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30413a말2장15절(수치를 넘어서)-이 근호 목사
안양20230413a말2장15절(수치를 넘어서)-이 근호 목사
말라기2장10절,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않았느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해요. ‘우리에게 나의 것은 없다.’ 이것은 마태복음5장에서 햇빛과 공기와 모든 빗물, 단비,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악인, 선인 가리지 않고 다 주신 거예요. 그것도 은혜로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나의 것은 없다는 말이 뭐냐 하면 모든 게 공짜다. 모든 게 공짜에요.
그러면 말라기에서 제사는 뭐냐, 제사란 돌려드리는 것. 누구한테? 이게 중요해요. 나에게 머물게 하지 말고. 중요하다. 이거. 나 혼자 중요하지만. 나에게 머물게 하지 말고, 내가 지금껏 살아온 모든 것은 공짜니까 나에게 머물게 해서는 안 돼요. 나에게 머물게 하게 되면 나는 뭐가 되겠어요? 나에게 이건 자아가 되겠지요. 자아가. 나에게 자아가 되는 거예요.
제사란 뭐라고요? 돌려드리는 것. 뭘 돌려드려요? “공짜로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돌려드리는 거예요. 돌려드리게 되면 자아의 내용은 뭐가 되느냐 하면 텅 비워있겠지요. 비워있다. 돌려드렸으니까. 다 드렸으니까. 그러면 드리는 방법은 “공짜였습니다. 제가 노동해서 얻은 게 아니었습니다. 내 자아는 내가 구성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고 돌려드리는 거예요. 이런 고백은 뭐냐 하면, “저요? 저 공짜에요.” 저 공짜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말라기에서 제사이야기하는데 제사란, 돌려드리는 것이다. 돌려드릴 때 그 당시 말라기에서 욕 되게 하거든요. 말라기 선지자가 이스라엘에게. 할 때 돌려드리는 게 제사인데, 뭘 돌려드리느냐 하면, 자아를 따로 챙기고 형식만 돌려드렸어요. 이 말라기가. 자아를 따로 남겨둔 거예요. 우리는 공짜로 살잖아요. 어느 누가 지 잘난 맛에 못 살잖아요. 목숨도 그렇고 햇빛, 공기, 모든 거 마찬가지에요. 다 공짜로 사는데 자기 자아를 따로 챙기기 위해서 형식만 돌려드리는 척만 한 거예요.
튀르키예에서 얼마전에 지진이 일어났지요. 지진이 일어난지 50초만에 우리나라에서 감지되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지구가 너, 나게 없다는 거예요. 튀르키예가 소식이 얼마나 멉니까. 거기서 지진이 9. 얼마의 지진이 일어나니까 한국에 가만히 있는 멀리 있는 우리에게 감지되었어요. 우리끼리, 너, 나를 나누는 그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튀르키예도 하나님이 공짜로 주었고, 한국에도 공짜로 주었기 때문에 너따로, 내 따로가 이 지구상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몽골에서 황사 불었다. 그럼 우리나라는? 관계없는 게 아니잖아요. 국가 경계가 인간이 정한 거예요. 이거 아무 의미 없어요. 바람 같은 거 자연이 불다가 “아, 여기는 중국이네.” “여기는 대한민국인데 조심해야겠다.” 이런 바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건 중국이고, 이건 한국이다. 이건 누가 정합니까? 인간이 정했지요. 인간이 무슨 중심으로 정했습니까? 내 것 따로 챙기기 위해서 국가라는 것이 만들어진 거예요. 니는 니 가정, 나는 내 가정. 내 것 따로. 그런데 제사라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 것도 아닌데 나에게 머물게 해서는 안되지요.
그 다음 들어갑니다. 왜 머물게 하지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나의 것이 없다는 뜻이고, 처음부터 나에게 없고, 지금 공짜인데 왜 공짜인데 나의 것을 챙기려 할까요. 공짜인 걸 아는데. 압니다. 압니다. 예, 감사하지요. 하면서도 자기를 따로 챙기지요. 이게 말라기에서 말라기를 통해서 말라기가 바로 그 다음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요. 말라기가 구약의 마지막이니까. 그 다음과 연결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수치를 못 이긴다.’ 인간은 수치를 못 이깁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창세기3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부끄러워 수치를 못 이기는 거예요. 목숨은 버릴 수 있을지라도 뭐는 못 버리겠다. 내가 수치스러운 자아는 못 버리겠다. 이게 마귀가 우리한테 집어넣어준 거예요. 수치를 못 버리겠다. 그러면 수치를 버린 분이 계시지요.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다는 말은 마음껏 나에게 뭐를 퍼부어라? 수치를 퍼부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나한테 욕을 해라. 그러면 너희들은 스스로 수치를 못 이겼다는 것이 티가 나버려요. 인간들이.
예수님은 욕 얻어먹고 그냥 수치스럽게 죽었는데. 예수님보고 욕을 하는 사람은 왜 욕을 하는가, 예수님이 미워서가 아니라, 저 사람처럼 예수님처럼 수치스럽게 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자기 수치를 못 버린 분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받고 다 알지요. 사도잖아요.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수치를 못 이겨서 자아가 그렇게 강해서 의아스럽지요. 나옵니다. 고린도후서12장에 나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있다는 말은 우리는 공짜라는 뜻이고요. 하나님께 제사드리라는 말은 니가 공짜라는 고백을 하라는 거고, 그게 하나님께서 주께서 다 주신 거니까 되돌려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뭐라고 했습니까? 제사지요.
제사에서 지적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짜인데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나에게 머물러 있게 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누가복음16장 했잖아요. 거기에 유명한 말 나왔지요. 불의한 청지기 나오지요.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한 재물로 뭐를 사귀라고 했습니까? 친구를 사귀라고 했지요. 불의한 재물, 설명하면 불의한 재물 원래 누구 거예요? 직원 거 아니잖아요. 그 사장님 있잖아요. 남의 것을 가지고 자기가 사장인양 행세하는 거. 주님은 불의한 거 맞다고 이야기해요. 불의한 거 맞는데. 불의한 것은 이게 의로운 게 아니에요. 불의한 거 맞는데, 그러면서도 그 사람에게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뽑아내요.
지혜는 뭐냐 하면 불의하기 때문에 자기가 현재 처지가 멸망당한다는 처지와 연계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 나, 불의하다.” 이게 아니고 “불의하면 나는 이제 조저났어. 나는 이제 죽었어.”라고 불의한 것을 본인이 인정을 하고, 그 다음에 그 대가로 우리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예요. 허겁지겁 자기 돈도 아니고 남의 돈을 가지고 챙기려 하겠지요. 지 살 궁리를 하겠지요.
살 궁리를 한다는 것은 자기가 허다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불의한 청지기를 무엇과 연결시켜 봅시다. 무엇과 연결시키지요? 수치와 연결시키는 거예요. “나, 죽으면 안 돼!” “나, 망하면 안 돼!” “그게 왜? 왜?” “나, 수치스러우니까. 부끄러워하니까.” 그런데 이것이 사도바울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거예요. 그것도 구원받기 전의 사도바울이 아니고, 구원 받은 후에 사도바울에게 이같은 일이 또 다시 반복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뭡니까. 육체의 소욕과 성욕의 소욕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되풀이 되는데 고린도후서 한 번 보겠습니다.
단지 수치만 이야기하려고 제가 그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고린도후서12장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내 육체에 가시 그 다음에 뭐가 나왔다? 사탄의 가시지요. 오? 사도바울이 성령 받았잖아요. 마귀하고 상관없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둘 다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요. 뭐를 증거하는 용도로 활용하겠다는데 뭘 증거하느냐, 이게 사탄의 요소가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아야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비정상이 된 게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지금 망한 게 아닙니다. 지금 지옥가는 게 아니에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무슨 요소가 남아있다? 사탄의 요소가 남아있어요.
사탄의 가시가 왜 들어갔겠습니까? 자, 이제부터 설명합니다. 사탄의 가시가 사도바울에게 왜 들어갔겠습니까? 너, 구원받았으니까 이런 이런 일은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뭐? 니 구원받은 입장에서 뭐 안 된다? 니가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거 누구 이야기라고요? 사탄이 그걸 알고 사탄이 들어간 거예요. 니 구원받았잖아. 천국가잖아. 그런데 니가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거. 뭡니까? 나는 결코 부끄러운 존재가 되면 안 돼! 이것을 사도바울도 감당을 못한 겁니다.
베드로처럼 내가 예수님 따라가는데 목숨바치겠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소리 한다는 것은 남들 보기에 대단해 보이지요. 그런데 뭐를 못 이긴 거예요? 자기를 근사하게 보이고 싶은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이 머리 좋아서 아시겠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꺾을 수 없는 그 마지막 선, 그 마지막 선을 넘어서는 거예요. 그걸 뭘 넘었겠어요? 주님은. 수치를 넘은 거예요. 수치를.
수치 뒤를 가버린 거예요. 수치로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가득차 있는 이 세상. 그 장벽. 그 장벽을 내가 부산강의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되지도 않는데 영어썼습니다. Broking. 이걸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발돋음 하세요. 그러면 복음관계가 보입니다.” 중요할 때는 좀 적으세요. 인간들이 있잖아요. 발을 한 번 들어보세요. 발돋음. 저는 이걸 어디서 배웠는가, 봉준호 감독한테 배웠어요. 1인치 자막 1인치만 넘어서게 되면 영화의 참 모습이 보입니다.
이 인간관계가 뭐냐 하면 인간관계가 브로킹(Broking)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인간관계뿐이에요. 인간관계에서 무엇과 무엇의 충돌입니까. 누가 더 수치스러운 존재이냐, 누가 덜 수치스러운 존재이냐, 그것 배틀하지요. 인간관계에서는.
그래서 마귀는 알아요. 니가 예수 믿었으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 안 낫다. 이런 논쟁에 마귀가 집어넣지요. 애가 담장을 넘을 때, 애가 야구장에 갈 때, 옛날에는 야구장에는 담장이 허름했거든요. 야구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합니까? 애들이 키가 작을 때는 발돋음하잖아요. 뭘 넘어서는 거예요. 인간관계의 브로킹을 넘어서야 되지요.
그러면 인간관계의 브로킹을 넘어서면 거기에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이 없지요. 인간이 없고 그 브로킹을 건너 먼저가신 누구만 보이겠어요? 예수님만 보이겠지요. 이렇게 발을 탁 드는 거예요. 그러면 남편관계, 자식관계, 아내관계, 모든 가족관계, 시가집, 친정집 모든 관계가 발을 돋았으니까 아래쪽이 보이겠지요.
아래쪽이 보이면서 그 주님이 보잖아요. “주님, 뭘 해결하고 넘어갔습니까?” 물으면 주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창세기3장 해결했다는 거예요. 인간은 어쩔 수 없어요. 병 같은 거예요. 왜? 어떤 병? 베드로처럼 내가 목숨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나보기에 수치스러운 존재, 수치스러운 자아는 나는 정말 싫어. 그거는 극구 밀치고 싶어요. 내가 수치스럽다는 것. 지금 꽉 죽었으면 좋겠어. 수치스럽다는 소리마는 안 듣고 싶은 거예요. 부끄럽다는 말은.
그래서 사도바울이 몇 번 기도합니까? 자기가 사도잖아요. 아프잖아요. 기도를 했겠어요? 안했겠어요? 했겠지요. “사모님, 암 걸렸을 때 기도했어요? 안했어요?” 했지요. 할 때는 내용을 편집해요. 나는 죽어도 괜찮은데 아이 셋 저거..., 괜히 남 걱정 다하는 것처럼 하지요.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조금만 살려주신다면 인생을 주님 앞에 헌신하겠습니다. 되지도 않는 장담들을 하면서 하지요.
그런 기도하지 말고 발돋음만 하면 되는데. 발만 돋아버리면 인간관계 브로킹 없어지지요. 그런데 그 중요한 거 있어야 돼요. 주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사도바울에게 그 인간관계 속에 사도바울을 집어넣어버려요. 우리 주님께서. 왜 집어넣느냐, 니가 뭔데? 이걸 주님이 이렇게 합니다. 니 은혜가, 고칩니다. “니 역할이야. 니 역할이 그만하면 됐어.” 니는 니 역할을 니가 넘어설 수 없다는 거예요. 왜? 예수님의 증인되어야 되니까.
내가 구원받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나는 이러합니다. 나는 □입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건 인간관계에서 성립되는 거고, 주님이 건너갔는데 건너간 주님이 보이게 되면 주님 쪽에서 우리는 역할과 기능을 부여받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그게 뭐냐, 니 은혜가 그걸 은혜라 해요.
네게 준 기능이 네게 충분하다. 그 기능이야. 니가 사탄의 가시로 원초적이라 하는데. 원초적 애초적 요소가 우리의 몸에 있는 한 우리 속에 같이 섞여있습니다. 그게 육체의 소욕과 성욕의 소욕에서 갈등을 유발하게 되어있어요. 계속해서. 우리는 그걸 보고 괴로워서, 기준을 무슨 기준으로 삼았다고 했습니까? 나는 수치스럽지 않고 싶다가 기준이 되어가지고 발악을 해요. 막 노력을 한다고요. 요건 발돋음을 하게 되면, ‘아, 지금 내가 역할이 중요한데 나는 뭐에 수치스럽지 않아야 된다는 것에 대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처음에는 몰랐고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응답은 뭐냐 하면 너를 시원이라 하는데, 시원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오리지날.
시원의 요소를 집어넣어서 사도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고. 어렵게 말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품고 있다. 어려운 말로. 내가 아무리 기억해도 기억하지 않는 것이 내 안에 들어있었던 거예요. 심지어 그것조차도 공짜에요. 그것조차도.
내가 나에게 필요한 것 뽑아내고 내가 구성하고 내가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일방적으로 나를 다루시는데 내가 미처 기억도 않는 요소까지 우리 속에 집어넣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하는 용도로 활용하신다 이 말이에요. 그게 사탄의 가시에요. 그냥 몸이 아픈 게 아니고 감기기운이 아니고 사탄의 가시에요.
시원적인 것, 오리지날. 그렇게 되게 되면 요것을 신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런 사도바울을 산 제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산 제물. 말라기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드릴 때 정성껏 농산물 드렸지요. 드려봐야 뭡니까. 아까같이 자아 남기고 뭘 드렸다? 형식을 드린 거예요. 형식을.
만약에 제사 드릴 때, 가장이 제사드릴 때 위선적인 행동을 제가 수십년동안 30년 동안 본 사람이에요. 우리 집이 강력한 유교집안이라서 우리 할아버지가 술로 돌아가셨어요. 그 때는 제 명이었어요. 거의 70가까이 가셨지만. 술을 너무 많이 드셨어요. 특히 사기 당하고 난 뒤에 그렇게 술을 많이 드셨어요. 그렇게 하면서도 제삿날만 되면. 제삿날이 몇 번인가, 1년에 10번은 아니고 한 5번 왔어요. 우리 어머니하고 할머니 애먹었어요.
하게 되면 두루마기 꺼내고 열단 병풍 딱 치고, 나는 제삿날에 열단 병풍 보고 있으면서 갓 쓴 노인네 낚시하는 거 보고 있고, 점잖은 다 빼고 있어요. 왜냐, 뭘 안하기 위해서. 술 잡술때 그 모습하고 다른 그 때만큼은 의젓해 보이는 거예요. 자아 빼놓고 자아 챙기고 나머지는 전부 다 자아를 보호하는 수치를 감추는 형식과 제도로서 그냥 입막음하면서 제사 드린 거예요. 말라기가. 확 오지요. 이 말라기에 그렇게 욕하는 이유를.
그러면 3장에 들어와서 주님의 조치는 뭐겠습니까? 2장에서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그 다음에 2장17절부터 주께서 임하시는 날이 와요. 제목을 붙인다면 주께서 임하시는 날, 자, 그러면 이렇게 꾸지람을 했으면 우리 같으면 뭡니까. “똑바로 제사를 드려!” 가 되잖아요. 그렇죠. 니가 이렇게 했고, 이렇게 했고, 니가 아버지의 취지를 공짜를 모르고, 도로 드려야 될 텐데 반띵한다고 지가 챙기고 챙기면서 하나님 저 믿습니다. 이리 나오니까 앞으로 똑바로 하라는 말이야, 제대로 하라는 말이야, 우리네 상식인데.
그게 아니고 “주께서 왜 오십니까?” 올 때가 되었다는 거예요. 3장에서. 올 때가 된 거예요. 올 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무르익어야 되느냐 하면 드디어 맛이 갔다는 표현이 있지요. 이 제사도 이제는 식상했어. 지루해요. 새롭지가 않아요. 제사드리는 당사자도 새롭지 않고, 제사 받는 하나님도 본문에 나오지만 “야~ 좀 지루하다~ 아~ 정말 지루해.” 이 제사제도가 지루하고 드리는 사람도 재미없고 형식으로 하니까.
그럼 인간 쪽에서 조치를 내려야 돼요? 하나님 쪽에서 조치를 내려야 됩니까? 하나님 쪽에서 조치를 내리는 방식이 이 제사제도의 완전함, 완벽함을 어떤 분을 보내서 대신 실시하겠다는 그래서 율법을 이루겠다는 것이 3장에 죽 나옵니다.
3장 나오기 전에 2장에서 철저하게 그들의 속내를 지적을 해야 되겠지요. 말라기2장에서. 왜? 3장에서는 아예 인간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심지어 제사 드리는 제물부터 제사드리는 당사자까지 공짜로 오십니다. 왜 처음부터 한 아버지니까요.
자, 그러면 2장10절을 다시 보게 되면요. 자, 그러면 여러분 의문점은 ‘분명히 아까 목사님께서 모든 세상에 악인과 선인에 다 공짜로 주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도 하나님의 공짜입니다. 하면 구원될 수 있잖아요?’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지요.
오늘 본문 2장10절에서 아버지를 하면서 뭐를 지목하느냐 하면 아들을 지목해요. 그러면 어제 수요일 설교한 거 잠깐 볼게요. 예루살렘이 있다. 할 때에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예루살렘도 있지요. 다른 나라도 있고. 자기의 직장도 있고. 자기가 이 세상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예루살렘은 없다가 아니라 예루살렘 있는 건 인정하는데 그 중에 여러 가지 중에 뭡니까. 하나이지요. 왜?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가 중심이라는 말은 자기가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단도리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어제 재판장, 선지자, 방백들, 방백들이 왜 법 모르는 서민들을 등쳐먹었습니까. 이 중간계층 이 사람들은 뭐냐, 본인을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율법을 활용한 사람이에요.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공격은 이들에게 향했잖아요.
제가 어제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여러 가지 있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뭡니까. 예루살렘만 있다는 거예요. Only. 예루살렘만, 만, 있다. 이걸 예수님께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인간들은 나말고, 아까 인간관계있지요. 발돋음하기 전에 브로킹 보기 전에. 앉아서 인간들 관계에서는 너도 인간, 나도 인간, 나는 여러 가지 인간 중에 하나가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여럿인간, 여럿인간 말고 오로지 아버지를 진짜 아버지로 유일하게 연결이 성립되는 어디다가 집중하느냐, 아들에게 집중해요. 수요일날 예루살렘에 집중하는 것처럼 오늘은 아들에게 집중한다고 보시면 돼요. 예루살렘은 누가복음 13장에서 선지자가 죽어야 될 공간이, 선지자가 죽는다는 말은 이건 시간관계상 말씀 안 드렸습니다만, 요한계시록11장에 보면 그곳이 바로 선지자가 죽는 그곳이 예루살렘이에요.
선지자가 죽는 그 장소가 예루살렘이고 거기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어제 수요일 윤석열 국정지지율하면서 제가 그런 질문을 던졌지요. 예수님이 만약에 대통령이라면 지지율 몇 %나오겠느냐고.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들었어요. 질문을 그렇게 하기 전에 한 번 순서를 해봅시다. 장로가 대통령이라면 지지율 몇 %나오겠어요? 목사가 대통령 된다면 몇 %나오겠습니까? 사람들은 긍정적인 미래를 생각하겠지요. 하나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되겠어요? 0%나옵니다. 0%나와요.
하나님께서 2장10절에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한 아버지께서 지은바가 아니냐고 하면서 자꾸 물어요. 한 아버지가 지은 바가 아니냐. 하나님께서 3장에서 어떤 분을 보내기 전에 어떤 작업을 하느냐 하면 지워버리는 장차 오실 제대로 아버지를 아는 그 분 말고, 나머지기 사람들을 가위표, 지워버리는 작업으로 뭐냐 하면 성결, 그리고 제사를 문제 삼아서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12절,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어디의 장막에서 끊어 버린다 했습니까? 야곱의 장막에서 끊어버리고 나오지요. 그 다음에 13절,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 아니하시지요.
15절 봅시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이리 되어있지요. 한 개를 남기기 위해서 그동안 자칭 경건하다는 자들을 딜렉트 지워버리는 거예요. 지워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행위로만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예수님의 천국에 들어갔다는 이유 때문에 뭐를 아낌없이 지워버려요? 내가 행한 것은 아낌없이 지우개로 지워버려야 되겠지요. 지워버리는 거예요.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것. 지워버릴 때 뭐도 지워버려요? 바로 지워버릴 때 나의 세계관도 같이 지워버리는 거예요. 나의 세계관.
자, 요점을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 빼놓고 이걸 왜 다 지우는가, 그것은 아까 발돋음했지요. 발돋음해서 브로킹을 넘어서시기 바랍니다. 인간 대 인간관계 아닙니다. 거기서 훌륭한 인간된다고 뒤쪽을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발돋음을 해야 됩니다. 발돋음을 할 때 그 자세는 더 이상 저 넘어가신 분이 공짜로 주신 분이기 때문에, 나는 공짜로 제게 없습니다. 하는 사람만이 발돋음을 할 수 있어요.
이걸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래가지고는 발돋음 되지를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제사제도를 통해서 3장에 오실 그 분만 남기기 위해서 한 아들, 한 자손 그 분을 만드는 작업에 제거하는 작업에 나서십니다. 그럼 우리는 무슨 대상입니까? 아주 기쁘게도, 아주 감사하게도, 우리가 제거대상이 된다는 게 기쁘지요. 사탄의 가시를 넣어서 제거해 버리는 것. 우리한테는 은혜지요.
더 이상 내 자신에게 신경 안 써도 되니까요. 그 점을 이제 도표로 그려보겠습니다. 이 도표는 어디서 따왔느냐 하면 여기서 따왔어요. ‘라캉의 광학모델’ 제목을 밝혀주는 것은 녹취하시는 분에게 캡쳐 할 수 있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가를 알려드리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라캉의 광학모델은, ‘자아는 가짜다.’ 자아는 가짜라는 사실을 광학모델로 라캉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모델로 밝혔습니다. 가짜. 가짜니까 광학모델을 제가 그대로 한 번 그 사람의 설명에 따라 그려볼게요.
상징적 공간(허상의 세계,상징의 세계)
대타자
눈:주체 거울
↖주체,자아이상
오목거울
(큰타인)
↑
‘나는 이럴 수가 없다!’
“진짜 나는 진짜 나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진짜 나는 니가 알 권한과 권리가 니한테는 없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가짜니까, 실선으로 하면 안 되겠지요. 점선으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자아가 보는 세계관만 가짜가 아니라 자아라 생각하는 것도 가짜가 되고, 자아가 건설하는 자기 세계관, 그래서 자기 단도리하는 그 세계관도 가짜다. 어제 스바냐에 의해서 재판장이나 선지자나 방백들이 본인들이 가짜라는 사실을 모르고 이 감히 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자기 걸 챙긴 거예요.
그 이유는 뭐라고 했습니까? 수치스럽지 않는 자아가 되기 위해서. 자아가 가짜인데 수치스럽지 않겠다는 그 시도가 다 헛수고가 되겠지요. 제가 라캉이 이야기하는 용어는 다 빼겠습니다. 이거 하면 골치 아파요. 이 사람이 주장하는 것만 이야기하고 그 사람이 쓰는 용어는 이 제자리에서 다 빼겠습니다. 이 사람은 가짜인데 가짜가 진짜 행세하지요. 진짜 행세한다는 거예요. 가짜인데 진짜 행세한다는 거예요.
그 가짜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아라고 이야기하고, 자아 또는 나라고 하고, 진짜를 주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나누어요. 아주 알기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자아(나)는 내가 상상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상상할 때 이게 나에요.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무엇이 될까, 여기에 나라하는 것은 상상하는 나에요. 상상이니까 다른 사람이 끼어들 필요가 없지요.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보고. 그러니까 이건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이건 타인이 남이 보게 되면 이걸 자기애에요. 자기 사랑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지요. 자기 사랑에. 요게 뭐라고요? 이 사람은 가짜라는 거예요.
그러면 가짜가 주체가 되게 되면 이것도 가짜지요. 가짜인데,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할 때는 이건 뭐냐 하면 다른 사람이 너는 이렇다고 이야기해주게 되면 우리는 그 순간 주체가 되는 겁니다. 주체가.
그러니까 주체의 특징은 해체와 재설정이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이 주체는 이 사람이 이렇다 하면 그래, 나 그런가, 저 사람이 와서 이렇다 하면 서로 상반되는 의견을 할 때는 이 사람이 했을 때는 내가 그렇다고 했던 그것이 순간적으로 또 해체되고 저 사람이 하는 거 가지고 뭐가 됩니까? 내가 재설정을 하게 되는 거예요.
한 몇 년 지나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면, 또 재설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뭡니까? 남들에게 휘둘리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럼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 하잖아요.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휘둘리지 않겠다고 이건 남들이 이야기하기 전에 이건 내거라고 잡아 있잖아요. 그것 자체도 이미 남들이 손을 본 거예요.
어린 애가 뭘 압니까. 부모가 이야기한 것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 이상은 이건 새로운 정보가 오지 않는 한 유지하고 있다가 새로운 정보 선생님이 와서 뭐라고 하면 바꾼 용도지 재료 자체는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남들에게 휘둘렸고, 죽을 때까지 휘둘리고 둘 다 가짜에요.
자아(이상 자아)도 가짜고, 주체(자아 이상)도 가짜인데, 가짜이외에는 없습니다. 인간은 진짜가 없어요. 이게 허상의 세계에요. 허상의 세계 이걸 가지고 라캉은 뭐냐 하면 이게 상징화된 세계. 상징의 세계. 이걸 현실로 보는 거예요. 현실. 상징의 세계. 내가 나밖에 모르는 이것을 이게 상상의 나의 세계. 나의 세계로 된 겁니다.
그러면 상징의 세계인데 그럼 텅텅 비워있으니까 실제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라캉은 광학실험을 해요. 그래서 제목이 광학모델이에요. 광학실험을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광학실험을 해보는 겁니다. 받침을 딱 하나 해놓고 받침안에 항아리를 딱 놔요. 받침안에 항아리를 놓는다 말이에요. 받침대 위에다가 꽃을 놔요. 실험이니까 얼마든지 이리 만들어낼 수 있어요. 실험이니까. 여기다가 오목거울을 딱 두는 거예요. 오목거울을 놓고 실험을 해요. 오목거울을 두고 여기다 따로이 보통 거울, 평평한 거울을 딱 하나 만들어 둡니다.
왜 이런 실험을 하느냐 하면 오목거울에 비친 이 상이 실험에 딱 비출 때 어떻게 비추느냐 하면, 요 안에 있었다고 여겼던 이것이 위로 올라와요. 올라오고 꽂혀져 있던 꽃이 밑으로 내려가겠지요. 상이 반대로 뒤집어지니까. 왜 이런 실험을 하느냐 하면 인간의 이 허상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가짜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짜이외에는 실제적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실제는 진짜 있는 것. 가짜 말고 진짜 있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진짜 나 있잖아요. 진짜 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 오목거울이 해가지고 이렇게 받침대 안에 항아리가 있고 받침대 위에 꽃이 있는 거예요. 여기서 이 주체가 가짜입니다. 주체가 받침대 안에 꽃병이 있고, 받침대에 꽃이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럴 수가 없다는 거예요. 받침대에 꽃병이 있고, 꽃병 위에 꽃이 있는 게 이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이걸 본인이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왜? 세상은 다 이런 세상이니까. 이미 타인으로부터 교육받고, 훈육받고 있는 모든 세계에서는 내가 그들과 함께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돼요. 왜 그래야 돼요? 안 그러면 내가 그 사람에게 뭘 듣기 때문에. 수치의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인간들의 세계가 가짜들의 세계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빠져나갔지요? 인간관계에서 발돋음 했지요. 발돋음 할 때 그냥 당한 게 아니고 뭐를 심하게 당했습니까? 수치를 당했지요. 베드로가 그걸 못 넘었지요. 사도바울은 죽을 때까지 이미 넘은 채로 주님 증거하기 위해서 그 안에 들어있어야 되고.
베드로는 죽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자기 수치는 못 느끼고. 나중에 닭 울 때, 시시한 미미한 닭이 울 때, 비로소 내가 니보다 더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막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내가 어디서 막히는지를 알았던 거예요. 내가. 어디서.
이 수치스러운 존재가 안 되려고 했던 이것이 나를 폐쇄시킨 거예요. 나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진짜는 있어요? 없어요? 운다고 해서 진짜 되는 게 아닙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진짜 되면 안돼요.
어제 수요일날 요약할 때 이렇게 했잖아요. 천국 갔을 때 이사야6장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그거 했을 때에 제가 요약해서 이렇게 썼어요. 한 번 적어볼게요. 이사야는 이 땅에서 죽을 필요도 없고, 살 필요도 없다. 요약한 거 제가 적어놨습니다. 읽어본 사람은 알 거예요.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을 때에 내가 이 자아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본인하고 아무 상관이 없게 된 거예요. 상관이 없어요. 내가 어느 게 진짜냐, 가짜냐, 자체가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냥 공짜로 주시는 내일의 목숨가지고 공짜로 주시는 햇빛과 공기 속에서 자기 자아 가짜가 예수님 앞에서 수치를 넘어선 예수님 앞에서 내가 날마다 하루 하루 사는 것을 삭제 당하는 기쁨과 즐거움만 있으면 돼요. 딴 거 필요 없어요. 그리 되는 거예요.
다시 계속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보고 싶은 거예요. 이 실험을 딱 하면서, 오목거울을 했는데 이런 그림을 연상한다는 것. 이런 그림을 연상한다는 것. 이것은 진짜는 이 막 뒤에 있는데 그 막 뒤에 있는 진짜 그림을 원형 있잖아요. 받침대 안에 거꾸로 꽃병 있고 받침대 위에 꽃이 있는, 거꾸로 단지가 있는 이런 것은 그럴 리가 없다는 거예요.
한 번 적어볼게요. “나는 이럴 리가 없다.” 사람이 뭘 되기가 싫은가 하면 바로 요게 되기가 싫은 거예요. 내가 이럴 리가 없어. 이럴 수가 없어. 자기 딸을 학교에 보냈는데 60대 운전사가 장례식에 술 한 잔 먹고 와가지고 애를 학교 앞에서 죽였습니다. 그 소식 들을 때 엄마의 즉각적인 태도는 뭡니까? 이럴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 러시아 전쟁 그렇게 이야기해도 남의 이야기에요. 남의 이야기입니다. 아, 그래, 전쟁해라. 그래.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런데 내 딸이 죽었을 때 그럴 수는 없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지 자식 죽일 때, 대부분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보통 사람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 저한테 이런 지시를 내린 적 없지요. 그지요? 하나님, 똑바로 이야기하세요. 이런 지시를 저한테 내린 적 없지요. 그지요? 나는 진짜 나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진짜 나는 니가 알 권한과 권리가 니한테는 없다.” 왜, 피조물이기 때문에.
이거 가짜입니다. 이게 주체에요. 좀 더 여기서 용어를 붙인다면 이 상징계에 현실세계에서는 가짜 주체와 나. 나(이상 자아)와 주체(자아 이상)의 차이점은 뭐냐, 주체는 타인이 개입했다는 것이고, 요거(자아)는 뭐냐 하면 자아, 이건 이상 자아라 하고, 이 용어 괜히 이야기했어. 이게 너무 헷갈리기 때문에 이건 잘 모르는데 이건 잊어버리시고.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내가 어릴 때 상상의 세계 어릴 때거든요. 세상에 나가지 않았을 때에 생각했던 나에요.
그래서 세상에 나가서 휘둘리는 거예요. 휘둘리지 않는 방식으로 휘둘리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까. 가장 나를 붙잡는 것은 내가 수치스러운 존재가 안되어야 된다는 이건 사탄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놓고, 아담이 치마 입은 거, 해 입은 거 그 원리는 우리가 어디가도 뽑아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수치가 되지 않는 방향 같으면 누가 어떤 이야기를 내가 골라잡아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자아 이상이에요.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니 커서 뭐 될래? 대통령 되고 싶어. 대통령은 왜? 수치스럽지 않기 때문에. 계속 골라가는 겁니다. 계속 찾는 거예요.
내 주체에 합당한 나의 직업, 나의 환경, 삶의 모든 것. 끊임없이 찾아다닙니다. 이 모든 세계가 어느 세계에서 일어난다 했습니까? 무슨 관계? 인간관계. 인간관계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마찬가지고, 성도는 물론이고, 담궜다가 부활의 이름으로 담궜다가 빼내는 거예요.
다시 하면, “나는 이럴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이 예수님 믿는 사람 잡아 죽일 때 자기의 확실한 태도였습니다. 내가 달라져요? 안 달라집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