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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30407a 울산강의-역대기상(19강) 17장 1절 : 개인의식과 성전자유게시판역대상

20230407a 울산강의-역대기상(19강) 17장 1절 : 개인의식과 성전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17장하겠습니다. 17장 1절부터 15절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내용은 다윗이 자기가 백향목 궁에 거하면서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는 어디 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자기는 백향목 궁에 있는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밑에 있다, 그렇게 나와 있지요. 그러면 다윗의 생각에 자기가 백향목 궁 안에 있으면 오늘날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주시고 모든 일에 성사시켜주신 하나님은 그것보다 좋은 곳에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다윗이 갖고 있었습니다. 초라하다 이 말이죠.

자기는 이스라엘 왕으로 자기로서는 그럴싸한 데 거기에 비해서 우리 하나님 계신 곳은 처한 곳에 있다, 라고 다윗이 하나님께 미안해한 겁니다. 미안해했으면 미안하지 않는 방향으로 하기 위해서 거창한 하나님만을 위한 하나님의 계실 집을 자기가 건축하겠다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나단 선지자와 다윗 두 사람이 이야기하죠. 역대상 17장 1절과 2절에 두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거기에 cctv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현장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는지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3절에 보니까 “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이렇게 나왔어요.

거기 두 사람 밖에 없는데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하나님이 어떻게 아시지요? 질문 자체가 잘못됐습니까? 사람이 대화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아느냐 이 말이죠. 여러분은 이야기하고 싶을 거예요.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시니까 다 알고 있지요, 라고 말씀하고 싶지요. 자,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흔한 오류, 잘못되게 섬기는 것을 다윗이 대표해서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 하나님이죠. 하나님 계신 곳을 다윗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 계신 곳을 다윗이 생각하고 있어요. 왕관을 쓰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계신 곳은 이렇다. 이게 잘못이에요. 이게 사단의 시발입니다. 이게 잘못된 거예요. 다윗이 하나님 생각하게 되면 그 생각으로 다윗 자신이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다. 이게 문제인 거예요.

내가 여기 집에 있는데 아버지는 촌에 계시다. “아하, 날씨가 추울 때 우리 집은 뜨뜻한 데 촌에 계신 아버지는 어떻게 계실까? 아버지 집에 보일러 놔드려야 되겠다. 그것도 귀뚜라미 보일러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말은 뭐냐 하면 자기와 아버지로가 따로 산다는 것을 티를 내게 돼요. 따로 살고 있는 거예요. 촌에 있는 아버지 때문에 내가 뭉개지고 무너지는 일은 없어요. 나 따로 촌에 있는 아버지 따로 되는 겁니다. 이게 인간 대 인간 사회에는 타인을 생각할 때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나 따로 하나님 따로 이게 반칙이에요. 이게 성립이 안 됩니다. 왜 다윗은 자기가 거하는 백향목 궁을 이게 하나님이 계시는 궁으로 왜 보질 못했을까요? 내가 지금 백향목 궁전에 사는데 이걸 왜 내가 산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이 궁에 산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요? 그것은 개인의식 때문에 그래요.

역대상 17장 초반에서 다윗이 무엇이 잘못됐느냐 하면 나는 여기 있고 하나님은 언약궤 있는데 계시다고 나 있는 공간과 하나님 공간을 다윗은 분리시켰습니다. 이게 다윗이 저지른 잘못이고 모든 인간이 똑같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아주 쉬운 예로 제가 하나님께 뭘 드리면 되겠습니까? 시골에 있는 아버지한테 자식이 전화해서 “아버지, 이번 여름에 에어컨 달아드릴까요,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라는 말을 할 때 말은 하는 본인은 아버지한테 효도한다고 생각하지요. 사람 대 사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잘못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해드린다는 자체가 인간에서는 나올 말이 아닙니다. 인간에서는 그런 말을 할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어요. 왜? 본인 게 없기 때문에. 마치 본인 게 있어서 이웃집 할아버지한테 어르신께 해주듯이 하나님께 해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다윗 중심으로 시편 51편도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근원적으로 몰랐던 것이 뭐냐 하면 본인들이 모든 생각이 개인의식부터 출발해요.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앞에 해당 안 되거든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개인의식은 비워버려야 돼요. 개인의식 지우고 뭐로 바뀌느냐? 동승자, 또는 동행자 의식을 갖고 있어야 돼요. 하나님을 생각할 때 나 여기 있고 하나님 거기 있고, 이러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말도 안 되는 것이고 그건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께 뭘 드려야지 하는데 시편 51편에 나오지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뭘 드릴까요? 이게 아모스에도 나와요.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뭘 드릴까요? 수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을 드릴까요? 이게 하나님이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이게 드린다는 게 어떤 경우냐 하면 내 것 따로 있고 하나님 것 따로 있는데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내 것을 가지고 하나님 것으로 이동시킬 때 드린다가 성립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모독입니다.

2인용 김밥을 가지고 두 사람이 소풍을 간다고 생각해봅시다. 2인용이에요. 도시락 안에 김밥 네 줄 있어요. 2인용이니까. 네 줄 있는데 친구가, “내 김밥 너 줄까?” 하면 그 자체가 친구에 대한 모독이죠. “니 김밥? 니 김밥이 있었어?” 니 김밥이 있었느냐 말이죠. 김밥 도시락이 두 개가 아니에요.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하나님 것입니다. 이스라엘 게 아니에요. 뭘 드리고 자시고 할 게 없어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는 자체가 이거는 불신앙적 요소를 본인도 모르게 티가 나 버렸어요. “티 나?” 확 나. 드린다는 게. 선교해 드릴까요, 전도해 드릴까요, 헌금해 드릴까요, 찬양해 드릴까요, 예배 참석해 드릴까요, 봉사해 드릴까요, 착한 일할까요? 주께서는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나한테 줄 게 뭐가 있다고 뭘 드려.

사도행전 17장에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설교한 내용이 하나님은 무엇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친히 주시는 분이라 했어요. 들어나 봤습니까, 이 말씀. 사도행전 17장 25절,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아테네에 신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데 그 신들이 이방신이죠.

여호와가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의 특징이 뭐냐? 인간으로부터 받아 챙겨서 개념이 유지되고 있는 전통적으로 인간 손에 보존되고 있는 그 신들은 인간에게 받아먹는 신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설교한 내용이 오늘날 이 설교를 어디 가서 해야 돼요? 교회 가서 해야지요. 교회 자체가 지금 다른 신을 섬기고 있어요. 인간 것을 받는 신을 섬기고 있다고요. 그런 신은 없어,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동승, 함께 있으면 이게 하나님의 뜻인데 만약에 개인주의의식으로 시작하면 이게 뭐냐 하면 공포입니다, 공포. 무서움이에요. 사람이 혼자 있으면 무서움이 따라오게 돼 있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주 큰 집에 밤중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잠을 잔다고 생각해봅시다. 잠을 자는데 창가에 뭔가 그림자가 비추는 것 같은데 화장실 쪽에서 삐익 문 여는 소리 들리고, 싱크대에 뭔가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들릴 때에 거기 누구요, 이렇게 하겠지요. 그럴 때 반가워서 그런 소리합니까, 무서워서 그런 소리합니까?

신약성경 찾아봅시다. 마가복음 6장 49절, 제가 읽어볼까요.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이렇게 돼 있지요. 그다음에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고 돼 있지요.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이렇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밤중에 물위를 파도치는 바다 위를 걸어오는 걸 보고 유령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유령과 함께 살고 있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 유령은 나 있는 곳에 없어야 되고 유령은 배척해야 되고 우리 있는 곳에 유령은 없어야 되고 우리끼리 독자적인 그러한 집단으로서 폐쇄적 집단을 유지해야 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유령을 얼마나 무서워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밤중에 인기척 없이 복도에 귀신 나타나듯이 퉁퉁 올 때 유령인가 하여 제자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려워 말라, 나다.

이 비슷한 예가 누가복음 2장에 보면 광야에서 목자들이 양을 치고 있을 때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지요. 그때 목자들이 굉장히 두려워했다고 돼 있어요. 성경에. 그런데 천사의 말이 두려워 말라고 했어요. 두려운 경우는 어떠냐 하면 내가 확인하고 내 점검을 마친 내 아는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이 나왔을 때 인간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겁니다.

이런 것이 뭐냐 하면 나 혼자 뿐만 아니고 두 사람이 있든 세 사람이 있든 이 개인의식이란 것은 중심에 누가 자리 잡고 있다? 중심에 내가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사람만 뽑아서 꽃다발 만들듯이 나한테 공격 대상이 안 되는 나를 공격하지 않는 사람, 내가 편하게 맞이할 사람만 따로 부케 만들 듯이 그런 식으로 사니까 이거는 여러 사람 있다할지라도 개인의식 아니라 하지 마세요. 여러 사람 있어도 그건 개인중심이에요. 왜냐하면 중심에 본인이 있기 때문에.

그 사고방식이 오늘 본문 역대상 17장에서 누가 갖고 있는가 하면 다윗이 갖고 있는 거예요. 나는 지금 좋은 백향목 궁에 살고 있는데 우리 하나님은 초라하기 짝이 없고 허접한 그런 천막 위에 계시니까 맴이 아프다는 거예요, 자기 마음이 아프다는 거예요. 그걸 나단 선지자 보고 이야기했다고요. 그 현장에 다른 사람 없었어요. 그런데 그날 밤에 새벽 세 시인지 네 시인지 모르겠는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나타나서 네가 나를 위해서 집을 지어준다면서, 이렇게 나온 거예요.

왜 다윗은,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궁에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생각을 왜 못 갖습니까? 개인의식 때문에 그렇지요. 자기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해서 그래요. 내 중심인데 나는 좋은 것 누리고 있구나. 내 바깥에 멀찍이 내가 있는 경계선 바깥에 계신 하나님께 좀 미안스러우니까 나보다 좋은 걸 드려야 이게 이스라엘 왕으로서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 마땅한 도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오늘날 한국교회에 있는 모든 교인들이. 특히 연세 많은 권사님들, 장로님들. 그럼 목사는? 아이고 목사는 신앙이 없으니까 빼고요. 자체가 신앙이라고 볼 것도 없으니까. 장로님들, 권사님들. 30년, 40년 이무기 있잖아요. 교회 이무기. 푹 절였잖아요. 맨날 매 주일마다 교회 가서 하는 일이 “하나님이여, 주님이여, 예수님이여 제가 무슨 좋은 걸 해드릴까요?” 맨날 해드릴까요 하면서 50년, 60년 다닌 사람이에요. 본인은 벌벌 떨면서. 본인은 쥐만 나와서 바퀴벌레 나와도 엄마야, 이러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을 떠나지 않는 방식으로 함께 있습니다. 우리 이스라엘 하나님. 그런데 왜 다윗은 하나님이 아주 어설픈 곳에 있다고 생각할까요? 그것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은 죽으러 가심, 이걸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같이 껴안고 죽음의 길을 가시는 거예요. 진주의 논개가 임진왜란 때 적장 껴안고 화장실 갔습니까, 놀러갔습니까? 진주성 밑에 있는 남강에 자기 몸을 던져서 같이 죽자고 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껴안고 죽으러 가시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덕분에 잘 먹고 잘 살아서 고맙습니데이, 지금 이러고 있단 말이죠. 자기는 살 궁리 챙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하나님 아무리 하나님이 이스라엘 도와주고 해도 하나님이 가는 방향조차 감 잡지 못하는 이스라엘, 오늘날 교인들. 사람들은 예수 믿고 자기가 멀쩡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게 구약의 사사기도 그런데 사사기는 뭔가 반복이 되는데 이게 뭐냐 하면 자기가 멀쩡할 때는 하나님 안 찾아요. 그런데 자기가 궁지에 몰릴 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하나님 살려달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궁지에 몰릴 때 잘 들어보세요. 첫째는 누가 궁지에 몰아넣는가, 그 사람들 모르고요. 두 번째 뭘 모르느냐 하면,

사사기에서 궁지에 곤경에 궁지에 몰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뭘 모르느냐? 첫째는 누가 우리를 궁지 또는 곤경, 궁지로 몰아세우시는가? 이것 이스라엘 사람들 몰랐어요. 왜? 그들은 무슨 의식을 갖고 있다? 개인의식을 갖고 있어요.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개인의식에 충실한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 오늘날 우리 모습과 똑같다고 보면 돼요. 아쉬울 때 찾는 거예요. 아쉬울 때 쭈여, 하고 찾는 거예요.

그다음에 뭘 모르느냐? 누가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는가? 이건 여러분 아시지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궁지로 몰아세우시는 쪽이 누굽니까? 이스라엘 하나님이잖아요. 그것 때문에 이방사람들, 이방민족들을 주위에 깔아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방민족은 오늘날 같으면 뭐냐 하면 바디프랜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안마기, 250만 원짜리 안마기. 안마의자에 앉잖아요. 누가 안마기 앉아 있는 나의 몸을 압박합니까? 그 안마기 역할을 누가 하느냐? 주변에 하나님 안 믿는 우상 섬기는 자들이 압박을 하는 거예요.

두 번째 뭘 모르느냐 하면 어떻게 해서 우리가 숨 돌릴만한 상황이 되었는가? 이걸 몰라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압박을 당하다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살만하다 할 상황이 되었는가? 사람들은 말합니다. 오늘날 교인들이나 그 당시나 하나님이 도와줬다는 거예요. 땡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준 게 아니고요. 하나님이 죽었어요. 하나님이 희생했다고요. 대신 희생했다. 입다의 딸처럼, 삼손처럼. 삼손도 마지막 죽을 때 죽잖아요.

개인의식 하는 게 아무리 하나님이 도와줘도 이 개인의식이 찌부러지거나 무너질 생각을 안 해요. “하나님, 또 다음에 어려울 때 기도원에서 기도할게요. 다음에 어려울 때 십일조 안 빠뜨릴게요.” 맨날 이러고 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개인의식이란 나 여기 있고 하나님 어디 있고? 저기 있다는 말은 나 있는 곳에는 누구만 있다? 나만 있고 하나님은 저 뒷간 방에 어르신네로 있다가 내가 아쉬울 때 조르르 와서 도와주는 그러한 하나님, 아아 대한민국 하나님, 아아 대한민국 교회 하나님. 그것도 교회라고 다니니 참, 가관이에요, 가관. 그렇게 다녀놓고 10년 다녔습니다, 20년 다녔습니다. 그게 무슨 교횝니까, 절간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미국에 B급 영화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주인공이 악당한테 쫓겨서 옆에 있는 지그재그로 돼 있는 사다리로 막 올라갑니다. 총은 있는데 밑에 악당이 총 들고 잡으려고 따라옵니다. 그런데 마침 주인공의 총에 총알이 다 떨어졌어요. 그런데 악당이 죽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악당본부에서 “걔 왜 죽었어?” 하니까 “총에 맞아 죽었어요.” 이러거든요. 여러분 아직도 감 안 잡히지요.

총에 맞아 죽는다가 우리들 생각에는 뭐냐? 총에서 총알 나와서 죽는 걸 생각하지요. 그게 보통 아닙니까. 두 종류가 있어요. 총알 맞아 죽는 것도 있지만 총 자체에 맞아 죽는 것도 있어요. 이것도 총에 맞아 죽는 거예요. B급 영화의 주인공이 총알이 없으니까 총 자체를 밑에 있는 사람에게 던지니까 그것 맞고 죽은 거예요.

우리가 죽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우리의 죄의 몸 때문에 죽어요. 그리고 성도는 예수님의 몸 자체 때문에 예수님 죽을 때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도 죄 있는 몸이고 우리의 몸도 죄 있는 몸이고.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죄가 나와서 죄가 나를 쏜다고 되는 거예요. 죄가 쏘는 게 아니고 죄의 몸이, 우리가 같이 악당인데 총알이 날아와야 되는데 총알이 안 날아오고 이만한 총신, 총 몸체가 떨어져서 예수님 몸이 떨어져서 함께 죽을 때 비로소 함께 삽니다. 부활되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가 사는데 있어서 우리 나름대로 어떤 요령을 부릴 여지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에게 덮친 그분이 네가 이런 식으로 살라고 구원받으라고 준 게 없어요. 그냥 예수님 몸 자체가 우리에게 덮쳐버렸습니다. 예수님 몸 자체가 덮친 것을 색깔을 의미를 줘서 말씀드립니다. 그걸 ‘피’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의 피, 또는 예수님의 찢겨진 뭡니까? 살이죠. 이 떡을 먹어라 내 살이고, 이 잔을 마셔라 이거는 피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을 압축기 넣어 짜보잔 말이죠. 짜면 나온 게 뭐예요? 피와 터져 나오는 살점이죠. 그걸 내 찢겨진 살과 피를 마시란 말은 동참하라, 참여하라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총신 있잖아요. 몸체가 우리를 덮치는 거예요. 총알 맞아 죽는 게 아니고 총에 맞아 죽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총에 맞아 죽는 것 할까.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첫째 오해는 뭐냐? 하나님 주를 위해서 뭘 해드릴까요? 두 번째가 오해가 뭐냐 하면, “주님, 저한테 가르쳐주세요. 우리가 어떤 요령을 부리고 어떻게 행동하면 우리는 이 죄를 씻을 수 있고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이런 요령 부리는 방식만 배워가는 그 잘못, 이게 두 번째에요. 첫 번째는 뭐라 했던가요? (뭘 해드릴까요) 맞아요. 하여튼 현대인들은 너무 바빠서 두 번째 하면 첫 번째 잊어버리고, 첫 번째 하면 두 번째 잊어버리고.

첫 번째는 주여 제가 뭘 해드리면 됩니까? 복 받기 위해서 한 거죠. 두 번째는 내가 너무나 죄가 많아요. 이 죄 씻으려면 뭘 찍어 바르면 되고 뭘 어떻게 언약을 배울까요, 구속사 배울까요, 십자가 피를 믿을까요, 뭘 하면 될까요, 라는 방식만 매뉴얼, 전자제품 사면 두꺼운 설명서 있잖아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잘 안 읽는다면서요. 그 설명서 알려달라는 거예요. 그게 어디서 나온 오해다? 그게 개인의식에서 나온 오해에요.

다행스러운 것은 그 잘못을 오늘 역대상 17장에서 누가 저질렀어요? 다윗이 저지른 거예요. 다윗이 자기는 백향목 궁에 살면서도 미안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거예요. “나는 이렇게 호사스럽게 하는데 나를 왕으로 만드신 나는 여호와 덕분으로 잘 사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초라하게 비참하게 사시는구나. 세상에 저 천막이 뭐냐.”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다윗아, 내가 천막 하나 보내줘? 내가 천막에 산다고? 네가 백향목 궁에 산다고? 백향목 궁에 너만 사는 게 아니고 나도 살고 내가 언약궤가 천막에 산다고? 나만 천막에 사는 것이 아니고 너도 천막에 살아야 돼.”

천막 사는 하나님, 백향목 궁에 사는 다윗 이 둘을 합치는 것, 이게 동승자, 동행자로 만드는 하나님의 그다음 작업입니다. 개인의식 때문에 나 따로 하나님 따로 있는 이 의식을 하나님께서 일을 벌여서 두 개를 합치는 일을 해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나는 좋은 집에 사는데 하나님은 초라한 데 사는구나. 내가 집을 지어드려야 되겠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어요.

인간의 오류가 나와야 주께서 그다음에 작업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자기의 오류에 대해서 본인이 처리하려 하지 말고 내버려두세요. 오류를 유발케 하는 것은 여러분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오류, 오류 아닌 게 없지요. 다 오류니까.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죄가 발굴되었는데 그걸 주제넘게 지가 그 죄를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운다. 아이고, 그런 되도 않은 그것 겸손 아닙니다. 교만입니다.

내가 쏟아놓은 배설물 내가 치운다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배설물만 쏟아놓으세요. 그게 제대로 된 갓난아이의 모양새입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갑니다. 자꾸 어른스럽게 하지 마세요. 지혜롭게 슬기로우려 마세요. 잘립니다. 그런 사람 이미 벌써 잘렸지요.

다윗은 자기가 어른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이스라엘 왕이니까. 참으로 이스라엘 왕이라면 하나님이 계시는 그 초라한 천막, 그 천막 쪽으로 백향목 궁에서 내 인생은 천막이 적절함을 알아야 돼요. 백향목 궁은 나한테 과분해요. 뭐 했다고 백향목 궁에 삽니까. 다윗은 자기 궁을 천막으로 만들 생각하지 않고 자기는 자기대로 버티고 여호와 계시는 그곳을 백향목으로 수준을 높이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오늘날 교인들이 생각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나 좋고 하나님 좋고. 얍삽하기 짝이 없어요.

자, 오늘 강의 처음부터 말씀드린 건 이겁니다. 다윗이 생각하기를 하나님 위치와 자기 위치가 따로 떨어졌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생각은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성전은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로 결합시키는 그 작업이 하나님 보시기에 성전의 완공, 성전의 완성입니다. 떨어져있는 것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겁니다.

처음에 휘장 있잖아요.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안에 있다 할 때 이스라엘이 처음에 장막 생활했습니다. 텐트 생활했는데 그건 빨리, 빨리 이동하기 위한 텐트 생활이에요. 그러니까 텐트 생활은 현재 있는 그것이 완성형이 아니고 완성형은 따로 있고 거기로 이동하는 중이고 이동해야만 하는 일들이 남아 있어요.

쉽게 생각해서 고린도후서 5장에 우리 몸이 있잖아요.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우리 몸을 장막이라 했어요. 여기서 장막이라 하는 것은 임시 천막이란 뜻이에요. 임시 거주지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임시 거주지라 하는 것은 내가 있는 임시 거주지가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있는 임시 거주지였던 겁니다.

쉽게 하면 우리 몸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천막이라 할지라도 이 천막을 하나님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나님의 열정으로 나는 내 백성과 함께 있으리라는 열정으로 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죄 있는 우리 몸이 거룩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돼버린 거예요.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리고 흙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 몸이 어떻게 나중에 천국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는가? 그 경로, 그 절차, 그 과정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 주도해서 인도해가는 거예요. 인도해간다는 것은 계속해서 이동해간다는 것, 머물지 말고 계속 변신해나가야 되는 거예요. 오늘 마이크 없으니까 마음껏 소리 질러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이크 고장 났답니다. 다시 마이크 될지 안 될지 그건 난 모르겠어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계시는 그 하나님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어서 종의 형체로 왔을 때에 야 우리는 살았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안 돼요. 여기서 나는 살았다는 개인의식을 뭉개버리기 위해 오신 거예요.

주인공이 뉴욕의 낡은 빨간 벽돌집 옆에 있는 지그재그로 돼 있는 사다리로 올라갈 때에 그 밑에 있는 악당이 아무리 봐도 총알 다 떨어진 것 같아. 총알 다 떨어진 소용없는 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 악당은. 총 자체가 지 머리에 떨어질 걸 상상도 못했잖아. 우리는 주님한테 빼먹을 생각을 해요. 주님 어떻게 기도하면 주님 갖고 있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빼먹어서 4기말 암이나 낫고, 아이들 시집장가나 가고, 우리 집 잘 되고 우리 집 옛날처럼 행복하고 아름답게 원상복귀 언제 됩니까? 지금 빼먹을 생각하는 거예요.

빼먹을 생각할 때 된 통으로 뭔가 묵직한 게 떨어지면서 아직도 너 혼자 살 생각하느냐. 혼자 사는 버르장머리는 마귀가 집어넣어준 거거든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특징은 같이 살 생각이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특징이에요. 내가 강남강의 할 때 인간은 고독을 지향한다는 말을 했거든요. 오직 자기 홀로만이 혼자이고 싶어 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한계는 수요일 설교에서 스바냐 2장 15절에 나옵니다. 최고의 자리는 나밖에 없다. 그게 말하나 말하지 않으나 우리 속에는 이것이 이 괴물이 가득 꿈틀거리고 자리 잡고 있어요. 우리 중심에. 네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뭐가 되리라? 하나님이 되리라. 이게 남의 이야기입니까?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보고.

하나님의 계시가 율법이죠. 하나님의 계시, 법이죠. 여기에서 인간을 걸치고 내려옵니다. 인간을 걸치고 오게 되면 여기 인간의 물질적 안목이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와 접합해요. 물질적 안목이 뭐냐? 이제 여러분 감 잡았지요. 다윗이 백향목 궁, 이게 물질입니까, 물질 아닙니까? 물질이죠.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휘장 안에 있다. 휘장, 물질이죠.

물질적 안목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마중을 나가는 게 인간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을 물질적 이스라엘로 간주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끼리의 공동체, 물질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에요. 언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과 일대일 대응이 돼야 유의미한 언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성경에서도 과연 통하느냐? 민수기 22장 26절 보겠습니다. 민수기 22장 24절부터 보고요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질 테니 여러분 속으로 답변해보세요.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민22:24~30)

지금 누구와 누가 이야기하고 있지요? 사람과 사람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사람과 나귀가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런데 발람 선지가가 자기가 타고 있는 나귀가 담벼락에 붙어서 가니까 좁은 길에서 발람은 자기 나귀니까 때린 거예요. 발람이 때릴 때 나귀는 보고 있는데 발람은 못 본 게 뭐가 있지요? 천사지요. 하나님의 사자를 못 본 거예요. 공간에 대한 의식에도 발람은 자기 개인적 의식에서 공간을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물질성이에요.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여기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할 때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한계에 도달하는 이유는, 내가 구성하는 내 중심의 세계에서는 내 눈에 마음에 드는 것들만 소복이 모아서 이게 내 세계라고 굳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제가 주일날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인간은 구성하고 주님은 해체한다고 했어요. 인간은 자꾸 구성을 해요. 자기 세계를. 구성하면서 이것도 하나님 은혜고, 하나님 주신 거고 들었던 풍월은 있어서 좋은 말은 다해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분의 말씀이 들어오기를 원해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덕분에 내가 원하는 눈에 보이는 괜찮은 것들이 내 주변에 수북하기를 원해요. 그러니까 그게 내 덕으로 만든 내 신앙 덕으로 모아놓은 내 축복이기를 원하고 내 가정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한 번 짝대기로 맞아보시렵니까. 도대체 그동안 신앙생활 한 거예요, 안 그러면 누가누가 잘 먹고 잘 사나 시합하려 교회 온 거예요? 누가 더 행복한지 노닥거리고 배틀할 일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죽자고 오신 분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거울 앞에 비친 살아 있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기 한량없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안 늙고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에 가까이 안 하기를 원해요. 이거는 어디까지나 개인주의인데 이 개인주의의 결정적 단점은 뭐라 했습니까? 무섭다 했지요. 앗 유령이다. 공포를 느껴요. 유령과 같이 살면 안 됩니까? 집에 유령이 나타났다. 반갑다, 친구야 하면 안 됩니까? 그러면 무서움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런데 이 집에 나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바람 조금 불고 창문이 흔들려도 무서워서 잠을 못 이뤄요. 나만 있어야 되는데.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이 이야기가 유별난 이야기가 아니고 마가복음 16장 8절에 보게 되면 예수님 무덤가에 갔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보니까 돌이 굴러져 있고, 흰옷 입은 한 청년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 한 청년이 있는데 그 청년이 천사에요. 놀라지 말라, 했어요. 그리고 16장 8절에,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평소에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계시로 얼마나 이야기했어요.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얼마나, 얼마나 많이 이야기했습니까. 다 어디 날아갔어요?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물질 요소가 차게 되면 계시는 모든 것이 소거되고, 소거되지요. 제거되고 뭐만 남는가? 목소리만 남는 거예요. 법은 날아가 버리고 목소리만 남는 거예요. 도로 떨어지지요. 인간은 자기 개인의식으로 도로 떨어집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주님이 이스라엘을 안 떠난다 했지요. 안 떠나면 추가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줘요. 예언이나 율법을 줍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계시가 점차점차 최고의 최후의 완성형으로 다가가는 그 시대가 바로 신약시대입니다. 두 번째 시간에서는 그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은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생각해봅시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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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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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