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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230316b말2장5절(함께 죽음)-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

안양20230316b말2장5절(함께 죽음)-이 근호 목사

열왕기상17장에서 “하나님 믿습니다. 참, 선지자군요.” 이렇게 했을 때, 그 사렙다 과부가 하나님 믿고, 선지자 믿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이 여인에게 믿음의 대상은 지 자식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발악을 하는 거죠. 기절하듯이 하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몰아세웁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왜냐하면 인간은 뭘 믿느냐, 자기 능력을 믿어요. 자기 능력이 어떠한 절망 가운데도 자기에게 살아있는 한 곧 살아있다는 말은 아직도 내가 일어설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로 받아들여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희망이라 하는 것은 이걸 희망이라 하는 것은 대안 없음. 어떤 대안이 없음을 니가 희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아직 먼 대안이 있다는 말은 자기가 약간의 수습해서, 약간의 일어설 수 있는 부시럭 거리는 몸부림 할 수 있을 때, 아직 멀었어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 구석이 되는 겁니다.

정말로 헛 웃음이 나올 지경이 되게 되면 그야말로 자유지요. 자유. 자율이 아니고 자유가 되는 거예요. 웃음이. ‘정말 내 인생이 내게 아니구나! 주의 것 맞구나! 로마서14장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 맞구나!’ 가 되는 겁니다.

이 사렙다 과부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신약에서는 이것보다 더 센 걸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2장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그 다음에 뭡니까? 제물. 제물의 특징은 입을 다문다는 거예요. 제물이 중얼중얼 그건 제물이 아니에요. 망치로 때려가지고 입도 못 열게 콕콕 때려가지고 주둥이 못 놀리게 만들어야 돼요. 꽁꽁 묶어버려야 돼요.

그냥 산 제물이라는 것은 뭐냐, “끝났네. 나는 끝났어! 내 생애는 여기서 끝이 났구나! 오늘이 최후의 나의 날이구나!” 007영화에 보게 되면 007이 그런 위기에 맞이해요. 선반에 묶여있는데 007살인번호 하는 영화에 나와요. 목재를 자르는 그 쇠톱이 007 몸을 가르기 위해서 다리부터 밑에서부터 올라옵니다. 그 순간 마주 보지 않고 화장실 간 사람은 얼마나 놀랐겠어요. 영화 끝났다. 영화 1시간도 안 됐는데 주인공 죽겠구나.

그야말로 누워있다는 것. 꼼짝 못하게 묶여있다는 것. 이게 제물이에요. 제물의 모션입니다. 제물의 태도에요. 그냥 그대로 드려요. 그대로. 철판구이하듯이 그대로 드린다고요. 그런데 여기 열왕기상17장에서는 아주 사렙다 과부가 발악 발악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제물이 들 되었어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엘리야도 발악해요. 엘리야가 발악하기를 20절에 나옵니다. 엘리야가 부르짖는 거예요. 여호와에게.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요번에는 엘리야가 또 그 과부를 대변해서 지가 같이 하나님께 대듭니다.

그러니까 부대찌개 솥있잖아요. 솥에 엘리야도 들어가고, 과부도 들어가고, 아들도 죽고, 다 들어가요. 다 들어가. 그러니까 그 죽음에 들어가는 자격으로 구원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들어갈 때까지 인간은 발악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안 죽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대로 망하기는 싫기 때문에. 그래서 언약이 나보다 세서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언약을 지키는 게 아니고, 언약이 아주 내가 안 떨어지려고 하는 것을 강제로 떼내어가지고 신약성경에 의하면 산 제물로 갖다 바치도록 하는 거예요. 그 제물은 우리 혼자 드리는 제물이 아니고 주님이 들어가셨던 그 현장으로 우리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 현장에 가야 주와 함께 부활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 공간, 아무 장소로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발악 발악해도요, 사실은 우리가 뭔가 몰라서 그래요. 우리는 진작에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에요. 진작에.

남들이 사는 거 보니까 저 사람은 96세 살고,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살아야지. 남들을 보니까 그런데 아까 했잖아요. 사람을 믿지 말라고. 사람은 우리의 구세주가 아닙니다. 어느 인간도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어요. 구세주는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코스로 갔는가를 봐야지요. 같은 인간들이 어떻게 괜찮게 천당 갔다는 이야기 믿지 마세요. 주님이 천국 간 것만 믿으세요. 누구 천당 가고 주기철이고 뭐고, 철이고 금속철이고 간에 믿지 마세요. 예수님만 하늘나라 갔다는 것만 믿으세요.

그래서 엘리야도 그만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줄줄이 따라 들어가게 했어요. 아들을 죽게함으로서 극진히 사랑하는 엄마도 탄식하면서 아들이 있는 곳에 쏟아졌고, 거기에 사렙다 엄마, 아들, 모자를 다 살렸던 엘리야도 여기에 죽음에 참여합니다.

어떻게 참여하는가, 아이 몸에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이게 뭐냐, 엘리야가 보여준 바로 기름 부은 자의 모습. 대신 받는 것. 이걸 안수라고 해요. 안수. 요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레위기4장15절, 레위기에 많이 나와요. 제사할 때마다 나오니까.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지요.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안수 없이 잡는 법은 없어요. 안수가 되어야 돼요.

열왕기상17장에 엘리야가 아이에 세 번 펴서 몸의 일치를 하는 거예요. 왜 하느냐 전부 다 마땅함에 동참하는 거예요. 동의하는 거예요. 죽어마땅함에 동의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나도 같이 죽어도 합당합니다. 동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안일하게 쉽게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그냥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죽음 안에서 우리를 구원합니다. 죽음 안에서. 나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하는 조건하에 우리를 구원해요. 그런데 죽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강제로. 내가 가장 귀한 것 따라서 같이 죽음에 들어오도록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발악 발악하는 겁니다. 사람은 “약간은 희망은 줘야지. 이게 뭐야? 이게?” 하고 난리 치는 거예요.

내 모습의 마지막 모습은 발악하는 모습이에요. 그걸 어제 수요일날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적어볼게요. ‘자기를 존중하는 자는 분노한다.’ 제가 이리 하면 어떤 사람은 “늘 웃고 있지요.” 그 내면에는 과연 그럴까요. 내면에는 항상 분노하고 있습니다. 건드리기만 해봐라. 죽여버린다. 자기를 존중하는 자의 분노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12장에서 자기를 무시하라, 멸시하라, 하지요. 자기 자신을 멸시하라. 미워하라. 불가능합니다. 베드로도 안 되는데 우리가 뭐 되겠어요.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강제로 미워하지 못하는 것을 미워하는 자리에 강제로 납치하듯이 끌어당겨버립니다. 끌어당겨버리면 우리는 격렬한 반발을 하지만 반발보다 잡아당기는 힘이 강렬해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

사랑은 효과가 있어야 되잖아요. 효과가 있으려면 내가 하는 사랑은 효과 하나도 없어요. 그건 상황 따라서 웃다가 울다가 난리도 아니에요. 그런 사랑은 값싼 사랑이에요. 사랑도 아니에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해결 났음을 통보해줄 때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혜택 그게 사랑이에요.

어처구니없는 혜택. 어처구니없는 혜택. 이걸 제목으로 삼아버릴까. 더 멋진 말은 터무니없는 용서. 예상한 용서가 아닙니다. 주여,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이건 예상한 거고, 이 용서 말고, 터무니없는 용서. “됐다. 너 죄 없어. 됐다.” 우리가 돼지고기라면 뒤짝에 합격! 도장을 찍어요. 도살장에 푸른색 도장으로 합격을 찍었을 때에 우리는 그냥 허허 웃지요. 그냥. 왜? 합격되어야 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때 이걸 사랑이라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준 사랑은 이유가 없어요. 왜? 창세전에 결정됐기 때문에 우리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어요. “합격이라니까.” “왜요?” “묻지 마! 그냥 합격이야.” 그냥 합격이라. “누가 저를 도와줬는데요?” “알고 싶어?” “예” 로마서8장에 나오지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대신 기도함으로, 우리를 위해서 따로 기도해주신 분이 계셨던 거예요. 성령께서. “그런데 성령께서 기도한 대상이 왜 하필이면 납니까.” “그건 니가 몰라도 돼. 니를 찍었거든.” 내가 니를 찍었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뭘 하면 됩니까. 뭘 안하면 됩니까.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요. 그게. 그냥 니 하던대로 그냥 살아. 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그게 의미가 없어요. 살다 그냥 죽으면 돼. 아무 의미 없어요. 계획 잡는 거, 목적, 기대, 그게 다 한꺼번에 무산되지요.

심지어 요한일서에서는요, 어렵게 써놨어요. 뭐냐 하면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은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해놓고는 그런 사랑을 받은 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안다. 이렇게 했어요. 이게 뭐예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을 우리가 안다. “그러면 제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물으면 그건 성령이 와서 안다는 거예요. 일서4장에. 이 말은 뭐냐, 내 내부적인 것은 건드리지 않아. 내 내부에 이런 자질, 이런 생각, 건드리지도 않아요. 성령도 외부적이고, 사랑도 외부적이고. 외부적이 와서 그냥 나를 폐기물 처리에 보면 크레이너 와가지고 딱 집어가지요. 그냥 집어서 잡아당기는 거예요. 폐지인줄 알면서 그냥 집어가는 거예요. 그 많은 폐지가 있음에도, 쓰레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가져가는 거예요.

가져가면서 성도는 그걸 알지요. 올라가서 매달려가면서 보니까 다 쓰레기라. 골프치는 쓰레기도 있고, 장관질하는 쓰레기도 있고, 재벌된 쓰레기도 있고, 어쨌든간 쓰레기에요. 쓰레기에서 너만을 건져낸 거예요. 택해서 건져낸 거예요. 그래서 가끔 크레이너 와가지고 다시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려요. 쓰레기하고 섞여서 돈 번다고 헤헤 거리거든요. 어깨 무거워서 피곤함으로 축 쳐져와가지고. 또 쓱 꺼집어내고. 말씀이 “쓰레기 봤지? 오늘 죽여줄까?” “예” 내일 또 쓰레기 속에 집어넣고. 그렇게 하니까.

열왕기상17장22절에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의 통로지요. 전달해주지요. 하나님이 살렸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엘리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말씀이 진실한 줄로 알겠습니다.” 이게 바로 그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딱 엘리야 시대 때 사렙다 과부에게만 주어진 거예요. 특화된 거예요.

왜냐하면 레위언약이 작동하고 작용하는 이스라엘에서는 항상 이스라엘은 선택이란 요소를 잊어버리면 나라가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선택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선택 중에 또 선택. 선택되었다고 우기는 것을 피하고 또 새로운 선택에 나서서 언약을 그 현장에서 인간이 죽어 마땅할 장소를 물색하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리고 난 뒤에 뭘 보느냐, 본문 보기 전에 더 들려야 돼요. 이스라엘 역사가 그렇게 해요. 시편141편2절, 이것이 다윗의 시로 되어있지요. 시편141편이. 그런데 교회사에서 유명한 시가 되었어요. 성 프란치스코라는 사람이 있어요. 수도사. 새들과 노래한다.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죽을 때 시를 외웠습니다. 그래서 유명하게 되었어요. 천주교에서도 유명하고. 기독교도 유명한데. 2절,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이게 레위언약이에요. 이 시편141편 누가 했습니까? 다윗이지요. 누구지요? 왕이지요. 왕이 다윗이 기도하면서 내일까지 산다. 모레까지 산다, 가 아니라 기도하는 그 순간이 늘 제물이 되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저녁 제사의 제물로서 자기가 드려지는 거예요.

사실은 제사장이 해야 될 것을 누가 하지요? 왕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점차 왕되시는 분이 오신다는 것을 가까이 전에 보다 더 가까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가까이 가면서 이스라엘 역사는 그만큼 무르익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가.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망해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선택 중에 선택이니까. 남은 자 개념이지요.

이스라엘 자체가 남은 자인데, 남은 자를 계속 남은 자를 깎아나가는 거예요. 남은 자 중에 남은 자. 그 남은 자의 남은 자 깎고 최후의 남은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이스라엘이지요. 야곱이고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시니까 어떻습니까. 진짜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국에 안 넣어주려고 애를 쓰시는 모습이지요. 얼마나 애를 썼으면 부자가 천국가는 게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그 뜻이에요. 어떤 경우라도 들어올 수 없는 자가 들어오는 경우는 일체 주께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천국 들어오는 것은 그건 용납하면 안되니까. 마귀와 끊어내야 되거든요. 마귀로부터 마음가짐을 끊어내야 돼요. 끊을 수 없어요. 그럼 죽어야 돼요. 끊을 수 없으면 죽어야 되고.

죽음 속에서 새로운 분으로부터 안수 받아야지요. 안수라 하는 것은 전이. 쉬운 말로 이전하는 것. 이쪽을 이쪽으로 이전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은 우리의 죄를 주께서 가져가고, 예수님이 다 이루심을 우리에게 이전시키는 거예요. 주선하시는 분이 누구냐, 성령. 성령세례가 물세례보다 훨씬 위에 있지요.

물은 그냥 찍어 바르는 거지만, 성령은 효과적으로 둘을 하나로 뭉쳐버려요. 같이 있게 만들어요. 왜 같이 있는가? 서로 이전하라고. 죄는 이쪽으로 이전되고, 의는 이쪽으로 이전되고. 예수 안에서 의인되게 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세례로 오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이 오셔서 이걸 하는 거예요. 성령은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님의 영이지요.

그 예수님의 하신 일 가운데서 구약 전체가 다 포함이 되어야 돼요. 이 구약 전체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안수하는 게 있지요. 안수함을 예수님이 다 이루어서 누구의 자격으로? 제사장의 자격이 아니고 왕의 자격으로. 왕은 제사장보다 더 포괄적으로 완성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왕이 되었다는 말은 자동적으로 모든 제사기능이 완성이 되었다는 뜻이에요. 제사가 완성되지 않으면 왕에게 죄사함의 능력이 없습니다.

하여튼간에 여기서 141편2절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가 되게 한다. 이리 되어있지요. 그렇다면 요렇게 보시고 오늘 본문 들어가지 마시고 요한계시록을 한 번 봅시다. 요한계시록5장8절,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이게 원래 향단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제사장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향을 들고 간다는 말은 그 향이 타야 되잖아요. 타는데 불이 필요하고, 그 불은 제단불에서 들어와야 돼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죽음을 통과한 자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받으시는 겁니다. 왜그러느냐 하면 그 기도가 멋있는 기도라서 그런 게 아니고 성도는 누구와 함께 있느냐,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니까요.

요한계시록1장에 보면 예수님 자체가 성전의 설계도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 안에서 성전이고, 예수님 그 성전 전체가 예수님이니까 그 안에 성도가 놓여있는 거예요. 그래서 촛대도 있고, 그 안에 일곱교회가 있고 다 있어요. 그 향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자기 기능을 자기 기능이 어떻게 이 현실세계에 확산되고 퍼지는가, 그걸 요한계시록을 보여주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는 성도가 분명히 숨을 쉬니까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주님안에서는 세상에서는 죽고 주님안에서는 향으로 향기를 날리는 사람으로 살아있는 걸로 그렇게 평가를 해버려요. 평가를 해버리면 어떤 논리에 도달되느냐 하면,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이 주의 일이 되어버려요. 성도가 하는 일이 주의 일이에요.

여기서 우리가 새로운 주제로 나아가 봅시다. 새로운 주제. 구약 성경은 어떻게 해석하느냐, 보통 인간들은 구약 성경은 문자로 되어있지요. 글자로 되어있지요. 글자로 되어있으면 인간들이 글자를 볼 때, 글자를 통해서 뭘 끄집어내느냐, 개념을 끄집어냅니다. 이 끄집어낸 개념을 가지고 자기 행동을 모두 다 적용을 시키고, 적용을 시킬 때 어떻게 시키느냐 하면, 옳다, 그르다, 로 적용을 시킵니다. 인간들이 문자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성도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성전되신 성전안에 있다면 구약 해석은 신약에서 해석되어야 돼요. 완성차원에서 해석을 하게 되면 해석은 뭐가 되느냐 하면 성도의 삶이 돼요. 성도의 삶. 문자가 아니고 삶이 되어버려요. 성도는 뭐와 마주치느냐, 우연적 경우들을 접하게 돼요. 우연적 경우입니다. 우연적.

예상한 게 아니에요. 모든 우연적 경우에요. 우연적 경우를 했을 때에, 우연적 경우를 맞이했을 때에 개념을 끄집어내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 대한 성도가 보여주는 반응이 곧 성경해석이 되도록 그렇게 되어있어요. 왜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까요.

이리 생각하시면 편해요. 예수님이 하나의 거대한 배인데, 이 배가 아래쪽에 유리로 되어 투명하게 있다고 봅시다. 그 배 안에 어린애들이 초등학생들이 그 배 안에 있다고 칩시다. 어른도 타고. 제일 안쪽에 있으면서 투명하게 되어 있으니까 배를 타면서 제일 안쪽에 보니까 바다속에 여러 가지 물고기들이 유리판을 맞대고 마주쳐 보이잖아요. 그럼 애들이 가만히 있지 않지요. “와! 저건 오징어다. 상어다. 저건 돌고래다.” 할 때에 그 반응이 있잖아요. 반응.

반응이 성경해석이 된다니까요. 예수 안에 있으면서 세상과 마주치는데 그 마주침이 애들 눈에 그게 오징어가 올지, 미역이 올지, 문어가 올지, 갈치가 올지, 가자미가 올지, 애들은 몰라요. 그냥 유리판에 보이는대로 아주 쾌활한 반응만 나타낸다 말이죠. 쾌활한 반응이.

그러니까 이게 책 들고 신학 공부해서 성경 해석되는 게 아니에요. 그럼 누가 이렇게 했는가, 바로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약에 오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개념으로 성경을 해석해 온 겁니다. 책 펴고 연구하는 거예요. 연구하면서 갈라디아서3장, 2장에 나오는데 다시 해봐야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거기다가 자기의 행함으로 만나요. 율법을. 행함을 만날 때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문자로 했을 때는 또는 행동을 할 때 적용할 때 뭐로 했습니까? 이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그런데 성도는 “와! 야! 이거 감사할 일이네. 와~ 이거 기쁘네. 아~ 저건 슬픈 일이네.” 예상하는 감정이 아니고, 예상 못한 감정이, 신선한 감정이 나오지요. 새롭고 신선한 감정.

그런데 이건 뭡니까? 미리 딱 예상을 해요. “하나님, 제가 바르게 살겠습니다. 말씀 연구해서, 탐구해서 하나님 보라는 듯이 차카게 살겠습니다.” 나는 차카게 살겠다. 차카게 이리 써요. 나는 차카게 살면 하면 된다. 조폭 문구거든요. 나는 차카게 산다. 하고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른가를 두고 딱 마음에 준비를 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QT들어갑니다. 정숙있게 묵상의 시간 들어갑니다.

아침에 QT노트 펴놓고 읽고, 오늘 계돈 타야 되는데 되겠십니까? 안되겠십니까? 오늘 아 수능있는데 어떻게 잘 성적대로 나오겠십니까? 실수해서 한 줄 다 내리써가지고 다 망치겠십니까? 선악체계지요. 선악체계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 율법사들이 성경 율법해석이 굉장히 발달한 거예요.

얼마나 발달했는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간다 할 정도로 인간의 한계점을 찍어버렸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해서 모든 것에서 항상 어느 구석을 해도 이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고. 기준으로 인간이 옳고 그른데 옳다는 것도 행할 수 있고, 그르다는 것도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그 짓을 안 할 수도 있고 그렇게 결정한 거예요.

그런데 어제 수요일날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진짜 성령에 의한 계명에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속아넘어가는 짓이에요. 배후에 악마가 계명을 타서 인간을 속인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했지요. 내가 그렇게 마귀한테 그런 식으로 속아넘어갈 줄은 누가 생각하겠어요. 자기는 순수한데요. 사도바울은 사도되기 전에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에요. 악마의 속임수라는 것을 전혀 예상 못했어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죄라는 그 리스트, 그 내용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 믿는다는 그 이단을 척결하는 것이 하나님 믿는 가운데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충성심이 악마에 대한 하나님의 적편에서 최고의 적으로서 살았던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사실을 이건 속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했겠어요. 성령 받고 난 뒤에 그걸 알게 된 겁니다.

요한계시록5장8절에 나오는 그 내용이요. 그 이십사장로들이 다 순교자들이에요. 성도들도 그 뒤를 줄줄이 소시지처럼 따라가는 사람들이고, 주어진 상황이 있잖아요. 그 당시 요한계시록 주어진 상황이. 그냥 편하게 안일하게 예수 믿는다는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믿는다는 용납하는 세대가 아닙니다. 권력과 협상하고 타협하지 아니하면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그런 세대였습니다.

그럼 이제 많이 돌아다녔으니까 돌아올 때 됐겠지요. 말라기2장6절 봅시다.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그들이 제사를 안드렸습니까? 제사를 드렸잖아요. 진짜 똥을 드렸습니까? 아니지요. 아니 제사드리면서 흠있고 이런 걸 모르겠어요? 알지요. 평소에 행위 자체가 삶 자체가 꼼수가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이 제사법을 꾸준히 하기만 하면 우리가 고대했던 메시아가 우리를 도우러 오신다. 그것으로 곧장 밀어붙이자. 이렇게 한 거예요.

2장9절에,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리 되어있지요. 방금 유대인들이 구약을 해석할 때 하는 방법을 한 번 적용시켜 봅시다. 성령 없다고 치고. 여러분한테는 너무 안되는 일이지만 할 수 없어요. 성령 없다고 치고. 너무 안되는데. 조금만 참으세요.

자, 여러분들이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제대로 신앙생활 잘하나를 보이기 위해서, 딱 성경을 봤는데, 말라기2장9절이 나왔어요.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레위기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 사람들에게 치우치게 하였음으로 내가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리라. 이리 되어있지요.

그러면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했다고 딱 봤을 때, 여러분들이 성경을 덮고 한 번 생각해 보는 거예요. ‘내가 주의 길을 지키지 않은 경우가 과연 있었겠는가, 요모조모 따져봐도 없어요. 왜 없겠어요? 자기는 선하니까요. 자기는 지은 죄는 있지만 옛날에 회개해가지고 그 처리 다 했기 때문에. 자기는 아무 문제 없어요.

5절, 6절에는 메시아가 와서 지킵니다. 메시아가 와서 레위언약을 지키면 그가 나와요. 그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불의함이 없느니라. 그는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사람을 죄에서 떠나게 했다. 메시아거든요. 메시아인데, 이걸 메시아 없이 문자로 개념을 보는 사람 같으면 6절과 9절을 딱 비교하면서 어느 편에 서고 싶습니까. 6절 편에 서고 싶지요. 불의함이 없어 싶지요. 그러나 인간한테는 이게 해당이 안돼요. 모든 인간은 9절이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아까 그 이유를 설명할게요. 이런 게 좀 어려운데, 왜냐하면 이게 모든 상황이 우연이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상황은. 내가 정직하고 착한 것을 확인해주고 보장해주는 일들만 나타나지 않아요. 우리는 내가 착하다고 간주하면요, 착함을 억지로 밀어붙입니다. 그러면 주어진 상황을 내가 골라요. 저거는 내 탓아니고, 내 탓 아니고,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는 비겁하게 살아가요. 항상 비겁하고 피해버리고 내가 선함에 유리한 것만 찾아다니면서 내가 나는 선하다. 훌륭하다. 나는 복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그 쪽으로 자꾸 자기 자신을 조작해내는 겁니다.

그걸 어제 수요설교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연출. 연출은 나의 역사, 인생사가 연출입니다. 연극배우들이에요. 인생이 연출한 것밖에 없어요. 문제는 나의 연출과 타인의 연출이 충돌한다는 사실이에요. 그 때는 화가 나는 거예요. 니가 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우는 거야? 응? 그런 유명한 말이 “너는 왜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최근에 이런 사건이 있었지요. 정명석에게 속아서 했던 그 사람이 정명석이 자기를 비참하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바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거짓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강의 설교시간에 한 적이 있어요. 낮 설교시간에. 정신과 의사한테 갔다가 했다는 이야기. 내가 죽을뻔했다가 돌아와서 큰일날뻔했다고요. 큰일날뻔했다. 아이구 식겁했다. 이런 거요. 넘어갔어야지. 그 식겁하지 말고 도대체 망함이란 무엇인가? What is 망함. 망함이 무엇일까. 넘어갔어야지요. 넘어가서 내 힘으로 못 돌아왔어야지요. 아~, 그게 레위언약이거든요.

내가 믿으면 내가 철회가 가능해요. 좀 해보고. 야, 위험하다 싶으면 빼자. 빼야 돼! 니가 정통 신학이 아닌 곳에 빠졌구나! 빨리 빼라. 하면 빨리 뺄게요. 쓱 빼는 것처럼. 내 힘으로 뺄 수 없는 곳에 가세요. 이건 내 힘으로 믿은 게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내가 뭔가 조작을 해서, 내 심리를 내가 조작을 해서 했다면 조작한 주인공이 나기 때문에 내가 그 조작을 조작해서 내가 빼낼 수 있어요.

아따, 식겁했다. 자칫하면 지옥갈 뻔 했네. 이렇게 하는 자체가 지옥가고 있는 거예요. 진짜 천국가는 사람은 “아이구, 한 번 온 천국을 내 힘으로 밀어낼 수 없네.” 이리 되어야지요. 그리 되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게 바로 메시아의 세계지요. 내가 메시아를 믿으려고 애쓴 게 아니고 오직 그분만이 행한 곳에 내가 행하지 않았는데 그분만이 행한 것에 내가 거기에 빠졌다는 사실이에요. 우물에 빠지듯이. 깊은 우물에 빠지면 못 기어나옵니다. 그 우물에서는 예수님이 행한 것만 나한테 상황으로 벌어지게 되어있어요.

이런 논리가 신기한 논리입니다. 내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십자가 죽으신 그 분께서 의도적으로 유발한 상황이다. 그러면 식구가 뒤에서 뒤통수 막 때리면서 정리차려라! 인간아! 니는 과거에 안그랬었었잖아! 왜 그래? 니 어디에 미쳤어? 어디에 미쳤어? 니는 얼마든지 니 자유와 이성과 판단력으로 니 깨끗함과 정직함으로 좋은 성과와 결과를 낼 수 있단 말이야. 그런 자유로움을 니가 왜 어디 미쳤어? 니가 왜 포기해. 개선하고 발전할 수 있는데 왜 니는 접냐! 인간아! 언제든지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는데. 발전할 수 있는데. 그걸 왜 접나. 발전한다는 그게 우리의 희망이야.

얼마나 그들 입장에서는 건전한 충고지요. 하지만, 건전한 충고는 자기가 자기의 선악이 이미 기준이 되어있어요. 그거 일방적 판단입니다. 좋은 것만 뽑았어요. 비겁하게. 딴 데는 눈 감은 거예요. 자기의 평판 좋지 않은 것은 눈을 다 감아버렸어요. 제켜 버렸어요.

2장7절에,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메시아가 무슨 모습으로 온다? 왕인데도 이 땅에 올 때는 제사장의 모습으로 오셔가지고 성도에게 말라기2장 상황을 우리에게 반복시켜 버려요. 21세기에. 우리가 살아있는 현장에. 말라기2장이 죽지 않았어요. 하나의 상황으로 살아있어요.

말씀이 하나의 상황으로 현실화 되었어요. 우리가 말씀의 상황을 니가 만들어라가 아니라 예수님이 만들어서 말라기2장 상황 속에 우리를 여기에 놓이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그래놓고 말라기2장2절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 이것을 바리새인적인 해석을 해보세요. 내 이름을,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 사람은 저의 반에서 누가 일등하겠어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겠지요. 바리새인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데 일등입니다. 누구보다도 바리새인보다 나은 자가 없어요. 최고로 나은 자에요. 그래서 바리새인이 마귀 자식 아닙니까.

요즘 교회와서 말라기 보고 ‘아, 말라기 이런 말씀있었네. 아이구, 내가 생각해보니까 여호와 이름을 영화롭지 않게 했구나! 그래, 영화롭게 해야지’ 맨날 그래봐야 바리새인 시다바리밖에 안돼요. 바리새인 뒷줄밖에 안돼요. 바리새인 지옥가는데 따라 지옥가는 거예요.

모든 말씀은 일단 어디를 경유해야 되는가, 예수님을 경유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말합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 못 믿어요. 뭐냐, 예수님의 죽은 자리에 합류해야 그게 믿음이지요. 예수님의 죽은 자리에. 오늘 첫째시간, 둘째시간에 계속하는 것이 그거에요. 합류해야 돼요. 어떤 수로 합류합니까. 우리는 좋게 좋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말로 하고 싶어요. 안다치고 싶어. 주님이지만 평생동안 나의 일구워온 이 역사에 흠집이 나는 것은 나는 지독하게 싫어요.

마치 사렙다 과부같아요. 못 먹어서 자살은 하지만, 그렇다고 내 인격마저 모독하지 말라. 엘리야야! 이런 꼴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모자간에 죽으려고 했는데 새삼 하나님이 죽였다는 거예요. 안 왔으면 그 날밤 죽었어요. 마지막 만찬 먹고 죽었어요. 꼭 우리 같아. 어제부로 죽었는데 살려주니까 나의 가치 내놓으라는 식이에요.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에요.

주님은 이 레위기를 할 때,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십자가에 예수님 혼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끄잡아당겨서 십자가가 뭔지를 알려준 사람과 함께 다시 말라기 말씀이 아니고, 말라기 상황 속에서 말라기 말씀을 보게 하는 거예요. 말라기2장을 보게 하는 거예요. 우리의 삶속에서.

성경 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성경이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보게 하시면서 예수님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다 이루었는가를 매일같이 우리로 하여금 부딪치게 하고 만나게 해주는 거죠.

자, 끝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로마서12장1절 다시 한 번 되새기겠습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하나님에 드리는 산 제물이 되지요. 우리의 저녁 기도는 마지막 최후의 제사가 되게 만들지요. 하나님의 제사의 기도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억지로 하면 율법되겠지요. 억지로.

그런데 제사가 되려면 혼자 장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내 모습도 스냅 찰칵! 찍어서 위로 찌고 아래로 찍고, 장하다. 나야! 이런 식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함께 포개진채 누웠을 때에 그야말로 막달라 마리아의 주님이 준 사랑을, 사랑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잖아요.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겁니다. 주님, 제가 저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인공 아닙니다. 여고때 찍은 앨범 사진에 웃음찍고 45도 각도 친구와 찍은 거. 그 때 제가 주인공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마저 주의 일입니다. 하는 것을 매일 늘 앨범 보고 있지 않잖아요.

부딪히는 모든 일상생활 속에서 그걸 느끼게 하는 거예요. 컵을 보고서도, 그림도 보고서도 그렇고, 가짜 꽃이지요. 모든 매사가 일어나는 것 속에서 없는데 왜 그게 있었지. 어? 당신 없는데 왜 있지? 이런 거.

모든 사이에 있어서 하나가 주님의 가져다준 선물로 솜씨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말라기2장2절의 완성입니다. 네가 나를 이 주님을, 너 대신 희생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습이에요.

그게 바로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러니 이건 하는 게 아니고요, 가만히 있어도 상황이 부딪히는 거예요. 주께서는 우리를 이 쓰레기장에다가 내일 되면 또 보냅니다. 쓰레기장에 또 보내면서 쓰레기라고 하면서 어느덧 2시간 이야기하다보니까 본인이 쓰레기에요. 똑같아요. 다른 거 없어요.

아이고~ 부러워라. 부러워라. 또 댁의 아들이 서울대학 들어갔다면서. 부러워라. 우리 애는 뭐하노. 집에서 놀고. 누구는 취직되어가지고 독일에서 아르바이트한다는데 나는 뭐야. 이런 식으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희생해야 되고 믿어야 됩니까.

갑자기 화를 내고 이렇게 분개하고. 그럼 주님이 “이리 와! 너를 사랑해줄게.” “미안합니다.” 항상 주와 함께 동행하는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 말씀 앞에 있다는 자체가 당연한 걸로 여겼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물로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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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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