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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30313a 부산강의 : [시편]56(40:7)-두 개의 나자유게시판시편

20230313a 부산강의 : [시편]56(40:7)-두 개의 나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40편 1절부터 보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다윗이 하는 40편 1절부터도 우리가 생각을 깊이 해야 되겠지요.

인간에게는 어마어마한 책임성이 덮쳐집니다. 책임성이란 인간에게 뭐가 있기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 인간에게 하나님의 것을 가져갔기 때문에 훔쳐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선악을 아는 지식은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은 거거든요. 허락하지 않은 것을 인간이 낚아챘잖아요. 마귀 시험에 의해서.

그러면 선악은 하나님께 속한 겁니다. 선악을 하는 지식은 우리들만 안다고 돼 있어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이 왜 끼어드느냐 이 말이에요. 그러면 선악을 안다는 것은 판단을 해야 되는데 여기에 책임성이 같이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내부적으로 어마어마한 책임,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책임성에 인간은 짓눌려 산다. 이게 인생입니다. 그 책임감.

그 책임성을 인간이 감당할 수 있겠어요? 하나의 일이 끝난다고 책임이 다 끝나는 건 아니거든요. 또 주어지는 책임, 주어지는 책임. 엄마로서의 책임, 아빠로서의 책임, 자녀로서의 책임 그걸 어떻게 인간이 다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지요. 그래서 여기에 40편 1절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로 시작하지요. 이것은 다윗은 이 책임성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하느냐?

다윗은 이 책임성에 대해서 하나님을 소환합니다. 하나님을 소환한다는 것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께 되돌려주는 거예요. “이것 제 것 아니고 하나님 건데 어떻게 돼서 저한테 와 있네요. 하나님, 이것 도로 가져가세요.” 도로 가져가려면 내 자리에 하나님이 이걸 빼내가는 방법밖에 없겠지요.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줘야 되니까. 하나님을 소환합니다.

그 소환하는 방법이 이 많은 책임, 선악을 아는 지식에 짓눌려 살거든요. 사는 이것은 여기 뭐라고 보느냐 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이 우리 것이 아니니까 하나님이 것이니까 인간이 남의 것을 뺏어왔잖아요. 책임감에 짓눌렸다는 말은 죄에 짓눌려 산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는 자체가 죄기 때문에. 죄라는 것은 내 것도 아닌데 하나님을 것을 빼앗아 올 때 생기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다윗을 하나님을 소환함으로써 하나님이 빼가는 조치에 대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어떤 식으로 나를 빼 가는가? 그 조치가 어디 있는가 하면 책에 나와 있습니다. 40편 7절, 그 책의 내용이 나와 있는데, 그 책의 내용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이렇게 돼 있어요.

책에 무슨 내용이 있느냐 하면 여기 누가 등장하느냐? ‘나’가 등장하지요. 책에 기록된 나, 책에 예언된 나. 하나님을 소환했는데 다윗에게 찾아온 것은 뭐냐 하면 책에 기록된 또 다른 나가 찾아온 거예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 또 다른 나가 찾아오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책임성을 다윗에게 해제/면제시켜버려요.

그럼 면제시키는 것이 어디 나오느냐? 6절에 나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됐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드린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건 뭐냐? 방금 6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그다음에 뭡니까? 요구치 않는다. 어떤 선악을 아는 지식에 대한 책임감에 대해서 다윗이 면제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요구하지 않는 이유는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요구하지 않아요. 그러면 기뻐하지 않는 대신 기뻐하는 게 뭐냐? 7절에 나옵니다. 7절에 뭐라고 돼 있던가요? 책에 누가 있다고요? 책에 새로운 나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의 나가 있고, 책에 새롭게 등장한 나가 있으니 다윗은 뭐가 되느냐? 다윗은 하나님의 소환에 의해서 쌍둥이가 되는 거예요. 이게 야곱언약이에요.

이삭이 애 못 낳는 상태에서 리브가가 잉태하지 못한 가운데서, 리브가는 불임여성이에요. 육으로서는 이삭의 육의 자녀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삭의 자녀는 이삭이 갖고 있던 속성, 계시의 속성, 또는 약속의 속성대로 자녀가 주어지게 됩니다. 이삭은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그렇지요. 그 반면에 이스마엘은 인간의 혈육에 의해서 태어난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준해서 이삭이 태어난 겁니다.

벌써 여기서 이스마엘과 이삭은 같은 아버지, 같은 어머니를 갖고 있어도 일종의 쌍둥이 같은 그런 관계에 있지요. 아브라함의 자식이 하나인 게 아니고 둘로 등장해서 하나가 제거되는 방식으로 하나를 부각시키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합니다. 쌍둥이를 줘놓고, 하나를 줘놓고 이게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둘을 줘놓고 하나를 제거하면서 남아 있는 하나를 구원시키는 방식, 이게 하나님의 쌍둥이 방식이에요.

따라서 이삭의 리브가는 아기를 못 낳아요.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의 자녀는 없는데 이삭에 있는 약속에 준해서 새로운 자식을 낳는데 하나가 아니고 둘을 낳고 그 둘 사이에는 태아, 그러니까 자궁에 있을 때부터 그 둘 사이는 뭐가 되느냐? 투쟁관계에 있지요. 다투는 관계에요. 싸우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나가 한쪽의 원수가 되고 상호 원수가 되는 관계에 속하지요.

이 말은 지금 다윗이 책임성 때문에 하나님 것을 본인이 갖고 있다는 것 때문에 짓눌려 살고, 그것을 본인이 해결 못하니까 이게 뭐가 된다고요? 죄가 되겠지요. 그러면 다윗에게 두 가지 요소, 또는 이삭에게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돼요. 죄에 짓눌려 있는 나와 거기서 죄에서 꺼내주는 나, 두 나가 같은 하나의 육체, 다윗을 통해서 두 개의 나가 등장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삭언약 속에 쌍둥이 자식을 낳는 이삭언약의 법칙이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에 비로소 나타나는 기이한 법칙이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할 때 하나를 두고 “너, 와” 이렇게 하지 않고 인간을 두 개를 줘버려요. 두 개를 줘놓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선택이 죄에 눌려 사는 선택으로 간주해버려요. 선택을 잘못하게 만든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이 최악의 선택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선택의 기회를 주는 거예요. 모든 인생사가 다 그렇습니다. 최악의 선택. “아하, 그 주식 팔아야 되는 건데.” 이런 것. “아파트 그때 사야 되는데…….” 안 사려했는데 뭐 네 배 올랐다. 나의 죄를 이용해서 의를 보여주는 거예요. 죄라는 건 최악의 선택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선택을 안 하면 되지 왜 선택을 하느냐? 이것 때문이에요. 인간에게 주어진 선악체제에 관련된 책임성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한시라도 머리가 책임감 없이 행동한 적 없고 책임감 없이 생각한 적이 없어요. “내가 여기 왔으면 손자는 어떻게? 손자는 탈 없이 안 다쳐야 되는데…….” 이게 뭐예요? 마음은 여기 있어도 집에 있는 손자 걱정하잖아요. 이게 책임성이잖아요.

심지어 바람피우는 남편도 “내가 이 시간에 혹시 아내한테 들키면 아내가 기분 나빠할 텐데.” 이게 아내에 대한 책임성이에요. 요새는 남편만 아니고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그 책임성이 뭐라 했습니까? 그 책임성이 죄에요. 그 책임성을 없애는 방식이 시편 31편에 뭘 한다 했습니까? 이야기했는데 다윗의 방식은 뭐라 했지요? 하나님을 소환한다. “하나님이여,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여기 기다린다는 말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40편 1절, 하나님을 기다린 거예요. “어서 와주세요.” 어서 와주세요란 말은,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없나이다. 여호와를 소환하니까 여호와께서 넌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라 그런 지시를 내린 게 아니에요. 그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이상 지시를 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와 예물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않는 거예요.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우리는 짓눌린 죄에서 우리의 어마어마한 막대한 책임성에서 우리 힘으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거예요. ‘책임성=죄’거든요. 우리가 책임성 또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나의 선택에 의해서 내가 구원될 여지는 없다. 책임성 때문에 우리는 맨날 선택을 하는데 그 선택은 항상 최악의 선택이 돼요. 인간이 하는 일은 최악의 선택이 됩니다. 이미 죄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책임성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최악의 선택이 돼요.

이삭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쌍둥이를 낳아버리고 그 쌍둥이를 투쟁하는 관계로 만들었어요. 심지어 리브가 뱃속에서부터 이미 싸웠어요. 싸웠다는 말은,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서 본인들이 승자다, 패자다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싸우는 관계를 하나님이 허락했다는 것은 이 싸움에서 누가 최종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되는 것은 인간의 선택을 벗어난다 이 말이에요.

인간의 선택을 벗어나도 선택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이삭은 누굴 선택했습니까? 싸우는 애 중에서 싸우고 있구나. 그럼 나는 어느 편에 투표할까, 어느 편을 내 장자로 삼을까? 그 당시는 언약을 받은 대표자가 이삭이기 때문에 이삭이 언약의 대표자가 돼요. 인간의 대표자가 되니까 이삭이 선택하는 것은 누구였습니까? 맏이, 맏이에요. 먼저 태어난 자에요.

물론 에서를 선택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만 이게 의미 없는 거예요. 에서를 선택했다가 아니고 맏이를 선택했다가 옳은 거예요. 에서를 선택한 게 아니고 맏이를 선택했다. 자, 인간의 선택이 맏이입니다. 이것은 왜 맏이를 선택했어요? 맏이가 맏이니까요. 그건 이유를 따질 필요 없지요. 둘 중에 누가 맏이야? 맏이가 맏이지요. 맏이란 먼저 태어난 자에요. 너희 중에 누가 먼저 태어났어? 얘가. 그게 인간의 선택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인간이 책임성을 감당 못한 이유를 쌍둥이를 통해서 밝혀내시는 겁니다. 왜 인간은 책임성 있게 하나님 일을 못하고 죄에 눌려 사는가? 인간이 선택하는 족족 인간의 입장에서는 맏이니까 맏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한계 없는 앎, 앎이란 지식이죠. 한계 없는 앎/지식을 요구하는 게 아니고 한계 있는 지식/앎을 하나님께선 원하고 있습니다. 한계 자체에 대한 지식이에요.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진도 상 보조 맞추기 위해서 다시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시편 40편 1절하고 있습니다.

시편 40편 1절에 다윗이 누굴 소환한다 했지요? 하나님을 소환하지요. 하나님을 소환하는 이유는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성을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왜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성을 감당하지 못하느냐? 짓눌려 사는가? 선악을 아는 지식은 이게 인간 자기 것이 아니고 훔쳐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했지만 따먹게 된 하나님 것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소환해서 다시 주인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소환한 거예요. 하나님이 오셔서 내 속에 있는 하나님 것을 되가져 가시기 바랍니다. 그게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급하는 겁니다.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자, 기다리겠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선택, 내 행위로서 나로 하여금 이 죄에 눌려있는, 책임성이 죄라 했지요. “죄에 눌려있는 상태에서 내 식대로 구원하겠다는 의사를 저는 포기했습니다. 와서 데려가주세요. 제가 기다릴게요.” 그래서 막상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온 게 아니고 내가 온 거예요. 그게 시편 40편 7절에 있지요.

그런데 그 나와 새로운 하나님 보내신 나의 차이점은 그 안에 있는 두 번째 등장하는 하나님 보내신 나는 어디 안의 나라 했습니까? 7절에 책 안에 있지요. 하나님의 책 안에 있는 나가 온 거예요. 이것은 히브리서를 아는 사람은 낯설지 않을 거예요. 히브리서 10장 5절에서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여기 두루마리 책에 누굴 기록했는가? 나를 기록한 거예요. 그러면 히브리서 10장에서 나란 누굽니까? 예수님 이야기죠. 그런데 시편에서는 나는 누굽니까? 다윗이란 또 다른 나, 다윗이란 이름의 또 다른 나, 그럼 나가 몇 명이에요? 두 명. 나가 두 명 되지 못하면 구원되지 못한 사람이에요. 쌍둥이에요.

이삭이 쌍둥이 낳았을 때 거기서 맏이가 몇 명입니까? 맏이가 하나가 아니고 맏이가 둘인데 서로 싸우고 있으니까 맏이 전쟁이 종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둘이 리브가 배 밖에 튀어나와버린 거예요. 싸우다가 나온 거예요. 싸우다가 나온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인간에게서 떼어내기 위해서 나에게서 나를 떼어내기 위해서 인간의 선택 여지를 주는 거예요. 이삭 보고 둘 중에 누가 맏이냐고 물으니까 이삭이 맏이가 맏이라고 했지요. 먼저 난 자가 맏이지요.

인간으로선 그게 자기로선 한계 없는 지식의 전부지만 주님께서 그걸 뭐냐? 인간 자기 한계에 대한 지식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래? 먼저 난 자가 맏이라고? 그게 너희 인간사회에서 맏이란 뜻의 개념이지.” 맏이란 먼저 태어난 자가 맏이다. 한계에 대한 지식을 이것은 전에 있던 나에게서 나온 한계고요.

새로운 나는 기존의 한계에서 새로운 나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고 기존의 나를 부정하면서 그걸 거절하면 부정하면서 네가 먼저 너의 선택을 알아보고 그걸 엎어버리는 식으로 주님께서 맏이를 결정하는 겁니다. 이삭이 한 결정을 하나님은 거짓말로 대항해버리죠. 인간이 아는 한계 자체가 이게 거짓이며 이것이 죄입니다, 라고 거짓에 대해서 거짓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할 때 비로소 그게 진실이 되는 거예요. 이게 오늘 시편 40편에 똑같이 마찬가지로 그렇게 돼 있어요.

야곱이 에서를 선택한 것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역량 것 다 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내 한계가 어느 정도냐? 나는 이것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까지란 것을 분명히 다짐을 해놓으시고 그 외에 바깥쪽으로 새로운 맏이를 제공해버리면 그 맏이는 나와 쌍둥이 맏이지요. 쌍둥이 맏이, 내 복을 인수인계할 그 맏이는 인간의 손을 떠났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이 말이에요.

시편 40편 7절에 두루마리 책이 사람이 그분이 나오지요. 어떤 나가 나오지요. 다시 보면 7절에,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내가 왔나이다, 하고 있어요. 책이 오지 아니하면 다시 왔다는 말도 성립 안 되지요. 책이 온 동시에 책 속에 나 말고 나와 똑 닮은 쌍둥이 나가 새롭게 등장한 거예요.

그 쌍둥이 나는 나와 교체될 새로운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나에서 나로 옮겨가는 거예요. 그래야 구원받는 거예요. 나에서 나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일단 나는 죽어야 되고, 나는 죽고 죽은 나를 대신하는 나가 새로운 구원받은 나가 되는 겁니다. 이러면 나와 나 사이에는 연속성이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연속성이 성립 안 되지요.

내가 예수 믿음으로 구원되는 게 성립되지 않지요.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나를 대신한 분이 아버지를 믿음으로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분이 나한테 찾아온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찾아와서 구원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둘이 되지 아니하면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없으면 그건 구원된 사람이 아니에요. 내 안에 내가 없다, 내가 쌍둥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보내준 새로운 쌍둥이 없다면 나는 어디까지나 어떻게 됩니까? 하나로 살지, 하나로. 하나로 사는 그게 바로 종교라는 것 아닙니까, 나로.

하나로 사는 것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이슬람. 이슬람은 천국 가는 방법을 다섯 가지만 제공했어요. 아주 간편해요.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간편해요. 뭐냐 하면 일단 언어로 형성될 수 없는 최고의 신, 알라 신과 유일한 선지자 마호메트를 믿으면 돼요. 그 한 가지. 그런데 이것만 믿으면 안 되고 네 가지가 더 있어요. 알라 신과 그 유일한 선지자 마호메트를 믿어야 되고, 그다음에 하루 다섯 차례 메카를 향하여 기도해야 돼요. 그다음에 타인을 돌봐야 돼요. 자선.

믿음, 기도, 자선, 그다음에 금식을 해야 돼요. 라마단 기간에 여름 한 달 동안 낮에만 금식해요. 다이어트 하기 멋진 시기라니까. 다섯 번째, 일생에 평생에 한 번은 카바 신전을 순례한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천국 가기 힘들어요. 계속 살려고 생각했는데 다음에 2년 뒤에 갈게, 했는데 2년 안에 죽으면 곤란하죠.

이게 바로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하는 거예요, 내가. 내가 선택한 것으로 신에 대한 내 책임을 지는 겁니다. 그러나 내게 속해 있는 선악체제는 원래 내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속한 지식이 선악지식이기 때문에 주제넘게 피조물이 그 선악지식을 온전하게 이룰 수가 없어요. 책임감만 어마어마하게 부여하고 짓누르고 있고 그 책임에 제대로 화답을 하지 못하니 계속 뭐만 쌓입니까? 죄만 쌓이죠. 양심의 가책만 쌓이죠. 내가 어미로서 제대로 못했구나, 이런 것.

또 한 가지 다른 종교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이 아까 제가 했지요. 책임성. 인간이 있다면 인간이 세상 속에 살잖아요.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 전체에 어떤 책임성을 인간을 갖게 돼 있어요. 책임성이란 이 세상 전체를 커버하는,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걸 내 책임성으로 내 선택으로 내 결정으로 전부 다 커버해서 나한테 유리하게 하고 싶은 생각, 유리하다는 것은 선이죠. 나한테 불리한 건 아니고 나한테 유리한 건 선이라 해요, 인간들은.

선이 하고 싶어서 모두를 커버하는데 그러면 인간사 커버하는데 어떤 종류가 있는가? 가난하면 안 되고, 병들면 안 되고, 가정불화하면 안 되고, 사업실패하면 안 되고, 원인모를 병 있으면 안 되고, 미리 사주를 받아서 대책을 해야 되고, 궁합도 보고 택일도 해야 되고, 신수해야 되고, 이름 짓는 것도 제대로 지어야 되고, 부부의 화목한 관계, 결혼문제, 사업문제, 그다음에 우환, 그리고 불행, 우울증, 자살충동 이런 것까지 다 커버하면 얼추 다 커버된 거죠.

다시 할까요. 가난하고 병들고 가정불화, 사업실패, 원인모를 병, 사주, 궁합, 택일, 신수 보는 것, 이름 짓는 것, 부부, 결혼, 사업, 그리고 우환, 질병, 불행, 우울증, 자살충동 이런 것 있거든 스님 친견상담, 스님을 직접 상담할 수 있다는 거예요. 금당선원(2층), 010-9889-9598, 이 밑에 점집 이야기죠. 방금 이걸 보게 되면 여기 안 걸린 사람 없지요. 다 상담거리가 되지요.

이게 뭐냐? 세상 살면서 인간이 공포스럽고 무서운 것이 다 기재한 거예요. 이게 세상 커버에요. 아까 이슬람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왜 그럽니까? 이유가 뭡니까? 나가 몇 명이어서 그래요? 하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하나기 때문에 나 손해 보면 나만 탈나는 거예요.

그런데 시편 40편 1절에서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누굴 소환하지요, 누굴 기다립니까? “여호와여, 찾아오소서.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뭐냐 하면 내가 폐기대상이란 사실을 주께서 새로 마련하신 새로운 나로 인하여 어서 속히 바꿔치기 해주세요. 체인지 해주세요, 이 말이에요. 체인지 하려면 내가 폐기대상인 것을 인정해야 되지요.

왜 내가 폐기대상이 됩니까? 내가 평소에 내가 책임지려하고 내가 선택했던 목표물이 누구기 때문에? 나기 때문에. 내가 바로 삶의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되기 때문에 이거는 폐기대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성경의 진리에서는 뭐냐? 그 어떤 목표와 목적과 기대가 뭐로 이어진다? 죄로 이어진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목표와 목적과 기대가 결국 어디로 돌아오기 때문에? 나를 지켜내고 나를 버티려는 하나의 시도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죠. 내 안에 누구 것이 들어있습니까? 선악체제라는 이건 내 것이 아니라 누구 것이라 하죠? 하나님 것이 들어있는 데 왜 남의 것을 갖고서 내가 완성하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이건 반칙이잖아요. 다윗처럼 가져가라고 해야지요. 제 게 아니니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래 해야지요. 돌려드리려면 여호와께서 오셔야 되지요.

오셔서 빼 갈 때 돌리는 방법은 뭐냐? 여기 책이 오지요. 시편 40편 7절, 지금 몇 번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책이 오잖아요. 책이 오니까 그 책에 누가 들어있어요? 누군가 들어있는 데 그게 나의 쌍둥이였습니다. 그래서 책 안에 나가 왔나이다. 기다렸는데 누가 왔나? 책 안에 쌍둥이가 여기 온 거예요. 택배로. 왜 왔습니까? 대신 처리하기 위해서, 대신 죽기 위해서 오셨지요.

그러면 다윗에게는 다윗이 몇 명이에요? 두 명.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 몇 명입니까? 두 명. 하나의 육체 안에 두 명 들어있어요. 그걸 성령 받았다고 해요. 주님의 영이 들어와 계신 거예요. 주의 영이. 주의 영의 입장에서는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주께서는 죄인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어제 오후예배 때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건강한 자는, 간단한 거예요. 건강한 자는 하나님 앞에 쓸데없다. 스스로 괜찮은 자는 주 앞에 쓸데가 없어요. 스스로 괜찮을 것 같으면 알라 신 믿든지 안 그러면 밑에 2층에 가서 스님 직접 접견해서 하시든지.

지금 불교계에선 무슨 철이냐 하면,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라 하는 게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생전에 나중에 죽고 난 뒤의 생활을 미리 당겨서 하는 걸 생전예수재라 합니다. 극락생활을 미리 실습하는 것. 실습할 때 절이나 스님한테 돈을 내요. 돈을 뽑아내기 위해서 계속 이런 갈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생전에 있는 나가 극락에 있는 나와 불교에서는 같은 나에요, 다른 나에요? 같은 나에요. 나의 연속성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부지런히 뭘 행해야 돼요. 계속해서 행해야 된다고. 누굴 이용해서든지 내가 질적으로 나를 고급지게 만드는 작업을 게을리 해버리면 나는 극락에서 탈락이 된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악을 버리고, 그들은 악이 뭔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해야 되지요. 그러면 선악체제는 원래 누구 거라 했습니까? 하나님 건데 남의 것으로 지 것이라고 자기가 자기한테 책임지는 삶이에요. 내가 나한테 책임지는 삶을 살면서 이걸 구원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생전예수재, 불교에서 하는 거죠. 거기 상담료 내고 하는 거예요.

제가 방금 불교에서 하는 거라 했는데 불교에서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날 교회 보세요. 교회가 무슨 짓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지금 불교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다니고 있는 게 참. 절에 가는 것과 교회 가는 게 차이점이 전혀 없어요. 본인이 하나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손대서 우수한 나로 생산해내겠다, 뽑아내겠다, 이런 의식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고, 원인모를 병, 사업실패, 가정불화 있으면 이건 십일조 안 내서 그런 것, 이거는 헌금 떼먹어서. 궁합, 신수, 택일, 부부, 결혼, 사업, 전부 다 자기에게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는 거예요. 왜? 귀한 것은 내가 가장 귀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더 진도 나가서 그러면 주님께서 책에 나오는 새로운 내가 왔을 때 그다음에 나온 행보가 뭐냐? 그걸 제가 일곱 단계로 적어봤어요. 미리 정리해봤습니다. ①쌍둥이 → ②주체균열(분열) → ③거세(할례) → ④소환 → ⑤자기폭력(희생) → ⑥결박(내 속에 있는 악마를 결박) → ⑦해방(구원), 죄에서 벗어나는 것.

여기 하나님 소환이라 하는 것은 거세하고 난 뒤에 이제 본격적으로 인식한다는 거예요. 소환하면서 하나님께서 오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일찍부터 택한 백성에게는 오셔서 일을 하시는 데 이제는 거세당하고 난 뒤에 할례하고 난 뒤에 할례/거세는 출애굽기 4장에서 발생되는 게 뭐냐 하면 피가 나오지요. 그러니까 기존의 하나를 죽어야 주님이 만드신 준비해놓은 나가 그 죽음과 대비되어서 하나님의 오심에 의해서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할 수 있는 거예요.

이런 예는 뭐냐 하면 어떤 경우냐? 야곱에서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어서 활동한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하나님이 네 안에서 활동할게. 너는 거세당했으니까 할례 당했으니까. 할례언약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그냥 남성 생식기를 잘라내면 그걸로 끝나는 것 같지만 한평생이 거세당한 평생이 되는 거예요.

거세란 말은 나의 책임성에 대해서 내가 가만있을 수 없어 내가 어떤 행동에 나서잖아요. 행동이라 하는 것은 선택하고 결정하잖아요. 행동하고 선택할 때마다 족족 전부 다 그것을 주께서는 거세했다, 거부해버리는 거예요. 내 뜻대로 되지 않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런 아주 결정적 예가 뭐냐 하면 에스더 같은 경우에.

왕비 되게 해놓고 쭉 그어버리죠. 왕비를 쭉 그어버려요. 그러니까 에스더가 뭐라 합니까? 왕비가 어떤 자리다? 나의 마지막 죽는 자리다. 죽는 자리로 인식하게 된 거예요. 살아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권력을 행사하는 그 왕비 자리가 이게 자신의 최후의 자린인 죽음 직전에 그래서 문만 열면 죽어요.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라. 죽는데 왕비의 입장에서 죽는 거예요. 왕비가 되지 않는 입장에서는 내가 죽는 방법이 없다 이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모든 성도들은 공평해요. 그 사람의 어떤 직업이든 그 직업은 어떤 자리냐? 내가 자기 최후의 자리로서 부여받는 겁니다. 죽는다는 말은 나의 기대와 목적과 목표가 사정없이 잘라지는 거예요. 그 이유는 우리 안에 마귀와 연계된 결탁된 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를 따먹을 때 아담이 그냥 따먹었습니까, 뒤에 조종자가 있었습니까? 배후 조종자가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게 해놓고 인간을 떠나지 않았어요. 악마가 계속 인간과 결탁돼 있다 이 말이죠. 결탁돼 있으니까 결탁된 나를 제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새로운 나로 구원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전쟁은 내가 나설 수 없는 전쟁이고 누구와의 전쟁이다? 나는 빠지고 마귀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마귀와 예수님과의 전쟁이에요. 하나님과 전쟁이 아니고 예수님과 전쟁한다는 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시편 110편 1절과 2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전쟁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내 주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가 둘 되는 거예요.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40편도. 여호와 해놓고 주의 생각이 많다. 그러니까 시편 40편이 중첩이 되니까 무슨 뜻인지 몰라요. 주인공이 하나 인듯하지만 하나가 아니고 둘이 나와요. 주인공에서. 나의 하나님, 다윗과 하나님 관계 속에 책이 등장하면서 제3자가 등장하는 거예요. 제3자가 등장하면서 내가 나한테 뭘 실시해서 내가 구원되는 게 아니고 오시는 그분이 다 이뤘기 때문에 나는 거세니까, 내가 제거되는 즐거움을 주는 거예요.

제거되는 즐거움이 여기에 16절에 보면,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왜? 주 안에 새로운 내가 들어있기 때문에. 지금 나에 대해서 더 이상 애착이나 미련 둘 필요 없는 것, 그러면 나에 대한 내 책임성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책임성이 없어요. 내가 하는 책임감, 성취성, 목적, 목표 그 무게 때문에 내가 마귀에서 못 벗어나고 마귀와 못 떨어지고 같이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그 지옥에 있는 나를 그냥 보내세요. 마귀야 네 껍데기나 가져가라, 그냥 보내시고 새로운 주님으로 옮겨 타기, 갈아타기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하나하나 이야기했는데 아까 초반에 이야기했기 때문에 쌍둥이 이야기했다 치고, 두 번째, 주체균열 이것 이야기하겠습니다. 균열이란 뭐냐? 균열, 분열 같은 말로 되는데 내 안이 비워있다. 하나님이 주신 선악과를 하나님이 도로 빼앗아 가버리면 선악과 있던 자리가 텅 비게 되겠지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없음이죠. 무가 되지요. 없음인데 없음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미지의 X가 돼요.

내 안에 나는 아무것도 없다가 돼버리면 이건 불교가 돼버려요. 나는 무아다, 나는 내가 없다. 내가 없는 게 아니고 누가 들어와 있어요. 미지의 암호 같은 하나님의 암호가 주님의 암호가 들어와 있어요. 미지의 X에요. 그리고 그 X는 나의 한계를 알게 합니다. 너는 이것까지, 이게 네 한계까지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는 나한테 유리하도록 주변의 상황을 이용하려고 하는데 주변에 있는 모든 일은 미지의 X와 관련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내가 가꾸어온 내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내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깔아놓은 주님이 찾아온 자기의 징검다리였어요. 주님이 찾아드는 그러한 노선 또는 카펫, 미리 깔아놓은 양탄자. 나의 과거사가 제거돼버려요.

제거되고 미지의 X, 그러니까 이게 뭐냐? 주님의 일로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서 10절에 나와요. 그것도 디모데전서에도 나오고 디모데후서에도 나와요.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에는 창세전부터 이미 나 같은 인간을 아시고 그동안 은혜로 왔습니다.

여기 시편 40편 11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이것은 분명히 앞에서 말하는 다윗이 자기의 주변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상황을 한꺼번에 일괄해서 해석하는 설명하는 모습이에요. “그동안 나한테 일어났던 모든 일은 사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었고 사랑이었습니다, 진리였습니다.”고 고백해버려요. 진리를 진리 되게 펼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저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표현은 전에 있는 다윗이 아니고 책 안에 들어있는 새로운 다윗의 입장에서 고백하는 거예요. 이걸 고린도전서 찾아봅시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뭐라고 돼 있지요?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디모데후서 1장 9절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찾아왔던 하나님 주 말고 하나님이 주라고 부르는 또 다른 하나님, 주가 주께서 오셔서 우리가 결탁돼 있는 악마를 원수를 이김으로써 만들어낸 주님의 자신 안에 창세전부터 예상해놓은 그 나, 나로 옮겨 타기, 바꿔치기 되는 겁니다. 로마서 9장에도 그게 나오지요. 야곱과 에서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뭔가 행하기 전부터 이미 창세전에 하나는 사랑받기로 작정돼 있고, 하나는 미움 받기로 작정돼 있고. 우리는 10분 쉬기로 예정돼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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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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