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17"22-25(이방에게 전도)
Re..행 17:22-25(이방에게 전도)
이름 : 이근호(IP:)
이방에게 전도
2005년 2월 23일본문 말씀: 사도행전 17:22-25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마땅히 신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없었던 사도바울 시대에 노골적으로 신들을 단체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과연 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문제삼지만, 옛날에는 누가 신으로부터 큰 축복을 더 타내었느냐가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뛰어든 사도바울은 아예 말하기를, "너희들이 믿는 신은 있지도 않는 가짜 신이다"고 선언해 버립니다. 이러한 주장은 곧 '당신들의 신'의 논리에 합세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참된 신은 무엇입니까? '사람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는 신'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않는다는 말은, 신에게 많이 바친 자나 적게 바친 자나 전혀 구별두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인식하는 하나님은, '자기를 도와주는 하나님 상'입니다. 결코 '자기보다 남을 더 도와주기를 원해서 믿는 신'은 아니다는 말입니다. 다 신을 믿는 자기 자신이 남보다 더 잘되기 위해 믿는 신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복이 오도록 유도하려면 남들보다 더 애를 썼을 때나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마치 경마장에서 말에다 돈을 걸 때, 다른 말이 잘 달리기보다는 자기가 베팅한 말이 더 힘차게 달리기를 소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개를 경주시킬 때 보면 개 코 앞에 개가 좋아라하며 죽을 힘을 다해서 달리게 만드는 먹이를 달랑달랑 달아두게 됩니다. 개들은 자기들 코 앞에 있는 먹을 삼키기 위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인간들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미래가 전개되기를 원하는 희망을 코 앞에 매달아두고 교회오기 십상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란 경마장입니다. 남들보다 더욱더 힘차게 달리는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더 신경 써주십사하고 교회 나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남보다 타인에게 더 큰 축복을 가달라고 기도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능력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축복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힘든 노동을 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사람들에게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는 하나님상을 제기하므로서 인간과 인간 간의 신앙과 열심 경쟁이 무의미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참된 하나님 상이 여전히 인간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감추어진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은혜를 주십니까? 요한복음 1:18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 중에서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기에 각자 자신의 희망을 담은 신, 자기에게 복이 우선적으로 쏠려들어오기를 고대하면서 믿는 신들이 계속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불교나 이슬람교나 유대교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고 따라서 하나님의 속 마음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참된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셨다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독생자 예수님의 행동 하나 하나만이 참으로 하나님의 진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요 속뜻입니다.
이 사실은 곧 예수님 외에 하나님은 다 엉터리라는 말이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엄연히 계신대로 불구하고 아직도 하나님의 뜻에 모호하다고 주장할 수 없는 시대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즉 성도도 독생하신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더 이상 우왕좌왕하든지, 세상으로 인해 두려워하든지, 불안해할 필요가 하등없다는 겁니다. 독생하신 예수님께서 어디로 올라가셨습니까? 바로 십자가에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서 '다 이루셨다"고 외쳤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은 뜻은 다 드러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피로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희생이 근거로해서 자기 백성에게 무상으로 생명이 주어지는 일을 하셨는데 따라서 오로지 이것만이 하나님의 참 속 마음입니다. 갈라디아서 3: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예수님은 이러한 희생의 마음은 요셉에서도 나타납니다. 요셉의 일생을 보면 자신은 갈수록 더 깊은 곤경에 빠지는데 주위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축복이 크게 번지게 됩니다. 이것은 곧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남을 위한 하나님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용하심을 나타내는 바입니다.
이러한 혜택은 아브라함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아무런 일한 것도 없는 그는 경건함을 얻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그저 주시는가요? 그것은 로마서 5장과 6장에 나와있는 말씀처럼, 이미 인간 세상에 죄가 왕노릇하고 있다는 상황을 전제로 해야 나올 해답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죄의 왕노릇 밑에서 지배받아서 모든 인간이 다 죽음에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상으로, 곧 은혜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의는 마치 해일 덮치듯이 가만히 있는 자기 백성에 덮쳐서 그들을 통해 '의가 왕노릇'하고 있음을 만방에 보이려고 하시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서는 이것을 '의의 종'이라고 합니다. 이 의의 종이 된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걱정할 자격도 없습니다. 이미 그저 영생이 주어졌기에 이 사람은 자신이 '의가 왕노릇'하는 그 공간 안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성도는 이제부터 자신이 잘되는 식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망해도 복음만 전파되면 그것이 곧 '의의 왕노릇'임을 증거하는 운명의 사람이 된 겁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자신을 쓰레기로 취급하는 것도 다 성도들이 복을 받기 위한 조치라는 겁니다. 요셉처럼 말입니다. 결국 참 성도만이 이런 하나님으로 이해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하나님이 의논하신 바에 의해서 영생이 그저 온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어디서 어떤 경우를 만나도 의의 왕노릇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