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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강남-누가복음 15장 4절 (형식과 내용) 230307b-이근호 목사자유게시판누가복음

강남-누가복음 15장 4절 (형식과 내용) 230307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는 8절부터 봅시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것과 아까 양의 비유와 차이점이 있습니다. 양은 100에서 99를 놔두고 한 마리 양을 따로 떼어내는 데에 주력했다면 여기 동전 비유는 잃어버린 동전 하나에 모든 것이 다 담겨있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강조점이 좀 다르지요. 잃어버린 동전 하나에 모든 것이 다 담겨있어요. 동전은 양과 목자보다 더 치밀하게 동전과 붙어있어요.

양은 짐승이지만 동전은 뭐냐? 사물체에요. 딱딱한 사물체잖아요. 사물체에서 사물체 자체가 선택 못한다는 것은 이거는 너무나 명백한 거에요. 그리고 동전은 뭐냐? 동전은 주인의 손길이 묻어져있죠. 그러면 동전이 그냥 사물체이니까 자기 주장은 아예 애초에 없고요. 일방적으로 주인이 만지작거리고 갖고 있었던 그 주인의 손길. 그 동전 잃어버리면 뭘 잃어버리느냐. 주인의 손길을 잃어버린 게 돼요. 그게 없어진 거죠.

그러면 보통 경우에 10개 있는데 하나를 잃어버리면 보통 경우는 이게 동전이니까 그냥 포기하기 쉽지요. 그 돈 그렇게 큰돈이 아니니까.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여자가 좀 특이해요. 동전 하나 가지고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는 것도 특이한데 찾았다고 이웃과 함께 크게 함께 즐겼다. 동전 몇 푼 한다고 그것 가지고 즐기고 잔치를 벌립니까. 그리고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묻는데 세상 사람들은 안 찾지요 그걸 왜 찾아요. 잃어버리면 그만이지요.

그래서 이거는 뭐냐 하면은 세상은 생각하지 않고 계산한다. 인간은 생각 대신 계산하는 게 인간입니다. 끊임없이 이익이냐 손해냐 계산하는 거에요. 동전이 투입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계산해요. 계산하는 그 목적은 뭐냐 하면은 나의 전체는 어디까지냐. 자신의 전체를 늘 확인하는 겁니다. 나의 전체. 이렇게 되면 여기 나타나는 현상은 경색. 경색이라는 것은 딱딱해지는 것을 경색이라고 하지요.

자기 전체를 계속 모으다보니까 자기 전체가 점점 더 딱딱해서 굳어져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굳어져버리면 어떤 단도리를 하느냐 하면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 하는 거에요. 그런데 잃어버림이 없으면 뭐가 없다? 기뻐하고 잔치 벌릴 일이 없지요. 같이 친구 이웃과 벗을 불러서 같이 즐길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거에요.

몇 일 전에 일본 삿뽀로에 어떤 청소하는 사람이 쓰레기통인가 어디에서 9500만원을 주웠어요. 그것도 현찰로. 주웠는데 주인이 모호하니까 9500원 잃어버린 사람 광고하니까 내 돈이라고 하는 사람이 13명이나 나왔어요. 우리 어머니가 치매인데 갖다버렸습니다 뭐 구구절절 그럴싸한 사연하면서 나왔는데 그 증거가 없어가지고 나라에서는 삿뽀로 시에 기부할 가능성이 있다고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이 여자는 동전 하나 때문에 자기 자신이 망가졌어요. 주저 없이 망가졌습니다. 잃어버린 동전 때문에. 쉽게 말하면 “나를 만지던 너의 손길이 없어진 걸 이제야 깨달았어 네 마음이 떠난 것을” ‘사랑 안 해’ 백지영. 전체가 하나가 된다는 말은 그 여자 주인과 그리고 인격체가 없는 사물체하고 자기를 동일시 본겁니다. 똑같이 본거에요.

동전 하나 구하면 되지. 이게 아니에요. 그 동전이 없으면 자기 전체를 구성할 수 없는 그런 관계로써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찾아내고 골라낸다. 찾아내고 골라내는 거에요. 찾아내는 것은 잃어버린 양이고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가 되는 거에요. 두 번째 비유의 특징은. 처음부터 동전은 나와 함께 있었다. 그래서 동전 잃어버리면 곧 잃어버린 것이다. 그 결속력이 더 깊어지죠. 결속력이. 앞에 양과 그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 차이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아주 싫어하는 수학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차원에서 –1 있고 1차원에서 어떤 지점의 점들도 서로 다 아는 사이. 100% 다 아는 사이에요. 일차원에서는. 2차원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이것은 하나의 원을 구성하면 전체 사각형에서 자기 끼리 아는 퍼센트가 몇 퍼센트인가 하면 78.5%에요. 면적은 π/4로 계산되기 때문에 나머지 21%는 모르는 사이에요. 이 한계 바깥에 있기 때문에 모르는 사이가 돼요. 이게 2차원입니다.

차원을 더 높여서 3차원 봅시다.

이거는 하나의 공을 이룹니다. 정육면체 안에 공이 빠진 부분 있잖아요. 그 빠진 부분을 계산하게 되면 총 52.4%가 아는 사이고 나머지 47.6%는 모르는 사이가 돼요. 빠져 있는 사이가 됩니다. 이 안의 면적이 4π/3이고 이게 3차원이죠.
아는 사람끼리 알고 나머지는 모르는 사람이 돼요.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차원을 계속 높여보는 거에요. 그 다음에 4차원. 4차원 경우에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게 나옵니다. 수학적으로 4차원 계산해보니까

30.8% 나옵니다. 차원을 5차원 6차원 더 높여 보면 놀라운 사실이 나옵니다. 그것은 점점 더 줄어드는 게 아니에요. 100% 가까이 되는 겁니다. 차원이 높아버리면. 더 높아버리면.

이거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높은 차원에서는 어느 누구도 무관련성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 서로 다 아는 사이가 돼요. 모든 게. 그러니까 여인이 동전을 찾는 이유는 어떤 것도 잃어버림은 내 안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에요. 찾을 때까지 밤새도록 찾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도 ‘나’라는 전체에서 빠져나오도록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어떤 경우도.

그러니까 아까는 무슨 비유입니까? 남겨진 99와 1이 비교되지만 동전 찾기 이 비유는 잃어버림이 아니고 잃어버림이 없음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잃어버림이 없다는 것. 어떤 경우라도. 그러면 잃어버림이 없는데 왜 동전 잃어버렸는가. 그것은 여자 주인 자체의 자기 모순 때문에 잃어버린 거에요. 내가 나를 잃어버림으로서 도로 내가 몰랐던 내가 되는 거에요.

인간 예수님이 주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 예수님이 스스로 셀프, 심판에 아버지로부터 잃어버려야 돼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스스로 잃어버림 자체 안에서 잃어버림이 성사되면서 그러면서 ‘주’라는 이 정체성이 나중에 결과로 나와서 아버지도 기뻐하고 아들도 기뻐하고 온 백성도 함께 기뻐하는 그 여정을 주께서는 가시는 거에요. 처음부터 내 것이었는데 잃어버린 동전을 내가 찾아내는 작업을 하는 거에요.

그 찾는 작업은 뭐냐?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잃어버린 그것을 그대로 그들에게 적용하는 겁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사각지대에 무수한 점을 찍습니다. 점 찍어놓고 이 점을 a라고 하고 이 점을 b라고 한다면 이 점을 c라고 하고 이점일 d라고 한다면 a옆에 있는 d는 어떻습니까? 가깝지요. 2차원 평면에서. 제일 먼 지점 같으면 a에서 e는 a에서 b보다 훨씬 더 멀지요. 짧은 minimum distance 최소값의 거리와 maximum distance 최대값의 거리가 비유가 1이 아니고 차이가 많이 나지요. 여기가 2라면 저쪽은 한 100 되니까 엄청나지요. 50배 차이 나잖아요.

그런데 차원을 높여가게 되면 어떤 지점이든 모든 거리가 똑같아요. 차원을 높이면. 주님 안에서는 더 멀고 가까운 게 없어요. 동전 10개 가운데서 잃어버린 양은 더 애달프고 있는 양은 별로고 이런 게 없어요. 모든 동전 하나하나에 주님의 전체가 다 들어있는 거에요. 공통적으로. 다 들어있어요. 거기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그러니까 동전 비유를 보게 되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인생 성도의 인생이 얼마나 복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인간은 이렇게 차원이 기껏해야 3차원 밖에 안 되잖아요. 3차원 밖에 안 된다는 것은 자기 위주에요. 자기 위주. 말이 3차원이지 2차원 밖에 안돼요. 또는 1차원 밖에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 시간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차원이 없어요. 오늘은 이랬고 내일은 이렇고 이건 1차원이에요. 1차원.

그래서 인간이 다차원이 아니고 단선적으로 살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헌금을 하기 위해서 20만원을 딱 준비해놨어요. 20만원을 딱 준비했는데 차 몰고 집에서 나오다가 과태료 2만원을 예상 밖에 경찰에게 걸렸어요. 횡단보도 일시정지 해야 되는데 안하고 그냥 가서 경찰이 와서 2만원 끊어드리겠습니다 해서 냈어요.

그럴 때 자기 중심의 다차원 같으면 교회에 어떻게 헌금하느냐 하면은 헌금으로 20만원을 책정했는데 하나님 잘못으로 인해서 2만원 깎였잖아요. 헌금 18만원 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약간의 하나님 책임도 져야지요. 용돈 깎아버려요.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 뭐한다? 계산하는 거에요. 이런 방식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갑자기 생각하지 않은 돈 20만원이 그냥 횡재로 들어왔다면. 20만원 들어오면 20만원 헌금하는 게 아니고 십일조를 해버려요. 2만원을 내요. 십일조 찬스가 온 거에요. 2만원을 딱 하는 거에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것이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입니다.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서 하는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성경에 있는 선지자들을 보면 누구 이름으로 살죠? 다윗은 다윗의 하나님 이름으로 살지요. 아브라함은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지요. 그리고 야곱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겁니다.

자기가 만든 차원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인생이 아님을 인정해요. 인생은 하나님의 전체성이 담긴 인생입니다. 전체성이. 인간이라면 신촌 블루스처럼 비 오는 날 그냥 색칠해가지고 비오는 날의 수채화 해가지고 내 그림을 내가 그려요. 내 그림을. 그냥 캔버스에 색깔이에요 색깔. 형식이죠. 초록색깔. 그냥 색깔로 그리죠. 전혀 나는 변할 기미가 없어요. 나는 변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형식이에요.

선지자들은 내용을 집어넣어버려요. 내용을. 내용을 집어넣으면 주께서 내가 원하는 길로 못 가게 만들어요. 내가 원치 않는. 왜 나는 나 중심으로 살거든. 내 이름으로 살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을 무슨 이름으로 바뀝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바뀌게 하시는 거에요. 주님의 이름은 이 전체에요. 전체를 다 아는 거에요. 주님의 이름은.

그러면 나는 뭐합니까? 뭐 하는 게 없지요. 그러면 성도는 평소에 하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자기의 이름으로 살게 되면 성도는 짤리는가? 너는 탈락이야! 땡 탈락! 이렇게 되는가? 아닙니다. 성도에 대해서는 진행 과정을 보게 해요. 병원 진료 수납처에 간호사가 앉아있잖아요. 의사가 9시부터 진료한다면 8:30부터 앉아있어요.

그러면 간호사가 쪽지 주고 먼저 온 사람부터 하기 위해서 이름 적으시고 주민번호 앞자리 적으세요 이렇게 한다고요. 이름 적고 적는데 정형외과에 나이 많은 사람 있어가지고 이름 적는걸 안 적어요. 그럼 간호사가 와가지고 김옥자분 생년월일 어떻게 됩니까? 물어요. 그러면 45년생입니다. 연세 많은 분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데 이 병원이 95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운영한다고 봅시다. 그러면 간호사가 묻는 생년월일이 점점 더 20년대 출신 30년대 출신은 호명이 안돼요. 다 죽었으니까. 하나의 필름처럼 뭐가 주류가 되느냐 하면은 1970년도 80년도 사람이 주류가 되는 거에요. 좀 더 세월이 가면 2000년도 태어난 사람이 주류가 되는 거죠. 하나의 필름처럼 지나가는 거에요. 아까 그걸 뭐라고 했는가. 회전초밥. 가만히 있어도 없어질 사람들은 싹싹 빠지는 거에요. 병원에서도 자기 이름이 빠지는 거에요. 자기 이름이.

그러면 병원이잖아요. 병원은 치료하고 갱신하는 그런 일이란 말이죠. 그러면 내 이름으로 살던 사람을 영원에 집어넣을려면 뭐로 바꿔야 하느냐. 주님의 주민등록으로 바꿔야 돼요. 주님의 주민등록으로. 어떤 환자들 보면 실례지만 연락해야 하기 때문에 전화번호 말하세요 하면 010 해놓고 몰라요. 남의 전화번호는 외워도 자기 번호는 못 외운다고요. 자기 번호가 저장이 안 되어있으니까. 평소에는 못 외우잖아요. 잘 못 외운다고요.

주의 이름이 호명할 때는 다윗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할 때는 나의 이름은 잊어버려야 됩니다. 그걸 삭제시키고 소멸시키고 내 이름은. 이렇게 살아야 돼요. 언젠가 수십 년 지나면 병원에서도 호명하지 않는 이미 사라질 그 이름을 붙들지 못하게 해요. 왜? 그거는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거는 전체성이 아니거든요.

내 이름으로 해버리면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만 사귑니다. 그들의 전화번호와 이름만 기억해요. 이 사람들이 불평을 하는 거에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자기 당 만들고 국민의 힘, 민주당 만들고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게 뉴스 나오는 거에요. 왜 사과 한마디도 없이 일본한테 우리 기업이 배상해가지고 그렇게 배상하는 게 어디 있냐. 돈 줘도 안 받는다 그렇게 하거든요. 그게 전체성입니까? 이게 전체성이에요? 자기만 생각하는 거죠.

피해자를 위하지 않는 게 이게 나라냐. 지금 무엇을 하느냐 하면은 어떤 국가든 자기중심 쪽에서 못 벗어난다는 말씀을 하는 거에요. 자기중심 쪽에서. 자기 이름을 스스로 지워버릴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세상은 내 중심이 되어야 만족해요. 그랬던 사람이 아브람, 야곱, 이삭이었습니다.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무엇과 무엇으로 바꿉니까? 그 사람 이름을 주의 이름으로 바꿔버립니다.

바꾸는데 어떻게 바꾸는가. 동전은 사물체입니다. 사물체. 이거는 물질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사는데 주인이 찾기 전까지는 내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몰라요. 그걸 몰라요. 그러면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누구 중심으로? 그냥 꾸역꾸역 내 중심으로 사는 거에요. 내 인생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도 봐주겠지 이런 식이에요. 지금 이 이야기를 누구 앞에서 합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 앞에서 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아무리 해도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지금 너희들이 잃어버렸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거에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은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지? 그렇지? 이렇게 되는 거에요. 전체가. 우리는 나밖에 모르고 전체는 주님이 아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어서 우리가 전체를 알아가자. 이건 아니에요. 우리 안에 전체가 다 담겨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똑바로 해라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전체를 계속해서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지요. 우리 안에서 주님이 자신의 성의와 열의와 자신의 명예와 체면과 자기의 공로를 다 우리 안에 동전 하나에 지나지 않는 우리 안에다가 사물체에 지나지 않는 우리 안에다가 그걸 다 집어넣었어요. 다 집어넣고 어떻게 하느냐? binge watching, 뚫어지게 보기. 딱 쳐다보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리가 내 것이 아니고 주님 자기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눈 돌리지 않는 거에요.

따라서 잃어버린 동전은 없습니다. 다만 주님이 잃어버린 동전으로 등장하는 거죠. 주님이 잃어버린 동전으로 등장하고 아버지가 당신 아들을 부활로 되살려주는 절차가 일단 마련되고요 그 절차를 이제는 예수님이 아버지가 자기에게 했던 똑같은 행세, 똑같은 작업을 어느 인간도 자각하지 못한 내가 잃어버린 동전이라고 자각하지 못한 자에게 잃어버린 동전이라고 자각을 해주고 알아서 기어오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찾아가서 그래서 하늘나라의 잔치를 벌리게 만들게 라는 비유가 동전비유입니다.

찾는 게 그냥 무성의하게 찾는 게 아니라 쓸고 닦고 다 찾아요 여기 보면.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았다. 동전 하나에 에너지가 더 많이 들었어요. 에너지가. 이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노아언약, 다윗언약 이런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가 찾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사람이 아플 때 비로소 본인의 자기 모습이 돌아와요. 아플 때. 아프면 일단은 사람이 무능력하게 돼요. 사람이 아프면 무력하게 돼요. 뭘 할 것도 없고 할래야 몸이 움직여지지 않고 해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무력하면 인간이 아닙니다. 뭐가 되느냐? 사물 돼요. 사물체. 집안에 누워 있는 동전 같이 스스로 힘으로 못 움직여요. 아플 때는. 일어서는 것도 뭐 딛고 일어서야 돼요. 딛다가 또 테이블 쪼개져요. 세상에 되는 일이 없어요.

“주여 일어서고 싶습니다” 하면 주님이 “그냥 누워있어. 일어서지 마. 너는 이미 시체야” 건강할 때 내 모습이 아니고 아플 때가 내 모습이에요. 아플 때가. 간만에 제 모습 돌아온 거에요. 간만에. 건강은 보너스고요. 사람이 건강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까불기 시작하는 겁니다. 까불기 시작해요. 범죄도시2에서 마동석이 깡패 꼬마한테 너 이름이 뭐야? 까불인데요. 까불고 있어! 자기 이름 이야기했는데 왜. 주의 이름을 이야기해야지 왜 자기 이름을 이야기 왜 합니까.

사물체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인생을 책임질 수 없는 입장인 것을 현저하게 또렷하게 매일같이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추가적인 주님의 능력이 거기서 발휘가 되는 겁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제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찾을 때 어떻게 하느냐? as if. 마치~~인 것처럼 이렇게 살아갑니다. 건강한 자는 마치 뭐한 것처럼? 아픈 사람처럼. 돈 있는 사람은 마치 돈 없는 것처럼. 믿음 있는 사람은 마치 믿음 없는 사람처럼.

이 믿음 없는 사람처럼 되는 게 뭐냐 하면은 교회 와서 교인들이 만날 때 너도 안 믿고 나도 안 믿고 그래서 대화가 돼요. 교회 교인들이 대화가 잘 되는 이유가 둘 다 예수를 안 믿어요. 아무도 안 믿어요. 왜? 사물체니까 시체니까 아무도 안 믿습니다. 내가 안 믿는다는 사실을 as if를 통해서 마치 믿는 것처럼 했다는 소식이 들어올 때 그게 바로 주님이 추가적으로 그 사람과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음으로써 숨겨진 주님의 본 내용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내용이 드디어 발현되는 겁니다.

그 대목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행전 17장 24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아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형식에 절대로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것 제끼고 제끼고 제거하고 제거하고 다 끄집어냅니다. 터키 케밥처럼 긁어내고 긁어내고 긁어내고 남는 거 뭐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살아야 그게 신앙인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요것도 계시지 않고 요것도 계시지 않고 요것도 계시지 않고 아무것도 없어요.

코 자르고 눈 자르고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내가 살고 내가 있는 것은 이것은 주님이 친히 동전으로 만든 친히 자기의 전체성의 일부로서 우리를 이 땅에 심어준 거에요. 만들어준 거에요. 이 사도행전 17장 24절 이 한 귀절만 해도 한국교회 비판 한 달 동안 비판할 수 있어요. 전부 다 하자는 거에요. 뭘 해. 계시지 않는데 거기에.

주님이 했으면 나는 못했다가 나와야지 왜 자기가 했다가 왜 나옵니까. 인간이 했다는 곳에 하나님 계시지 않습니다. 이건 제가 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지 않는데 마치 한 것처럼 느껴지네요. 그게 신앙이잖아요. as if이니까. 마치 ~~~인 것처럼. 내가 인생을 내가 사는 것처럼 했지만 사실은 내가 아니올시다. 나는 동전일 뿐입니다. 주님의 전체가 품어진 동전.

자, 그러면 두 번째는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25절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아 이게 무슨 뜻이냐 말이죠.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다는 말은 평소에 주님의 계명 받고 살았다는 뜻이에요. 반대로. 나는 사람의 뜻으로 전한 게 아니고 주의 뜻으로 전한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다는 말은 주님께서 뭘 허락했느냐 하면은 받은 계명 없음에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의견을 이 고린도전서라는 성령 받은 계시에다가 주께서 집어넣어줌을 인정해주는 거에요.

그걸 인정해주는 이유가 있어요. 인정해주는 이유가 29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그 다음에 뭡니까? “없는 자 같이 하며”. as if 죠.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하나님의 성도가 주님의 계시에 참여하는 유일한 방식은 나 아닙니다 라는 방식으로 참여한단 말이죠. 이걸 내가 했습니다 라는 것은 거절해요. 나는 지금 뭣도 모르고 주님에게 이끌려왔습니다를 하는 거에요. 여기에 대해서 쉬운 예가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를 볼 텐데 두 개의 차이점을 대번에 알아요. 뜨거운 냄비가 있습니다. 뜨거운 냄비인데 식은 줄 알고 그 냄비를 들고 이게 뜨거워요. 뜨거울 때 그 든 사람이 계산합니까? 지금 많이 뜨겁다. 많이 뜨거우니까 이걸 내가 놓을 것인가 그렇게 합니까? 그냥 본능적으로 놔버려요. 어떻게 합니까? 뜨거운 순간 뒤에 잔소리를 하든 말든 지금 나도 뜨거움을 감당 못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as if. 인위적으로 조작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주의 말씀으로 살고 주의 계명이다 이게 아니라 그냥 들이닥친 거에요. 성령이 들이닥치니까 몰라 나도. 왜 냄비를 놨는지 몰라. 냄비를 놓은 것과 냄비를 들고 가는데 저쪽에서 라면 똑바로 끓였어? 전에 같이 퍼지게 했어? 해서 에이 성질난다 해서 냄비를 던지는 것과 그 차이점을 아시죠? 냄비를 의도적으로 던지는 것은 as if 가 아니에요. 나 한 고집한다 이런 뜻이거든요. 나 실제 한다 이 말이거든요. 인간은 허상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허상적 존재로 간주해요.

그 예가 욥에 나오는데 언젠가 대구 강의에서 설명했는데요.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식상하지만 한번 들어보세요. 악마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요. 야고보서에. 인정하지요. 마귀가 하나님을 인정한다고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마귀보고 물어요. 너 세상에 갔다 왔나? 갔다 왔습니다. 갔다 오니까 세상에 욥처럼 신앙 봤냐? 이렇게 나왔어요. 시비를 누가 겁니까? 괜히 가만있는 악마를 건드려요. 마귀는 가만있었어요. 있는데 답변을 요구하는 거에요. 욥처럼 괜찮은 신앙을 봤냐? 이렇게 하니까 마귀는 하나님은 인정하되 뭘 인정 못하느냐 하면은 주의 백성과 주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자기 라이벌이기 때문에. 심판주가 주가 되거든요. 이게 시편 110편에 나옵니다. “내 주께서 주에게 원수를 발아래 둘 때까지” 이 말은 예수님이 할 일은 악마를 발아래 두는 그 일.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하는 일은 뱀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일. 그걸 해야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인간은 배제됩니다. 욥은 사정도 몰라요. 그냥 농사짓고 이렇게 살아요.

모든 결정은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마귀가 다 결정해놓고 그 내용을 형식이라는 이 땅의 인간 형식에다가 그냥 일방적으로 체스 하듯이 장기 하듯이 이렇게 움직이는 거에요. 이 점이 기분 나쁩니까? 우리가 로봇이냐 이렇게 나올 거에요? 이렇게 하니까 마귀가 욥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하나님을 믿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에요. 여기서 주님께서는 욥에서 뭐를 끄집어내느냐 하면은 주님을 끄집어냅니다.

욥이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바꿔요. as if로 바꿔요. 신앙인인 것처럼 만들어요. 만들어서 거기서 주님을 끄집어내고 신약에 와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욥 같이 다룹니다. 마치 신앙인인 것처럼. 왜냐 하면은 네가 신앙인이 아니라 주님과 욥과의 관계, 동전을 잃어버리지 않는 끈질긴 관계, 이게 바로 신앙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신앙은 소유용이 아니고 주님의 끈질김입니다. 끈질김. 이걸 가지고 이사야 11장에서는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주님께서는 건집니다. 왜 우리 열심은 인정하지 않느냐. 그렇게 되어버리면 신앙의 주체가 인간으로 내려와버려요. 주님은 몇 분이어야 됩니까? 두 분이어야 됩니까? 한 분이어야 됩니까? 주님은 오직 한분이어야 돼요. 그래서 주의 이름이 돼요. 주의 이름은 하나의 이름이 돼야 돼요. 그런데 우리 이름은 as if는 여럿이 돼요.

크레파스 통에 색깔이 10가지 20가지 있어요. 그러나 그 크레파스에 통은 오직 하나에요. 우리는 그분의 지체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를 대신할 수 없어요. 주의 완전체 주의 전체가 포함되어 있어요. 눈이 코더러 쓸데없다고 발이 눈더러 쓸데없다고 못해요. 똑같은 동질의 것이 주의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더라도 성령은 나도 주다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은 오직 따로 계시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너는 뭐냐? 마태복음 10장 보겠습니다. 10장 20절에 보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우리는 형식이죠. 내가 말했다 라는 경우가 생기지 않는 경우는 나로 하여금 억울하게 일방적으로 악인에게 넘겨줄 때 그때 우리말로서 나오는 게 아니고 성령이 그 타이밍에 따라서 성령이 우리 대신 말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왜 성령이 우리 대신 말하느냐? 우리가 말해봤자 안 먹힌다는 것 세상 권력 앞에 소수의 양 한 마리가 먹힐 리가 있습니까. 언제 나라가 성도의 말 들었습니까? 안 먹힙니다. 먹히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한 단체가 있지요. 복음학교. 기도하면 응답한다는 거에요.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한답니다. 응답은 뭐가 응답이냐 하면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게 응답이에요. 왜? 나의 주인은 이미 나에게서 뺏어갔어요.

일방적으로 묻지도 않고 나한테 와가지고 일방적으로 나를 죄인으로 가져가가지고 주님만이 주가 되신다는 것을 활용하는 그 세계에 우리 허락도 없이 가져가버렸어요. 그 전체 속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그냥 잠시 변화하는 형식이에요. 그것도 고정적이지 않아요. 성격도 바이브레이션 많아요. 어떨 땐 기뻐했다 어떨 땐 삐졌다가 헌금 2만원 깎았다가 추가했다가 우리는 그야말로 신앙인인 것처럼 마치 믿음 좋은 것처럼 하는데 진짜 신앙인 특징이 뭐냐? 내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누굴 믿겠습니까? 자기 신앙 재주를 믿지 않고 주님의 관계를 믿지요. 그게 하나님의 의라는 겁니다. 욥이 마지막에 알게 된 것은 그렇게 말 많던 욥. 궁시렁 궁시렁 궁시렁 궁시렁. 맨날 인간과 인간하고 상대해가지고 내가 너보다 낫잖아. 대구강의에서 사람과 상대하지 말라고 했어요. 똑같은 as if 끼리 뭘 할 게 있어요. 둘 다 아무것도 아닌 허상들인데. 그 진짜 허상은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나를 이용한다는 그 이용당함이 어깨에 메시고 함께 율동 맞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그런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속에 주님의 모든 공로와 전체성이 다 품어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만약에 누가 미워하거나 싫어하면 그 사람은 저주받게 되어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동전이었고 잃어버린 양이었습니다. 우리가 성취해야될 일이 아니라 주께서 다 성취했음을 적용시켜주는 그래서 우리 자신을 주님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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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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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