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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30224a 다니엘12장 2절(제3의 영역)-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다니엘

광주강의20230224a 다니엘12장 2절(제3의 영역)-이 근호 목사

p.234 밑에서 11번째 줄에, [다니엘서의 묵시에는 이점을 달리 처리한다. ‘죽은 자의 부활’ 사건으로 설명한다.] 부활 사건에 대해서 밑에서 4번째 줄에, [그런데 그 신상은 결국 땅에 엎어진다. 역사 위에 엎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서’ 땅 위에 엎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역사 위에 엎어지게 되면 역사가 인간보다 더 우선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역사로서 엎어지면 역사는 없어지고 인간은 남게 돼요. 인간>역사. 인간이 역사보다 더 남는 겁니다. 역사보다 인간이 더 우선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사에서 인간을 뽑아내는 겁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인간의 시간 의식이거든요. 인간의 시간 의식이기 때문에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이죠. 현실이 우선이냐, 인간이 우선이냐? 인간들은 현실 속에서 자기가 태어났다고 생각하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고 현실은 인간이 조작했다고 보는 겁니다. 인간이 만들어냈다고 보는 거죠.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현실을 만들어놓고 그 현실에 자기가 속해서 농락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인간들은 ‘인간>역사’ 이렇게 보지 않고 인간인간>역사. 책이 우선이다.

미가엘이, 영적 세계에 하나님이 개입함으로써 ‘역사보다 인간이 우선이다’ 더 나아가서 ‘인간보다 책이 우선이다’라는 쪽으로 몰랐던 내용이 거기 하나 더 추가되는 겁니다.

다니엘 12장 2절에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이렇게 되어 있죠.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다’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뭐가 되죠? 부활이라 하죠. 부활. 부활이 되려면 일단 다 죽어야 돼요. 일단 다 죽인다. 일단 다 죽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시편 7편 11절에 보게 되면 거기 하나님의 명칭이 하나 나와요. “하나님은 의로우신”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기능, 재판하는 기능, 재판장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뭐한다?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첫 번째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재판할 때 어떻게 재판하느냐 하면 ‘그 누구도 무엇이 되지 말라’, 이것에 의한 재판입니다. 그 누구도 무엇이 되지 말라. 보통 재판하게 되면 착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나눠서 ‘너 착한 사람 되어야 돼. 넌 나쁜 사람 되면 안돼.’ 이렇게 하잖아요. 하나님의 재판은 그 누구도 무엇도 되지 말아야 될 것이 하나님이 매일같이 우리한테 분노로 재판하는 취지입니다.

재판할 때 분노를 가지고 재판한다는 것은 우리를 이미 아신다는 거죠. 착한 사람 되게 해달라고 재판하는 게 아니에요. 그 한 예가 솔로몬 재판인데, 창녀들이 같이 살다가 자기가 낳은 아이 하나를 죽이고 죽은 아이와 바꿔치기해서 자기 것이라 우겼던 그 재판을 할 때에 그 아이에 대해서 솔로몬의 판결은 뭐였습니까? 그 애를 둘로 쪼개라는 거예요. 그 아이는 누구의 것도 되지 말아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볼 때에 ‘하나님, 바르게 살겠습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이걸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인간이 되지 말아라. ‘나는 ~이 되겠습니다’ 하는 자체를 파괴시켜버리는 거예요. ‘나는 ~이다’ 그런 것을 네가 기대하지 말라는 재판을 하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부활은 일단 모든 것이 전부 다 사체가 되어야 되는 거니까요. 시체가 돼야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화가 난다, 분노한다. 그 이유가 뭐냐? 분노는 하나님이 해야 돼요. 재판하시는 분이 분노해야 돼요. 시편 7편 11절 다시 읽어보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이 늘 분노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의로움을 세상에 계속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분노가 설마 나한테는 안 오겠지?’라고 할 대상은 없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 저한테는 분노할만한 게 없죠. 그렇죠?’라고 할만한 인간은 없어요. 누구에게도 다 분노해요.

분노하는 그 취지는 뭐냐? 그 누구도 무엇이 되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이 살아있는 자가 되지 말라는 거예요. 사체가 되어야 돼요. 시체가 되어야 돼요. 시체가 되게 되면 여기 시체를 분석할 때 두 가지가 있죠. 시체 바깥쪽에서 시체 보기, 그것하고 그다음에 반대로 안쪽에서 시체 보기.

바깥쪽에서 보게 되면 성경 자체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숨이 끊어져 진짜 흙이 된 사람에게 다니엘 12장이나 성경 말씀 시편 7편 11절 같은 게 해당될 수가 없죠. 이미 귀가 먹었는데 이미 눈이 감겼는데 들을 수도 없는데 뭘 그 사람보고… “나는 늘 분노한다.” “걔 죽었는데요?”

쓸데없는 거예요. 쓸데없는 말씀이죠. 죽은 자한테는 말씀이 쓸데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준다는 말은 겉에서 보면 사체가 아닌데 안쪽으로 보면 이미 너는 사체인 것이 말씀을 통해서 증명되고 확인되는 거예요.

부부싸움 할 때 남편이 아내 괴롭히니까 힘이 없는 아내가 남편 막 붙들고 “죽어, 죽어, 죽어!” 이렇게 하잖아요. 그건 아직까지 “겉으로 볼 때 넌 사체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런 뜻이란 말이죠. “겉으로 보기에 너는 사체가 아니야.” 이게 문장이 너무 길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줄여서 두 자로 “죽어!”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내한테 구박받는 남편이 복음을 안다면 “나 벌써 죽었어.” 아내가 “너 뭐야?” “나 그 무엇도 아니야. 난 이미 사체야. 그 무엇도 아니야.” “그렇게 네가 생각하는 그 의도가 뭐야?” 다니엘 12장 2절, 티끌 가운데서 부활 되기 위해서.

역사보다 인간이 우선이고 인간보다 무엇이 우선이라 했습니까? 책이 우선이죠. 이 책 안에는 바로 다니엘 12장 2절이 들어있습니다. 티끌 가운데서 영생 얻을 자도 있고 부끄럽게 지옥 갈, 부끄러운 영원한 삶을 살 자도 이 책 가운데 두 종류의 인간이 들어있는 거예요. 두 종류의 인간이.

겉으로 나와 있는 역사 또는 현실은 인간이 조작한 거고 진짜 제대로 된 현실과 역사는 책 안에 숨어있는 형식이죠. 숨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 요한이 막 울죠. 계시 책은 받았는데 이게 일곱 개의 파라핀으로 봉인되어 있는 거예요. 자기가 딱딱 단추 떼듯이 뗄 수가 없어요. 열리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막 울죠. 우니까 천사가 “걱정하지 마라. 다윗의 사자가 이걸 떼리라.” (계 5:1-5) 뗄 때마다 역사와 인간 작살나는 겁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왜 이 현실이 환상이냐 하면 그 무엇도 아닌 것이 인간인데 인간이 자기가 사체라고 여기지 않고 시체라고 여기지 않고 살았다고 여기니까 살았다고 여기는 인간이 내가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철학, 예술, 과학, 종교 이런 것을 계속해서 만들어낸 거예요. 특히 과학도 마찬가지지만 종교, 문학도 마찬가지고요. 그 절대성을 향하여 인간 쪽에서 살아있는 인간이 살아있는 신을 만들어내서 ‘우리 산 자와 산 자끼리 한번 만납시다’ 하는 쪽으로 절대 진리를 향하여 추구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겉에서 본 사체에요. 겉에서 보니까 멀쩡하게 살아있는 거예요. 물론 군데군데 죽어가고 있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고 내가 요양병원에 가서 죽는 건 나중 문제고요. 지금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데 가만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퇴직했다고 집에 가만 있을 수는 없는 거죠. 뭔가 하는 거예요. 뭔가 하면서. 아침에 거울 보면서 ‘나 살아있는 거 맞잖아.’ 하고 화장도 좀 하잖아요.

그런데 겉으로 보는 것 말고 안쪽에서 봤을 때는, 이미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책에 담겨있는 계시를 통해서 늘 확인받는 것. 이게 바로 나는 이미 안에서 볼 때 티끌 가운데 죽어있는 사체와 마찬가지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영생의 대상자가 됩니다. 왜? 다니엘 12장 2절이 그 사람 속에 이미 파고들어왔기 때문에. 그 사람 속에 계시 책에 있는 내용이 사체 안에 자기 안쪽까지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그 신상은 결국 땅에 엎어진다. 역사 위에 엎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서’ 땅 위에 엎어지는 것이다.] 이 땅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이루어질, 계시가 실현될 곳이에요. 아시다시피 그 세계는 인자의 나라입니다. 인자 되시는 분, 예수님이 오셔서 이 계시의 내용대로 유일한 산 인간, 사체가 아닌 죽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맞다면 결국 인간 세계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제가 한 것이 성경대로 옳다고 한다면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인간을 죽인다. 하나님이 인간을 죽일 때는 죽이시는 이유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신다고 할 때 ‘죽이신다’를 주님 입장에서 다른 말로 하면 심판이 됩니다. 주님의 심판. 둘째, 인간은 하나님께 대든다. 그래야 이게 전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약간 지루하시겠지만 이 대목을 성경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역대상 5장 25절부터 보면,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하숫가에 옮긴지라 저희가 오늘날까지 거기 있으니라”

이걸 요단강 동편이라 해요. 요단강 안쪽은 약속의 땅인데 요단강 바깥쪽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거기가 목초지로서 너무 딱이고 목축하는 데에 너무 좋아가지고 약속의 땅 들어가기 전에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그 땅을 탐낸 거예요. 그래서 모세한테 부탁해가지고 ‘우리 여기 거할게요.’ 이렇게 한 거예요.

그들의 선택은 뭐냐 하면, 살아있는 나를 계속 살릴 수 있는 땅이라고 약속의 땅을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 기다리는 계시의 책이 완성되는 그 세계가 아니고, 지금 살아있는 내가 보다 더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생존의 터전으로서 약속의 땅을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문제에요? 자기가 계속 살아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다니엘 아까 보셨죠. 주님의 책은 우리를 뭐로 본다? 사체, 시체, 시신으로 보는 거예요. 시신으로 보고 그 시신 속에 책의 내용이 약속대로 주어지게 되면 죽은 자가 부활해서 영생을 얻는 그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 방식을.

그러니까 여기 5장 25절에서는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렇게 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에요. 왜 범죄하느냐 하면 자기가 사는데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범죄해요. 지난 강남강의에서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사람이 죄짓는 이유가 모자란 느낌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거예요. 자족하고 만족하는 게 아니고 뭔가 마저 채워야 나답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슬그머니 올라오는 게 욕심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뭡니까? 심판은 아까 뭐라고 했어요? 잊어버렸어요? 심판은 뭡니까? “너는 제발 무엇도 되지 마. 아무것도 되지 마.” 이거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인간 속에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내가 무언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가지고 대드는 거예요. 대드니까 그들은 이방 우상을 섬겼죠.

자, 여기서 우상과 참된 하나님의 차이점을 봅시다. 우상은 인간이 똑바로 볼 수 있어요. 참 하나님은 똑바로 못 봅니다. 이것은 어디 나오느냐? 출애굽기 33장에 모세가 시내산을 올라갔는데 하나님 얼굴을 못 봤어요. “수그리(엎드려)!” 해가지고 못 보게 만들고 등짝만 보고 그냥 지나갔어요.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 (출 33:20-23)

모세가 출애굽기 3장에서 떨기나무 보죠. 떨기나무에서 하나님 음성 들었습니까, 얼굴 봤어요? 얼굴 못 봤죠. 모세가 본 것은 불이었어요. 불은 어떤 불인가? 소멸하는 불이죠.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 삼손의 부모도 하나님을 봤어요, 못 봤어요? 불 가운데 올라갔어요, 불 가운데 (삿 13:20). 음성 들었어요. 하나님 못 봅니다.

하나님 쪽에서 보여주려면 하나님 쪽에서 낮아져야 돼요. 아브라함에게 세 명의 천사 찾아오죠. 그리고 야곱에게 얍복 강에서 하나님 쪽에서 낮아지죠. 얼마나 낮아졌는지 야곱하고 씨름할 정도에요. 야곱이 만약에 영암 씨름단쯤 되가지고 했으면 그 천사 혼날 뻔했어요. 안다리 후리기 뭐 이래가지고 들배지기 했으면 천사 거꾸러뜨릴 뻔했어요. 물론 천사도 결정적 한방이 있지만.

야곱과 천사의 만남은 인간의 속성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건드리면 그게 천사가 되든 누구든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발작을 일으켜서 대드는 경향이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생존 방법은 내 것은 내가 지킨다는 식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결핍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가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예요. 계속 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 범죄라는 것은 경합입니다. 인간의 범죄란 경합. 시합하고 경쟁하고 한판 붙는 거예요. 게임하고.

그래서 바둑하는 이것, 악(惡)입니다. 바둑이 악이에요. 자기의 모자람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승리감으로 빈 결핍을 채우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승리감 가지고 마음의 허한 곳을 채우는 거예요. 남자들이 직장 갔다와서 게임하는 것, 애들이 컴퓨터 게임하는 것, 손흥민 응원하는 것, 야구, 모든 스포츠가 전부 다 경합이잖아요. 다투는 거잖아요. 왜 다투는가? 허한 마음을 내가 응원한 팀이 이김으로써 다소 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모든 관심사가 현실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관심사를 쭈욱 쭉 자기 쪽으로 빨아당겨서 자기 속으로 응집시키는 겁니다. 자기 허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꽉꽉 메우는 그런 식의 인간 모습이 경합하는 거예요.

자기 아들한테 “너 몇 등 했어?” 무심코 던지는 거예요. 이게 전부 다 경합이거든요. 특히 고3 담임 같은 것 할 경우에 “선생님 반에 서울대 몇 명 들어갔어요?” 이런 거. 요새는 서울대학 몇 명 들어갔냐고 하지 않아요. “선생님 반에 의대 몇 명 들어갔어요? 약학대학 몇 명 들어갔어요?” 이거 묻죠. 의대, 약대, 한의대, 치과대 그거 묻는 거예요. 이게 전부 다 경합이에요.

이게 무슨 세계에요? 우상의 세계에요. 우상의 특징이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만든 제조과정을 본인이 다 알잖아요. 목수 불러다가 다듬은 걸 알잖아요. 세워놓고 “아이고, 무서워라.” 이런 거 없어요. 웬 아우라? 자기가 만들었는데 무슨 아우라가 있어요? 그냥 똑바로 쳐다보는 거예요. 똑바로 쳐다보기 때문에 우상의 모습은 자기 내면에 있던 신이 바깥 형상화된 거예요. 형상체에요. 내면에 있던 무형(無形)이 바깥쪽으로 유형화(有形化)된 것이 우상입니다.

부처. 석굴암의 부처 모습이 얼마나 인자합니까. 왜 인자하냐? 자기 인자를 극도의 예술적 표현으로 가미했기 때문에 그렇게 인자해 보이는 거예요. 특히 관상학적으로 석굴암 부처는 굉장히 인상이 좋게 되어있고 팔자 좋게 되어있어요. 귓고리가 늘어났으니까. 귓고리가 늘어나가지고,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부처가 신(神)이 될 상이죠. 노태우처럼 귓불이 많이 내려왔어요.

참 하나님은 ‘네가 나를 똑바로 쳐다볼 대상 아니다’는 겁니다. 역대상 9장 1절 한번 봅시다. 아까 역대상 5장에서는 어떻게 했던가요? 인간은 범죄하고 하나님은 쳐버리고. 앗수르 왕 불이라는 왕을 보내서 인간은 대들고 하나님은 쳐버리고. 심판해버리고. 그러니까 그 사이에 화평이나 화해란 있을 수 없죠.

여기 9장 1절에 보겠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 보계(족보)대로 계수되고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을 인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유다가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게 만들었죠. 인간은 범죄하고 하나님은 범죄하면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절대로 놔두지 않고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게 하죠.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대치는 극한 대치에요. 중간에 화해한다든지 통한다든지 이런 거 없어요. 인간도 분노하고 하나님도 분노하고. 그냥 마주쳐서 인간은 그냥 심판받고 인간은 그냥 심판당할 뿐이고 그러면서도 대들고.

그런데 9장 2절에 봅시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는데 그러고 난 뒤에 누가 돌아왔습니까? 여기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제일 먼저 돌아와요. “먼저 그 본성(本城)으로 돌아와서 그 기업에 거한 자는 이스라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과 느디님 사람들이라” 70년 포로잡히고 난 뒤에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 빈 약속의 땅에 제일 먼저 돌아온다고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심판도 아니고 대듦도 아닌 중간에 틈이 발생 되죠. 중간에 틈이 중보자죠. 철저하게 인간은 대들어야 되고 철저하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봐주는 것 없이 심판을 해야 됩니다. 그 심판과 대듦 사이에 레위 지파가 갖고 있는 고유의 기능이 제대로 이제는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분. 인간은 매 맞으면서도 꼭 대들어서 하여튼 얻어 터질만한 인간. 그 둘밖에 없겠느냐는 거예요. 과연 그 둘밖에 없겠는가? 제3의 지역이 없겠느냐 하는 거예요. 제3의 지역은 바로 레위 지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왜 이걸 제가 언급하느냐 하면 책 때문에 그래요, 책. 이 책이 어디서 튀어나오느냐? 책이 처음으로 튀어나오는 데가 있어요. 출애굽기 32장 32절요. 여러분, 방금 이야기한 걸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산 밑에 있는 백성들 우상 섬겼죠. 그래서 이건 얻어맞습니다. 그런데 산 위에 하나님은 뭘 고집해요? ‘나는 계약대로 하지 않으면 다 죽인다.’ 그거 고집하십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2장 32절에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모세가 시내산 올라가서 본 게 있어요. 뭘 봤느냐? 책을 봤어요. 모세가 뭘 아는가? 역사보다도 인간보다도 생명책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도 그걸 언급했죠 (눅 10:20). 제자들이 현실 속에 살면서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니까 아주 신바람 났어요. 그래서 자랑하죠. “우리가 복음 전하니까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주의 능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거 좋아하지 마라. 네가 하나님을 거론해도 너는 하나님을 모르고 우리가 귀신을 쫓아낸다 해도 너를 몰라.”

너는 하나님과 인간 그것 말고 다른 제3의 구역에 관심 둬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걸로 기뻐하라. 귀신이 너한테 항복한 걸 좋아하지 마라. 만약에 귀신이 너한테 항복한 걸로 기뻐한다면 갑자기 책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돼요? 귀신을 쫓아낸 내가 우선되잖아요, 내가. 내가 우선되죠.

수요일에 한 문장을 다시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믿지 않는 방식. 그다음에,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믿는 방식.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 말을 번역하면 ‘나 주님만 의지합니다. 주님이 도와줄 줄 믿습니다. 난 주님만 고대합니다. 기대합니다.’ 그게 불신앙이다 이 말이죠. 왜? 시작을 자기 쪽에서 시작했으니까. 이렇게 도와줘버리면 나를 안 잊어버리는 거예요, 나를.

하나님의 재판은 뭐라 했습니까? 너는 아무것도 되지 말라 했거든요. 왜? 너는 태어날 때부터 사체이고 시체이기 때문에. 그런데 거울 앞에 내가 살아있으니까 내가 왜 시체냐고 하죠. 내면적으로 볼 때는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죽은 자에요.

관계가 끊어졌는데 관계가 끊어진 이유가 뭐냐? 안에 마귀가 살아있어가지고 계속 우리들 위신을 부추겨주는 거예요. 계속해서 우리 위신을 부추겨주니까, ‘그래, 나는 고귀한 거야. 나는 아직도 살아야 돼. 나는 내 말빨 서야 돼.’

계속 큰소리치며 살아가지만 나중에 큰소리가 나이 들면 점점 더 사그라들어요. 어깨도 좀 구부러지고. 전도서 나오잖아요. 어깨도 구부러지고 눈도 어둡고 자식들보고 혼내도 손자들이 와서 막 놀리고. 맛있는 것이 그렇게 맛있었는데 지금은 이빨이 고만 망가져서 맛있는 것을 씹지도 못할 정도로 맛을 못 느낄 정도로 모든 게 그냥 붕괴되는 거죠. 파괴되는 거예요. 모든 게 파괴되는 거예요. 아무리 발버둥치며 살고자 해도 우리 내부적으로 계속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도 마귀는 멀쩡해가지고 계속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내가 늙어도 고집 하나는 만만치 않다’ 뭐 이런 걸 자랑이라고 내세우면서 그렇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믿지 않는 방식이 뭐냐 하면, 교회 50년 다녀서 권사 됐는데 끝까지 나는 믿음을 놓지 않겠습니다, 이게 불신앙이에요.

주께서 믿음 놓으라고 죽이는데 죽이시는 취지도 모르고, “끝까지 나는 주를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버릴지라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좀 버려. 나를 좀 놔줘!” “주님 붙들겠습니다.” “베드로야, 넌 나한테 오지 마. 좀 놔. 저리 가. 너는 내 처소에 오지를 못 해.” “끝까지 목숨 바쳐서…….” “네 목숨 필요 없어. 네 목숨 필요 없어! 네 목숨이 왜? 주의 이름에 네 목숨이 왜 끼어드는데?”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믿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 주님께 기대했다가 실망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이게 신앙 아닙니까. 하여튼 주님은 내 뜻대로 된 적이 없어, 이게 믿음이에요. 이게 믿음이라고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 8장 24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그 보는 것 중에 누구도 포함되느냐 하면 본인의 몸체도 들어있죠. 자기에 관한 것도 들어있어요. 내게 관한 것을 내가 바라지 않겠습니다. 내게 관여된 것 어떤 것도 내가 더이상 기대하고 고대하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는,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야 되는 게 마땅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내 몸을 포함해서 나를 역사 속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역사의 영웅, 역사의 일원. 역사의 일원이란 역사를 구성하는데 내가 보탬이 되었다는 거예요. 가정이란 역사, 자식 잘 키우는데 내가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빼는 거예요. 내가 힘들게 17년 동안 일해가지고 자식 시집 다 보내고 이 정도 하면 뭐 엄마로서 했잖아요. 지금은 은퇴했지만. 비자발적으로 조기 은퇴했지만, 뭔가 이 가정이라는 역사에 기여했다는 거예요. 뭐 시체로 기여했겠어요, 시체로? 그게 뭔데요? 그래서 생긴 게 뭔데? 자기 포기 못했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시는 것은 제발 나를 믿지 말라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요. 살아있는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우상적인 하나님밖에 없어요, 우상적인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낸 거예요. 모세를 불러내니까 딱 두 가지 구역으로 나눠졌죠. 한쪽은 저주받을 이스라엘, 한쪽은 구원이 아닙니다. 심판이에요. 하나님은 언약에 의한 재판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누구든지 다른 신을 섬기면 저주하잖아요. 이걸 하나님이 포기합니까? 포기 안하죠.

그런데 모세가 40일 올라가 있을 동안 밑에서는 뭐를 섬겼죠? 우상을 섬겼잖아요. 우상은 뭐라 했습니까? 살아있는 그들 본인이 제조해낼 수 있는 신. 살아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상상하고 꾸며낼 수 있는 신. 그래서 만들어진 신과 자기가 동질성으로 유통이 되고 소통이 되는, 대화가 되고 납득이 되는 신이에요.

납득된다는 말은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납득이 돼요. ‘네가 나를 믿는구나. 기특하다.’ 이런 소리를 하나님께 들을 때 순간 우리는 뭐가 됩니까? 내가 나를 부정하지 않아도 되죠. 그렇잖아요.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다.’ 이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건 예수님이 사울에게 하는 것이고. 진짜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고, 가짜 하나님은 ‘네가 대견하구나. 착하구나. 훌륭하구나.’ 이건 가짜죠. 그건 종교죠. 교회에서 말하는 종교.

제발 좀 아무것도 안 되어야 될 텐데 자꾸 뭔가 자기 지정된 위치를 자기가 만들어내려고 해요. ‘나는 ( )입니다.’ 이 문장 틀을 포기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매일같이 하나님이 분노하죠.

이 분노를 심하게 느끼면 고마운 점이 생겨요. 장점이 생겨요. 우리가 정서적으로 안정이 돼요. 맞아도 너무 맞으면 안정이 된다니까요. 우리가 하는 짓이 진짜 마동석한테 귀싸대기 맞는 식으로 철썩 철썩 맞으면 우리가 갑자기 안정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불평하지 않고. 특히 엄살떨지 않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엄살떨지 않고. 엄살떨지 않는다는 말을 아주 쉬운 말로, 자기 인생에 징징거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취직 안 한 애들이 꼭 징징거리잖아요. 다 세상 탓이고 세상이 나의 실력을 안 알아줘서 그렇고 나 같은 귀한 사람 왜 안 뽑냐고 늘 징징거리죠. 이건 덜 맞아서 그래요. 마동석한테 덜 맞아서.

분노한테 더 맞아버리면 안정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뭐든지 감사하게 되죠. 심지어 먹는 것, 입는 것도 감사해요. 물 마시는 것도 감사합니다. 왜? 이쪽에 귀싸대기 맞은 표시 다 나면서 “물 먹어.” “감사합니다.” “강정 먹어.” “예, 감사합니다.” 한 대 얻어맞았거든요. 얻어맞으니까 끽소리 안 하고 하는 거예요.

꼭 욥기 42장 같아요. 아무 소리도 못해요. 그렇게 말 많던 욥이 아무 소리 못해요.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었고 감히 쳐다볼 수도 없어요. 그래서 오기는 왔고 쳐다봐야 되니까 자기 쪽에서 뭘 하느냐? 재를 뒤집어써요, 재를. 부엌에 가서 재를 뒤집어쓰고 “나는 시커먼 재 속에 포함되어서 재와 나와 동일시되었습니다, 하나님. 저 재입니다. 이미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저를 불살라도 마땅합니다.” 재 속에서 하나님을 똑바로 못 쳐다보고 삐딱하게 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욥에게 처음에 줬던 복에 곱빼기를 줘요, 곱빼기를. 딸도 전보다 더 이쁜 딸 주고. 괜히 그 딸만 죽어서 손해 봤어. 재산도 완전히 배나 줘버리고. 그때 욥이 안 것은 뭐냐? 이 재산, 이 자식 하나 어느 것도 내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죠.

강남 강의를 여러분들이 들어보면 제일 초반에 나와요.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자기 목숨보다 미워하지 않으면 내게 올 수 없다 할 때 (눅 14:26) 거기서 제가 이렇게 해설했죠. 간단하게 해석했어요. 내 것이 있어야 뭐 내 걸 고집하지. 처나 자식이나 심지어 나도 내 것이 아니잖아요. 강의 끝나버렸어요. 강의 끝났죠.

그래서 제3의 구역을 둔 거예요. 그게 출애굽기 33장, 다시 한번 봅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본 게 있다 했죠. 뭘 봤다 했습니까? 책을 봤죠. 책에 보니까 이미 모세는 합격자 명단에 자기가 있어요. 합격자 명단에 자기가 있는 거예요. 이것은 모세가 뭘 한 게 아니고 모세가 올라오는 그것조차도 책이 책다운 자기 현실을 실시하는 과정 속에서 모세가 필히 구원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책이.

모세보다 뭐가 우선이다? 책이 우선이에요. 그 책은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 전에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명단 구성할 때 이미 확정된 거예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확정된 그 명단 리스트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하나님하고 아들하고 이미 합의했죠.

그래서 그게 예수 안에서 예수 이름으로 확정된 명단이기 때문에 주님은 주님 자신의 이름을 현실로 펼치기 위해서 모세, 엘리야를 하나도 잃어버리면 안돼요. 요한복음 6장 39절,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될 이유가 예수님 자기 숙제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예쁘다고 하는 게 아니고 우리 귀해서 그런 게 아니고 예수님이 예수님 되려면 아버지와 확정된 그 명단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될 그 업무까지 다 해야 돼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다고요.

once and for all. 한 번으로 인하여 단번에 모든 걸 다 이뤄버린 거예요. 책의 내용을 다 이룬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천사를 보내서 성령을 보내서 그 명단대로 방문하는 겁니다. 유월절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발렸는가 그거 보고 찾듯이 예수님의 언약, 내 피와 내 살이 있는가 그 명단 보고 아, 이 집 왔구나. 딩동. “계세요?” “누구십니까?” “데리러 왔습니다.” 그럼 끝난 거예요.

그게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거예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사람을 꼬시는 게 아니고 대조하는 거예요. 마치 가스 검침 나오듯이. 복음 전하는 사람이 유난 떨고 감정 피울 하등의 이유 없습니다. 상당히 기계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면 돼요, 기계적으로.

“실례지만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십자가 피에 대해서…” “나가!” “알았어요, 알았어요. 이 집 아니구나. 이 집 아니구나.” “실례지만 혹시 목사 되십니까?” “네 목사입니다.” “교회가 이단인 줄 아시고…” “나가!” “아이구, 예. 알겠습니다.” 복음 전하면 목사고 집사고 장로고 명단 없는 사람은 튕기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성경 말씀대로 환난 받는 것을 도리어 기뻐하라는 말이 이제 술술 풀리는 거예요.

출애굽기 33장에 보게 되면 이미 책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책 안에 제3의 영역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대신 희생해야 돼요. 누가? 모세가. 제3의 구역이 뭐냐? 대신 희생하는 거예요. 아버지 뜻도 알고 인간들이 얼마나 모질게 하나님께 대든다는 그 양쪽을 다 자기 인생에 담아야 돼요.

그러니까 인간의 죄를, 자기가 죄짓는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처럼 담당하는 거예요, 자기가.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모세는 알잖아요. 백성들의 죄를 모세가 대신 담당하게 해달라고 모세가 허락을 구하는 겁니다. 그게 ‘대신’이에요.

대신, 이것이 제3의 영역이죠. 제3의 영역이 틈으로 나오면서 책은 드디어 현실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 책 안의 내용이. 그냥 예수님만 부활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첫 번째이고 그다음에 부활될 자, 부활될 자가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적용시키죠. 그걸 ‘현세적 종말론’이라 합니다. 세상 끝이 안됐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성령을 줌으로써 하늘나라에 입성하게 만드는 거예요. 세상이 안 끝났는데 아직 내 목숨이 끝나지 않았는데 하늘나라에 미리 입성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학입시도 두 가지 종류가 있죠. 하나는 정시 있고 수시 합격이 있어요. 기분 같으면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하겠는데 여러분 마음을 내가 모르니 뭐. 다만 축하해드리고 싶어라.

이 ‘대신’이라는 것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까, 우리를 모독합니까? 문제에요. 이게 복음인데 이게 우리를 완전히 개무시하는 거예요. 장례식에서 제일 황당한 일이 뭐냐 하면 아휴, 남편 죽었다고 “여보, 여보”하고 이렇게 울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와서 본처 우는 것보다 더 많이 울 때, 울던 본처가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뭐 이런 게 다 있냐? 그런데 그 엎드려 울던 여자가 나중에 고등학교 학생보고 “야, 너도 와서 같이 울어라. 아버지다.” 혼외자식?

그다음부터는 장례식은 시마이했고 “아줌마는 누구십니까? 얘는 뭡니까?” “옛날 아줌마 결혼해서 애기 못 낳을 때 대신, 여기 ‘대신’ 나와요, 죽었던 우리 애 아빠가 아줌마 애 못 낳는 줄 알고 대신 나하고 관계 맺어서 애 낳았는데 아이가 이렇게 컸습니다. 듣기로는 우리 애 아빠가 46억을 남겼다면서요.” 이제 본론 들어가는 거죠, 본론. 돈도 없는데 왜 찾아왔겠어요? 국민연금? 누구 이름으로...?

방금 제가 들었던 예를 한번 보세요. 본처 마음이 어떻습니까? 섬뜩하죠. 이게 뭐에요? 그러면 처가 쪽 남자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이 여자하고 애하고 당장 내쳐라!” 하지 않겠어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돈 46억 남겼다고 어딜 기어 들어와. 내치라 하겠죠.

이게 바로 복음을 대하는 인간들의 본심입니다. 그 심각한 얘기는 10분 후에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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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5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