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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230216a말1장10절(규칙 그 자체)-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말라기

안양20230216a말1장10절(규칙 그 자체)-이 근호 목사

말라기1장6절부터 보겠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7절에 보게 되면,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신기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건넸다는 것이 신기해요. 말을 건넸다는 그 자체가 신기해요. 책망이 들어있던, 꾸중이 들어있던, 나무람이 들어있던,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쪽에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길이 없어요. 발견할 길이 없는데, 그 하나님이 자기 존재를 존재성을 찾을 수 없는 분이 먼저 연락을 취해왔다는 거예요. 이건 충격이지요. 인간의 눈에는 사람밖에 안보이지요. 대자연, 자연, 사람, 그게 전부에요. 아침에 눈만 뜨면 만나는 것이 대자연과 그 속에 움직이고 있는 인간들. 식물, 동물들, 동네 개들, 이런 것만 보는데. 누구로부터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쪽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은 우리만 살아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만.

인간은 뭘 할 때 근거가 “나는 여기 살아있다.” 나는 여기 살아 있다가 되거든요. 그러면 살아 있다, 를 확인하는 쪽에서 인간은 외부에다가 시선을 보냅니다. 시선을 보내서 시선을 보낸 것을 도로 가져와요. 그렇게 되면 나는 여기 살아 있다가 굳히게 되는 겁니다. 살아있는 거 맞네! 오래간만에 친구 만나면 뭐라고 합니까? “살아있네!” 살아있다. 반갑다! 이런 뜻이지요. 부산 말로. 살아있네! 나는 내가 여기 살아있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행동은 본인이 늘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인간은 행동하게 되어있어요. 깊은 산속에 있다가도 가끔 산에서 내려오면 자기가 살아있음을 감을 잡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흔적들이 자기한테 시선을 보내는데 난데없이 뒤통수치듯이 여기서 연락이 온 거예요. 누구한테? 하나님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연락이 와버리면 내가 여기 살아있다 보다 더 월등히 살아있음. 내가 살아있는 것은 제대로 살아있는 게 아님을 들추어내는 더 큰 살아있음.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지요.

내가 살아있다는 그 수집에 내 증거를 수집하는 여기에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았던 거예요. 내가 눈에 보이는 것만 주워 모아가지고 "나 살아있는 거 맞잖아." 라고 하고 싶었는데 뒤통수치듯이 내가 수집하지 않은 다른 쪽에서 어떤 증거가 와버리면 하나님의 살아있음이 내 속에 과연 내 살아있음을 확인해 줄 수 있느냐, 장담 못하지요.

내가 수집한 증거는 내가 살아있음을 확정하는 증거가 되는데, 내가 원치 않는 게 왔을 때, 원치 않는 연락이 와버리면 내가 제대로 살아있는 것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말이지요.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아주 쉬운 예니까요. 자기 남편과 아내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 애들 둘 하고 네 식구가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딩동~ 해가지고 애 하나가 딱 들어온 거예요. “니 누구고?” 이렇게 하니까 “울 아버지 집인데요.” “니 아버지 이름이 뭐고?” 하니까 이름 대는데 보니 자기 남편 이름 댄다 말이죠. 자기 남편의 혼외자식이 되는 거예요. SK 재벌 그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그럴 때 그 아내가 비참함을 느끼는 겁니다. 나는 그 애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나는 행복한데, 나는 살아있는데, 자기가 행복하게 살아있다고 확정했는데,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새로운 증거가 투입되니까 나 꽉 죽어버릴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갑자기 자기가 살아 있다, 를 자폭, 포기하고 싶은 거예요.

“내 인생 가짜였어.” 내 인생 가짜였어. 추가로 내가 다듬을 수 없는 다른 요소가 왜 다듬어 놓은 내 안에 왜 끼어드느냐 이 말이지요. 그럼 이건 뭐냐, 내 행복한 자아는 균열이 일어나지요. 균열. 내 살아 있다, 의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쪼개지는 거지요. 그래서 주님이 보낸 연락책은 주님이 보낸 그것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은 파편의 집합체 이걸 증명하는 겁니다. 쪼가리들을 억지 모아놓은 것. 본드로 붙여봐야 본드도 소용없는 거예요.

뭔가 외부에서 탁 쳤을 때 다 깨지는 거예요. 양성자가 중성자를 탁 쳐버리면 중성자가 깨지면서 숨어있던 여분의 물질이 에너지로 변화는 거 이게 원자폭탄입니다. 잘 결합이 되어서 단단하다고 자부했는데 외부에서 와버리면 이게 깨어지는 겁니다. 균열되지요. 뭐가? 나의 인생, 내가 살아있는 게 허구였다. 나는 내 살아있다는 것을 너무나 철딱서니 없는 내가 어린아이같이 내 눈앞에 있는 것만 주워놓고 살아있다고 그것도 일방적으로 자부했구나! 자기에 관한 자기 착각. 평생을 자기 착각 속에 빠졌다.

그런 의미에서 선지자의 존재, 이스라엘에게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감사해야 되고 행복해야 되는 겁니다. 다른 민족은 이런 게 없어요. 왜냐하면 언약의 상대자가 아니기 때문에. 언약의 상대자에게 계속 연락이 오는 거예요. 공식 하나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생산물입니다.’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조립하면 안돼요. 하나님의 언약, 모세율법 다 포함되는 겁니다. 특히 오늘은 제사법을 이야기할 텐데.

제사법에 의해서 제사법이 살아있는 단체가 될 때 이스라엘이에요. 만약에 제사법에 제대로 살아있지 않으면 그러면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늦게 오셨기 때문에 다시 해야 될 타이밍이지요. 다시 합시다. 다시해도 새롭게 들어가요.

말라기 할 때 말라기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연락을 줬다는 게 평소에 우리가 내가 원하는 것만 수집해서 나라고 우겼던 그것을 파탄시켜 버리지요. 그 내용이 어떤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들어오는 말씀에 의해서 완전히 파편처럼 산산조각 나버리지요. 그럼 산산조각 나버리고 그 나버린 그 현장에 미사일이 와서 아파트를 공격할 때, 우크라이나 아파트를 공격할 때 그 현장에 남아있는 게 뭐냐 하면 미사일 잔해잖아요. 그게 말씀이 남아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연락이 올 때 말씀으로 연락을 주고, 그 말씀은 우리가 나 위주로 살았던 내 인생이 허구라는 것을 완전히 들추어내면서 파탄시켜 버립니다. 나를 산산조각 내버리지요. 내 허구 버리고 그 안에 뒤통수치듯이 날아왔던 그 말씀이 그 현장에 서게 되고 그 현장 그 쏟아진 말씀이 스스로 자체적으로 하나의 조립이 되어버리면 그게 하나의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I'll be back! 다시 돌아온다! 터미네이터. 거기에 보면 터미네이터3에 보면 강력한 무기를 쓰지요. 적들이 터미네이터를 죽이겠다고 쏘면 뻥하고 구멍이 뚫립니다. 그런데 이게 액체 물질이 돼가지고 구멍이 뚫려가지고 허물어졌는데 뭐 10초도 안되어 가지고 자체적인 조립을 해가지고 공격 맞기 전에 그 인물로 다시 멀쩡하게 재현해요. 섬뜩함을 느끼는 거예요. 죽으라고 쏘았는데 안 죽고 멀쩡하다 말이지요. 섬뜩함이지요.

인간이 하나님께 폭탄을 쐈습니다. 하나님이 죽겠어요? 안 죽겠어요? 죽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죽습니다. 죽는데 그 죽음 가운데 사흘만에 멀쩡하게 살아난다면 이건 섬뜩함이지요. 이 섬뜩함이 나의 자리에는 없어요. 그러면 내 자리를 누구한테 내줘야 되는가, 죽었다 살아나신 그 분의 자리로 양보해야 돼요. 내놔야 돼요. 그 섬뜩함을 위해서, 그 분을 내놔야 된다고요.

그리고 그 죽었던 하나님은 섬뜩함의 더 섬뜩함으로서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여주게 됩니다. “니가 나를 죽였잖아.” 그게 유명한 말이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내 다리 내놔라!” 하는 이야기지요. “니가 나를 죽였잖아.” 이 땅에 진정 살아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만 살기 위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죽였을 때 그 인간의 죽임을 당한 자만이 진정 영원토록 살아계신 영생이 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등장은 그렇게 나타나는 거예요.

인간이 찾는 하나님은 우상이지요. 어제 수요일 설교에 의하면 전부 우상입니다. 그거 말고 꼭 인간이 하나님을 죽여야 돼요. 죽이는 방법은 지금 내가 구축한 내 자리에는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만 고스란히 남아있어야 되고 그 외부 것은 끼어들면 안돼요. 왜? 인간은 자기가 파괴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생 내가 건사하려고 살아오지 파괴당하려고 살지는 않잖아요.

지난 강남강의에서 했지요. 주께서 저는 자, 눈 먼 자, 소경, 병신, 아픈 자 초청한다 해가지고 자기가 자기 눈을 찌를 수는 없잖아요. 찔러가면서 주께 오지를 않는 거예요. 파괴되는 척하면서 파괴 안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천국에 합류하려는 이 심보, 주님 앞에서 그거 주님 앞에 들통 나야 되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라 하면, “부인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척하면서 어디를 다리를 슬슬 끼어들라고.

옛날 어릴 때, 형제간이 많을 때, 남자 형제들 한 방에 다 집어넣고, 여자 자매들 다 한 방에 집어넣잖아요. 부모는 이불 한 장만 툭 던져놓고 알아서 추운 밤을 지새라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형발이지요. 형들은 동생들 차버리고 지 혼자 이불 둘둘 말아서 세바퀴 반 돌면 동생들 한데 다 놓는데. 그런데 새벽2시 되어서 추워서 발을 하나 쓱 넣으면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깨는지 발가지고 들어오지 말라고 발길로 차버립니다. 참, 옛날이야기에요. 6.25까지는 안가지만 그 10년 정도 그 때.

주님 나라 좋다고 쓱 끼면 안돼요. 차 버려요. 제가 지난 화요일날 장례식을 갔는데 장례식을 가면서 죽음이 좋은 걸 한 가지 발견했어요. 죽음이 좋은 이유. 발인에 운구도 하는데. 죽음이 좋은 이유 딱 한가지였어요. 리무진 탄다는 거. 보람상조에서 제공한 리무진 탄다는 거. 딱 그거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화장터로 가면서 리무진으로 가는 걸 봤어요. 문제는 죽어야 탄다는 거예요. 산채로 한 번 타고 싶은데 산채로 탄다면 검은 색 리무진 타지 않겠지요.

인간은 계속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고집하는 것은 나는 여기 살아 있다를 유지하려 하는 겁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는 내가 살아있는 것에 부합되는 증거만 찾아요. 그걸 모으지요. 그런데 그게 뭐냐 파편이에요. 인간은 자기 위주로 만든 파편만 조각, 조각들의 집합체, 어설픈 집합체, 하나님의 말씀을 딱 던지게 되면 그건 완전히 당구공이 다 흩어지는 것처럼 하나치면 당구공이 전부다 저 구석까지 다 들어가 버렸어요. 다 깨지고 다 와해되어버려요.

그래서 어제 수요설교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캠퍼스 위에 그린 그림이라 했지요. 평생 그림을 그렸는데 이게 천이 낡아서 그럼 그 위 있던 그림도 찢어진 천과 함께 조각, 조각 균열이 일어나지요. 나라고 했던 초상화에 균열이 일어나지요. 다 조각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여겨야 돼요. 왜냐하면 말라기 6장7절에서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므로, 라는 말씀을 주셨잖아요.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말씀이 왔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뭘 원하고 있다는 거예요? 깨끗한 떡을 원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 하면 안돼요.

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언약의 상대자, 자기 백성에게 뭘 원한다? 하나님이 잡술만한 떡을 원한다, 라는 것이 분명하잖아요. 분명. 그러니 기쁨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이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다는 그 점.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하나님이 누군가도 분명해지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여기면서 흔들리는 우리의 자아도 흔들릴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뭘 원하는 줄 모르겠어...” 이렇게 중얼거린다는 것은 내 인생을 아무리 오래 산다 할지라도 불안정하다는 뜻이에요.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거예요. 확정된 주의 뜻을 모르는 이상은 인간의 마음은 그 방황 자체입니다. 방황이 심하면 공황이 되지요. 언제까지 방황할 거예요. 방황하면 안 되지요.

여기서 바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 바로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한테 주었다. 그게 왜 기쁜 소식이냐, 하나님께서 인간이 더러운 떡을 나에게 줬다. 하나님의 식탁을 너희가 경멸히 여긴다. 라는 말씀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준비된 그 다음 절차가 있다는 거예요.

뭐냐하면 제대로 떡을 줄 사람을 여기다가 니 자리 말고 니 비키고 거기다가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누군가가 심겠다는 뜻이에요. 기쁜 소식이에요. 반가운 소식입니다.

내 자리에 전에는 말씀만 왔는데, “떡 제대로 드려! 더러운 떡 주지 마!”라고 했는데 이제는 말라기가 마지막 선지자잖아요. 그 다음에는 아예 누군가 와서 깨끗한 하나님의 받을만한 제대로 된 떡을 바로 어느 자리에서 드린다? 내가 있던 내 자리에서 하나님께 드릴 분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게 뭐냐 메시아는 모든 예언의 완성이라는 뜻이에요. 말라기가 예언이잖아요. 그럼 예언은 그냥 줬다. 누군가 예언을 흡수하고 통합한다.

누군가 이 예언을 인간이 못해서 버려놓은 예언을 주께서는 본인이 가져가서 그걸 대신 완성하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준 거예요. 우리를 거쳐서 “니 못하지? 내가 할게.” 요 절차를 말라기가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분이 오셔서, 그 분이 오시게 되면 떡을 제대로 못 드리는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첫 번째, 나는 떡을 제대로 못 드린다. 두 번째, 어떤 분이 내 자리에 오신다. 오셔서 하는 것은 뭡니까. 내가 이루지 못한 말씀을 대신 다 이루었다. 다 이룬다. 세 번째 중요합니다. 나는 떡이다.

처음에 나는 떡을 드릴 사람이라고 되었는데, 그 다음에는 나는 떡이 되는 거예요. 나는 떡이 되려면 두 번째 분이 나에게 뭘 줘야 돼요? 아버지가 받으시는 떡을 나에게 공급하면 돼요. 나에게 제공하면 되겠지요.

마태복음26장26절 한 번 봅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말라기에서는 하나님이 “떡 다오! 떡을 다오. 너희들이 떡을 나한테 줘.” 이리 되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26장26절에 보면 거기에 모든 말라기 말씀을 어떤 식으로 이룬다고요?

떡에 관해서 떡이 관련된 채 이루어지는 모든 말씀은 우리가 떡을 제공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중간에 있는 중보자가 우리에게 아버지가 받을 떡을 우리에게 그저 주시는 거예요. 옛날 우리나라 조선시대 전통 예식 할 때 족두리 쓰고 예식 할 때에 그 때 신랑, 신부 마주 절하고 술 나누고 대추하고 밤 할 때 준비 어디서 합니까? 신부가 다 합니까? 신부가 하는 게 아니지요. 혼주 측에서 준비하지요. 예식을 예식답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 제공해놓고 폼만 내지요. 폼만. 신부 새신랑한테 술 한 잔 드려야지. 이거 누가 해요. 지가 집에서 밀주 담가서 합니까? 그저 다 해잖아요.

하나님이 말씀대로 받을 만한 떡은 내 떡을, 너희들은 더러운 떡을 나한테 줬다는 말은 하나님이 떡 받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제대로 가자는 뜻이에요. 제대로. 제대로 가려는 필요한 그 떡은 우리가 준비하는 게 아니고 우리 자리에 오신 다른 우리 대신 두 번째 아담 되시는 마지막 아담 되시는 주님이 우리 자리에 오셔가지고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그것을 두 번째 아담이 완성시켜서 뭘 줍니까? 우리에게 떡을 주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떡을 주게 되면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세 번째 되는 내가 곧 내 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떡이 있는, 내가 곧 떡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바칠만한 떡이 되는 겁니다. 떡이 되어버리면 첫 번째에서는 나는 떡을 더러워서 제대로 못 주니까 나의 주체, 나의 자아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 한계성이 드러났지요. 그야말로 파편의 집합체에 불과하구나. 하다가 이렇게 주님께서 와서 뭐가 되느냐 이건 뭐냐 하면 내가 떡이다. 이 말은 내 안에 다른 주체 곧 진짜 주체. 하나님이 인정하는 진짜 주체가 내 안에 나를 잠식했고 나를 점령하신 거예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주체 바꿔치기가 성사된 겁니다. 내가 떡이다. 라는 누가 했느냐 하면 요한복음6장에서 예수님이 하셨거든요.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할 때, 그 당시 요한복음6장에서 사람들은 좋겠네. 본인은 떡이라서. 그럼 우리는 뭐냐? 떡 아니지요. 제자들은 떡 아닌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은 떡이다 하는 자체가 이게 말씀이 되어버리면 나중에 말씀의 완성이 되어버리면 말씀 완성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집어넣으면 앙꼬처럼 붕어빵 속에 앙꼬처럼 그냥 들어오는 거예요. 들어오면 나의 주체는 이제는 주님의 주체로 바꿔치기를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주님은 떡이다가 뭐가 돼요? 나는 떡이다가 돼요. 왜냐 하면 내 안에 나만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떡을 왜 그리 좋아하느냐. 떡이라는 것은 레위기에 보면 양식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왜 떡을 좋아하느냐, 7절에 보니까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을 경멸히 여겼다. 여기 식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떡을 나눈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떡을 나눴잖아요. 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남이 아니다. 가족이다. 식구다. 이제는 니가 내 세계 속에 구성원이다. 그럴 때 내 세계를 형성하는 요소가 공통적인 요소가 너 안에도 공유되어야 된다. 동일한 동질성을 가진 본질이 네 속까지 삽입되어야 돼요. 들어오는 거예요.

마치 아담이 지은 죄가 아담의 후손에 샅샅이 침투되어서 아담만 죽은 것이 아니고 대대후손, 대대자손, 낳고서 살다가 죽고, 창세기5장 말씀, 아담이 몇 년동안 살다가 죽고 나오지요. 죽음을 계속 대대로 전달, 전달하는 전달체로서 기존 아담이 있다면, 새로운 아담은 아버지께서 흡족하게 받아서 율법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건 복이 돼요.

복의 전달체로 주님이 작용해서 우리에게 같은 복을 받는 거예요. 식탁을 하나 같이 하게 되면 요한복음17장에서 이걸 하나다. 아버지와 내와 그리고 너희와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라는 것에 우리 속에 주께서 가담시켜 주는 거예요. 우리. 우리 속에.

자, 그러면 난데없이 떡 달라고 하시는 이유가 앞서 그 앞에 절차가 먼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희생 제사가 드려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떡 먹자가 되거든요. 희생 제사. 희생 제사는 먹고 마시는 게 아니에요. 이건 다 태우는 겁니다. 희생 제사는 살벌해요. 하나 남김없이 홀라당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있음을 뭐로 바꾸느냐, 없음으로 바꾸는 겁니다. 어디 위에서? 제단 위에서. 제단은 역할이 뭐냐 하면 모든 있는 것을 없애는 거예요.

자, 모든 있는 것을 없앤다면 죽는 것을 없애면서 여기서 추가적으로 등장하는 게 있어요. 있음을 없음으로 하면서 추가로 등장하는 것.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나오는 게 뭐지요? 에너지가 나오지요.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심판이 나옵니다. 심판. 하나님께서 이걸 얻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의 법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는데 그 심판을 솎아내고 싶은 겁니다. 심판을.

제단은 심판을 위한 거예요. 흡족한 심판을 발취해내기 위해서 제단이라는 이 기계를 설치한 거예요. 밭에서 고추를 땄습니다. 그런데 김치할 때나 음식에 넣을 때 고추가 필요한 거예요? 고춧가루가 필요한 거예요. 고춧가루가 필요하지요. 고추는 어떻게 됩니까? 고추를 들고 방앗간에 가가지고 방앗간 구멍있잖아요. 블랙홀. 거기다가 집어넣으면 덜덜덜하지요. 매워서 코막고 하잖아요. 고춧가루가 떨어지지요. 원하는 게 나온다고요. 원하는 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율법을 다 지킨 후에는 영생 또는 복, 율법을 못 지키면 뭐가 됩니까?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율법이 하나님의 법이 영이 살아요. 빈 말이 아니고 영이 산다고요. 하나님의 권위가 산다고요. 그래서 저주를 필히 생산해야 돼요. 저주를 생산한 현장에만 영생이 생성돼요. 저주 없이 영생 오는 거 없습니다. 같이 나와야 돼요. 같이. 당구 하나를 치면 둘로 쪼개져야 되지, 둘 다 쪼개지듯이, 이 때 율법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모세 율법, 모세 언약. 완성이 된다고요.

자, 다시 묻습니다.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다 했습니까? 제단이 필요하지요. 제단을 집을 지어놓은 것을 성전이라 해요. 성전. 여기 말라기1장10절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너희 중에서 그 다음 나온 단어가 뭐지요? 성전의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이번 1월달에 우리교회 첫 설교의 핵심은 올해 우리교회 목표는 성전 문을 닫는 거예요. 경상도 말로 “그만 치워부리자 고마!” “고마 하자 그동안 많이 묵었다. 그동안에.” 치워버리고 두세 사람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진짜 성전. 진짜 그리스도. 성전 문 좀 닫아버려라. 가짜들아!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럼 절차가 어떻게 돼요. 하나님의 말씀 말라기 자체가 율법이고 예언이잖아요. 출발은 율법부터 시작합니다. 유식하게 말해서 말라기는 어디에 속한다? 다윗 언약에 속합니다. 다윗 언약에 속한다. 다윗 언약의 내용입니다. 다윗 언약이 다윗으로부터 해서 계속해서 중첩이 되고 추가가 되는 거예요. 내용이.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역사와 더불어서 숨겨진 다윗 언약이 계속해서 확산되고 확대되게 되어있어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노아언약 다음에는 아브라함 언약, 그 다음 이삭 언약, 그 다음 야곱언약, 그 다음에 모세언약이 나오지요. 야곱언약에서 국가단위가 되고, 국가단위의 언약이 모세언약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개인이에요. 개인의 가정이고 개인 문제에요. 개인 문제의 요소가 국가 요소로서 합류되면서 개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원리가 국가형태로 등장한 게 이스라엘입니다.

왜냐하면 12지파의 집합체. 열두 지파고. 열두 지파는 야곱의 자식의 숫자가 12이기 때문에.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죽 가면서 이스라엘 처음 할 때 뭐가 필요 없습니까? 말씀이 언약이 작용하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서 국가라는 형태에 있을 때 꼭 필요하다는 그 왕. 왕이 필요 없지요. 왕이 필요 없는데 이스라엘이 그만 그 다음부터 뭘 원합니까? 우리도 왕 주시옵소서. 하지요.

왕을 달라할 때 이스라엘은 이미 물 건너갔어요. “왕 줄게.” 왕 주는데 왕 달라할 때 저주받는 왕을 줘요. 항상 율법의 완성은 저주를 경유해서 영생 갑니다. 바로 영생 가는 법은 없어요. 절차가. 부정을 통해서 긍정이 나오기 때문에 이 저주 받는 왕 사울. 그 사울을 처음부터 깡패고 못난이고 이리 등장하는 게 아닙니다. 굉장히 겸손하고, “난 왕 안 해!” 임무를 줘도 왕 안 한다고 숨어있는 걸 하나님이 간택해서 숨어있는 걸 뽑아냈어요. 로또처럼 뽑아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사울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이스라엘을 한 번 해보겠다고 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던 거예요.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야기했다고요. “당신이 왕이지만, 왕이라는 당신 지위보다 우선하는 게 있다. 그건 뭐냐, 모세 율법이다. 당신이 만약에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당신이든, 백성이든 다 망한다. 당신은 율법대로 백성을 다스릴 책임이 있다.” 사울은 그걸 OK. 그렇게 하겠습니다. 선지자님. 받아들이지요.

그런데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됩니까? 왜 안 되는가, 사울은 메시아가 아니거든요. 사울이 메시아가 아니라서 율법이 주어졌을 때 율법의 영생 노선이 아니고 율법이 원치 않는 저주 노선을 보여주는 대변자로서 사울이 등장하게 된 겁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사울의 그 자리. 사울의 자리가 빈자리가 돼요. 공백. 빈자리가 되고 그 빈자리에 다윗이 등장하는데 교체되는 방법이 바로 다윗언약의 내용입니다.

뭐냐 하면 사울이 누구를 핍박해야 돼요. 누구를 핍박하느냐, 다윗을 핍박해야 됩니다. 나중에 다윗의 자리가 예수님의 자리로 바뀌잖아요. 그 때 다윗은 누굴 핍박해야 돼요. 우리아 장군을 핍박해야 돼요. 그럼 핍박하는 이유를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내가 내 자신이 살아있기를 원하는 그 자체가 내가 구성하는 요소에 원치 않는 것을 강하게 밀치는 것 때문에 우리는 핍박을 하게 되어있지요. 그 내부에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 다음에 이스라엘,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많이 어려워요. 이스라엘 되면서 왕은 둬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왕은 둬서는 안 된다. 그런데 다윗이 등장하잖아요. 다윗은 뭡니까? 왕이지요. 왜 왕은 둬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왕을 사울이 죽고 난 뒤에 아무도 왕의 자리를 허락을 안 하면 우리 인간 생각은 그렇잖아요. 왕 자리가 없어야 한다면 처음부터 왕 자리가 도로 비워놓으면 될 텐데 거기 다윗을 왜 집어넣는가.

그것은 다윗은 무엇과 관련되어있는가 하면, 성전건립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성전 건립. 다윗은 무슨 심부름꾼이냐 하면 하나님이 왕이 되기 위해서 심부름하는 심부름꾼으로 왕 일하는 거예요. “나는 왕 아니요. 진짜 오실 왕은 이렇게 성전 형식으로 오십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다윗이 존재하는 겁니다.

지금 사울왕 때에 백성들이 사울왕을 우리에게 왕이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은 주변에 외세들이 많잖아요. 외세들 많지요. 많은데, 선지자가 그동안 사무엘이 좀 간간이 이기게 해줬어요. 이기게 해주니까 백성들이 이 사무엘 선지자가 늙어 죽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그 다음 대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의 아들을 봤습니다. 아들을 보니까 세습 당회장 아들을 보니까 아예 감이 아니에요. 왕을 달라는 말은 뭐냐 하면 한 혈통으로서 계속 세습해 내려오면서도 우리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그게 왕이에요. 세습제니까.

혈통 하나가 계속 죽죽 가면서 아버지가 지키면 그 아들이 지키고, 손자가 지키고, 계속 그렇게 될 때에 왕 계열이 되는 거예요. 왜? 다른 나라도 다 그렇게 하니까. 특수한 혈통을 달라는 거예요. 특수한 혈통을. 어렵다 어렵다 하는데 뭐가 어려운가 하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라고 허락할 때에 집을 허락한 게 아니에요. 특수한 혈통 자체를 허락한 거예요. 특수한 혈통을. 혈통이 세습하는 혈통이 될 때에 그게 왕다운 왕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신났지요. 아~ 사울은 아니구나! 그러면 다윗은? 자꾸 외세로부터 공격받을 때 나라를 지켜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다윗의 특징이 뭐냐, 가는 곳마다 이겨요. 다윗이 가는 곳마다 승리한다는 말은 다윗의 아들도 가는 곳마다 승리할 거고, 그 다윗의 아들의 아들도 가는 곳마다 승리할 거고, 그럼 무슨 걱정이 날아가 버립니까?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의 택한 이 나라는 왕의 혈통 하나가 꽂아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보호받는다는 것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겠어요. 이런 횡재가.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내부적인 갈등도 힘들지만, 특히 수시로 찾아오는 외부의 공세. 누가 사기를 친다든지, 누가 험담을 한다든지, 우리 가정을 못살게 한다든지, 하여튼 외부적인 적들을 이렇게 영원히 적들이 없으면 좋겠지요. 솔로몬이 적들을 없애는 방법이 뭐냐 하면 혼인정책을 해서 없앴어요. 주변에 있는 나라들의 공주를 수입해서 자기 아내로 삼았어요. 그런데 공주가 혼수 감으로 들어온 게 뭐냐 하면 자기 고향에서 믿었던 몰렉이라든지, 말감이라든지 온갖 이런 신들까지 다 들어온 거예요. 남편 하나로서는 인생이 즐겁지 않으니까. 종교나 섬기면서 살겠다고 하니까.

솔로몬이 공주를 자기 왕비된 공주를 학대하면 주변에서 화내가지고 전쟁하러 오잖아요. 이길 수는 있겠지만 전쟁한다는 자체가 불편한 일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컨트롤하면 되잖아요. “왕비야 뭘 원하느냐” “종교를 원합니다.” “무슨 종교?” “신천지” “아이구, 신천지해라.” 신천지 지어줘. 지어줘. 나라가 중요하니까. 종교는 별로인 거예요.

그러니 벌써 인간의 혈통 자체가 하자가 있다는 것을 드디어 밝혀진 겁니다. 다윗에게 또 솔로몬에게 성전을 약속했어요. 성전을 약속한 그 대목이 열왕기상8장에 나오는데 그것까지 다 읽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렇습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죄를 사해주겠다. 죄를 사해주겠다. 이리했어요. 조건이 있어요. 성전 위주여야 돼요. 성전 위주. 그럼 성전은 무엇을 대체한다? 전체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길거리에 호떡 만들 때 불판에다가 기름 넣고 밀가루 반죽 동글 동글해가지고 그냥 팍 던지지요. 그러면 불판에 동그란 밀가루반죽 있잖아요. 그럴 때 동원되는 도구 하나 있어요. 꽉 찍어버리지요. 꽉 찍어버리면 납작하게 되면서 끝에 있는 밀가루 반죽 어떻게 됩니까? 퍼져 나오겠지요. 요 꽉 찍은 자리가 성전 자리고 삐져나온 게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위주가 아닙니다. 낙인 찍혀야 돼요. 하나님이 여기에 성전 세웠다는 낙인찍어야 됩니다. 성전 세울 때에 그 성전은 건물은 폼이고요, 그 안에 뭐냐 하면 다윗의 혈통으로 삼겠다고 찍은 거예요. 그걸 역대상, 역대하, 열왕기상, 하, 그걸 다윗의 등불이라 하는 거예요. 다윗의 등불.

자, 아까 이야기한 거 결합해 봅시다. 여기서 좀 복잡하다 했지요. 제단은 뭐라고 했어요? 제단은 심판을 생산하는 겁니다. 심판 생산은 어느 취지에서 나왔는가, 율법 자체 안에서 저주도 있고, 축복도 있으니까, 축복만 끄집어낼 수 없어요. 저주, 축복 둘 다 끄집어내는 현장일 때 율법은 완성이 된다 이 말이지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죽임을 당한 거예요. 저주 받으신 거예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자, 이런 거 생각해 보세요. 첫 번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끄집어낼 때, 살아있는 양을 천사가 지나가는 그 길목에 내놓으면 그 집이 살겠어요? 죽겠어요? 살아있는 양. 안되지요. 하나님의 취지는 심판에 있어요. 아담 자체가 심판 대상이기 때문에. 니 주제 파악하라는 이야기에요. 니는 심판 대상이야. 구원 대상 아니야.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지. 니 소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나의 소원은 우상이고요. 주님의 소원인데. 주님의 소원이 주의 어떤 지시로서 그게 실제적으로 이게 발현이 돼요. 이게 역사 속에. 그게 놀라운 사실이에요. 실제로 나타난다고요. 양을 그냥 바치면 안돼요. 죽여서 바쳐야 돼요. 그 양의 피를 발라야 돼요. 피를.

그리고 안에서는 뭐냐, 앞에 양의 피 바르고, 지는 돼지고기 먹고 이리 하지 말고, 그 죽은 양의 고기를 먹어야 돼요. 양과 떡을 하나로 나누어서 떡이 된 우리가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표시를 양의 피로서 발라가면서 그걸 표시해내는 거예요. “우리 이미 죽었어요.” 오지 마세요.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죽었다는 말은 곧 어린양이 죽으리라, 약속이 살아있다는 말이에요. 나는 죽었는데, 나는 죽음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고 지나간다는 말씀은 살아버리고. 나는 죽고 말씀은 살고. 이 언약의 원칙에 자기 백성을 도입시킨 겁니다. 이용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이용한 거예요. 어떻게 감사 안할 수가 있어요. 감사하지요.

그래서 여기에 성전 문 닫아라, 이 말은 문 닫아야 되겠다. 이 뜻이거든요. 성전을 문 닫는다는 말은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성전 자체가 혈통을 이야기하니까요. 내가 너희들 말고 다른 이스라엘을 준비했다. 그래서 준비한 게 열 두 제자에요. 열 두 제자의 면면을 보게 되면 하나같이 이건 전과자도 아니고 인간 같은 인간 하나도 없어요. 열 두 제자 전부 다.

카우보이들 복수하려고 열두 명 모은 거와 똑같은 거죠. 그런데 그 카우보이들에게 전부 다 권총 하나 새 권총 하나 차주니까 전부 다 놀라운 총사수가 되어버리죠. 성령을 주신다는 열 두 지파 새로운 이스라엘에게 그 다음에 나온 게 오순절, 성령이 임하지요.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7장에 이걸 가지고 광야 교회라고 했어요. 교회.

자, 이거 설명하고 첫째시간 마칩시다. 교회라 하는 것은 세례를 받아야 돼요. 그 세례가 고린도전서10장에 보면 뭐냐, 10장 1절에 보면 그들은 한꺼번에 세례 받은 걸로 여기지요. 그 한꺼번에 세례 받은 것이 그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올 때, 그냥 건너왔어요. 물 찍어 바르고 이런 거 없었어요.

그냥 건너기만 했는데 이미 세례 받은 걸로 여겼어요. 인간이 하는 교회에서 하는 세례 아니지요. 주님이 하는 세례가 그런 겁니다.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낙인 찍어버린다고요. 우리가 어떻게 세례 받으려고 시도한 게 아니고 뭔가 통과했는데 세례 되게 만든 그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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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5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