 걱정이 늘어지는지, 왜 그래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그것은 내가 나를 놔주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 덕분에 내가 잘 되려하는 거예요. 내가 나 보기에 만족스런 내가 되고 싶은 거예요. 헤어져야 되는데 헤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오늘 시편 42편에서 하나님 원수가 오니까 비로소 내가 나를 놔줄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찬송이에요. 내가 나를 놔버리는 것. 내가 수입이 더 늘어나고 건강하게 된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출세하고 승진한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 인간관계는요 이거는 마르크스란 사람이 이야기했는데 이 말이 얼마나 이 세상에서 진리처럼 통하는지요.
마르크스가, “내가 보기에 화학자가 아무리 다이아몬드를 연구해도 거기서 교환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다.” 당연한 얘기죠. 화학자가 다이아몬드를 분석하면 탄소결합체에요. 단단한 탄소결합체. 다이아몬드는 지구 생성 초기에 제일 압력이 많은 곳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지구의 맨틀에만 들어 있다가 그게 마그마에 밀려서 올라와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는 거예요. 그 정도로 귀한 거예요. 그만한 다이아몬드 되기 위한 압력을 지표면에선 성립이 안 돼요. 더 압력이 센 곳에 가야 돼요. 화학자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탄소의 결합체.
그럼 탄소의 결합체와 교환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이게 시장에서 상품으로 얼마할지 그건 화학자의 자기 담당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교환가치가 시장경제 원리가 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이야기해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인간신체 눈에 보이지요. 만지면 만져지잖아요. 여러분 집에 가면 자식들, 시집 장가보내서 없겠지만 가끔 만나지요. 만날 때 그걸 인간신체 눈에 보인다고 그게 자식의 가치의 전부입니까? 자식의 가치는 노동시장에서 얼마나 교환의 가치가 있느냐 여부에요. 명절에 자식이 오니까 아직 노나? 이게 뭔 뜻이에요? “엄마 눈에 저 안 보입니까?” “잘 보인다. 잘 보이지. 엄마 아직 시력 살아있어.” “엄마, 내가 오늘 안 반갑습니까?” “니가 왔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왜 놀아? 내가 니 대학공부 시켰는데 왜 놀아?”
이게 뭔 뜻이에요? 나는 니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곁들인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자식이고 싶다는 거예요, 부모가. 딸이 왔는데 서른이 넘었는데 “엄마 잘 있었어? 밥 해줄까?” “그래 고맙다. 밥 해먹자. 그런데 니 남자 없나?” 이런 이야기를 왜 해요? “너 왜 시집도 안 가는데?” 그런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인간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산다고?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뱀의 자손, 악마의 지배에 완전히 선악적으로 세뇌 당했어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불안하고 낙담하고 낙망하는 거예요. 몸도 안 아프고 밥 세끼 잘 먹는데 불안해요.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지 못해요. 미래가 염려스러워요. 그건 뭡니까? 평소에 악마가 인간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티가 난 겁니다.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하는, 히브리서 2장 14, 15절 말씀, 그게 계속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회 기능은 결국 뭐냐? 한 번 적을게요. 사회 기능이란 인간의 수치와 불안감을 감추기 위한 시도 또는 노력, 이것이 바로 사회 기능입니다. 이걸 창세기 3장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치마, 주일 낮 설교에선 이걸 한 자로 했지요. 옷. 이게 이 사회에선 문명의 시작이에요. 모든 문명의 시작이에요. 불안과 근심과 수치, 특히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인간은 쉬지 않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고 AI 연구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불안과 장래에 대한 낙담을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에요.
그것을 해낼 때 그 사람은 시장에 나가서 고가에 팔리게 돼 있어요. “너 요새 한 달에 얼마 받는데?” 이게 뭐냐? 고가의 수입을 얻는다는 말은 악마가 만든 이 불안과 수치를 교묘하게 더욱더 안 들키게 감추는 개발한 거예요, 방식을 개발한 거예요.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어렵게 이야기해도 성경에서는 많은 인간들의 탐구를 웃으면서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욥기 6장 6절에 나와요.
“계란 흰자가 맛있냐?” 욥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 대목을 보겠습니다. 욥기 6장 6절에 보면,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4절에,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다시 말해서 흰자가 맛있냐는 이 말은 사람은 재미 없이는 못 산다. 흥밋거리 없이는 못 산다. 인간은 취미거리 없으면 사람은 사는 게 아니다, 이걸 말합니다. 욥이 하나님이 와서 육체적인 아픔도 아픔이지만 육체적 아픔 때문에 뭘 못하는 거예요? 사는 재미를 못 느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망쳤다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뭐냐? 실패적인 희생물. 이 세상에는 희생물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공적인 희생물이 있어요. 그다음에 실패적인 희생물, 두 종류가 있습니다. 성공적인 희생물을 영웅이라 해요. 안중근 의사, 영웅. 희생해서 그 결과가 인간사회를 유지시키고 존속시키고, 존속이란 건 끌어가는 거예요. 존속시키는 데 기여한 걸 성공적인 희생물이에요.
그러면 욥은 뭡니까? 성공적인 희생물입니까, 실패적인 희생물입니까? 실패적인 희생물이죠. 지가 고난 받고 희생했는데 아무 결과가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둘 중에 어느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욥이 실패적인 희생물이라면 예수님의 희생은 실패하기 위한 희생이죠. 실패한 희생이에요. 이게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십자가, 십자가해도 둘 중에 어느 십자가인지 잘 새겨들어야 돼요. 나를 잘 되게 하는 십자가인지 그래서 예수님을 영웅으로 띄우기 위한 희생물인지, 아니면 예수님마저 실패했는지 이 땅에서, 어느 쪽이에요? 예수님마저 실패해서 이 땅에서 이 세계를 버리고 탈출하지요. 사라져버렸어요. 그리고 남아있는 이 세상은 나중에 불 심판 받고 망해버립니다.
이 말이 어려우면 더 쉽게 말씀드릴게요. 세상이 물바다 된다. 세상이 물바다 된다는 소식을 들을 때 사람의 반응은, 제가 둘 중에 하나하지만 사실은 하나이지만, 일단 둘이라 하면 ①성공적인 희생물을 원한다. ②실패한 희생물 원한다. 세상이 물바다 된다, 종말이 온다, 마지막이다 둘 중에 어느 쪽을 인간은 원하겠습니까? 그분이 희생해서 우리가 살던 고향에서 계속 살기를 원하겠지요. 성공적인 희생물을 원한 거예요. 누가 희생하되 나는 그 덕분에 사는 것, 성공적인 희생물을 원하지요.
그러나 실제로 노아 홍수는 뭐였습니까? 실패한 희생물이었어요. 왜? 다 죽었으니까. 산이 있고 들이 있는데 노아가 여기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노아 여덟 식구가 앉아있었다. 물이 차오르는 데 점점 차올라서 노아 식구들 앉아있는 산꼭대기 빼놓고는 다 죽었다. 이러면 노아 입장에서는 뭡니까? 그 방주는 성공적인 희생물이죠.
그런데 노아는 어디 갔습니까? 노아 살던 집 어떻게 됐지요? 노아 살던 집, 물에 잠겼지요. 이것 성공한 거예요, 실패한 거예요? 자기 고향 영토, 부동산 다 물에 잠겼는데 성공한 겁니까, 실패한 겁니까? 실패했지요. 니 부동산도 니 지난 인생도 저주받아라. 이게 주님의 언약이잖아요. 이게 노아언약이잖아요. 노아가 산 것은요 심판에 합세해서 살았어요. 심판에 같이 가담해서 살은 거예요. 죽어 마땅함으로 들어간 거예요.
성공적인 희생물 내가 얻겠다는 자체가 내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라고 자인하면서 주께서는 언약 안에서 살은 거예요. 그 언약 안이 신약에 오면 무슨 안이 되는가? 예수 안이 되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 안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나오지요. 나는 십자가 안에 있고 세상은 십자가 밖에 있다. 자기가 십자가 안에 있데요. 나는 방주 안에, 심판 안에 있다는 겁니다.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성공한 인생 살라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이 세상 무형의 집에, 악마의 집에, 뱀의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망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증거, 전달하기 위해서 노아는 심판 속에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 거예요. 눈에 보이는 창조가 다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이미 악마가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약 안에 있는 자는 그걸 유일하게 알지요. 이 세상은 하나님께 속한 게 아니다. 그게 요한일서 2장에 나옵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하나님은 이 세상과 주님의 세계를 날카롭게 완전하게 대립시키고 구분시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세상으로부터 좇아 왔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 이 코스가 주님이 다녀간 코스에요.
지금부터 설명할 것은 시편 42편에서 어떻게 찬양으로 하나님께 찬송하게 됐는가? 그 불안과 그 두려움과 낙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것이 신앙인은 하나님의 계시를 아는 시인은 찬송으로 나아가게 되는, 낙망에서 어떻게 찬송되느냐 이 말입니다. 신약적으로 하면 낙망에서 어떻게 범사에 감사로 이어졌느냐, 이 말이거든요.
대구에서 부산까지 기차 타고 오면 물금역이 있어요. 낙동강 댐 물금역. 물금역에 딱 정시에 무궁화호가 정차를 해요. 정차할 그 타이밍에 여기 기차선로가 두 개 있는데 무궁화호가 대구에서 와서 부산으로 갑니다. 그러면 물금역에 정차하고 있어요. 그 타이밍에 부산서 대구 가는 새마을 기차가 같이 정차해 있어요. 바로 옆에 있어요. 창가에서 보면 풍경 하나도 안 보입니다. 기차 옆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여기서 뭐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에 속한 인간을 새로운 기차를 마련해서 빼돌리는 거예요. 교체지요. 여기 있는 자를 빼돌리는 거예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육신 안에 있는 나를 뭐로? 예수 안으로 빼돌리는 겁니다. 우리 힘으론 건너갈 수 없어요. 우리는 모든 의미를 내 쪽으로 돌리기 때문에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주님이 우리 쪽에 와서 동승을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일종에 노래 부를 때 뚜엣이에요. 이중창. 노래 두 사람 할 때 멜로디 파트가 있고 멜로디를 보조하는 화음 파트가 있겠지요. 이중창이 그렇잖아요. 멜로디 파트를 누가 차지하느냐? 예수님이 멜로디 파트를 차지합니다. 왜냐하면 전체를 다 아시니까. 우리는 보조지요.
뚜엣을 하는데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환자가 돼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망친 인간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우린 망한 채로 태어나요. 아까 야고보서 4장에서 뭐라 했습니까? 안개. 우리는 헛되고 헛된 안개, 없어져야 마땅한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이것은 환자인데 주님은 뭐냐 하면 환자와 짝이 되려면 의사가 돼요. 마태복음 9장에서 내가 온 것은 건강한 자에게 온 것이 아니요, 적어볼게요.
내가 온 것은 건강한 자를 위함이 아니다. 자, 묻습니다. 아픈 자가 주님 만나고 건강하게 되면 더 이상 예수님이 필요 있습니까, 필요 없습니까? 예수님이 한 번만 필요합니까, 계속 필요해요? 예수님은 계속 필요하겠지요. 계속 필요하기 위해선 뭡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환자이어야만 돼요. 계속 환자 되도록 하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까 그림 그렸습니다.
이 전체성에서 우리는 태어나면서 우리의 지식과 육신의 제한 때문에 좁은 것만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작은 것만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오느냐 하면 말씀을 가지고 오지요. 말씀은 다 완성됐다 했지요. 완성된 말씀이 오면서 우리의 생각의 폭을 점점 더 넓혀나가요. 넓혀나가면 지금의 내가 멀쩡하게 사는 것이 타인을 돌아보지 않고 타인의 힘듦과 아픔을 관련되어서 지금 내가 멀쩡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발견케 해요.
뭔 뜻이냐 하면 우주인이 우주비행사가 우주공간에 오래 있으면 뼈와 근육에 퇴화가 일어나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퇴화돼요. 이 말은 우리가 음식 먹고 단백질 소화시키면 건강하게 된다. 이거는 좁은 데서 나와요. 우주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좁은 데서 나왔어요.
하나의 나무가 있다. 하나의 나무를 우리는 한 그루라 하잖아요. 그런데 나무가 나무되기 위해서는 비와 토양과 영양분, 햇빛, 공기뿐만 아니고 다른 식물, 심지어 동물의 변, 동물까지 전부 다 한 그루 나무에 연관이 돼 있어요. 심지어 더 나가서 달과 별의 중력까지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한 그루의 우주에요.
하나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여러 가지 변수들이 이렇게 오늘날 우리 자신을 만들어낸 겁니다. 이걸 가지고 원격작용이라. 원격작용이 뭔 뜻인지 아시죠. 물리적인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어도 작용을 주고받는 걸 원격작용이라 합니다. 멀리서 작용하는 거요.
그래서 이 세상은 세 종류의 네트워크로 형성돼 있는데 하나는 중앙 집중 형, 두 번째는 탈 중앙 집중 형, 세 번째는 분산 형. 이 세상에 네트워크는 딱 세 종류밖에 없어요. 중앙 집중이라 하는 것은 하나 앞에 모든 것이 여기서 연관돼 있는 것.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멀리 있더라도 여기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오직 하나를 향하여 집중해 있는 걸 중앙 집중 형.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탈 중앙 집중 형이라 하는 것은 여기에 나름대로의 중앙 집중이 있지만 나름대로 중앙 집중을 갖추면서 이것도 중앙 집중을 소규모로 갖추면서 이것도 하나 중앙 집중을 갖추면서 이것들끼리 연결되는 것, 중앙 집중된 것끼리 연결되는 것.
세 번째, 분산 형은 이렇게 여러 가지 사람 있지만 서로서로에게 팔다리가 서로에게 무작위로 연결되는 거예요. 이게 분산 형이에요. 이 고리, 고리를 노드라 하는데 node. 네트워크에 노드가 있어서 다 연결되는 거예요. 전 세계 모든 사람은 일곱 노드만 단계만 하면 다 아는 사이가 된다는 그런 수학적 이론입니다.
자, 여러분 보세요. 이 세상은 어떻게 돼 있습니까? 셋 중에 어느 쪽이죠? 중앙 집중 형입니까, 아니면 탈 중앙 집중 형입니까, 안 그러면 분산 형입니까? 이 세상은 분산 형이에요. 탈집중형 되지만 결국은 전체를 보게 되면 전부 다 한 곳에 모이도록 악마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네트워크 속에 들어와요. 이 연결고리를 성령이 확대시켜요.
나만 잘하지, 나만 성경말씀 잘 지키면 되지가 아니라 그 모든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연결돼 있어요. 나만 취직 잘해서 돈 벌어서 교회 십일조하면 되지. 그런데 그 취직한 회사 자체가 다른 환경 오염시키는 회사면 어떻게 하겠어요? 환경오염으로 돈벌이해서 그것으로 교회 십일조했다. 성경에 보면 창녀가 번 돈은 교회 내지도 마라. 성전세 내지도 말라 했거든요. 근데 창녀 아닌 자가 어디 있어요? 전부 다 몸 팔아서 돈 버는데.
확대시켜버리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조리 다 뱀의 자손, 악마에게 분산된 악마에게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하죠. 성령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되돌려줍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나라는 장소가 우리 주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여호와지요. 언약과 육신이라는 나의 뱀의 자손을 만나고 활동하는 장으로써 영토로써 우릴 활용한 걸 알 때 우리는 기꺼이 내 영토가 주께서 주를 위해서 하는 활동에 내어줄 때 찬송하리로다. 그래서 시편은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내 세계 갖추지 못하게 내가 나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죄악과 연계돼 있고 같이 합세돼 있는가를 깨달아서 오직 주의 십자가 외에는 다 이루심 없이는 다른 복음이 없음을 날마다 더 깊이 깨닫는 감사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