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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30324a 다니엘8장 27절(도살장에 합류)-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다니엘

광주강의20230324a 다니엘8장 27절(도살장에 합류)-이 근호 목사

p.236부터 할 차례입니다. 제목 “70이레의 의미” 이렇게 되어 있죠. 70이레의 의미를 아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70이레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럼 70이레가 뭐냐는 우리가 알 수 없는데 70이레에 대해서 그 시작점, 70이레의 뜻을 아는 시작점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십자가죠.

십자가는 말씀의 완성입니다. 말씀이 수백페이지가 넘고 많은 말씀이 있지만 모든 여러 가지 말씀의 끝은 어디로 끝나야 정답이다? 십자가로 끝났을 때 정답입니다. 왜? 거기서 다 이루었으니까요. 다 이루었다.

성경은 내(예수님)게 대해서 증거한다 했으니까 (요 5:39) 예수님 자신이 모든 성경을 자기가 떠안고 그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다 이룬 모습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그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될 수 있어요. [말씀의 완성은 예수님의 죽음이다] 자, 이미 우리가 해답을 알고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이다,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예수 믿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 하는 그 문제도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되겠어요? 예수님의 죽음부터 시작하면 되겠죠. 예수님 죽음부터. 예수님의 죽음이 다 이루었으니까.

그럼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인가를 보게 되면 이것은 이사야 53장 7절에 나옵니다. 이사야 53장 7절을 읽어볼게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도수장 또는 도살장.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린 양이 자살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양이 자살하진 않겠죠. 도살할 양은 외부에서 타격을 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서 마구간에 태어나서 십자가 갈 때까지 무엇을 끌고 가는가? 계속해서 자기를 타격할 그 세력의 실체를 들추어내는 용도로 살아가시겠죠. 그런데 그게 뭐라고요? 그게 ‘모든 말씀의 완성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켈로그 콘 프레이크, 아침에 우유 타먹는 그런 거죠. 시리얼 같은 이런 거. 그럼 콘 프레이크를 타먹으면 거기에 알갱이들이 있죠. 알갱이들을 그냥 먹습니까, 우유에 타먹습니까? 우유에 타먹죠. 말씀 하나하나가 시리얼 알갱이라면 그 알갱이는 어디 안에 담겨야 완성이 되는 겁니까? 예수님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의 죽음에 담겨야 완성을 보는 거예요. 푹 담겨야 되겠죠, 콘 프레이크 같은 경우. 푹 담겨야 돼요.

말씀을 완성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푹 잠긴다,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도살할 양 같다 했으니까 이 대목을 이렇게 현실적으로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기에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이 바로 도살장 입구라 합시다. 그럼 예수님이 여기 입구 밖에 계시다 이 말이죠. 그럼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이 어두운 도살장 입구로 그냥 들어가는 거죠.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런데 이게 너무 무서워서 그 앞을 얼쩡거린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말씀 완성 안 되겠죠.

오랜만에 휴가 나온 군인들이 저녁 6시까지 부대에 복귀해야 되는데 부대 복귀 안하고 자꾸 입구 앞에서 얼쩡거리고 그 동네 돌아다니면서 시간 때우며 놀고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위병소(guard house)에 있는 같은 부대원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드루와 드루와!” 하겠죠. 원래 ‘들어와’ 이래야 맞는데 라는 영화 때문에 이 말이 유행했어요. 들어오라는 거죠. 빨리 들어와.

뭐 하러 들어와요? 도살장에 가면 그 짐승의 몸체를 사정없이 아작 내는, 요새 같으면 기계로 된 톱니바퀴가 있겠죠. 톱니바퀴가 휙휙 돌아가는데 거기 들어가면 자기 몸이고 뭐고 다 찢어지겠죠. 어느 누구라도 겁이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겁나죠.

성도의 삶이 뭐냐 하면 어린 양을 따르는 삶이라고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계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럼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 주님 가신 그 코스로 들어가야 돼요. 왜냐하면 그 코스만이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다 이루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다음에 뭡니까? 십자가 지고 그냥 도 닦으면 되는 거예요? 아니죠. “나를 따라오라” (막 8:34, 마 16:24) 너 자신을 아작 내는 그곳으로 네가 함몰되어 버려라. 지금 이게 성도의 삶이거든요.

이 세상에서 예수 믿고 어디 소풍 왔습니까? 소풍을 옛날 말로 원족(遠足)이라 하는데 예수 믿고 노닥거리고 부대 안 들어가고 계속 놀러 다니는 그런 식으로는 아니죠. 빨려 들어가듯이 도살장으로 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작용을 하느냐? 지금부터 좀 지루하시지만 같이 봐야 돼요. 요한계시록에서 쭉 찾아볼게요. 이리저리 찾으면 귀찮으니까 요한계시록만 찾아볼게요. 요한계시록 5장 6절부터 시작합니다. 한 10개 될 거예요.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그다음에 뭡니까? “어린 양”이 있죠. 어린 양이라 할 때는 반드시 이사야 53장 7절의 말씀을 생각해야 돼요. 그냥 어린 양이 멀쩡히 가는 게 아니고 도살당한 어린 양이 보좌의 중심에 있는 거예요.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러니까 우리가 그동안의 신앙생활에서 오해가 컸던 것은 ‘내가 예수님을 따른다’ 라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아니고, ‘내가 예수님의 죽음을 따른다’ 이게 맞단 말이죠. 이게 맞는 거예요.

누가 누구를 따를 때는 상대방도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고 둘이 다 살아있다는 것을 구성요소로 해서 ‘따른다’가 돼요. 그런데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이 도살장으로 가 죽었잖아요. 그러면 여기 나라고 하는 것은 내가 멀쩡하게 산 채로 따르면 안 되고 주님을 빨아 당긴 그 도살장의 죽음의 위력에 나도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식의 삶이 성도의 삶이 되는 거예요.

이걸 어려운 말로 하면 ‘내가 여기 있다’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 또는 ‘내가 살아남았다. 휴우, 다행이다.’ 이런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쓰여지는가’가 중요한 거예요. 이 복음의 세계에서.

아이고, 살아남았다. 코로나 다 걸려도 나는 안 걸렸다든지 예를 들어서 우크라이나 전쟁 때 폭격 맞았는데 다른 사람은 죽었는데 우리 삼촌은 역시 기도를 많이 해서 살아남았다, 지금 그런 것을 간증이라고 하면 안 되죠.

살아남은 것이 신앙의 증표가 되질 못한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쓰여졌는가’ 하는 거예요. 어떻게 쓰여졌는가? 물음이죠. 물음에는 반드시 해답이 있어야 물음이 완성되니까요. [나는 어떻게 쓰여졌는가? 비로소 도살장으로 가는 양의 운명을 알았다] 이렇게 되는 거죠.

나는 도살장으로 가는 양의 운명을 알았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도살장 가는 것으로 확정이 된 겁니다. 왜 도살장으로 가야 되는가? 보좌에 들어가실 때,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의 중심에 들어설 수가 있고 그 주변에는 천사들, 최고class의 천사들로부터 영원히 찬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찬양에 합류하려면 우리도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우리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그 위력을 오히려 반겨야 되겠죠.

한 열 군데 찾아봐야 되니까 계속 찾아봅시다. 요한계시록 7장 10절,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그다음에 뭐죠?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그냥 어린 양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도살장에 끌려갔던 그 어린 양. 도살장 안에 비로소 거기서 기다리는 천국. 도살장 바깥에는 천국이 없고 도살장 안에서만 있는 그 천국.

그다음 7장 11절, 12절에 다 나오죠. 다 거기 있는 겁니다. 천사들이 또 장로들이. (11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장로들은 순교자들이죠. 도살장으로 예수님과 더불어서 예수님이 도살장으로 갔던 그 코스대로 들어왔던 순교자들.

12절,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같이 찬양하는 거예요. 13절,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세상 바깥에 있다가 도살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죠.

14절, “...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그 환난은 예수님께서 먼저 솔선수범해서 맞이했던 환난. 그 동일한 환난에 같이 합류된 자들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이 하얗게 되어서 그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보좌, 도살장에서 죽었던 양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는 그런 구조의 나라,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거기서 행복하게 산다는 그런 건 없어요. 17절에,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이러라”

왜 도살장에 끌려간 어린 양 중심으로 비로소 그들의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수 있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도살장으로 가는 죽음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완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의가 성사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죠. 그리고 14장 1절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그다음 4절에 보면 결정적인 게 나오죠. 14장 4절, “이 사람들은 여자(음녀)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어린 양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들을 어디로 데려가겠습니까? 보좌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겠죠. 어린 양이 보좌의 중심 센터에 앉아있으니까. 거기서만 모든 말씀을 이루었다는 효과, 하나님의 영생이 거기서 흘러나오니까 자기 어린 양을 영생 없는 곳으로 데려갈 리 만무할 것 아니겠어요.

주님이 지상에서 들어갔던 그 장소, 지상과 천상, 천국의 경계선에 쳐져있는 것은 바로 도살장입니다. 도살장으로 들어갔던 자들에게만 천국이 허용된 겁니다. 도살장은 왜 만들어놨는가? 말씀을 다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도살장이 있어야 되는 거죠. 도살장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도살장에 안 들어가겠다고 발악하는 거예요. ‘이걸로 대충 때웁시다. 내가 예수 잘 믿을게요. 이걸로 퉁 칩시다. 나한테 아직 시집도 안간 딸이 있는데 이럴 수 없습니다. 장가도 안간 애도 있는데. 지금은 안산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기서 내가 가면 안 됩니다. 장가가는 거 보고 가야됩니다. 그 대신 예수 잘 믿을게요.’

그러면 철모 쓴 위병이, ‘들어와 들어와! 얼쩡거리지 말고 빨리 들어와. 그런 걱정 네가 하지 말고 들어와, 이리로!’ ‘제가 이 땅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할 일 하지 마. 그냥 들어와. 어차피 들어와야 돼, 이 도살장으로.’

주님이 가신 그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꼭 굳이 노래 부르라 하면 부르죠. ‘다른 길은~ 다른 길은~ 다른 길은 없.어.요!’

‘도살장 가면 우리 죽잖아요. 그것도 참혹하게 찢겨서 죽지 않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14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럼 뭐 다른 대안이 있냐?’ 왜 그러냐 하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나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용납이 안돼요. 내가 도살장에 가든지 아니면 짐승한테 매여서 이마에 손에 표를 받든지. 그래서 어린 양 앞에서 쏟아내는 불과 유황으로 영원히 진노를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주님 가신 도살장으로 가든지. 다른 길은,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여기서 슬슬 좀더 어려운 걸 이제 시작하게 되겠죠. 인생이 무엇이냐? 인간이 무엇이냐?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방법은 이렇게 알면 돼요. 의견과 현실을 구분 짓는 거예요. 인간이 무엇인가.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내가 지금 몸이 아프다’ 자, 이게 나의 의견입니까, 안 그러면 현실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현실.) 그러니까 틀린 거예요. 이것은 나의 의견에 불과해요. 이것은 내가 제시한 이론에 불과한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이 있는 이상 나의 의견은 반드시 여기서 선악지식이 표출되게 되어 있어요. 드디어 감추지 못하고 이게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느냐 하면, 세상의 현실은 뭐냐? 선악지식을 부정해서 이걸 지워버리고 예수님이 도살장으로 가 다 이루었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고 도배하는 식의 현실인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몸이 아파버리니까 그 순간 현실을 잃어버리고 내가 몸이 아프니까 진짜 아프니까 진짜 진짜 아프니까 이것은 현실 그대로라고 우기게 되는 겁니다.

나의 의견의 특징은 나에게 이익이냐, 나에게 손해냐를 생각하면서 내놓은 의견, 내놓은 뜻이 바로 현실이 아닌 거예요. 이게 가짜인 겁니다. 이 가짜를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 있음부터 출발할 것인가, 아니면 말씀으로부터 출발할 것인가]

‘나 있음’부터 출발해버리면 그 인간은 그냥 곱게 순수하게 출발하는 게 아니에요. ‘이래서 나는 이익 봤다, 이래서 나는 손해 봤다. 이래서 난 천국 가니까 나한테 이익이었다, 이렇게 했더니만 이래서 나는 내가 잘못 선택해서 지옥 갔다. 나한테 손해니까 그건 지옥이다.’ 그런 현실은 이 땅에 없는 현실이에요. 그런 현실을 하나님께서는 주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또 하나의 예시를 줄 테니까 여러분들이 맞춰보세요. ‘내가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 둘 중에 어느 게 틀리고 어느 게 맞고, 어떻게 됩니까?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 내가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둘다 틀렸죠.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 자체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이것은 비(非)-현실이에요. 내 속에 있는 선악체제, 나한테 어떤 것이 이익이냐, 손해냐를 두고서 지옥까지 가면서도 지옥 가는 것이 내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지옥이라는 그러한 나 중심의 현실관을 지금 못 버리고 있는 거예요. ‘아, 예수 믿을 걸. 괜히 안 믿어서 지옥 간다.’ 지금 아직도 착각에 빠진 거예요.

현실은 뭐냐? 진짜 현실은 뭐냐? 이런 선악체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어린 양과 무관한 것은 지옥이고 어린 양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천국이고. 이것이 현실로 십자가에서 이미 확정나버렸어요. 확정나버렸다고요.

자기가 행동하는 것,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내 운명을 바꿀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제가 수요일에 그런 말씀드렸죠. 그 사람의 자리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요, 자리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천국이고 바깥에 있는 사람은 지옥인 거예요.

수요일 설교 예를 들면 그 바깥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좀비 아쿠아리움이에요. 손 뻗어서 유리판에 붙어가지고 빨아먹으려 하고 있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팔짱 딱 끼고 ‘지금 유리판 밖에서 무슨 짓 하는 거야?’ 쭉 보는 거예요. 아쿠아리움 안에 보니까 상어도 윙~ 상어 나올 때 음악 있죠, 빰빰빰 죠스~에 나오는 음악 깔리고 있고. 큰 거는 작은 걸 삼키려 하고. 대기업은 중소기업 기술 빼먹어 살려고 하면서 쾅쾅쾅 죠스 있고, 한쪽에는 피라미가 으악, 살려주세요! 하고 있고. 그게 다 보이는 거예요. 예수 바깥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전부다 자기의 만족과 행복에 목말라 하는 자니까 그걸 저는 좀비라고 표현한 거예요, 좀비. 뭔가 갈급해. 갈급한 거예요. 좀비란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 이미 죽어버린 자들의 집합이고 그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들인 거예요.

얼마 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강도 6.5 지진이 일어났어요. 며칠 전입니다. 사람들은 뭐했느냐? 집 바깥에 나와서 코란 외우고 있어요. 코란. 꾸란(Koran). 경전을 외우고 있더란 말이죠. 왜 그런 짓합니까? 도살장에 안 끌려 갈라고 그래요. 도살장에 어떻게 하면 안 끌려갈까 싶어서 평소에 얼마나 힘들었냐 이 말죠.

그러면 시작을 뭐로 하느냐? 예수님의 시작은 십자가부터 시작하게 만들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버려요. 그렇게 되면 이 나, ‘내가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 하는 이 ‘내’ 자리에 무덤이 들어가요. ‘무덤’이라는 자리. 우리는 무덤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무덤에서.

그럼 무덤에 들어가려고 하면 나로부터 출발해서는 절대로 무덤에 안 들어갑니다. 막 모가지 밀면서 들어가라고 하면 딱 버티고 안 들어갑니다. 그럼 뭐냐? 무덤을 겨냥했던 것이 예수님의 말씀 성취적 행적이잖아요. 그러니까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이미 그 안에서 무덤 속에 들어온 게 돼요.

말씀 시작이 나의 시작을 바꾼 거예요. 말씀 시작으로 나의 시작을 바꿔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뭘 해도 전부다 말씀이 스스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식으로 우리 주님 만날 때까지 평생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적이(꽤 어지간한 정도로) 안심이 되죠.

이 대목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옵니다. 아쿠아리움이라는 표현은 안 나오는데 똑같은 취지의 말씀이 나와요. 세상은 내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갈 6:14).

성도로 하여금 말씀 속에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네가 천국 가기위해서는 이거 챙겨야 되고 예수 믿어야 되고 성경대로 삶을 살아야 되고 육의 열매 고만 맺고 이제는 성령의 열매 있잖아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 양선 그런 거 열심히 추구해야 되고 완벽하진 않겠지만 최선의 노력을 하면 그만큼 보너스 상급 주어지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헤엄을 칠 때 물에 들어가기 전에 헤엄은 이렇게 해야 되고 물에 들어갔을 때 팔 젓고 이렇게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물에 집어넣고 물에 뛰어들게 한 다음에 헤엄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의견, 나의 이론 -나는 몸이 아프다. 감기 들렸다. 며칠 더 못살지 싶다. 이제 마지막 인사를 고하여야 되나- 이건 어디까지나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어요? 나한테 있죠. 50년 믿었는데 이제 와서 예수님이 희미해졌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아무리 봐도 나는 불신자 같아요. 어떡하면 좋아요.

본인이 대책을 세우겠다는 그 자체가 지금 물에 들어가기 전에 헤엄치는 요령을 익히려고 아주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거예요.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의견이에요. 제가 말한 자기 의견이라 하는 것은 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환상이에요. 환각. 환각이에요.

주님께서는 성도를 일깨우기 위해서…… 성도도 인간인지라 맨날 환상을 꾸잖아요, 자기 의견 또는 자기중심의 현실관. 우크라이나 전쟁 어떻게 될 건지는 관심 없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손에 습진이 있지? 설거지를 했더니만. 우크라이나 전쟁보다 이게 더 관심 있어요. 왜? 모든 것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꿈속에서 꿈을 깨버리죠. 꿈속의 꿈. 인간의 꿈을, 꿈이라고 여긴 것을 꿈으로 공격해서 꿈꾼 나 자체가 이게 꿈이라고 여기게 하는 거예요. 제가 왜 꿈이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예상 못한 것이 우리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예상한다는 것은 예상한 내용이 어디서 나왔다는 뜻이에요? 내 의견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내 의견에서 어떤 좋은 이야기가 나와도 그것은 꿈에 불과합니다. 그 꿈은 꿈속의 다른 꿈이에요. 꿈이라는 말로 표현한 이유는, 내가 예상했는데 꿈은 예상대로 됩니까, 안됩니까? 꿈은 예상대로 안 되잖아요.

그래서 꿈꾸고 난 뒤에 땀 흘리면서 큰일 날 뻔했다 하는 이유가 꿈속에서 완전히 자기가 망칠 때 난처할 때 본인한테 이익이 된다, 손해가 된다? 큰 손해, 낭패가 될 때 꿈 깨고 난 뒤에 아이고, 다행이다. 꿈이었으니 다행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평소에 얼마나 성도 아닌 모습으로 살았느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꿈속에서 자기가 도살장으로 끌려갔을 때 깨고 나면 ‘아이고 다행이다. 자칫하면 오늘부로 인생 끝날 뻔했네. 아이고. 꿈이니까 다행이다, 휴우. 주여, 감사합니다.’하면서 소녀의 기도를 하죠. 옥색 원피스 입고 꿇어 앉아서, 감사합니다.

인간이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것, 하나의 자기 견해에 불과하고 하나의 개인의 이론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하나님께서 구원할 때는 반드시 예상 밖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예상한 것의 밖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전에도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지만, 네가 왜 원하는 것이 굳이 있어야 하는지 어디 대답해봐라. 네가 왜 원하는 것이 굳이 있어야 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왜 굳이 있어야 됩니까?

무덤 속이거든요. 십자가가 무덤입니다. 안 보고 제가 말로 요약하려고 했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지금 어떤 아쿠아리움에 세상이 들어있다 이 말이죠. 서로가 아쿠아리움이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해서 못 박혔다. 못 박혔으니까 못 박혀 죽은 사람은 어디에 들어가야 돼요? 무덤에 들어가잖아요. ‘나는 세상 너희들이 따라올 수 없는 무덤에 이미 들어와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죠. 무덤 속에 왜 있어야 된다 했죠? 무덤 속은 모든 말씀을 완성한 거고 모든 말씀을 완성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의를 인정해요. 완벽한 거룩과 의를 인정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안에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로마서 같은 경우에 나오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이삭을 생각할 때 처음에는 자기 아들, 대를 이을 아들로 생각했죠. 그러나 이삭이 죽고 난 뒤에 또 자기 손으로 이삭을 죽일 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알았던 거예요. 나에게서 이삭이 나온 게 아니고 이삭 안에 내가 먼저 출현되었다, 등장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시간의 역전(逆轉)이죠, 시간의 역전.

로마서 4장에서 이삭을 예수님으로 보죠. 예수님이 죽은 것은 네 죄 때문에 죽었고.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 죄 지었구나. 에라이, 이리 와서 벌 받아라.’ 이게 인간에게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의견이에요. ‘내가 죄 지었으니까 하나님 때려주세요.’ 이것은 자기 의견이에요. 전혀 현실이 아니에요.

현실은 뭐냐? 내가 죄 있는 일을 했던 착한 일을 했던 상관없이 몽땅 그것을 죄로 규정할 만한 최종 규정된 일이 벌써 십자가에서 일어났다는 거예요. 왜냐?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우리는 졸지에 어떤 행동, 어떤 생각을 하든 죄가 된 거예요. 개를 한 마리 키우든 두 마리 키우든 뭘 하든 관계없이 그냥 죄인된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걸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굉장히 강조하고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분이 살아남으로써 우리가 졸지에 뭐가 되었어요? 한 것도 없는데 값없이 의가 된 거예요.

그러면 값없이 의가 되려면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어야 돼요? 나의 자리에 있으면 안돼요. 내가 죽은 자리에 있어야 돼요. 주님의 도살장 자리에 합류해야 그다음에 예수님의 살아남이 우리에게 의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가 평소에 육체로 갖고 있으면서 개진하는 의견이나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 우리가 생각하는 견해나 이론 같은 게 현실이 아니고 전부다 가짜라는 거예요. 망상에 불과합니다. 나의 생존에 대한 기대와 이해와 이익이 그것들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 자체가 죄 덩어리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은 우리가 무덤에 있을 때뿐이에요.

다시 봅시다. 방금 설명한 대로 우리는 죄뿐이죠. 죄뿐인데 죄에서 굳이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야 됩니까? 원하는 자체가 무엇의 연속입니까? 죄죠. 내가 원하는 건 뭘 원하든 간에 죄가 되죠. 우리 남편이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죄에요. 하나님의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죄에요. 죄 아닌 게 없어요. 주는 대로 먹어라. 주는 대로 먹어야지, 뭐 내가 원하는 게 따로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무덤의 출발점 의미는 그다음부터 나의 인생관을 모조리 무효화시키는 능력이 충만하다]. 무덤이란 나의 인생을 모조리 무효화시킨다. 내 중심의 인생관을 모조리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내가 주의 것이라는, 그 무덤 속에 같이 완성되어 있는 로마서 14장 8절을 우리에게 수시로 각인시키고 확인시키는 그 일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요한계시록 계속 봅시다. 15장 3절,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이렇게 되어 있죠. ‘어린 양’이라 할 때 앞에 뭘 집어넣어야 돼요. 이 땅에 와서 도살당한 그 양의 노래를 부른다 이 말이에요.

이게 모세의 노래니까 모세가 유월절 이후에 홍해를 건너잖아요. 그러면 홍해를 왜 건너야 하는가? 유월절 어린 양과 동행했기 때문에 동행하는 인간들의 사정을 고려하는 게 아니고 ‘너희들 힘드냐? 불편하냐?’가 아니라, 어린 양의 그 취지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을 죽음 속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무덤 속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집단 무덤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이게 세례 아닙니까(고전 10:2). 죽음 속으로 같이 가는 거예요.

어린 양만 당할 수는 없다, 이 땅에서. 어린 양이 당했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의 운명을 천국에 합류할 자도 같이 이 땅에서 필히 그 코스로 가도록 이미 확정이 되어있는 거예요. 이미 확정되어 있어요. 다른 길은 없어요. 오직 그 길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에 끝으로 하나만 더 보죠. 요한계시록 17장 14절,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여기 보면 저희가 알아서 어린 양 따른 게 아니고 부르심을 입었고 불러냄을 당하고 빼내심을 얻은 자들. 누가 같이 가자고. 어디로? 도살장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빼내심을 얻은 자들만이 이 발목 잡는 악마의 세계,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일말의 틈이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갑옷이라면 틈이 없는 갑옷이에요. 옴팍 뒤집어 씌였으니까요. 주물 공장에서 같은 제품들, 옹기 류나 그릇 류 만들 때 주형틀 안에 내용물 집어넣어서 그대로 만들잖아요. 그 주형틀에 틈이 있습니까? 균열이 있습니까? 일말의 균열이 있습니까? 없죠. 있으면 제품이 안 되죠. 하자품 나오죠.

악마가 죄 있는 아담을 계속 복제시키는 데에 있어서 갑옷과 같이 주형틀처럼 집어넣을 때, 일말의 빠져나갈 균열점은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거기서 이런 현상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신의 관찰(경험)에 의해서 형성된 그 세계관 뒤편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종교와 철학과 학문의 딜레마입니다. 내가 관찰했다고 해도 되고 하나 더하면 내가 경험한 그 뒤편으로 갈 수가 없어요. 종교적 경험까지 포함해서. 신비로운 경험.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해같이 빛나는 것을 봤죠. 또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죠. 베드로가 기적을 행했잖아요. 그러면 베드로가 그것가지고 자기가 생각한 자기 세계 밖으로 나갔습니까, 못 나갔습니까? 못 나갔죠. 나갈 수가 없어요.

주섬주섬 자기가 경험한 것, 자기가 획득한 지식 정보가지고 어디를 뚫으려고 했습니까? 천국까지 가려고 했죠. 그런데 베드로에게 악마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삼키죠. 왜냐하면 악마는 자신 있는 거예요. 인간들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거예요. 왜? 균열이 없으니까. 이 세상은 인간이 만든, 자기가 생각한 하나의 에 나오는 거대한 돔(dome) 같은 세트장이에요. 돔 같은 세트장.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애들이 서로 말다툼하고 싸우는 거 여러분들 보신 적 있습니까? 길거리에서나 안 그러면 드라마에서 보게 되면 그들이 싸우는 게 세계 평화를 위해서 싸우던가요, 뭐로 싸우던가요? ‘너 왜 내 친구한테 나쁜 소리했어, 응? 나는 그런 말 한적 없는데 왜 그런 말했어?’ 이것가지고 싸우고요. 그보다 더 어린 애는 ‘어제 너 반칙으로 구슬 3개 더 땄잖아.’ 이런 거 있잖아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걔들 수준에 있어서… 이걸 이렇게 정리하면 쉬워요. 나의 게임이죠. 내가 벌이는 나의 게임 수준을 못 벗어나요. 이 어린아이가 하고 있는 게임이 나중에 어른이 되면 뭐 세상을 돌파합니까? 아니죠. 어른은 어른 나름대로의 게임이 되는 거예요.

이 게임에 나의 게임, 너의 게임 공통점이 있어요. 나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겁니다. 나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그 이익을 조사해보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뭐냐 하면 살아남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다면 그걸로 마지막 챙길 수 있는 나의 인생 승리라고 여기는 겁니다.

살기 위해서 인간은 게임하고 게임에 지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노력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철저한 악마의 하수인으로 그동안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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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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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