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0324b 다니엘8장 27절(도살장에 합류)-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30324b 다니엘8장 27절(도살장에 합류)-이 근호 목사
다니엘 8장 27절 보겠습니다. 다니엘 8장 27절에 나오는 다니엘에게 일어난 일, 아까 우리가 공부한 바와 같이 다니엘이 아프다는 것은 그냥 개인적인 의견이죠. 개인적인 의견은 그다음에는 이렇게 또 수정이 돼요. ‘아팠는데 나았어요. 뭔가 나았는데 아팠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게 한결같지 않죠. 왔다갔다 하죠. 그렇죠?
그러니까 ‘다 이루었다’가 아니죠, 개인적인 의견은. ‘내가 아팠는데 병이 나았어요.’ ‘너 아픈 거야, 안 아픈 거야?’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다 이루었다’를) 설명할 수 없죠.
그래서 지금 다니엘 8장 27절에 나오는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할 때, ‘다니엘이 혼절하여서 수일을 앓다가 잃어났다’ 이것은 이제 다니엘에게 계시가 주어졌죠. 다니엘이 계시 받을 때 예상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예상 못했습니다.
항상 하나님 일은 어떻게 한다고요? 우리의 관찰할 수 있는 그 관찰을 부수고 쳐들어오죠. 내가 관찰해서 얻었던 획득된 내 인생관을 가만 두지 않고 그걸 부수면서 오죠. 왜 부숴야 되는가? 그것은 온전한 의가 아니기 때문에.
계시를 안다는 것은 이미 계시 아는 내가 계시를 품고 있어버리면, 말씀으로 시작해야 될 걸 갑자기 계시를 아는 복음을 아는 내가 스타트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완전히 가짜죠.
방금 이 이야기가요. 그동안 십자가 마을이나 우리 교회나 소위 ‘복음에 대해서 안다’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뭐냐 하면 복음에 의해서 ‘나’가 잃어버려져야 될 텐데 복음을 모르던 나가 복음 듣고 복음 아는 나가 된 거예요. 그럼 나는 어떻게 됩니까? 나는 멀쩡해요.
그릇이 이렇게 있다면 다른 건 좀 채워졌는데 복음 이 부분이 모자라다는 거예요. ‘이걸 마저 채우고 마저 채우면 온전한 나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이걸 노리고, 아까 말한 대로라면 이걸 원한 거예요. 복음을 모르는 내가 복음을 알게 되면 나는 온전하게 이제는 마지막 심판대를 통과한다, 이걸 노리고 온 사람이 이제 복음 아니까 헤헤거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아니다’ 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다 떠나니라. 이걸 설교시간에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는데 쉽게 말해서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자는 말씀에서 멀어진다].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자는 말씀에서 멀어지고 반대로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벌써 말씀에게 끌리고 있는 상태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왜 다니엘에게서 아픈 대목을 끄집어냈느냐 하면 역사라는 것을 인간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역사라는 것을. 인간이 만들어냈는데 ‘인간이 만들어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여기에 p.238에 이렇게 아주 쉽게? 이야기했어요. p.238 밑에서 6번째 줄에, 어느 정도로 쉬운가 한번 들어보세요.
“흐름의 연속성을 관찰자가 정지시킬 수가 없는데 이럴 경우에 윤곽만 포착된다.” 아~주 쉽죠. “윤곽 면에 포착되지 않는 유동성은 우리 인간 손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물처럼 사라져버린다.” 아주 쉽죠. “동사로서 포착한 것은 운동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윤곽이다. 곧 잠정적 계기이다.” 쉽지 않습니까.
“항상 일치를 고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변화되어지는 주체는, 자기가 벌이고 있지 않는 변화 속에서 다른 주체가 벌이는 변화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시도하며, 그 변화에 이미 말려든 셈이 된다. 고정된 주체가 빠져나가는 주체를 포착해낼 수가 없는 동시에, 그 변화의 주체에 의해 도리어 진위를 판단 받게 된다. 곧 계시에 접근하는 순간이 곧 계시로부터 심판받는 순간이다.” 하아. 아~주 쉽습니다, 이야기가.
이 이야기가 p.236부터 p.238 중간까지 나오는, ‘70이레가 뭐냐’에 대해서 세계 대가들, 소위 히브리어 헬라어에 능통한 대가들, 성경 원문에 능통한 대가들이 이 70이레를, 이레란 7이니까 곱하기를 하는 거예요. 70×7=490이잖아요. 490년을 어디서 어디까지 잡아서 490년이라고 할 것인가 견해를 쭉 소개한 거예요, 견해를.
최만수, 칼빈, 카일(C. F. Keil)과 몽고메리(J. A. Montgomery), 헹스텐베르그(E. W. Hengstenberg), 하젤(G. F. Hasel), 에드워드 영(E. J. Young), 최영헌, 간하배, 옛날 선교사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견해를 뽑아서 제가 쭉 올려놨어요. 이게 다 틀렸다는 거예요. 이게 다 틀린 거예요. 왜? 흐름의 연속성은 관찰자가 정지시킬 수 없기 때문에.
흐름의 연속성을 관찰자가 정지시킬 수 없어요. ‘잠깐만 스톱! 잠깐만 기다려줘요!’ 이럴 수가 없어요. 흐름 속을 파악하려면 같이 흘러가야 되는데 인간의 주체는 같이 흐를 수가 없어요. 흐르면 자기가 어지러워서 자기가 스톱이 안돼요. 정지를 할 수 없어요.
그럼 인간은 뭐냐? 흘러가는 것을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딱 스톱을 시켜버리는데 이렇게 스톱을 시켜버리면 뭐가 되는가? p.239 위에서 4번째 줄에, “사건과 사건 사이에는 무한히 매개하는 사건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 사건들의” 그다음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이 사건들의 평균치” 평균치.
평균치란 뭐냐 하면 가운데가 볼록한 종 모양 그래프가 있다면 그래프를 그대로 보는 게 아니고 평균으로 나눠버리면 동일한 일직선(평균치) 안에 다 들어가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중산층 자산의 평균을 내보니까 올해 통계상 4.5억이에요. 4.5억 있으면 중산층 된다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평균치죠.
그런데 실제로는 10억 이상 가진 사람이 20%이고 나머지 80%가 4.5억 밑에 있어요. 4.5억이 순자산이거든요. 그것도 이게 목포에 집이 있느냐, 서울에 집이 있느냐, 대구 빌라에 사느냐, 이것 따라서 같은 평수의 아파트라도 가격차이가 확 납니다. 평균치가 이렇게 엉터리에요. 평균치라는 게. 평균치는 가상이에요. 실제로는 평균되는 사람 없어요. 가상이에요. 숫자에서 나온 거예요. 인간의 계산에서 나온 거예요.
p.238 중간에 봅시다. 간하배, 이희락 견해까지 해놓고 제가 그다음에 한 말, “이 중에 어떤 견해가 ‘역사적’으로 딱 떨어지는가 하는 것을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땅의 역사적 조건을 계시 이해의 바탕으로 삼는 것은, 신의 개입을 일종의 ‘초기 조건’으로 생각한 이신론적 전통에서, 세계는 정확히 시계태엽의 이미지를 따라가며 파악하는 것과 같다. 지속을 시차적 안목으로 잘라내는 것은, 사실상 평균치를 일방적으로 추정하여 포괄적으로 접근해 나가는 시도일 뿐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시간 속을 가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인데 시간 바깥에서 그걸 관찰하는 자가 누굽니까? 인간인 거예요. 인간은 시간 속이 어떤 내용으로 가고 있는가는 모르고 ‘내가 보기에는’ 이러고 끝내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이 하는 견해와 이론은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 이게 나의 생존에 유리하냐. 내가 의롭다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 하는 벌써 선입관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현실이라고 구성해서 자기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뭡니까? 변화죠. 계속 변화를 추정해야 되죠. 그러면 이 사람은 확정된, 모든 변화가 종식된, 확정된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은 아니죠. 무덤 속에 가야 모든 말씀을 다 이루잖아요.
그것도 어떤 무덤입니까? 도살할 양 같이. 세상에 의해서 ‘너 죽어!’ 라고 삼킴을 당한 자. 그리스도가 했던 어린 양 있잖아요. 당한 자이기 때문에 어린 양이죠. 도살할 양이기 때문에 어린 양인 거예요. 어린 양은 한두 마리가 아닙니다. 그거 말고 도살할 양으로서의 어린 양이 보좌의 중심에 있고 그 보좌의 중심이 확대된 그게 천국이고 거기에 참여한 사람만이 주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도살할 양이 갔던 코스대로 그대로 가야 우리는 그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아까 첫째 시간에 했잖아요. 말씀이 오게 되면 이미 우리는 말씀 완성에 저촉을 받는다고요.
그러면 예수님만 아는 도살할 양의 원리대로 시간을 보지 않고 달리 보면 어떻게 되느냐? 여러분, 식당에 가면 메뉴판에 스테이크 나오죠. 식당에 가면 메뉴판 쭉 있잖아요. 있는데 여기 ‘스테이크 80.’ 메뉴판 위쪽에는 ‘카푸치노 5.’ 이렇게 되어 있죠. 이 스테이크 80. 어디 있습니까, 메뉴판 안에? 스테이크 없죠. 스테이크는 지금 주방에 가있어요. 주방에.
하나님께서 어느 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네가 백날 찾아봐야 이미 언어를 알고 있는 인간은 이 8만원짜리 스테이크보고 인간이 동원하는 게 뭡니까? 상상하죠. 이것은 자기의 사적인 의견이고 이론이에요. 견해에 불과합니다. 실제 스테이크를 상상하는 거예요. 없어요.
그래서 도살할 양 자체가 굉장히 아주 살벌하죠. 도살할 양. 그렇게 하나님의 일이 상상을 넘어 예상을 능가하고 상당히 급진적이에요. 얼마나 급진적인지 우리가 마태복음 7장을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7장 6절 읽어보세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이걸 제가 글로 써서 풀이하겠습니다.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이죠. [돼지는 돼지다워야 하고 개는 개다워야 한다. 우수한 돼지, 우수한 개는 소용없다. 덕이 많은 돼지, 자애로운 개는 소용없다.] 주변에 자애로운 개, 덕이 많은 돼지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걸 더 급진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실험용 돼지에서 민첩성 여부는 부질없는 관찰항목이다] 실험용 돼지가 살쪘느냐, 야위었냐 그것만 구분할 목적으로 돼지를 키웠는데 ‘교수님’ ‘왜?’ ‘이 돼지가 굉장히 민첩합니다.’ ‘민첩한 거 빼. 리스트에서 빼. 그건 필요 없어.’
돼지가 덕이 많고 자애로운 것,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복음을 모르는데 수능 만점이다. 그거 어디다 써먹습니까? 그때는 그야말로 급진적인 말, 지옥에나 가라, 이렇게 하죠.
인간 자체가 메뉴판에 있는 거예요. 메뉴판에 적혀있는 그러한 언어에 종속된 자에요. 왜냐하면 자기 견해, 자기 의견을 버릴 생각을 아무것도 안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름이라는 것은 이마와 손에 악마의 인이 박혔다는 게 요한계시록에 나오잖아요. 아무리 봐도 인간에게는 666 그런 건 없어요. 마트에 갈 때 지지직 전자코드 그런 거나 있지 없단 말이에요. 없어요.
그러니까 메뉴판에는, 성경에 있는 현실성이 인간들의 세계에는, 관찰하는 세계에는 없어요. 세계 자체가 인간들의 견해이고 의견이기 때문에. 인간의 견해에 ‘나 돼지입니다. 나는 개입니다. 나한테는 덕도 소용없고 나의 자애로움과 사랑도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나는 지옥 가야 마땅합니다.’ 이게 인간들 세계에 학교 수업시간에 나오던가요? 초등학교 3학년 2반 교과서에 나오던가요, 이게? 안 나오죠.
그러면 우리가 아는 이 세상은 왜 이게 엉터리이냐? 그것은 이 세상에서 도살장에 끌려가서 죽어버린, 죽은 분을 중심에서 빼버리고 생각하는 것이 이 세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사야 53장 7절, 도살장에서 죽어가는 그 죽음을 빼고 모든 것을 설명하기 때문에 이게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제는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이미 죽어버린 이스라엘 속에서만 살아있는 이스라엘이 나온다] 이 말은 아까 이름과 관련해서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이름으로 말미암아 망했다. 이스라엘은 이름으로 망했다.
이스라엘은 자기가 현실이라고 우겼던 거예요. 그런데 이게 메뉴판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죠. 진짜 이스라엘 이름이 뭐냐? 주방에 있는 스테이크에요. 이스라엘 이름 누구입니까?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죠. 세상은 하나님 중심이지, 인간 중심이 아니었거든요. 이스라엘 이름 때문에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했던 겁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를 요 근래 스바냐 하면서 자주 언급했어요.
그러면 예수 이름이 우리한테 있다는 말은 우리가 다행이라는 말입니까, 슬프다는 말입니까? 다행이죠. 왜? 그 이름으로 인하여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진정한 인간, 진정한 사람은 주님밖에 없음을 주의 이름으로 비로소 알게 되는 거예요. 나는 이 땅에 그렇고 그런 인간들과 같이 한 메뉴판에 쓰여 있는, 그냥 불에 타 없어질 그 세계에 소속되어 있는 하나의 이름일 뿐이죠.
오늘 제목이 에요. 70이레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70이레에 대해서 인간들은 역사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먼저 그것부터 해야 되니까 제가 다니엘 8장 27절을 언급한 겁니다. 다니엘이 하나의 사람으로서 계시를 받을 때 자기는 혼절하여 수일동안 앓았어요. 몸이 아팠어요. 그럼 몸이 아픈 것은 비로소 자기가 예상 못한, 상상 못한 새로운 현실이 계시와 더불어서 찾아온 거죠.
다니엘 10장 2절에서 3절에 보면 “그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세 이레(21일)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그 이유가 뭐냐? 전쟁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 때문에.
왜 전쟁이 일어나는데 밥맛이 하나도 없습니까? 전쟁이라는 것은 인간이 개인의 입장에서 내가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이 삶의 환경을 전쟁이 휩쓸어가죠. 전쟁이 거기에 대해서 내 의견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전쟁에 대해 네 가지 현실이 나와요. 하나는 전쟁, 또 하나는 죽음, 세 번째는 기근(흉년드는 것), 네 번째가 전염병.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네 마리의 천사가 오죠. 한 마리 거룩한 분 빼고 나머지 세 마리의 천사가 전쟁, 죽음, 흉년과 전염병으로 오는데 이 네 가지의 공통점이 뭐에요? 인간을 살리고자 하는 겁니까, 안 그러면 죽이고자 하는 거예요? 인간을 죽이는 거예요.
모아이 석상에서 이야기했듯이 모아이 석상의 상체는 흙밖에 나와 있지만 밑에는 흙속에 있다 했죠. 밑에는 흙속에 박혀 있어요. 흙속을 멸망당할 이 세상이라 한다면 멸망당할 세상에서 좀비들이 또는 악마가 이 아래 부분을 뜯어먹으면 뜯어먹을수록 윗부분의 다 이루심이 부각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도 똑같은 대우를 받는 거예요, 이 땅에서. 성도라 해서 전쟁에서 빠지고 죽음에서 빠지고 흉년에서 빠지고 전염병에서 코로나 안 걸리고 이런 거 없어요. 우크라이나 전쟁할 때 러시아 미사일이 드론 띄워서 왔다가 ‘아이고, 성도네. 빠져나가자.’ 이런 거 없거든요. 그냥 팡 터지면 성도가 되든 교회 기도를 얼마나 잘하든 헌금을 얼마 내든 교회생활 10년 했나, 20년 했나 그런 거 묻지도 않고 전쟁 자체가 파괴입니다.
스스로 파괴되어서 도살장으로 갈 위인들이 없잖아요. 이 땅에 위인들이. 그러니까 말씀이 오게 되면 말씀이 알아서 우리로 하여금 성도를 어디로 보낸다? 주님 가신 도살장으로 가서 천국에 가도록 이렇게 이끈다 이 말입니다. 반갑지 않습니까, 이 소식이?
그것을 신약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라 하지만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다니엘에게 이미 그 일이 터졌다 이겁니다. 다니엘에게. 다니엘이 계시 받고 난 뒤에 다니엘 10장 16절,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내가 곧 입을 열어 내 앞에 섰는 자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주여 이 이상을 인하여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내가 힘이 없어졌나이다” 힘이 없어졌다. 또 17절, “내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사오니 내 주의 이 종이 어찌 능히 내 주로 더불어 말씀할 수 있으리이까”
내가 어떻게 주와 함께 말씀할 수 있습니까. 이 다니엘 10장 16절, 17절의 특징은 뭐냐? 다니엘이 지금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아요. 주님 앞에 아랫도리가 허물어져버린 거예요, 완전히. 내 육신이 몸이 아파서 호흡이 남지 않고 몸에 힘이 없어질 정도에요.
이 말은 뭐냐? 내 의견을 개진하고 내 이론을 펼쳤던 그 나의 저력이 주님의 계시 앞에서 비로소 그것이 용납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개가 사람 되고 돼지가 사람 되는 순간이죠.
그렇다면 자신의 해석, 성경해석, 그것은 메뉴판에서 메뉴판으로 해석하는 이걸 다니엘이 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주방장이 되셔가지고 스테이크를 가지고 ‘아나, 먹어라.’ 하고 주니까 메뉴판에 자기가 상상한 스테이크하고 주방장이 가져온 스테이크의 차이가 너무 나니까 여기에 완전히 맥이 빠진 거예요. 마치 판콜 하나 먹은 것처럼. 감기약 먹고 퍼져 있는 것처럼 힘이 없는 거예요.
이것을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이 첫째시간, 둘째시간 여기까지 한 걸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정리가 같이 되어야지, 나 혼자 정리되는 건 소용없어요. [인간의 시간이 말씀의 시간으로 전환] 인간의 시간이니까 나라고 보면 돼요. 나 중심의 시간이 말씀 중심의 시간으로 전환돼요. 바뀌어버려요.
바뀌어버리면 바뀌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말씀의 시간에서는 ‘다 이루었다’가 되고 인간의 시간은 ‘따져보자.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내게 이익이 되겠는가.’ 이 이익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내가 구원 되겠는가’ 이것도 포함되죠.
그럼 그다음 이야기는 인간의 시간이 말씀의 시간으로 바뀔 때 여기다가 뭘 집어넣는가? 바뀌는 작용이 있어요. 바뀌는 작용을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피입니다. 피로 두 가지 경우가 발생돼요. 피 흘리게 하는 자, 그다음에 피 흘린 자. 피로 인하여 두 가지의 경우가 항상 생기겠죠. 발생되겠죠. 누가 죽였으니까 누가 피 흘리고 죽는 거예요. 피 흘리게 하는 자로부터 피 흘린 자가 될 때, 이것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이 되겠죠.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70이레가 뭐냐 하는 거예요. 70이레라는 것은 주님 중심의 역사관, 세계관이 이 땅의 인간들이 들고 있는 메뉴판에 낯선 70이레가 등장한 거예요, 메뉴판에. 인간들은 그 메뉴판을 보고 70×7=490년으로 계산해서 앞으로 어떻게 될 건가 미리 대비하겠죠. 이게 인간들이 얼마나 평소에 개, 돼지냐를 들춰내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거예요.
아까 p.238 참 쉽다고 한 대목을 다시 볼게요. p.238 밑에서 2번째 줄에, “하지만 변화되어지는 주체는, 자기가 벌이고 있지 않는 변화 속에서” 자기가 유발한 게 아닙니다. “다른 주체가 벌이는” 다른 주체, 누굽니까? 주님이죠. “다른 주체(주님)가 벌이는 변화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시도”하게 돼요.
왜? 모든 의견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어야 되니까. 자기가 더 살고 행복하게 살고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 한다는 어떤 이익, 보상 그걸 노리고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뭐든지 해석을 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 변화에 이미 말려든 셈이 된다.” 말려들었다는 거예요.
“고정된 주체가 빠져나가는 주체를 포착해 낼 수가 없는 동시에” 인간 본인을 고정적으로 관찰자로 보는 거예요. 나한테 뭐가 이익이 되나. “그 변화의 주체에 의해 도리어 진위(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판단 받게 된다. 곧 계시에 접근하는 순간이 곧 계시로부터 심판받는 순간이다.” 아까 이야기했고.
“사건과 사건 사이에는 무한히 매개하는 사건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 사건들의 평균치를 추정하는 것으로서 진리로 삼을 수는 없다.” 평균치 이야기했고요. “등질성(질이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주체 인식을 확립하기 위한 농간이요, (인간들이 날마다 벌이는 자기를 정당화하는) 전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호들의 연쇄가, 언표가 되기 위한 둘째 규정은, 그것이 주체와 어떤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게 아까 메뉴판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인간은 어떤 현실이 와도 자기 현실, 자기 이론을 포기 못해요.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라는 사람이 있어요. 오스트리아 공주이지만 프랑스 루이 16세와 혼인한 사람이에요. 합스부르크라는 왕가가 있는데 옛날에는 유럽이 쪼개진 게 아니고 하나였거든요. 대부분의 나라가 하나가 된 데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1792년 루이 16세 남편과 함께 같이 단두대에 죽습니다. 왕을 모가지 잘라요. 신이 주신 자리를 민중들이 죽여요.
사형집행관이 사형을 집행하면서 이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의 딸처럼 공주처럼 의연한 자세로 죽어갑니다. 그러다 처형 직전 사형집행관의 발을 실수로 밟았어요. 그때 프랑스말로 했겠지만 제가 영어로 한다면 “Pardon me, sir. I did not do it on purpose.” 죄송합니다. 제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너무 고상해서 품격, 품위를 지키는 거예요. 도대체 뭐하는 거예요. 아직도 현실을 감 못 잡고 있어요. 지금 앙투아네트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앙투아네트가 덕이 없어서 죽인 줄 알고 있어요. 앙투아네트 왕비와 루이 16세가 죽은 이유는 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치를 많이 해서가 아니에요. 시대가 바뀌어서 그래요.
시대는 우연적입니다. 시대는 내가 바꾸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돈 버는데 열심히 해서 돈 벌었다 하죠. 열심히 해서 돈 번 게 아닙니다. 열심히 못해서 돈 못 번 게 아니고 우연입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그래요. 그 시대는 내가 사전에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나의 시간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은 말씀의 시간이에요. 돈 못 벌어서 빨리 도살장 끌려가라 이 말이에요. 조기에. 그게 주의 뜻입니다. 그렇게 끌려가면서 뭘 보느냐? ‘누가 나 돈 못 벌게 했어?’가 아니라 ‘누가 예수님을 죽였느냐?’를 보게 하는 거예요. 관점이 내 관점이 아니고 말씀 완성의 관점에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이 우연에 대해서, 이 세상 모든 게 우연입니다. 자꾸 내 탓이라 하지 마세요. 전부 우연이에요. 내가 남자고 여자로 태어난 것, 전부 우연입니다. 이 우연을 자기의 내부로 받아들여야 돼요.
TV를 잘 안 보는데 얼마 전에 TV를 보다가 이 우연에 대해서 아주 멋들어지게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연을 아주 잘 설명해놨어요. 조세호라는 개그맨이 있고 유재석이라는 개그맨이 있는데 그 사이에 앉아있었어요. 이 사람 이름이 조성진입니다.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피아노 잘 치니까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하고 손을 맞춰보니까 조성진 손이 굉장히 크고 길었어요. 그래서 조세호라는 개그맨이 ‘손가락이 만약 짧았으면 굉장히 힘들었겠죠?’ 물으니까 ‘글쎄요. 제가 손가락 짧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자보고 ‘당신이 여자였으면 어땠겠습니까?’ 물었는데 ‘글쎄요. 제가 여자여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건 뭐냐 하면 ‘내가 지금 어떠냐’ 보다도 ‘이런 내가 어디에 쓰여지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손가락 길다고 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되는 게 아니에요. 손가락 크면 산적이 될 수도 있어요. 마님! 이러면서 도끼질하는 아주 훌륭한 머슴이 될 수도 있죠.
세상에 주어진 모든 것이 네 탓이라고 하면 안돼요. ‘네 탓’이라는 것은 ‘내 탓은 아니다’를 전제로 하거든요. ‘이 일은 내 탓은 아니고 내 탓이 아니면 누가 있지? 어? 네 탓이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 탓도 아니고 내 탓도 아니고 이것은 무슨 탓이냐? 불편한 진실 탓이에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예요. 악마와 더불어서 지옥 불에 가든지 아니면 예수님과 더불어서 도살장 속으로 들어가서 천국에 도착하든지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우연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예상 밖의 선택이에요. 우리가 미리 예상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이것은 나의 이익을 계산하는, 역사를 내가 만들고자 하는 그런 잘못이에요. 오늘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니엘이 계시 받고 아프다’ 이 말은 이 계시를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기대 있잖아요, 이렇게 계시 받으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원 받고 그럼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되고 이런 계산이 선지자한테는 없어요. 자기 이익에 대한 생각이 없다 이 말이죠.
그저 아플 때는 아프고 건강할 때는 그냥 건강한 거예요. 이게 뭐냐? 왜 아프냐? 아파서 아픈 거고. 왜 안 아프냐? 안 아파서 안 아픈 거예요. 그냥 손가락이 길어요. 짧다면? 그냥 짧은 거예요. 그래서 뭐? 뭐 어떤데? 그게 뭐가 문젠데? 내가 그것을 내 이익을 위해 판정할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70이레’가 딱 나오니까 사람들은 와락 달려들어서 이걸 역사적으로 해석을 하는데 그 목적이, 내가 어떻게 이 성경을 해석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여김을 받고 구원 받을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는 거예요. 그 당시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신학자들 전부다.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고요.
여기 p.239 봅시다. 위에서 8번째 줄에 “언표가 되기 위한 둘째 규정은, 그것이 주체와 어떤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기호들의 계열은 대상 세계만이 아니라 주체들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만 언표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메뉴판에 있는 그 스테이크는, 스테이크를 먹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한테는 메뉴판의 기호만 봐도 글자만 봐도 침을 흘려요. 그런데 같이 왔던 사람은 어제 스테이크 먹고 체했던 사람이에요. ‘제발 이 집 메뉴판에 스테이크 없어야 할 것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 메뉴판 보지도 않아요. 왜? 어제 자기한테 너무 손실이 왔기 때문에.
인간의 기분, 감정 이것은 본능적으로 자기 이익과 손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가 주일 낮에 잠시 설명했는데요. 설교 시간이기 때문에 길게 못했는데 여러분한테는 약간 길게 하겠습니다. 이 점에 대해 주일 낮에도 설명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 선악과 지식을 먹고 난 뒤에 그때부터 자립적 존재가 되죠. 자립적 존재라면 자립성, 이건 주관이고 이 자립성을 둘러싼 이 모든 것은 대상이니까 객관성이 돼요. 객관적인 환경이 되겠죠. 환경이 되면 이 자립성은 환경과 마주하면서 스스로 자립해야 되기 때문에 여기서 방어체제가 가동돼요. 가동되거든요.
우리 몸 전체가 자율신경으로 완전히 서로 통신체계가 갖춰져 있어요, 자율신경으로. 자율신경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죠.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어쨌든 간에 우리 장기라든지를 보호하는 거예요. 보호 방어하는 거예요. 뭘 보호합니까? 보호한다는 말은 그냥 가만히 놔두면 안 되고 뭔가 대책을 세웠다는 뜻 아닙니까.
그럼 가만 놔두면 왜 안 되는가? 여기서 기본적으로 두려움이 있어요. 두렵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나를 지키겠는가, 이 방어체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면역체계에요. 우리 속의 면역체계.
면역체계에 관여하는 그런 촉매라든지 생물학적 호르몬들 전부다 118가지 원소 중 하나씩으로 나오는데 그중에서 칼슘과 나트륨이 우리 몸에 굉장히 크게 작용해요. 혈액 속에 칼슘, 나트륨. 뼈에도 칼슘 있고. 그래서 뼈 안 좋다 하면 뭘 먹습니까? 칼슘 들이붓는데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다 소화되고 내려가서 없어요.
그냥 우리 몸에 칼슘 있다 하지 말고 달리 봐야 돼요. 아, 내가 나를 방어하는 것이 일상이구나. 이게 생리고 본능이구나, 나를 방어하는 게. 그 말은 오늘 말씀에 의하면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피 흘리게 만든 당사자란 뜻이에요.
본인이 살겠다는 것은 내 방어체제의 목적은 오직 나만 살리는 데 방향이 그쪽으로 쏠려있다는 뜻이고 거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그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판정합니까? 내게 이익이냐, 손해냐로 판정하겠죠. 그럼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한테 이익 되는 게 뭐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내쫓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동안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우리 몸이 방어체제기 때문에요. 어느 정도 우리 몸이 뭐 그럴싸하게 그럴만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하면 여유가 있으면 그때는 ‘말씀 배워야지. 성경공부 참석해야지. 그래서 천국 가야지.’ 이러고 있지만 지금 당장에 자기 가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고 자기 재정적인 문제가 있고 돈 버는 일이 있다면 말씀에 관심 없어요.
어떤 사람이 ‘돈 10만원 벌 시간에 나는 10만원 벌지 않고 성경공부 참석하겠다’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방어체제가 중지된 거예요?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콜!’ 악마 쪽에서 올리죠. ‘20만원은?’ ‘난 돈 보기를 돌 같이 본다.’ ‘옳지. 2000만원은?’ ‘그건 좀 생각해봐야겠는데.’ ‘20억 줄게.’ 후딱! 넘어가죠.
자기 방어체제 자기 손으로 어떻게 됩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말씀이 와버려요. 말씀이 오게 되면 내가 나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그게 다니엘 8장에서 자기 몸이 아픈 거예요. 자기가 아프고 싶어 아픈 게 아니고 계시로 인하여 몸이 아픈 겁니다.
이건 다니엘 뿐 아니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할 때 그냥 점잖게 기도하면 되는데 기도하면서 땀방울이 핏방울 돼요. 어떤 인간도 뚫어낼 수 없는 아까 그 형틀, 쇠뭉치 형틀, 완벽하게 가두어놓은 거푸집에서 예수님만이 그걸 뚫고 지나가잖아요. 다른 사람은 못 뚫습니다. 자기 방어체제를 벗어던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를 구원해놓고 헤엄은 나중에 배우게 하죠. 이 세상에 탁 던져놓고… 복음 알 땐 기뻤는데 ‘다 압니다. 압니다.’ 해놓고는 조금만 무슨 일 있으면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이런 식으로.
그다음 봅시다. 여기 70이레라는 말씀이요. 그 말씀은 바로 혼절해서 수일동안 앓았던 다니엘처럼 이 말씀자체가 우리를 파괴시킵니다. 파괴시킬 때 그냥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고 “너 돼지잖아. 너 개잖아. 네가 언제 말씀을 좋아해? 날 속일 생각하지 마. 너는 너 자신도 지금 안 속고 있잖아. 네가 복음보다 돈 좋아하는 거 네가 먼저 알고 있잖아.” 이것을 우리에게 지적함으로써 내가 말씀 지키겠다는 나를 파괴시키고 말씀이 나에게 다른 시작점을 주셨다는 점을 깨닫게 만들죠.
지키는 게 아니에요. 말씀이 와서 우리를 지배하죠. 그러면 우리 내부에서 나의 싸움은 아니고 주님과 마귀의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로서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할 게 뭐가 있습니까.
10만원 주는 걸 거부하고 내가 성경공부 참석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20만원은? 그건 좀 생각해보자. 절대로 우리는 한 순간에 우리의 바른 선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이 p.240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권력의 장”
첫 번째 줄에, “인간의 주체는 악마가 장악하고 있는 권력의 장에서, 인간은 그 실천성을 나타내는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형식의 양상이나 제도를 붙들고 실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게 뭡니까? 성경말씀을 사람들에게 많이 전파하고 복음 전한다는 핑계 하에 사람들이 만든 것은 교회였습니다. 교회를 그냥 만듭니까? 형식을 만들죠. 제도를 만들죠. 형식과 제도 있으면 거기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게 역사죠. 또 역사 나오잖아요, 벌써. 역사.
조직의 역사가 나오니까 나의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다가 그다음부터는 어떤 직분을 맡게 되게 되면 그 조직의 이익이 뭐냐, 조직에 손실되는 게 뭐냐가 그 사람에게 새롭게 확장된 진리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학교에 있는 교목.
내가 나한테 직분을 준 거예요. 나는 이런 사람이다. 도살장 양으로 끌려가야 되는데 자기가 양으로 안 끌려가고 나는 이 땅에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거예요.
‘나는 노래하는 목사다. 나는 노래해서 전도하는 목사다.’ 지금 노래자체도 문제고 전도하는 것도 문제고 목사도 문제에요. 이 세 가지 다 엉터리거든요. 이름은 뭐냐? 구자억이다. 구자억이 뭐하나 보니까 중들 노래 부르는데 원불교, 신부, 거기다가 여자 중이 노래 부르는데 같이 구례 화엄사 가서 거기서 무슨 노래 부르더라? 상당히 신나는 트롯트 불렀는데.
이게 뭐냐 하면 종교보다 더 월등한 게 자기 음악이 된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이 자기 종교보다 더 월등한 거예요. 그럼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 (고전 16:22).
그런데 그것을 공간 시간 따라서 하라? 아니에요. 시도 때도 없이 어느 자리든 주와 함께 있는 자리라면 주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것이 하나의 행동으로 나와야 되잖아요. 그렇다면 거기서 노래 부른다는 말은 ‘나 저주받을래.’ 하고 똑같은 거예요. ‘나 이제 저주받는 사람 되겠습니다.’하고 똑같은 짓밖에 안되죠.
주께서 주신 목숨가지고 주께서 주신 시간가지고 주께서 주신 공간가지고. 이게 무슨 시간? 말씀의 시간이죠. 말씀의 시간에서 자기 변명과 자기 정당성을 왜 집어넣습니까? ‘이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 잘 융화해서 그 사람들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서 제가 판을 깐 겁니다.’ 판을 왜 자기가 까는데요? 죽으라고 하는데 판을 왜 깔아요? ‘내가 죽으면 안 됩니다. 판을 깔아야 됩니다.’ 이게 말씀의 시간이 아니고 자기 시간이 되는 거예요.
물론 하나의 예를 든 거니까요. 구자억이 이런 사람이라는 게 다니엘처럼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그냥 하나의 예를 든 건데. 그렇게 하면서 나도 불국사 가가지고 노래 부를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잊으라 했는데~’ 해놓고 찬송가라고 우길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이거는 누구도 모르는데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한 가지, 주께서는 이미 확정했다는 것, 도살장으로 끊임없이 당기고 있다는 거예요. 구자억 목사도 화엄사가서 도살당하라고 할 수도 있는 문제기 때문에 내가 누구 인생에 대해서 관여할 하나님 자리가 아니니까 알 수 없지만 매순간이 주님의 죽으심에 관심 두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한테 이익이냐 손실이냐. 도저히 지워낼 수 없고 빼낼 수 없는 본성으로 가득차서 살아가는 엉터리 현실관에 매여 사는 우리 자신을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십자가에 완성된 어린 양의 하나님 은혜를 한시도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