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424강, 425강) 중요한 것, 말씀의 시간 230321
424강-YouTube강의(중요한 것 로마서 10:16)20230321-이 근호 목사
제424강, ‘중요한 것’. 세상에 중요한 것이 많은데 사람에게 중요한 것하고 하나님께 중요한 것이 다르겠죠. 사람은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무지 애를 씁니다. 그런데 중요하다고 여긴 것을 한번 얻은 뒤 시간이 약간만 지나도 이게 식상해요.
이거 말고 더 더 더 중요한 것 없나, 내 구미, 내 욕구를 만족시킬 것이 없나 계속 찾게 됩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산다는데 그 행복이란 것을 일단 붙잡아보니까 이게 지루해요. 권태롭죠. 이것 말고 여기서 더 행복할 수 있는 꺼리가 없나 또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원한다는 것은 어떤 늪에 빠졌다고 보면 돼요. 인간은 원하는 것, 원하는 것, 원하는 것 계속 가면서 자신이 헤어 나오지 못할 지경에 빠진 것이 자기 인생이라는 것을 눈치 채야 됩니다. 그런데 그걸 눈치 챌 사람이 없어요. 모릅니다.
그럼 성도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 원하는 것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성도는 하나님의 소중한 것이 덮쳐진 사람이 성도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갖고 있는 게 성도가 아니고, 나 말고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찾아온 사람, 그 사람이 성도가 되겠어요.
그러면 성도에게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이 왔다면 하나님께서 그 성도 개인이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그냥 방치하겠습니까, 그걸 덮치겠습니까? 당연히 덮치죠. 왜냐하면 하나님께 소중한 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소중한 것으로 훼방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방해받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런 말씀들이죠.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최종 목적이 되는 바가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이 되겠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어떤 일을 맡기셨는데 그 일의 최종적인 성과, 주님만 행해서 얻어진 성과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소중한 것이고 또한 그것이 성도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성도는 교체가 되어야 됩니다. 여기서 교체가 중요하죠.
내게 나름대로 소중한 게 있어요. 자식이 잘 되는 것, 내가 유명인사 되는 것,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여력이 되는 권력을 갖는 것, 돈을 갖는 것 하고 싶죠. 그러나 그것은 성도가 아니라도 세상사람 다 똑같이 원하는 바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무엇과 교체되어야 되는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바에 의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소중해요. 주님이 하신 일이. 내가 갈구하고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주님이 꾸역꾸역 혼자서 해내신 일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는지 로마서 10장 16절에 보면 나옵니다. 로마서 10장 15절부터 16절을 보게 되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좋은 소식, 두 자로 하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 전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밖에 없느냐? 복음에 관심 있는 사람. 복음이 그야말로 나에게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었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기쁜 소식 그 자체인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의 모든 행위와 행동과 생각을 하나님께서는 아름답다고 평해주십니다. 아름답다고.
그럼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이것이 진짜 하늘에서 왔는지, 아니면 내가 이 세상에 사는 게 힘들어 은근히 내가 노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걸 어떻게 구분하는가? 그건 16절에 나옵니다. 로마서 10장 16절,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복음이 뭐냐? 다시 설명합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은 못하고 예수님 홀로 이루시는 것을 복음이라 합니다. 그 복음을 하나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이에요. 가장 소중한 것을 자기 아들에게 임무 완수하라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진짜로 그러냐 하는 것을 어떻게 판정하느냐 하면, 이미 복음을 받은 사람이 알고 있는 그것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 천국갈 수 없는 사람한테는 아무리 믿고자 해도 친구 사이라도 그리고 부모 자식 사이이고 형제 간이라도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에요.
분명히 소중한데. 성도한테는 소중한데 성도 외에 다른 사람한테는, 그게 뭐 소중해? 그게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그거 하면 사람들이 너를 성공했다고 이야기해줘? 하는 그런 타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누가? 성도가.
그런데 성도가 그러한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반갑게도, 반갑게도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셨었습니다. 그게 여기 로마서 10장 16절에 보면 “이사야가 가로되”라고 되어 있죠. 그 이사야 본문이 어디서 나온 본문이냐 하면 이사야 53장에 나온 본문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 1절부터 읽어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이 말은 인간 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수입한, 하늘에서 직접 왔던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이 세상 사람들 아무도 믿을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능력으로 믿지 못하는데 행여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뭐냐? 53장에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여호와의 팔, 예수님께 나타났던 그 여호와의 팔이 동일하게 예수님이 하신 그것이 이 천하보다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는 예수님께 나타난 여호와의 팔이, 능력이 동일하게 그 사람에게 나타나야 예수님이 하신 일에 눈이 번쩍 뜨이게 되는 겁니다.
야, 예수님이 저렇게 소중한 것을 했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하는 것 외에 일체 거부하신다는 사실을 아울러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이사야 53장 1절도 그렇고 로마서 10장 16절도 그렇고, 우리가 전한 복음을 누가 믿겠느냐?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믿지 못할 것을 주님은 소중한 기쁜 소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왔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사모하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돼요? 세상 것도 얻고 복음도 얻고 둘 다 가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됩니까? 아니면, 복음만 있다면 주님처럼 이 세상에서 천대받고 밉상 받는다 할지라도 그게 대수냐? 그게 뭐 심각한 일이라고. 중요한 것을 이미 챙겼는데 중요한 것에 눈이 뜨여버렸는데 천국 가지도 못할 인간들의 의견들, 그러한 여론들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신경 안 써도 되는 거예요.
이게 자유죠. 세상에서 주는 평가로부터 신경 안 써도 될 정도로 고귀한 것을 알게 된 사람, 그걸 아까 뭐라고요? 그걸 아름답도다 복음을 전하는 자여. 아름답다고 해요. 세상에 천하 죄인보고 주께서 아름답대요.
우리보고 이야기하지 않죠. 우리 속에 복음이 담기니까 예수님이 하는 일이 담기니까 우리는 졸지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누구에게? 하나님에게. 그런데 이 아름다움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비난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이하림gblayer('gblayer4', 'summerwood', '이하림', 'summerwood96@naver.com', '', '1', './program');(IP:219.♡.37.139)
23-03-22 06:00
425강-YouTube강의(말씀의 시간 시편 119:10)20230321-이 근호 목사
제425강, ‘말씀의 시간’. 말씀의 시간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말씀이 일하지 않는 시간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당연히 없죠. 이 세상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계속해서 말씀이 퍼부어지는 그 순간 순간들입니다.
말씀은 쉬는 일이 없어요. 말씀은 말씀 찾는다고 말씀이 일하고 사람이 안 찾으면 뭐 손님 안 오는데 내가 일할 필요가 뭐 있어? 이러질 않습니다. 이 세상에 공기가 빈틈이 혹시 있을지라도 말씀에는 빈틈이 없습니다.
말씀의 시간은 늘 모든 시간이 말씀의 시간이었어요. 우리가 딴전 피워서 그래요. 우리가 세상에 관심 두고 내 위신에 관심 두고 내 자랑거리, 나 관리하기 바쁘고 내 이익을 계산하기 바쁘다보니까 자기가 하는 일에 울고 불고 좌절하고 또는 좋다고 호들갑떨고 그러죠.
그런데 그게 말씀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가 호들갑을 떨든 슬퍼하든 말씀은 일하지 않은 때가 없는데요? 말씀이 우리 호응 따라 일하고 호응 없으면 일 안하고 그게 말씀이 아닙니다.
늘 말씀 생각을 못한 것은 다 우리 잘못이에요. 말씀이 일 안해서 우리가 모르는 게 아니고 말씀은 줄곧 일하는데 우리가 너무나 흔히 자주 자기 자신의 형편에다가 부질없는 신경을 너무 많이 썼기 때문에 말씀의 기쁨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 전하는 자, 특히 설교자는 뭘 해야 돼요? 인간들이 일반 교인들이 놓쳐버린 그 틈새에도 말씀은 이렇게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한 주일에 한 번 주일날 교회 왔을 때 생활에 쫓기고 여러 가지 일에 딴 생각하다보니까 놓쳐버린, 그동안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꾸준한 말씀의 혜택들과 은혜들이 우리가 심지어 잠자는 시간에도 말씀은 이렇게 말씀대로 많은 것을 행하셨고 주셨구나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설교자의 해야 될 일이겠죠.
물론 사람들은 말씀을 늘 묵상하고 늘 생각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세상살이에서 내 신체에 자극이 오고, 신체 자극은 정신적으로 자극 준 쪽으로 얼굴을 돌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사람은 동시에 두 쪽을 못 보잖아요. 말씀 생각을 못하고 이 문제가 빨리 원상 복귀되기를 거기다가 고민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대책 세우고 어떻게 원상 복귀가 될 수 있을까, 수단이 없을까,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그런 데에 푹 빠지죠.
그렇다면 말씀은 계속 일해왔는데 사람의 관심사는 내가 일하는 시간에 사람은 거기에 집착해요. 내가 일하는 시간. ‘하나님 보시옵소서. 제가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어떤 성과를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의 모든 성과는 말씀의 성과이지, 내가 일한 성과를 우리에게 주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노동의 삯을 받는 겁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일한 것도 없이 받는 삯이에요 (롬 4:4-6). 말씀이 일하고 그 혜택을 일한 것도 없이 받는 거예요.
이처럼 말씀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고 있다는 것을 소위 분주하다는 핑계를 대고 우리 쪽에서 그 말씀의 은혜를 느끼지를 못하고 그냥 본인 일 때문에 끙끙 앓고 살아오고 있죠.
그래서 시편 119편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여기 ‘떠나지 말게’라고 되어 있죠. 떠나지 말게. 벗어나지 않게. ‘않다’는 부정사(否定詞)가 붙어 있잖아요. ‘떠나는 것 말고요, 하나님’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원래 성도의 자리가 밖에 있다가 말씀 찾으러 오는 게 성도의 자리가 아니고 원래 성도의 자리는 말씀이 쉬지 않고 작렬하는 그 현장이 성도의 본래 자리이고 그것이 바로 계명의 자리이고 그것이 오늘 이야기한 말씀의 자리입니다.
성도를 비롯해서 인간들은 자기 자리를 어떻게 마련하느냐 하면 자신이 일해서 얻었던 돈 가지고 자신의 육신을 편하게 눕히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자기 터전을 잡죠. 쉽게 말해서 ‘집 샀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집 사고부터 그 사람은 집에서 나가면 떠난 거고 집에 있으면 머물러 있는 거고. 바깥에 출타했다가도 후딱 어디 가서 쉴 수 있다? 내가 내 노동으로 구입한 그 집에 가야 만사 잊고 편히 이 육신과 더불어서 마음도 편히 쉰다, 우리에게 너무나 상식적이고 일반화된 그런 패턴이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그 집에서 누구를 관찰합니까? 자기가 집에 머물 때 사람은 누구를 관찰합니까? ‘가만 있어봐. 지금 한 시간 동안 계속 잘 게 아니지. 지금 빨리 저녁을 해야 되지.’ 하고 일어선다면 지금 누가 누구를 관찰하는 거예요? ‘아, 이거 내가 화장실에 갔다 와야겠구나.’ 누가 누구를 관찰합니까? 본인이 본인을 계속 관찰하는 공간이 자기 집이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밖에 나가서 자기 집에 돌아오지 않고 밖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에게 돌아온다면 그건 시편 119편 10절의 말씀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옵소서”를 성취한 셈이 되겠죠. 내가 지금 집 바깥쪽에 있어도 말씀 안에 있다면 그건 집에 가나 안 가나 그 사람은 계속해서 말씀이 주는 그 능력과 그 혜택을 안 떠나는, 벗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왜 제가 이런 말씀을 하느냐 하면 성도냐, 성도 아니냐 그렇게 구분하는 방법 중 하나가 상대방하고 이야기하면서 자꾸 말씀이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말씀이. 여호와의 증인 말고. 달달 외워서 왕국 회관 거기서 가르치는 것 말고 삶에서 우러나면서 자기의 삶과 말씀이 연결 결합되고 뭉쳐져서 계속 나는 삶속에서 이런 말씀이 자꾸 생각이 나더라고 이야기할 때. 말씀이 나올 때.
그 사람은 집에 있으나 직장에 있으나 밖에 유원지에 있으나 놀러가나 상관없이 그 사람은 말씀을 떠나지 않고 사는 사람이에요. 저는 이것을 감히 성도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왜? 말씀이 턱하니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요.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안에 들어와 있어요. 들어가 있어요, 자기 중심부에.
집에 가스 불 안 껐는데... 자기 집 생각하는 게 아니고. 물론 집에 가스 불 안 껐으면 빨리 가스 불 꺼야죠. 그건 맞는데 가스 불 끄든 밖에 나가든 집에 있든. 집에 있더라도 말씀 생각 안하면 어딜 봐서 성도입니까? 집에 있으면서 TV나 보고 그냥 스포츠나 즐기고 낮에 누구하고 히히덕거리던 것, 이야기했던 것, 좋았던 것, 나빴던 것 그런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집에서는 안 떠났지만 뭐 말씀이 나와야죠, 말씀이.
밖에 있을 때 친구하고 다투든... 그냥 다퉜다 하지 말고 그 다툰 것으로 인하여 어떤 말씀이 떠올라야죠. 말씀이. ‘아, 또 나의 탐욕이었구나’ 라든지 ‘내가 또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았구나’ 하든지 뭔가 말씀과 연결되어야 돼요.
성경말씀 다 외우라는 말이 아니고 주님 말씀에 속한 성도는 그때마다 적절하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말씀의 계명에서 떠나지 않게 한다는 그 증거자로 성도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자각하면서 이끌고 있습니다.
그래야 시편 119편 10절이 현실화될 게 아니겠어요. 이 시편이 성경책 안에만 들어있으면 안되겠죠? 그럼 성경은 말씀의 무덤이 되겠죠. 그게 아니고 성경말씀이 성경책 안에 갇힌 게 아니고 오늘날 성도라는 존재 안에서 말씀은 그 삶을 통해서 이건 이런 말씀이고 저건 저런 말씀이고, 이런 말씀을 떠오르게 했고 저런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는 것을 실습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늘 말씀은 절대로 항상 말씀의 세계에서 너는 떠나지 않고 있음을 우리에게 비춰주는 그것조차 말씀의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