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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강의20230413b 요한일서 1장 1절(생명의 향수병)-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일서

서울강의20230413b 요한일서 1장 1절(생명의 향수병)-이 근호 목사

하늘나라의 신비로움을 인간 쪽에서 벗겨내려는 시도를 구약 역사가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까 우리 재원형제가 참 좋은 질문했는데요. 사울 왕이 있고 다윗이 아니고 소년 다윗이 있는데 사울에게 악신이 들렸다. 그런데 다윗이 비파, 요새 말하면 기타죠, 기타치고 노래하니까 악신이 떠났다. 다윗도 육신이고 사울도 육신인데, 여기에 나오는 그 노래가사 같은 것은 시편에 나오겠죠.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은 이 육신에게는 해야 될 일이 있는 거예요. 뭐냐 하면 인간 육신을 제치고 오늘날 우리 육신을 제치고 말씀이 친히 육신이 됨으로써 모든 말씀을 다 이 육신이 이루는 거예요. 뭐를 제키고? 우리 육신을 제켜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인간들이, 아까도 말했지만, 어떤 신비에 대한 경향성이 있어요, 없어요? 있죠.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만들어낸 창안한 종교입니다. 이 종교는 말씀이 있으면 필히 여기 뭐가 들어가느냐? 인간의 육신이 들어가요.

물론 그들은 말합니다. 이게 절제된 육신이겠죠. 절제된 육신. 욕심을 뺄 때로 쫙쫙 빼버리는 거예요. 욕심이라는 기름기 다 쏙 빼버린 것. 수도원과 수녀원 같은 경우에 그 절정이잖아요. 기름기를 쏙 뺀 것. 순수, 순결, 순정함. 모든 정을 피하는 것, 피정. 피정을 하는 집을 무슨 집? 피정의 집. 순수, 순결, 모든 정욕을 없애는 그걸 뺀 육신으로 뭘 추구하느냐? 신성함을 추구하는 거예요. 제가 방금 천주교에서 이렇게 한다고 했는데 천주교고 불교고 간에 일반인도 다 평소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말씀은 어디서 나오는가? 선악 지식에서 나왔고 선악 지식을 육신으로 해서 신성한 선을 추구하는 이 모양새. 이 모양새인데 사울도 이런 거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인간이니까 당연히 하죠. 하는데 여기 뭐가 임했습니까? 악신이 임했죠. 그러면 사울이 평소에 왕으로서의 자기 품위와 체신을 지킨다고 애썼던 모든 것이 악신이 와버리니까 아무 소용없죠.

그럼 소년 다윗이 했습니까? 아니죠. 다윗도 육신이라니까요. 다윗 속에 있는 그리스도 영이 (사울에게 임한) 악신을 추방하면서 생긴 결과가 뭐냐? 바로 시편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편을 제작하는 겁니다. 시편 제작.

이 시편이 된 내용이 바로 메시아가 이 땅에 수행해야 될 시나리오가 되는 겁니다. 시나리오가 된다는 말은 ‘악신 들린 자를 성신 입은 자가 추방한다’ 이것을 예수님은 반복시키는 그러한 토대로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렇다면 사울의 육신, 다윗의 육신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울이라면 예수님은 뭐로 오셨습니까?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다, 육신으로.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오셨기 때문에 다 이루었기 때문에 충분히 우리로 하여금 악신을 뽑아내서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악신을 제거하고 데려갑니다. 나의 결핍된 것을 채울 수 있는 보충병으로.

왜 이 보충병이 될 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손댔기 때문에 그래요. 내 공로로 너를 건졌다는 요소 있잖아요. 그거 외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천국 왔습니다. 그것만 영원토록 기쁨으로 찬양하면 되는 겁니다. 이러나 저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 그다음 두 번째 시간에 본격적으로 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이 신비를 요한일서 2절에서 쭉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취지에요. 인간 쪽에서 신비를 벗겨내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신비를 벗겨내는가? 어떻게 해서 진실을 드러내는가? 진실은 드러내고 감추어졌던 것이 폭로되는 것은 인간 쪽에서 신비를 벗겨내서 그런가, 아니면 하나님 쪽에서 신비를 벗겨내는가?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신비를 벗겨내는 것은 어느 쪽이죠? 역시 하나님 쪽이겠죠. 그러면 인간 쪽에서는 뭐냐? 인간 쪽에서는 가짜 신비를 추가적으로 계속 덧붙임으로써 배후에 악마가 있으니까 계속 가짜처럼 함으로써 진짜 신비를 벗기시는 하나님 일을 방해하겠죠. 그럼 그 역사가 뭐냐? 구원을 방해하는 이스라엘 역사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역사는 종교 역사입니다. 종교 역사.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었습니다. 율법을 줬거든요. 율법을 줬는데 이 율법에 대해서 인간들이 율법 속에 있는 그 신비로움을 인간 쪽에서 자기가 그것을 구현하려고 애썼어요. 법을 줬으니까.

인간의 방법은 뭐냐? 율법 안에서 무엇을 추구하느냐? 아까도 말했지만 신성한 것을 끄집어내는 그 작업을 인간들이 해왔던 겁니다. 이런 주장을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요한복음 1장에서 마지막 21장까지 예수님께서 뭐를 통과하느냐 하면 인간이 만든 종교 속을 통과합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의 밀림 있잖아요. 숲속이 있는데 그 안에 길을 내면 어떻게 됩니까? 그 숲 속에 갇힌 형국이 되겠죠. 그 안을 예수님이 그냥 통과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쭉 통과하면서 계속해서 압박을 느끼겠죠. 압력을 느끼겠죠. 통과하고 통과하면서 예수님 자신이 어디 이르게 하느냐 하면 자신이 죽음에 이르는 데까지 계속해서 통과합니다.

그런데 통과하는 건 통과하는데 여기서 아까 이야기한 걸 그대로 적용시키면 인간 쪽에서는 신비로움을 인간 쪽에서 찾아내려 해요. 어떻게?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요. 그걸 그대로 적용시키면서 인간 쪽에서 신비를 찾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교회에서 누가 은혜 받았다, 은혜 받았다 하면 사람들이 일단은 “아이고 축하해요, 집사님.” “은혜 받았어요. 이번에 금식하고 기도 바짝 했더니만 은혜 받았어요.” “아이고, 좋겠습니다.”라는 말로 그렇게 스톱이 되는 게 아니고 그다음 게 있어요. “은혜 받았으면 그럼 애들 이제 공부 잘하고 남편 수입이 좀 늘어나겠네요. 땅 사놨는데 땅값 좀 오르겠네요.”

반드시 이 땅의 실적 같은 것으로 환원되어서 설명해야 인간에게 납득이 돼요, 은혜 받은 게. “아이고, 기도를 많이 했더니만 은혜 받았어요. 얼마나 은혜 받았는지 우리 애가 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이런 거. 그건 안 돼요. 은혜 받았으면 부러워할 만한 그런 건덕지가 계속해서 생산되어야 돼요. 은혜 받았으면. 집안이 화목하니 뭐 그런 게 있어줘야 돼요.

예수님께서 통과할 때 예수님의 방향은 뭐냐? 말씀을 이루었는데 그 결과는 뭐냐? 사람에게 맞아 죽는 거예요. 맞아 죽는 겁니다. 그런데 초장부터 악마가 거기에 대해서 강하게 밀어붙이고 저항합니다.

네가 하나님 아들 같으면 돌이라도 떡 되게 하고 그리고 네가 메시아로서 목회하려면 많은 대중들을 몰고 너의 기적에 탄복해야 되고 기적을 통해서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은 걸 통해서 ‘맞다. 당신은 메시아 맞다.’고 확인 되어야 되고 그리고 세상에 모든 정세와 권세가 당신 수하에 놓여 있을 때 당신은 소기의 목적, 원래 원했던 목적을 이루는 성공적인 메시아가 된다, 라고 악마가 예수님에게 속삭였죠. 끊임없이.

어디 뭐 예수님한테만 속삭였겠습니까? 오늘날 우리한테도 뭐 마찬가지죠. 우리한테도 속삭이죠. 모든 인간 다 넘어갔습니다. 은혜 받았다 하는 것을 아까 세 가지의 실적으로 증명해줘야 돼요.

인간의 그 노림수. 노림수가 실제로 현실적으로 나타나줘야 돼요. 그래서 아까 안양강의 때도 했지만 [현실은 현실적으로 증명되어야 된다.] 요한일서 후딱 뛰어가지고 5장 한번 봅시다. 5장 5절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여기서 물과 피라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면서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는… 물이 흐르고 피가 흘렀거든요. 예수님이 실제로, 죽은 척한 게 아니고 죽은 시늉을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죽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실제로 죽어버리니까 제자 입장에서는 무엇이 날라가버린 거예요? 신성한 신비로움이 날라가버렸죠. 그게 신비입니다. 요한일서에서. 그게 신비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 어렵다 정도가 아니고 대략 난감이에요. 요한일서 이 말씀을 이해한다는 게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예수님이 증거하는 것이 육체로 오셨다, 이러면 우리는 인정하죠.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아, 나도 예수님 당시에 있었으면 나도 예수님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봤으니까 나도 영생 얻었다, 라고 할 수 있죠.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남기고자 한 그 증거, 물과 피와 성령 앞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믿은 게 없었음이 들통 났습니다.

여기 요한일서 1장 4절에서는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하잖아요. 그러나 요한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 떠날 때 기쁨으로 충만한 게 아니고 반대였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으로 충만했어요. 슬픔과 두려움.

다시 이야기합니다. 영생을 방해하는 자가 누구죠? 우리의 육신이죠. 내가 여기 육신이 있다는 내가 방해꾼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방해꾼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도 바울처럼 이미 비늘이 떨어진 사람이에요. 여러분도 자기 비늘 떨어졌나 한번 주워보세요. 비늘이 떨어진 사람이에요.

내가 방해꾼이라는 것을 흔쾌히 기뻐하는 사람은 내 힘으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두 번 다시 안하죠. 거기서 오는 자유가 있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내 구원하고 내 영생 받는 것하고 무관한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도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지만 내가 무슨 행동을 해도 내 천국 가는 것에 방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난감해요. 남들에게 설명하기 곤란해요. 난감한 일이에요. ‘너 어디서 배웠어, 너?’ 이렇게 나오든 말든 할 수 없어요. 할 수 없어요.

요한일서 전체가 다 그러니까. 나중에 5장까지 보겠지만 5장 끝까지 하면 이것을 일관성 있게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리 한번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 그러니까 요한일서를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어떤 가능성 같은 것이 자꾸 없어져요.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이건 진짜 한번 적어봐야 돼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죠. 지금 이게 말씀이 육신 된 결과물입니다. 주님의 결과물이에요. 그럼 이 결과물에 대해서 우리는 내 육신으로 한 것과 내가 원하는 목표로 한 것과 주님의 목표가 끊어져야 되죠. 끊어짐이 있어줘야 우리가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그게 비늘이 떨어진 사람이에요. 내 쪽에서 끊어짐이 있어야 돼요.

그럼 우리는 평소에 뭐하느냐? ‘가르쳐주세요.’라고 나오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죠. 가르쳐주세요. 사실은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닙니다. 참고로 들을 뿐이죠. 어쨌든 간에 그건 나만 알고 있고 여러분 자신만 딱 챙기고 있고. ‘가르쳐주세요.’로 시작해서 뭐로 이어져야 돼요? 결과는 뭡니까?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 없고.’

‘목사님, 가르쳐주세요.’라고 시작해가지고 나중에 끝나면 ‘목사 너는 나한테 가르쳐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나빠서가 아니라 기대한 내가 나빠서 그런 거예요. 누구한테 가르침 받아서 배워서 구원받겠다는 내 의도, 이 자체가 주님 앞에 배격당해야 될 것을 내 쪽에서 시발점으로 착수 심리로서 먼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육신이, 내 육신이 꼭 필요한 거예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 속에 무슨 작용을 하는가를 위해서 우리의 모든 시작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방밖에 못하는 내 육신이 필수 조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일서 하면서 내내 뭐가 반복되겠어요? 우리는 못했지만 주께서 하셨다. 우리는 못했지만 주께서 하셨다. 요한일서 공부하면서 계속 그것이 되풀이되면서 기쁨과 감사가 나오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을 다시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이것은 성경에 안 나왔지만 제가 만약에 추임새를 넣는다면 “얼씨구” 들어가야 돼요. 얼씨구. 그다음에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여기 한번 또 쉬고 들어가야 돼요. “절씨구” 그다음에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때는 뭐 한식보다도 복음적으로 “아멘”.

우리가 뭘 지켰습니까? 뭐 지킨 게 있습니까? 우리는 내 더러운 육신만 제공했을 뿐이에요. 말씀이 육신 되신 그분이 이런 결과를 낳은 거예요.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가 그동안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 될 때까지 끊임없이 인류 역사를 가렸잖아요.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알 때까지 그 이후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기성 교회에서 충실하게 살아왔어야 했던 겁니다. 기성 교회에서.

그들이 하는 수법, 바리새인인지 뭐 분간도 안 되는 교회 있잖아요. 바리새인인지 사두개인인지 구분도 못해,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사두개인 바리새인 전부다 다 갖고 있어요. 사두개인은 예배당 중심. 바리새인은 말씀 지켜서 복 받자. 그러니까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게 만든 요소를 교회가 빠짐없이 다 갖춰놨어요.

거기다 열심당원까지 보태면 뭐가 되느냐? 예수만 믿으면 안 되지. 사회변혁을 시켜야지, 뭐 이런 거 하나. 그거 나오면 열심당원까지. 그다음에 에센파. 세상은 더럽다. 우리는 깨끗하잖아, 이것까지 포함되면 에센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새벽기도 나가면 제일 앞자리에서 기도하는 권사님들. 적어도 칠십 이상 된 권사님들, 에센파입니다. 자기 기도로 교회가 건사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에요. 우리 기도의 불이 꺼지면 진도 7.0의 지진에 의해서 이 예배당이 무너진다. 기도로 버텨야 북한의 지하교회가 유지된다는 거예요. 나는 북한의 지하교회를 일체 안 믿는 사람이에요. 난 지하교회를 안 믿습니다. 난 거짓말로 봐요. 김정은이 보통 마귀가 아닌데 지하교회를 가만 두겠어요.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이해해야 되는가? 왜 교회가 필요한지. 한번 적을게요. 이것은 어렵지 않아요. 첫 번째, 왜 교회조직이 필요한지. 두 번째, 왜 모이는 것이 중요한지. 그냥 아무거나 하는 거예요. 세 번째, 왜 헌금생활을 생활화 일상화하는 것이 중요한지. 네 번째, 왜 선교가 중요한지. 다섯 번째, 왜 찬양이 중요한지. 교회조직이라 하는 것은 교회계급 조직표. 위에 당회장부터 해서 있는 거요.

이거 여러분들 다 아셔야 됩니다. 아셔야죠. 이게 바로 이스라엘 역사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를 함축적으로 짧은 인생 가운데서 교회생활을 통해 다 배우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첫 번째, 우리 교회조직이 왜 필요하냐. 거기에 대해서 나오는 모든 생각들을 우리가 모를 필요가 없어요. 다 알 필요가 있어요.

성경구절 막 뽑죠. 교회 내에서 여자는 머리에 수건 하나 뒤집어쓰고 조용히 해라, 있잖아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고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 구절가지고 교회조직이 꼭 필요하다는 말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되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요한일서 보면서, 나 예수님만 믿을래. 안돼요! 교회 복음을 방해했던 모든 요소를 우리가 다 알고 있어야 돼요. 짧은 인생동안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취지나 그들의 주장이나 논리를 우리가 모르면 안돼요. 다 알아야 돼요. 왜? 이게 감추어놓은 나의 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꼬깃꼬깃 안 들키고 있던 나의 의란 말이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왜 교회 헌금을 꼭 해야 되느냐. ‘목사님, 왜 교회 헌금을 해야 됩니까? 복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데 왜 교회 헌금을 해야 됩니까?’ 라고 한다면 당회장 목사나 재정 보는 장로가 뭐라고 하겠어요? ‘당신이 헌금을 해봐야 돈 귀한 줄 알고. 헌금을 해봐야 당신 앉은 자리 옆에 뭐 있나? 에어컨 있지. 에어컨 전기세 누가 내는데? 이거 뭐 공짜로 구원 받으니까 에어컨도 공짠 줄 아나?’

거기에 대해서 소위 요한일서 공부해서 나 이제 복음 믿는다는 사람들 입에서 어떻게 됩니까? 입이 또 근질근질… 유행가 나오면 안 되는데. 할 말을 잊었지만~ 할 말이 없죠. 맞는 이야기만 하니까 할 말이 없는 거예요.

목사님 설교하는데 춥다고 슬리퍼 신고 그러는데 그게 어디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헌금해야 추워가지고 벌벌 떨면 설교도 못하는데 딱 신겨줘야 되고. 그 신겨주려고 하면 아무나 와서 신으세요, 이렇게 하면 돼요? 헌금을 재정부에 맡기면 재정부 장로가 회의를 거쳐서 슬리퍼가 와야 되잖아요. 그러면 재정 집사, 재정 부장이라는 직책, 조직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있어야 되잖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할 말을 잊었지만~ 할 말을 잊었지만.

어떤 집사가 교회 나오는데 멀리 촌에 있던 노쇠한 어머니가 ‘야야, 마지막 때 너희 집에 살려고 한다. 그런데 교회는 너희 다니는 교회 갈게.’ 했는데 보니까 어머니가 노쇠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돈을 내서 차를 사가지고 ‘아이고 촌에 있는 권사님. 고생 많았죠. 차타고 갑시다.’ 차타고 가면 얼마나… ‘야야, 너희 교회는 너무 좋다. 내가 교회도 못가고 쓰러질 뻔했는데 차가 와서 딱 대줘가지고 또 노인네라고 밥도 따뜻한 밥으로 제일 먼저 나오고 난 이제 죽을 때까지 너희 교회 다닐래.’ 했을 때 그 밥하고 차 기름값 어디서 나오는데? 그거는 돈을 내야 될 것 아니에요. 뭐 복음 알아서 구원 받는다고? 돈을 내야지. 세 번째입니다. 할 말을 잊었지만~ 할 말을 잊었어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체제 이루는 거, 쓸데없이 이루어진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이 사람들이 골머리 앓으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말씀을 사람들에게 생활화, 실천화시키기 위해서 애쓰고 그걸 집대성했어요. 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이었어요. 서기관들이었고. 그들이 말씀을 보존하지 않았다면 말씀 올 수도 없었어요. 할 말을 잊었다는 말 고만합니다. 자꾸 하면 식상해서 안 돼요.

그런데 요한일서는 그걸 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죄는 숨겨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숲을 뚫고 지나가잖아요. 그것을 뚫고 지나가면서 그 진공상태에서 뭐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거룩을 표방해서 하나님을 신성하게 섬긴다는 명목의 죄들이 예수님이 통과하는 그 지점에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복음을 알고 복음으로 구원 받는다면 주께서 묻습니다. “네 죄는 뭔데?” “죄 용서했는데 뭐 이미 용서했는데 죄까지 자꾸 기억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니야. 그게 아니야.”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죄를 평생토록 다 일구어냅니다. 일구어내는데 재밌는 것은 바로 그 죄가 굉장히 고상하고 성스럽고 건전한 모양새를 띈다는 거예요. 그 선배가 뭡니까? 1번, 2번, 3번, 4번 이거에요.

이 1번, 2번, 3번, 4번 교회에서 추진하는 이 법 제도에 사람들은 그냥 이야기하게 되면 융통성을 부리겠죠. 모든 사도 바울의 편지나 성경 마태복음, 성경구절 가지고 여기 전부다 근거를 대요. 근거를 대서 이것을 한 꽃다발로 만들었습니다. 그게 신앙고백서에요. 신앙고백서를 만드는 거예요. 신앙고백서가 우리 교단의 교리가 되는 거예요. 침례교, 성결교, 각 교단의 교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목사는 선언합니다. 이 교리를 위헌하면 이단이다. 주님께서는 이단 소리 듣고 돌아가셨어요.

보세요. 인간들이 얼마나 성실합니까. 착실합니까. 노력하고 있습니까. 인간들이 인간들의 이러한 아이디어에 대해서 그들은, 한번 더 해야 되겠다, 할 말이 없어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어요. 역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의 머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뿐이구나. 오직, sola. sola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추구하는 사람들의 그 순결한 머리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우리같이 어설프고 시원찮은 아마추어가 따라줌으로써 교회가 혼란스럽지 않고 교회가 더욱 확장되고 부흥되는 데에 우리가 기여하는 것이 마땅한 우리 평신도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라고 어느 집사가 이야기하면, 안할라 했는데 또 해야 되겠다, 우리가 할 말이 없죠.

할 말이 없다 하지 말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세요. 그리고 내가 평소에 그런 이야기 듣기 전에는 몰랐는데 듣고 보니까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내가 너무 경솔했구나. 내가 너무 복음만 추구했구나. 역시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아니면 오늘날 이런 교회가 있을 수 없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 그러니까 남 교회 비판하지 말고 비판하려면 절에 가는 사람 비판해야지. 우리 교회는 전부다 한 편이야.’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죠.

드디어 우리의 죄가 비로소 복음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들통 난 거예요.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요한일서에서 하고 있습니다. 오직 증거는 예수님의 죽음이죠. 물과 피와 그리고 그 죽었다는 사실을 자기 백성에게만 할당, 분배해주는 배급해주는 분, 누구입니까? 성령. 이 세 분만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하고 그 외의 다른 증거는 일체 죄가 돼버립니다.

요한일서가 그냥 쉽다고 생각하면 쉬운데 정말 쉬운 가운데서도 복잡한 것이 우리에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쉬운 가운데서도 복잡한 것이 제공되고 있죠.

자, 이제 2절 봅시다. 이제 2절이에요.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그건 됐고 그다음에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이거 이제 설명해야 될 차례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어렵게 갈 수밖에 없어요. 우리 인간에게는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어머니밖에 없어요, 인간에게는.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식과 어머니에 대해서 타자에요. 바깥에 계시는 분이에요. 바깥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등하게 놓을 수 없습니다. 누구 입장에서? 아들이나 딸, 자식 입장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등하지 않아요.

어머니는 지상에 투입된 존재고요. 우리가 있는 인간 바깥에 있는 존재가 아버지에요. 그래서 어머니는 성령인데 어머니 성령의 역할은 바로 창세기 1장에 나오죠. 품어주는 거예요. 품어주는 것. 성신 또는 성령은 뭐냐? 어머니 역할이에요. 품어주는 거예요. 성신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근거는 아버지가 구원하지,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물론 예수님은 아버지와 같이 있다고 보면 되고. 그 이야기를 요한일서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하나님의 복음을 방해한다 했잖아요. 말씀이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보호할 때 율법은 아버지의 법으로 쳐들어온 거예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4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출애굽기 4장 22절,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했어요.

그렇게 하면서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아요.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것은 율법과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이 나타나죠. 그런 게 어려워요. 항상 아버지의 이름이 나타나고 아버지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있고 하늘나라는 비어있다는 말이 아니고 아버지는 항상 하늘나라를 차지하고 있어요.

차지하고 있고 이름이라는 것은 중개자를 말해요, 중개자. 중개 역할을 하는 하나님이에요. 이게 시편에서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시 110:1). 여러 번 했어요. 다윗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다윗에게 졸지에 하나님이 두 분 됐어요. 이게 신약에 오면 “주께서 내 주에게” 이렇게 돼요. 베드로 설교에서는 (행 2:34).

왜 두 분이 필요하냐 이 말이에요. 왜 두 분이 필요하냐? 한쪽은 주의 이름은 이스라엘과 역사 속에서 동행하는 거예요. 왜? 보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의 언약을 보호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특징은, 여자의 후손으로 나타나신 어머니의 특징은 생산입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거예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양육하고 키우는 거예요. 어머니 역할은. 그걸 주의 이름이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아버지의 법으로 왔을 때 이스라엘이 아버지의 법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언약대로 잘 처신해왔는지를 검토해야 돼요. 왜 성신은 돌보는 거고 율법은 왜 이렇게 공격하는 거냐 하면 율법에서는 지키면 복을 받고도 있지만 안 지켰을 때는 가차 없는 저주가 주어지는 거예요. 아주 냉혹한 아버지의 법이에요. 가차 없는 저주가 주어지는 겁니다. 물론 저주에서 복으로 바꾸는 중개적인 역할을 언약이 또 해내요. 율법 내에 또 그렇게 해냅니다.

그러면 아버지+어머니가 주어지는데 아버지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법 지켜서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어요. 없다면 어머니 역할이 중요해요. 어머니 역할은 아버지께로 갈 수 있도록 여기서 새로운 생산, 새로운 자녀를 낳아야 돼요. 새로운 자녀를.

율법으로는 못 지키잖아요. 마치 아브라함의 자식 이스마엘처럼. 그 부인 이름이 뭐에요? 하갈. 그리고 아브라함의 본처 이름은 사라. 이게 두 개 언약의 원천이 돼요. 갈라디아 4장의 두 언약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식이 나와요.

자식을 낳는데 하갈의 자식은 낳아봐야 소용없어요. 그거는 왜냐하면 율법 아래 난 자식이기 때문에. 율법 아래 났다는 말은 지키면 될 것 아니냐, 이게 아니고 못 지킨다는 사실, 저주받아야 될 것을 하기 위해서 엄한 아버지 엄한 율법이 작용합니다.

그러면 사라 쪽은? 사라의 자식은? 사라는 자식이 없어요. 애를 못 낳아요. 잉태치 못합니다. 사라는 아기를 못 낳아요. 90세까지 아기를 못 낳습니다. 아기를 계속 못 낳아야 돼요. 그래서 아기를 못 낳으니까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으니까 율법의 저주를 받을 대상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작전이 멋집니다. 없어요. 이 말은 이 세상에 없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2절에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 분이 유일한 아들이 되는 거예요. 율법에 신경 쓸 필요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잉태치 못한 자. 잉태치 못한 자가 드디어 하늘의 어머니에 의해서 잉태케 되어버리면 이것은 약속으로 낳은 자잖아요, 약속. 약속으로 낳는다는 것은 뭐냐? 모든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내용으로 꽉 차 있는 자식이 태어나요.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으니까 죄인이 아니고 뭐가 됩니까? 의인 되죠. 의 덩어리를 생산해버리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라 했어요. 그리고 뒤에, 이것이 성령으로 난 자라. 성령으로 난 자라. (갈 4:22-29)

그럼 성령으로 난 자를 어떻게 아느냐? 봐라. 저 사람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지 한번 보란 말이죠. 세상 사람들. 선악 지식에다 율법에다가 바리새인 사두개인. 아까 1번부터 4번까지 다 봤죠. 교회가 있어야 될 이유, 헌금해야 될, 찬양해야 될 이유. 진짜 고개 끄덕여지며 납득이 되죠.

문제는 그런 식으로 율법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에요. 이유가 뭐냐? 본인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있다고. 혈통으로 났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혈통으로 난 것을 주께서는 아들로 보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는 아들이 아닙니다. 말장난 같지만 중요해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아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여기 요한일서 1장 2절에서 하나님께서 새삼스럽게 아들을 보내신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분을 보낸 거예요.

그리고 3절에 봅시다. 함께 보냈는데 그 결과가 있어요. “너희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이게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는 바로 잉태치 못한 자가 약속으로 잉태하는데 그 약속이 뭐냐?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지음 받은 자만이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을 사도 요한은 아주 그냥 편하게 쉽게 이야기해요.

마치 아동들 앞에서 선생님이 2+3은 얼마? 5. 참 잘했어요. 예.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는 누구? 성도. 참 잘했어요. 여러분 다 그런 사람 되죠? 아주 편하게 이야기해요. 편하게.

성령 받았으니까 안 편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 너무 힘들게 살아가지 말아주세요. 제발입니다. 힘들게 살아가지 말아주세요. 왜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이것저것 다 챙긴다고 자기 스스로 힘들게 살아갑니까. 이것저것 챙길 필요가 없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내가 몰랐던 죄를 주께서 발굴해주십니다. 발굴할 때마다 족족 4절의 말씀처럼 기쁨으로 기쁨으로 계속 이것이 향기를 드러내게 되어있어요. 기쁨으로 향기를.

끝으로 고린도후서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2장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얼마나 냉정하게 다루어지는가 한번 보세요. 15절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되어 있죠. 이 짧은 문장 가운데서 내가 염려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쉬운 예로 이렇게 보시면 돼요. 에어컨 있는 집에서 가장 더운 장소가 어딥니까? 실외기 근처죠. 안쪽에 있는 더운 것은 실외기 근처에 다 모여서 열이 막 올라가잖아요. 얼마나 하나님께서 냉정하게 성도를 다루는지 성도 하나 있으면 가장 악마적인 것은 성도 옆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걸 보는 즐거움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친하게 지낼 필요 없어요. 나쁘게 지낼 필요도 없지만. 그냥 웃으면서 바라볼 수 있는 이유가 이쪽은 망하는 자라는 것이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성도가 복음으로 기뻐할 때 자동해서 같이 등장해요.

에어컨 켜면 실외기 근처에 자동적으로 온도 높아지는 것처럼 안에 있는 더러운 열기, 뜨거운 열기가 바깥으로 모이는 것처럼 성도 하나 복음 알면 그 주변이 졸지에 성도 눈에 뭐로 보입니까? 망하는 자식들로 다 보여요, 망하는 자식들로.

그런데 성도는 뭐 했습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향수병이에요. 향수병에서 뚜껑만 딱 열어놨는데 향수가 팍 퍼지는 거예요. 문제는 향수가 되는 내용이 어떤 거냐? 고린도후서 1장 20절,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 나옵니다. 우린 약속의 자녀라 했잖아요.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뭐가 된다? “예가 되니”

19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그러니까 합력하여 뭐를 이룬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니, 그다음에 아까 봤던 2장. 우리는 그렇게 해서 생산된 결과물이니까 우리 자체가 예수님의 ‘예’가 되는 거예요. 예. 김 예, 최 예, 박 예가 되는 거예요. 이름 짓기 쉽죠. 예스가 되는 거예요. 예스가.

그러니까 예스가 되는 인생은 ‘아니오’라고 할 일이 일어납니까, 안 일어납니까? 일체 일어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복음의 향기가 계속 나오려면 우리에게는 ‘주여,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는 일이 일어나지를 않아요.

우리 쪽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향수 관리는 주님 쪽에서 향수 관리를 하시기 때문에요. 막 쉰 내나고 이런 것은… 천사보고 “빨리 갈아 넣어라. 쉰 내 나기 전에 빨리 향수 갈아 넣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예’라는 생각을 늘 갖게 만듦으로서 우리 근처에 망하는 자들이 꼬물꼬물 형성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16절에 보면,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이게 얼마나 잔인합니까.

이게 뭐 남 같으면 김정은 같으면 우리는 신나는데 문제는 우리 딸자식이고 아들이고 가족이고 이럴 때는요. 16절 이 말씀 하나가 잔인해도 너무 잔인하잖아요. 그동안 정들었던 게 있는데 정이고 뭐고 뭐 소용없어요. 냉정하게 다뤄요. 내 향수가 아니고 주님의 그리스도의 향수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그러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 사망에 이르는 사람은 “아휴, 복음 그게 뭐가 향기로워? 내가 보기엔 악취인데.” 하고 막 코를 막는 거예요. “저리 가. 저리 가. 악취 나. 저리 가.” 했을 때 그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그리스도께서 “예”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좋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주님만 냉정한 게 아니에요. 오늘날 성도도 성도 본인이 냉정하라는 말이 아니고 성도의 위치가 너무나 예상 밖에 감당 못할 정도로 너무 냉정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일이 아니고 내 인생도 내가 원한 인생이 아닌 것을 이제는 기쁨과 감사로 향기를 내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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