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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30410b 부산강의 : [시편]57(41:9)-친구 만들기자유게시판시편

20230410b 부산강의 : [시편]57(41:9)-친구 만들기
(강의:이근호 목사)

왜 다윗에게 친구가 배신하느냐, 친구가 욕하느냐? 욕하는 사이 같으면 친굽니다. 욕하는 사이 같으면 친구라는 말은 다윗의 확장, 다윗의 존재의 확장이 친구라고 볼 수 있어요.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곧 내가 네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다는 관계에요. 떨어질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에 배신당한다는 것은 평소에 인간들은 탈출불가, 친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친구 안에 있는 나의 것으로부터 내가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친구로 지내기 위해서 서로서로 주고받은 게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을 떠난다는 것은 곧 나를 떠나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내가 나와 헤어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인간이 자기와 헤어진다는 말은 모순된 말이잖아요.

배신당했다. 배신당했다 이 말은 모르는 사람한테 배신당합니까? 그럴 리는 없어요. 배신이라는 것은 내 것을 충분히 저쪽에 다 넘겨줬는데 그쪽에서 관계를 끊어버릴 때 배신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다윗이 왜 친구한테 배신당했느냐? 여기에 대한 정답은 요한복음 15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은 주님을 배신한 친구그룹에 해당하는 자들에 국한된다. 그들에게만 국한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친구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주님이 사랑하는 대상이죠. 주님이 사랑하는 대상인데 주님을 배신한 그 그룹이 있어요. 그 그룹을 친구로 불러주는 거예요. 주님을 배신했다고 다 주님께서 사랑해주는 게 아니고 주께서 친구라고 불러줄 마음이 있는 자들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야 되느냐 하면 친구라고 불러준 그 대상에 의해서 예수님이 배신당해야 그게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제자들이 예수님이 친구라고 불러줄 주님이 사랑한 제자들은 결코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없어야 돼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이 세상 전부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걸 전제로 깔고 주께선 일방적으로 거기서 친구 될 사람과 안 될 사람을 선별해버려요. 이거는 일방적입니다. 예수님의 고유 권한이에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 가운데서 친구가 될 수 없는 자를 집어넣어버렸지요. 거기 가룟 유다를 집어넣어버려요. 선택을 했는데 친구 아닌 자를 선택해버려요. 친구 아닌 자를 선택하고 친구 될 자를 선택했는데 제자들 열둘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어느 쪽을 선택하고 어느 쪽을 선택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뜻은 뭐냐? 우리는 열두 제자기 때문에 의례히 하나님께서 다 제자로 천국 가기 해주신다는 생각을 한 제자도 알았고 가룟 유다도 그걸 알고 있었지요. 인간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 자기 위주로 계산하고 생각한다는 그걸 전제로 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전제를 비껴가면서 자기 백성을 뽑아내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라는 전제를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어요.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의 전제를 거부하는 거예요. 그들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를 거부해버립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말하는 그 배경에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하고 나온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그런 인간의 생각들을 전부 다 하나님께서 거부해버리죠. 한 번 적어볼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걸 강조하는 게 요한일서에 많이 나와요.

두 가지 해석이 있지요. 첫 번째,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해석 두 번째 견해를 지워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가 우리도 사랑할 수 있다. 아니야, 우리는 사랑 못해, 라고 두 개의 인간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씀이 들어옵니다. 이게 단추를 꿰는 실이에요.

들어옴으로서 우리는 뭘 아느냐? 하나님은 사랑할 수 없다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할 수 없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반드시 뭐냐 하면 미워해야 돼요. 인간은 사랑할 수 없다 정도가 아니고 미워하는 존재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가라. 실컷 모든 인간으로부터 미움 받으라고 보내신 거예요.

인간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 속에 하나님이든 누구든 간에 내가 사랑하고 싶으면 다 친구로 삼고 사랑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그래요. 그게 얼마나 마귀적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모르는 거예요. 그게 악마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동의하고 싶은 사람 없겠지만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 마찬가지만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합니다. 아가씨한테 총각이 할 수 있다. “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①번입니다. ②번 그쪽 상대방이 하는 말이, “나는 당신을 사랑할 의사가 결코 없습니다.” 이래 나왔어요. 까인 거죠. 까였어요. 자, 여러분한테 물어봅니다. 세 번째, 나는 괄호다, 뭡니까? 괄호 안에 뭐가 들어가겠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 사랑할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세 번째 안에 뭐가 들어가겠어요?

나의 사랑이 과연 내가 상대를 사랑한 것인지, 아니면 상대가 내 사랑을 받아준다는 조건이 붙어있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인지 보자는 거예요. 나는 어떻게 되는가? I hate you. 나는 당신을 미워할 거야, 나오지요. 이게 다윗의 아들 가운데서 암논이 자기 누이동생을 일방적으로 스토커해서 사랑하다가 강제 강간을 하지요. 나는 성폭행이란 단어 자체가 싫어요. 그냥 강간이에요. 왜 강간이란 좋은 말이 있는데 성폭행이 왜 들어가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그것도 인권인가.

했을 때 이름이 뭐죠? 다 잊어버렸다. 사무엘하 13장인가, 이렇게 하면서 하나씩 배우는 거죠. 다말이죠. 이복 여동생 이름이 다말이죠. 다말이 강간당했어요. 당하고 난 뒤에 이복 오빠가 해놓고는 자기가, “저리 가. 꼴 보기 싫어.” 성경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더 미워했다는 거예요(삼하13:15,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여기서 인간의 마음이 복잡해지는 겁니다. 어떤 점에 복잡하냐 하면 이복 오빠 암논이 뭘 미워한 거예요, 누굴 미워한 거예요? 자기한테 강간당하기 전의 누이동생을 미워한 거예요, 강간당한 누이동생을 미워한 겁니까? 자기가 강간하고 난 뒤에 여동생을 미워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네가 내 수치스러운 행동의 증거가 왜 너한테 있어. 내가 하지 말아야 될 행동이 담겨있는 증거가 되는 나는 너를 저주한다, 밉다. 미운 거예요.

인간은 상대를 사랑한 적도 없고 상대를 미워한 적도 없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선에 대해서 사랑했고, 자기 자신의 악에 대해서 본인이 본인을 미워하는 거예요. 왜? 본인이 신이니까, 선악 지식을 갖고 있는 신이니까. 자기가 자기를 평하는 거예요. 옳은 것은 자기가 사랑하고, 옳지 않은 것은 자기가 미워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문제 하나 설정돼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인간은 어떻게 하면 죄 짓지 않는가? 인간은 어떻게 하면 죄 짓지 않는 겁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 죄지요. 왜? 자기 자신을 사랑하니까. 다윗이 밧세바를 사랑했습니까? 아니지요. 밧세바가 마음에 들어서 사랑했잖아요.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있는데 리트머스 시험지 같아. 전부 다 막대기가 하나에요. 선과 악이 하나의 막대기에 같이 있단 말이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함을 선으로 받아줄 경우에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어떤 남자가 꿇어앉아서 프러포즈한다고 다이아몬드반지를 여자한테 내밀면서 나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이렇게 하는데 여자가 몸 좀 풀더니만 돌려차기 있잖아요. 돌려차기로 반지를 차서 다이아몬드반지가 한 15미터 떨어졌을 때 남자 마음이 뭡니까? 남자가 어떤 마음이 있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이건 뭐냐 하면 당신은 내 자존심을 발로 차버린 거예요. 그러면 찼다고 한다면 그 남자는 결국 여자를 사랑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남자는 자기 자존심을 사랑한 거예요. 사랑이란 게 미움이 결코 자기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그게 악마거든요. 그게 악마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하나님이 내 뜻대로 해주면 사랑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안에 누구 내용이 잠식돼 있다? 내 뜻이 하나님 뜻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마치 러시아 인형처럼. 외형은 하나님인데 그 안에 누가 들어있다, 누가 주인 노릇하고 있다? 내 뜻이 주인 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사람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하죠. 교회가 마귀들의 집합체에요.

그렇게 분석한다고 문제 해결되는 게 아니고요. 어떻게 하면 범죄 하지 않을까요? 시편 41편과 관련해서 그럼 어떻게 하면 범죄 하지 않을까요? 정답은 이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골리앗이고, 내가 아무것도, 할례 없으면 인간 취급도 안 하니까 내가 할례 받기 전에 내가 세례 받기 전에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받아들이면 상대방이 두 바퀴 돌아서 내 프러포즈를 차게 되면 그걸 주의 뜻으로 반겨야지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걸 반겨야지요.

어느 누구도 남에게 우위에 설 자격 없고요. 어느 누구도 남을 통제하거나 지시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상대를 함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어떤 인간에게 하나님이 준 적이 없어요. 상대를 함부로 할 수 있는 권한. 이단옆차기로 차든지 뭘 한다하더라도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반발을 못해요.

그것을 바로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서 밝혔습니다. 요한복음 15장 대목을 봅시다. 친구에 관한 이야기니까. 요한복음 15장 9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하지요. 방금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주님이나 하나님이나 타인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주님의 사랑 안에 거둬들이는 거예요. 단추에 실 꿰듯이 그냥 거둬들이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할 수 없어요. 왜? 어떤 것도 자기가 자기 밖으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악마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악마가 회개하는 것 봤습니까? 없지요. 악마는 회개를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례 요한 보내서 회개하라 한 거예요. 회개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회개하라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다. 심판의 날 그냥 와도 되는데 심판의 정당성을 보여주지요. 회개하라, 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10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은 거기다 한 발 더 뜹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사랑이란 계명이 완성돼 있다. 따라서 너희들도 그렇게 그 계명을 지켜야 된다, 이렇게 돼요. 그러면 이거는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굳어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예수님 밖에 없거든요. 예수님만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사랑을 제자들에게 요청한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그 사랑이 있다, 없다? 없고, 그 사랑이 없으면 뭐가 안 되느냐? 너희들 사이에 친구 사이가 안 돼요. 각각 개별체로 분리돼버려요. 친구가 될 수 없어요. 이용대상이요. 아내는 남편을 이용하고 남편은 아내를 이용하는 거예요.

그것 하기 위해서 서로를 속이면서 결혼한 거예요. 결혼해놓고 그다음부터는 강제조치, 그 강제조치가 되는 경우가 뭐냐 하면 자식이 생길 때. 헤어지고 싶어도 무엇 때문에 못 헤어집니까? 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엄마는 자식 때문에 못 헤어지니까 자식 키운다고 자식에 매달려버려요. 잠도 못 자고. 그러니까 뭘 못 버려요? 돈을 못 버려요.

그러면 남편은 뭐냐? 이쪽에 자고 있는 남편은 돈 버는 기계여야 해요. 더도 하지 말고 돈만 벌어 와야 해요. 애는 내 애에요. 돈만 벌어 와야 해요. 만약에 남편 돈 못 벌지만 시아버지 돈 있다. 그러면 시아버지한테 순종하는 척하고 있어요, 며느리들이. 무조건 빼먹을 것 빼먹으면 되니까. 그런데 그 아들이 자식이 자기 남편을 너무 닮았다. 그러면 이제는 자식이란 정도 떨어져버려요.

이 세상이 어느 정도로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인 것을 하나님은 결혼제도를 통해서 자식 잉태를 통해서 그걸 확인해주는 거예요. 부부사이라도 자식 사이라도 모든 개념에는 뭐냐 하면 돈, 돈은 뭐냐 하면 내가 생존하기 위한 힘, 에너지거든요. 나만 사랑하기 위한 세상, 이게 악마가 모든 사람에게 다 집어넣은 인간의 본질이고 본심입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뽑았다는 거예요. 몇 명을? 열두 명을 뽑았어요. 하나를 열한 명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한 명을 마귀를 뽑았어요. 마귀를 뽑아서 마귀의 미래와 마귀의 갈 곳과 열한 명이 갈 곳이 예수님이 뽑아놓고 예수님께선 둘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쪽의 열한 명은 친구에요.

친구니까 여기는 무슨 내용이 포함되는 친구냐 하면, 시편 41편 9절의 말씀이란 실, 단추를 통과하는 시편 41편 9절에 있는 말씀을 거기다 담아버립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 대목이에요.

예수님께서 자기의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 기존의 친구라는 그 관계성을 주님께서 배신하는 방법으로 끊어냅니다. 너희들이 사랑하는 친구와 내 사랑하는 친구가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친구가 뭐냐? 요한복음 15장에 보니까 친구를 위해서, 13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자, 나왔지요. 친구에서 무슨 개념 나오지요? 사랑 개념 나오지요.

친구가 있어야 될 이유는, 친구라는 바탕이 있어줘야 거기서 없던 사랑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 친구에는 사랑이 없음이 확인돼야 되겠지요, 그렇지요? 인간들 열두 명 모아 놓고 무엇을 확인시킵니까? 사랑 없는 자, 사랑 없는 사이의 친구관계라는 것을 주께서는 증명하기 위해서 여기서 배신당하는 모습으로 주님께선 그들과 함께 있었던 거예요. 배신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뭘 믿어요? 내가 배신했던 분을 제가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내가 숨기고 있던 나의 진실을 오직 예수님만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나의 어두운 면, 좋은 면도 있다는 말이 아니고 전부 다 어두운 면이죠. 나의 어두움을 몽땅 다 갖고 계시기에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야 될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요한복음 12장 25절, 이거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뭐하는 자?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

그러면 아까 ①번, ②번, ③번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②번 이단옆차기 들어왔지요. 너하고 사랑하면 내가 죽을게, 단호한 거절. 단호함이 포함된 단호함이 명확한 거절. ③번, 나는 당신을 미워합니다. “네까짓 게 뭔데? 너 없으면 여자가 없어?” 이런 것 하잖아요. ④번, “나는 내 사랑을 거절한 당신, 그 당신을 미워한 나를 미워합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상대보고 미워하는 게 아니고 미움 받았다고 짜증내는 나 자신과 미워하면서 나와 결별에 나서지요. 나와 이별하는 거예요. 또 하나의 티켓을 얻은 거예요. 기존의 티켓 말고, 끝까지 내 사랑으로 고집하면서 천국 가고자 하는 그 사랑 말고. 내가 안 되는 이 미움이 주께서 나를 미워지게 해주신 그분을 드디어 사랑하게 된 거예요. 너는 미운 존재란 걸 재료로 한 사랑을 내가 받아들이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이라 하는 것은 의외의 나라고 생각지도 못한 나라죠. 왜냐하면 기존에 우리가 생각한 교회와 천국은 뭐냐? 거기에 내 사랑이 기본요소로 포함된 천국이에요. 나 잘되기 위한 천국이거든요. 내 복 받기 위한 내가 복을 얼마나 사모했습니까. 살아선 고생이지만 죽어서는 호강하자. 이 구호 하나 믿고 교회 갔잖아요. 성당 갔고, 절에 갔고. 이제는 바로 그것을 미워해줄 수 있는 교회, 참 그런 교회 있으면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나를 미워하고 그걸 저주해주는 교회, 그게 복음 아닙니까. 그게 복음이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 마지막 의가 떨어지는 맛을 네가 알아? 그 게 맛을 알아? 평생을 남을 이용해놓고 나는 사랑했다고 거짓말하는 우리, 나 호강하기 위해서 주변 친구를 끌어 모은. 내가 실패하지 않는 인생 되기 위해서 주변에 연락을 취한 거예요. 여자들 전화하면 한 시간 반씩. 남편 이야기 끝났는데, 이것 이야기하고 끝내자 해놓고 30분 더 끌어버려.

요한복음 15장 22절입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 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이제는 뭡니까? 인간이 자기 사랑에 빠져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몰랐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심지어 친구라고 하는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했을 때에 도대체 예수님을 알아본 인간이 누가 있었느냐? 아무도 없지요. 없다는 말은 바로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안다고 여긴 자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살해당함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그동안 몰랐고 모르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뭐가 되다? 관계가 끊어진 죄가 되는 거예요.

오늘 시편에서 다윗이 본의 아니게 비쩍비쩍 말라가고 아픈 것은 바로 내가 죄 때문입니다, 하는 그 죄를 같은 친구들은 이해할 수가 없지요. 다윗에게는 새로운 계시가 다가와서 그 보이지 않는 말씀이 인격이란 특정 인간이란 걸 이 세상 현실에 구체화돼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만 하신 게 아니고 말씀이 육신이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이 세상에 유일한 위기에요. 유일한 위기고, 멸망의 이유고, 심판의 근거가 하나님 쪽에서 장만한 겁니다. 이거는 종교가 아니에요. 있는 사실 자체, 팩트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령, 또는 주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우리 안에서 뭘 준다? 새로움을 준다. 여기서 새로움을 준다는 이것만 알면 안 되고 새로움의 반대가 뭐냐? 새로움이 전혀 새롭지 않은 게 뭐냐? 그 반대가 사색입니다. 철학적 탐구에요. 자기 도 닦는 거예요. 이건 전혀 새롭지 않아요. 이거는 자기가 오류를 줄이기 위한 조치에요. 오류를 실수를 줄이기 위한 조치가 사색입니다.

소주 한 병 먹고 뜨신 방에 이불 덮고 말씀을 생각하는 것, 큐티하는 것 이거는 새롭지 않습니다. 새로움이 되려고 지가 목표 산정해놓고 그 목표에 맞추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아주 발악을 하는 거예요, 발악을.

그러면 인간이 하는 한계가 사색에 불과한 데 어떻게 해서 사색에서 새로움으로 건너올 수가 있는가? 이걸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까 이야기하면 어떻게 사색하는 나는 근사하다, 멋있다, 내가 말씀을 상고하는 게 멋있다는 이것을 어떻게 새로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누구로부터 우위를 점령할 자격조차 ……. 이걸 어떻게 밝혀지는가? 거기에 대해서 어제 제 오후설교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오후설교 때 실로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실로가 나오는 구절이 창세기 49절에 10절에 나옵니다. 야곱이 마지막 죽기 전에 열두 아들에게 복을 내리면서 창세기 끝나버려요. 하나님께서 나한테 계시하기를 예언하기를, 다른 말로 하면 복을 주기를 너희들 열두 지파는 이렇게 다양하게 복이 파급된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 대목입니다. 창세기 49장에.

여기서 특이한 게 있어요. 이스라엘을 누가 통합할 것인가에 차이 나는 예언을 줬는데 이게 통합이면 하나여야 돼요, 둘이여야 돼요? 통합은 하나여야 되는데 이게 둘로 갈라져버렸어요. 요셉 지파와 유다 지파 둘로 복이 어떤 구심점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듯한 느낌을 줘요. 요셉 지파에는 뭘 주느냐? 목자를 줍니다. 유다 지파는 왕을 줘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 없다고 분명히 단정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왕이기 때문에 인간적 왕은 필요 없어요. 인격적인 인간으로서의 왕은 필요가 없습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왕을 달라할 때는 분명히 사무엘 통해서 예언하기를 너희들이 왕을 달라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왕 됨을 나는 거절한 걸로 간주하겠다, 이렇게 나왔어요,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왕을 달라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는 왕이 없는 이스라엘과 다른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거는 파괴돼야 될 이스라엘이죠.

지금 제가 사색에서 어떻게 해서 새로움으로 바뀌는가? 지금 단어 하나 힌트 드렸습니다. 파괴되어야 될 대상에서 뭐가 나온다? 새로움은 파괴를 통해서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걸 실로에서 어떻게 보느냐? 요셉은 목자로 돼 있어요. 왕이 아니고 목자입니다. 목자는 양을 이렇게 모으는 거예요. 통합시키는 거예요. 목자인데 요셉 지파가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로 갈라진 것 아시죠.

어쨌든 간에 두 지파가 된 이유는, 요셉의 희생 때문에 야곱의 온 식구가 다 살았어요. 심지어 요셉의 아홉 형들은 요셉을 팔아먹었습니다. 팔아넘겼어요. 좀 없어질래, 없어주라는 거예요. 우리 앞에서 눈에 띠지 말고 좀 사라져줄래, 이랬어요. 사라진 희생물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두 배나 하나님께서 복을 준 거예요. 두 배나 줌으로서 우리가 저 요셉을 학대했다는 것을 대대로 각인되도록 새겨지도록 한 거예요.

십자가에 우리 마음속에 새겨져야 돼요. 여기 피아노에 십자가 네 개 있지요. 이거는 잘 안 들어갑니다. 우리 마음속에 십자가가 있어서 까불거리는 제가 주님을 죽였습니다, 라는 게 우리 속에 있어줘야 돼요. 그래서 두 배나 했다. 그 장소가 뭐냐? 실로에요. 통합됐지요. 여호수아의 정복 이후에 여호수아도 실로에서 언약궤에 있었고, 정복 후에는 실로에서 언약궤가 중심역할 한 거예요. 그러니까 통합된 거예요. 어디? 실로란 지역에 통합된 겁니다.

통합되고 난 뒤에 이들이 안정권에 들어갔거든요. 안정권에 들어가니까 여기서 뭐가 일어나는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변나라를 이스라엘에서 다 쫓아내지 않았어요. 쫓겨나서 저쪽에 가 있는 거예요. 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한 번 획득했다고 도우심이 그걸로 마감되는 게 아니고 그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언약관계가 유지되어야 주변이 너한테 굴복 당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계속 주변 나라를 주변에 얼쩡거리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약속의 땅에 잘 먹고 잘 사니까 어떻게 됐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들을 쫓아내고 우리만 특혜를 줬다는 이 관계를 잊어버린 거예요. 왜? 이스라엘의 잘못은 이스라엘이 누굴 사랑했다? 이스라엘을 사랑한 이게 잘못이었던 거예요. 내가 나를 사랑한 것, 나 이제 지난 5년 전에 은혜 받았어, 구원받았어, 이렇게 되면 누굴 사랑한 거예요? 주님 사랑한 게 아니고 구원받은 나를 사랑한 게 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주변에 사태를 일으키죠.

성도에게만 해당되지만 사건을 일으켜서 내 하는 뜻을 뜻대로 안 되게 말하죠. 그게 뭐냐? 나의 파괴, 나와 나의 이별을 반복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앗수르가 우상을 섬겼다. 우상을 섬겼는데 우상의 특징이 뭐냐? 그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게 없어요. 긍휼이란 실이 없어요. 단추를 꿰뚫는 실이 없습니다. 그냥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에요.

그러니까 인간 위주지요.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가치, 인간의 인권이죠. 이게 우상의 세계에요. 서로의 가치를 존중해주자. 민주주의 이런 것 전부 다 마귀적이에요. 헌법을 지키는 것이 주의 뜻이다. 아닙니다. 그게 마귀 생각이에요. 부활절 기념사에 누가 그런 소리했다고, 어디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헌법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라는. 그게 바로 차라리 성철 스님처럼 “사탄아, 환영합니다.” 그게 더 나아요. 저는 사탄을 숭배합니다, 죽은 성철 스님, 조계종 석가탄신일에 법어로 우리는 사탄마저 용납합시다, 하면서.

앗수르가 와서 완전히 실로, 북쪽을 다 작살냅니다. 작살낼 때 남쪽은 남겨둬요. 왜 남겨두는가? 이스라엘을 통합시키는 통합의 구심체가 요셉의 한도가 끝났어요. 목자의 시대가 끝나고 어디로 가느냐? 유다로 가요. 유다로 가는데 이걸 통합할 때 이게 어려운 거예요. 어제 설교시간에 설명이 다 못했습니다. 시간관계상. 유다의 왕이 오잖아요. 여기서 알아야 돼요.

유다에서 왕인데 왕이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왕이냐, 아니면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왕인지 알아야 돼요.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왕이 오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왕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창세기 49장 9절에 보면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9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축복할 때, 여기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해놓고 사자 새끼의 성격이 어때요? 뒤에 나오죠.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앗수르가 사자 같이 북쪽을 삼켰잖아요. 그러면 이것이 실로에 있던 언약궤가 어디로 이동하느냐? 예루살렘으로 이동합니다. 다윗에 의해서. 이동할 때 유다가 뭐 같다? 사자 같이 뭘 찢어버린다? 유다는 이스라엘을 보호하지만 유다자손은 예언된 진짜 유다에서 나오는 왕은, 유다는 왕 되면 안 돼요.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 없어요.

진짜 이스라엘 왕은 이스라엘을 앗수르가 찢어버리듯이 찢어버린 거예요. 얼마나 찢는지 예루살렘을 찢어버려요. 마치 옛날에 실로를 찢어버리듯이, 앗수르가. 실로란 지역 북쪽이 앗수르한테 찢길 때에 북쪽 왕들이, 남쪽 왕들도 마찬가지지만 어느 신을 믿었습니까? 앗수르가 믿던 신을 섬겼어요. 앗수르 신을 섬겼는데 앗수르 신을 믿던 그들이 앗수르에 의해서 찢기듯이 완전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오늘 시편대로 하게 되면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은 누구한테 심판 받습니까? 여호와한테 심판 받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로부터 지옥 보내집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지옥 보내지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러느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말씀이 그러니까 티켓 한 장, 내가 말씀 믿고 교회 가고 이러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나 말씀이 먼저 와서 나를 파괴시켜줘야 돼요. 그 말씀의 완성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앞에 우리가 설 때에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 어느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느냐 하면 주님이 나를 구원해도 그만이고 구원 안 해도 상관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야 돼요. 그게 십자가에요.

그래야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으로 전환되느냐 하면 그동안 내 인생 내가 주인 노릇했는데 이게 주님으로 인수인계됩니다. 그러니까 곱게 인수되지 않고 찢겨서 파괴되어서 인수된 거예요. 사나죽으나 이젠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주의할 것은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니까 나는 구원받았다고 하면 안 되지요.

그래서 그걸 어제 설명한다고 부활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마술사가 부활되는 것 이야기했지요. 살아 있는 채로 부활되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살아 있으면서 부활 생각하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 연기하고 있는 거예요. 죽는 척하면서 또는 죽을 뻔하는 건 부활이 아니에요. 완전히 내가 알던 나는 할례가 없는 그 자체, 세례 없는 그 자체가 살아 있어도 이건 산 게 아니고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요소가 없으니까, 주님의 실이 없으니까, 다윗을 꿰뚫는 실이 없으니까.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내가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여 성신을 나한테 거두지 마옵소서, 했어요. 자기가 죄인인 건 알겠는데 성신을 내게 거두지 마옵소서. 왜? 그게 하나님의 다윗 자손이기 때문에. 본인이 살고 싶어 하는 게 아니고 그게 약속 중에서 나를 친구로 삼았고 나를 사용하셔서 약속을 드러낸다는 그 약속은 저한테 거두지 마소서, 란 뜻이에요.

주께서 찾아온 복음이 저에게 떠나지 마소서, 하는 것은 떠난다는 말이 아니고 떠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주님을 버릴지라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것이 이사야 44장에 보면, 이스라엘아 여수룬아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왕이 없어야 될 이스라엘에 다윗을 줬다는 것은 다윗의 후손에 의해서 다윗을 배태한 이스라엘이 심판 받고 파괴된다는 겁니다. 그 다윗의 자손이 누구지요?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한테 배신당하고 죽으신 겁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날 위해 울지 말고 네 딸을 위해서 울어라. 내가 이스라엘을 대표로 작살내시는 바로 심판주다.

그럴 때 사도행전 2장 37절에서 베드로가 그런 설교하니까 유대인들이 이런 소리했어요. 어찌 할꼬, 했어요. 이 말이 세례의 내용이 됩니다. 나중에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 받으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어찌 할꼬, 란 것은 뭐를 떠난 거예요? 내가 할 도리 다했는데 이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은 내가 원천부터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비로소 발견했다는 거예요. 전부 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살아왔어요.

햇빛이나 공기나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이 그냥 은혜로 주신 걸로 살았는데 그걸 받는 쪽쪽 마귀 품성이 있어서 전부 다 애써서 인생 내가 주인공으로 살아왔다 그걸 다 전환시켜버린 거예요. 그런데 에티오피아 내시처럼 성령을 받아버리니까 참 이거는 진짜 말도 안 돼. 내가 왜 마귀 짓을 해도 그렇게 독하게 했지? 그것을 알게 됩니다.

끝으로 이야기할 것은 그렇다면 그걸로 구원받았으니까 어떻게 할까요? 시편 41편 때려치울까요, 이젠 안 봐도 됩니까? 아니죠. 내가 있던 내가 주인공 되는 그 자리에 나를 현실에 구체화하기 위해서 말씀이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내가 아직도 안 죽고 있는 이유는, 말씀의 나의 중심에 차있다는 것을 구체화시키는 거예요. 이 ‘구체화’가 중요해요.

구체화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없다, 보이지 않는다, 말씀도 안 보인다, 우리 인간들끼리 있다, 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여기 있잖아. 아무것도 아닌 채로 있잖아. 그 아무것도 아님이 시편 41편의 구현체로 완성체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오늘 시편 41편에 온전함이 등장합니다. 41편 봅시다.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41편 12절,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이것은 노력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다 애쓰면 구원에 도달한다는 말이 아니고 어제 낮 설교처럼 구원은 완전해져서 시작되는 거예요. 완전함이 내 중앙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노력하면 다 탈락이에요. 선악 지식으로 애쓰고 최선을 다했다, 나름대로 바쁜 시간 짜내서 교회 봉사했다, 다 탈락이에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아버지가 아들 아는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 아는 예수님처럼 완전하지 아니하면 다 탈락입니다.

그 완전을 뭐라고 하느냐? 그게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주님을 미워한 요소로서 사랑을 구성하기 위해서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끝으로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의 실질적인 구현체로서 실제적인 실체로서 우린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코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주님이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해 온 거죠. 그래놓고 요한일서에 보면 이걸 알게 한 것은 성령이 너에게 임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해버려요.

그러니까 인간의 지식으로 아는 사람은 뭔가 보이지 않는 천국 가고 싶은데 내 쪽에서 할 게 있어야 되는데 성령이 와야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했다는 내용이 있으니까 어느 것 하나 내 쪽에서 잡을 게 있다, 없다?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 마지막에 세상에 속한 사람 있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오신 것도 기적이지만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 성도가 발생된 것도 특혜요 기적으로 여기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주님의 약속을 드러내기 위한 조치이지 우리 이익을 위하지 않은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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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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