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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30224b 다니엘12장 2절(제3의 영역)-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다니엘

광주강의20230224b 다니엘12장 2절(제3의 영역)-이 근호 목사

자, 아까 이야기 계속해야 되겠죠. 지금 다니엘 12장에서 부활을 뭐로 보느냐 하면 석방으로 봐요, 석방. 감금된 상태에서 석방된 걸 부활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카엘이 전쟁을 할 때 사람하고 전쟁하지 않아요. 미카엘은 책대로 전쟁해요. 그 책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의 경합과 전쟁, 그걸 무산시키는 전쟁입니다.

바리새인적인 용어로 취지를 살려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복음이란 철저하게 비(非)-윤리적 토대를 그 위에 도배하는 식이 돼요, 복음이란. 비-윤리적이 없어버리면 복음의 가치가 생기지 않아요. 비-윤리적 또는 비-도덕적. 바리새인이 하는 그것을 감안해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기 의로움이 극대화된다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 이게 경합이거든요, 경합. 어렵죠. 한번 적어볼게요. 인간 세계에서는 경합을 한다. 시합을 하는데 그 시합, 경합의 주제가 뭡니까? 이게 바리새인에 의하면 뭡니까? 자기 의죠. 그럼 내가 의로우면 남들은 뭡니까?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러한 주장이 왜 엉터리냐 하면 random connection, 무작위적인 연결들, 인간 세상 자체가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들이닥친 우발적 사태 속에 인간들은 다 각자 각자 거기에 random, 무작위적으로 놓여있는 상태거든요.

인간이 착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지금? 뭐를 지금 뿌리치는 거예요? 그 어떤 주어진 상황을 본인이 고려하거나 본인이 취사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완전히 놓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비-윤리적이다. 어떤 사람은 되게 도덕적으로 보인다. 보이겠죠. 그렇게 보이겠죠. 그 사람은 지금 random connection, 무작위적인 연결고리, 연결선, 연결들을 그들은 지금 고려하고 있지 않은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어버리면 나는 그냥 툭 던져진 존재, 내가 의도한 것은 어떤 것도 먹히지 않는 세계라는 사실을 본인이 인정 안 하게 되죠, 본인이. 내 인생은 내가 착실해서 내가 이만큼 건사했다고 우기는 겁니다. 다들 그렇겠죠.

그럼 뭐가 죽어버립니까? 부활은 석방이라는 게 죽어버리죠. 왜냐하면 부활이 되려면 나는 속박된 상태, 우연에 속박된 상태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결혼하는 거예요. 총각, 처녀들이 결혼할 때 feeling, 그냥 감정적이에요. 이것 저것 따지지 않습니다.

조건 좋은 사람들 주위에서 해줘도 전부 다 싫어, 싫어. “조건 좋잖아.” “조건은 좋은데 내가 싫어.” 어떤 조건이라도 나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눈에 확 들어오는 다른 어떤 좋은 조건이 오게 되면 “제 이름은요. 옥순씨, 제 이름은 ~입니다.” 이게 라는 예능 프로에 나와요. 가명으로 여자 5명, 남자 5명 해놓고 제일 마지막에 ‘나는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고 ‘나는 선택하겠습니다’ 해가지고 비로소 좋아하는 여자, 남자한테 자기 본명을 밝히는 게 나와요.

그러니까 이것은 철저하게 자기가 속박된 상태에서 선택하는 거죠. 우연에서 필연을 끄집어내는 거죠. 그래서 그 선택에 대해서 자기 정당성과 자기 의로움을,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고 우기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반격은 이렇게 됩니다.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그리고 장애자들, 이거 본인이 선택했습니까? 이 사람들이? 선택한 거 아니죠. 강도 된 사람에게 “너 장래희망이 뭐고?” “강도입니다.” 이렇게 선택한 사람 있어요? 아니죠. 장애자들, 소경들, 절름발이 본인이 장애자 되고 싶어서 환장해가지고 자기 스스로 다리 끊고 안 했죠.

특히 전쟁에 의해서 가난한 자들, 남편이 전사해서 졸지에 과부된 자 이런 자들 뒤에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구약에 보면 후견자가 계세요. 이 후견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죠.

하나님은 인간 세계에 후견자의 자격으로만 나타나요. 그러니까 이게 ‘대신’이에요. 이 천대받는 자들을 대신해서 내가 등장하는 거예요. 이게 출애굽기 22장에 나옵니다 (출 22:22-24).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는 것은 곧 나를 학대하는 것이다.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 본인이 이렇게 가난한 자로 오세요, 예수님 본인이. 사람들에게 무시당할만한 분으로 오신다고요. 그리고 그 예수님의 후견자가 누가 되느냐 하면 아버지가 되시죠. 그러니까 그 후견자 제도, 대신의 삶을 사는 거예요, 대신.

외손자가 집에 와서 밥을 먹는데 제 딸이 제 아내보고 “엄마” 이렇게 하니까 외손자가 갑자기 이상한 거예요. “왜 할머닌데 엄마라 해?” 왜 할머니보고 엄마라고 이야기해? 엄마는 내가 불러야 되는데, 나는 할머니라 부르는데 왜 엄마라고 부르느냐. 걔는 이제 복잡해진 거예요. 걔는 대신을 몰라요.

엄마라고 부르는 그 엄마 안에 본인이 들어있는 거예요. 대신 안에 우리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외손자가 제 아내보고 “할머니” 할 때 그 할머니 안에는 대신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할 때는 주님은 우리의 후견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 자체가 후견자로 오셔서 후견자라는 connection, 후견자 관계를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내가 너를 대신해 줄게. 네가 밥을 먹을 때 내가 대신 먹어줄게. 네가 잠잘 때 내가 대신 잠자줄게.’ 이러면 말이 상당히 어려워지죠. ‘네가 길을 걸을 때 네가 조깅할 때 내가 대신 조깅해줄게.’ 이게 굉장히 어렵잖아요. 이걸 신약에서는 간단하게 ‘예수 안에서 조깅하고 예수 안에서 밥을 먹고 예수 안에서 잠을 자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후견자의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쯤 해서 제가 또 여기에 관련되는 노래 가사를 갖고 왔죠.

씨스타

추억이 이리 많을까 넌 대체 뭐할까 아직 난 이래 혹시 돌아올까 봐
나 절대 이런 애 아닌데 이런 적 없었는데
사랑 너무도 독해 아직도 못 깼나 봐
너무도 달콤한 니 말에 속아 이제와 혼자
( I'm falling down I'm falling down )
차라리 만나지 말걸 그랬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이토록 쉽게 우린 끝인가요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영화를 보고
나 혼자 노래하고 이렇게 나 울고 불고 넌 떠나고 없어 후회해도 소용없어
오늘도 나 혼자 ( Whoo Whoo Whoo Whoo Whoo Whoo Whoo Whoo )
나 혼자 길을 걷고 나 혼자 TV를 보고
나 혼자 취해 보고 이렇게 매일 울고 불고
사랑 참 달콤했어 이별이란 그림자 안에서
오늘도 잠 못자 ( Whoo Whoo Whoo Whoo Whoo Whoo Whoo )
...

그러니까 이 복음이라는 것은,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복음에 접근 못합니다. 왜? 인간은 바로 이 라는 가사처럼 결국은 자기 혼자로 자기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상으로 여겨서 계속 찾아가죠. 출발점을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이게 역사 속에 있는 우리 인간이 자기가 사체가 아니고 엄연히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는 방법이 이 방법이에요. 자기 쪽에서 찾아가요, 자기 쪽에서.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에게 나 말고 누가 있어야 돼요. 나 말고. 나 말고 누가 있어야 돼요. 남들이 너 귀신 들렸구나, 무슨 소리를 해도 괜찮아요. 하여튼 나에게 나 말고 다른 분이 있어야 돼요. 한번 적어볼게요. ‘나 말고 다른 분이 있어야 한다.’ 보통 모든 인간은 홀로 살잖아요. 홀로 남겨지죠. 그런 사람들이 이 사람을 볼 때 미친 사람이죠. 귀신 들렸거나 악령 들렸다는 소리를 할만하죠. 나 말고 다른 분이 있어야 돼요.

예를 들면 교회에서 부교역자 뽑는데 “목사님, 우리 교회에 오실 의향 있습니까? 계약은 1년 계약이고요. 월 200 드리겠습니다.” 요새 200 주는가 모르겠어요. 부교역자 200만원 잘 안 줄 거예요. 하여튼 “보너스 400% 드리고 200만원 드리겠습니다. 오실 의향이 있습니까?” 하면 보통 기도해보시고 결정하세요, 하잖아요. 기도해볼 것도 없어요. “주님, 어떻게 할까요?” “지금 방금 누구보고 이야기했어요?” “지금 나 말고 다른 분이 계셔서.”

그럼 그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다른 분인 주님 자체가 죽음을 능가하신 분이잖아요. 책 자체가 살아 있어버리면 거기서 영생이 부활이 나오죠. 다른 분이 함께 있다는 것은 죽음을 능가하는 분이 나와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죽음을 능가하는 이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그 교회 부교역자로 갈 때 조건이 뭐냐? 월 200주고 보너스 몇 %가 아니라 ‘죽어도 좋습니까?’라는 이 조건보고 가야 되죠. 죽어도 좋습니까. 그래야 다니엘 12장의 죽은 자의 부활이 살아날 거잖아요.

어떤 사람이 35세에 죽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 그 사람이 35년간 살았던 모든 것은 그 사람이 15세 때, 24세 때 일어났던 모든 것도 35세 때 죽어야만 되는 이유를 사람들은 뽑아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겠죠. 이미 아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분이 나를 대신하는 거예요. 대신이란 말 표현을…… 그냥 함께 있다는 뜻이 아니고요. 우리를 가위표로 지우는 식으로 대신하는 거예요.

너 혼자 밥을 먹는 게 아니고 내가 밥을 먹고. 너 혼자 영화 보는 게 아니고 내가 영화를 보고. 같이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영화를 보고. 네가 노래하는 게 아니라 내가 노래하고 너는 노래 안 하고. 이렇게 울고불고, 네가 울고불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울고불고. 너는 나의 아바타란 말이야, 아바타. 누구 말대로 재미 하나도 없는 아바타 2!

나 혼자 길을 걷고 나 혼자 TV를 보고 나 혼자 취해 보고 이렇게 매일 울고불고.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혼자 사는 게 문제에요. 나를 대신할 어떤 자가 없으니 죽든 말든 나라도 버텨야 되죠. 나라도 살아야 되고. 특히 나라도 내가 살기 위해서는 안 죽기 위해서는 내가 의로워야 돼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그런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말고 거기서 도피하고 피해야 돼요.

혼자 있어도 이렇게 해서 정당하다는 그 말이 성립되는 것이 우리한테 있다는 것, 그게 결핍이고 그래서 대드는 거예요. 하나님께 대들고 예수님을 볼 때 하나의 우상 보듯이 똑바로 쳐다보고 지 할 말 다하고 그렇죠.

이스라엘 역사, 아까 역대상 5장도 보고 9장도 봤는데 이방인들이 멸망 당했다, 이거하고 이스라엘의 멸망 때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을 안 사람들이에요. 그 안 사람들이 결국 멸망 당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자기가 자기를 놔버리는데 실패했다는 거예요. 살아있는 나는 절대로 나를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이방 나라와 전쟁을 붙여서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한테 잡혀서 파괴되고 멸망되는 방법, 그게 이 세상의 전쟁이 되는 겁니다.

죽음을 능가하신 분이 지금 살아있다면 우리는 아바타가 되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속 사는 쪽으로 가게 되면 나중에 죽는 게 아니고 그냥 잠자는 게 돼요. 왜? 처음부터 주님이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죽었으니까. 죽었는데 내부적으로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려줬으니까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이제 너 비서 노릇 그만해도 된다. 이제 좀 쉬자. 그동안 참 17년 동안 일한다고 고생 많이 했다. 이제 쉬어라. 수정과나 만들고, 단술 만들고 생강 넣어서. 집안 살림하면서 푹 쉬어라. 쉬는 거죠.

그래서 사도행전 7장 끝에 보면 스데반 집사 나오죠. 스데반 집사님의 퇴직식은 아주 화려했습니다. 본인이 석방되는 날이고, 주께서 양쪽에 하얀 두부를 갖고 ‘에라이, 먹어라. 그동안 죄인으로 산다고 고생 많이 했다.’하고 갖다 먹이는 거예요.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간음한 여인에게 두부를 먹이듯이.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일체 우리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겁니다. 우리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 대신이 죽어버려요. 대신이라는 것은 일부를 대타하는 게 아니고 몽땅 다 대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니엘 12장 다시 봅시다. 다니엘 12장에 나오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할 때 그 일이 언제 나오느냐 하면 4절에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되어 있죠.

마지막 때, 이 말씀을 완성할 때, 바깥에 있던 주님이, 하늘에 계신 주님이 우리 안까지 들어올 그때, 말씀 자체가 다 이루었다는 것으로 봉함된 채 우리 안에 쑥 들어왔을 때, 우리 안에서 뭐가 나와요? ‘다 이루었다’만 나오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만 나오려면 도대체 뭘 이루었는지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시 모세처럼 되는 거예요. 모세가 양쪽을 다 아는 거죠. 인간들이 우상 숭배자라 하는 것을 모세도 알고 실제로 모세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잖아요, 그렇죠? 구약에서. 신약에는 들어갔지만.

그리고 하늘나라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창세 전에 예정된 자라는 책대로 하나님께서 그 완성을, 희생으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도 모세는 알고. 그러니까 모세는 제3의 영역에서 희생의 역할로 백성과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적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걸 선지자라고 그렇게 이야기하죠.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라는 말은 마지막 때가 되면 이 책의 내용이 펼쳐집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쭉 보게 되면 여러분 아시니까 굳이 찾을 필요 없는데 교회를 이야기할 때 2장, 3장에 있는 교회가 모두 몇 교회입니까? 일곱 교회죠. 여덟 교회 아닙니다. 아홉 교회 아니에요. 여섯 교회 아니에요. 일곱 교회에요.

일곱 교회는 어디서 나오는가? 하나의 오른손에서 나오죠. 1에서 7이 나오죠. 1에서 주님의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았잖아요, 일곱 별을. 왜 갑자기 요한계시록을 봅니까? 라고 묻는다면 여기 다니엘 12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다니엘 12장 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되어 있어요.

‘별과 같이’라는 말에서 별로 묘사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가 하늘에 붙박이처럼 박혀서 빛나는 거예요. 세상 일에 영향받지 않고 빛나고 있다는 뜻에서 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곱 별이라 하는 것은 지상에 어떤 변화에도 관계없이 굳건하게 고정화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별과 대비해서 이 지상에 일곱 교회가 왔는데 편지를 보낼 때는 일단 그 편지 출발이 예수님부터 출발합니다. 에베소 교회도 그렇고 서머나 교회도 그렇고. 요한계시록 2장 8절에 보면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그러니까 아까 우리가 배웠으니까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나한테 이야기하시기를, 나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따라서 너도 죽었다가 살아나야 돼.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 9절에 보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10절에 보면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결국 함께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이유가 아니에요, 함께 있기 때문에 우연적인 우발적인 random connection이 아니고 확실한 connection으로 함께 있는 거예요. 이미 확정된 팔자이기 때문에 죽었다가 살아나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를 경유해야 된다? 죽었다,를 환난 가운데 그리고 죽음 가운데 옥에 던져지는 가운데 우리가 놓일 수밖에 없죠.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럼 우리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경찰에 잡혀서 감옥에 갇혀야 됩니까? 또 이렇게 이야기해가지고 이 광경을 자기가 연출해서 시나리오 짜가지고 그때를 대비해서 옥에 갇힐 때 “예수님 사진을 밟아라.” “나는 절대로 밟지 않겠습니다. 으으윽.” 사무라이 나카무라가 칼 가지고 “그렇다면 예수를 위해 죽겠는가, 우리 천황을 위해 죽겠는가?” “나는 죽어도 예수를 못 버린다.” “죽어라.” “으악!” 뭐 그런 연출을 자꾸 구상하는데 그렇게 굳이 우리가 뭐 김은숙 작가도 아니고 그렇게 시나리오 짤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감옥이기 때문에 그래요. 강정 먹는 감옥생활, 귤 먹는 감옥생활. 감옥생활 치고는 아직까지 한가하지만 우크라이나 같은 경우에는 감옥이 좀 곤란하겠죠. 미사일 막 날라오고 전기 다 끊어지고 수도 다 끊어지고.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고요. 생사를 알 길 없고.

이 세상이 우연 맞아요.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책에 의하면 우연이 아니고 필연입니다. 반드시 그러해야 해요. 아까 이 말 다시 해봅시다. 한 시간 지났다고 다 잊어버렸겠지만 아까 했던 것 한번 정리해봅시다.

시편 7편 11절, 하나님은 재판장이죠. 재판장이니까 재판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재판장이 재판을 안 하면 말이 안되죠. 재판을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선한 자는 건지고 악한 자는 벌하는 그 재판 하는 게 아니에요. 뭘 합니까? 매일 everyday 매일 분노하는 식으로 재판한다는 말은, please 제발 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된다는 거예요.

너한테 주어진 어떤 상황도 어떤 취지로 내가 그 상황에 너를 집어넣느냐 하면, 너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시내산 밑에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게 그럼 ‘아무것도 아니겠습니다.’ 이러면 끝나잖아요. 그게 안되니까 매일 같이 분노하는 거예요. 이게 안되니까.

명령한다고 우리가 들을 위인들입니까. 우리가 명령에 복종할 것 같으면 대신 죽으심이, 새 언약이, 내 살과 내 피가,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 질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주님은 살아있는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 다니는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우리를 죽음에 내몰면서 구원하시는 거예요. 죽음에 내몰리는 자체가 구원되는 과정의 일부다 이 말이죠.

분명히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처참하게 비참하게 죽음에 내몰립니까?”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럼 뭐 월 760 받고 죽음에 내몰리고 장사하는데 손님이 아침부터 들끓어서 죽음에 내몰리고 어떤 사람은 몸이 건강해서 보디빌더 하면서 죽음에 내몰리고 어떤 사람은 자식이 너무 잘돼서 변호사 시험 합격, 의사 합격 그래서 죽음에 내몰리고.

이래 내몰리나 저래 내몰리나 남의 인생 너무 탐탁잖게 보지 마시고 너는 인생 그렇게 죽음에 내몰리고 나는 이런 식으로 죽음에 내몰리고 다 달라요. 그러니까 엄살떨지 말고 징징거리지 말라는 거예요. 세상은 어떤 경우라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시고 발걸음도 세시는 분이거든요. 잠언서에 보면 발걸음도 세신다 했어요. 어떤 것도 우리 마음대로 안됩니다.

그러니까 서머나 교회에 보낸 것은 “너 교회 맞아?”라고 확인해주는 말씀이에요. 내가 너에게 의도적으로 환난을 받게 한 것에 대해서 네가 그것을 고마워하느냐를 지금 보게 하시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당부합니다. 동행 정도가 아니고 아예 나를 늘 없애고 죽이는 식으로 살아계신 분, 주님이 내 인생을 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상 수시로 누가 튀어나옵니까? “제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라든지 “제가 말씀을 전하니까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할 때, 쥐어박으면서 “그거 좋아하지 말고 책을 잊어버리지 마라. 책에 명단에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그 말씀을 하시는 거죠.

자, 그러면 이 작업을 위해서 p.235 한번 보겠습니다. 야, 이것도 참 만만치 않다, 내용이. p.235 중간, 위에서 11번째 줄에요. [느부갓네살과 다니엘의 두 번째 만남]이라 했는데 다니엘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오늘 강의의 중심 다니엘.

다니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앙이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어떤 점에서 신앙이 좋지 않냐 하면 다니엘도 여전히 구약 사람이 돼서 이 인간 세계가 평화롭게 가길 원해요. 그래야 자기도 평화로우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보니까 자기 나라가 속해있는 이 바벨론이 메대, 바사한테 망한다는 소리, 그리고 또 그 나라가 가만 있지 않고 헬라, 마케도니아한테 망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가 충격을 받아서 며칠간 앓아 누웠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전쟁한다는 자체가 자기 신상이 불편해진다는 것에 대해서 다니엘도 동일하게 우리하고 똑같이 힘들어하는 사람이었어요. 계시라 하는 것은 신약 계시처럼 성령 와서 주는 게 아니고 다니엘을 포함해서 계시가 서서히 무르익기 때문에 아직까지 미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다니엘 입장에서는 그 미래를 감당하기가 굉장히 힘드는 겁니다. 다니엘은 본인이 아직 살아있으니까.

그러면 다니엘에게 계시는 뭐냐? 7년. 시간성. 자, 이건 설명이 많이 필요하겠죠. 많이 필요한 거예요, 이것은. 느부갓네살과 다니엘의 만남에서 다니엘은 가만 있는데 누가 짐승이 됩니까? 느부갓네살이 짐승이 되죠. 짐승이 됩니다.

이번 주일 오전 설교에 제가 중요한 포인트 있는 말씀을 했어요.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하면서 뭐를 지키려고 하느냐 하면 신비성을 지키려고 했어요, 신비성.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여러분 알아 맞춰보세요. 공기와 주님과의 관계는? 공기, air와 주님과의 관계는? 어렵죠.

공기는 뭡니까? 물질이잖아요. 이 물질과 주님이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거예요. 주님이 공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안돼요. 그렇게 되면 뭐가 빠졌나? 중간에 인간이 빠져버려요. 여기에 인간을 집어넣고 주님과 공기 사이에 연결고리가 해명되어야 돼요.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이기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흔히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제3의 영역으로 오셨잖아요. 제3의 영역은 사물로 물체로 되어 있는 이 현실 세계 말고 책 내용 말고 중간에 현실보다 역사보다 뭐가 우선이다? 인간. 인간보다 뭐가 우선이다? 책.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 이것이 우선이잖아요. 그러면 인간 부문에 제3의 영역이 겹쳐버린다고요. 인간이 뭐로 바뀝니까? 주님으로 바뀌는 거예요.

아들이 아닌 자가 아들로 오셔서 아들이 아닌 자를 대신해버리면 그때부터 우리 아들 아닌 자가 아들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 요소를 집어넣고 공기와 주님과의 관계를 설명해야 되는 거예요. 물질이 주님한테 어떤 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알아야 되는 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신비성을 지킨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들이 이미 공기라든지 우주, 자연과학, 천문학 이에 대해서 인간 자체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미 물질화시켜놓은 거예요. 관측에 의해서 관측하는 자가 관측만 하는 게 아니에요. 해석을 해버리는 거예요. 해석을. 공기, 자연, 금, 금속, 지구, 달, 별에 대해서 이미 해석을 내린 거예요. 누가요? 관측하는 자가.

관측하는 자가 해석해버리면 뭐는 빠져요? 무슨 해석이 빠져버립니까? 관측하는 본인에 대한 관측은 누가 하죠? 이게 성립됩니까, 성립되지 않습니까? 성립되지 않죠. 내가 누구냐를 백날 관측해봐야 안 보이는 거예요.

내가 원숭이 쳐다보면 나를 압니까? 쳐다보니까 원숭이가 갑자기 말을 해가지고 ‘너 누구야?’ 하는 그거는 발람 선지자한테 한 얘기에요. 발람 선지자가 누구한테 자기 본색이 들킵니까? 당나귀. 당나귀한테 들키잖아요. ‘왜 때리십니까?’ 하극상이죠. 이등병이 상병한테 대드는 하극상. 왜 때리십니까? 이래가지고 발람이 기절을 할 정도에요, 세상에.

진짜 자기 자신을 누가 정확하게 이야기해준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반가운 이야기가 아니고 기절초풍할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인간이 나라는 것은 내가 관측한 정보를 수집해서 그 안에서 자기 의로움을 동반해서 자기를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내가 이래서 아직도 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동반해서 이야기한다고요.

부부끼리, 부부싸움을 여러분 해본 적이 없잖아요, 부부싸움 하면서 그 대화를 보세요. 대화에 반드시 뭐가 들어가요? ‘나는 이래서 정당하다’가 포함 안된 대화 나오던가요? 인간은 말을 하든 행동을 하든 이래서 나는 정당하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를 평할 자격이 있지만 너는 나를 함부로 평하지 마.’ 이걸 전제로 해서 대화해요. 이게 대화입니까, 이게 폭력이에요? 지금 애들도 마찬가지에요. 자식들도 마찬가지에요.

ChatGPT? GPT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걸 통해서 나를 알 수 있습니까? 과학? 수학? 우리나라 서울대 수학과 나오고 수학과 대학원 나와서 현재 프리스턴 대학교수로 있는 사람 있어요. 필즈상 받은 사람, 허준이. 그 사람이 이런 말 했다고요. “당신은 뭘 제일 잘합니까?” “나는 모든 걸 잘해요. 수학 빼놓고. 난 수학 빼놓고 다 잘해요.” 자기가 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다는 것을 아는 거죠.

그럼 왜 수학의 노벨상이라 하는 필즈상을 받았는가. 이것을 자기는 우발적이라 보는 거예요. 나보다 받을 사람이 많았는데. 그리고 곡면의 경우의 수인가 그걸 푸는데 자기가 운이 좋아서 푼 거죠. 운이 좋다는 말이 뭡니까? 내 목적과 기대한 것과 무관하게 상 받은 거죠. 그럼 상 자체도 내가 굳이 안 받더라도 남이 받더라도 내가 조금도 기분 상할 이유가 없다, 가 되죠. 물론 그런 경지까지 간 사람은 아니고요. 해석이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디모데에게 중요한 것은 디모데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에게 주어진 아우라 같은 신비성, 그걸 지금 사도 바울은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느부갓네살은 중요하지 않아요. 느부갓네살에게 있어서 신비성은 뭐냐? 느부갓네살은 짐승이 된다는 거예요. 문제는 다니엘은 짐승이 안됐다는 거예요. 그 차이점이 중요하죠.

다니엘은 증인이지, 관측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니엘과 함께 있는 분, 다니엘은 아까 했죠? 함께 계신 대신이 있잖아요. 지금 바벨론 나라가 이스라엘을 건드렸고 이스라엘의 현재 대변자가 다니엘이에요. 바벨론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를 건드린 게 아니고 누구를 건드렸냐?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인간 역사가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하나님의 책을 건드린 거예요.

아까 첫째 강의에 의하면 인간 역사가 하나님의 책을 건드린 거예요. 건드려야 그 내막이 나올 게 아니겠습니까. 환난 가운데 나올 게 아니겠습니까. 건드려보니까 졸지에 느부갓네살이 짐승이 된 거예요.

짐승이 되었는데 짐승이라는 꿈이 실제 인간 역사에 어떤 기간으로 나타났어요. 몇 년 동안 짐승 되었는가? 7년 동안 짐승 되었어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의 역사는 짐승의 7년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7년 안에 감금됐다. 7년에 속박되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하나님이 규정한 7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70 이레가 드디어 풀립니다. 7년, 이 시발점은 느부갓네살의 7년부터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가 이스라엘답게 된 역사는 몇 년이냐 하면 70년이에요. 그 땅에 사는 이스라엘이 70년 동안 약속의 땅을 비워줘야 돼요. 하나님의 거하실 약속의 땅을 비워줘야 되잖아요.

그 빈 곳에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스라엘 사람 있습니까? 없죠. 포로잡혀 갔으니까요. 남아있는 사람은 혼혈아들이고 제대로 이스라엘이라고 우길 사람 없이 비어있죠. 비어있다는 그 비어있음이 제대로 된 이스라엘이죠. 비어있다는 것이.

이스라엘은 이 땅에 없다. ‘없다’를 어디서 아느냐? 약속의 땅 바깥쪽에서 아는 거예요, 바깥쪽에서. 사체가 된 것은 우리 내부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우리가 이미 죽은 자로 아는 거예요. 그런데 바깥에서는 모르죠.

우리가 전에는 약속의 땅에 살던 민족이 무슨 민족이다?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그 땅에 살지 못하게 되었죠, 현재 이스라엘이.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뭘 바라봅니까? 현재 있는 자기가 사는 곳을 스스로 부정하고 자기부인이 되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이 땅에 태어난 나는 진정 나가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런 말이 있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이 깨어졌을 때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요. 이별할 때 사랑을 알죠. 사랑한다는 말은 못해도 안녕이라는 말은 해야지. 박선주가 불렀던 라는 노래에 나와요. 그런 노래 있어요. 아무 말 없이 가버린 그대가 너무 미워. 나중에 한번 들어보세요. 구구절절 참 노래도 잘 부르지만 노래 괜찮아요.

그 가사를 생각하면서 도대체 사랑한다는 말하고 안녕이라는 말의 차이가 뭔데 이거는 안 해도 이건 해야 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잘 생각 안 나요. 사랑한단 말은 못해도 안녕이라는 말은 해야지. 그동안 살았던 의리를 생각해서. 아, 의리 생각하는구나. 그러니까 사랑은 놓쳐도 의리는 남겠다는 자기 존재의 정당성은 챙겨야 되겠다. 네가 그것마저 짓밟나? 그런 뜻 같아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가버리면 그대가 너무나 미워.

지금 70년이 바깥에 있는 이스라엘한테는 계시로 다가오는 거예요. 70년만 지나면 이 약속의 땅에 간다. 가면 뭐하나? 여기 누가 기다리죠? 다윗 언약이 기다리죠. 다윗 언약은 뭡니까? 이스라엘이 온 이방 나라를 통치했던 것. 이방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고 역전되어서 도리어 우리가 모든 이방 민족을 다스렸던 그 대단했던 다윗, 다윗 언약의 시절로.

그 다윗 언약의 시절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지 사무엘하 22장을 보겠습니다. 이건 좀 어려워요. 보세요. 7절에 보면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여기 분명히 다윗처럼 되어있죠. 다윗처럼. 다윗이 지금 하나님의 신을 받아서 계시를 받아서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장래 일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하니까 다윗이잖아요. 다윗이지만 다윗 안에 들어계신, 아까 이야기한 다윗을 대신해서 다윗 삶을 사시는 그분이 예언하기를, 8절에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진노는 하여튼 한결같아요, 진노는.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또 10절에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11절,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인자가 메시아가 올 때 천사의 구름 타고 나타나시는 그걸 인자가 메시아가 오는 때라고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은 그걸 기다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보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다윗의 자손이야? 다윗 언약대로 오실 메시아 맞아? 그럼 당신 구름 타고 왔어?” 라고 묻는 거예요.

예수님 답변이 뭐냐? “내가 그렇게 올게.”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죽여버린 거예요.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죠. 뭘 구름을 타? 지금 행색이 초라한데요. 주께서 오케이, 구름 타고 온다고 한 것은 너희들은 너의 관측 있잖아요. 아까 우상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살아있는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신이라 했죠. 주님께서 그들을 바라보게 만든 거예요.

지금 여기 70년이 뭐냐? 약속의 땅이 비어있잖아요. 바깥에 있는 사람이 뭘 생각합니까? 70년만 지나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처음에 다니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70년이 뭐로 바뀌는지 알아요? 70 이레로 바뀌어요.

70 이레로 바뀌면서 아하! 갈 필요가 없다. 다윗 언약의 완성은 이 세상 전체에 대한 것으로 이 세상 자체가 이스라엘과 무관하게 멸망해야 될 파괴되어야 될 세상인 것을 안 겁니다.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이방화 되고 우상화된 것은 주께서 하는 인자의 나라가, 들어가는 나라 말고, 인자의 나라가 따로 있다.

그렇다면 이 인자의 나라는 느부갓네살 짐승이 극대화된다고 다니엘은 깨닫게 되었어요. 느부갓네살 우상 자체가 인류 역사의 시작과 끝을 말해줘요. 마지막 끝에 금, 은, 동, 철과 진흙에 섞여 있는 것을 마지막 올 때 태산 돌멩이를 쌓아서 이걸 넘어뜨리죠. 그럼 우상은 땅에 엎드러져요. 역사로서 우상입니다. 역사 위에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로서 떨어져버려요.

마치 사무엘상 5장 4절에 다곤 신상이 언약궤 앞에 완전히 엎드러져서 박살 난 것처럼. 역사 속에 조각조각 난 후에 그때 무슨 나라가 됩니까? 인자의 나라죠. 인자의 나라가 되려면 70년을 이루면 안 되죠. 70 이레를 이루어야죠. 그럼 현재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 다니엘부터 대신 함께 있는 다니엘부터 새로운 인자의 나라가 시작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게 오늘 다니엘 12장에 나오는, 모든 인간은 이스라엘이고 이방인이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야 돼요, 아무것도 아닌 자. 그냥 사체가 되어야 돼요. 시신이 되고 시체가 되어야 돼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야 돼요.

70년을 바라보면서 기다렸던 여기 바깥에 다니엘이 있죠. 여기 하나님께서 70년 말고 70 이레의 계시를 주세요. 70 이레가 되어버리면 여기 7년은 어디 포함되느냐? 70 이레에 포함돼요. 처음에 7로 시작되면 7+62+1, 합쳐서 70 이레가 되는 겁니다.

최종 완성은 1 이레잖아요. 1이 있으니까 1이라는 최종 밑에 중간지역 62 이레가 있는데, 62 이레란 옆에 7 이것을 깨부수는 거예요. 7년 동안 뭐 하느냐? 하나님이 다시 돌아와서 뭘 짓는다? 에스라, 느헤미야 뭐를 짓습니까? 어쭙잖은 성전 지었죠. 성전 지었잖아요. 그 성전을 지었을 때 이스라엘은 아직 역사는 흐른다~ 역사는 흐르는 줄 알고 있어요.

역사 자체가 비역사적 해석이에요. 역사 자체가 무산되기 위해서 여기에 1과 7 사이에 1 하나 남기기 위해서 소실시키기 위한 기간이 62 이레에요. 이것은 7년째 만드는 성전을 이방 나라가 와가지고 다 부숴버리는 거예요. 역사를 가지고 역사를 부수는 거예요. 이게 인간 전쟁입니다.

자기들끼리 물어뜯어서 자기들끼리 망해버려라.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는 고맙게도, 내가 하는 일이 내가 하는 합기도가 나를 망치게 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너는 그런 식으로 합기도 해서 망하고 너는 뭘 해서 망하고 놀면서 망하고.

하여튼 우리가 하는 것이 역사 속에 있는 관측된 나의 역사가 무너짐으로써 내가 홀로 있는 게 아니고 이미 대신 그냥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자기처럼 죽었다가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인하여 그 과정을 필수적으로 겪게 하시는 이 일에 주께서 참여시켜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합시다. 또 나 홀로 울고불고 좀 하지 마시고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니엘을 통해서 또 말씀을 통해서 하신 일이 그대로 새 언약 안에서 현실로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 바라는 것이 우리의 우상을 유발한다는 것을 깨달았사오니 하나님 주신 그 신비로운 것을 귀하게 감사히 여기면서 보이지 않는 분과 십자가 지신 분과 함께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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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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