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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강남-누가복음 14장 26절 (충만과 자율성) 230221a-이근호 목사자유게시판누가복음

강남-누가복음 14장 26절 (충만과 자율성) 230221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4장 25절 26절 27절,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여기에 나오는 이 말씀은 오히려 굉장히 쉬운 말씀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여기 나오는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 십자가 모두 내 것이 아닙니다. 끝났지요. 내 것이 아닌걸 내가 가질 이유가 없지요. 부모, 형제, 처자, 부부 다 내 것이 아닌데요. 내 것 아닌 것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그중에서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내 것이 아니에요. 내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는’ 이라는 것을 단독적인 ‘나’는 있으면 안 되고 사람들 이렇게 있으면 각자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나’가 있잖아요. 나. Me. 또는 I. ‘나’가 있잖아요. 이 ‘나’를 전부 다 모아서 여기 한곳에 집중을 해야 돼요. 그럼 여기 누가 있느냐. 내게 오는 자, 집중해야 될 ‘나’가 따로 있어요. 예수님이 ‘나’죠. 내게 오는 자. 안 올려면 이럴 필요 없어요. 안 올려면 나를 갖고 있으면 안돼요. 오케이 갖고 있어. 하지만 내게 올려면 나에게 올려면 여기 전부 다 모아야 돼요.

모이게 되면 그림을 이렇게 그리는데 그림을 이렇게 그려보겠습니다. 이쪽에 모눈종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또는 이걸 아파트 한 동이라고 생각하면 여기 있는 점에 있는 각자 살고 있는 개도 한 마리 살고 있을거고 이 모든 ‘나’가 예수님께 올 때는 한곳에 집중해서 이렇게 주님에게 나와야 돼요. 그래서 누가복음 14장 25절에서 27절이죠. 이 말씀은 방향이 인간 쪽에서 주님께로 올 때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인간 쪽에서 주님으로 올 때는 여기 있는 각자의 ‘나’들은 ‘나’를 취소해야 된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나에 의해서 발생된 ‘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면 뭐냐 하면은 인간은 태어난 것이 사고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사고가 난거에요. 교통사고? 어쨌든 간에 내가 태어난 것이 사고라는 의식을 가져야 될 이유가 태어나면서 누가 태어나게 한 줄을 모른 채 누가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는지, 그리고 누가 내 인생을 끝장을 내는지 우리가 아는 게 없어요. 알 수도 없고 아는 게 없다 이 말이죠. 어느 누구도.

서로서로가 쳐다보고 있고 “너 알아?” “나 몰라.” “너 알아?” “몰라.” 그러면 모르는 사람끼리 한데 사회를 구성하면서 늙어죽을 때까지 계속 모르는 척 하다가 나중에는 본인이 본인을 죽이는 게 아니잖아요. 본인이 막 열심을 해서 오늘도 늙자 오늘도 늙어가자 이렇게 운동해가지고 늙어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인간은 늙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늙음을 지연시키고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아등바등 애를 쓰지 않습니까. 나중에 애쓰는 것도 힘 빠져가지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나 몰라라 하고 요양병원에 그냥 방치해버리죠. 인간은 세월을 못 이기고 시간을 못 이기고 자신의 운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길 수 없는데 해답은 모르죠. 그러니까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티기 들어가는 거에요. 인간은 버티기에 들어가는데 이 버티기가 문제가 되는 게 뭐냐 하면은 이 버티기가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은 늘 결함을 의식해요. 결함에서 나온 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는 결함의식에서 나온 거에요 결함의식. 만약에 결함이 없다면 죄 지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결함이 없는데 죄 뭐하러 집니까. 결함이 없는데. 모자람이 없는데 죄를 왜 지어요. 모든 죄는 모자람에서 와요. 모자람에서.

그러니까 이 모자람을 느낀다는 것은 여기 나, ‘나’라는 것이 나에게 충족성을 다 채우지 못하는 형편이다. 자기 충족을 다 채우지 못하는 형편.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결함. 모자람이 있는 거에요. 이 모자람을 인간은 살아가면서 주변에 일어나는 사태를 통해서 어느 정도 모자라는지 그 모자람에 인간은 미쳐버려요. 가만있어도 모자라고 뭔가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서 설쳐대도 모자라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뭔가 행동에 나서야 되는데 나서봤자 그 모자란걸 채우면 또 모자람을 채웠다는 이유 때문에 새롭게 뭔가 발생이 돼요. 모자람이.

그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28절, 그리고 32절에 나옵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되어있지요. 여기에 “족한다”는 말. 만족할까 안할까를 비용을 계산한다. 예상한다는 말입니다. 왜 계산합니까? 이게 자기가 알아요. 내가 결함이 있다는 것. 자아 충족성, 나 충족성.

내가 스스로 나로 절대적이지 못한 것을 본인이 알고 뭔가 나서야 되는데 이 나설 때에 주변의 상황이 항상 뭐를 나를 일깨우느냐 하면은 ‘너 많이 모자라지? 그렇지?’ ‘너 스스로 지금 만족하지 못하지? 그렇지?’ 라는 식으로 주변상황이 다가옵니다. 그것을 29절에서는 뭐냐 하면은 ‘비웃음’. 타인들이 내가 어설프게 결함 있다는 것을 타인들에게 노출될 때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부끄러움, 수치, ‘나 실패자인가? 나 인생 잘못살았는가? 나 좀 더 성실해야 되고 좀더 계산에 치밀했어야했는가?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는가?’ 그 고민한다고 귀한 인생 다 보냅니다. 다 보내지요.

그 다음에 31절부터 32절까지는 그런 망대 세우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전쟁을 벌려요. 어떤 임금이 전쟁을 할 때에 또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또 계산에 나서는 거에요. 자, 계산에 나서는 것은 뭔가 모자란다는 거에요. 결핍되어있다는 거에요. 결함도 좋지만 결핍. 채워지지 아니한다. 같은 말이에요. 결핍. 이게 바로 내가 처한 환경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에요.

주님께서 이 나를 만약에 이런 ‘나’들이 자기의 결핍과 모자람을 느끼고 내게 온다면 네가 있는 모자람만 갖고 오지 말고 네가 모자람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너 자체를 한데 모아서 오라는 거에요. 따로 오지 말고. 주여 주여 오지 말고. 한자리 한자리에 모아서 오라는 거에요. 한자리에 모은 게 뭐냐 하면은 바로 자기 십자가에요. ‘자기 십자가’.

자기 십자가에서 한데 모을 때에 여기서 자기 떼어버리고 그 십자가 주님의 앞에 있는 객차 있고 열차 있잖아요. 자기 십자가를 내가 기관차가 되어서 긴긴 오십량의 육십량의 백량의 객차를 끌고 뒤에 끌고 올 때 나를 이 자리에 지워버리고 주님의 자리 집어넣고 끌고 가는 거에요. 어떤 경우에만? 인간 쪽에서 주님에게 나올 경우에만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 지고 끌고 나오게 되면 여기서 뭐가 주어지는가. ‘그 나라와 의’가 주어지죠. ‘그 나라와 의’. 내가 있을 때는 여기 결함이 있고 결핍되어 있지요. 충족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해서 목마름이 있고 헐떡이고 있고 결함이 있고 그것 때문에 자꾸 욕심을 내게 되어 있고 뭔가 모험을 하게 되어있고 시도해도 그렇게 만족함이 없을 때 그 나라 의, 그 나라 의니까 천국이죠. 천국이 그냥 주어졌다면 무엇이 날라가버리겠습니까?

결핍이 날라가버리죠. 결핍이 날라갈 뿐 아니라 결핍 때문에 인간은 뭘 한다고 했습니까? 결핍 때문에 죄 짓지요. 결핍 때문에 죄 짓게 되면 인간은 자기의 결함이 되죠. 오점이 되죠. 결함도 같이 날라가버리죠. 탐심? 탐낼 거 뭐 있습니까? 다 이뤘는데. 탐심도 같이 날라가버려요. 이거는 뭐냐? 완성이 되고 온전함이 되고 만족함이 되는데 이걸 에베소서 1장에서는 이걸 아주 멋진 말로 표현하고 있어요.

에베소서 1장 23절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표현을 이렇게 했어요. 이 상태를 뭐냐 하면은 ‘충만’. 우리말로 하면 가득차서 만족이 넘쳐남. 가득차서 만족이 넘쳐남 그렇게 되는 거에요. 로마서 5장에 보면은 하나님의 의의 특징이 무엇과 대조가 되느냐 하면은 인간의 죄와 대조가 되는데 인간은 죄 지은 것만 죄가 아니라 인간이 죄 지을 때만 죄인 되는 것이 아니고 죄가 인간을 통해서 차고 넘쳐 나온다 흘러넘쳐 나온다고 되어있어요.

바케스에 물을 담는데 물이 가득 담는 게 아니고 바케스 안에서 죄가 흘러넘쳐 나오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모자람과 결핍이 흘러넘치는 거에요. 아무리 돈을 벌어도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높은 자리 있어도 늘 결함 때문에 이걸 마저 채우기 위해서 어떤 수단과 어떤 묘수와 요령을 피워야 되느냐 늘 골똘하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로 인하여 누가 발생되겠습니까? 피해자 발생되겠지요. 피해자 있던 말던 내가 지금 결핍을 느껴서 미치겠는데 남이 아프다는게 걱정이 됩니까? 안됩니까? 그것까지 신경 쓸 수가 없어요.

내가 지금 4강까지 해도 배고픈데. 히딩크처럼. 지금 손흥민이 5골 넣었는데 우리나라 국민들 좋아합니까? 아직도 배고파요. 한 게임에 4골씩 넣어야해. 손흥민은. 뭘 느끼느냐 하면은 손흥민을 좋아하면서도 손흥민을 통해서 뭐냐? 자기 결핍을 계속 느끼는 거에요. 나 실망시키면 안돼. 부부와 자식도 마찬가지고요. 자식아 너 나 실망시키면 안돼. 자식이 부모한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는 계속해서 나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야 해. 이런 식으로 계속 요구하고 있는 거에요. 내가 너 장단 맞출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천국을 이미 알아버리고 천국 안에 있는 사람은 죄가 넘쳐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만족도가 이게 바케스에 담을 수가 없어요. 계속 만족해요. 어떤 경우가 되도 만족해요. 집에 가스 안 잠궈서 불 나도 만족해요. 어떤 경우라도. 우회전을 하는데 사람 오는데 잠깐 해가지고 7만원 범칙금 내도 만족해요. 어떤 경우라도. 왜? 주님이 주신 하늘나라가 가득 찼기 때문에. 이게 완료된 상태, 이 충만이 계속 충만이 넘쳐나는 이 완료된 상태 단어가 상태개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상태개념, 상태 의미가 뭐냐 하면은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

교회는 기능적이에요. 존재적이 아니고 기능적입니다. 왜냐 하면은 나를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라는 이 존재가 나한테 올려면 이 존재가 날라가고 온다는 기능이 살아있어야 되거든요. 결핍된 기능. 그렇다면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기관차 객차가 바뀌어 버리면 뒤에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에요. 기능. 주님의 의가 흐르고 넘치는 그걸 담아내는 넘칠 때마다 담아내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일종의 성도는 또는 교회는 주님의 가득참을 담는 포장지 또는 빈 그릇. 빈 그릇이라 할 수 있어요.

그릇의 모양은 그때그때 다르지요.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 주어진 사태와 사건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주께서 일부러 그런 사건을 일으키는 거 같아요. 네가 이런 지경이 되도 네가 만족하냐? 만족하지요. 이렇게 되도 만족하지요. 네가 말기암 4기인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뭐 그럴 때도 있고 죽을 때도 있고 아플 때도 있지. 뭐 괜찮아유~ 이렇게 되는 거에요. 만족도가 너무 넘쳐가지고.

만족도가 넘치니까 죄 지을 필요가 없어요. 죄 지을 필요가 없으니까 죄책감을 적금 붓듯이 죄책감을 차곡차곡 쌓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이 죄책감을 갖는 이유는 내가 혹시 죄 지은 것에 대해서 주께서 벌을 내리면 내가 만족하기 위해서 창구에 쌓아놓은 그동안 귀한 내 노동의 대가가 한꺼번에 날라갈까봐. 그러면 내 결함을 채울라고 애썼던 그 모든 수고가 헛수고로 끝날까봐 이게 무서워가지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면서도 계속 결함을 느껴요.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고 헌금하고 예배 참석하면서도 계속 결함을 느끼는 겁니다. 자기 존재의 밥그릇을 발로 걷어차지를 못하는 거에요.

그러면 인간이 과거로 돌이켜서 자기가 태어났다. 태어난 것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사고죠. 사고 아닌 사람이 없어요. 태어났는데 그 태어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늘나라 천국에 있는 사람에게 너 태어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만족스럽지요. 이렇게 되는 거에요. 태어난 것부터. 지나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충만이 아닌 적이 없어버려요. 모든 것이 충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은 계산 끝이에요.

이걸 아주 전문용어로 통밥 굴린다. 네가 네 인생에 통밥 굴리지 마라. 계산 누가 하느냐? 예수님의 계산으로 모든 것은 종결됐습니다. 종결됐어요. 끝났어요. 끝. 예수님의 계산은 끝났습니다. 예수님의 계산과 네 계산을 한번 비교해볼 수 있느냐. 인간이 올 때에 주께서는 자기 십자가 지라는 계산법을 사용하라는 거에요.

그러면 이 말씀을 할 때 이 제자들이 이 계산법을 따르겠어요? 안 따르겠어요? 못 따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질 수가 없어요 인간은. 왜냐 하면은 나는 나를 나와 결별이 안 된다. 나는 나와 헤어질 수가 없어요. 그걸 지금 언급하고 있는 거에요. 주님께서. 계속해서 주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네가 너를 놓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놓지를 못하고 안 놓고 뭐하느냐? 자꾸 통밥 굴리지요. 자꾸 계산해요. 여기 31절에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계속해서 계산하는데 아무리 인간들이 계산하고 전쟁할 때나 망대 지을 때 계산하는데 그 계산으로 절대로 자기를 버리는 계산은 나오지 않는다는 거에요. ‘자기의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처자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계산법은 인간에게는 나올 수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법은 정해져 있어요. 나올려거든 제대로 계산하는데 그 계산법이 뭐냐? 자기를 미워하고 나를 따라오는 계산법. 이것은 사람은 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리고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말씀은 사람에게 준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 땅을 방문하는 본인이 본인 보고 내린 말씀이 이 말씀이에요. 언약은 언약 준 사람만 지킵니다. 정답은 언약을 주신 그 분이 정답을 알고 나머지는 정답을 몰라요. 예수님께서 아시는 정답을 정답을 모르는 인간 속에 딱 집어넣어서 주께서 얻고자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찾아올 수 있는 자격자나 능력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있다. ‘나’. 그 이야기하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어떤 인간도 나에게 올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 하나님의 주신 그 말씀은 내가 너에게 준 말이 아니고 내가 내 할 일을 위해서 미리 레일을 깔아 놓은 거란 말이죠. 내가 나는 이런 식으로 가는데 너희들은 엉뚱한 식으로 간다. 너희들이 내 제자로 따르려하느냐? 여기 나오죠. 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되어있지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것은 어떤 조건이 붙는데 어떤 조건이 붙는가?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된 생각을 가질 경우에만 제자가 돼요. 괜히 뭐 예수님께서 메시아고 천국에 그 천국을 탐내서 예수님 졸졸 따라다닌다고 제자 되는 거 아닙니다. 예수님과 동일한 생각을 자기에게 부여할 수 있는 자만이 제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는 스승이 될 수 없어요. 제자는 제자의 선에 머물러야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내게 주어진 모든 아이디어는 결코 나에게서 나온 게 아니다. 스승이 먼저 있고 제자는 스승 다음에 뒤에 출몰되는 거에요. 스승 없는데 제자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스승이 있다는 것은 제자는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문제는 조건이 생각이 똑같은 생각이어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길은 결국은 이거는 예수님은 면제된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렇게 자기를 미워하는 길로 예수님이 가겠다. 계산해봐라. 이쪽으로 와서 하늘나라 하나님한테 가는데 너도 같이 갈래? 라고 묻는 내용이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33절에 한번 봅시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되어있지요. 버린다는 말이 있거든요. 버린다는 말. ‘버린다’. 처음에 그렸던 그림 다시 한번 그리겠습니다. 모눈종이처럼 있는 이 아파트에 아파트마다 각 호마다 전부 ‘나’가 있어요. ‘나’. 나나나나나나. 전부 ‘나’가 있단 말이죠. ‘나’가 있는데 주님께서 요청했어요. “야 내가 온 천국에 가고 싶냐?” “가고 싶습니다.” 하고 나오지요.

뭘 느낀다? 인간은 뭘 느낀다? 결핍을 느끼지요. 인간은 결핍을 느꼈을 때 결핍 자체가 뭐를 유발한다? 죄를 유발한다는 사실, 이 사실에 대해서 몰라요. 내가 결핍되어 있는 이것은 타고났기 때문에. 그래서 타고난 것을 견제하고 유지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나쁜 짓을 했을 때 죄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인간 존재가 이미 결핍되어있다는 자체가 온전치 못한 자체가 이미 이것은 죄가 나올 수밖에 유발할 수밖에 없는 바탕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결핍을 너희들이 계산하라 이걸 자꾸 염두에 두고 채워서 만족해하는 계산을 해보라. 그 계산법은 내가 제시한 계산법은 뭐냐? 너 자신을 제거하는 거에요. 너 자신을 제거하는 것. 인간이 못하지요. 할 수가 없어요. 제거하고 쓰레기 한데 다 모으자. 여기에다가. 한데 다 모아있으면 그때 내가 내 십자가와 함께 너희를 이끌리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사람들은 생각할 때 내가 주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나 자신조차 버렸다고 하는 이 대단한 결심을 하고 따랐을 때에 하나님이 “제대로 버렸느냐?” “제대로 버렸습니다!” “진짜야?” “약간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때부터 새로운 게 나오는데 그게 뭐냐? ‘나는 너를 버린다’가 되어버려요. 버린다. 왜 버리느냐. 소금 맛이 없기 때문에 버린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 좋지 않다는 거에요. 좋지 않으니까 어떤 대상이냐 하면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그냥 사람에게 밟히도록 갖다버리는 용도에요.

이 말은 결핍이 곧 뭐다? 쓰레기였다. 쓰레기 안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도 소용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들이나 그 당시 제자들에게 섭섭하게 느껴져서는 안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오히려 이러한 전제가 우리 모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아쉬운 그 결핍 또는 결함 또는 죄, 죄책감, 모자람 이 모든 것은 한방에 다 이루어지거든요.

예수님께서 나로 하여금 예수님 가신 길이 내게 주어지게 되면 우린 한방에 해결되게 됩니다. 한방에 해결되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그 나라 의,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천국이 찾아오게 되면 이 모든 것은 다 사라져버리지요. 우리 쪽에서 오는 방향은 이렇습니다. 그런데 주님 쪽에서 이미 완료된 천국을 쓰레기 같은 우리에게 찾아와버리면 우리가 그렇게 걱정했던 결함, 결핍, 죄, 죄책감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시도, 온전치 못함 거기서 오는 불안감 그리고 걱정 근심 이 모든 것이 한방에 다 날라가버리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있을 이유가.

그러니까 이런 전제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내가 누구냐를 앎으로서 주께서 해주시는 것이 극대 극으로 대조가 되면서 이걸 몇 년 공부하라든지 삼년 기도하라 이게 아니고 한방에 그냥 다 날라가버리는 거에요. 이젠 죽어도 괜찮아요. 모든 건 다 날라갔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성경 보시면 그렇게 골치 아팠던 성경 해석도 한방에 다 풀려버려요. 한방에.

만족함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충만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질타를 보는 거에요. 하나님이 질타하시는 것. ‘네가 죄인이구나!’ 이렇게 하게 되면 이미 하나님의 의로 충만한 가운데서 ‘네가 죄인이구나.’ 그럼 우리는 뭡니까? ‘예 그랬던 것이 우리였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시비 걸 거 뭐 있어요. ‘예 그렇습니다’ 이러면 되잖아요. 그걸 두 자로 ‘아멘’ 이라고 하는데.

여기 26절에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하면 우리는 해석을 어떻게 합니까? 제가 될 수 없지요. 제가 무슨 제자가 됩니까 라고 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가가 된 거에요. 라고 한 사람이. 어느 말씀도 우리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주님이 네가 못 지키는 것 내가 지켰다. 우리가 뭘 못 지켰으며 주님은 뭘 지켰습니까 를 누가복음 14장에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아 우리가 이런걸 못 지켰구나. 이런걸.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게 이게 안 되는구나. 안 되는걸 억지로 할 이유가 없지요. 그럼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시도한 모든 시도는 할 필요가 없지요. 오늘로서 종강인가? 모든 것을 할 필요가 없지요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면 우리 기능은 뭐냐? 우리 존재는 끝났으니까. 우리는 이미 죽었으니까. 존재는 죽었지만 기능은 살았으니까. 그럼 어떤 기능이 살아있는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그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육신은 죽을 때까지 계속 기능하는 거에요. 우리가 내가 그렇게 신뢰하고 내가 그렇게 못 놓던 내 결심과 오기와 정신력과 신앙이 이렇게 고장났구나 라는 것을 이미 합격한 상태에서 천국에 온 상태에서 만족한 상태에서 계속 그것을 점검하는 거에요. 그걸 다시 한번 되새겨보면서 혼자 히히덕 거리고 있는 거에요. 혼자 가벼운 마음 어쩔 줄 몰라서 고마워서. 혼자 킥킥거리고 웃는 거에요. 킥킥거리는 거 알죠? ㅋㅋㅋㅋ 이거 있잖아요. 메시지 보낼 때 아니면 ㅎㅎㅎㅎ. 40년 50년 교회 다녔는데 그게 다 쓰잘데기 없는 짓이었던 거에요. 그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천국에 못가면 어떻게 됩니까?” 꼭 초를 치시는 분이 있어요. 이미 천국 온 사람은 ‘천국에 못가는’ 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우리의 남은 육신 가지고 하는 행동이 천국에 못 가는 인간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내가 못하는 것이 천국에 왔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즐거움을 점점 더 증강시켜요. 내가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다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내 결함은 채워지지 않는다는 이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고 기쁜 소식이고 즐거운 일인지.

그런데 그걸 기뻐하지 않고 염려 걱정 슬픔에 잠겨서 내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이 말은 논리는 맞는 거 같은데 못가는 경우는 이거는 낭패지 않습니까. 영원히 맛없는 버림받은 소금되면 저 어떡해요 라고 또 자기 자신을 건질려고 하는 사람에게 주께서는 미리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미리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요 아까 제가 한 말보다 더 어려워요.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어떤 설명이 필요하느냐 하면은 아파트마다 살고 있는 나,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아요.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이 쓰레기 같은 우리를 대표한 ‘나’가 돼요. ‘유일한 나’가 돼요. 이 ‘나’는 뭉개버립니다. 주님의 기능이 될려면 여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나’를 증거하는 기능자가 돼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래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러면 지금 현재 예수님 이 말씀 할 때는 어떤 인간도 못 지킵니다. 아무도 제자가 없어요. 아무도 제자가 없어요. 제자다운 제자도 없고 이 말씀 지킨 사람도 없고 제자들이 맨날 계산하죠. 예수님 따라다니면 하늘나라에서 우리 중에 누가 높으냐? 이런 계산만 하는 거에요. 자기를 미워하지를 않아요. 자기가 아까워서 미칠 정도에요.

세상에 지진이 일어나도 6.0 여진이 또 일어났거든. 또 일어난다 할지라도 딴 것 다 무너져도 제발 우리 집 만큼은 시장 하나 서울시장 잘 만나가지고 튼튼하게 안 무너져라 이런 거 있잖아요. 제발 나만큼은 내가 그만큼 건사하도록 노력한 그 대가는 내가 꼭 손에 쥐고 싶은 거에요. 이만큼 살아온 그 희생과 어려움은 내 명예와 의미를 못 놓는 겁니다. 자기를 미워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은 성령을 할 때 앞에 뭘 붙이느냐 하면 천부. 아버지에요.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분은 누구밖에 없느냐? 예수님 밖에 없어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언약은 이거는 보다 더 구체화된 언약이에요. 노아 언약 모세 언약 아니에요. 아브라함 언약 아닙니다. 보다 더 구체화된 언약은 뭐냐? 다윗에게 준 언약입니다.

다윗의 언약에 의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만들 경우에만 이 아들만 구원된다는 계약이었습니다. 사무엘하 7장 14절. 그러니까 아들이 등장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할 수 없어요. 처음에 아버지라고 불렀던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 그 이스라엘은 이미 끝장났어요. 왜냐하면 조건이 언약을 안 지켰기 때문에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 실패한 그 현장에 나타나가지고 내가 아들 되어라가 아니라 ‘내가 아들 만드는 그 자만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느냐? 아들의 영을 줬기 때문에 그래요. 아들에게 요단강에서 성령을 줬는데 그 성령이 뭐냐? “내 기뻐하는 자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 이야기에 의하면 “너희들은 내 아들의 말을 들으라” 아버지께서 “내 아들의 말을 들으라” 이렇게 했어요.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아버지로 나타나는 그 진짜 하나님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천국도 오죽했으면 천국도 무슨 나라입니까?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했어요. 아들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에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를 때 아들의 영을 줬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 아들 만들 때 뭘 줬느냐? 율법을 주셨고 말씀을 주신 거에요. 예수님이 성령이 임해서 아들이 된 것은 이 모든 말씀을 성령의 도움으로 온통 다 이뤘기 때문에 아들이 되신 거에요. 아들이 되시고 주가 되신 겁니다.

그럼 그 외에는 그냥 우상이죠 그냥. 여호와 이름의 우상이에요. 예수님마저도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아들로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성령은 예수님에 의해서 끝났어요. 성령은 예수님에 의해서 완료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말은 이거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말이 아니고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지킬 말씀이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내게 성령을 주신다 이럴 경우에만 이 기도가 효력이 있는 기도에요. 효력이 있는 기도.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해놓고 누가복음에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누구든지 아비 된 자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대신 뱀을 주겠느냐” 라고 할 때 사람들은 이 대목 보면서 ‘야 이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구나’ 하는데 내가 원하는 걸 주는 게 아니고 성령을 주시는 거에요. 이거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필요한 그것만 주께서 아버지와 아들 됨의 관계를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에요.

그게 로마서 8장에도 나오는데요. 8장 26절 한번 봅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라고 되어있지요.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이나 내용 알고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우리는 없다는 말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이 말이죠. 연약한 자의 기도를 받는다 이거는 있을 수 없지요. 기도 내용이 온전치 못한데 그 기도내용을 받습니까. 안되지요. 그리고 기도를 받으시는 아버지의 마음과 동질성을 갖춰야 돼요.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압니까? 모르지요. 모른다는 게 어디 나옵니까? 27절에 나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독점하시는 분이 누굽니까? 성령님이죠.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아~~~~~~~이 탄식 아닙니까. 하아~~~~~~~이 인간들. 이 탄식이잖아요 탄식. 그러니까 우리 곁에 어떤 어르신이 있는 거에요. 머리 하얀 어른신이. 우리 곁에 어르신이 있으면서 한숨을 푹~~~~~하아~~~~~~저 또라이 저거 아~~~~~~. 저거 기도 아닌데 저거 미쳤지 왜 저래. 이렇게 탄식하시는 거에요.

뭔가 했다 하면 저거 말씀 아닌데 저거 말씀 준수한 거 아닌데 저거. 저거 자기 생각인데 저거 자기 욕심인데 욕정인데. 아.......저 바보 등신 저거. 마귀한테 빠져가지고. 성도가 살아가면서 느낀다는 말은 우리를 측은히 보는 한심스럽게 보는 다른 어르신이 따라붙고 있다는 거에요. 우리 인생에. 노아 혼자 살았습니까? 노아는 동행했다 했지요. 에녹이 혼자 살았습니까? 동행했지요. 지금 오늘날 신약시대에서 성도는 절대로 혼자 둔 적이 없어요.

또라이 밑에 딱 갖다 붙이는 거에요. 또라이 하니까 전영록 생각나네. 또라이1, 또라이2 그런 영화 있어요. 재미 하나도 없는. 저거 저거 또 말씀 곡해하는 거 봐. 그런데 옆에 누가 탄식하시는 그 탄식소리 입김이 온도가 체온이 느껴진다는 것. 이거 우리의 결핍 아닙니다. 결함이 아니에요. 결핍 없습니다. 우리는 뭐 철딱서니 없이 우리 마음대로 원래 마음대로 했어요. 그리고 구원받고 난 뒤에도 또 마음대로 해요.

제가 어느 설교시간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할머니가 딸랑딸랑 종을 이렇게 해줬는데 엄마가 이거 누가 사줬어요? 하니까 그 아이가 철딱서니 없이 친구! 이런다고요. 친구. 아닌데. 그러니까 아 할머니 이렇게 했어요. 일단은 친구를 내뱉어요. 일단은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살아요. 육신대로. 일단 해놓고 아닌데 할 때 그 외손녀가 가슴을 치면서 내가 왜 할머니가 준 것을 친구라고 했을까 이렇게 가슴치고 통곡했을까요? 안했을까요? 절대로 안합니다.

왜? 자기 주제를 아니까. “내가 뭐 아는 게 있어야지.” 끝이에요. 내가 아는 게 있어야지 끝입니다. 결함을 인정하는 거에요. 자기가 십자가 죽어 마땅한 쓰레기인 것을 본인이 인정하는 새로운 삶의 기쁨에 몰두하게 됩니다. 몰입하게 돼요. 어디서 어떤 짓을 해도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거는 성령은 탄식할 수밖에 없고 아이고 돌대가리야 라는 주님의 탄식이 추임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잠복되어 있는 나의 철딱서니 없음을 평생까지 펼쳐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평생토록. 내 철딱서니 없음을. 드러내놓고 또 드러내놓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그런 상황을 계속 맞닥뜨리게 할 거에요.

로마서 8장 36절에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게 돼요. 누구한테? 성령 받은 사람한테 이게 된다고요. 왜? 즐거우니까. 도살된 양 되는 것이 그렇게 즐거워요. 주께서 가게 하신 상황이니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잘했지” 라는 말이 이게 나올 수 없다는 게 우리 자신을 얼마나 가볍게 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여기 로마서 8장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하나님의 뜻은 우리 몫이 아니고 누구 몫입니까? 성령의 몫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굳이 하나님의 뜻을 연구해가지고 알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 복잡한 거 알아서 뭐할 건데. 우리는 본능대로 그냥 할 뿐이에요. 그냥 본능대로 할 뿐이에요 그냥. 어떤 짓을 해도 우리는 본능이에요. 이거는 믿음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뭐 기도해서 자꾸 성령 끼워 넣지 마세요. 우리는 성령이라는 말할 정도로 얼마나 우리가 위선자라는 그것도 본능이에요. 성령 거론하는 것도 본능이에요. 이 거짓말쟁이.

성령은 탄식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우리는 성령을 자꾸 자기편으로 끼워 넣을려고 가만히 있는 성령 보고 자꾸 자기를 칭찬해달라는 거에요. 칭찬할게 있어야 칭찬하지요. 처음부터 우리 타고난 우리의 육신은 말씀을 범죄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인데요. 육신이. 결함과 결핍을 못 견뎌 하는 존재 아닙니까. 내가 개입니까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아니야 나도 예수 믿고 성령 받았으니까 바르게 착하게 살아야지 그게 우리 도리야.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하라 했으니까 말씀대로 살아야지 이게 우리가 더러운 짓이에요 이게. 그런 생각 자체가.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 얻겠다는 게 뭐냐 하면은 계산해서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구원받고자 하는 거에요.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원칙을 주님이 주신 적이 없어요.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구원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를 미워하기 싫은 이유가 이 결함과 결핍을 본인의 힘으로 마저 채울려고 하는 거에요. 내가 보기에도 나 자신을 참 잘 건사했다는 그 자기 만족감에 빠질려고 하는 거에요. 자기 만족감에.

옆에 어떤 어르신이 있는데 완전히 어르신의 존재를 무시해버리고 단독으로 살려고 하는 거에요.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헌금하면서 맨날 검사받아요. 저 어떻습니까? 저 어떻습니까? 주께서는 ‘쓰레기 가져가’ 하면 흑흑흑 울고. 울 사람은 성령이 울어야 되는데 지가 왜 웁니까 지가. 정작 울 사람은 탄식 할 사람은.

저 어때요? 저 오늘 하루 이렇게 살았는데 잘 살았습니까? 점검받겠다는 거 보고 뒤에서 성령께서는 팔짱을 끼고 하아.......인간아.... 그렇게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가 뭐라고 주제넘게 너 자신을 어느 안전이라고 너를 들이 내밀어 너를. 비켜 비켜 뜻을 아는 게 나니까 내가 대신 너를 위해서 기도해줄게. 그 기도 덕분에 우리가 아무 문제없이 지금 천국을 누리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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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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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