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30428a 마태복음6장 3절(사라진 분)-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태복음

광주강의20230428a 마태복음6장 3절(사라진 분)-이 근호 목사

p.240 중간에 “70이레”에 관한 거죠. 70이레, 지난번에 설명했듯이 이 ‘이레’라는 것에 초역사적(超歷史的)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70×7=490년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490년이 아니에요. ×7에서, 7이 이레거든요, 이레 안에 역사도 있고 역사를 초월한 묵시도 있고 그렇습니다.

묵시는 시간의 변화가 없습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가는 게 역사겠죠.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이 7을 역사 빼고 왜 묵시라고 하지 않느냐? 그것은 7 안에 역사에서 묵시로 바꾸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p.240 중간에 보면 “70이레에 일어난다는 모든 역사적 내용들, 즉 예루살렘(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명령) 하달, 기름부음 받은 왕의 등장, 기름부음 받은 자의 끊어짐, 성읍과 성소 훼파, 언약 굳게 함, 제사와 예물 금지” 이런 것들이 있죠. 이것은 역사적으로 그대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역사적인 것과 묵시적인 것을 도출해야 되는데, 일단은 역사라는 게 있어야 되겠죠. 역사적인 것을 신약에서 육이라 보고 묵시적인 것을 영이라 본다면, ‘역사’에서 ‘역사적’과 ‘묵시적’으로 쪼개져야 영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냥 영이 나타나질 않아요. 그냥 영이 나타난다면 이것은 신비주의가 되겠죠.

역사가 있는데 역사가 육으로 되고 영으로 갈라지려면 이 역사가 심판받아야 돼요. 역사 자체에 대해서 심판받는 거예요. 역사라는 한 덩어리가 있고 이 역사 자체가 심판을 받게 되면, 이것은 종말로서 사라지는 거예요. 역사가 이제 끝장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영적(靈的)이라 할 때 바로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영적이라고 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신약에서 영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구약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되거든요.

‘나 은혜 받았다’ 라고 어떤 사람이 주장한다고 할 때, ‘그럼 이스라엘 역사하고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그 사람이 답변하겠어요? 이스라엘 역사하고 무슨 관련 있습니까? 이스라엘 역사와 관계성이 없으면 그건 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역사가 심판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어떤 사람이 ‘역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왜 심판받는가?’ 그렇게 생각하겠죠. 역사가 심판받는 그 표본, 샘플로서 이스라엘 역사가 있는 거예요. 인류의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의 확대입니다. 그 압축한 게 이스라엘 역사에요.

70이레가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 거예요. 70이레라 하는 것은 1부터 쭉 나가다가 70까지 나오겠죠. 시작이 있고 끝이 있잖아요. 끝이 있다는 것은 이미 그건 끝 다음에는 심판이고. 심판 대상이라는 뜻이죠, 끝이 있다는 것은. 끝장 보겠다는 말은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는 그런 뜻이 아주 강렬한 겁니다.

그래서 70이레에 이스라엘 역사와 더불어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역사가 심판받는다는 말은… 큰 동그라미가 인류라면 인류 중간(가운데 동그라미)에 이스라엘이 있고 그 주변에는 이방민족이 있어요. 이스라엘 이 땅을 약속의 땅이라 했죠. 약속의 땅 주변에 이방민족들이 배치가 되어 있었잖아요, 구약 때.

그럼 구약은 옛날 언약이에요. 언약을 벗어난 영적 세계는 없습니다. 언약을 벗어난 영적 세계는 없어요. 그리고 영적 세계라 하는 것은 그 언약이 완성되면서 주어지는 거예요.

약속의 땅 주변에 이방민족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심판받았잖아요. 심판받았으면 그다음에 심판이 여기(중심)서 여파가 일어나겠죠. 진동이 일어난다 이 말이에요, 진동이. 그러면 이 지진의 진원지가 이스라엘이라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머지는 지진의 여파로 인해서 와장창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서 마지막에 지구가 불탑니다. 지구가 불탈 때, ‘야 지구 불탄다.’ 생각하지 말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탈 때는 이미 지구 불탄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이 있던 자리가 불타기 때문에 언약이 없으면 항상 불탈 수밖에 없는 그런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영적이라 할 때 자꾸 모호하게 신비체험이나 짜릿한 그런 것 찾지 마시고 영적이라 하는 것은 ‘언약 자체가 영적이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 영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고 ‘역사 속에서 육과 영이 나누어진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요약하게 되면, 영적인 것은 어디 있느냐? 영적인 것은 구약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성이 있어야 되고 이게 연속성을 갖춰야 돼요. 구약 때 이스라엘. 실제 이스라엘 역사가 있잖아요.

보통 기도원에서 “은혜 받았습니다. 목사님 감사해요. 은혜 받았어요.” 막 이렇게 한다면, 방금 이걸 안다면, 그 ‘은혜 받았다, 안 받았다’에서 확인 작업은 뭐냐? “그렇다면 구약 이스라엘 역사와 어떤 관련성이 있습니까?” 물으면 뭐라고 답변하겠어요? “내가 기도해서 은혜 받았는데. 뜨겁던데. 구약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어? 상관없어.”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면 그건 자기 피부의 신경조직이 흥분한 거예요. 은혜 받은 게 아니고. 피부세포가 신경조직이 흥분한 거예요. 팔 아플 때 막 두드리면 뜨거워지거든요. 그러면 마비됐던 팔이 은혜 받아서 녹취 막 하고… 그렇게 될 수가 없죠.

사람들이 ‘나는 성경을 모릅니다.’ 라는 대표적인 말이 뭐냐? ‘나 기도 열심히 해요.’ 하는 그런 말입니다. 기도 열심히 한다는 말은 ‘난 성경에 대해서는 완전히 백지입니다’와 완전히 같은 뜻이에요. 목사가 설교하면서 ‘여러분 성경도 많이 알아야 되지만 기도 열심히 하세요.’ 라는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무슨 뜻이냐 하면 ‘목사 나는 성경에 대해서 아는 바 없습니다.’와 똑같은 거예요.

자, 그럼 다시 p.240 중간에 나오는 제가 나열했던 것, 실제로 역사성으로 있던 일을 하나님께선 거기서 영을 뽑아낸다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인데. (요 3:6) 맞죠? 육은 육이고 영은 영 맞죠. 분류 되는 것 맞죠. 하지만 그 영은 육을 심판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생기는 것이지, 육 말고 따로 영이 오는 건 아니다 이 말이죠.

마태복음 6장 3절에 보면 거기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말씀을 언급해드리겠습니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인간을 완전히 두 조각내는 거죠. 우리는 오른손이나 왼손이나 다 내 손이라서 차별을 안 두잖아요. 오른손, 왼손 나눈다는 것은 ‘내가 내 몸을 보는 것을 주께서 심판하신다’ 이 말입니다. 내가 내 몸을 보는 것.

주님께서 우리 몸을 관찰하고 평가해버리면 내가 내 몸을 봤던 것이 심판받아요. 벌써 이 말씀 자체가 뭐냐? 이게 영적이잖아요. 오른손, 여기 오른손 있죠. 왼손 있죠. 누가 봐도 이건 아주 신비로운 게 아니잖아요. 실제로 있잖아요. 있는데 이 실제적으로 사물체로 실체로 이렇게 역사적으로 분명히 있는 손이지만 그 손 속에서 주의 말씀이 와닿아버리면 여기서 영적인 말씀이 나와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일상이라든지 성도가 속해있는 모든 세상 속에서 주님께서는 날마다 부지런히 영적인 것을 계속 뽑아먹는, 뽑아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 방법은 말씀이 여기에 도달해서 말씀 안목에서 내 해석을 부정하고 주님의 해석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라는 것, 내 몸이라는 실체를 육을 다시금 해석하게 만들어버리죠. 성령이 와서 해석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신기한 것 찾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내가 아는 것과 주님이 아는 것의 차이를 한번 볼게요. 내가 아는 것과 주님이 아시는 것. 어떤 차이가 있느냐?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속해있는 주변, 이걸 공동체라 하죠, 국가라 해도 좋고 가정이라 해도 좋고, 이 공동체가 공히 같이 아는 것을 내가 알게 돼요. 내가 아는 것은 내 주변에 있는 공동체가 나에게 알려준 겁니다. 말해준 겁니다.

따라서 주님이 아신다는 것은 이 공동체에서 알려준 그 공동체 내에 없는 것을 주께서 알려주죠. 왜 그러느냐 하면 주님이 이 인간 공동체에서 추방됐기 때문이에요. 추방될 때는 추방된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말이 안 통하니까 추방된 거죠.

그러나 인간들이 공동체에서는 예수님을 추방했지만 인간들은 뭐는 추방 못하느냐 하면 해와 달과 별들은 인간세계에서 추방 못하고 있죠. 문짝 떼가지고 쑤신다고 별이 없어지고 그렇지 않죠. 추방 못하고 있어요.

인간들은 해, 달, 별들을 왜 추방하지 않는 겁니까? 해와 달과 별은 인간 공동체에서 통하는 그러한 언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해와 달과 별은 인간이 사용하지 않는 다른 언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시편 19편, 전에 설교할 때 한번 한 것 같은데요.

시편 19편,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절에, “언어가 없고” 언어가 없다는 거예요.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다음 4절에,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해와 하나님 사이에, 달과 하나님 사이에, 별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로 통하는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통하는 언어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인간의 공동체가 알고 있던 그 언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해와 달과 별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데 왜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거예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를 사용해서 공동체가 서로 통하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말은 생각들이 단일화 되었다는 뜻이에요. 생각들이 똑같은 거예요. 생각들이 하나로 집결하고 단합되어버리면 공동체가 인정하지 않는 언어를 쓰는 사람은 도태대상이 되는 겁니다. 살해대상이 돼요. 바벨탑이 그런 거죠. 똑같은 언어를 썼기 때문에 탑을 쌓고자 했다.

해와 달은 주님을 추방하지 않았지만 인간들이 추방한 이유는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그 언어, 그 언어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그 의미와 매 이야기할 때마다 충돌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당신과 내가 다르다, 이렇게 할 게 아니고 철저하게 예수님을 안다면, ‘당신과 내가 다르다’ 이러면 안돼요. ‘당신이 속해있는 세계와 내가 속해있는 세계가 이렇게 다르다’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이야기해요. 18장 36절에 보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이렇게 나오죠.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이야기하지 말고 인간들이 이야기해야 돼요. 그러나 인간들은 그 이야기를 못해요. 왜냐하면 예수님도 자기들 세계에 속했다고 여기고 다만 예수님이 귀신들려서 우리끼리 진리로 구축해놓은 이 의미를 예수님이 정신이상이 돼서 안 받아준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소속자체가 환경자체가 다른 환경이라는 생각은 도저히 안 해요. 안하고 자기들의 세계, 그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제가 아까 이야기한 역사에요, 역사. 역사 자체가 심판받는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도저히 성립 안돼요. 왜? 역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심판을 받아요. 다 끝나야 평가를 받을 거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역사가 진행되는 이 인간세계 대해서 이미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언약세계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 의미로 인하여 인간의 세계 모든 것은 이미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지금 제 이야기가 아까부터 하면 ‘공동체가 보는 것과 내(예수님)가 보는 것이 다르다’ 그 입장을 제가 지금 견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더 나가서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주님을 식별할 수 있느냐? 주님을 식별할 수 있느냐. 식별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가능치 못하죠.

왜 예수님을 식별하지 못하느냐 하면 공동체에 있는 모든 같은 의미를 사용하다보면 여기서 동일의식이 발생돼요. 너와 나, 우리는 하나이다. 잠시 의견 다르더라도 이야기해보면 합의점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동일의식을 갖고 있는 겁니다. 동일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단하게 결집되어 있고 단결되어 있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신학적으로 논쟁을 많이 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모두를 한통속으로 유도해버린 겁니다. 주님께서 만들어버린 거예요.

지금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역사를 주님께서 어떻게 심판해서 육에 속한 세계와 영에 속한 세계를 어떻게 분류해내느냐, 그 작업과 관련되어 있는 겁니다. 역사를 어떤 식으로 심판할 것인가?

역사는 심판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죠. 그러면 ‘역사를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라는 그 방식은 주님께서 일찍이 먼저 역사에 찾아오셔서 독생자 예수님이 이 땅 역사 속에 들어왔다는 자체가 역사가 이미 심판받은 거예요. 모세가, 나를 믿지 않음으로 이미 너희는 심판을 받았느니라. 요한복음 3장에 나오죠. (요 3:12-18)

우리가 그러면 예수님이 쓰는 언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아는 그 의미를 우리가 알아채면 되지 않겠는가? 그걸 우리가 캐치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걸 캐치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가 쓸 테니까 이 질문에 답변해보세요. 질문은 두 개입니다.

첫째, 지금의 나와 천국의 나와 같은가, 다른가? 두 번째, 천국 갔을 때 나 말고 다른 이와 나와 같은가, 다른가? 천국 갔을 때. 집사님이 천국 갔을 때 저하고 같은가, 다른가? 이 질문. 같다면 어떤 점이 같고 다르다면 어떤 점이 다른가? 그 질문.

제가 일부러 질문을 끄집어내서 그렇지, 사실은 마음 속에 이 질문하고 싶어서 환장을 했죠. 또 질문 잘못했다고 꾸중 듣지 않을까 그게 겁나서 그렇지, 사실은 되게 궁금했던 겁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 질문 자체가 우리를 둘러싼 인간 공동체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 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지금의 나, 나와 다른 이, 그러니까 이것은 나와 타인, 지금의 나와 천국 갔을 때 나와 과연 내가 다른 타인이냐, 아니면 지금 그대로 나의 동일성을 유지하느냐 그 질문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인간 공동체에서 나라는 것은 남들이, 특히 가까운 부모가 되겠죠, 삶의 환경이니까, 부모가 나에게 알려준 그것이 나를 구성합니다. 그러면 나라 하는 것은 이미 나라는 의식이 있기 전부터 타인이 관여했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가 70, 80, 90이 돼도 계속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어 있어요. 남들의 평가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와 천국의 나라고 했을 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지금의 나라 할 때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나답게 만드는 타인들을 같이 동반하고 있죠. 그러면 천국에 갔을 때, 지금의 나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죽고 난 뒤에 부활해서 무덤에서 나와서 주님과 함께 있다 할 때 사람들은 자기만 달랑 함께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이 나가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남들의 제작품이에요. 내 속에 타인의 요소가 가득 들어있는 거예요.

일종의 고로케? 안에 감자도 들어있고 양파도 들어있고 으깬 게 들어있죠. 고로케를 쪼개보면 거기 고로케는 없어요. 양파 쪼가리, 감자 으깬 게 들어있지, 고로케는 없어요. 고로케라는 명칭은 그렇게 으깬 걸 가지고 추후에 그걸 요리제품 명칭을 고로케라고 붙인 것뿐이지, 이름 자체는 아무런 실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름과 그 실체가 동일하지 않아요.

지우개가 있는데 이 지우개 안에는 지우개 없어요. 지우개 안에는 털로 되어 있고 뭐 이렇게 되어 있지, 지우개는 없어요. 손잡이 떼버리면 이게 지우개입니까? 털 떼면 지우개입니까? 지우개 아니죠. 지우개 요소가 해체되어버리죠.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 보내면서 우리를 해체시키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미워! 못됐어! 그런 게 아니고 우리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싼 그 인간 공동체가 함께 있기 때문에 심판 차원에서 우리를 거기다가 분쇄해버리는 겁니다. 다 부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의 나는 천국의 나로 못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마치 이 세상 역사 속에 나는 타인이 없으면 내가 없는 것처럼. 성경에서 민수기 22장에 보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대목이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언어가 없다고 알려진 당나귀가 주인인 발람 선지자에게 막 대들고 반발하고 말을 해버려요.

발람 선지자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이거 무슨 귀신인가? 작대기가지고 막 때리죠. 당나귀가 좀 당나귀다워. 네가 왜 말을 해? 이 당나귀야. ‘주인님, 왜 때리십니까?’ 이게… 그냥 때릴 때 당나귀가 찡그릴 것 같으면 우리가 참아낼 수 있는데 그걸 말로 표현해버리면 기절해버려요. 기절하겠죠.

천국의 나는, 나를 되게 하신 분은 나보다 선제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만드신 거예요. 예수님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형상이 있어요. 예수님의 형상으로 나를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나와 예수님의 형상은 동질성이 돼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에베소서 1장 23절에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두 개의 몸이 아니고 하나의 몸이다. 하나의 몸이에요.

에베소서 1장 23절도 그렇고 4장 5절, 6절도 마찬가지죠.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6절,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하나 되기 위해서, 너희들은 둘이 아니고 그리스도 하나의 몸 안에서 있다는 걸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줬다고 되어 있어요. 에베소서 4장에 보면 6절에 나와 있죠. 7절 전부다 특히 13절까지.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인간세계 언어로서는 납득하기 곤란해요. 인간세계에서는 아무리 스승한테 뭘 받아도 나는 나고 너는 너에요. 인간세계에서는 타인의 것으로 교육받고 타인에게서 아무리 도움을 받아도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에요. 최종적으로 나의 절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질문이 바로 나의 절대성을 근거해서 이 질문이 나온 거예요. ‘천국 갔을 때 다른 이와 나와 같습니까, 다릅니까?’ 라는 질문이 여기 나는 나만의 고유성, 독보성. 나는 끝까지 나로 모든 것을 종결짓는 것을 나는 포기할 의사가 없다고 단호함을 갖고 있는 그 나. 그 나가 다른 사람하고 똑같이 됩니까? 라고 물은 거예요.

그러면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기초, 기반은 닦았다고 치고. 물론 일방적 생각입니다만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강의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해놓고 본격적으로. 벌써부터 어질어질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내 세계 내 나라 따로 있다. 나는 유대인의 왕인데 내 나라 따로 있다. 내 나라 따로 있다는 이 말씀은 이 세상과 차별된다는 뜻이거든요. 그냥 차별만 될 게 아니겠죠. 더 나아가서 이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겠다는 거예요. 지구 폭발이에요. 지구를 폭발시키겠다. 다 없애버리겠다. 해와 달과 별이고 뭐고 다 없애겠다. 다 폭발하겠다는 거죠.

그래서 이걸 거꾸로 다시 올라가게 되면, 지구를 폭발하겠다. 왜냐? 이 세상이 나의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그런데 그분이 누구라고요? 주님이라고요. 그분이 주님이거든요. 그러니 주님은 심판하시는 분. 인간세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 나라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심판하겠다는 말은 이 세상에 협조하겠다, 이 세상이 번영하도록 도와주겠다는 그것과는 정반대죠.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내가 놀아나지 않겠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 심판하시는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심판받을 요소로 가득 차있다’ 이걸 인정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심판받을 요소로 가득 차있다. 심판받을 거리만 계속해서 양산하고 있다’ 이걸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걸 이제 우리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굳이 알 필요 없다고 우기는 것이 이 세상이에요. 왜? 오른손이나 왼손이나 다 내 손이기 때문에. 나의 절대성, 독보성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굳이 오른손, 왼손으로 나눌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오른손하고 왼손, 다르지만 내 몸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걸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은 공격하는 거니까 공격하는 편이 주님이니까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주께서는 파쇄해버리죠. 균열, 그 안을 쪼개버려요. 그 안을 쪼개버린다고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거기에 대한 답변은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답변을 제공해줄 수가 없어요. 그건 당연한 거죠. 답변 못하기 때문에 심판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답변을 끄집어낼 수가 없죠.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왜, 왜 이 세상은 심판받을 요소가 계속 나오느냐?’ 이것을 우리들이 이 강의를 통해서 추적해봐야 됩니다. 왜 이 세상은 심판받을 것들이 계속 나오는가? 일단 그 절차를 제가 한번 쭉 써보겠어요.

다수→ 둘의 만남→ 관계 출현→ 공통점 찾아가기→ 빈 자리에서 주체 등장→ 빈 자리와 등장된 주체의 싸움→ 빈 자리(빈 무덤)의 승리.

다수부터 출발합니다. 둘의 만남→ 관계 출현→ 공통점 찾아가기→ 빈 자리에서 주체 등장→ 빈 자리와 등장된 주체의 싸움→ 빈 자리, 다른 말로 하면 빈 무덤의 승리. 이런 절차가 진행됩니다. 이 절차 하나하나 이동하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궁금했던 것, 고민거리가 다 담겨있어요, 전부 다.

첫째, 다수. 인간의 시각, 인간의 눈에는 다수가 있습니다. 다수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죠. 여럿. 예를 들면 대구의 시립 합창단에서 헨델의 합창을 공연하려고 했는데 대구시 종교자문연합체에서 합창 공연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그 마지막 악장에 신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한 거예요.

자, 종교협의체가 기독교만 있는 게 아니고 천주교만 있는 게 아니고 불교도 있고 여러 가지 다른 종교도 있겠죠. 그게 뭡니까? 단일한 겁니까, 다수입니까? 다수에요, 다수.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대구시에서 종교협의체 폐지시켰습니다. 간단하죠. 폐지시키죠. 폐지시키면 그게 뭐냐 하면 빈 자리가 등장하는 거예요. 공백. 공백이 등장해요. 공백이 등장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가 날아가버린 거예요, 존재 자체가.

다수입니다. 이것은 세 살, 네 살 누구라도 서른 살, 사십 살 누구라도 자기 눈에 자기만 있고 아무도 없는 게 아니고 여럿이 있어요. 여러 명이 있어요. 인간의 모든 의미와 의식은 이 다수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수하고 다 사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중에서 친밀도가 가까운 쪽에서 둘의 만남이 이루어져요. 이 둘의 만남,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 우정이라 해요. 사랑, 우정.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애가 있는데 어린 애가 태어났잖아요. 어린 애가 태어났을 때 아빠, 엄마에게서 어린 애가 태어나잖아요. 그럼 아빠, 엄마 보기에는 식구가 세 식구잖아요. 그런데 그 갓난애는 식구를 세 식구라고 보지 않습니다. 둘 중의 하나 후보감을 탈락시키고 우선 협상대상을 먼저 골라요. 그게 부모들은 궁금해가지고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렇게 묻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와 친밀도가 가는 사람과 둘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둘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관계라는 게 생겨요. 관계라는 게. 두 사람 사이에 관계가 되면 이것은 하나의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하나의 관계에 종속되면서 다수 중에 우리, 다수들 중에 우리가 따로 설정돼요. 우리가.

그런데 둘이 만나다가 삐쳤어요. 삐치면 뭡니까? 관계가 끊어지겠죠. 끊어지면서 인간은 전에 있던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 후보감을 학수고대하게 됩니다. 너 아니면 친구 없는 줄 아나? 나 다른 사람, 친구 있어. 기다리게 돼요. 자, 기다리는 이 자세, 이 태도를 한번 봐요. 자기 손해 봅니까, 자기 손해 안 봅니까? 절대 손해 안 봐요. 자기 절대성이죠.

그래서 인간은 다수 중에서 자기와 관계 맺기를 고대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외로움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번 이렇게 아는 관계라도 언젠가는 더 좋은 게 있으면 알아서 좀 떨어지고 다른 사람이 나한테 붙었으면 좋겠다는 것. 그러려면 항상 세 사람과 사귀든 네 사람과 사귀든 본인은 늘 외로워요. 외로움을 유지시켜줘요, 외로움을.

외롭다는 게 뭐에요? 손해 보기 싫다는 거예요. 내게 조금이라도 손해 보기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 다닐 때 그런 거 있었어요. ‘취미가 뭡니까?’ 그러면 ‘고독.’ 고독이 취미래요. 그것은 취미 아니라도 나이 들면 다 돼요. 나이 들면 다 고독해져요. 인간은 백날 변장해봐야 소용없어요. 결국 나이 들면 변장거리 다 떨어집니다.

부.무.떨.깨. 부서지고 무너지고 떨어지고. 나이 들면 다 떨어져요. 비듬만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머리카락만 떨어지는 게 아니고 다 떨어져요. 자식도 싫고 손자, 손녀 다 싫어. 다 떨어져나가요. 다 떨어져나갑니다. 나의 외로움을 찬양해주고 나의 외로운 절대성을 선한 일로 인정해주는 그런 사람하고 관계 작대기만 딱 쥐고 여기 붙어라, 누구든지 나의 고독의 위대함을 찬양해줄 사람은 붙으라고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럼 관계가 출현했잖아요. 그러면 사랑관계니까 둘이 이제 잘해보자고, 다수 가운데 또는 다자 가운데서 우리를 따로 한다고요. 그러면 우리라는 것이 만났다고 우리가 됩니까? 공통점을 찾아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혈액형은요?’ ‘A형.’ ‘아, 맞네.’ ‘그러면… 짬뽕?’ ‘나도 짬뽕.’ ‘아, 맞네.’ ‘놀러갈 때, 산? 바다?’ ‘바다.’ ‘맞네.’

계속 찾아가고 또 찾아가요. 언제까지? 틀어지는 게 나올 때까지. 계속. 틀어지는 게 나올 때까지. 왜냐하면 그래야 고독이 정당화되니까요. ‘저 사람하고 잘해보려고 그렇게 애썼지만 결국 안 맞는 게 있더라. 그래서 갈라섰어.’ 이게 나올 때까지. 그런데 이런 내 행동이 하등 이상하지 않아요. 왜? 다수가 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이.

교회 가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 뜻을 주님이 이루어줄 것을 내가 쥐었던 관계 작대기 옆에 예수님이 걸려들기를 바라는 거예요. 낚시 놓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건지기를 바라는 거예요. 공동체를 찾아가는데 공동체가 결국은 바닥납니다. 소진 다 했어요.

‘나 당신의 모든 면을 다 좋아해. 하지만 팔 아픈 것은 나 용서가 안 돼. 헤어져.’ 뭐 이런 거. 그러면 팔 고치고 다시 합류하면 안 되느냐? 한번 떨어진 건 딱 싫어. 고장 날 가능성이 더 심해. 우리 헤어져. 인간의 만남은 항상 헤어질 것을 단도리하면서 만나요. 너 아니면 내가 안 되는 줄 알아? 너한테 죽자고 붙들 타입이 아니거든. 이걸 모든 다수가 다 그래요.

그래서 가보면 둘 사이에 공통점이 결국은 없을 때까지 찾아요. 지독하죠. 결국은 우리 사이는 안 맞아. 세상에, 절대적인 존재하고 맞는 존재가 누가 있어요. 모든 인간이 절대자인데 모든 인간이 신인데 어떻게 신이 신을 모실 수가 있고 섬길 수가 있어요. 끝까지 가보면 안 맞아요.

그 안 맞는 빈 자리, 이걸 공백이라고 합니다. 결국 공백이 등장해요. ‘그래, 안 맞으면 나 혼자 살지.’ 그게 뭐냐 하면 주체에요. 그게 주체라고요. 주체라 하는 것은 처음부터 주체가 아니고 처음에는 자아가 돼요.

이 자아는 남들이 나한테 가르친 거예요. 아까 했죠. 내 주변의 상황에서 언어든지 뭐든지 의미를 다 나한테 고로케 내용물 채우듯이 꽉꽉 채운 거예요. 내 속에는 뭐만 있다? 남의 것만 있어요. 내 건 없어요. 창의적인 것은 하나도 없어요. 다 남들이 이야기한 거예요. 아이큐는 어느 정도 되어야 되고 대학은 어느 정도 나와야 되고 성깔은 이 정도 해야 되고 이건 양보해야 되고 그건 양보하면 안 되고. 전부다 남들이 다 한 거예요.

그런데 주체가 등장하려면, 주체는 내가 남들과 하나 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모든 것이 실패가 되고 좌절될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등장하는 것. ‘나는 나다. 나는 나를 위해 살아야지 그 외에는 필요 없어.’ 할 때 남이 떨어져나간 그 빈 자리에서 비로소 주체가 등장합니다. 절대적 자아가 주체에요. 주체. 빈 자리에요.

그럼 빈 자리가 있으니까 그다음에 빈 자리를 그냥 두면 공허하잖아요. ‘외로워 못 살겠어요. 아무나 오세요.’ 이러고 있단 말이죠. ‘나하고 놀아줄 사람 없어요?’ 이런 거. 그럼 ‘아무도 나하고 놀아줄 사람 없으면 나는 책하고 놀지.’ 이러면 책도 뭐가 돼요? 책은 그냥 책입니까? 책 안에 누가 있어요? 저자가 있잖아요.

나는 뭐 나이 60되서 남하고 놀기 싫고 난 TV보고 싶어. TV드라마 보면 누가 나옵니까? 내가 관계하고 내가 마음 주고받고 싶었던, 내 조건에 맞는 사람이 등장하는 거예요, 드라마에. 내 인물에는 저 정도 인물 되어야 되고 내 학력은 저 정도 학력 되어야 되고 내가 가는 카페는 이 정도 호텔 카페여야 되고. 그게 드라마에 다 나온다고요, 드라마에. 그리고 나를 괴롭히는 거 누가 패주면 좋겠다. 그 패주는 건 에서 다 해주잖아요. 이름 뭐고? 김도기가 다 해주잖아요. 드라마 보면 거기에 푹 빠지는 거예요. 내 타입에 맞는 사람을 골라잡을 수 있기 때문에. 푹 빠지는 거예요. 내 빈 자리를 채우는 거예요. 내 빈 자리를. 빈 시간을.

그럼 가 끝나고 안 나오나? 모범택시2하고 3나올 때까지 빈 공간이 있죠. 빈 공간 있으면 허전하잖아요. 허전하면 뭐 다른 드라마 또 찾아봐야 되죠. 찾아보든지 뭐 이렇게 또 찾아보는 거예요.

둘의 만남이 없으면 여기서 사랑관계가 형성이 안돼요. 내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못 받아요, 혼자 있을 때는. 뭐 현빈이 있든지 누가 있든지 가상적으로 하든지 이렇게 해야 돼요.

꿈 이야기하고 첫째 시간 쉽시다.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아주 생생한 꿈을 꿨어요. 우리 집에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는데 우리 집에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아가씨가 세 들어 있어요. 세 들어 있었는데 꿈속에 보니까 1970년대에요. 전화기 하나 당첨되기 힘든 거예요.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딱 울리는 거예요. 성경공부에 방해되니까 받았죠. ‘여보세요?’ 하니까 ‘저 문간방에 누구 있죠?’ 그 누구 이름도 어떻게 꿈인데 그대로 기억나요. 여자 아가씬데 이름이 남자 이름 같이 일산이에요, 일산. ‘거기 일산이 있죠? 전화 좀 바꿔주세요.’ 옛날 70년대에는 전화기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성경공부 하다가 전화 받는 거예요. ‘그래, 야야.’ 뭐라 하면서 ‘다음에 만나자. 나 지금 우리 주인집에서 받는 거야.’ 그러고 가버려요.

그러니까 성경공부 하는 그 세계와 성경공부 세계에 그 일산이라는 아가씨가 참석은 했지만 자기 세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오늘 공부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녹취할 때 정신없이 아무 생각 없이 녹취하는 그 이야기 들으려고 내가 이 꿈을 꿨는가? 성경공부 하는데 완전히 전혀 상관이 없어요. 전혀 상이한 이질적인 두 세계가 성경공부라는 역사적 현장에 같이 있는 거예요.

걔는 자기 친구하고 만났죠. 둘의 만남. 외로우니까 빈 칸이 있으니까 그걸 채우는 걸 사랑이라 하고 우정이라 여기는 거예요. 내 마음에 드는 사람 없을까 계속 찾고 있으면서 자기는 주체로서 더욱더 단단해지겠죠.

그러면 이 빈 자리와 주체의 싸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다음 시간에 10분 뒤에 봅시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1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7,672 자유게시판 1강-학개 1장 1-6절(공간 싸움)230517- 이 근호 목사 학개 최고관리자 23-05-17
7,671 자유게시판 20230515b 부산강의 : [시편]58(42:5)-실패한 희생물 시편 최고관리자 23-05-17
7,670 자유게시판 20230515a 부산강의 : [시편]58(42:5)-실패한 희생물 시편 최고관리자 23-05-17
7,669 자유게시판 51강-예레미야 8장 4~7절(투명한 유리막)230514 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3-05-14
7,668 자유게시판 14강-디모데후서 2장 20-21절(그릇)230514-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23-05-14
7,667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요나의 복음 / 230514 - 최고관리자 23-05-14
7,666 자유게시판 5월 부산 성경공부 안내 시편 최고관리자 23-05-13
7,665 자유게시판 14강-스바냐 3장 18-20절(절기완성)230510-이 근호 목사 스바냐 최고관리자 23-05-11
7,664 자유게시판 431강-YouTube강의(산자와 죽은자 에베소서 1:20)20230509-이 근호 목사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23-05-10
7,663 자유게시판 430강-YouTube강의(일용할 양식 출애굽기 16:19)20230509-이 근호 목사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23-05-10
7,662 자유게시판 자기 의의 반란 - 최고관리자 23-05-10
7,661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6장 13절 (구조와 증상) 230418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3-05-08
7,660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6장 13절 (구조와 증상) 230418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3-05-08
7,659 자유게시판 13강-디모데후서 2장 16-19절(피중심)230507-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23-05-07
7,658 자유게시판 50강-예레미야 8장 1~3절(뼈들)230507 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3-05-07
7,657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사람의 진짜 모습 / 230507 - 최고관리자 23-05-07
7,656 자유게시판 20230505b 울산강의-역대기상(20강) 17장 12절 : 동전판 레위기 최고관리자 23-05-07
7,655 자유게시판 20230505a 울산강의-역대기상(20강) 17장 12절 : 동전판 역대상 최고관리자 23-05-07
7,654 자유게시판 13강-스바냐 3장 14-17절(무효)230503-이 근호 목사 스바냐 최고관리자 23-05-04
7,653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30428b 마태복음6장 3절(사라진 분)-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3-05-01
열람 ➜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30428a 마태복음6장 3절(사라진 분)-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3-05-01
7,651 자유게시판 12강-디모데후서 2장 14-15절(육신이 된 진리)230430-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23-04-30
7,650 자유게시판 49강-예레미야 7장 29~34절(지옥체험)230430 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3-04-30
7,649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과부의 오해(엘리야의 일) / 230430 - 최고관리자 23-04-30
7,648 자유게시판 안양20230413b말2장15절(수치를 넘어서)-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23-04-29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