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0428b 마태복음6장 3절(사라진 분)-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30428b 마태복음6장 3절(사라진 분)-이 근호 목사
왜 인간은 타인과의 공통점을 가질 수 없는가? 그것은 그림을 그려보면 되죠. 분명히 정사각형 환경 속에 있는 정사각형 물건을 여기(정면)에 있는 내가 쳐다봐요. 똑바로 쳐다보죠. 폭이 얼마고 길이가 얼마라고 보죠.
이것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 수학적 직선이라 하는데 수학적 직선 거리 안에 포함되는 것을, 나는 그 안의 걸 포착했다. 난 정확하게 이 정사각형을 본다. 이걸, ‘함수로 지배한다. 수학 함수로 지배한다.’ 고 어려운 말로 이렇게 할 수 있는데요.
이 지점(정면)에서 보는 게 A라면 B라는 사람이 정면이 아닌 옆에서 이 정사각형을 보게 될 때, 정사각형이 하나의 물건이고 사물이고 그림이라면 이 그림을 지탱하고 있는 환경조차도 삐딱하고 안의 물체도 삐딱하게 이렇게 보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옆에서 보니까. 옆에서 사선으로 보니까 자기 눈에는 뭐든지 삐딱하게 이렇게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둘(A와 B) 사이에 만나서 공통점이 있을 리 없죠. 똑같은 사물, 똑같은 사건, 똑같은 인물을 대할 때 내가 속해있는 그 모습과 남이 보는 것하고는 차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성장과정이 다르고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차이나요.
그러면 인간은 똑같은 게 아니냐? 똑같은 것만 골라서 채집해서 담았죠, 본인이. 그 사람을 만날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맞춰주려고 똑같은 것, 이해하려고 애썼던 요소들만 급조해가지고 ‘나 당신하고 생각이 똑같아요.’ 이런 식으로 담아오는 거예요.
인간은 같을 수가 없죠. 같을 수가 없는 자들이 다수 모여 있으니까 이게 지옥인 거예요. 달리 지옥이 아니고 이게 지옥이에요. 불이 뜨거워서 지옥이 아니라 ‘세상에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왜 이리 없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되는데 인간이 그러면 외롭잖아요.
나의 외로움을 들어줘야 내가 주체로서 절대적 주체로 유지가 가능합니다. 신하가 있어야 왕질을 하죠. 자기 혼자 왕질합니까? 나 하는 일에 ‘아휴, 맞습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해줘야 자기가 이 땅에 살맛이 난다 이 말이죠.
아무리 많은 사람을 사귀고, 어떤 사람은 선을 100번 본 사람이 있는데, 100번 만나서 맞다, 맞다, 맞다, 맞다,… 아니구나. 마지막의 공백. 건너갈 수 없는. 공백이 뭐냐 하면 공백이란, 동일성이 누락된 것. 동일성이 끊어진 거예요. 동일성이 누락된 걸 말합니다.
‘정도껏 비슷하면 대충 하자. 그래, 서로 비슷한 거 많으면 그렇게 싫지 않으면 결혼하지.’ 이게 1990년도까지의 20대들이 가진 결혼인식이었습니다. 2000년 들어와서 완벽하게 맞아야 결혼해요. 완벽하게. ‘집안에서 대충 맞으면 살다보면 맞춰지는 거야. 그래, 살면서 맞춰가겠다.’ 1990년 정도에 결혼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본인이 주체가 된 거예요. 집안 어른이 주체가 아니고 본인이 결혼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하자를 줄이는 쪽으로 보다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드디어 만났다, 완벽한 사람.’ 만났는데 사실은 완벽한 사람을 만난 게 아니고 완벽해주기 위해서 저쪽에서 연출을 했죠. ‘결혼하면 보자. 너 죽여 버린다. 결혼하면 봐주는 거 없어.’ 속으로 감추고 ‘그래 그래. 당신은 이렇게 해. 당신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손에 물 안 묻히고…’ 연출을 한 거죠. 어떤 인간도 결국은 공백 빠지고 둘 사이가 하나 되는 방법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 다음에, 빈 자리 생겼죠. 그 빈 자리는 뭡니까? 자기의 동일성이 없죠. 거기서 하는 말이 ‘내가 그 사람하고 결혼하려고 한 3년 사귀었는데 나중에 말이 안 통하더라.’ 이러죠. 말이 안 통한다.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은 내 자리가 내민 육지와 저쪽 육지에 다리가 없다, 건널 수 있는 브릿지가 없다는 말이에요. 이게 빈 자리, 공백이에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이.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고 모든 인간이 그래요. 자기와 똑같은 인간은 없어요. 그러면 이 세상에 다수의 세계, 다자의 세계가 한통속이라는 말은 빈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아요. 전부다 각자 자기가 작은 신으로 작은 god로 행세한다는 점에서 똑같아요. 그런 점에서 동일한 거예요.
이 빈 공백을 겨냥해서 누가 오시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와버려요, 말씀이. 이 빈 공간에. 주님이 여기 빈 공간에서 출몰해버려요. 그럼 주님이 오셨다는 말은 예수를 믿을 수 있다, 없다? 없죠. 끊어졌음을, 끊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또는 사도의 말이, 성경말씀이 이 빈 공간에 출몰합니다. 공백이 있다, 가 아니라 공백의 출몰. 출현 정도가 아니고 출몰. 아예 어떤 인격이 등장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기 p.241에도 나옵니다만 히브리서 10장 29절이요. 이것은 약간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9절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8절부터 29절을 보면,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생각 안합니다.
왜 생각 안할까요?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할 때는 내가 통해야 말을 해요. 주님의 모든 성경말씀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 나의 주체를 주체되게 하기 위해서 형성된 모든 의미와 이게 끊어져 있어요. 단절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을 보고 ‘아이고, 지옥 형벌이 무섭구나.’ 이러면 통하는 사람이죠. 그게 아니고, ‘뭐야 이거? 내가 굳이 이걸 꼭 알아야 돼? 언약의 피를 알아야 돼? 하나님 아들을 밟고, 밟고 안 밟고 그건 내 마음대로지. 내가 좀 밟았다고 그게 뭐 어때서?’ 이렇게 된다니까요.
28절,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이렇게 되어 있죠. 28절, 29절 무슨 뜻인지 여러분들 아시죠? 이 이야기를 이방민족에게 한 겁니까, 이스라엘에게 한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한 거예요.
아까 첫 번째 시간에 강의 첫 번째에 한 게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샘플 삼은 거예요. 샘플로 잡고 그들이 원치 않는데 율법을 줘버려요. 율법을 줬을 때 그 이스라엘 사람이랑 똑같은 사람이에요. 지금 여기 이야기하는 다수의 세계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들은 모세 율법을 이렇게 대하고 했지만 결국 그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멸망했습니다. 심판받았어요.
그러니까 선지자들은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율법을 준 거예요, 모세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잖아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는데 수요일에 자세히 못했지만, 민수기 바로 앞에 있는 레위기 26장 17절 같은 경우에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나오죠. 그리고 16절에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그렇게 되어 있죠.
31절에 보면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36절에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대적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같이 서로 천답하여 넘어지리니 너희가 대적을 당할 힘이 없을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레위기 26장에서는 조건이 들어있어요. 만약에 네가 율법을 어길 경우엔 이렇게 된다 했는데 가만 보게 되면 ‘율법은 어기라고 준 거야’ 라는 뜻으로 준 거예요. 주고 내가 약속한 대로 율법을 어겼을 때 반드시 이런 결과라는 것을 너희를 샘플로 해서 내가 보여주는 용도로 너희들에게 역할을 맡겼다는 거예요, 역할을. 역할을 맡겼다는 거예요.
아까 제 꿈속에서 성경공부 하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려가지고 문간방에 있는 아가씨한테 전화 바꿔줬을 때 우리의 역할은 뭡니까? 성경공부 못하고 멀뚱하니 저 사람들 사적인 이야기 들어야 되는 역할. 그 역할 한 거예요, 그 역할.
그게 바로 성경공부에요. 아하, 다르구나. 저 아가씨 나라하고 내가 속한 나라가 저렇게 다르다는, 요한복음 18장 이야기가 실제로 그대로 확인되잖아요, 그 속에서. 아이고, 꿈 고마워라. 꿈 아니었으면 설명 못할 뻔했다.
주님께선 아까 그 절차 있죠. 다수에서 둘의 만남, 관계 출현, 공통점 찾아가기, 빈 자리의 주체 등장, 빈 자리에서 공백의 출몰. 이것이 공백 주체의 출몰. 주체가 두 명 돼버렸어요, 두 명. 인간세계에 속하지 않는, 인간과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과 말이 섞이지도 않는 그분이 출몰해버린 거예요.
마치 구약 때는 율법이라는 돌판을 줬듯이 신약에는 아예 돌판 정도가 아니고 말씀이 육신이 돼서 출몰해버린 거예요. 두 종류의 주체가 등장해요, 두 종류의 주체가. 두 주체가 등장하니까 인간들과 안 싸울래야 안 싸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뭡니까? 아까 처음에 역사가 먼저 있고 역사가 둘로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가 나올 때 역사 내부에 이 둘이 싸움을 통해서 전쟁을 통해서 둘이 분류가 된다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역사 안에 이미 묵시가 들어있었던 거예요. 잠복되어 있었던 거예요. 특히 이스라엘에게는. 이스라엘 다니엘서 이런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율법이고 말씀이고 선지서이고 하나님의 계시잖아요. 계시 안에 영적 세계와 육적 세계 둘 다를 포함하고 있어요. 우리는 육적인 것은 태우고 영적인 것만 자꾸 탐을 내는데 그러면 안돼요. 우리 주체가 내가 다른 주체와 싸움의 대상이 되어야 됩니다.
다시 히브리서 10장 29절을 보면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이 대목 설명하는데 전화벨 울린 거예요. 그 문간방 아가씨 온 거예요.
“아줌마, 아저씨들 뭐하고 있으세요? 전화 이렇게 바꿔줘서 감사해요.” “아가씨, 잠깐만. 히브리서 10장 29절 무슨 말인지 좀 들어볼래?” “싫어요. 나 지금 바빠요.” 그럼 그 아가씨는 뭐냐? 전화 받고 자기 방에 가서 잠자는 역할 한 거예요. 자는 역할 한 거예요.
우리가 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습니까? 못하죠. 왜? 그 사람은 그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온 환경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갇혀있는 거예요. 말씀이 씨도 안 먹히죠. 막혔으니까. 공백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조용하게 이 땅에 살다 조용하게 가시는 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시비 거는 쪽으로 가버려요. 그게 뭐냐 하면 빈 자리에 주체의 등장과 싸움, 그다음 제일 마지막 절차가 뭐라 했습니까?
‘빈 자리’ 그다음에 여기 아까 설명을 놓쳤네요. 자리의 출몰이고 이게 빈 자리가 돼요. 인간에게 빈 자리에요. 끊어진 자리. 출몰인데 ‘빈 자리의 승리’라 하면서 이 빈 자리에 괄호로 뭐라 했습니까? 빈 무덤이죠. 빈 무덤이 승리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공백으로 오셨다 이 말이에요. 오셨을 때 어떤 일을 하셨느냐 하면… 다수의 인간들이, 예를 들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 사회, 유대인 국가라 합시다. 그 사람들도 따져보니까 모든 인간에게 기대하기는 글렀다는 사실을 자기들도 알고 있죠. 그럼 이걸 뭐로 덮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으로 덮어요.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이니까. 하나님의 약속으로 우리는 하나라고 이렇게 해요. 하나라고. 이게 뭐냐 하면 종교입니다.
종교란 빈 공백의 허전함을 덮기 위한 겁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살고 내 멋대로 살았을 때 신을 상정한다면 신을 염두에 둔다면 신의 절대적인 원하는 기준 있잖아요. 그 기준, 표준에 자기가 미흡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죠. 그럼 그 빈칸을 그냥 두게 되면 죄책감이 발생하잖아요. 그럼 그 사이를 뭔가 메워야 돼요. 메워야 되는데 그 메우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메우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과의 관계죠.
흔히 목사들이 이런 이야기하죠. 십자가가 왜 이렇게 cross되어 더 수직적인 줄 아나? 하나는 인간 사랑이고 위에서 내려오는 수직적인 것은 하나님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하라고 이렇게 된 거다. 이런 구라를 떨고 있잖아요.
바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이건 자기의 허전함을 성경말씀, 율법화 된 성경말씀으로 자기가 할 도리는 하되 미흡하게 남아있는 빈 공백의 자리를 하나님 것으로 마저 채우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다치지 않죠. 자기는 날마다 회개하면 되니까. 반성하면 되니까요. 반성하는 자기는 귀한 거니까. 나에게 반성한 나는 귀하고 그걸 용서해주는 하나님의 사랑도 귀하고. 두 개의 귀함이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룬다. 그런 것들로 그 유대사회는 민중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종교 했을 때 이 주체는 부정됩니까, 엄연히 살아있습니까? 살아있죠. 기존의 주체들의 다수와 하나님의 사랑이 결합해서 자기들을 구원받은 택한 민족이라고, 선택받은 택한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거예요.
주님께서는 여기에 하나의 주체로서 쓱 끼어듭니다. 끼어드니까 이쪽(유대사회)에서 예수님을 내쳤습니다. 여기서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았던가요? 몰아넣는 이유가 뭐였던가요? 무엇이 그렇게 했습니까? 왜 밀쳤죠? 이미 이들이 유대라는 종교 자체에서 의미화 되어가지고 서로들끼리는 언어가 소통되고 있었던 거예요. 통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참 신기하죠. 어떤 점이 신기하냐 하면, 나는 나밖에 모르잖아요. 나밖에 모르는데 유대신학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유대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힘들게 인도해주셨다는 것이 이 절대적인 나한테 와닿는다는 것, 통한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거 굉장히 신기한 거예요.
주님은 그 유대인 지도자보고, 너희 아비는 악마다. 여기서 주님은 인간하고 너희들하고 싸우지 않겠다고 천명해버려요. 나의 싸움은 악마지, 악마의 하수인 인간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 성도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돼요. 우리가 사람하고 싸우면 안돼요. 왜냐하면 각각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전화 받은 일산 아가씨, 그건 자기 역할이에요. 우리는 우리 역할이에요. 내 역할이 낫다고 윽박지르면 안돼요. 그냥 역할이에요. 우리의 싸움은 문간방에서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걔가 우리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싸움의 대상이 아니에요. 내가 나한테 목 조르고 벽에 부딪치면서 ‘똑바로 하란 말이야. 똑바로! 팔도 아프지 말고 똑바로 해! 주의 일하는데 똑바로 해.’ 흔들어대지 마세요. 나를 닦달내지 말라고요. 우리의 싸움은 내가 아니에요.
주님은 악마의 일을 멸하러 오신 거예요. 요한일서 3장의 말씀처럼. (요일 3:8) 마귀를 겨냥하는 거예요. 마귀는 인간들을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시어서 그들로 하여금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이 그들의 주체와 붙어있도록 조치를 해준 겁니다. 딱 들어붙을 수 있도록.
독일의 환경 데모하는 사람들이 떼지 말라고 아예 아스팔트에다 본드 붙여서 죽어도 이 아스팔트에서 데모하는 걸 중단 못하겠다 하니까 경찰들이 와서 아스팔트 뜯어내버렸어요. 뜯어내서 그대로 경찰서 집어넣었어요.
인간은 절대로 우리가 살아온 이 아스팔트 같은 세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고대로 뜯어내요. 마치 야곱이 복 받고 난 뒤에 환도뼈 그대로 위골된 채 그냥 사는 것처럼. 야곱도 위골됐어요, 야곱도. 위골된 채. 영생 얻은 거 생각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죠.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인 그대로 유지하게 해요. 우리보고 죄인하지 말고 이제는 의인되란 말이야. 은혜를 받아놓고 보답을 해야지. 이렇게 우리보고 닦달내는 것은 마귀가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복음 알았으면 이젠 복음 값을 해야지,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 안합니다. 우리는 아스팔트에 본드 붙여서 이렇게 딱 붙어있어요, 이렇게.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0절 말씀. 여러분 이거 찾지 마시고 외우는 분이 이야기하시죠. 간단한 건데.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한번 생각해보세요. 왜 굳이, 사람을 왜 굳이 안 좋게 하려고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왜 굳이. 인간은 자기 주체를 잃어버리지 않고 부정하지 않고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인간은 이미 악마가 조성해놓은 환경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를 다치지 않고 나를 화나게 하지 않는 괜찮은 단어와 의미들은 어떤 게 있을까 찾아서 내 것으로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은 좋아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널 죽이려고 작정했다는 말은 싫어한다니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작정해버리면 내가 남은 세월 동안에 노력한 것이 의미 없이 되잖아요.
“그러면 나는 의미 없는데?” “너는 원래 의미 없어, 원래! 원래 의미 없는 거야.” “왜요?” “그건 성경 히브리서 10장 29절에 나오지. 하나님 아들을 밟았으니까.” “제가 안 죽였는데요?”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 내가 아버지에 의해서 죽게 했다니까요. 내가.
인간들은 예수님을 밀쳐서 무덤에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꼴좋다. 까불다가 우리한테 대들면 이런 꼴 난다.’ 라고 무덤에 집어넣었어요. 그럼 무덤에는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은 채로 있어야 되죠. 예수님이 죽은 채로.
예수님이 여기 무덤에 있다. 무덤에 죽은 채로 있다. 구약 에스겔 37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예수님 자체가, 요한복음 1장에도 마찬가지지만, 이스라엘이에요. 인자가 머리 위로 오르락 내리락. 예수님 자체가 이스라엘이에요. 왜냐하면 유일한 참 아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들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 무덤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무덤에서 끄집어냈다는 말은 죽은 이스라엘이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난 거죠. 살아나게 되면 그러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자기가 ‘나는 살아있다’고 우겼거든요. 살아있고 예수님은 죽어 마땅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죽어 마땅하다는 이 분을, 이스라엘 또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려버리면 ‘살았다’가 두 개의 상충되는 세계에서 다른 의미로 적용되는 거예요. 예수님 나라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죽은 적이 있었다는 말이고. 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살았다’이고. 여기 인간세계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죽은 적이 없은 경우를 살았다고 보는 거예요.
근원적으로 말이 안 통해요. 근원적으로 말이 통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기(인간세계) 있는 백성들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그 말을 사도 바울도 성령을 통해서 말할 수밖에 없어요. 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까 절차 다시 하면, ①다수→ ②둘의 만남→ ③관계 출현, 왜? 외로우니까. → ④공통점 찾기. TV예능 막 들어가는 거예요. 예능프로, 인기죠. 너 커서 뭐 될래? 가수 될래. 방탄소년단 될래. 전부다 이거 뭡니까? 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의미에 섞여 들어가기. 그들이 원하는 의미에 합류하기. 이게 애들의 장래 소망이잖아요. 나 거지 될래요, 이런 건 없다 이 말이죠.
→ ⑤빈 자리에서 주체 출몰. 빈 자리에서 주체 출몰하면→ ⑥기존의 주체와 싸움. 기존의 주체와 싸우니까 승부가 나야 될 게 아닙니까? 누가 승리합니까? → ⑦빈 무덤으로 승리하죠. 절차에서.
그러면 말씀은 뭡니까? 말씀은 절차의 처음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성경말씀은. ①우리는 눈에 ‘다수’가 보이네요: 다수가 아니야. 단수야. 하나하나 시비 다 걸어요. 하나하나.
②둘이 만날래요: 둘이 만나봤자 그것은 제대로 된 만남이 아니라는 거예요. 좋다고 만나봐야 같이 따로 놀 거야, 아마. 관계 출현. 전부다 이 절차마다 말씀이 다 들어가는 거예요. 둘의 만남. 이거 말씀 한번 찾아볼게요. 로마서 14장 1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죠.
성도와 성도가 만났는데 내 원대로 만나는 게 아니고, 내게 주어진 말씀에 입각해서 상대를 내 품으로 악수를 해야 되고 받아들여야 돼요. 내가 원하는 타입이라든지 내 스타일, 그걸 주께서 일체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말씀이 훼방꾼입니까?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행동 하나, 생각 하나에 하나하나 다 누가 끼어드는가? 말씀이 난입해서 다 끼어드는 거예요. 완전히 우리의 내 주체되는 자리에 대해 시비 안 거는 순간이 없어요. 전부다 시비 걸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말씀을 안 보잖아요. 안 보든지 아예 따먹어서 구겨가지고 입에 집어 넣어버려요. 선악과 따먹듯이.
③관계 출현. 여기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5장, 이건 사도 바울의 경험이니까요, 5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육체로 알았으나. 역사적인 인물, 육체에서 육과 영이 분류되는 것을 사도 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눈치 챈 거예요. 주님이 나한테 뭘 해줄까, 가 아니라 내가 애초부터 주님을 오해부터 시작해서 주님을 알았던 거예요. 나한테 이런 오해가 있는 줄 나도 몰랐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고 난 뒤에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이 보는 관점과 내 보는 관점이 달랐다는 겁니다.
여기 벽에 있는 사각형이 내가 보기에는 반듯한 사각형이지만 옆에 주님 보시기에 ‘그거 삐딱한데?’ 이렇게 보는 거예요. 우리는 내 자리에서 주님 자리로 갈 수가 없었기에 내가 삐딱한 존재라는 사실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내가 죄인인 것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이건 주님 생각하고 너무 터무니없이 삐딱하고 다 다르고 틀어졌다는 사실을 예전에 미처 몰랐던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④공통점 찾아가기. 공통점 찾아가는 이것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옵니다. 6장 14절, 굳이 안 찾아봐도 여러분들이 다 아는 건데.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주님 보기에 나는 죽어 마땅함이 나의 공통점이 되는 거예요. 주님과 나 사이의 공통점은, 주님은 날 죽이는 것이 정당하고 나는 죽는 것이 당연하다,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말씀 자체가 일찍 찾아온 나에 대한 심판이었어요. 심판을 미리 받은 거예요.
그러면 타인들, 남들은 다른 관계에 있을 때 너와 같은 친구 사이에서 그때는 어떻게 보는가? 고린도후서 5장 14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자에요.
‘다수가 눈에 보이네’에서 거기 앞에다 괄호열고 뭘 하나 집어넣는데 ‘모두 다 죽은 자들이 보이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안 죽은 자들이 안 보이고 죽은 자들만 자꾸 눈에 띄는 거예요, 죽은 자들.
이걸 정확하게 말해서 전부다 죽어갈 수밖에 없는 자들. 나중에 전부다 요양병원에 갈 자들이란 뜻이 아니고 분명히 오늘 있다가 내일 음주운전 걸려가지고 죽어버린 친구. 우리 십 년간 앞으로 계속 살자, 하다가 그 다음 날에 그 친구는 먼저 죽어버린 것. 언제 내일 돼서 없어진다 할지라도 이것은 죽어야 될 것을 미리 먼저 보여준 사례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의 다수. 그런 사람들만 간호법 바꾸라고 데모하고 있어요. 의사는 반대해서 파업한다고 엄포 놓고 있고.
그다음에, ⑥주체와 주체의 싸움. 아까 첫 번째 시간에 한 것 다시 하면 달과 별과 해는 주님과 어떤 관계였어요? 사이좋죠. 사이좋은데 그들은 주님과 그들끼리 통하는 언어가 따로 있어요.
그러면 인간에게 있는 언어를 결국 누가 장악했단 말입니까? 언어에 지식이 들어가는데 선악 지식이 언어를 통제하고 다스리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결과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네가 신처럼 되리라.
‘신처럼 되리라’와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와. ‘죽는다’와 ‘신이 된다’는 것,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것. 안 죽는다는 건 악마의 생각이고 죽는다는 것은 주님 생각이죠. 그럼 어떻게 되느냐? 인간들은 ‘죽기야 죽겠지.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살면 되잖아.’ 이게 악마가 만든 종교로 종교적으로 그렇게 위로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 부활했더니, ‘우리도 부활하면 되잖아.’ 이게 마귀가 기독교 형식의 마귀가 이렇게 인간들을 세뇌시킨 거예요. 위로한 겁니다. 누구 좋으라고? 사람을 좋게 하기 위해서.
빈 무덤은 요한복음 19장이나 20장에 보면 부활 나오잖아요.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는데, 없어. 없어요. 누워있던 사람이 없어요. 누워있던 시체가 없는 게 아니고 사람이 없어요. 사람이. 예수님이 없어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죽은 시체라도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시체가 없는 거예요. 그럼 산 사람은? 산 사람도 없어요. 양쪽 다 없어요. 살았든 죽었든 양쪽 다 없어요.
부활은 나타내줘야 돼요. 부활은 우리가 ‘아이고, 여기 있네.’ 붙잡는 게 아니고 이미 주님의 세계와 인간 사이는 처음부터 공백으로 단절된 관계이기 때문에 저쪽에서 붙잡아도 주님 계신 곳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하고 3년 동안 붙어있었잖아요. 붙어있는 게 아니고 떨어져 있었던 것을 베드로가 몰랐던 거예요. 열두 제자가 몰랐던 거예요. 같이 밥 먹고 잠잔다고 너하고 같은 세계에 있는 줄 아냐? 같은 세계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그것을 인간들이 어떤 점에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를 그림으로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주님은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주시했습니다. (삼각형의 꼭짓점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어요. 바라보고 계셨다. 이걸 응시라 하는데요. 바라보고 있었잖아요. 우리는 여기(꼭짓점에 대응하는 밑변 자리) 있죠. 여기 있었죠.
바라보고 있으니까 어떤 말씀을 가지고 계속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이스라엘이 샘플이 되는 거예요, 샘플. 이스라엘이 샘플이 되어서 하늘나라 계신 주님이 율법을 보냈잖아요.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에서 만났잖아요. 이 말은 율법을 계속 주신 거예요. 온 거예요. 오니까 인간들에게 율법이 계속 추가됩니다. 추가되는 이유를 아시겠죠? 우리로 하여금 완벽에 완벽을 기해도 점점 더 틈이, 공백이 생기는 거예요. 일치점이 없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했잖아요. 그럼 우리는 어떤 사람이 평생 살인 안 했으면 자기는 살인 안한 걸로 여겼는데 산상설교 와서 주어진 율법의 완성 차원에서는 형제를 미워한 것도 뭐가 된다? 살인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벌써 건널 수 없죠. 아까 했잖아요.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건 구약에 나오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서(꼭짓점과 밑변 사이에 변) 내가 이룰 수 있는 것만 소복이 여기 다 집결시켜요, 집결. 집결시켜서 하나님을 내 행함으로 상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아버려요. 이것을.
그런데 주님 쪽도 만만치 않아요. 집결시킨 여기서 자기들의 의미로 이것 체크, 체크하면서 이것 지키고 저것 지키고 했는데 주님께서 여기서(꼭짓점과 밑변 사이에 변) 사건을 일으켜요.
사건을 일으켜버리면 내가 체크한 그 법에 의하면 이 사건은 해답이 없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다고요. 오른손이 한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거는 때려죽여도 못해요. 그런 내용이 성경에 차고 넘칩니다. 차고 넘쳐요.
분을 품되 해지도록 품지 마라. 왈왈 막 달려들고 하는데 시계를 딱 보는 거예요. 보니까 해가 지금 3cm 남았어요. ‘아…, 끝!’ ‘방금 우리가 뭐했지?’ ‘으음, 아무 일 없었어.’ 이렇게 됩니까, 사람이?
에스컬레이터 올라타는데 에스컬레이터 법이 있어요. 막 달리다가 에스컬레이터 타니까 잡는 형사도 가만 있고 범인도 가만 서서 가는 거예요. 그리고 끝나자마자 범인 잡는다고 뛰는 그런 공익광고가 있어요. 기차 타보면 나와요. 그게 말이 돼요? 에스컬레이터 그게 뭐라고? 둘이 가만 있고, 점잖게. 끝나자마자 ‘서!’ ‘미쳤나, 내가 서게?’ 막 달려가고 해요.
모든 이 세상의 상황 속에서는 항상 돌발적이고 예상 밖의 상황으로, 우리로 하여금 내가 단단히 스킬, 기술적으로 나를 의롭게 만들 모든 기술이 헛수고, 헛것으로 만드는 사건들이 일어나게 만들죠.
이 틈을 뚫고 들어와요. 틈을 뚫고 들어오죠. 뚫고 들어오면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새로운 말씀으로 여기에 토치카, 장벽을 더 쌓아버려요. 장벽을 더 쌓아버리죠. 하나님은 계속 추궁하고. 이 장벽이 실제가 아니고 바로 인간들의 종교적 이미지로 만드는 거예요. 이게 악마의 할 일입니다. 악마의 할 일이에요.
그리고 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은 인간이 다룰 만한 대상으로 (종교적 이미지에) 딱 달라붙어 있는 거죠. 이게 유대교잖아요. 하나님을 다룰 때는 하나님 이거 번제 받으시고 십일조 받으시고 이렇게 다룰 만한 대상으로 삼는 거예요. 이 바깥(주님 쪽)으로 벗어나는 건 없죠.
그러다가 자기가 몸이 아프다. 그러면 도대체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몸이 아픕니까? 몸 아픈 것도 하나의 역할인데 이걸 생각 못한 거예요. 사탄의 가시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역할에 불과한데 우리는 내 인생을 내가 조절하고 내가 관리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지고 자기를 부정하라고 하죠. 안됩니다. 자기 부정 안돼요. 부정을 해버리면 이게 어디 가요? 이미지에 들어붙어요. 이 이미지에 보면, 나는 나를 부정한 사람. 나 부인한 사람. 십자가 믿는 사람. 여기 다 들어붙어 있어요. 이건 이미지에 불과해요. 허구에요. 가상이에요.
실제로 구원하시는 것은 주님이 마귀를 이기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자기 관리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나는요? 나는 죽이죠. 나의 죽음이 여기(장벽, 종교적 이미지에) 있어요. 그러니까 죽는다는 말이 숨 끊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이 상태(밑변과, 밑변~꼭짓점 사이 장벽까지의 범위)가 이게 바로 나의 죽어가는 모습이죠. 이런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죠.
성령께서는 바로 이걸 우리에게 알려주니 성령 받은 사람의 복이 어떻겠어요? 대단해요~! 정말 대단해요. 내가 하는 그 짓거리가 나의 구원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나의 육적인 옛 모습을 그대로 매일같이 반복해 쏟아내고 있다는 것.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일만 쏟아내고 있다는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어야 하는 겁니다. 감격이어야 돼요.
그래서 여기 p.240에 뭐가 무너지는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 해놓고는 그 예루살렘이 성읍과 성소가 어떻게 돼요? 훼파, 무너집니다. 무너지고 난 뒤에 그다음 ‘언약을 굳게 함’ 할 때 여기 누가 등장합니까? 바로 마지막 한 이레에 누가 등장하느냐? 우리 주님이 그 자리를 치고 들어오죠.
그동안 계시로만 예언으로만 율법으로만 말씀하신 그 말씀이 하나의 주체로 등장해요, 주체로. 주체로 등장해서 너희들이 나에게 잘해라, 가 아니라 잘하나 못하나 너희들 인간하고 상대할 게 아니기 때문에 아예 악마가 예수님을 죽이도록 부추기도록 예수님 자기 몸을 내맡기죠. 그 사탄이 누구냐? 주님이 일부러 선택했어요. 자기 제자군에다가 가룟 유다에다 악마를 심어놨어요.
그러니까 역할을 맡은 거예요. 가룟 유다는 자기 역할을 해가지고 예수님을 구차없이 팔아먹지 않고서는 안 되게 만들었어요. 그냥 팔아넘겨서 결국은 총체적으로 예수님이 하나의 중심이 되게…
이 삼각형에서 밑변과 꼭짓점 사이의 변을 스크린이라고 합니다. 라캉이라는 철학자는 ‘스크린’이라고 하는데 스크린 말고 하나의 무덤이라고 하는 게 좋아요. 예수님을 죽도록 한, 이 무덤은 나의 무덤이 아니고 예수님의 무덤이에요, 무덤이라 할 때 무덤에서 일어나서 다 이루었습니까? 무덤 돌아가실 때 다 이루신 겁니까? 십자가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죠.
그러면 이 무덤, 블랙홀 같은 이 무덤 바깥이 뭐냐? 이게 바로 인간 현실이에요. 악마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현실. 무덤을 중심으로 해서 이걸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디서 나오는가? 이 무덤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서 이 현실세계에 역할을 맡아서 파견근무하고 있는 거예요.
무덤 바깥으로 나가면서 ‘나 죽었는데 주님이 찾아오니까 내가 죽어 마땅한 걸 알았다. 나는 이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라는 이야기를 하죠. 당연히 세상은 못 알아듣죠. 알아들을 수가 없죠.
그러나 성도가 ‘내가 이러하다’ 가 아니라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을 전하면 성도를 봐서가 아니라, 이 말씀을 보고 말씀의 능력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바로 주께서 마음 두고 있었던 주께서 생각해둔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게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p.240~241 걸쳐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음에는 쭉 한번 나가봅시다. p.246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돌아가셨는지,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 왜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해야만 하는지를 이제는 밝히 알게 된 그 사실을 저희들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