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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30303b 울산강의-역대기상(18강) 16장 22절 : 하나님의 음식물자유게시판-

20230303b 울산강의-역대기상(18강) 16장 22절 : 하나님의 음식물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왜 많은 사람을 쳐다보는 게 아니고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니고 딱 한 사람을 쳐다보게 하느냐? 나를 못 쳐다보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왜 나를 못 쳐다보게 하는가? 내가 구원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저주받은 자는 저주를 받아야 되지 구원을 받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 인물이 나를 대신할 때에 그 대신함 안에 비로소 그 안에만 구원이 있어요. 날 대신하신 분, 그분의 관계가 구원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나의 이름으로 내가 구원되는 게 아니 주의 이름으로 구원되지요. 그 주의 이름에 대해서 반박하면서 대들면서 너의 자율성, 네가 언제든지 할 수 있는데 자꾸 비겁하게 의존적이냐, 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네 노동이 있잖아. 네 노동의 대가를 네가 얻을 자격이 있잖아, 라고 할 때 그게 사탄의 이름이죠. 주의 이름이 아니고 악마의 이름이죠.

악마의 이름의 특징은 자기 의를 우리 앞에 제공해주겠다고 제시하는 거예요. 거래하는 거예요. “네가 이렇게 훌륭하고 교회 다닐 정도로 대단하고 착하게 말씀대로 살 정도로 대단해.” 이게 바로 마귀가 교인들에게 계속해서 유혹하는 겁니다. 대신한다는 걸 없애버리고 그냥 모범적으로 살라는 거예요. 네가 모범 된 모델을 알았으니까 따로 붙이라는 거예요. 부처를 알았으면 부처를 따라하면 부처가 된다는 이론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신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약적으로 제시한 특정 인물에 관해서 일해요. 그분 중심으로 일한다고요. 숨어있는 하나님은 언약에 나타난 인물에게 모든 것에 권한을 주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요. 그걸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름 부은 왕은 우상을 대신한다. 인간은 우상을 추구하게 돼 있어요. 우상은 누가 내 대신이란 말을 안 하고 우상은 나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래요. “잘하면 잘할 수 있어, 너. 너에 대해서 포기하기가 너무 이르잖아. 포기하지 마. 너 할 수 있어.” 거기서 나온 노래가, (성진우, , 1994)란 노래가 있어요. “다 포기하지 마” 빨리하면 “닭고기 아줌마”되는. 포기하면 안 돼. 포기하면 네가 살 의미가 없어진다는 거예요.

제가 수요일 설교제목이 [모조품]이거든요. 사람이 절망에 빠지고 자살하는 이유가 자기가 모조품인 것을 몰라서 그래요. 자기한테는 자기가 진짜라고 우기는 거예요. 진짜 내 대신 그분이 진짠데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는 나와 계약한 게 아니고 내 이름으로 계약한 게 아니에요. 우린 이 땅에서 부동산 사기 위해선 내 사인을 하지만 하늘나라는 내 사인을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선 “너 말고 너 대신한 분, 나와.” 이렇게 되거든요. 너 말고, 네 노동 말고, 네 착함 말고 너를 대신한 분, 사인 받아와. 주의 이름이 와야 돼.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 왕은 그다음부터 어떤 작업을 하겠어요? 지금까지 논리에 의하면 어떤 작업을 하겠습니까? 나를 자기의 힘으로 교체하는 작업에 나서겠지요. 그 교체하는 때문에 주어진 율법이 있어요. 그게 뭐냐? 제사법입니다. 구약성경 할 때 또는 성경이야기 때 사람들이 제일 골치아파하고 좀 짜증스런 얼굴로 인상이 팍 가는 이유가 뭐냐? 레위기입니다.

레위기 언급하게 되면 그때부턴 일부러 자려고 애를 써요. “안 들으란다, 난 아무것도 안 들었다.” 이러고 싶은 거예요, 레위기가. 레위기가 무지무지하게 복잡하게 돼 있잖아요. 절차고 형식 같은 게 막 들어갔다고요. 형식이 아무리 복잡해도 내용은 단 하나에요. “너를 대체할 것을 내가 받는다.” 그겁니다. 레위기의 내용은 너를 대체할 것, 또는 대신이죠. “너를 대신할 것을 내가 주고 그것만 인수받을게.” 이게 레위기에요.

너를 인수받을 것 법으로 규정할 테니까 그것만 들고 오게 되면 나, 그것 바치는 너도 받아줄게. 이게 레위기입니다. 바칠 때 하늘을 향하여 던진다고 받는 게 아니에요. 바칠 때 어떻게 바치느냐 하면 불판, 쉐프들 요리 자랑한다고 불 쇼하면서 하잖아요. 불판요리 있지요. 오징어하고 하는 그 불판 위에서 하나님의 대체한 인물이 곱게 안 죽어요. 불에 홀라당 다 태워서 받습니다. 그걸 하나님의 양식이라고 해요. 흔쾌히 받으신 하나님의 향기로운 음식이다.

옛날 성경번역에는 ‘응식’이라 돼 있는데 요즘은 뭐로 바뀌었느냐 하면 그냥 하나님이 받으시는 음식물이다. 또는 양식이라 하는 게 적당하겠지요. 하나님도 나도 좀 먹고 살자,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잡수시는 양식은 하나님이 제공한 것을 불을 통과한 걸 받습니다. 숯불갈비 탄 냄새 그런 건가?

하나님은 불을 통과, 그 불이 무슨 불인가? 심판의 불이에요. 하나님은 심판을 통과한 걸 받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논리에서는 심판을 통과하게 되면 어떻게 돼요? 심판을 통과했으니까 받을 게 있어요, 없어요? 홀라당 다 태웠으니까 없지요. 없는데 하나님이 지정한 제물은 심판을 통과하고도 그게 받을 수가 있어요.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그 대신 하나님의 양식은 죽은 대표 양식을 나머지 양식에다 이미 대신했다는 의미로서 그냥 양식도 대신 죽었다는 그 의미를 담아서 하나님께서는 받습니다. 일단 숟가락 먼저 뜨고, 숟가락 먼저 떠야 돼요. 그다음에 “먹어, 먹어, 먹어, 너희도 먹어.” 이걸 화목제라 합니다. 주께서 먼저 잡수시고 잡수신 그것을 주께서는 나눠주는 형식으로 하나님의 음식에 감히 우리가 그 음식에 손대서 같이 먹게 해서 한 식구가 되게 하는 방식이 하나님 백성이란 방식이에요.

아까 역대상 16장 봅시다. 2절,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그다음에 뭡니까? 무엇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게 언약의 이름이란 뜻이거든요. 항상 여호와는 언약을 앞장세워서 일하지 언약이 없는 것은 명칭이 여호와든 예수든 간에 그건 우상이에요. 마귀가 만든 겁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언약을 앞장세워서 하는 거예요. 언약을 이루는 분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은 언약을 주고 그 언약을 이룬 분이 여호와란 이름의 하나님.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요. 하나님은 언약을 제공하시고 그 언약을 실천해서 완성시키는 분이 하나님의 이름, 또는 여호와, 또는 주라고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언약 주고 실천자 따로 이냐? 이게 마귀를 의식해서 하는 겁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믿어요. 그래서 욥기에 보면 마귀와 누구와 이야기합니까? 하나님과 이야기하지요. 욥을 두고 이야기하잖아요.

믿는데 마귀가 싫어하는 자가 뭐냐 하면 바로 자기를 심판할 자, 자기의 심판주가 될 하나님의 아들을 싫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을 유포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버리도록 조치하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에즈베리 부흥운동이라 해서 미국의 에즈베리 대학교에서 오순절 부흥운동이 퍼져서 지금 한국 목사도 가고 구경하고 그래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하는데, 이게 바로 성령의 역사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에즈베리 대학교 옛날에도 그랬고요.

그런데 그게 복음적이냐, 할 때 고린도전서 2장에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복음이 뭐라고 돼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인다 했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은 인간들이 아무리 탐구해도 알아내지 못한 것, 그것을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만 주신다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으로도 지혜로도 알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어떤 기준을 제시해야 인간의 한계가 노출되겠습니까?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걸 제시하는 것, 그게 뭐겠어요? 고린도전서 1장 끝에 또는 2장초에서. 십자가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무엇과 대비하라고 준 거냐 하면 인간이 종교적으로 또는 윤리적으로 노력해서 얻고자 하는 인간의 한계를 너희들 십자가 아는 사람이 좀 들여다보라는 거예요. 그들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그들이 어떤 순수한 열정과 신앙심과 자기의 낮춤과 회개와 반성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울부짖고 콧물 쏟아가면서 무려 14일 동안 예배가 중단되지 않고 예배드렸다 하거든요. 2주 동안에 한 대학교에서 대학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그들이 십자가를 압니까? 그들이 십자가를 알겠어요?

십자가란 뭐냐 하면 내가 회개하는 것조차도 내 구원의 근거가 되지를 못한다는 것, 성령께서 정말 알리고 싶은 것은 바로 그거에요.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형태나 모습이 아니라 그런 게 없이도 된다는 것, 구원이란 게. 유별남이 없어도 된다는 것, 이게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요. 나는 십자가를 알아, 이렇게 하면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대번에 달려듭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가도원에 가서 며칠 기도했어, 성경 어떤 대목을 공부했는데, 누구 설교를 들었는데?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해요. 아무 상관없는 건데.

아까 므비보셋 이야기했잖아요. 여러분 그것 잊지 마세요. 아무 상관없어요. 인간은 자기 일밖에 몰라요. 자기 일밖에 모르는데 주의 일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자기 일밖에 모른다는 그 범주가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 아는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의 범위를 아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레위기를 좀 소개할 거예요. 지금 이 시간에. 쉽게 하기 위해서 이 문장을 먼저 쓰겠습니다.

젓갈은 푹 삭혀야 맛이지요. 젓갈은 푹 삭혀야 돼요. 레위기의 원칙을 뭐냐 하면 내 음식에 손대지 말라.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겁니다. 역대상 16장 22절 누가 읽어보세요.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만지지 말라, 상하지 말라.

방금 제가 쓴 것은 내 음식에 손대지 말라.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고 회수하려는 하나님 쪽의 언약적 인물 제시입니다. 하나님께 제시된 인물이에요. 그러니까 손대지 말고 상하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너희들은 뭐냐? 그 음식 앞에 젓갈류다. 젓갈은 어때야 맛이 난다고요? 이게 썩어야 되고 푹 삭혀야 맛이 나거든요.

삭힌다는 말은 그 고유의 맛이 날아가 버린 거예요. 소금과 젓갈류의 절묘한 조화. 삭지 아니하면 음식에 오를 수 없는 게 젓갈이에요. 젓갈의 기능은 마치 소금과 같아서 맛을 돋워주는 거예요. 본래 맛이 아니라 다른 맛을 돋워주는 거예요. 김치 맛을 돋워준다든지 보조, 시다바리 역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음식에 시다바리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젓갈 같은 자기를 쳐다보면 안 되고 누구냐? 하나님이 받으시는 음식이 어떻게 인물화 되어 우리 가운데 있느냐를 주목해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이에요. 예수님 생각하면 되겠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요단강 세례 받을 때 그렇게 했잖아요.

그런데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기어이 십자가에 처참한 몰골로 죽게 하십니다. 끝까지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 맞아요. 그러니까 보통 인간들로는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지켜주고 안 다치게 해주는 게 사랑이라 여기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아직도 더 살아야 돼요. 더 썩어야 돼요. 푹 삭아서 나는요, 하는 말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도록 푹 삭아야 돼요.

우리는 그냥 폐인이에요. 자기가 쏟아놓은 오물에서 못 벗어나는 그런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주께서 오케이,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대체물이 돋보이잖아요. 우리가 푹 삭아야 대체물이 돋보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음식으로 여기지 않아야 음식으로 여기는 분이 돋보이는 거예요.

바둑에 이기는 법을 알려드릴게요. 어떤 누구와 두어도 이기는 방법은 이겁니다. 남이 보지 못한 수를 내가 두면 이겨요. 바둑뿐만 아니라 모든 게임이 그렇지요. 특히 바둑 같은 경우엔 그게 강렬한 데요. 우리나라는 신진서란 선수가 제일 잘해요. 그 사람은 남이 보질 못한 수를 봐요. 그래서 지질 않아요. 세계랭킹 1위에요. 한 달 수입이 10억이 넘을 정도로 잘 둬요. 세계 최고에요. 여러분들은 복음계의 신진서가 되길 바랍니다.

남이 보질 못한 것,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아는 것, 그 방법은 뭐냐? 나를 쳐다보고 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 안 쳐다봐, 이러는 게 아니고 쳐다볼 필요 없는 모든 환경이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찾아오고 있어요. 나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을 때, 반대로 나에 대해서 신경 써버리면 그만큼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요. 스트레스 받아서. 그 결핍 때문에 마음이 불안정해요. 결핍성 때문에.

이 목적을 해내야 되는데, 이 목표를 달성해야 내가 마음이 편한데 이게 조마조마해서 자기에게 미련이 강렬하니까, 미련은 강렬한데 내가 나한테 못 마땅하니까 결핍에 시달리는 거예요. 그래서 무리수를 두고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결국 그것이 남 탓으로 돌아가고 자기 때문에 남까지 괴롭히고. 남 괴롭혀서 남이 공격하니까 자기 괴롭고. 해결책, 해답은 전혀 없고. 그 원인은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가 삭을 대로 삭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자, 해결책은 뭐냐? 기름 부은 자가 어떤 자인지 찾아보면 되겠지요. 해결책이 있으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창세기 14장 1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여기에 살렘 왕 이름이 멜기세덱이라 하는데요. 이 이름에 결부된 직책이 두 개에요. 살렘 왕이니까 왕이지요. 또 하나는 뭐냐? 하나님의 영원한 제사장이다.

그렇다면 이 멜기세덱이 누굴 만났느냐? 아브라함을 만났단 말이죠. 그럼 아브라함의 자손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두 가지의 기능이 어떻게 따로 주어져서 어떻게 따로 합류하느냐? 그 합류한 시점이 완성된 시점이 되는 겁니다. 멜기세덱이란 사람에서 아브라함이 만났으니까 아브라함은 이 땅에 선택받은 인물이니까 그냥 통로, 통과하는 파이프, 비어있는 파이프로 보면 돼요.

멜기세덱 요소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두 가지 기능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왕 기능과 하나는 제사장 기능을 해요. 아브라함이 기도하니까 아비멜렉 집안 여자들이 임신을 하게 된 거예요. 아브라함의 누이동생을 건드릴 뻔하니까 아비멜렉 집안사람들이 임신 못하는 저주받은 거죠. 저주받다가 기도하니까 풀린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께서 유황불 내릴 때에 의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합류된 자만 의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삼판을 내렸고요. 아브라함의 기도에 따라서 조카 롯과 그 두 딸만 건짐 받았어요. 그래서 그걸 하나님께선 롯을 생각해서 롯을 건진 게 아니고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졌고, 아브라함은 무엇과 관련돼 있는가? 멜기세덱과 관련돼 있어요.

그러면 성경은 하나의 일종에 순환을 보여주는 데 멜기세덱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가? 다시 멜기세덱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성경의 여정입니다. 이건 하나님 자기의 노선이에요. 자신의 여정, 자신의 여행. 걸어서 세상 끝까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 가운데 걸려든 사람들, 택한 받은 사람,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각종 선지자들, 특히 이스라엘 집단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멜기세덱부터 아브라함부터 해서 이삭, 야곱, 야곱에서 열두 지파가 나오고 열두 지파가 무슨 나라? 이스라엘 되지요. 전부 다 이 사람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제물, 하나님이 회수한 제물, 그리고 이거는 뭐냐? 희생물이 되는 거예요. 그 이스라엘 압축한 것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희생물이 될 때 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또는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렸잖아요. 아브라함이 제물 드릴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이 제물을 받으시고 나를 용서해 달라, 나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이루게 해 달라 이렇게 했을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취지는 그게 아니고 제물과 아브라함의 일대기를 일체화 시키는 겁니다.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나 양을 안 받기 때문에.

소나 양을 받는다고 시작해서 결국 하나님은 소나 양이나 염소를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선 인간이 준 것은 아무것도 받질 않아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소나 양의 말씀에 입각해서 따로 지정한 그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받아요. 예수님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기 전에 이스라엘은 그래서 이거는 하나님 말씀에 합당치 않고, 합당치 않고, 합당치 않고 계속해서 잘라내는 과정의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에요. 너 아니고, 너 아니고, 너 아니고 이사야 아니고 예레미야 아니고, 아니요, 아니요. 세례 요한, 너 아니고 예수님.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믿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예수님으로부터 무슨 소릴 듣는 거예요? 너 아니고, 너 아니고, 너 아니고, 너 아니고. 이번에 네가 출세한 것도 너 때문이 아니고. 애가 공부 잘한 것도 너 때문이 아니고. 속이 안 좋은 것도 너 때문이 아니고. 소화 안 되는 것도 너 때문이 아니고. 소화 안 되는 너 때문이 아니에요. 네가 죽는 것도 너 때문이 아니라는.

사나죽으나 내 것이지 네 선에서 걱정하고 염려할 그게 아니라는 거죠. 다 나 때문이라는 거죠. 나 때문에 너한테 벌어진 상황이죠. 멜기세덱 때문에 일어난 상황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 멜기세덱이 왕과 제사장이잖아요. 그럼 아브라함이 제사장 죽 하면서 왕의 요소도 아브라함 후손에 나타납니다.

먼저 사무엘상을 보고 민수기 보겠어요. 사무엘상 2장 10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이거는 첫째 시간에 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이 세상을 뭐로 만든다? 폐허로 만든다. 하여튼 하나님이 일하시면 이 세상은 무조건 폐허가 되어 마땅한 세상이다. 이걸 기정사실화시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망하기 위해 태어났고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그걸 확실히 한 것이 여호와의 나타나심입니다.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그다음에 뭐라 돼 있느냐?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심판을 누구한테 맡겼다? 왕에게 맡겼지요. 멜기세덱이 왕이니까요. 왕과 제사장이에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는 것도 318명하고 소돔과 고모라 다섯 왕과 전쟁할 때 승리하고 만났거든요.

하나님은 끊임없이 전쟁을 하십니다.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멸망 프로젝트, 멸망 시나리오거든요. 그걸 누구한테 맡기느냐? 왕에게 맡기는 거예요. 그럼 우리 생각에는 왕에 빌붙으면 되겠네. 문제는 그 왕이 어떻게 나오느냐, 에요. 왕이 어디에 나오며, 누구며, 어떻게 나오는지 문제에요. 왕을 알아봐야 빌붙든지 엎드리든지 할 건데 왕이 누군지 알 수 있어야지요.

민수기 2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왕으로 된 나라, 왕은 왕인데 여호와께서 왕으로 계시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지금 반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민수기 24장 17절,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한 별, 한 홀. 홀이란 것은 왕이 쓰는 지팡이를 홀이라 해요. 왕이 등장한다. 어딜 통해서? 야곱의 민족을 통해서.

그러면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통로 역할인데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 아들이 야곱이죠. 야곱에서 무슨 지파? 열두 지파. 열두 지파가 후손을 낳게 되면 무슨 나라? 이스라엘 나라. 이스라엘 나라가 왜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나라는 다수잖아요. 다수인데 한 명을 뽑아내기 위함입니다. 심판 주를 뽑아내기 위해서, 왕을 뽑아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속에서 왕이 나왔어요, 안 나왔어요?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잖아요.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고 상하게 하지 말라. 여러분 골치 아픈 레위기지만 레위기에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다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음식을 해먹어요. 음식을 해 잡숫는 데 불판 위에서 음식을 해먹는데 심판을 통과한 그 음식, 심판을 통과했다는 것을 냄새로 맡으시고 냄새가 너무 맛있는 음식이라서 기꺼이 하나님께서 양식을 제사장을 통해서 준비케 합니다.

제사장이 기름 부은 자입니다. 기름 부은 자는 왕도 되지만 제사장, 그다음에 선지자 되거든요. 전부 다 멜기세덱의 기둥 중에서 뽑혀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잡수었다, 안 잡수었다 어떻게 아는가? 제사장과 그 가족이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께서 맛있게 드신 결과를 부여받고 있다고 보면 돼요. 제사장들이.

제사장들은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양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 양식은 반드시 어디를 경유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제사를 경유해서 제사의 일부는 바치고 일부는 남겨둬서 누가 먹느냐? 특히 화목제 같은 경우에는 제사장들이 가족들이 먹어요. 동물성만 먹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당뇨 걸려서 안 좋아요. 식물성 그것도 하나님께 일부를 바치고 십일조로 바치고 나머진 제사장 가족들이 먹어요.

제사장들이 그 양식을 먹고 생존한다는 것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 자기가 받으실만한 음식으로 간주해서 계속 하나님에 의해서 살려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내 음식을 내가 먹고 싶다는 거예요. 그 음식이 음식으로 유지되려면 너희들 속에 제사장 기능이 계속 유효하게 살아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뭐냐? “목사님, 제사장만 있으면 되겠네요.” 당연히 그런 질문 나오잖아요. 근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한 것은 전에는 하나님과 제사장이 다이렉트로 연결됐다면 다윗언약에서는 하나님이 지정하는 왕에 의해서 제사장이 그 왕의 지시를 받게 돼 있어요.

여기 역대상 16장 4절에 보면,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이걸 누가 지시합니까? 왕, 다윗이 지시한 거예요.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음식물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왕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 관계를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맛있게 드셨다는 것은 극히 인간적인 표현을 한 거예요. 내가 음식을 먹고 기쁘고 배부르다는 말은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는 나처럼 영원토록 함께 배부르고 하나님과 영생을 누린다. 그런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장치, 시스템을 누가 마련해주는가? 레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친히 마련해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받는지, 안 받는지 그 여부를 어떻게 아느냐? 제사기능이 원활하게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된다는 것. 그러면 제사장들이 또는 레위 인들이 하는 일이 뭐냐? 제사 지내는 거죠. 그럼 제사가 뭔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것에 대한 심판을 그 제단에서 대신 세상 심판을 이스라엘을 중앙에서 미리 심판을 다 해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을 받았습니까, 아직은 안 받은 거예요? 심판을 이미 받은 게 돼요. 자기를 대신한 양들이 자기 대신 심판을 받았으니까요. 어쨌든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그 심판을 경유한 탄 음식, 그것을 하나님은 자기 양식으로 받았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양식에 합류된 자의 특징이 뭐냐? 저는 이미 죽어 마땅합니다.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6장에 누구와 더불어서 받았어요? 예수님과 더불어서 저는 심판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지요.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인데 율법 앞에서 누구누구도 저주 피할 자가 없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나는 율법대로 저주받았다.

그래서 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 대신하신 분이 살아 있고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21절 내용이에요. 그냥 쓱 넘어갈 게 아니고 그 대목을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걸 생각해야 돼요.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이 세상 전체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세금 올라간다, 가스비 올라간다, 그것과 비교가 안 돼요.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완전히 퍼부은 거예요. 뭐라고? 더 이상 너를 쳐다볼 이유가 없다고. 저주받을 걸 쳐다봐서 뭘 기대합니까? 뭘 해도 저준데. 이게 율법을 통해서 확연하게 우리 자신을 아는 겁니다. 루마니아 대통령처럼 거울아, 거울아 이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율법을 보면서 뭘 해도 이거는 하나님께서 안 받는구나. 받지를 않는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의 행위라 하는 것은 율법을 보고 율법에 자극 받아서 내가 행하는 걸 말해요. 내가 행하는 것은 안 받아요. 그러면 주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받아요. 주님의 행하심은 일단 우리를 죽였다 치고 행하기 때문에 우리한테 두 번 다시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네가 못됐구나. 좀 맞아야 되겠어.” 이런 것 없어요.

사체(死體)한테는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모셔서 집에서 장례한다고 관 속에 있는데 평소에 버릇이 되어 “아버님, 잘 주무셨습니까?” “아이고, 참 죽었잖아.” 죽은 자에겐 안부를 묻는 게 아니에요. “안녕, 뽀삐.” 이런 것 묻는 게 아니에요. “여보, 잘 주무셨어요?” 묻는 게 아니에요. 누가 안부를 물어야 되는가? 사체가 나에게 안부를 묻는 겁니다. 강의가 갑자기 전설의 고향이 돼버렸는데…….

죽은 남편이 나한테 잘 잤어요, 이거는 남편이 묻는 게 아니고 남편에 계신, 아내에 계신 그리스도가 죽은 시체, 나보고 안부 묻는 거예요. 죽은 가운데 일어나라, 이런 식이죠. “출근해야지.” “어, 죽었는데?” “너는 죽었지만 내가 살아 있잖아. 출근해야 돼. 애들 가르쳐야지.” 이걸 또 이론으로 알아서 매일같이 실습하지 마세요. 이것 하면 율법 하나 또 추가한 게 돼요. 하지 마세요.

주께서 이런 느낌을 우발적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고 주님의 자랑되게 하세요. 내가 살아 있는 게 나의 자랑이 아니고 주님의 자랑거리에요. 왜? 시체, 어제부로 죽어도 되는데 살려냈잖아. 주님에 영광이 되고 주님께 자랑거리가 되고. 그게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고.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뒤에 보게 되면 대구강의에서 한 건데요. 19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런 구절 있잖아요. 내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된 거예요. 율법은 살아서 펄펄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율법은 우리를 기어이 죽게 하는 거예요. 사체됨을 분명히 하는 게 율법이에요. 율법을 죽은 시체가 뭘 지켜요.

19절 대목이 저만 보이는가요? 여러분도 같이 보여야 될 건데. 그래서 이런 해석이 사도 바울이 해석한 그대로 못 받아들이는 이유는, 나를 내가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좀 이렇게 못났다고 느끼지 아주 죽지는 않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질 걸 이야기하고, 산다는 것은 끊어진 자리에 하나님과 관계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분에 의해서 관계가 이어진 것을 우리는 살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는 죽었지만 내 안에 사신 분이 살기 때문에 나는 살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스도 안에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건 결국 뭐냐? 네가 주도적으로 하는 것은 없고 다 주께서 하게 하셨던 거예요. 이걸 사역형 피동성, 하게 하신 거예요. 나는 쌍꺼풀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 마세요. 그것 쌍꺼풀 수술하는 건 좋은데 DNA는 쌍꺼풀이 없어요. 아빠, 엄마는 쌍꺼풀 있는데 애 낳고 보니까 쌍꺼풀이 없어. 그럼 누구 하나 안 그러면 둘 다 뭐 했어, 고쳤어.

주께서는 우리 있는 그대로 봅니다. 죽은 잔데 내가 살린다는 거예요. 그럼 이건 뭐냐?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고 하나님에게만 구원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걸 알리게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우리가 끝으로 봐야 될 것은 진짜 어려운 걸 봐야 돼요. 요한복음 18장 33절,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왕이 나오죠.

이게 제가 왜 어렵다고 했느냐 하면 아까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언급했어요. 언약 밖에 인간들이 무슨 일을 도모하는지 설명했지요. 무슨 일을 도모합니까? 언약 밖에 한 덩어리 됐지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어요. 한 덩어리 됐으니까 거기서 뭘 뽑느냐? 그들은 우리 한 덩어리 됨을 긍정해줄 수 있는 어떤 대표자, 왕을 찾았던 겁니다.

그들은 이걸 뭐라 하느냐? 메시아라 했고, 이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태어난다고 본 겁니다. 태어난 장소까지 그들은 알아요. 그 태어난 장소가 베들레헴이에요. 참 이게 이상하지요.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났습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잖아요. 태어났는데 헤롯이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나지 말도록 두 살 밑의 애를 다 죽였어요. 죽임으로 말미암아 베들레헴에선 태어났다, 안 태어났다? 태어난 자가 없게 한 거예요.

선악과 있을 때 인간은 부담을 느껴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죽음의 협박을 받고 위협을 받아요. 그럼 방법은 뭐냐? 선악과 과일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겠지요. 따먹어서. 자기가 소유하면 되겠지요. 그 방법하면 되잖아요. 예수님이 자기가 메시아라 했잖아요. 그럼 방법은 뭐냐? 메시아라고 발설하는 예수님을 어떻게 합니까? 죽여 버리면 되잖아요.

그런데 제자들이 걱정돼요. 제자들이 예수님이 평소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다 하니까 유대인들의 그다음 조치가 뭐냐? 예수님 시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무덤가에 보초 지키면 되잖아요. 도대체 인간들이 왜 그렇게 나옵니까? 그렇게 나오는 이유가 뭡니까? 교회 가라 하니까 십자가복음 알았을 때 그러면 교회 안 다니는 남편이 아내를 교회 못 가게 하면 되지요. 그 복음을 같이 믿으면 되는 게 아니고 못 가게 하는 거죠.

그 의도가 뭐예요? 도대체 그 이유가 뭡니까? 십자가복음을 못 믿게 하는 의도가 뭐냐 말이죠. 뭐가 깨지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나의 평생의 노동과 매진한 열심히 한 나의 가치가 나의 의로움이 누구 때문에? 예수님 그 한 사람 때문에 모조리 쓰레기가 되는 걸 내 속의 악마가 견딜 수 없는 거예요. 내가 누구로부터 심판받는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복음을 듣고도 거부하는 사람은 누가 감히 나를 심판해, 이것 때문에 삐져서 교회 안 나와요. 복음 거부합니다. 그러면 복음 듣기 위해서 교회 나온다는 것은, “또 때려주세요, 또 내가 폐인인 것을 알게 확인시켜주세요.” 이래서 교회 나오지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래도 꾸역꾸역 교회 나오는 이유는 언제든지 발 빼기 위해서 교회 나옵니다. 양다리 걸쳤다가 싹 빼는. 언제가 돈만 벌면 뺄 거야. 지금 돈 없어서 한쪽에 혹시 행운이 올 줄 몰라서 그렇지만 돈만 챙기면 뺄 거야. 벤츠 타고 골프 치면 교회 안 나올 거야. 일요일 골프 치러 가는데 교회 나올 재간이 있어야지요. 골프 칠 돈이 없어서 교회 나오는…….

그쪽 스타일에 이미 한 통속이 돼 있어요. 넓은 길에 한 통속이 돼 있다니까. 그러니까 영생은 좁은 길이에요. 찾는 사람이 적어요. 그만큼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 없어요.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을 수밖에 없고 외면당하고 배제당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가신 것도 똑같은 코스를 강제를 가게 하신 사람,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 가신 것처럼 이 땅의 희생물입니다. 성도는 희생물이에요. 하지만 성령의 기름 부음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끝으로 요한일서 읽고 마치겠습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성도를 해하는 것은 야고보서 5장에 나와요. 성도를 해하는 것은 심판을 받으리라. 네가 그 사람을 건드린 게 그 사람을 건드린 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건드렸기 때문에 심판받습니다. 내 양식에 왜 손대냐? 내 음식에 왜 손대? 내가 받을 음식에 왜 손대는가? 여러분 그리스도 성령이 있거든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이 노동한 것 말고 쓱 다른 분이 들어오심에 저희들이 황송스럽고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내 일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성과요 결과요 효과요 주의 연속적인 일인 것을 저희들이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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