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30316a 베드로후서 3장 12절(새로운 전체)-이 근호 목사
서울강의20230316a 베드로후서 3장 12절(새로운 전체)-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3장 12-13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런데 그때 불에 타서 풀어지는 게 뭐냐는 거죠. 불에 타서 풀어지는 것. 전체입니다. 불에 타서 풀어지는 대상, 이것이 전체입니다. 그러면 그 전체에 우리가 포함됐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전체에 우리가 포함됐습니까? 포함되어 있죠. 그러면 우리도 불에 타서 풀어지잖아요. 뭘 기다립니까? 기다릴 대상이, 기다릴 주체가 없는데요. 같이 불타버렸는데 뭘 기다려요.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라고 되어있는데 여기 ‘그’도 전체에 포함이 되어 있잖아요. 지구 자체가 전부다 불타는데 거기서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인간들도 지구인이고 지구 불탈 때 그들도 같이 불타버리는데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릴 당사자가 없어지잖아요. 다 없어요. 다 없다고요.
다 없는 상태에서 14절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흠이고 티고 간에 본인 자체가 없는데 뭐. 우리 자신이 있어줘야 아, 흠 없이 점도 없이 깨끗하게 살아야지, 뭐 이게 되는데 내 자체가 공중 분해돼서 불에 타 없어지는데 어떻게 구원이라는 것이 성사되느냐 이 말이죠. 성사가 안 되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걸 아셔야 돼요. 이 본문은 다음 두 가지를 구분해야 됩니다. ‘내가 구원에 실패하면 어떡하지?’ 이게 아니고, ‘내가 구원에 성공하면 어떡하지?’ 이거에요.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구원에 성공했다니까 이것은 어떤 절차를 거치느냐 하면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이 불에 타버린다는 절차를 거치게 되거든요. 구원에 성공했는데 불에 타버렸다. 그거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실패죠. 그래서 ‘구원에 실패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보다도 구원에 막상 성공을 했는데 이 구원이 뭐냐? 구원은 불에 다 태움, 이게 구원이잖아요.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에게 구원은 불에 다 태움.
결혼을 하는데 ‘결혼에 실패하면 어떡하지?’가 아니라 ‘결혼에 성공해서 신혼집에 살면 어떡하지?’가 걱정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그 신혼집이 울산 산불 났을 때 그 한복판에 있을 때에요. 경북 울산 산골짜기 한복판에 신혼집 지어놓고 이제 결혼에 성공하게 되면 거기서 행복하게 백년해로하겠다고 했는데 어떤 지나가는 도사가 미리 말하기를, 결혼하고 그 다음날 울산에 산불 난다고 했을 때 그다음부터 어떤 걱정이 생깁니까? 결혼 못하면 어떡하나,가 아니라 결혼을 했는데 백년해로고 간에 결혼하고 돌아서서 대출내서 집 산 것 홀라당 다 태워먹으면 대출금 누가 갚아요? 걱정이 되겠죠.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구원에 실패하면 어떡하지?’할 때 이 ‘내’가 가짜라는 거예요. 이게 가짜인 거예요. 구원되고자 하는 ‘내’가 그걸 진짜라고 간주했을 때 성경에 나오는 구원에 관한 모든 절차를 여러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감당 못합니다. 할 수가 없어요.
어차피 어려운 것, 계속 어려운 거 해보겠습니다. 언제든지 담배 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담배 끊는 것을 방해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금연할 수 있다는 그 착한 의도를 본인이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자신만만하게 계속 흡연하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나 언제든지 금연할 수 있어. 그런 의지 있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지금 담배 피우고 있다는 말입니까, 끊었다는 말입니까? 피우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사람은 담배는 끊을 수 있는 가능성 있다고 우길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을 못 끊어요.
자기 자신이 나는 담배를 끊을 수 없는 나라는 생각을 못 갖고 있습니다. “아, 담배 그까짓 거 나 끊을 수 있어.” 그 자체가 가짜에요. “아유, 구원 뭐 좋은 이야기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그걸 내가 왜 마다해? 그걸 왜 싫어해?” 이러니까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나는 지금 살아있다고 자기가 느끼기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어떤 선택도 내가 하질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네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네가 가짜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느냐는 거예요. 그게 엉터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느냐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계속 살아있기 때문에 ‘언제 늙어 죽을 때 난 교회 간다. 걱정하지 마. 지금은 내가 살아서 바빠. 굉장히 바쁜데 내가 헥헥 숨도 못 쉬고 요양병원에 갔을 때, 그때 다 됐구나. 내가 더 이상 못 살겠네. 그럼 빨리 대비책 세워야지. 죽기 전에 숨 끊어지기 전에 빨리 세례 받고 예수 믿습니다 해야지.’ 그런 생각 갖고 있는 것이 구원될 수 없는 자아를 갖고 있는 거예요, 아직. 구원이 안 되는 자아를 계속 구원될 수 있다고 고집하는 그 엉터리 같은 생각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방금 제가 몇 가지 예를 들었는데 이 몇 가지 예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말씀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서 사람이 사달 나고 엉터리냐 하면 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구원을.
나 구원받고 싶다. 뭘 하면 되지?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구나. 그러면 내가 그것을 믿을 가능성은 언제든지 나한테 있다. 한번 적어볼게요. 머리가 안 나쁘지만 일단은 머리 좋다는 나를 가짜로 여기시고요. 뭘 듣더라도 이해 못한다는 그 내가 진짜라고 여기시고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구원은 반드시 말씀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말씀으로 시작해요. 그런데 나로부터 시작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에 말씀을 대합니다. 말씀을 대하면서 뭐를 찾느냐 하면 가능성 있는 것, 내가 믿을 가능성 있는 걸 뽑아내요. 그리고 또 목사들도 이런 걸 해줘요, 또.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이거 해줍니다.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또 해줘요.
그러니까 이 바윗돌 같은 나는 꿈쩍도 안 해요. 꿈쩍도 안 하고 성경말씀 정복에 나섭니다. 제자훈련이고 뭐고 온갖 희한한 것들 다 동원해가지고 성경말씀을 내가 정복하면 성경말씀에 의해서 나는 구원될 수 있는 나가 되는 거예요.
나→ 말씀(을 경유해서)→ 말씀을 아는 나, 이게 바로 구원될 수 없는 가짜에요. 이게 바로 가짜가 되는 거예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땅)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하늘과 땅 불에 다 탄다 했잖아요. 그럼 불에 타는 그 가운데 우리 자신은 어디에 속하냐 이 말이죠. 거기에 당연히 속해있죠. 그럼 불에 타버리죠. 불에 탈 때 불에 같이 다 타버리는데 그의 약속하신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릴 당사자가 어디 있습니까? 없는데. 없잖아요.
마지막 때에 지구 전체가 다 타버린다. 그럼 전체 안에 내가 빠져 있느냐, 속했느냐 그 문제를 제가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내가 그 전체 안에 빠져있습니까, 속해 있습니까? 속해 있잖아요. 전체가 불타버리는데.
그럼 불타가면서 믿습니다, 하면 구원해줍니까? 불에 타. 그냥 불에 타세요. 타서 재가 되세요, 이렇게 해버리는데 기다리긴 뭘 기다립니까. 흠도 티도 없이 뭘 정결하게 해요. 정결하면 불에 안 탑니까? 정결해도 불타는데요. 깨끗하고 거룩한 행실해도 불타는데. 경건해도 불타는데요.
불탄다는 말은, 내가 모든 걸 불태우는데 아, 너는 경건하구나. 지나가 지나가 지나가. 저 사람은 태우지 말고 그냥 지나가. 나머지는 까만 재가 되는데 경건한 자는 반짝반짝 빛이 나면서 지가 천사도 아니고 거기에 그렇게 서있는 거예요? 불탔구나. 나만 통과했네. 지금 뭐 그걸 즐기고자 하는 거예요? 아니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가 계속 살아있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죽음 너머의 일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내 구원에 방해가 돼요.
언제든지 담배 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담배 끊는 것을 방해하듯이.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가 지니고 있으니까 나는 계속 흡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앞에서 “나 담배 끊는다. 마음만 먹으면 삼일 만에 끊을게.” 하면서 담배 피우고 있어요. 본인을 본인이 못 끊어요. 본인이 본인을 못 끊어요. 담배도 못 끊으면서 본인이 뭘 받아요? 구원을 받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요.
내가 나를 끊을 수 없는데 무슨 구원이 돼요? 구원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모든 것을 불태운다는 그 약속을 네가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불태우는 대상 안에 누가 들어있다? 네가 들어있다는 것을 네가 받아들일 수 있냐고 묻는 거예요, 이 본문이.
또 한 가지 예를 들게요. 이게 보통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두 가지 문장의 차이점을 알아보세요. ①아내는 남편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한다. 이 문장이에요. ②아내는 남편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한다. 문장이 똑같죠? 똑같은 문장이죠. 강조점을 위에 문장은 ①아내는 남편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예요. 밑에는 ②아내는 남편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예요. 반대 뜻이에요.
‘저 인간 건강하면 안 되는데...’ 이게 밑에 문장이에요. ‘아, 저거 아파야 되는데. 아파서 빨리 죽어야 되는데. 저거 언제 아프지?’ 이건 아래 문장이고, 위에는 ‘당신이 아프면 내가 힘들어. 아프면 내 쇼핑 돈이 어디서 나오지? 당신 돌보는데 짜증나서 귀찮아서 내가 안 돼. 당신이 건강해야 내가 마음대로 놀 수 있어.’ 이런 걱정하는 거고.
위에는 남편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예요. 밑에는 남편이 안 아플까봐 걱정하는 거예요. 완전히 다르죠. 베드로후서 3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차이를 의미하는 거예요.
시작을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아무리 성경에서 말씀으로 시작해도 인간은 그걸 나부터 출발해놓고 그 말씀을 중간에다가 집어넣는 식으로 해석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성경에서 말씀으로 시작해도.
그 예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15절에 나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절에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알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어디에 이른다? “멸망에” 이르죠. 멸망에.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무슨 가능성을 준다? 멸망에 이를 가능성을 준다는 거예요. 어떤 자에게? 성경 왜 봅니까? 성경 구원 받으려고 봐요, 안 받으려고 봐요? 구원 받으려고 보잖아요. 구원 받으려고 보는 자를 어디로 인도하는 게 성경이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게 성경이다 이 말이죠. 멸망으로 인도하는 게.
이렇게 어렵게 할 게 아니고 이걸 아주 쉽게 간단히 하면 이렇습니다. [나를 위한 통합성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나를 위한 것이 무너지는 것, 이게 바로 흠과 티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지구 자체를 멸망할 때, “참 잘 하셨습니다. 합당합니다.” 나 빼놓고는 말하지 말고 나를 집어넣어서 “이것은 나를 집어넣어서 참 잘한 조치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그리고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서 했다는 거예요. 너도 포함해서 망한다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면 나는 망하지만 망한다는 말씀이 내 속에 담기죠. 그러면 시작을 뭐부터 시작하겠어요? 나부터 출발하니까 나는 이미 말씀에 의해서 망하도록 되어있죠. 그럼 출발은 내가 되는 겁니까, 말씀이 되는 겁니까? 말씀이 되는 거죠. 그렇게 말씀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말씀이 되는 거예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그래야 이 말씀이 되는 거예요. 약속대로 지구가 불탄다. 잘하셨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내 꼬라지 봐도 이건 마땅히 그래야 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빨간 걸로 해볼게요. 이 말씀을 다시 써보겠습니다. [모든 윤리적 결과를 나에게로 돌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환경] 지구가 멸망한다니까 살고 싶어가지고 멸망하는데 어떻게 멸망에서 내가 빠져나와서 살 수 있습니까? 흠과 티가 없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점도 없고 흠이 없이. 옳다구나. 그럼 앞으로 내가 해야 할 것은 윤리적 도덕적으로 흠과 티가 없으면 세상이 몽땅 재가 된다 할지라도 3차 대전 일어나 재가 된다할지라도 지구가 불바다 된다 할지라도 나는 살아남겠네, 라는 아이디어가 번뜩이겠죠.
그렇게 되면 내가 하는 윤리 도덕은 결국 어디로 귀소돼요? 어디로 귀속됩니까? 나에게로 돌아오죠. 나를 위한 것으로 되돌아오죠. 그렇죠? 내가 하는 행동은 누굴 위함이다? 나를 위함이 되는 거예요.
아까 나를 위한 통합성은 여지없이 무너지죠. 구약에서는 이 ‘나를 위한’ 것을 우상이라 합니다. 하나님을 믿되 나를 위해서 믿는 것은 모조리 우상이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라 했잖아요. 부인 정도가 아니고 아예 너 자신을 미워하라고 되어있죠. 이건 인간으로서는 해낼 수 없는 능력이에요.
나를 위한 통합성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처럼 모든 윤리적 결과를 나에게 돌리려는 그런 환경을 허락한 적이 없다. 그럼 앞으로 주어질 환경은 나를 위해서 윤리 도덕으로 하는 사람을 절대 일체 구원하지 않는 환경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그런 환경이.
자, 그렇다면 진짜 그렇게 세상이 온다면 그럼 어떤 사람이 구원되느냐? 다시 원래 질문으로 되돌아와요. 어떤 사람이 구원되느냐? 처음의 자리로 가서 말씀이 이끄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처음 자리로 가야돼요. 처음 자리. 그 처음 자리에 가면 악마가 인간을 어떻게 속였느냐 그 사건이 터진 현장입니다.
인간의 처음 자리는 인간과 하나님이 처음 만난 자리가 아니고 인간과 하나님과 그 가운데 마귀가 끼어든 그 자리가 처음 자리에요. 오늘날에 우리들이 인간이라고 규정하는 처음 자리가 악마가 중간에 끼어든 결과물로 오늘날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어요.
In the long term, we are all dead. 길게 보면 모든 인간은 다 죽는다. 길게 보면 모든 인간은 다 죽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리석게 보는 것이 짧게 보는 것이라는 뜻이에요. 인생을 짧게 짧게 보게 되면 다 죽는다는 사실을 매일 삶 속에서 살림살이하면서 자꾸 이걸 놓쳐버려요.
어차피 다 죽는다는 사실을 놓치고 마치 천년 만년 계속 내가 내일도 살고 모레도 또 살고 계속 사는 것처럼 그렇게 short time, 짧게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성해요. 참... 이게 나쁜 거예요.
이게 정말 나쁜 겁니다. 내가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가만 있질 못하고 내가 마음에 드는 자아상을 매일 새롭게 구성해요. 매일같이 구성을 하는 거예요. 누가 이걸 시키느냐 하면 인간을 미치게 만든 악마가 우리한테 매일같이 이걸 시키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매일 구성하면서 짜증내고 스트레스 받고 암 걸리고 그렇죠. 내가 내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내가. 남들은 저런데 나는 이때껏 뭐했나, 하고 자기 자책에다가 자기 모멸에다가... 여기서 더 열심히 해야 되느냐.
더 열심히 하는 것, 이걸 accelerationism, 가속주의(加速主義). 엑셀레이터 밟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절망을 느낄 때마다 더욱더 가속페달을 밟는 겁니다. 내가 내 마음에 안들 때 미흡함이 생겨버리면 그냥 가속페달을 밟아서 더욱 매몰차게 나를 후려치는 거예요. 내가 나를 후려치는 거예요. 더 열심히 하란 말이야. 더 열심히 해야지.
그럼 더 열심히 하면 남는 결과가 뭐냐? 결과가 이거에요. 오늘 이 이야기하려고 지금까지 뜸을 이만큼 들였습니다. [나의 동일성]. 동일성. 어제와 오늘, 내일의 내가 똑같은 내가 되는 거예요. 어제, 처음 자리에 악마와 함께 있던 그 나, 그 나를 우리는 기어이 천국 보내려고 가속페달을 밟는 거예요. 처음 악마와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그러나 주님은 이 동일성과 반대로 가요. 뭐냐 하면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너로부터 시작한 것 말고 말씀부터 시작하는 그 차이에서 나오는 새로운 너, 새로운 인간, 이게 바로 구원받는 인간입니다. 이게 구원받는 인간이에요.
처음 출발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했죠. 이게 문제 있다 했죠.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어떤 말씀을 어떻게 지켜야 되고 그 말씀대로 얼마나 순수해야 되고 순결해야 되고 흠도 티도 없어야 된다. 성경에 나오잖아. 나 성경말씀대로 그렇게 할 거야. 베드로후서는 “그게 멸망인데? 그게 네 멸망 길로 가는 거야, 그게!”
시작을 말씀부터 해야 되는데 말씀부터 시작을 할 재간이 없어요. 능력이 없어요. 마귀가 놔주질 않으니까. 마귀가 뭘 안 놔줍니까? 지금의 너와 다른 네가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아, 이거 마귀가 한고집해요.
여러분 고집 센 사람 찾으려면 남자가 70이상 나이 먹으면 그 고집 한번 보세요. 남자가 70이상 넘어가면 이건 뭐 아내고 자식이고 손자가 와도 못 말려요. 그 고집은 고집 다음에 나오는 말이 있어요. 고집소통이 아니고 반대말 고집불통이 돼요. 고집불통. 뻣대죠. 도로 어린애가 되듯이. 최씨 고집이에요. 또 가만 있는 최씨가 1패를 당했는데. 최씨 왕고집.
이게 왜 그러느냐? 가속주의 때문에 그래요. 살아온 이력이 멈추질 못해요. 지금껏 살아온 게 자기 몸에 맞고 편하거든요. 상황이 맞은 게 아니고 상황 속에서 자기를 구성하는 거예요. 이게 사달 난 거예요. 나는 이러해야 돼.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조립해버렸어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날마다 나는 어제까지의 나는 무너지고 말씀으로 새로운 내가 되어야 돼, 이게 되지를 않아요. 이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말씀 왜 있습니까? 말씀은 나의 동일성을 깨뜨리기 위해서 말씀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말씀이 깨뜨리는 게 아니고 말씀이 꼭 화투장 같아. 이마에다 턱하니 붙이고 그냥 말씀을 종이에다 써서 풀로 자기 육체에 붙이면 자기 부적이 돼가지고 자기 천당 보내줄 줄로 생각해요. 턱 붙였는데 그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사도 바울의 편지도 떡 갖다 붙여놨어요. 이 편지는 멸망에 이르는데요?
여기 멸망이란 말이 있죠. 17절에 보면 “미혹”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성경은 너희를 멸망에 이르게 하고 미혹에 이끌리게 한다. 미혹에 떨어진다. 뭐가? 성경이 너를 그렇게 만든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의 고집, 나의 왕고집, 동일성이 있는데 동일성에다 성경말씀이 나로 하여금 멸망케 하고 미혹케 하게 되면 그 말씀을 기피해야 될까요, 받아들여야 될까요? 마땅히 받아들여야죠. 그래서 나로 하여금 멸망에 이르고 미혹케 되면,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처음 자리로 가봐야 돼요. 거기에는 나만 혼자 있었던 게 아니에요. 악마가 있었던 겁니다.
놀랍게도 악마가 말씀을 가지고 이용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 잊으면 안돼요. 예수님이 시험받을 때 악마가 예수님 시험할 때 악마가 말씀가지고 시험했어요. “아이고, 그 말씀 나는 모르는 건데~”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 “안다, 안다, 그 말씀. 메시아가 말씀대로 오는 것 내가 다 안다. 그러니까 말씀대로 한번 해볼까, 우리? 높은 데서 뛰어내려라.” 시편 91편인가 나오죠. “뛰어내려라. 말씀대로 해봐라. 해봐. 해봐! 해보라고! 너 쫄았어? 쫄았어?” 악마가 예수님보고 “너 쫄았지?”
예수님이 말씀대로 했을 경우에는 성전에서 뛰어내려 박살나는 그게 완성이 아니고 십자가에 죽는 게 말씀대로 완성이에요. 똑같은 죽음이라도 새로운 전체를 구비한 가운데 죽어야 돼요. 기존 전체의 일부로서 죽는 게 아니고 그 전체 말고 숨겨진 다른 전체가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성도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들어가는 것은...... 성도가 기존의 전체에 속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도의 육신이에요. 육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전체가 준비되어 있어요. 그것은 새 하늘 새 땅과 통하는데 거기 있는 전체는 말씀에 의해서 시작된 자의 전체가 들어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사도 바울을 언급했는데요. 사도 바울의 말을 우리가 볼 필요가 있겠죠. 갈라디아서 5장 17절. 베드로가 말하기를 함부로 풀 수 없다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우리가 지금 인용하고 있습니다. 함부로 풀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한번 봅시다.
여기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렇게 되어있죠. 자, 성도가 이렇게 있는데 성도를 사도 바울은 육체라고 보는 겁니다, 육체.
사도 바울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아요. 말씀으로부터 출발하거든요. 말씀은 예수님이 완성시켜 놨잖아요.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된 전체에 있어서, 하면 벌써 시작은 뭐부터 합니까? 말씀부터 시작하죠. 말씀으로 시작하는 데에 있어서 죄인인 인간은 어떤 활용도가 있느냐를 보는 거예요. 어떤 활용도!
말씀을 말씀 되게 드러내는 데 있어서 성도의 육체는 불필요하다, 가 아니라 어떤 활용도를 가지느냐 하는 거예요. 말씀 완성 앞에서 성도하고 대결상태에 놓여있는 여기에 다른 어떤 분이 계십니다. 이걸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는 이걸 누구라 했어요? 5장 17절에서는 이걸 누구라 했습니까? 성령이죠.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밀당을 하면서 밀고 당기고 하면서 그 열매로 나온 것은 뭐냐? 말씀이 다 이루었다, 가 나오는 거예요. 말씀으로 시작해서 죄 많은 인간을 활용해서 말씀에서 시작해서 끝은 어디로 끝나죠? 말씀은 결국 주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구나, 가 되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갈라디아서 5장 24절이에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그 십자가의 현상성, 현재성,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말씀이 현재에 계속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누가 꼭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이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죄성, 육체성이 꼭 필요한 거예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말씀으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이루었다는 그 완성에 있어서 인간은 중간에 끼어드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처음 있었다는 거예요. 내가 처음 있었던 게 아니죠. 나는 거기 누가 있었다 하면 대결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악마와 한통속이죠.
대결하지도 않았어요, 그때. 악마와 한번 싸우지도 않았어요. 악마와 그냥 같은 패가 되었어요. 악마와 같은 패가 돼서 나는 앞장세우고 악마는 뒤에 숨어버리고. 비겁한 악마. 나를 하수인으로 만들어놓고 악마 본래의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거예요.
악마의 목적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을 부정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행하심.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부정하는 거예요. 교회 목사들이나 교회 와서 설교할 때 뭐 40분 50분 하더라도 딱 하나만 들으면 돼요. “그래서? 그래서 우리 할 게 남아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그거 딱 하나만 끄집어내요.
악마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니까 우리 나름대로 뭘 해야 된다고 가르치면 이거는 백퍼입니다, 백퍼. 기분 좋아서 이거 한잔 마시고. 백퍼센트입니다. 백퍼센트 악마에요.
인간의 위상이 위치가 이미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데 성령하고 싸우는 입장이란 말이죠. 성령은 다 이루었다는데 우리의 육신은 뭡니까? 내가 흠과 티가 없어야 되지 않습니까? 베드로후서의 말씀처럼 내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누가 측정하고 누가 판단하는데요? 본인이~ 본인이 판단하죠, 본인이. 손자한테 맨날 욕 얻어먹는 전두환. 본인이 판단해요.
판단하기 위해서 판단자인 나는 변해야 돼요, 변하지 말아야 돼요? 요지부동 최씨 고집. 나는 옳으니라. 그럼 그렇게 고집부리는 그 70넘은 장로님한테 물어보세요. 성령님 어디 계십니까? 내가 필요할 때마다 부르면 되는 거야. 누가 쫄병인지 누가 주인인지 구분도 안 돼.
부르면 오는 게 아니고 싸운다니까요! 참... 싸운다는 말은 서로가 양보 없다 이 뜻이거든요. 성령님은 우리에게 양보를 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우리를 개무시하느냐 하면 로마서 8장에 보면 너는 기도할 줄도 몰라, 인간아. 너는 기도할 줄도 몰라. 너 아버지 하나님 뜻을 알아? 모르잖아. 모르면서 무슨 기도를 해? 뜻도 모르면서 기도해놓고 이번 기도는 참 은혜롭다고 자기가 자기 혼자 판정내리고 뭐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자꾸 이 육체의 소욕은 자기의 동일성을 포기 안하고 있어요. 마귀한테 길들여지기를 그렇게 길들여져 가지고 주님 욕 얻어먹는 것은 전~혀 이것은 가슴 아프지 않고요. 내가 욕 얻어먹는 것은 그렇게 직접 욕 얻어먹은 것도 아니고 우회적으로 둘러서 이야기하는데 눈치는 빨라가지고 그걸 어떻게 알고 또 그것 때문에 삐쳐가지고 3년 동안 이야기안하고요.
남편이 “당신이 그런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시집오기 전에 친정에서 잘 배웠네.” 이 한마디 했다고 다음 5년 동안 말도 안하고. “잘 배웠잖아, 그래.” “잘 배웠다는 말이 왜 꼬는 것처럼 느껴지냐?” “그건 니 생각이지.” 보세요. 예수 믿지 말라 해서 5년 동안 말 안하는 것 봤습니까, 부부 사이에? “너 예수 믿지 마.” “나 이야기 안 해.” 그런 부부 봤습니까? 친정 씹는다고 5년 동안 이야기 안하는 부부는 있지만 시가집 씹는다고 3년 동안 이야기 안하는 부부는 있지만, 예수님 씹는다고 이야기 안하고 그런 부부 있습니까?
얼마나 나 위주입니까. 70살 먹은 고집이 뭐 50, 60때는 없다가 70되면 갑자기 생기는 겁니까? 아니죠. 그게 바로 성화된 거예요. 성숙된 거예요. 딴 게 성숙되고 성화된 게 아니고 고집이 성화된 거예요, 고집이. 황소고집이 성화된 거예요. 죽어도 내 이 믿음은 못 버린다. 그게 바로 마귀생각이에요. 좀 버리란 말이에요, 네 믿음을. 좀 매일같이 믿음 바꿔야 돼요!
흠과 티가 없다는 말은 매일같이 새롭다는 말입니다. 매일같이 새롭다는 말이에요! 어제 나보다 오늘이 새롭다는 게 흠과 티가 없는 거예요. 원래 창조가 흠과 티가 없어요. 구닥다리 고쳐 쓰고 아껴 쓰고 그거 백날 해봐야 다 흠집이 나요. 고물 아무리 깨끗하게 해봐야 흠난다고요. 늘 매일같이 죽고 매일같이 사는 새로움이 주께서 언제 오시든지 흠과 티가 없는 겁니다.
과거를 버리는 방법은 제가 알려드렸습니다. 육체에서 성령한테 지고 성령 안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죠. 다 이루었다 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 안에는 누가 있느냐?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십자가가 들어있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시작하면 그게 바로 새로운 거예요.
새로운 내가 가게 되면 이 세상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불타야 될 이유들이 있죠. 그 불타야 될 이유가 우리의 육신과 또 같이 결탁이 돼요. 짝짜꿍이 된다고요. 나는 새 사람 되었다, 새 사람 되었다. 새 사람 되었다고 서너 번 하면 벌써 헌 사람 돼버려요. 뭐가 새 사람인데? 새 사람 되었다. 몇 분 전에? 5분 전에. 그럼 아니네. 그건 5분 전이잖아. 지금 아니잖아. 5분 전이잖아.
부흥회 때 회개하라고 부흥사가 얘기하면 이미 작년 부흥회 때 다 회개해서 청산했는데 회개하라 하니까 시간은 자꾸 가고 할 말 없으니까 작년에 한 것 또 끄집어내서 또 한다고요. 왜 그런 현상이 있느냐 하면 나는 옳다, 이렇게 돼버리니까 말씀이 말씀과 티격태격이 안 되는 거예요.
성령이 없으니까 성령으로부터 지적을 받는 요소가 있어야 새로움의 가능성이 있는데 내가 말씀을 지켜버리고 내가 말씀을 해석해버리니까 결국 남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결국 어디로 돌아와요? 모든 통합성과 윤리 도덕은 어디로 옵니까? 나의 멋짐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나의 멀쩡함으로 돌아오는 거죠. 나의 대단함으로. 나의 우수함으로. 나의 훌륭함으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언제든지 담배 끊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담배 피우잖아요. 그거 뭐 끊으면 되지, 이러면서 계속 담배 피우는 거예요. 새로운 것, 흠과 티가 없는 것? 내가 지금 마음만 먹으면 열심히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게 가짜인 거예요, 그 인간이.
여러분 이 정도까지는 알았으니까 계속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일본에서 어떤 청년이 외국 사람을 무참하게 살인하고 그다음부터 숨어 다녔어요. 무려 6년 동안이나 숨어 다녔습니다. 일본에서는 전국에 수배를 내렸고 전국을 샅샅이 뒤져서 그 수배된 살인범을 찾았습니다. 못 찾았었는데 결국은 체포했어요. 그동안 그 사람을 왜 못 찾았는가? 사진도 있고 했는데... self-성형을 했습니다. 자기가 자기 얼굴을 성형했어요. 이게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짓거리에요.
새로운 전체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에서 불타고 난 뒤에 나타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거기에 이미 성령 받고 소속된 성령 받은 사람은 이 땅에서 결코 수배당할 이유 없습니다. 수배당할 대상 아닙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을 전혀 모르고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같은 교회나 주위에서, 너 그래가지고 구원 받겠냐? 흠과 티가 그렇게 많아가지고 여기 베드로후서 3장에 보니까 흠과 티가 없어야 천당 간다는데 천당 가겠냐? 이런 소리가 타인의 시선으로 따갑게 들릴까봐 겁이 나가지고 자가 성형에 들어가요. 어제도 나 금식했거든? 매일같이 내가 잘 때 기도한다고. 매일같이 기도해.
오늘 안양강의에도 잘 때 하는 기도, 안양강의 때 제가 언급해드렸죠? 참고로 미리 또 말씀드리면 시편 41편, 아까 몇 시간 전에 들은 것 해도 괜찮겠죠. 아, 141편이다. 나도 5분 지나면 바로 잊어버려요. 그렇게 지적해주니 내가 새 사람 됐잖아요. 이게 바로 응용문제 아닙니까? 새 사람 됐잖아요. 지적을 받아야 된다니까요.
141편 2절에 보니까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날마다 저녁에 내가 제물 되는 거예요. 오늘로써 내 생애는 끝입니다. 밤에 잘 때. 오늘로써 내 생애는 끝입니다.
내일 혹시, 혹시입니다, 혹시 허락한다면 새 날을 허락하시겠죠. 새 날을 주시겠죠. 새 날을 주신다면 이것은 누구 솜씨냐? 성령이 또 나한테 꾸지람하려고 만든 대상으로써 육체에 속한 나를 또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제하고 나는 차이가 나는 거예요. 동일성이 아니고 차이가 나는 거예요. 내가 셀프 성형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남들이 나보고 궁시렁 궁시렁 거리면서 저거 뭐 집사답지도 않네, 뭐 장로, 목사 행동이 어떻네 그런 소리를 들을 때 그들로부터 수배당할 이유 없습니다. 숨을 필요 있어요?
그걸 가지고 이렇게 합니다. [매일같이 나를 거세한다] 거세란 할례죠. 내 마음의 할례. 성령이 매일같이 나를 거세하는 거예요. 거세하고 나를 어디다 숨기는가? 기존 전체에 숨기는 게 아니고 불에 탈 이 세상에 숨기는 게 아니고, 불에 타지 않을 전체에 속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당당하고 그다음에 제가 좋아하는 말, 의젓하게. 걸을 때 구부정하게 걷지 말고 당당하게. 숙여 걷지 말라는 말은 내가 많이 듣던 소리네요.
어깨 펴고 당당하게.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 중 괴수입니다. 사도 바울이 당당한 것처럼 당당할 수 있는 것은 남이, 십자가와 관계없는, 다 이루었다와 관계없는 남들이 나한테 지적할 하등의 권한도 권리도 없습니다.
형제가 누굴 충고할 때는, 충고할 수도 있어요, 충고할 때는 나도 이 말씀에 죄인이니까 너도 혹시 죄인일 수 있다 하는, 전하는 자가 더 성형을 잘한 차원이 아니고 성형을 포기한 차원에서 이야기할 때, 나 말씀으로 포장 안 할래, 그런 자유함으로 언급할 때는 주께서 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이시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일체 누구한테도 최고집이나 왕고집한테도 여러분 구애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