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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230216b말1장10절(규칙 그 자체)-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

안양20230216b말1장10절(규칙 그 자체)-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내 자리에서 이동” 하는 거 써놨지요. 어떤 사람이 가로등 밑에서 뭘 찾고 있어요. 어떤 사람이. 예를 들면. 지나가던 사람이 도와주려고 뭘 찾습니까? 하니까 “아이고, 내가 열쇠를 잃어버렸습니다.” “같이 찾읍시다.” 열쇠가 없어요. “어디서 잃어버렸는데요? 열쇠가 없는 거 같은데요. 이곳은 아니고 다른 데서 잃어버린 거 아닙니까?” 이렇게 하니까 딴 곳은 어둡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밝은 데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밝은 데서 찾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 사람이 지금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잃어버린 곳을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 자신이 누구냐를 알면 우리가 잃어버린 곳까지 이동이 되어야 돼요. 현재 이 자리는 나를 찾는 자리지 내가 잃어버린 자리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잃어버린 곳이 어디냐, 그건 우리는 몰라요. 예수님이 대신해서 우리를 보여주는 겁니다. 말씀으로.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들은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잃어버린 자리도 몰라요.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시는 예수님께서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인간이 어디서 잃어버렸는가를 예수님이 친절을 다하여 소개시켜 줍니다. 그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은 자기 자리를 잃어버렸어요.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지를 못한 겁니다.

말라기는 마지막 선지자에요. 이스라엘 멸망의 정당성. 이스라엘은 왜 굳이 멸망해야 되는가를 최선을 다하여 그 근거를 제시하는 게 말라기입니다. 13절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런 것들은 그전에 이미 레위기할 때 레위기22장에서 이거 뭐 찾을 필요 없어요.

여러분들이 레위기 보면 다 알 거예요. ‘아, 제물은 깨끗해야겠구나! 멀쩡한 거 드려야지 더러운 거 드리면 안 되겠구나!’ 여러분들은 그런 거는 상식적으로 아는 거죠. 레위기22장 18절부터 해서 32절까지 죽 나와요. 아까 같은 거 반복하는 거예요. 더러운 거, 흠 있는 거, 눈 먼 거, 상한 것, 레위기22장22절. 상한 거 이런 거 좀 드리지 말라. 이건 흔히 조상 제사 지내는 사람도 상식적으로 아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사 드리면서 어떤 사람은 작년에 문어 끄집어내서 또 제사 지내는 사람 있긴 있다만. 워낙 비싸니까요. 어차피 제사는 장난이니까.

병든 것, 더러운 것, 이런 것을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 나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라는 뜻이거든요. “제사 드리는 거 그거 제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그만한 역량을 우리가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말라기1장12절에 보면 너희가 내 이름을 더럽혔다는 거예요. 내 이름을. 내 이름을 더럽혔다. 자, 성전이라 하는 것은 성전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만나기는 만나는데 그냥 만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과 합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인간들이 2.0 대 2.0 서로 봤을 때 그렇고, 하나님 이름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이 있다고 칩시다. 이게 성전이다. 앞에 성전 기둥이 있고 성전 안에 내부 안에 지성소, 성소 있다 합시다. 앞에 제단 있다 합시다. 제단에 관광객들이 와가지고 제단에 사진 찍고 관광할 때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이 발견됩니까? 안 됩니까? 사진 찰칵 찍었는데 주의 이름이 나타나고 이런 거 있습니까? 없지요.

이건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성전이 있는데 제사장이 굉장히 들락, 달락은 하는데 제사는 정기적으로 드리는데 주의 이름이 있다고 하는데 주의 이름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요. 성전의 있음의 흔적을. 들락달락하는 제사장만 보이지 담당 제사장 불러가지고, “뭐했습니까?” “제사 드렸습니다.” “주의 이름 봤습니까?” “못 봤습니다.” “못 봤는데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있습니까?” “있다니까 일단 믿어야지요. 뭐.” 이런 식이에요. 그게 말이 되냐 말이지요.

그 당시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제사장을 통해서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선지자를 통해 보여준 거예요. 선지자들을. 그래서 선지자들의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졌어요. 자기 말이 먹히지 않는 이유가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선지자는 보여줄 수가 없어요. 보여줄 수가 없고 그냥 자기 입에 담는 말씀만 전하는데 말씀만 전하니까 제가 지난 낮 오후설교처럼 말씀만 전하니까 그들은 뭐냐 하면 니 왜 자꾸 욕하느냐, 자꾸 욕한데. 욕하고 저주하고 그러니까 그쪽에서 오히려 부화만 돋우는 거예요. 부화만. 화만 더 돋우는 거예요.

그런데 그 스가랴 선지자도 마찬가지에요. 스가랴 선지자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이사야에도 나오듯이 선지자는 자꾸 뭐라고 전해야 되느냐 하면 “너희들이 우상을 섬기므로 나의 분노를 촉발했다.” 이리 되어있어요. 너희들이 우상 섬기니까 내가 화가 난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뭘 요구합니까? 그 화난다는 하나님의 인상 좀 보여줘! 이리 나올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선지자를 통해서, 선지자는 양쪽 다 분노를 받아요. “아이, 좀 우상 좀 섬기자. 왜 우상 섬기는 걸 못 섬기게 해?” 하고 분노하고, 하나님은 또 우상 섬긴다고 분노하고. 선지자의 자리가 분노의 자리가 되어버렸어요.

제사장들은 그 제단에서 제물을 태울 때 홀라당 다 태우는 겁니다. 다 태우면서 거기서 특수한 의미를 발췌해야 돼요. “이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심판하는 겁니다.” 라는 것을 발췌해야 돼요. 제사장들이. 그 발췌하는데 그 제사장들이 실패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히브리서에 나와요. 그것은 제사장이 그 이유가 아주 명쾌해요. 제사장이 인간이라서 그렇다는 거예요. 유한한 인간이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제사장이 나쁜 짓을 한 게 아니고, 그 자체의 유한성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계속 인간의 유한성을 히브리서 2장에서 주장하는 것은 율법 담당자가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이 지켜야 되지 주제넘게 지 주제파악도 안되는 게 니가 왜 말씀을 지키느냐 말이지요. 니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말씀을 누가 지킵니까? 인간은 못 지켜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다. 누가 지켜요? 못 지킵니다. 마음에 형제를 미워한 것도 무슨 죄? 살인죄.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려라. 이거 누가 지켜요? 못 지킵니다. 주님만 지켰지요. 성령에 의해서 온몸이 다 죽음으로 주님의 제단에 바쳐지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라기가 복음을 경유하게 되면 십자가를 경유하면 이게 기쁜 소식이 돼요. 참담한 소식이 아니고 기쁜 소식이에요.

이 참담한 소식을 느끼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이스라엘을 못 놓는 인간들에게만 참담한 거예요. 나의 주체됨을 쥐고 있으려니까 이 성경 말씀이 참담함이 돼요. “내 인생이 어떤 식인데. 내 팔자가 얼마나 고귀한데 이걸 지금 여기 와서 포기해?” 이런 인간들만 이 말씀은 참담하게 되고 복음은 화딱지 나는 복음이 되는 거예요. 기쁜 소식이 아니고 분노의 소식이 되는 겁니다.

12절에서 너희가 주의 이름을 더럽혔다. 할 때는 그걸 말을 달리하면, “니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다.”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면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아, 이래서 내 주제를 아는구나! 이런 이야기구나!’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나의 제단 위에서 그 다음에 단어 부사는 뭐지요? 불사르기 앞에 무슨 단어입니까? 헛되이. 너희들이 헛짓했다는 거예요.

이 말라기 보고 사람들은 “야, 말라기 시대에 제사장 참 나쁘다.” “이거 누가 할 거지요?” “내가 할게요.” “왜?” “느낌 아니까.” “아이구, 제사장 다 나가. 내가 지킬게.” 이러면 이건 전혀 지금 말라기를 이해 못한 겁니다. 이 말라기 제사장들이 못 지키는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못 지키는 거예요.

첫 번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이걸 ‘주체 갈아타기’ 주체를 갈아타기 해야 돼요. 주체를 갈아타기 하는데 왜 그렇게 성전주고, 하나님 말씀 줘도 왜 못 지키는가, ‘나는 내 속에 타자 또는 타인 남이지요. 남. 남에 의해 구성된다.’ 이것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 속에 주의 이름을 대적하는 요소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내내 그것이 이미 주체 노릇을 해왔어요. 인간의 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사주 받은 거예요. 내가 주체다.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다. 하는 것은 내 안에 괴물을 숨기면서 그 숨겨진 괴물이 나한테 사주해서 그런 발언을 하도록 한 겁니다.

어디에 가도 나라는 것은 껍질에 불과하고 원래 주인은 마귀가 되던지, 주님이 되던지, 따로 있어요. 주님의 말씀은 그걸 끄집어내는 거예요. “너 나와!” “저 말입니까?” “너 말고. 니 속에 나와! 너 말고 니 속에 있는 거. 주의 이름에 공격하는 원수 나와!” 그렇게 되는 겁니다.

1장 14절에 보면,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금 여기 이방민족이라는 말을 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지금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곧 멸망 직전이에요. 사실은 이스라엘은 그 당시 나라 자체도 아니고 그냥 선지자 중심으로 모인 단체에 불과하니까요. 제사장도 있지만 형식이고, 관행이고, 관습이고, 그냥 형식적으로 해왔던 거예요.

그러면 원래 이스라엘은 이방나라 중에 돋보여야 이스라엘다운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다운 이스라엘이 원칙을 주님께서는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여기 주체 갈아타기거든요. 주체 갈아타기.

주체 갈아타기를 주께서는 오늘 신약시대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 성도를 규칙 그 자체가 되게 하십니다. 내가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고 규칙 그 자체가 되게 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나쁜 짓을 한 게 아니고 우리 자체가 오류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안에 타인이 있거든요. 내 안에 타인은 악 그 자체에요.

제가 언젠가 순수 악이라 했어요. 순수 악은 나쁜 짓하기 전부터 이미 악 자체가 순수 악이라 해요. 내가 나쁜 짓을 해서 악이 아니고 나쁜 짓하기 이전에 바탕 되는 그 순수와 그걸 이게 뭐냐 하면, 다윗 속의 언약. 다윗 속의 언약이니까 이걸 합쳐버리면 무슨 언약됩니까? 다윗언약. 다윗언약은 말라기에서도 여전했던 거예요. 어디 안에서? 말라기 선지자 안에서.

선지자는 주체 갈아타기가 성공했거든요. 그건 온전한 건 아니지만. 신약에 와야 온전하게 돼요. 성령이 오시기 때문에 온전히 갈아타기 하거든요. 구약에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주체 갈아타기에 어떤 시범요소가 잠기다 보니까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내 인생인데 내 맘대로 되지를 않는 거예요.

그 흔적 중에 하나가 삼손이잖아요.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될 선지자가 누구를 쫓아다녀요? 블레셋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만 쫓아다니는 거예요. 아버지가 말렸잖아요. 왜 할례 받지 않은 여자를 좋아하느냐, 그냥 성경에서는 내가 좋아하니까. 이렇게 되어있지만, 사실은 정확히 말해서 이쁘니까.

전에 오후예배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것도 갖고, 이스라엘도 구원하고 이 두 개가 삼손에게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힘이 있으니까. 그러나 힘에서 힘으로 구원하지를 못합니다.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차라리 이스라엘의 힘이 이스라엘을 방해했지요. 이스라엘의 구원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언약에 의한, 규칙에 의한, 구원을 방해했기 때문에 삼손은 거기에 언약에 의해서 약속대로 희생되어야 됩니다.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릴까요. 삼손이 눈 뽑히고 묶여있을 때 머리카락이 자라난다 했잖아요. 그렇죠. 자라나지요. 머리카락 자라난 거 이왕이면 좀 더 머리카락이 길게 자랐으면 힘 더 쓸 건데, 그런 발상을 하면 안돼요. 삼손이. 왜냐하면 힘으로 구원해왔던 것은 눈 뽑히기 전에 소경되기 전에 이미 다 했어요. 자기가 힘만 자라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 건지는 힘만 자라난 게 아닙니다. 자기가 이쁜 여자 좋아하는 것도 같이 자라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통해서 이미 통과시켰어요. 경험했어요.

내가 힘이 세다는 것은 내 안에 괴물도 같이 커간다는 사실을 삼손이 보여준 겁니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오늘 말라기 제사장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그들이 죽으면 돼요. 그게 주체 갈아치기입니다. 하나님의 원칙, 규칙에 의해서 규칙은 제물을 드리는 게 아니고, 내가 규칙 앞에 누워있는 다 태워야 될, 심판받아야 될, 제물로 드러날 때, 우리는 제물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전에 있던 악마는 우리보고 “죽지 마라. 죽지 마라” 이렇게 했는데, 지금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죽어라, 죽어라, 하지는 않아요. 왜? 이건 우리 보고 지시한다고, “우리가 죽을게요.” 하는 것은 죽는 척하기 때문에 안 돼요.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하지요. 이미 죽었다.

그러니까 이게 교회라는 게 성전의 완성이 교회 아닙니까. 성전완성 교회 이게 굉장히 어려운 테마가 돼요. 주제가 돼요. 개념이 돼요. 어려운 것을 두 번째 시간에 합시다. 왜 우리가 그 규칙 자체인지를. “우리가 교회를 열심히 섬기자.” 가 아니라 ‘교회의 그 자체’ 인 것을. 왜 그런가.

마태복음16장18절 보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 앞에 뭐가 하나 붙지요. 중요한 거 붙습니다. 뭐가 붙습니까? 내 교회를 세우겠다. 누가 세운다고요? 베드로야 세워라. 아니에요. 그건 천주교 돼요. 베드로보고 세우라는 말이 아니고 세우겠다. 내 교회를 내가 세운다. 누가? 주님이 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세운 교회의 특징이 뭐냐, 죽음의 권세, 악마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내가 세우겠다. 이 말은 교회 세우는데 인간한테 아무것도 맡기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럼 맡기지 않으면 우리는 구경만 하느냐 그렇지는 않아요. 죽어줘야 돼요. 죽는다는 말은 숨이 끊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주체 갈아타기, 주체가 바뀌는 거예요.

그 전에 타인이 바꾸어지는 거예요. 타인이. 요번 요한복음 할 때 제목이 ‘타인의 마을’이거든요.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라는 타인, 타인으로부터 만들어낸 마을이 천국입니다. 왜 예수님을 타인이라고 하느냐, 인간은 나의 나됨을 한시도 꿈에라도 잠을 깨든, 낮이든, 밤이든, 포기한 적이 없어요. 나의 나됨을.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본성이기 때문에 율법은 항상 그걸 지적하고 들어갔어요. 항상 지직했다고요. 좀 번거롭지만 난해하기 때문에 하나 하나, 차근 차근 봅시다. 예레미야7장4절 봅시다. 교회와 관련해서 보셔야 돼요. 자, 성경해석은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합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무엇을 믿지 말라? 거짓말을 믿지 말라. 하지요. 이런 말이 어려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하나님이 성전을 건물로 지어놓고, 또 기존의 성전이 있잖아요. 그럼 성전이 졸지에 한 개가 아니고 두 개가 되지요.

두 개 되어놓고, 둘 중에 어느 것이 성전이야. 라고 한다면 가만히 있어 봅시다. 어느 것이 마음에 와닿지? 이 성전이네. 이렇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성전은 지금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도 예루살렘에 성전이 하나밖에 없다고요. 하나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어디서 만난다? 성전에서 만나지요. 주의 이름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과 자기 백성과 더불어서 한 팀을 이루어서 누구를 만난다?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나중에 그 한 팀이 아들이 되지요.

아들이 자기의 형제들과 한 팀이 되어서 아버지를 만나는 거예요. 성전이 지금 둘이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밖에 없는데 이것이 성전이 아니라면 그러면 졸지에 하나님의 말씀은 중간에 하나님 말씀 자체가 스스로 포기하고 중지시키고, “아이고, 인간들 때문에 안 되겠네. 포기한다.” 이런 경우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잖아요. 말씀은 반드시 말씀대로 완성되는데 이것이 성전 아니라면 그런 다른 대안적인 성전이 있느냐 말이에요. 없어요.

여기서 이곳이 성전이 아니니까 문 닫아라, 이 말 아닙니까.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야기하기를.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던 그 당시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럼 진짜 성전은 어디 있는데? 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어디서 만나는데?” 할 거다 말이죠.

그러면 그 정답은 뭡니까? 성전이 아니고 성전이 깨어진 그 현장이 진짜 성전이 세워지는 곳이지요. 그러면 어떤 식으로 세워지는데? 또 궁금해 하겠지요. 이 말은 그럼 어떤 식으로 우리 성전이 부서지는데? 같은 말이에요. 있는 성전을 부수는 절차가 없던 성전이 만들어내는 절차와 일치됩니다. 같아요.

마태복음 16장17절 봅시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말은 뭐냐, 아버지가 너를 찍었어! 이런 뜻이에요. 베드로 이름이 시몬이잖아요. 베드로는 자기를 뭐로 부릅니까? 시몬이라고 부른다고요. 이건 누가 불러 준 거예요? 시몬의 혈육, 아버지가 아들 되는 시몬보고 시몬아! 하고 이름 지어서 시몬을 부른 거예요. 시몬아! 하고 불러 준 거예요. 그러나 그건 그 계통은 혈육적인 계통이라는 말이지요.

혈육적인 계통에서 베드로 속에 누가 들어 있느냐, 아버지가 들어있겠지요. 자기 이름을 아버지가 지어줬기 때문에. 그래서 아버지 이름으로 살잖아요. 아들은. 죽은 아버지를 의식하면서 죽은 아버지 보라는 듯이 살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는 내 안에 살아있다, 이런 식으로 하지요. 노골적으로 마귀가 살아있다 하면 되는데 아버지가 살아있다 같은 말이에요. 아버지가 살아있다.

엄마가 아직도 젊은데, 아들이 죽으면, 나는 땅에 못 묻는다. 나는 내 가슴에 묻는다. 이러고 있잖아요. 세월호 하든지, 세월호 제2탄 이태원에 가서 하든지. 뭐 하나 세워놓고 거기서 내 아들 찾는다고. 바깥에는 아들을. 이거 참 설명을 해야 돼요. 엄마 파마했습니다. 엄마가 이리 있는데, 월남치마 입고 있는데. 여기 아들이 있잖아요. 분명히 아들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요. 애가 학교가도 어디가도 엄마는 항상 애하고 관련성을 짓습니다. 자기 안에 아들이 있어요. 아들과 자식들이 자기 안에 있다고요.

그런데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말이죠. 죽었을 때, 교통사고는 아들을 육체를 데려가지 아들에 대한 기억은 데려가지를 못해요. 그래서 이 기억이 더욱 더 강화돼요. 내 아들과 비슷한 애가 있으면 내 아들인가 하고. 아, 참 내 아들 죽었지. 하고 점점 미쳐가는 거예요. 이걸 뽑아낼 수가 없는 겁니다. 아들 안에 뭐가 들어있다? 엄마가 아들 키웠으니까 엄마가 있겠지요. 엄마가 있으니까 아들과 엄마 사이가 언어가 대화가 통하는 거예요. “니 뭐라고 부르나?” “엄마” “옳지. 내 자식, 아들!” 부르지요. 대화가 통한다는 말은 둘 다 공통요소가 같이 통하는 동일한 요소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들이 죽어버리면 뭐도 죽은 거예요? 아들 안에 있는 엄마 자화상도 같이 죽어버린 거예요. 자식 없이는 못살겠다는 말이 이 말이에요. 자식은 죽었지만 내 안에 있는 자식은 살려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맨날 자기하고 대화하는 거죠. 심지어 꿈속에서도 대화하는 거예요. 주위에서 말려도 안 됩니다. 내 속에 있는 타자는 내 욕망에 원천이기 때문에 인간이 욕망이 없으면 죽은 존재잖아요. 내가 사는 이유, 보람, 의미, 내 속에 있는 욕망의 대상이 나로 하여금 사는 원기, 힘을 붙들어주지요. 내가 잃어버리지 못한 그것이 나한테 흑염소가 되는 거예요. 보약이 돼요.

내가 살게 하는 이유는 너가 있기 때문이라.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 너 사진 붙여놓고 잠을 자도 중국집 배달하며 살아도 달려갈 거야. 조금만 기다려. 너한테 달려갈 거야. 그 노래가 남자들 심금을 울릴 수밖에 없지요. 내가 사는 것은 너 때문이야. 니가 내 존재의 의미야. 제목이 아닙니까.

인간은 나를 지탱하는 거기에 어떤 듬직한 바위덩어리 같은 게 있어요. 바위덩어리. 그걸 교체하는 거예요. 이걸 교체하는 거예요. 이거 인간 힘으로 뽑아낼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연락와가지고 어디를 공격하느냐, 그걸 폭파해버립니다. 이게 우크라이나에요. 이게. 러시아 미사일이 와서 여기를 폭파해버려요. 아니면 여기 터키 지진현장으로 만들어버려요. 완전히. 320고리를 완전히 종이를 찢어놨어요. 올리브농장이 완전히 협곡이 되고 말았어요. 주께서 찢어가지고. 완전히 명태포 찢은 것처럼 찢어놔 버렸어요. 쫙 찢어놓잖아요. 이럴 때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가, “누구요?” 라는 질문이에요.

“누굽니까?”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 아니에요. 인간이 자기가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게 있으면 말씀을 지켜서라도, 말씀을 위해서 지키는 게 아니에요. 주님을 지키는 게 아니고, 내 귀한 걸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말씀 지켜서 혹시나 복이 올까 지켜주는데. 그 자체를 예수님보다, 십자가보다 더 소중한 게 없다는 것을 미사일 내용에 실어가지고 드론 공격해가지고 이걸 폭파한다고요.

“너를 공격하는 그 분보다 더 소중한 건 없어.” 이게 말씀의 기쁨입니다. “시몬아!” “예” “이름 바꾸자.” “너그 아버지가 너를 만든 게 아니고 내가 니 만들어줄게. 내가. 니 안에 너가 나에게 드리는 떡이 되고 제물이 되게 할게.하나님의 거룩한 제물에 베드로는 떡으로 섞여서 하나님께 기쁘게 받을 만한 인간 내가 만들어줄게.” 그 때 베드로는 이게, 아! 내가 착실해야 되는 줄 알고 그렇게 오해했어요.

그런데 그 착실한 것. 마태복음16장 그 뒤에 나오지요. 21절부터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뭘 몰랐느냐 하면 내가 살아있는 나를 하나님께서 교회로 반석으로 만들어 줄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내 안에는 내가 원하는 게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의 죽으심이 시몬 안에 들어오면 시몬은 베드로가 돼요. 그게 반석이 돼요. 교회의 반석이 된다고요.

베드로의 이름은 시몬의 이름이 아닙니다. 야곱의 이름은 이삭이 지어줬지만, 이스라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이 베드로 속에 들어온 거예요. 그게 베드로에요. 그러니까 껍데기 되는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여, 그러지 마옵소서. 그게 주께 미치지 않겠습니다.” 하는 순간 드디어 베드로가 끄집어내준 시몬이 끄집어내지 못한 정체가 툭 튀어나왔어요. 사탄아! 악마야! 니가 그동안 베드로 주인 노릇한다고 많이 힘들었지. 그러니까 혈통 자체를 악마가 완전 장악하고 있으니까 어느 누구도 자기로부터 자기를 해방할 수 없어요.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를 부정하라. 마태복음16장 23절,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거 예수님 따른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베드로 3번 부인했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베드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 되게 하는 게 베드로에게는 없어요. 베드로 자체가 교회의 규칙이 되게 하기 때문에 그래요. 베드로가 교회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 베드로에 있었던 베드로의 실패 있었잖아요. 베드로 안에 사탄이 들었던 그 자체를 규칙의 요소로서 베드로를 집어넣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다가 베드로를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재료로.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할 것도 없이 그냥 쓱 들어온 것뿐이에요. 그러면 전에는 바깥에는 내가 주인공이고, 안에 또 다른 타인이 있었지만, 주님이 바깥의 주인공이고 내가 주님의 타인으로서 주님의 요소를 구성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주되심은 베드로로 인하여 구성된다. 이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주되심을 구성하고 있는 거예요.

자, 교회가 이렇게 이루어지는데 이게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못하고 내 교회는 내가 일으킨다고 하는데 이게 바로 사무엘하7장13,14절 봅시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그렇게 되어있지요. 16절,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이게 여호와의 집이 여호와가 집이라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어디에 들어오시는가,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그러니까 아버지가 등장해서 친히 아들을 만들면 그 아들 속이 아버지가 계시는 성전이 되는 방식. 그리고 그 규칙에 그 자체로서 나중에 성도가 이 규칙 자체가 돼요.

그러면 인간은 못하는데, 인간은 못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사도행전 한 번 봅시다. 사도행전2장1,2절 봅시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이렇게 되어있지요. 고린도전서10장1,2절에서(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스라엘 전체가 홍해를 건너왔는데 집단세례를 받은 걸로 간주하고 있어요. 집단세례.

그들은 그냥 이미 바다 위 갈라진 길을 건너왔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단체로 세례 받은 걸로 간주해 버려요. 개개인이 물을 찍은 게 아니에요. 개인은 없어요. 이제 개인은 없어요. 신약에는 모든 인간은 다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개인의 가치, 개인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냥 전체 자체가 망해야 마땅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주께서 어떻게 조치하느냐에 따라서 이제 누가 선택받고 누구는 버림받고, 이제 그 문제만 남아있어요. 선택받은 사람은 신나는 거예요. 신나. 신나라. 신나라. 아주 신나는 거예요.

물 위를 통과해야 되는데 오순절날 뭐냐, 하늘에서 5층 아파트 위에서 물을 확 부어버리면 갑자기 목 내놓다가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진 거예요. 보통 갑자기 부자 된 걸 뭐라고 합니까? 벼락부자지요. 벼락부자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벼락거지에요. 벼락거지. 갑자기 거지되는 거예요.

오순절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례 받는데 무슨 세례를 받느냐, 집단적으로 성령세례를 갑자기 받아버려요. 성령세례. 물세례 받은 거 무효입니다. 이제 물세례는 잊어주세요. 무효에요. 갑자기 성령세례를 받아버려요. 성령세례를 받는데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그런 건 따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세례 받을 때 그 모양이 뭐냐 하면 ⓵번 비둘기 ⓶번 불 어느 쪽입니까? 불이지요. 그러면 이게 뭐냐, 성령 받은 자체를 뭐냐 하면 불 제단으로 사용한다. 이 말이에요. 불이 떨어지는 거예요. 위에서 불이 떨어지고 제단에 있는 나는 홀라당 다 타버리고. 이것은 뭐냐 하면 아까 처음에 한 것처럼 주체 갈아타기!

주체 갈아타기가 어려우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주체가 아닌 이유가 언젠간 돌아갈 곳이 내가 아니잖아요. 내가 나한테 돌아가지 않아요. 나를 지으신 분에게, 나를 지으신 분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그래서 누구나 주체가 아닌 거예요. 그러니 쉽지요. 좋은 호텔 있어요. 주모, 국밥 하나 말아주소. 괜찮은 주막도 있어요. 하지만 본향은 본집은 아니잖아요. 본집은.

본집이 내 이름으로 등록된 집이 아니거든요. 누구 이름이냐, 주의 이름으로 등록된 집이기 때문에 내 이름은 임시방편이고 언젠간 내 이름을 버려야 됩니다. 내 이름을 버리면 나를 버리는 거예요. 내 주체를 내가 버리는 거예요. 인생은 나그네의 길이니까. 인생은 나그네니까.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고,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고, 신천지 떠났다가 바빠. 어떻든 간에 가는 쪽은 나를 위한 것은 이미 성령세례를 인하여 나는 항상 불 속을 통과하는 것처럼 수시로 나 자체의 의미와 가치를 불살라 버리는 그러한 터널 속으로 우리는 통과중입니다.

아까 봤지요. 베드로야,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못하고 니가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사람의 일은 곧 나의 일은, 나의 일을 생각하면 주께서 그걸 무산시키고 그 다음의 일을 생각하면 없애버리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온 문제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불 사른다. 그러면 그 불사르면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냐, 그럼 우리는 필요 없네. 필요 없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가면. 가면 노릇하는 거예요. 우리가 가면놀이 해야 돼요. 이 말은 뭐냐, ‘은폐장치 없으면 진리도 없다.’ 은폐장치가 없으면 진리도 없어요. 가면이 진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줘요. 가면이. 우리는 가면이에요. 그런데 가면이 꼭 필요해요. 가면이 없으면 진리도 없는 거예요.

가면은 은폐장치 또는 가면. 특징은 뭐냐 하면 가짜라는 말이지요. 가짜, 엉터리, 헛된 것, 이런 것. 이걸 결합시키면 엉터리 가짜가 없으면 진리도 없잖아요. 진리가 진리로 등장하기 위해서 가짜인 우리를 성실하게 가면으로 은폐용으로 사용한다는 것. 이게 규칙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뭐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죄 있는 육신으로 왔잖아요. 이상하게 죄가 없는데 꼭 가는 길은 최고의 극악무도한 강도와 더불어 같이 십자가에 달리지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에 대해서 아버지의 형상인 줄을 모르고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줄 모르고 사람들은 예수님한테 다 속아 넘어간 거예요. 심지어 누구도 속아 넘어갔는가, 성령 받기 전에 제자들도 다 속아 넘어갔지요. 누가복음 끝에 보면 누가복음24장18절에 보면, 글로바라는 제자와 또 한 명의 제자가 예수님 옆에 딱 붙어서 같이 갔어요. 그런데 예수님인 줄 몰라요. 왜 모르는가, 제자들은 자기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을 자기가 속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한테 속아 넘어가야 되는데 인간은 고집이 있어가지고 나는 나다! 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속이기 위해서 왔는데 우리는 한 고집을 하기 때문에 안 속으려고 해요. 자꾸 안 속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환상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안 속으려하는 자아는 누가 만들어줬는가, 내 살면서 살아왔던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아까 올라오면서 꼬마들이 있었어요. 저는 집사님한테 물었어요. 이 꼬마들이 평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겠느냐, 이 꼬마들은 자기가 눈에 보이는 거, 코앞에 있는 거 그게 다에요. 남자 애들은 내 구슬이 몇 개지. 나중에 그 애가 어른 되면 펀드 몇 개 였더라. 이렇게 되지만. 애들은 펀드까지 생각 못하고 구슬치기 잘 안하지만 학원 다닌다고. 여자애들은 내 인형 집에 잘 있을까. 내 언니가 가져가지는 안았을까. 그르니까 생각하는 폭이 좁아요. 폭이 좁다고요. 좁은데 공통점이 있어요. 인간은 자기 것만 챙긴다는 것. 이거 백프로 가짜입니다.

그래서 잘 사는 집 애들이 학교 가서 못사는 집 애들하고 이야기할 때 이야기 안 통하는 이유가 그 애들이 그냥 허름한 뒤떨어지는 빵을 하나 먹어도 그렇게 고마워하는 것 보고 ‘이상하다. 그거 주면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데. 저걸 왜 고마워하지?’ 납득이 안돼요. 납득이. 에 나오는 납득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자아가 환경에 따라서 이게 구성된다는 것. 아까 했지요. 나는 남이 구성해주는 거예요. 그게 가짜에요. 애들이 주의해야 될 것은 잘해주는 어른한테 따라가요. 유괴당해요. 왜? 그게 애들의 한계니까요. 종잡을 수 없어요. 내가 누군지 종잡을 수 없어요. 그래놓고 그게 가면인데. 그걸 지킨다고 그게 자기의 삶의 모티베이션, 삶의 동기가 되고 말았어요. 내 가정 내가 지키는 것이 나는 사는 이유다. 지진이 일어나야 되는데. 서울에 지진 9.8 일어나라.

촌에서 서울 살려고 서울사람 되려고 다 올라왔는데 지진이 일어나버리면 차라리 촌이 더 낫지요. 늘 불안을 안고 공포스럽고 그런데 오순절이라는 건 뭐냐 하면 오순절 성령세례는 뭐냐 하면 나는 작고 나를 덮친 것은 크고. 이거에요. 큰 것에 그러니까 로마서에 한 것처럼 하나님의 의를 바케스로 부었다고. 바케스라는 말은 안 나오지만 원뜻이 그래요.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착하게 살면 의가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의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의를 줘서 부어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의가 차고 넘치는 거예요. 의가 나라는 인간을 통해서 늘 차고 넘치는 거예요. 만화에 보면 열심히 일하면 땀방울이 마구 튀어나오잖아요. 흘러내리는 거 아니고 땀방울이 튀어나와요. 하나님의 의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걸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살아야 돼요. ‘아, 내가 그 규칙 자체구나!’ 오늘 제목은 ‘규칙 그 자체’ 내가 규칙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내가 규칙 그 자체에요. 왜? 나는 가면이니까. 내가 가짜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도대체 누가 알려주겠어요? 뭔가 덮쳐줘야 돼요. 주님의 영이 내 속속들이 스며든 주님의 영이 진짜입니다. 그게 진리에요.

진리는 가짜를 통해서만 이 땅에 흔적을 남깁니다. 가짜를 통해서만. 그래서 전에 설교를 했지만, 수련회에서도 했지만, 세례요한보고 “뭐야? 너? 뭔데 이런 짓을 해?” “나, 아니야.” 참 질문한 사람들 대단히 당황스러울 거예요. 왜냐하면 질문 할 때 나는 이 정도, 나는 이것인데, 너는 무엇이냐고 가운데 괄호를 집어넣고 묻는 거예요. 너는 한 달에 월급 얼마 받아? 이런 뜻이에요. 나는 이 정도 받거든, 이라는 것을 자기는 딱 감춰놓고, 니가 나보다 더 잘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돈 얼마 받지? 월급 얼마 받지?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우리 답변하는 것은 “돈? 나 돈 아니야. 월급? 나 월급 아니야.” 그런 니 누구야? “나는 주님을 증거 하는 가짜야.” “믿음 좋으네.” “나, 믿음 아니야.” “소망” “소망? 나 소망 아니야.” 바로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물세례는 사람을 거기다 익사시켜요. 죽여 놓고 살려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그게 어제 수요설교였어요.

주님의 심판주요, 구원자요, 그 활동 기능을 자기 사람 안에서 그걸 순환시킨다 이 말입니다. 이게 뭐냐, 주기적이지요. 그래서 출발은 뭐 부터 한다? 나의 일부터 시작해요. 항상. 출발은. 해가지고 주께서 관여해서 이게 주의 일로 바뀝니다.

나의 일은 목적과 목표가 있기 때문에 늘 불안해요. 안되면 어떻게 하나, 깨지면 어떻게 하나, 망하면 어떻게 하나, 나 망하면 안 돼! 안 돼! 하다가 그런 나의 일을 들어가게 하고 주의 일을 만나서 망하던 좋든 죽든 살던 그 자체가 주의 일 됨에 감사가 나오도록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데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제단에 죽어 마땅한 제사장들이 자기 제사장을 살리기 위해서 제사 드리다가 선지자에게 혼줄 나는 그 대목을 보았습니다. 날마다 우리 주님 앞에 혼줄 나는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의 백성인 것을 이제는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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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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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