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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30410a 부산강의 : [시편]57(41:9)-친구 만들기자유게시판시편

20230410a 부산강의 : [시편]57(41:9)-친구 만들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41편 해봅시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1절) 복이란 걸 형성하기 위해서 주변에 먼저 빈약한 자가 설정돼야 되고, 복이란 빈약한 자가 설정되지 않으면 복이 오지 않는다. 그리고 왜 빈약한 자가 설정돼야, 먼저 있어야 복이 오느냐 하면 무슨 날이 있느냐 하면 재앙의 날이 있어요. 이 재앙의 날은 모든 인간을 죽이는 날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을 죽이는 날을 하나님이 설정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이란 것은 없는데 빈약한 자를 등장시켜서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재앙의 날이 너희들을, 모든 인간을 죽이는 그 날이 있다는 것을 빈약한 자가 등장함으로써 발견하게 하는 거예요. 빈약한 자는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 하면 재앙, 결국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죽이는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죽음을 주실 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죽이시는 환경이냐, 아니면 내가 알아서 죽는 죽음이냐? 죽음의 두 종류, 내가 알아서 죽는 죽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죽이신다, 이렇게 돼버리면 우리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죽어야 될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은 그걸 놓치지 않고 죽어야 될 이유 때문에 나는 필히 너를 죽이겠다. 나한테 죽음을 당해봐라. 이게 ①번이에요.

②번은 뭐냐 하면 내가 죽어야 될 이유를 모르겠는데 하나님이 죽이겠다고 하니까 죽는 결정을 기어이 내가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고집 세지요. 한 고집하지요. 죽을 때까지 반발하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반발하는 그 기간을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비록 죽는 순간이 온다 할지라도 살았다는 느낌은 한 번 가지고 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의 죽음에 대해서 내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살아 있으면서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잘못한 건 인정하겠지만 그게 죽을 이유만큼은 인정 못하겠다는 것. 하나님이 굳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죽이시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는 동의 못하겠다. 살 만큼 살다가 내가 늙어서 살 힘이 빠질 때 내가 알아서 죽을게요.” 자살한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자연에 맡길게요, 시간에 맡길게요.” 이런 식으로 버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자, ②번에 해당되는 사람, 내가 알아서 죽겠다는 것, 대다수지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면 자진해서 빈약한 사람이 될까요, 안 될까요? 자진해서 빈약한 사람이 안 돼요. 자기는 빈약한 걸 제일 싫어해요. 이 세상에 강자로 살고 싶고 으스대고 싶고 남한테 꿀리지 않고 남한테 무시당하지 않는 존재, 빈약? 그건 나하고 상관없어. 나는 약한 가운데 일어서서, 이런 것 주장하고 싶은 거예요. 빈약이란 약하다는 뜻이에요. 약한 가운데서도 버티면서 살아왔었어. 이게 ②번에 해당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빈약한 자를 외면해버리고 기피하니까 빈약한 자가 기피돼버리면 뭐가 없어요?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빈약한 자가 등장해야 뭐가 생긴다고요? 복이 등장하지요. 빈약한 자를 내가 외면해버리면 그 사람한테는 뭐가 없습니까? 복이란 게 성립되지 않아요. 복이란 게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빈약한 자의 노선을 거부한 자는 결국은 뭐냐 하면 재앙의 날에,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죽이는 그 날에 재앙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더 깊이 있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재앙의 날에는 어떤 사람을 재앙에 하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복을 피해가는 사람이에요. 재앙의 날에 정당하게 하나님은 너희들을 저주하고 심판했다는 그 이유를 ②번 되는 자들은 그걸 미리 알려달라는 거고, 주님은 그걸 미리 알려 줄 필요 없이 네가 꼭 재앙 받아야 마땅한 사람인 줄 네가 평소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두고 봐. 장담한다. 거봐. 반항하는 꼴 봐. 그러니까 재앙 받아 마땅하지. 복이란 게 너한테 해당이 없다는 것이 합당하지, 라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이런 자들이 생깁니다. 이런 자들, ②번이 생기는 거예요.

빈약한 자를 발생시켜놓고 내가 알아서 내 인생 내가 멋지게 용감하게 멋있게 살다고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이 관계를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원수관계로 본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관계입니다. 11절에 나와요.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그러니까 시편 41편에 나오는 복이라는 개념, 그리고 재앙이라는 개념, 원수라는 개념 이것 인간들이 만들어냈어요, 안 만들어냈어요? 인간들이 이런 개념을 만들어냅니까? 복, 재앙, 원수 이건 인간들이 안 만들어져요.

내가 멋있게 사는 자체가 복인데 복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인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뭔가 스스로 자기를 비참하게 보는 거예요. 얼마나 복이 없으면 복을 달라하겠어요. 이런 느낌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아쉬운 사람들은 복을 원하지만 스스로 원하는 것을 가졌다는 사람들은 복을 원합니까, 안 원합니까? 복을 원하지 않지요. 복이란 뭐냐? 노동 개념이 빠져있는 게 복이에요. 불쌍해서 봐주는 게 복이라고요. 내 힘으로 얻는 것은 복이 아니에요. 성취지.

여기 10절에 보세요.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나를 긍휼히 여겨달라는 거죠. 긍휼히 여겨달라는 이러한 저자세, 현대인들은 특히 20대 젊은이들은 아주 싫어하는 거예요. 내 팔자, 내 미래는 타로 점으로 미리 당겨서 보면 돼요. 점 보면 되는 거예요. 점 본다는 것은 미래개척에 내가 관여한다는 거예요.

미래에 대해서는 그냥 멍청하게 있다가 주어지는 대로 살기 싫고 자존감이 있기 때문에 내 미래는 점을 봐서라도 당겨서 내가 단도리하고, 경상도 말로 단디, 대구은행에 가면 ‘단디’라는 카드 있어요. 내 인생은 내가 단단히 단속하고 관리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나한테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빈약한 자에 속하지 않지요. 인간은 누구든지 죽는다 하는 것은 세포의 끝이 닳아지는 것, 텔로미어라는데 그게 닳아지면서 회복이 불가능하니까 죽음에 이른다, 생물학에서 그걸 밝혀냈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의연하게 대처하면 될 것 아니냐. 내가 죽을 때를 기다릴 필요 없다. 살만큼 살다가 힘 빠지면 죽지, 뭐. 그게 인생의 가는 길 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내가 죽음의 공포 앞에 꿀릴 일 없지.” 이렇게 자신만만한 거예요.

그러니까 은혜라든지 복이라는 개념 같은 것은 인간세계에 이런 게 없지요. 인간세계에서 복, 빈약함, 재앙, 원수 이런 개념은 인간들이 원하지 않는 개념이에요. 시편 41편 자체가.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원수라는 것을 원수의 실체를 그대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모든 사람은 원수일 가능성이 많은데 그중에 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의 적에서 빠지게 되겠지요. 복을 받았다는 말은 재앙의 날에서도 빠지고 원수에서도 빠져버리죠.

그러니 복 받은 것은 일종에 인간세계의 모든 인간을 다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원수에서 빠지고 빈약한 이거는 뭐냐 하면 특혜입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특혜조치에요. 복 받는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에요. 이거는 기대하지 말아야 됩니다. 인간이 복 받는다는 것, 긍휼히 여김 받는다는 것, 긍휼을 기대한다는 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긍휼이란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빈약한 경우에요. 그런데 이 빈약은 모든 인간이 자기 알아서 챙기는 데 빈약을 스스로 요청한다든지 빈약하고 싶어 환장한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특혜와 관련돼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알아서 망하겠습니다’를 인생의 유일한 소원으로 삼는 사람 없습니다.

초등학생에서 “너 장차 뭐 될래?” “빈약한 사람 되겠습니다. 나 나중에 망하겠습니다.” 이걸 장래희망으로 쓰는 애가 있겠어요, 없겠습니까? 없지요. 그럼 애들의 장래희망은 어디서 골라잡느냐 하면 기존의 기성세대에서 자기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 중에서 뽑아서 장래희망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성세대의 후세대, 그 아비의 그 자식 대대로 재앙의 날에 전부 다 총 집결되는 이 원칙에서 피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세상이 악하다고. 참 지옥 같다고. 그런데 그거는 잘못된 거예요. 세상은 악하다, 이거는 잘못된 말이에요. 내가 악하다, 이게 옳은 말이에요. 내 자신이 악하지요. 내 자신 같은 것들이 모여서 세상이 악해지잖아요. 세상이 악하다면 그 속에 누가 포함돼 있습니까? 내가 당연히 포함되지요.

내가 세상은 악하다는 말은 나는 악하지 않고 나는 스스로 설 수 있는 자격을 구비하고 싶다는 것인데 이거는 시편 41편에 나오는 빈약한, 하나님에 의해서 유발된 빈약함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에요. 신약에 로마서 10장에서 이걸 자기 의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은 악해도 나 하나는 건질만한 것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제 오후설교에 잠간 언급을 했습니다. “네가 게 맛을 알아?” 진짜 맛은 알지 못하고 내 마지막 의가 떨어지는 맛, 내가 마지막 꼬깃꼬깃 꼬불쳐놓은 정말 세상은 지옥이 돼도 나는 이렇게 의젓했다고 내밀 수 있는 증거 있잖아요. 그 마지막, 남들은 몰라요. 자기만 아는 내가 사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야, 라고 버틸 수 있는 마지막 버팀이 떨어져나가는 그 맛, 네가 게 맛을 알아?

정말 이게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로 빈약한 자가 되는 이 코스는 무슨 코스냐? 복 받는 코스와 직결돼 있어요. 이게 시편 41편의 시작입니다. 빈약에 대해서 자존심 상하지 마세요. 빈약하게 되는 내력이 있어요. 이제부터 올 사람 다 왔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시편 41편은 말씀이 어떻게 구체화되는가? 지금부터 좀 난해합니다. 많이 난해해요. 그래서 제가 어렵지 않도록 쉽게 저도 애를 쓰겠습니다.

말씀이 어떻게 구체화되느냐 할 때 말씀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께로 나오지요. 일단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안 보인다는 것은 인간세계에선 없음이에요. 안 보이니까 없는 거예요. 인간세계에 없습니다. 말씀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어디에 치중하느냐? 보이는 데 치중해요. 보이는 것은 누가 보이느냐? 하나님의 반대, 인간들은 보입니다.

보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의견이나, 인간들의 주장이나, 인간들의 강압에 신경을 많이 써요. 인간은 있음이니까. 있는 인간들의 주장들, 의견들 이런 것들을 다 플러스 해보면 이게 바로 이 세상이 되는 겁니다. 의견들, 그런 것들이 왕왕왕 날아다니거든요. 다 의식하고 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없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말씀을 줬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있음의 세계에 어떻게 없음의 세계가 그게 구체화, 형상화 되고 나타날 수 있느냐는 문제에요.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단추를 다는 바느질하는 예를 들겠습니다. 단추가 있는데 보통 단추 구멍이 두 개지요. 실을 꿰어서 단추 구멍 한 쪽에 집어넣고 다시 다른 구멍을 통해 올라오지요. 그러면 이 단추는 어디에 부착되는가? 옷에 부착됩니다. 안 봤지만 옆에서 보니까 그래요.

그렇다면 다윗이라는 눈에 보이는 인간 다윗에다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꿰고 올라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으로 실로써 바느질해버리는 거예요. 통과하게 되면 다윗은 두 세계를 양면으로 보여주는 인생이 됩니다. 특수한 택함 받은 사람 돼요. 다윗은 신체를 갖고 있으니까 보이는 인간세계에 어쨌든 보이는 하나의 인간으로 이미 스며들게 된 거죠.

근데 다윗이 하나의 인물에 주의 말씀이 와서 빠져나옴으로서 다윗이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사태가 자기 인생에 들어오게 돼요. 그러면 단추가 옷에 부착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에게 딱 달라붙어 부착되는 거예요. 부착되는 게 그냥 달라붙는 정도가 아니고 이건 뭐냐 하면 환풍기 또는 통풍기 역할을 하는 겁니다. 누가? 다윗이.

왜냐하면 이쪽으로 와서 양면으로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한 인물 속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들어와서 빠져나오고, 들어와서 빠져나오고, 들어오는 기운 있고 빠져나오는 기운 있고 양쪽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본의 아니게 빈약한 사람 된 거예요. 다윗이 빈약한 걸 소원한 사람 아니에요. 그런데 다윗의 시에 41편 1절에 보면,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자기 자신에게 졸지에 빈약하고 싶지 않은데 빈약한 사태가 벌어진 거예요.

아마 세상 사람들이 그 당시 사람들이 다윗보고 너 빈약한 게 된 것이 다이어트 많이 해서 그렇다든지 자꾸 원인을 캔 거예요. 네가 빈약하고 시름시름 아픈 이유가 운동을 안 했다든지 비타민을 제대로 챙겨먹지 않았다든지 자꾸 이유를 대는데 다윗은 이유가 없어요. 이유는 없는데 이유가 어디서 왔는가? 단추 안에 실이 통과하지요. 하늘, 보이지 않는 쪽에서 온 실이 다윗을 통과하면서 다윗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났다? 빈약해진 현상이 일어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시들시들 아파 죽어가고 있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3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다윗이 쇠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약해지기 시작한 거예요. 그 약해진 걸 다윗이 뭐라고 계시하느냐 하면 내가 약한 것은 죄 때문에 약해졌다 하는 거예요. 그 뒤에 나오지요.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 범죄 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제가 여러분한테 질문을 하겠습니다. 다윗이 아픕니다. 어떤 사람이 아픈 게 아니고 다윗이 아파요. 다윗은 왜 아프냐 하면 자기 죄 때문에 아프다는 거예요. 죄 때문에 아프고 점점 죽어가고 있습니다. 점점 인간으로서 어디 가느냐? 죽음이란 것은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까 죽음에 도달하지 않잖아요. 도달하지 않았지만 방향이 그쪽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현재 그들이 가고 있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 이유를 몰라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쪽에서 말씀으로 실로 꿰어버리면 다윗이 통풍기/환풍기 역할 해서 대표로 해서 모든 인간은 죽는 이유가 죄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거는 쉬운데 그다음이 더 어려워요.

뭐냐 하면 다윗은 죄 때문에 죽음에 이릅니다.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게 어려워요. 네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하나님 말고 다른 사람이 다윗에서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첫 번째, 인간들은 다윗에게 말하기를 너의 죄 때문에 너는 죽는다, 벌 받는다, 쇠약하게 되었다, 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 예가 욥기 19장 13절에서 22절까지 나오는데 13절부터 제가 빨리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종들은 나를 외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하여야 하겠구나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 어린 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13~19절)

욥보고 하는 거예요. “네가 이런 심한 고난 손댈 수 없는 아픔을 병든 것은 생각해봐라, 욥아. 네가 무슨 죄 지었을 것 아니냐.” 인간들이 생각하는 건 뭐냐 하면 죄 지은 분량만큼, 정량적이에요. 죄 지은 분량만큼 그만큼 벌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마치 감기약처럼. 감기 약간 들면 한 알, 심하게 들면 두 알. 그것도 안 되면 하루에 한 번 먹지 말고 세 번. 식사 후 30분, 이런 식으로 정량제에요. 양을 정해서 이쪽 양과 이쪽 양을 균형을 맞추면서 처방하는 것인 인간들 지식의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다윗보고 네가 죽어가고 약해진 것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인간들이 그런 소리 한다는 것은 본인은 어떤 뜻이란 말이에요? 본인은 다윗처럼 안 아프고 있는 현 자기의 모습은 어떻단 말입니까? 완전하진 않겠지만 정량적으로 다윗보단 의롭다 하는 빌미가 다윗의 아픔으로 발생된 거예요.

이게 어려우면서 쉬운 게 왜냐하면 사람들이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사람들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게 참 안 됐다, 동정심, 불쌍하다. 그러면서도 나오는 감정은 뭐냐 하면 아직까지 내 손에 못 안 박혀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애가 셋이나 되는데 다 키우고 죽어야지. 곧 막내가 대학 들어가는 데 내가 아파 죽으면 안 되지.” 그런 생각이 훅 드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상대적으로 누구는 나보다 죄인이고 누구보다 나은 의인이다. 누굴 대상으로 하는 겁니까? 예수님을 향하여 그런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느냐 이 말이에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알면서 그런 대상으로 못 삼지요. 지보다 못된 인간이 벌 받아 아파서 죽는 것에 대해서는 흔쾌히 대상으로 삼잖아요.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셔. 못된 짓하다가 망하는 것 봐. 역시 내가 인생사는 원리원칙은 그만큼 합당해. 내가 지금 잘못된 인생사는 건 아니야. 왜? 나쁘면 저렇게 벌 받는 것 봐.”

그러니까 정의는 살아 있다 이 말이죠.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준다는 자기 원칙을 정당화하는 증거로 삼는 거예요. 못된 놈 집안 망하면. 그런데 그 원칙이 어디서 깨집니까? 어디서 깨지는지 본인은 알잖아요. 어디서 깨질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와 비교 안 된다는 걸 발견하잖아요. 그러니까 방법은 뭡니까? 십자가를 외면하는 방법이에요. 십자가를 외면해야 자기가 정당하다는 원칙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을 안 듣습니다. 복음을 안 듣고 교회 와서 누가 기도 오래하는가 붙고, 한 달 수입이 누가 많은지 비교해볼까, 이런 식으로 나와요. 교회 봉사 많은 한 사람과 적게 한 사람과 비교해서 봉사 많이 한 쪽이 만약에 잘 산다면 그 사람도 봉사할 가능성 있어요. 봉사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 옳은 것을 정량적으로 추가를 하게 되면 나는 내 인생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관리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왜 다윗을 아프게 했습니까? 왜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은 죄가 많아서 아프다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뭡니까? 정답은 하나님의 원수를 색출하는 방법에서 다윗을 미끼로 사용한 거예요. 모든 세상이 지옥 가도 마땅하다는 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는 미끼로 사용한 거예요. 모든 인간이 죽는 이유는 배후에 누가 있기 때문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악마의 정신은 뭐냐? 내가 신이다, 그게 악마의 정신이에요. 그래서 악마의 심성을, 악마가 죄거든요. 죄의 왕 노릇, 죄의 통제를 받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악마의 심성을 그대로 복제해서 갖고 있어요. 그게 뭐냐? 나는 신이다. 나는 정당하다. 그게 우상의 특징이다. 나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신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신이 인간에 일종의 라이벌입니다. 신에게 막 바치지요. 신에게 바치면서 인간은 다룹니다. 받아쳐먹었으면 뭔가 내놔라. 안 내놓으면 신 바꿀 거야. 내가 절에 갔는데 이제는 교회 갔다. 교회 신이여 받아먹었으면 내게 복 주는 게 당신의 정당성에 합당하다. 내가 알고 있는 신은 그런 신이야, 라고 교회 와서 그렇게 기도하고 부지런 떨고 난리 치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고 싶어서 환장하고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죽이고 싶어서 환장하신 거예요. 원수니까 미끼를 던져놓은 거예요. 죄 없는데 빈약하고 죄 없는데 죽어가고 죄 없는데 망해가는 버림받는 상실된 그런 사람을 던져놓았을 때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보고 오해하지 않을 인간이 아무도 없어요. 오해한다는 말은 예수님 앞에서 평소에 본인도 몰랐던 본색이 노출됐다 그 말이에요. 십자가 앞에서.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 하는 방법은 뭐냐?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돼요. 얼굴 돌리면 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귀 막으면 되는 거예요. 그거에요. 그리고 자기와 비교할 다른 인간들과 아옹다옹 다투면 되는 거예요. 누가 의로워서 누가 복을 많이 받았는가? 그것만 정량적으로 측정하면 되잖아요.

어떤 사람 교회 봉사해서 복 받았다는 그 이야기는 애써 부인하지만 결국은 부인 못해요.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통하는 원칙을 목사 입에서 그게 나와 버렸으니까. “목사님, 너무 기복 신앙적이야.” 욕은 하면서도 그 교회를 떠날 수가 없어요. 생각이 똑같거든요. “설교 너무 천박하게 한다. 요새 시대에 누가 그걸 믿나?” 본인이 믿어요. 누가 믿느냐고 욕하는 본인이 믿고 있다고.

그걸 목사가 심리적으로 간파하고 있으니까 욕하나마다 교회 부흥되면 그만이지.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라. 교회 부흥되면 지 월급 계속 들어오니까. 노후가 대책이 되니까. 그런 식으로 교회사업 밀어붙이는 거예요. 안 속는 척하면서 다 속아 넘어가고 있어요. 나는 배운 여자고 배운 남자라 해서 배운 여자 더 찾고 있어요.

두 번째가 뭐냐? 인간들이 욕하지요. 그런데 다윗은 뭐가 어려우냐 하면 그렇게 다윗은 스스로 죄 있고 나는 죽어 마땅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에 대해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저들을 고소해주세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방금 다윗 본인이, “나 죄 많습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사람이 그걸 듣고, “그래 너 죄 많으니까 죽어라.” 하니까 “하나님이여 저 원수를 용서하지 마옵소서.” 이렇게 나온 거예요. 이게 무슨 모순입니까?

본인이 본인 입으로 죄 이야기해서 다른 사람이, “그래 죄 많아 죽어 마땅해.” 한다면 다윗이, “주여,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원수. 저주해버리소서.” 이런 발언은 또 어디서 나온 발언입니까? 그것은 바로 다윗이 특혜 받은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말씀의 줄이 환풍기 역할, 들어왔다가 나왔다는 게 있는데 다윗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양면의 세계가 없어 기존의 자기세계만 유지하면서 나온 원칙으로 양면의 세계 둘 다를 보여주는 사람을 함부로 폄하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미끼로 사용한 거예요.

그래서 어제 주일 낮에 티켓 한 장과 두 장을 설명해드렸잖아요. 티켓 한 장 있는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든 간에 반드시 신을 찾게 돼 있어요. 왜? 평생을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잖아요. 누가? 모든 인간이. 누가? 깡패가, 조폭이. 누가? 사람을 때려죽인 연쇄살인범도 본인의 행동의 깊은 곳에 양심은 있고 그 양심은 선하고 착하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어떤 인간도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도 내가 전적으로 나쁘지 않다는 사고방식이 있어요.

그 인간은 그 티켓으로 이 땅에서 고생했지만 죽어선 천당 가려고 그 티켓으로 천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절에 가도 교회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교회를 저주해도 마음속에는 신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중이에요. 여러분 그 마음가짐을 파악해야 돼요. 모든 인간은 신을 찾고 있습니다. 찾는데 티켓 들고 있어요.

“주여, 저들은 악하지만 제가 불우한 가정에 태어났지만 나름 내가 착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은 주께서 다 알고 보고 계시지요? cctv 다 찍어놨지요. 주님 다 지켜보셨지요. 이 착함, 내가 나쁜 짓한 것 인정하겠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것 충분히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악하고 더러운 세상, 나를 힘들게 만든 인생, 이 세상 가운데서 나름 착함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그 마음은 가상하게 보셔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게 인간의 모든 행동 속에 다 들어있어요. 티켓이 한 장입니다. 그 양심만 생각하면 스타일 죽이지요. 좋지요. 브이아이피로 모십니다, 나이트클럽에서. 티켓 들고. 소위 성도란 사람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착하고 싶은 이 마음을 본인이 주체할 수 없어요. 한 달에 한 번은 교회 나오잖아, 이 착함을. 안 나와도 되는데 한 달에 한 번은 나온다고, 이 착함을 내가 자기가 자기에게 감동을 해요. “언제부터 착하게 되었지, 교회를 다녔지?” 이런 식으로. 목사님 설교 들어오지도 않아요. 자기 착함에 자기가 황홀에 빠졌어요. 두 달, 석 달 만에 교회 나오면서 황홀에 빠져버린 그걸 어떻게 버립니까? 그걸 어떻게 내 힘으로 뽑아내요?

성도는 어떤 자가 성도냐? 그 티켓 들고 천당 가려고 오는데 그 지옥 문턱에서 입구에서 뺀찌로 빼버려요. “너 그쪽 아니야. 반대쪽이야.” 그러니까 인간의 능력으로서 방향을 틀 수 있다, 없다? 틀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특혜라고 한 거예요. 내가 지식으로 감 잡아서 복음이 뭐고, 세상이 뭐다 감 잡아서 방향이 틀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천국은 이런 곳이고, 지옥은 이런 곳이라고 아는 자체가 너무나 의로운 행동이기 때문에 그 의로운 행동을 본인이 뽑아낼 수가 없어요. 그동안 교회에서 배운 복음의 정보량이 얼만데 아주 대단하잖아요. 그걸 어떻게 죄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까?

다윗을 끌어오는 빈약이란 것은 이것 아셔야 돼요. 이유 없는 죽음이에요. 다윗에 왔다가 올라가면서 다윗이 아는 것은, 나는 이유 없이 그다음에 뭐다? 이유 없이 죄인이고, 이유 없이 죄인 된 이유가 이유 없는 아무런 근거 없는 긍휼을 통과한 사람만 영생의 복을 받은 사람이란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시편 41편이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시편 전체가, 다윗 전체가 그래요. 다윗은 소년 다윗의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요. 소년 다윗이 골리앗 이겼을 때 골리앗 이기는 이유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유를 찾지 말라고 성년 다윗이 아니고 소년 다윗 때 골리앗을 어른 다윗을 붙여준 거예요. 다윗을 고백하지요. 이 전쟁은 내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저를 사용했을 뿐입니다. 이제 아까보다 더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게 돼서 시간을 보고 갈게요.

다윗이 골리앗 할 때 소년 다윗이 내세운 것은 아주 순진한 발상인 줄 모르지만 다윗이 아니니까 그런 평을 할 수 있는데 뭐냐 하면 골리앗을 싸움하기 전에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자부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저들은 할례 받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순진한 사고방식입니까? 아니 그걸 사울의 군인들 중에 또 사울 왕이 모를 리 있어요? 다 알고 있잖아요. 그게 지식이잖아요.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다 알고 있는데 하나님의 지식을 덮어버린 지식이 있어요. 뭐냐 하면 힘없이는 진다는 세상적인 지식이 이쪽 지식, 하나님의 지식을 깔보고 억눌러버린 거예요. 숨도 못 쉬게 눌러버린 거예요. 그러면 눌린 하나님이 가만있겠어요, 가만있지 않겠습니까? 가만있지 않겠지요. “에라, 이것들이 뭘 억지로 덮어?” 확 열어젖혀버리지요. 거기서 대비한 것, 준비한 것이 소년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형들이 있는데 다윗을 얕잡아봤어요. “전쟁하는 데야. 애들 가는 데 아니야. 후딱 집에 가, 집에 가.” 소년 다윗이 보더니만, “이것 게임도 안 되는데.” “네가 뭘 안다고?” “저들은 할례 받지 않고 우리는 할례 받았으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할례 받은 자가 없는 자를 이긴다 했으니까 이깁니다.” “우리 다 아는 소리하지 마. 저리 가.” “그럼 제가 나설게요.” 나선 거예요.

그럼 누구를 완전히, 어른들의 허상, 어른들의 허세를 실질적인 순진한 어린아이,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 못 가요. 어린아이가 어른들의 허상을 다 뒤집어버린 거예요. 어른들은 무엇이 쌓이고 쌓인 거예요.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해도 눈에 보이는 인간이 더 중요하고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발언이 이 세상 살아가는 데 유일한 생존의 힘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나 소년의 입장에서는 하나 거치고 와요. 우리가 저 골리앗처럼 죽어 마땅한 데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유가 뭐냐를 생각해보자 이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골리앗은 이미 허수아비에요. 그리고 블레셋 나라는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를 못 이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있는 민족으로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누가? 소년 다윗이요.

그 소년 다윗이 커서 뭐가 되겠어요? 어른 다윗이 되어 뭐가 됐습니까? 이게 이스라엘의 왕이거든요. 두 번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할 거예요. 왕은 안에 있는 내용은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두 번째에 하는데, 할례부터 먼저 언급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할례 언급하기 위해서 여러분 성경 찾아보겠습니다. 신약의 사도행전 8장 봅시다.

사도행전 8장 29절 보겠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그다음에 나머지는 시간 관계상 생략하고 34절, 38절 보겠습니다.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굽니까?” 이사야에 나오는 말씀을 이야기해주니까, “자기를 가리킵니까, 타인을 가리킵니까?” 그러니까 이사야 본인을 가리킵니까, 안 그러면 선지자가 자기 입을 통해서 나 말고 다른 분을 이야기합니까?

선지자는 단추 구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왔다가 나간 거예요. 나를 향하여 말씀이 왔다가, 세상 말이 아니죠. 하나님의 숨겨진 말씀이 왔다가 내 인생에 대해서 예상 밖의 내가 원치 않는 어떤 다른 현상을 유발하면서 빠져나갔는데 빠져나간 방향이 나를 사용한 하나님 쪽으로 빠져나갔단 말이죠.

그런데 빠져나간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어떤 분이 억울하게 죽는다는 것, 사지에 가는 어린양처럼 희생이 되었다는 그 내용이에요. 그 내용을 하고 난 뒤에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35절입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라고 이야기했어요. 세례입니다.

제가 아까 소년 다윗 이야기할 때 할례 이야기했지요. 자, 할례가 뭐냐, 세례가 뭐냐? 내가 혼자 살던 그 나를 두 동강내리는, 잘라버리는 거예요. 그럼 내가 뭐였다? 골리앗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세례에요. 할례 없는 자, 할례의 의미를 드러내가 위해서 나는 할례 없는 자로서 어디로 건너간다? 할례 있는 자로 건너가는 데 합류하는 거예요. 그 할례 계열에 합류하고 그 노선 변경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에서 이 일을 누가 시작했는가? 아까 8장 29절에 보니까 성령이 빌립더러 했지요. 그리고 끝부분 39절에 “둘이 물에서 올라갈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이렇게 돼 있지요. 내시는 홀연히 자기 길을 갔더라. 이거는 성령이 했다는 말은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한 거예요.

이것은 다윗이 빈약한 사람 된 것은 본인의 죄, 본인의 행동과 아무 상관없어요. 그냥 특혜 입고 선택 받은 거예요. 아무 상관없는 데 본인이 몰랐던 뭘 발견해요? 이거는 죄 지어서 죄가 아니고 죄에서 태어난 죄로 나는 죽어 마땅함을 다윗이 단추에 실 오듯이 말씀이 와서 꿰서 빠져나가면서 아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다윗을 보고 너는 아픈 것은 네 말대로 죄 지어서 아프다, 하는 자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들의 누구냐? 시편 41편에 보니까 그들이 친구에요. 그 친구가 누굽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돼요. 다시 시편 41편에 와보면 9절에,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차버렸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성령의 기능은 영어로 하겠습니다. Blocking, 장벽이죠. 이걸 가지고 제가 강의 처음에 있잖아요. 이게 뭐라고요? 숨겨진 복이 되는 거예요. 블로킹, 장벽을 세워버리는 거예요. 하나의 인간이 환풍기도 되고 통풍기도 되지만 동시에 그 인간이 세상에선 도저히 알 수 없는 블로킹, 장벽이 되는 거예요. 배구에서 블로킹 알지요. 딱 막는 것, 블로킹 기능을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에요. 성도가 누굴 전도하는 게 아닙니다. 블로킹을 드러내면 그게 하나님이 하신 전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잖아요. 일곱 교회가 나올 때 일곱 교회가 뭐냐 하면 블로킹이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아무도 귀 있는 자가 없어요. 달린 귀 소용없어요. 말씀이 통과해서 단추를 통해서 빠져나오지 아니하면 그거는 귀 있다고 하면 안 돼요. 성령 받은 빌립은 귀가 있지요.

그런데 내시는 빌립의 세계에 세례로 말미암아 자기 세계를 절단 내고 자기 세계를 공격한 거예요. 왜? 하나님이 자기를 원수로 보기 때문에. 원수로 봤던 그 조치, 신의 조치를 흔쾌히 내시는 받아들인 거예요. 성령의 역사로. 어린양이 나를 공격한다는 그 공격을 나는 공격받아 마땅함으로 받아들여버리니까 내시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빌립처럼, 다윗처럼 같이 들어와 버린 겁니다. 상주해버린 거예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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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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