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30316b 베드로후서 3장 12절(새로운 전체)-이 근호 목사
서울강의20230316b 베드로후서 3장 12절(새로운 전체)-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16절에 보면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했어요.
멸망 가는 길을 자력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어디 있다? 성경 자체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람이 성경을 보는 이유는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 보는 거죠. 멸망에 이르려고 성경 보지는 않잖아요.
사도 베드로가 16절 같은 이런 말씀을 빼든지 해야지, 괜히 이런 걸 딱 놓으니까 그다음부터는 사람들이 성경 볼 때 조심해서 성경을 풀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조심해서 푸는 것은 셀프 성형입니다.
조심해서 푼다는 말은 평소에 구원받는 것도 자기가 조심스러운 성격에 입각해서 구원에 접근해왔다는 그 본색이 고만 들통나버린 거예요. 조오심 조오심 멸망에 이르지 않게 조오심 조오심 천로역정 가는 것처럼. 천국 가는 길에 앞뒤 살펴가면서. 어디 뭐 한문철 변호사 이야기입니까? 교통신호 주의해서 벌금 적게 내고 이런 거예요, 천국 가는 길이?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편지 속에 육체의 소욕이 어디서부터 육체의 소욕이 나오냐 그걸 한번 우리가 생각해봐야 돼요. 육체의 소욕이 인간의 육체가 마귀와 더불어 있다, 제가 아까 그렇게 했잖아요. 이걸 좀더 알기 쉽게 말하면 인간이 있는데 악마가 붙어있는 이런 식이 아니고 악마가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이걸 돔(dome)이라 하죠, 돔. 장충체육관 같은 데, 지금도 장충체육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의 지붕으로 다 덮는 그 세계의 신이 누구냐? 이 세상 신이 사도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악마입니다. 악마를 이 세상 신이라 했어요. 돔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내가 바르게 살아야지, 아무리 애를 쓴들 육체는 이미 무엇의 성질에 푹 젖어 있느냐 하면... 김장 김치 배추할 때 소금에 절인다는 말이 있죠. 인간들의 육체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악마에 푹 젖어 나옵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 했는데 그 죄가 뭐냐? 그 죄가 바로 창세기 3장의 하나님 지시와 반대된 것인데 그게 살고자 하는 거예요. 어떤 이유로든지 살고자 하는 것. 내가 하는 행위와 태도와 그리고 말과 말씨와 모든 행동을 통해서 이게 어디로 모아진다? 내가 하루하루 보다 더 나를 살게 하는 용도로 이것을 발산할 때, 그걸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규정할 때, 아까 했죠, 넓게 보면 we are all dead. 우린 다 죽도록 되어있어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후손들이 아무리 오래 길게 살았다 할지라도 사는 기간보다 죽고 난 뒤의 기간이 더 긴데 뭘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900살 가까이 살아도 태어나서 애 낳고 죽었다. 태어나서 애 낳고 죽었다. 죽었다의 반복으로 연속되는 겁니다.
이 창세기 5장의 말은 인간이 달라도 죽음은 하나다 이 말이에요. 아무리 인간이 남녀가 구분되고 뭐가 성격이 다르고 DNA 다르다 할지라도 죽음의 DNA는 한결같다 이 말입니다. 거기서 인간은 못 빠져나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이 세계, 돔의 세계는 바로 죽음의 세계입니다. 죽음의 세계에서 살고자 하니까 여기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반발과 반항기. 반항과 반발기.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니까 징벌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더 하나님께 욕설을 퍼붓는 대목이 나와요. 회개하는 게 아니고 욕설을 퍼붓는 거예요. 그냥 곱게 살면 안 됩니까? 이런 거예요.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멘트 있죠. 그냥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너희들 배다른 남맨데? 남매든 뭐든 간에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가자, 인도네시아로. 옛날 드라마에 그런 게 있어요. 가란 말이야. 돈이면 다야? 그런 대사 나오는 거 있어요. 제발 좀 우리 둘이 사랑하게 그냥 내버려둬요, 좀. 간섭하지 말고. 뭐 이런 거요.
그런데 그게 더 발전하면 그냥 나 조용하게 살 테니까 나를 좀 괴롭히지 말고 나를 힘들게 하지 말고 그냥 사는 것처럼 가만 놔두면 안 됩니까? 이것은 하나의 반발이고 반항이죠. 세상은 왜 모질게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냐. 왜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야. 그렇게 해놓고는 이유에 대해서는 몰라요.
그래서 제가 이유를 네 가지 적어왔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가 반발하고 반항하고 세상 살면 살수록 하나님께 대들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가 뭐냐? 자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네 가지 적대감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셨어요.
첫째는 모든 가치를 돈으로 측정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모든 가치를 돈으로 측정함으로써 여기서 인간의 품위, 고요한 품위가 나중에 커가면서 따뜻한 어머니의 정, 형제간에 우애, 클 때는 그래요, 남매간에 서로 돕고 하는 이것. 그런데 둘다 새로운 식구들이 오게 되죠. 여자는 남편, 아들에게는 며느리 들어오면서 모든 가치가 남매간 형제간의 우애 그런 것 다 날아갑니다. 얼마면 돼? 전부다 부모와 자식 간에 돈으로 다 되죠.
너한테 그 돈 주고 나면 나이 70넘은 우리 늙은 부부는 뭐 먹고 살라고? 그렇게 나이 40,50때까지 도와주면 됐지 이 나이까지 또 너를 뒷바라지해야 되나? 이 늙은 우리가. 너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아? 지금 나무라는 거 아닙니다. 그럼 자식들이, 어머님 섭섭합니다. 어머님은 그런 어머니인지 몰랐습니다. 다시는 내가 찾아오는가 보세요. 여보, 가자. 어머니 생신이고 뭐고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거 좀 자식이 클라고 할 때 약간만, 한 2억 5천 약간만 도와주면 될 걸. 3억 정도 약간만 도와주면 될 걸 가지고 자식 망하는 게 그리 좋습니까? 악담을 늘어놓죠. 아유, 더러운 세상. 이러면서. 자기가 더러우면서 무슨.
두 번째가 역시 다 적대감이라 어쩔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도록 만들어놨어요. 자연과의 적대감. 자연훼손. 그놈의 태풍, 가뭄, 지진은 왜 허락도 없이... 산불, 계속되는 고온현상, 싸이클론, 태풍 이런 건 왜 자꾸 와가지고 공들여놓은 내 농토와 이런 걸 다 망치는지. 자연훼손. 자연과 인간의 적대감.
세 번째는 뭐냐? 아까는 인간을 돈으로 보죠. 세 번째는 인간형의 변질. 어떻게 변질되는가? 돈이 문제가 아니고 인간 자체가 이게 기계인지 인간인지 구분이 안돼요. 기계로 변해요. 인간은 기계로 변해요.
특히 21세기 들어와서 인간은 기계같이 돼요. 긴 답변도 싫어요. 딱 인공지능처럼 답변하기를 원해요. 따뜻한 우리의 회사 분위기 그런 거 없어요. 기계처럼 매뉴얼대로 딱 하고 정식 칼퇴근 끝나. 회식도 없어. 전부다 10년, 20년 처음 왔을 때 정 나눴던 것이 나중에는 상투적인 기계와 기계의 마찰로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게 되어버린 겁니다.
네 번째는 비슷한 얘기인데 거주환경이 단절된 구조. 아파트화 되어서 가구 수도 삼대가 다 모여 사는데 전부다 쪼가리내가지고 손자는 손자끼리, 그 손자들도 따로 손자, 아들은 아들끼리. 아들도 나중엔 전부다 각방 쓰고. 그것도 안 되면 집 두 개해서 별장엔 아버지 살고 자기는 서울에 와있고.
전부다 개체화. 극단적인 개체화. 가구 수가 늘어나죠.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통해서 내가 요구하는 데에 대해서 부응해주는 타인이 점점 더 희소해져요. 점점 사라져요. 따뜻하게 깊이 있게 정 나눌 대상들이, 말벗, 말을 나눌 수 있는, 말을 섞을 사람들이 점점 더 없어져가요.
그래서 이런 현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으로 언급하신 거예요. 처음부터 인간은 없음입니다. 성경대로 하면. 없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돼요.
현재 지금 이 네 가지 적대감은 출발점이 없음이 아니고 있음부터 출발해가지고 있음을 계속 있음으로 또 있음으로 이어나가다가 나중에 나 있음으로 마감되잖아요. 나 있음. 남이 있든 말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나 있음으로 나온다고요. 이 있음은 나에게 떨어지지를 않아요. 왜 있는지 물어보면 이유를 몰라요. 내가 왜 있는지. 아무도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고 이야기해줄 사람도 없고 그런 능력 있는 사람도 없고.
있음이 있음으로 있으니까 사회는 이래요. 사회는 적대감이 늘어나는데 인간은 있으니까 자꾸 있음으로 가면서 여기서 뭘 찾느냐 하면 여기서 꿈과 희망을 원하고 있습니다.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거예요.
현실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나이 열 몇 살, 스물 몇 살까지는 아직 가족 정이 남아있어요. 그런데 사회 나가면 사회가 가족 정을 나눌 시간 틈을 주지 않습니다. 가족 시간하다가는 회사에서 잘려버리는데요 뭐. 잘리면 경력단절 돼서 다시 재취업하기 힘들어요. 회사는 기곈데요. 기계 속에서 사람 구실하려고 하다 보니까 기계가 용납 안하죠. 생산성 약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는 현실은 바로 이 네 가지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꿈과 희망이죠. 그러니까 현실은 이 네 가지인데 왜 나는 동떨어져서 현실을 현실로 안 받아들이고 되지도 않는 꿈과 희망을 추구하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이 현실세계에서 보면 이렇게 돼요. [꿈과 희망은 집착이며 곤경을 기피하려는 이론으로 무장한 비겁함이다] 꿈과 희망은 비겁함이에요. 현실은 이 네 가지인데 우리는 위로랍시고 하는 게, 힘내. 뭔가 나중엔 좋은 날 있을 거야.
그렇다면 제대로 현실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쪽은 어느 쪽입니까? 하나님 쪽이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만들어준 현실은 이겁니다. 모든 세상은 불바다 된다, 이겁니다.
따라서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 성도의 희망이에요.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절망을 기다리는 용기] 절망을 기다릴 줄 아는 용기, 이게 자유입니다. 그게 의의 약속한 바에요.
이것은 악마로 구성된 돔 있잖아요. 이걸 아까 전체라 했죠, 전체. 이 전체가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뒤에 준비된 전체,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래서 왜 성경 풀다가 멸망합니까? 나를 여기 절망 속에 넣으면 되는데...... 기어이 내가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것을 고대하면 되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어제 수요일에 했듯이 스데반 집사 아닙니까. 스데반 집사는 그날을 기다렸어요. 자기가 죽는 날을. 세상에 속한 내가 주님께 속한 나라의 전체 중 일부로서 드러날 그날을 기다린 겁니다.
그런데 다른 외부인 3자가 볼 때는 스데반 집사는 절망을 절망적인 사태를 자기가 의도적으로 시도한 바가 되죠. 입 다물고 있으면 될 걸 괜히 말해가지고 돌멩이란 돌멩이는 죄다 다 던져가지고 그 동네 돌멩이가 없이 깨끗했어요. 자기는 돌멩이 무덤 속에 있고. 그런데 그 돌멩이 무덤에 누가 서 있느냐? 사울이란 사람이 서 있죠. 그 광경을 사울이 주도했고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전체가 이 땅이 멸망해야 그다음 비로소 나타나는 게 숨어있는 다 이루었다의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건 아니고 꿈과 희망을 원하지만 주어진 것은 말씀이 주어지거든요. [준비된 전체는 매순간 새롭게 창조된다] 이 새로움. 새로움의 현장이 뭐냐? 성도가 있는, 이 세상에 사는 자리입니다.
성도는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직도 주님은 우리 목숨을 데려가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곧 계시니까. 성도의 삶이 곧 계시이니까요. 그게 흠과 티가 없는 거예요. 완벽한 거예요. 왜? 새로우니까.
옛날 못한 걸 수리한 게 아니고 아이고, 옛날에 뭐 술을 많이 마시고 담배를 못 끊었는데 담배 끊어야지, 이게 아니라 술, 담배에 속한 그 옛날보다 전혀 다른 그것과 단절되어 있는 연속적이지 않은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어설프기 짝이 없고 허접스러운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말씀으로 그 자유함을 드러내니까 이것보다 더 새로운 게 어디 있어요.
“아이고, 연세 많은 사람 이제 연세 다 되가지고 낙이 없죠?” “내가 연세 늙어가는 게 낙이다, 야.” “아니, 그거는 뭐 처음 듣는 말인데.” “그래, 너는 처음 듣는 말이지. 네가 따라오려고 하면 네 멸망에 빠져. 따라하지 마. 미혹에 빠진다고.” 있음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고 말씀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말씀에서 출발하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말씀드릴 것은 그 전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성경에 어떻게 드러나 있는가? 그것을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걸로 지우라 했으니까 이걸로 지우겠습니다. 잘 안 지워지네. 다른 지우개로 처음부터 지우고 싶어도 이걸로 지우라는 것이 새로움으로 다가오니까 새로움을 써먹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면.
이스터 섬(Easter Island)이라고 있어요. 뉴질랜드와 페루가 있는 남태평양 거기에 석상이 있습니다. 모아이(Moai) 석상이죠. 모아이 석상이 있는데 석상의 특징이 얼굴에 귀, 코 있는데 석상 몸뚱이는 지면에 나와 있고 밑에 발은 땅에 묻혀있어요. 묻혀있다고요. 세상에 모아이 석상까지 일본에서 이걸 그대로 베껴가지고 자기 나라에도 만들어놨어요. 홋카이도 가면 이런 게 있답니다. 톡파원 특파원보면 이게 나와요.
모아이 석상이 있는데 위에는 나와 있고 아래는 묻혀있어요. 성경에서는 장차 올 이 밑바닥을 불에 탈 이 세상으로 밑에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는, 실제로는 이게 위에 있는데 인간세상은 아래 있으니까 위가 전혀 안 보이는 거예요. 이게 전체 석상이에요. 그게 성경에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를 몇 구절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창세기 9장 14절에 보면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그다음에 “내” 뭐라고 되어 있어요? “내 언약”이죠. 말이 아니라 실제 이 세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표현이 언약인 거예요. 언약.
보통 노아 언약은 방주잖아요. 그런데 방주는 이미 노아 식구를 태워서 날라가버리고 노아 언약의 연속성, 노아 언약이 지속될 때에 노아 언약에 의해서 이렇게 구성이 돼요, 세상이. 저 위에는 뭐가 있다? 무지개. 아래쪽은 뭐냐? 아래쪽은 심판이 잠재되어 있는 세계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제가 방금 이야기한 옛날에는 물로써 망했지만 앞으로는 불로써 망한다는 그 대목과 연관시켜서 생각하시면 쉽게 됩니다.
무지개가 뭐냐 하면 무지개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본다, 이게 무지개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 대상으로 봤다. 어떤 조건 하에? 언약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언약 완성을 위해서 이 세상은 일시적으로 심판의 대상으로 연명하면서 현재 하나님이 그냥 잠시 쥐고 있는 상태에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전에는 물로 멸망했지만 마지막에는 불로 멸망받기 때문에.
무지개라는 것이 뭔가 비가 왔다는 증거거든요. 비가 왔는데 하나님께서 물 심판 그만하는 조건 하에 무지개가 뜬 겁니다. 그래서 노아 방주가 뭐로 전환되었다? 무지개로 전환되어서 전체 이 세상 끝날까지 그 원칙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그런 표증으로써 rainbow, 이 무지개가 떠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에스겔 1장 28절 봅시다.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아까 모아이 석상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2층 구조로 되어 있어요. 아래쪽에는 무서운 숯불이 있어요, 에스겔 1장 13절에. 아래쪽에는 무서운 숯불이 있고 층이 2층으로 되어 있어서 아래쪽으로는 무서운 숯불이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천사가 그 기능을 담당해요. 천사가 심판의 기능을 한다고요. 불로 싸질러버리는 기능을 하고 있고 아래쪽은 굉장히 요란스럽고 시끄러워요, 심판한다고. 위쪽에는 조용해요. 조용하고 굉장히 평화로워요. 무지개가 떠있는 거예요.
무지개는 심판했는데 일시적으로 마감되었다. 이제는 평화롭다. 이게 노아 언약에도 노아 홍수 위에 평화의 모습으로 무지개 떠 있잖아요. 심판하고 난 뒤에 평화로운 그러한 상태에 돌입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지개가 있는 것처럼, 일단은 심판이 있었다.
그때 심판할 때 심판하는 이유가 너무나 단순해요. 뭐냐 하면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그들은 신뢰하지 않았다는 단지 그 이유에요. 아브라함 시대에 심판받는 이유는 아비멜렉 추장이 심판받는 이유는 아브라함의 아내를, 그것도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건드릴 뻔해서 그 집안의 모든 여자가 임신을 못했습니다. (창 20:18)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단독성을 강조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린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특정성, 특정 인물을 등장시키는 거예요.
노아 방주에 들어오면 사는데 거기에 안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무슨 짓을 해도 그건 전부다 찰랑찰랑하는 물에 잠겨버려요. 완전히 물에 다 잠겨버렸어요. 여기서 나온 노래가 유명한 찰랑찰랑이에요. 찰랑찰랑~
안에 다 들어있다니까요, 이 안에. 인품 좋고 성격 좋고 뭐 우리 서로 사랑하게 해달라 그런 소리 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문제는 그걸 묻는 게 아니에요. 특정성이에요, 특정성. 주님이 일방적으로 딱 꼬집어서 하는 거기에 대해서 관심 없을 때, 저주에요.
이 말은 뭐냐? 이왕 저주된 거예요. 벌써 저주된 거예요. 그래서 저주 안 받는 게 이상한 일이에요. 멸망 안 당하는 게 이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게 희한한 일이고 어찌 그럴 리가. 멸망해야 되는데 지옥 가야 되는데 왜 지옥을 안 가지? 그걸 의아해해야 합니다. 적어도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기분 좋아하면서, 이럴 수는 없습니다. 반항 아닌 기쁨의 반항을 해볼 줄 알아야 돼요. 주여, 제가 뭘 했다고 구원 받습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 통촉 많이 해주세요, 전하.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정녕. 뭐 싫어? 아닙니다. 너무 좋아서 했습니다.
이게 바로 모아이 석상, 양쪽 다... 어떻게 눈에 보이는 네 가지의 적대감으로 혼란에 빠진 이 세상만 보이는 게 아니라 다른 전체가, 가리워진 윗부분이 어떻게 보이냐는 거예요, 윗부분이. 언약이 왜 보이냔 말이에요, 무지개 언약이. 맹렬한데. 그 맹렬한 심판 뒤에 위에 평화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맹렬한 이것이 전부라고 알고 있겠죠.
특히 그 아는 데에 기여한 학문이 뭐냐 하면 양자물리학 아닙니까. 양자물리학.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 생물학, 화학. 노벨물리학상 뭐 그런 상. 노벨상. 모든 인간의 지혜는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이 지구호를 살려라, 이거잖아요. 지구호를 살리는 데에 기여한 사람은 상 줄게. 50만 달러의 상금을 걸고. 그게 노벨상이다 이 말이죠.
성도가 보기에는 그냥 웃죠. 뭐하냐, 너? 뭐하니? 질소가 어떻고 산소가 어떻고 원자, 전자, 양자. 양자를 논하고 파동방정식을 논하고 그렇게 해서 정확하게 정확하게 우주의 역사는 137억년, 인류의 역사는 52억년 어떻고 저떻고 47억년 뭐 이렇게 하는데. 크로마뇽인이 있기 전에는 네안데르탈인이 구부정하게 걸었다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바로 서고.
성도가 있다면 뭐하니 너, 지금? 출발점이 뭐야? 말씀이야, 아니면 어디야? 네가 하는 이야기는 있음에서 있음의 요소를 끄집어내서 다음 있음을 구성한 거예요, 그게. 있음에서 있음으로. 그러니까 그들의 주장은 뭡니까? 이러면 우린 다 망한다, 가 없어요.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꿈과 희망에 대한 집착이고 이것은 비겁함의 신호다.
터널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터널 안을 헤매고 있었어요. 꿈과 희망을 찾아서 터널 끝에는 뭔가 거기 햇빛이 비치는 곳이 나오겠지. 보는데 빛이 보여요. 가만 보니까 점점 더 빛이 밝아져요. 보니까 자기 자신이 서 있는 곳으로 박치기하기 위해서 거기서 나를 향하여 치려고 달려드는 기차의 헤드라이트였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마주치는 절망과 대충돌하는 일만 남아있습니다.
인간의 양자물리학, 인간 천재들, 우주 역사가 어떻니 지구 역사가 어떻니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결국 그 사람들이 그거 연구하다가 나이 80되고 90되면 죽죠. 자기가 평생 동안 연구해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바보 아닙니까.
인간은 왜 죽습니까? 처음부터 죽게 되어 있어요. 이 돔에서, 악마가 있는 이 돔 안의 모든 인간은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어요. 왜 그걸 모르냐 이 말이에요, 그걸. 영어 한번 더 배워야 되겠다. 그걸 몰라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이 공통적으로 똑같이 외친 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게 복음이다. 죽었다가 살아났다. 하나의 독특성이에요.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고, 독특성이죠. 노아의 방주에 들어오지 않는 자는 물에 찰랑찰랑 다 죽는다. 오늘날은 뭡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남을 부정하는 자는 지옥이다.
뭐 우리 가운데 학식 있는 자도 없고. 학식 없어도 괜찮아요. 이겁니다. 성령이 와서 가르쳐 주는 것은 나를 포함해서 죽어 마땅함이에요. 나를 포함해서. 첫째 시간부터 제가 강조한 겁니다. 나 빼놓고, 가 아니라 나를 포함해서 죽어 마땅함이에요.
내 안에 하나님의 다 이루신 말씀의 완성이 성령이 올 때 비로소 우리는 성령이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먹고 마시고 그거 하나 안 하나 아무 상관없어요. 교회 헌금 얼마 했는가 그거 아무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이지, 내가 뭘 했는가는 아예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그런 거는.
자, 그다음에 요한계시록 4장 3절 봅시다. 2층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요. 이 에스겔의 이야기가 계시록에서는 어떻게 완성되는가 보겠습니다. 4장 3절 보기 전에요. 요한계시록 10장 1절, 2절 보겠습니다. 그게 더 확실해요.
10장 1절과 2절, 이 모아이 석상을 그대로 빼다 박았어요.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뭐가 있죠? 무지개가 있는데 위에는 평화로운 “무지개가 있고”. 그러니까 밑에 물로 심판하고 그 위에 무지개가 뜬 것처럼 이 땅에는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3절에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이제 땅은 죽었어, 너희들. 완성했기 때문에 제발 꺼져줄래? 라는 이야기에요. 이미 완성한 나라가 있기 때문에 좀 꺼져달라는 거예요. 너희들의 양자물리학, 생물학, 과학, 철학 좀 꺼져라 이 말이죠.
이 세상에서 그런 양자물리학이나 학문은요, 자본을 재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들이에요. 어떤 지식도 돈이 되지 않는 지식은 통하지 않습니다. 반도체가 되었든 전기 자동차가 되었든 새로운 돈을 창출할 수 있어야 돼요.
아까 적대감의 첫 번째가 뭐였습니까? 모든 가치를 뭐로 측정한다? 가정의 화목 깨어지고 돈으로 측정한다. 네 큰 아들 어느 회사 다니는데? 둘째 아들 어느 회산데? 어느 회사인지가 왜 궁금합니까? 큰 아들 대기업, 둘째 아들 중소기업, 셋째 아들 농사짓고.
소 키우는데 전염병 돌고. 염소 키워놨더니 염소 병들어서 다 팔고. 과수 농사하니까 태풍불어서 다 날리고. 농협에 대출은 있어서 이자는 나가고. 힘은 힘대로 들고. 외국 노동자 안 들어와가지고 하루 품삯 10만원인데 15만원 주고. 농사짓는 거. 힘든 거. 아침에 한번만 게으르면 잡초가 우르르 쏟아져 있고. 회사 다니는 사람은 하루 회사 출근 안하면 회사 시멘트 바닥에 잡초 일어납니까? 안 일어나죠. 뽑을 필요가 없죠. 아줌마가 청소하면 끝나는 문제잖아요. 농사는 그거 다 뽑아야 되죠. 모기 파리 다 달려들죠. 거미까지 달려들죠.
이게 다 내가 못 배운 탓이다, 또 이러고 자책한다고요. 내가 못났다. 네 어미가 못 배워가지고 너희들 하나 잘 배우게 할라고 내가 애썼는데 너는 내 머리 닮아가지고 공부를 그리 못하니. 또 내 탓이요 나오는 거예요. 내 탓이요 하니까 천주교 생각나는데.
인간 탓 아닙니다. 특정 인물을 주께서 특정 인물답게 내세워서 문제에요. 문제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게 문제에요, 그게. 그게 큰 사건입니다. 큰 사건이고 그게 유일한 사건입니다. 유일한 사건. 모든 인간은 이걸 쳐다봐야 돼요.
왜 유일한 사건이냐? 언약을 유일하게 달성했기 때문에. 그 달성한 이름이 주의 이름이에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는,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내 이름 대신 주의 이름을 불러야지, 내 이름도 부르고 주의 이름 부르고 이런 거 없어요. 내 이름이 힘없고 내 이름은 저주받을 이름인 것을 인정한 가운데 내 이름 대신 주의 이름이에요. 주님이 나를 대신해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 세월은 일찍 끝나면 좋고 또 일찍 안 끝나도 또 새로움이 새록새록 매일같이 나오니까 그래도 좋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어차피 내 팔자 아니니까요. 무지개 팔자거든요. 위에서 무지개가 작동하는 대로 나는 이 땅에서 증인 노릇하면 되니까. 그것도 매일 삶이 멸망되는 세상, 쓰레기 같은 세상을 쳐다보는 그 즐거움으로.
다시 말해서 꿈과 희망이 집착에 불과하며 꿈과 희망은 다 헛것이라는 것, 이미 모든 것은 베드로후서 3장에 의해서 이미 결정 났음을 매일같이 확인해보는 그 즐거움이 편안함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게 새로운 전체에 소속된 소속원들의 하루 일과입니다.
오늘은 맑았다. 오늘도 맑았네? 이런 식으로. 또 세상에 나갔다. 세상에 나가니까 네 가지의 적대감으로 난리도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해결책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 또 한번 감사했습니다. 오늘밤 나의 기도는 저녁 제사 되게 하옵소서. 시편 141편. 그렇게 하고 주무시면 되는 겁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자, 18절 보겠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이게 뭐냐 하면 only you, 오직, 유독, 유일성이에요, 유일성. 예수 그리스도에 감히 비교할 게 더는 없는 거예요.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와 비교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고백마저도 주께서 그걸 유발시킬 때 죄인이지, 우리가 아는 죄인은 내가 측정해서 아는 죄인은 주님 앞에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새로움을 위해서 매일같이 우리 육신이 갖고 있는, 내가 모르는 죄 개발에 나서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개발팀이에요.
내 죄가 어느 정도로 묵은 누룽지인가를 캐내는, 우리 어미가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남겨준 죄가 얼마나 굳은살로 나한테 배겨져 있고 또한 내가 속해있는 이 세상, 돈벌이를 위해 속해있는 이 세상이 나에게 전달해주는 그 죄들이 어떤 성격의 죄들인지, 나에게 어떤 성격의 죄들이 날라오는지를 주께서는 친히 경험케 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이 날로 더욱더 많아지고 풍성해지는 세월을 보내게 하십니다.
이 말씀과 관련해서 또 우리가 억지로 풀면 안 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우리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3장 19절, 사도가 기도하는 기도 내용이 여기 적혀있습니다. 사도가 어떻게 기도하는지 상당히 궁금하신 분들이 있거든 사도가 17절에서 21절의 기도를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17절부터 봅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너희의 마음 가운데 주님의 사랑이 박혀있죠. 이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은 안 받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 사랑을 받으면요, 우리는 우리 바칠 사랑 만든다고 신경질 나요. 되게 고민하게 돼요.
인간은 원래 자기 사랑이 우선이기 때문에 자기 사랑밖에 없기 때문에 타인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사랑이 늘어난 거예요. 이건 반칙이죠.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다는 말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해 당신을~ 그런 나를 사랑해~ 이런 뜻이거든요.
인간은 사랑이 없습니다. 자기 사랑에 미쳐있기 때문에 crazy love에요. 자기한테 미쳐있기 때문에 사랑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이 박혀버리죠. 박혀서 새로움을 줘요. 그 새로움이 풍선처럼 늘어납니다.
그 풍선이 19절에 나옵니다. “그 넓이와 (그) 길이와 (그) 높이와 깊이가” 자, 여기서 설명이 좀 필요하겠죠. 어떻게 이렇게 풍선처럼 늘어나느냐? 이 세상 돔, 악마의 돔에 예수님이 다녀갔고 예수님을 핍박했던 그 성깔들이 그대로 고스란히 살아있는 세상이에요. 예수님을 죽도록 미워했던 그 미움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에 성도를 여기다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주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그러면 예수님이 경험했던 그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그와 동일한 마음을 갖겠습니까? 고맙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했던 그 세력이 우리에게 아주 압박감으로 찾아오죠, 압박감으로.
제가 그 예를 수요 예배 때 설명했었습니다. 덴노헤이까 반자이. 일제시대 때 예배드리고 있는데 일본 순사가 딱 여기 입회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일본 천황에게 만세 삼창하는지 안 하는지 여부를 보면서 네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예배 드리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고 맨 먼저 일본 천황한테 고개 숙이고 하는지를 순사가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순사는 어디서 온 거예요? 아까 그 네 가지 적대감으로 본다면 그 순사는 일본제국에서 왔죠. 일본제국은 힘이 무엇의 힘입니까? 무엇의 힘이죠? 자본의 힘이잖아요, 자본의 힘.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돈 힘으로, 돈이 많기 때문에 조선을 이긴 거예요. 그리고 조선은 일본에 의해서 자본 시장과 근대화에 눈뜬 거예요. 그래서 일본이 한국 근대화에 도움 줬다고 일본이 떵떵거리고, 그 떵떵거리는 수상하고 오늘 회담하고.
일본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한국이.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일본 아가씨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돈 벌다 잠시 회사 그만두고 배낭 매고 북유럽 놀러가니까 20년 후에 한국 아가씨들이 결혼할 나이에 결혼 안하고 전부다 북유럽 가서 거기서 아주 낭만적인, 우연히 만난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가지고 돌아다니면서 하잖아요. 톡파원 돌아다니면서. 거기 가면 쭉 한국 아가씨들 많이 와있어요, 거기 가보면. 거기 가야 또 자기들끼리 대화가 돼요. 의사소통이 돼요. 파리 가봤나? 뭐 이렇게 되가지고. 그게 일본이 이미 했던 거거든요. 이게 돈 힘이잖아요, 돈 힘.
그러니까 너희들에게 이 선진문물을 내가 부여하는 이 자비하심에 너희들은 군소리하지 말고 따라다니란 말이죠. 일본이 하나님 믿어서 예수 믿어서 이렇게 잘된 거 아니잖아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주변 나라가 어떤 나라였어요? 다 이스라엘보다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포진케 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뭐냐? 새로운 언약의 나라죠. 다른 나라는 뭐가 없습니까? 돈도 있고 인간 있고 다 있어요. 뭐가 없습니까?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십자가가 없는 거예요. 주님의 이름이 없는 거예요. 결국 그들은 나중에 이스라엘도 망하고 둘다 다 망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냥 천국 오지 말고 예수님이 얼마나 시련과 아픔을 견뎠는지, 얼마나 이 세상 살면서 네가 뭐 괴롭습니다, 아픕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보면 나와요. 네가 백날 아파봐라. 나만큼 아파봤어? 네가 고생했다고 해도 나만큼 고생해봤어? 네가 기도 해봐도 나만큼 이렇게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해봤어? 안했으면 말을 하지 마 그냥. 잠시 네가 흉내 내게는 내가 해줄게.
왜 그렇게 하시는가? 가짜를 치밀하게 걸러내요. 가짜를.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일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 충성, 봉사 소용없어요. 성령 없으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아니고 예수의 사람이 아니면 그것은 천국 백성 아닙니다. 그대로 갈라지는 거예요.
갈라내면서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제가 한 게 전부 다 죄였습니다. 그들과 대화하고 맞서 싸운다고 순교한다고 까불거리는 그 조차도 주님의 행하심과 견줄 수가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주님 다 하셨지, 내 착함이 보태져서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실제 삶을 통해서 그 깊이와 높이가, 처음에는 “주님이 진짜 고맙습니다.” 하다가 “정말 주께서 혼자 다 하신 것, 이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이것은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가 점점 그게 가득 차기를. 풍선 속에 헬륨 가스만 차지 마시고.
풍선 속에 십자가의 그 사랑, 터 박힌 사랑만 계속 커져 나가는 거예요. 커져 나오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는 예수님이 커진 게 아니고 그 교인이 점점 사랑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본인은 갈수록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가는 거예요. “아이고, 성도님 성화 많이 되었네요. 어떻게 교회 봉사를 다 합니까?” “내가 뭘 봉사한다고. 이것도 죄인데 뭘 봉사라고 해요.” “아이고, 또 거기다 겸손하기까지 하네.”
네 마음대로 해석해, 네 마음대로. 하여튼 나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내가 감사한 것은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죄 뿐인데 이걸 이미 다 용서로 끝냈다는 것. 그리고 목숨 주셔서 봉사하게 하셨는데 봉사가 내일로 끝날 수도 있고 그것은 내 소관 아니라는 사실. 그 자유함을 여러분이 만끽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로운 전체가 있기에 사도 베드로가 마음 놓고 이 세상의 멸망을 주저 없이 외쳤습니다. 이로써 사도가 얼마나 욕 얻어먹었으리라는 것을 예상한바 저희들도 발설될 이 말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수모로 다가올지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그것조차 주의 사랑의 크기로 가늠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