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4장 26절 (충만과 자율성) 230221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4장 26절 (충만과 자율성) 230221b-이근호 목사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면 인간의 특징은 그 말씀을 지킬려고 해요. 말씀을 지킬려고 하는 그것을 이용해서 말씀을 지키는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원수 그 마귀가 인간과 얼마나 치밀하게 결속되어 있는가를 하나님께서는 들추어내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말씀을 지킬려고 애씀으로서 드디어 그동안 꼬깃꼬깃 숨겨놓은 악마가 자기의 본색을 말씀지킴을 통해서 노출되도록 하나님이 그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백성 맞아요. 백성 맞는데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이 세운 나라를 얼마나 갉아먹는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열왕기하 1장 1절에 보면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그 다음에 뭐 나오죠?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다”
튀르키예 원래 이름이 터키인데 미국에 칠면조가 터키라서 이름을 대통령이 국민투표해서 바꿨는데 그 튀르키예에 보게 되면 케밥이라고 합니까? 이렇게 걸어놓고 깎아서 나오는 고기를 빵에 싸가지고 주지요. 고기가 이렇게 있는데 이걸 칼 가지고 조금씩 덜어내잖아요.
이스라엘이 있는데 모압이 이걸 깎아내는 거에요.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을 주변의 나라가 깎아내면서 모압의 문제점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개념, 이 개념과 이스라엘이라는 인간의 만남이 이 인간 만남 속에 여기 악마가 개재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주님이 이 개념을 축으로 해서 이걸 보여주는 거에요. 깎아내는 방식으로 구약이 진행되는 겁니다. 껍질부터 바깥에서 깎아내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첫째시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주신 말씀이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못 지킨다. 굉장히 간단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두 번째 시간에 해야 될 것은 왜 우리가 못 지키느냐에 관한 이야기를 두 번째 시간에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왜 그걸 못 지키느냐. 우리를 무시하느냐? 우리는 주의 말씀을 지키고 싶어. 주의 말씀을 지키고 싶어서 열심히 주의 말씀을 지킬려고 애를 쓰는데 어떻게 그것이 마귀의 작당이 되느냐 그 점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 점을 위해서 주께서 준비한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율법이고 율법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은 이게 소금을 집어넣었어요. 율법 안에 소금을 집어넣었다고요.
누가복음 14장 소금은 좋은 것이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신약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소금은 좋은 것이다 너희가 소금이다 끝. 이게 신약이에요. 그런데 구약은 소금은 좋은 것인데 너희가 소금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게 구약입니다. 참 쉽지요. 소금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일단 소금 해놓고 한번 너희들을 가지고 소금이라고 너희들을 불러줬을 때 너희가 소금에 부합되는지 한번 볼 거야. 보니까 네 속에 마귀 나오네 이게 구약입니다.
히브리서 7장 8장 9장 10장 계속 나와요. 제사장해서 제사 지내보니까 제사장들이 나가떨어지는 거에요. 우리가 하는 제사는 우리의 연약함과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온전히 받을 제사에 미흡하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에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최선을 다했잖아. 그 최선 다한 건 봐줘야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나오는데 그런 게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7장에 누가 나오느냐 멜기세덱 나오지요. 멜기세덱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라는 속에 멜기세덱을 감추어 놓고 멜기세덱처럼 되지 못할 인간들을 가지고 이 제사장을 하게 만들어요. 해놓고 탈락! 땡 탈락 탈락 계속해서 마지막에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 누구다? 바로 예수님이다 를 소개하는 겁니다. 이게 인류역사를 전개하시는 하나님의 취지에요. 정답 줘 놓고 정답에 부합하지 않으니까 내치는 것이 나의 정당성 이거다 이 말이죠.
인간의 순환은 자기의 자율성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인간의 순환은. 자기의 자율성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 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들이에요. 사람이 나중에 대학 졸업하고 사업하잖아요. 자율성이죠. 취직해서 승진할려고 애를 쓰잖아요. 자율성 발휘하지요. 부모가 돼서 자식 키워놓고 학원 잘 보낼려고 공부시키잖아요. 요새는 초등학교부터 의대 진학반을 설치한답니다. 초등학교대상으로 의대 진학반.
와 참 대단하십니다. 걔들은 졸업하기 전에 함수 다 떼고요 부모들이 왜 그렇게 합니까? 무엇 때문에? 자식의 자율성이 아니고 부모 자기의 자율성을 통하기 위해서 억지를 부리는 거에요. 그게 통하지 않으니까 그 고통이 인간사회에 이게 순환사가 되는 겁니다.
자, 이 자율성, 인간의 이 자율성이 마귀로부터 왔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인간의 그 자율성. 주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죠. 그런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을 사람들이 죽였잖아요. 뭐가 빠져버린 거에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우리 되시는 분을 죽여버린 거에요. 이 기도하시는 분을 죽여버린 거에요. 인간세계에 뭐가 빠졌습니까? 우리가 빠졌으니까 아버지가 빠진 거에요.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오직 아들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이 자기 자율성을 발휘해서 아들을 죽였으니까 인간의 자율성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들통나는 것 그 위치가 뭐냐? 마귀의 자리죠. 마귀의 자리. 악마가 지배하는 자리에요. 우리라고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은 성령이 왔을 때 우리가 돼요. 예수님의 영이 왔을 때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가 돼요. 믿는 사람 우리가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 모인 핵심이 뭐냐 하면은 아들이 계셔야 우리가 돼요. 성령이 와야 우리가 된다고요. 단독의 자율성은 더 이상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 자율성, 구약 내내 실험 대상이 돼요. 성전 지어라 율법 지켜라 십일조 해라 계속 주는데 인간들은 그걸 어떻게 마중 나옵니까? 자기의 자율성 가지고 마중 나오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율성을 믿기 때문에. 이것만이 뭔가 현실로 통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렇게 해야 내가 더 이상 나를 미워하지 않고 나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내치지 않고 보담아주고 안을 수 있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꼭 안고 있는 상태. 사람들은 이 상태를 가지고 사람들은 뭐라고 부르느냐 이걸 가지고 행복이라고 합니다. ‘행복’. 모든 시중에 서점에 나온 책들이 이 이야기에요. 너 자신을 놓치지 말고 꼭 잘 키워서 베란다에 있는 아름다운 꽃처럼 너를 잘 키워내는 그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후의 행복이다. 꽃잎이 떨어지거든 남아있는 꽃잎 가지고 꼭 쥐어라. 꽃잎 다 떨어지고 짝대기만 있거든 짝대기 쥐어라. 짝대기 날라가면 뿌리라도 쥐고 너를 이렇게 보담아가지고 너를 위로하고 안아주게 되면 그게 바로 행복의 씨, 마지막 남은 행복의 터전이다.
이게 뭐냐? 주님 쪽에서 인간에게 행하는 잘라내기. 튀르키예의 케밥. 케밥 고기 자르듯이 계속 잘라 들어가면 마귀가 나오는 거에요. 마귀가 자기 마귀를 못 놔요. 성도는 성령이 오면 자기를 부인할 수 있지만 마귀는 지옥 가는 것이 확정된 존재이기 때문에 끝까지 지옥 가도 나 붙잡고 같이 지옥 가겠다는 거에요. 그게 마귀고 그 마귀의 후손들이 오늘날 이 세상에 ‘나’라는 아파트 안에 모조리 다 들어있어요. 전부 다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말이 복음이 통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통할 수가 없어요. 자기 행복 따로 꼬불치고 있는데 자기 행복을. 내가 당신한테 잘못한 거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너무 밀치지는 마세요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꼭 붙잡고 있는 거에요.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맞춰보세요. 남에게 맞은 부모가 마음이 아플까 남을 때린 자식을 가진 부모가 마음이 아플까. 어느 쪽이 마음이 아파요? 얻어맞는 자식을 가진 부모가 마음이 아플까요? 때린 부모가 마음이 아플까요? 글로리.
둘 다 고통입니다. 왜? 둘 다 뭘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율성이 있는 한 인간은 지옥입니다. 이 자율성이 시들할 때 이게 복이에요. 이게 행복입니다. 너 뭐 할 줄 알잖아. 내가 뭔데, 나 아무것도 못해. 이 자율성으로 뭘 하느냐? 계산합니다. 계산. 자, 지금 두 번째 시간 초반에 이렇게 운을 뗐지요. 인간이 말씀을 지킬 때 어떤 태도로 그 말씀을 자율성이죠. 어떤 자율성을 가지고 내가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고자 시도를 하는 그 생각 아이디어 그걸 어떻게 우리가 찾아낼 수가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열왕기하에 보면 이걸 잘라내는 방법을 하는 거죠.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나의 자율성을 한껏 발휘. 이건 인갈들의 생각입니다. 두 번째는 개념, 주의 개념을 두고 자율성을 깎아내는 계속해서 깎아내어서 네 안에 마귀 있다 라고 들추어내는 개념을 주고 인간 속을 깎아내는 방식 이것이 바로 주님의 방식이에요. 구약에서. 신약 오늘날도 마찬가지고.
지금 제가 소금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처음에 소금을 들고 나올 때 개념이 이거는 뭐냐 하면은 구약에 의하면 정결케하는 재료에요. 정결케 깨끗하게 하는 재료입니다. 재료인데 가면 갈수록 뭐로 변하겠습니까? 이게 맛을 잃게 만드는 그것을 증거로 보여줘요. 구약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통해서 맛이 갔다는 것을 너희는 하나님의 개념에 불일치한다는 사실을 증거로 보여주는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자, 그러면 충돌되지요. 우리는 열심히 지킬려고 하고 하나님은 이게 안 된다고 할 때에 나의 자율성을 열심히 지키는 이것을 응축시킨 게 뭐가 있을 거에요. 모든 인간의 자율성을 가지고 열심히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뭘 하겠습니까? 계산하겠지요. 오늘날 계산은 뭐냐. 수학이에요. 수학. 그래서 제가 지금 어렵지만 수학에서 인간들이 진리를 찾는 그 방식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연산수 e에다가 I 허수지수가 들어가고 여기에 파이 들어가고 =-1. 오일러의 공식, 오일러라는 수학자가 있어요. 이게 뭐야 이게. 이게 바로 자율성의 극치에요. 이게 자율성의 극치입니다. 이제 인간들은 이걸 증명하는 거에요. 이렇게 해놓고. e가 뭔지를 I가 뭔지를 파이가 뭔지를 +는 뭔지 1은 뭔지 =은 뭔지 0은 뭔지 이걸 인간들은 이걸 알고있어요.
왜? 이것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나왔습니까? 인간에서 또는 배후의 마귀에서 나온 인간의 자율성의 표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일러의 함수를 어떻게 계산해놨는가 어떻게 증명해놨는가 0,1 이것은 카운트입니다. 어떤 식이 있는데 =0으로 놓는다는 것은 0으로 놨을 때 해법이 나와요. 이게 0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 진리로서는 끝났다. 0으로 놓을 때 여기서 뽑아내는 이것은 진리 맞다. 이렇게 할 때 수학에서 0을 놓는 거에요.
그러면 수학이라는 것이 왜 필요하냐. 수학은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보이는 것과 변화하는 것. 보이는 것은 도형으로 나타나고 변화하는 것은 미분과 적분으로 나타나요. 미분 알지요? 움직임 변화를 포착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거에요. 미래 예측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진리지만 이 방정식대로 그대로 세상은 움직일 것이고 세상이 그렇게 움직인대요. 움직일 것이고 그렇게 예측대로 되면 우리가 목적하는 미래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나사에서 로켓을 올리면 분명히 5개월 뒤에는 분명히 화성에 도착할 것이고 맞지 봐 화성에 도착했잖아. 화성에서 사진 전송. 12억 화소의 사진을 우리한테 보내는 거 맞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진리 맞잖아. 우리 자율성의 승리죠. 우리 자율성의 승리인거에요. 진리는 하나님만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서 다가서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자율성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자율성이 되어버리면 뭡니까? 자기 미움이 돼요? 안돼요? 자기 찬미가 되죠. 자기 미움이 되지 않지요. 자기 찬미라니까요. 모든 학문에는 보이는 것과 변하는 것만 정복하면 다 정복하는 거에요. 두 개만 정복하면. 그러면 이 보이는 것을 하는데 삼각형 직사각형 일부만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이는 것에서 출발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끄집어내는 거에요.
이 보이는 것은 0,1,2. 보이는 것은 1이잖아요. 1과 대응을 해야 보이잖아요. 한 개 있다 하잖아요. 한 개 없는 것을 0이라고 하는 거에요. 1에서 0이 나온 거에요. 두 개 있으면 2, 세 개 있으면 3. 그러니까 0=0 진리에요? 진리 아니에요? 1=1 진리지요. 2-1=1 진리에요. 두 개에서 한 개를 빼니까 하나. 그러니까 이거는 맞다. 맞으니까 이건 진리다. 따라서 이거는 우리의 자율성의 승리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평소에 하는 우리의 모든 것이 이 자율성에 푹 빠져있어요.
주님이 케밥 잘라내듯이 그렇게 일을 하게 해놓고 자율성을 하게 해 놓고 그 자체를 근원적으로 잘라낸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몰라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줘놓고 그 말씀에 부합된다는 조건하에 우리를 잘라낸다는 사실을 교회 다니는 사람이 몰라요. 이 자율성이 어디까지 퍼졌는가. 종교, 성경해석까지 퍼져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여기 인격체가 몇 개 나옵니까? 나 나오지요. 예수 나오지요. 주의 말씀의 원칙에 의하면 인간은 두 주인을 못 섬기죠. 두 주인을 못 섬겨요. 그러면 나와 예수 가운데서 부등식으로 내가 쎌까요? 예수님이 쎌까요? 두 주인을 못 섬겨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렇게 되어있어요. 한쪽을 미워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한쪽을 미워할 때 한쪽을 사랑한다는 말은 한쪽을 미워한다는 거에요. 나 두 개 다 사랑해 이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한쪽을 미워하지 않으면 한쪽을 사랑할 수 없어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필히 뭘 동반해야 돼요? 나를 미워하지요. 나에다가 이걸 대입해봅시다. 수학을 대입해버리면 나는 예수를 믿는 나를 뭐한다? 예수님 앞에서 미워해야 돼요. 이게 주께서 그렇게 잘라내게 하는 거에요. 예수 믿는 나를 미워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믿는 예수를 하나님이 신뢰 안하는 것으로 단정짓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구원받는다는 것은 자기 자율성의 발휘에요. 여러분 구원받는 것이 좋습니까? 싫습니까? 좋지요? 좋으니까 나에게는 배척의 대상이 안되지요. 예수님 나귀타고 올 때 호산나 할 때 예수님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호산나 노래 불렀잖아요. 그들이 자기 구원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 군중들이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뭐했습니까? 막 데모했습니까? 촛불집회 했습니까? 안했지요.
저 죽어가는 예수보다 누가 더 귀해요? 구원을 기다리는 본인이 더 귀한 거에요. 본인을 미워할 수가 없는 거에요. 예수님보다 나의 구원이 더 귀하다 내가 귀하다는 말은 자연적으로 누굴 미워할 수밖에 없다? 예수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겁니다. 네가 하는 자율성과 너의 기대가 실제로 예수님 살인사건 앞에서는 그게 아무짝도 의미가 없다는 것. 아무 의미가 없어요.
천국와가지고 더 이상 모자람이 없고 충만했는데 갑자기 이거 뭐 예수 믿는 수작부터 해가지고 거부당하니까 우째 나 뭐하면 돼 이렇게 되지요. 주님께서 바로 이런 것을 잘라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때그때마다 뭘 확인시키느냐 하면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천국이냐 네가 고대한 천국이냐를 우리보고 갈라세우는 겁니다. 갈라세우는데 그때 갈라세우는 작업을 우리가 알아서 제가 알아서 갈라세우겠습니다 하면 안돼요. 우리는 우리 본성대로 본능대로 그냥 밀어붙여야 돼요. 밀어붙이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잘라내요. 우리를.
이 자율성을 발휘한다는데 인간이 구체적으로 자율성을 발휘하는지를 제가 하겠습니다. 이게 수학이라고 했지만 수학이 어디까지 파급했다고 했습니까? 종교까지 또는 성경해석까지 파급되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정복. 여기 등장하는 것이 숫자파이. 곱하면 –1 되는 것. 이건 말도 안되거든요. 곱했는데 –1. 루트-1을 제곱했는데 이게 있을 수가 없어요. 뭐든지 제곱하면 플러스가 마이너스 바뀌면서 1이 되야 정상인데 이 허수는 봐줘야 된다는 거에요.
1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없는 것을 동원해야 돼요. 1 전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1 전에 0이 있지요. 0을 카운트해버리는 거에요. 이게 반칙이에요. 없는 것은 카운트하면 안돼요. 아무것도 없는데 카운트하면 안돼요. 귀신 없는데 귀신 두 사람 있다 이건 말도 안 되거든요. 수학자가 논문 발표하다가 잠깐만 여기 귀신 일곱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 수학자 논문 통과합니까? 통과 안하지요.
있는걸 증명될 수 있는 것 다음에 이 원리대로 이와 같이 발생될 때 그때 논문이 통과되는 거에요. 인간세계에서. 네 자율성에 대해서 내 자율성이 호응을 줄 때 통과되는 거에요. 박사가 되든 석사가 되든 뭐가 된단 말이죠. 귀신 세 명이 있습니다. 그거 뭐로 증명할거에요? 증명 안 되지만 귀신 있다고 칩시다 하는 거에요. 귀신 있다고 칩시다. 그게 수학이고 그게 신학이고 성경해석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1부터 하는데 0 없다고 칩시다. 없는 것은 없는 건데 카운트하면 안돼요. 반칙이에요. 그런데 없음을 가지고 그 다음에 있음을 가지고 없음을 동원하는 거에요.
왜 그러느냐? 나의 위치를 잡기 위해서. 0이 있는데 1,2,3,4 실제로 있는 것을 카운트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실수라고 해요. 실수. 실제의 수. 1,2,3,4 그런데 출발점을 어디서 합니까? 0으로 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두 사람 모였다. 2죠. 그러면 2라고 하는 것을 왜 하느냐? 0에서부터 우리 자리 여기다. 우리의 확보된 자리를 우리가 자율적으로 규정하겠다.
다시 말해서 이 자리가 무슨 자리 됩니까? 내 자리. 또는 우리끼리 자리. 관심은 어디 있습니까? 0에 관심 있는 게 아니에요. 0에서부터 우리는 두 개 떨어져있다. 어! 저쪽은 네 명 모여있네. 그러면 저쪽은 0에서부터 4떨어져있고 우리는 2개 떨어져있다. 이게 왜 진리죠? 이게 진리입니까? 우리는 여기 살고 있고 미국은 저쪽에 떨어져있다. 이게 진리입니까? 이게 진리 맞아요? 진리다 아니다 둘 중에 하납니다.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뭐가 누락됐어요?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유황불에 탄다는 사실이 여기에 포함됩니까? 안됩니까? 안 되어있잖아요. 예수님 죽었다는 사실 포함 안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진리가 아닌 거에요. 우리끼리 진리인 거에요. 인간끼리 진리입니다. 자기 만족이에요. 자기 미움 아닙니다. 자기 찬미고 자기 찬양이에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자기 정당성이고 성경에 보면 자기 의. 이게 자기 의에요. 자기 의를 성경공부한다고 이게 사라집니까? 안 사라집니다.
인간은 실수 자리에 1 해놓고 y 자리에다가 허수 자리를 만들었어요. 허수라는 게 없는데 자리를 만들었어요. 만들어놓고 실수로 3, 허수로 2 해놓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complex plan. 복소수 또는 복수평면. 허수세계와 실수세계를 한 그래프에 만듭니다. 자, 이렇게 만들어놨어요. 인간은 상상하는 거에요. 무엇 때문에 상상합니까? 자기의 자율성. 자율성을 왜 그렇게 주장하지요? 자기 정당성. 자율성에서 행함이 나오고 그 행함에 대한 자기만족, 자기 옳음 나는 옳았다. 나는 제대로 했다를 하는 거에요.
여러분 제 말이 이해되십니까? 그만큼 우리는 당연하게 살았어요. 당연하게 자율성 챙기고 성경공부해가지고 천당 간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 성경의 진리가 여기 누가 작용해요? 성령이 작용하지요. 자율성은 누가 작용합니까? 악령이 작용. 악령은 나를 대표로 내세웠고 성령은 성도를 대표로 내세웠어요. 둘 사이에 전쟁이 있는데 우리는 모르고 악령 챙기고 성령 챙기면 천당 가는 줄 천국 가는 줄 알고 있어요. 성령께서 우리를 자율성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모르고요. 허수라는 개념자체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정복하겠다는 겁니다.
출발점은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실수로 시작해서 허수세계까지. e=i 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실수에서 출발해서 만들어낸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비교 대조의 본능을 발휘합니다. 비교하고 하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옳았고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뭔가 대비되고 반대되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딱 옆에 같이 견주어서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자기가 망가진 것을 위로하기 위해서 자기보다 더 망가진 사람을 염두에 두는 거에요. 자기 아이가 감기 들린 것이 슬플 때 아이 5명 다 죽은 가정을 생각하면서 그래도 우리 애는 아프지만 죽지는 않았잖아. 살아있는 것이 고맙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 위로해서 자율성의 행복에 잠기는 것, 이게 인간의 심보입니다. 우리 삶 그 자체에요. 그걸 지적하는 거에요.
그걸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y=f(x) 라는 함수가 있어요. y라는 것은 하나의 종축이고 x가 이런 function, 하나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을 점으로 찍어서 보여주는 거에요. 보여주게 되면 인간은 뭘 하느냐 하면은 이 지점을 f(x)라고 하면 여기서 좀 더 나간 지점을 델타엑스(Δx)라고 합니다. 이 차이는 여기서 이 만큼을 빼면 되요. f(x+Δx)-f(x) 빼기는 이 차이이죠.
그렇다면 인간의 변화는 뭘 한다? 차이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식으로 새로운 진리를 찾아나서는 거에요. 수학하고 그래서 골치 아프고 있지만 인간을 사용하는 인간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해드리는 거에요. 변화, 미래에 대한 변화를 뭐라고 한다? 차이죠 차이가 될려면 뭐를 부정하면 안돼요? 지금 fx까지 온 나를 부정하면 돼요? 안돼요? 나를 부정하면 안돼요.
지금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그걸 해서 그 차이를 끄집어내면 나중에 나는 5개월 뒤에 6개월 뒤에 이렇게 될 것이라는 그 차이가 지금의 나로 하여금 삶의 활력소가 되는 거에요. 활력소가. 잘 될 거야 그런 노래 있잖아요. 잘 될 거야. 그 차이를 계속해서 찾아나서는 거에요. 계속해서. 회사에서 그래프 그려놓고 더 광고회사 많이 따오너라. 너 부회장 말 안들으면 따오는 광고회사 다 stop시키고 너는 사표내고 나가라! 형사인데 범인을 잡는 게 아니고 오히려 범인을 이용해서 돈을 빼먹고 베트남까지 가가지고 범인 돈 빼먹는 드라마 모범택시2.
여러분 세상을 한번 보세요. 모든 세상은 그 차이가 없으면 살 의욕이 없어요. 주님은 인간들이 그렇게 나오는데 어떻게 한다고요? 그 차이를 깎아버리죠. 그 차이를. 지금부터 소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지금부터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기 위해서 제사에 소금을 뿌리는 레위기 2장 13절 “네 모든 제물에 소금을 쳐라” 하나님의 언약이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모든 제물 안에 뭐가 들어있다? 소금이 들어있다. 소금이 들어있어서 정결하게 된다면 인간은 이스라엘은 어디에 주목해야 됩니까? 소금에 주목해야 되죠. 소금에. 이게 굉장히 겁나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인간들 흔히 일상에서 요리에 사용하는 소금. 소금을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일상적인 소금이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제사에 일상적인 용품이 거기. 율법에 의해서 들어가는 거에요. 흔해빠진 소금이에요. 흔해빠진 소금이 구할 수 있는 소금이 감히 하나님께만 드리는 그 번제물에 삽입된다는 것, 이것은 그 제사 드리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흔해빠진 인간이지만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백성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그것을 개념적으로 보여주는 거에요. 개념적으로.
그러면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이런 말씀 듣고 뭐만 치면 돼요? 제물에 소금 치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 안에 있는 소금이 드디어 살아납니다. 서서히 이게 살아나요. 제물 안에 소금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번제를 받는다는 뜻이고 동시에 이는 제물인 이스라엘 전체를 받는다는 뜻이에요. 받는다는 뜻은 이스라엘의 삶과 행동 속에서 소금 같은 정결을 자동적으로 정결할 수 있는 요소가 이스라엘 속에 계속해서 살아서 활동하는가를 주께서는 주시해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제사의 율법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가 인간들이 일상 속에 재료 중에 하나 소금이 들어간다 재료 중에서. 양도 그렇고 염소도 그렇고 특별히 소금이 거기 들어간다는 것은 너희들이 다루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택해서 구분한다면 정결할 수 있는 소금이 제물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너희들도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그들은 제사드림으로 자기가 정결하다고 주장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보세요. 너희들이 맛이 없으면 뭐처럼 버려질 것이다? 소금처럼 버려진다 했지요. 자기 집에 있는 소금 갖다버리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너야 너너너. 너를 제물 속에 섞일 소금처럼 그렇게 대했단 말이야. 그래서 너에게 율법을 줬단 말이야 라는 뜻으로 쓰시는 거에요. 소금을. 그래서 소금을 무슨 언약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소금언약이라고 해요. ‘소금언약’. 소금으로 맺은 언약 약속이라고 하는 거에요.
열왕기하 2장 21절 보겠습니다. 이 대목을 봐야 이 소금의 뜻이 점점 더 중심에 다가갑니다. 제가 구호 비슷한 거 적어볼게요. 인생을 길이로 살지 마시고 깊이로 사셔야 돼요. 송해처럼 올해 몇이다 하는 오래 사는 거 자랑하지 마시고 얼마나 깊었는가를 자랑해야 됩니다. 자랑하는 것도 안되지만 그 깊이를 아셔야 돼요. 성경이 그걸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몇 년 살았다 그게 중요하지 않고 이스라엘은 가면 갈수록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서 그 깊이와 그 언약의 내용에 더 짙어져요.
그중에 하나가 열왕기하 2장 21절입니다. 19절 보면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왔을 때 그때 성 사람들이 물이 안 좋아서 열매를 못 맺겠다고 엘리사한테 부탁했어요. 엘리사에게. 자, 그 뒤에 엘리사가 가로되 쇠그릇에 소금을 담아오라고 했지요. 자, 엘리사가 소금 담아온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모른다 치고 여러분이 엘리사라면 어떤 조치를 취했겠습니까? 물이 좋지 않아서 선지자님 대책 세워달라고 할 때에 여러분들 어떤 대책세울 수 있습니까? 아까 수학 언급했지요.
수학을 다시 보겠습니다. 인간이 어떤 눈에 보이는 것과 변화하는 것을 할 때에 인간은 여기서 뭐부터 출발한다고 했습니까? 자율성이죠. 이거 포기합니까? 안합니까? 이거 포기 안하지요. 지금 엘리사를 뭘 하느냐 하면은 이걸 포기하라는 거에요. 이걸. 이걸 포기하라는 말이죠.
만약에 우리가 선지자가 아니라 그냥 도와준다면 우물 다시 파면 되고요. 인간을 건드리지 않고 우리 자율성 가지고 어떻게 그 지역을 개발해가지고 더 지하수 더 깊이 내려가가지고 좋은 물 찾을 때까지 우물 팝시다 어떤 대책이 있을 거잖아요. 이 사람들을 건드리는 게 아니에요. 건드리지 않고 뭘 건드리느냐 하면은 이 사람들의 고민거리를 건드린다고요.
교회 교인들이 상담을 하러 온다면 아쉬운 것을 해결할 생각을 하면 안 되고 함께 온 사람의 그 깊이 얕다는 것을 주목해야 돼요. 세상 보는 깊이가 얕다.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나오는 게 뭐냐? 물의 근원이거든요. 물의 근원. 물의 근원인데 이 좋았던 물이 왜 지금 못 먹는 물이 되고 나쁜 물이 됐느냐 하면은 약속의 땅에 사는 인간들이 뭘 버렸느냐. 이 북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버렸어요. 언약을 내팽개쳤다고요.
그런데 소금이라는 것은 어디에 포함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제물에도 소금이 끼어들지요. 이 말은 인간 자체가 제물화 되고 거룩화 되는 것이 하나님이 제사 드리라고 하는 본래의 취지였다는 겁니다. 본래의 취지가. 제사 드렸습니다 끝! 이게 아니라 네 자신 속에 소금이 있는가를 한번 보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정결한 언약적 요소가 들어있는가 보라는 겁니다. 제사만 덜렁 드리지 말고 소금 치지 말고 네 안에도 정결한 소금이 있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약간 설명이 필요합니다.
엘리사는 선지자죠. 선지자의 등장 이유는 그 나라가 이미 끝장났다는 뜻이에요. 선지자가 등장한다는 말은 이 나라가 완전히 시마이 됐다. 희망 없다. 이제는 망하는 것만 남아있다 할 때 선지자 등장해요. 그럼 망하면 되는데 왜 등장시키느냐. 망하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망하는 이유를. 그래야 돼요. 망하는 이유를 알고 망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왜? 모든 개념의 성취는 누가 한다? 모든 개념의 성취는 하나님 자신이 그 말씀을 자기 것으로 잡아와서 완성을 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망해야 되지요.
엘리사가 소금 가져와서 소금을 어디다 합니까? 아무데나 연못에 뿌립니까? 어디에 뿌립니까? 물의 근원에다가 뿌려버리지요. 그동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감당 못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소금언약에 대한 위반으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농사 안 되게 하는 것은 무엇에 대한 경고요 무엇에 대한 주의입니까? 너희들이 우상을 섬기고 바알을 섬기고 너희들이 망한 이유를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에 선지자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완성시켜버리는 겁니다. 선지자 계열은 율법의 완성 계열이잖아요.
무슨 언약이라고 했습니까? 소금언약이죠. 소금언약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물이 안 좋아서 농사 못 짓는다고 상담 온 사람에게 엘리사 본인이 갖고 있던 하나님의 완성된 소금언약의 진위를 그 면면을 드러내신 거에요.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왜 하나님은 애초부터 그들이 찾기 전에 알아서 못하는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제사드리는 게 아니에요. 그들 자체가 하나님의 소금언약 속에 관여되어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뭐라 했습니까? 소금이죠. 민수기에 보면 소금언약이 나와요. 제물에 소금을 해놓고 소금 영원한 언약을 맺어요. 제물에 소금 들어갔다 하는 것은 제물은 없어져도 소금은 남아있다 이 말입니다. 소금은 그 완성의 개념을 볼 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소금언약을 인간이 이룰 수가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너희들의 아쉬움을 들어줄려고 온 것이 아니고 너희들 자체를 다른 인간으로 제대로 된 인간으로 바꾸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언약 안으로. 인간은 언약에 관심 없어요. 뭐가 방해합니까? 인간의 자기 자율성 때문에. 방해해서 나만 행복하면 되지 뭐. 내가 하나님을 꼭 섬겨야 돼? 이런 식으로 나만 잘되면 된다는 거에요. 그게 아니고 사람에게 밟히고 망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소금이 소금답게 하나님께서 완성시키겠다는 거에요.
그러니 아까 처음 천국이 이미 와버리면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지켜서 이 껍데기 같은 우리의 소금을 버려주시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우리가 감사히 여기면서 찬양하면 되지요. 주님이 소금이지 내가 소금인가. “주여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내 자율성 맘껏 발휘해서 발휘하는 족족 내 뜻대로 안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걱정하지 마 다 안 되게 해줄게” “나로 인하여 행복하고 나로 인하여 살맛이 나게 안 되게 하옵소서” “염려하지 마 걱정하지 마. 네 뜻대로 안되고 내 뜻대로 다 해줄거야”
그러니까 죄책감이라든지 어떤 결핍 결함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의만 충만하라 이것이 바로 오늘 누가복음에서 소금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밟힌다는 이야기를 버려진다는 이야기를 십자가 지는 과정 속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아 우리가 버려져도 마땅하구나’ 제자들이 알고 얼마나 기뻐했겠어요. 얼마나 기쁘게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도 말씀을 보고 기뻐하게 하여주옵소서. 우리 자율성에 가리워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는데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미워하는 기쁨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충분히 미워해도 괜찮은 그런 세계 속에 천국 안에 들어와있음을 찬미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