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4장 16절 (이쪽 저쪽) 230207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4장 16절 (이쪽 저쪽) 230207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4장 16절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돈 많은 주인이 어떤 큰 잔치를 배설한 주인이 초청했는데도 오지 않는 사람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다가 그들의 자리를 대체하는 그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입장을 주님께서 상세하게 설명한 이유는 두 개의 입장을 다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첫 번째는 초청받은 자. 밭 산 사람, 소 산 사람, 장가간 사람. 이 사람들이죠. 초정 받은 사람 밭을 산 사람, 소 산 사람, 장가간 사람 입장과 두 번째 가난한 자, 저는 자, 병신들, 소경된 자 이 사람들의 입장이 있을 거에요. 보게 되면 밭 산 사람 소 산 사람이 여기 자기를 초청한 큰 잔치 베푸는 사람을 어떻게 보겠느냐 하는 거에요.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악하게 본다. 악하게 보지요. 사람마다 자기 계획이 있는데 네 계획만 우선이고 내 계획은 아주 안중에도 없는 그 모습이 악하기 짝이 없어요. 이 사람들은 가난한 자, 저는 자, 병신들, 소경된 자들 아니에요. 밭, 소, 장가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멀쩡한 자라고 합니다. 멀쩡한 자. 멀쩡한 자의 안목에 봐서 이 잔치를 배설한 사람은 나의 멀쩡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인격모독한 걸로 간주가 되지요.
갈 수 없어서 못 간다. 왜? 내 계획이 우선이니까. 잔치 베푼 자여 당신 계획은 내 계획 그 다음이야. 일단 내가 할 일 지지리도 없을 때 그때 갈까 말까 그때 내가 결정하는 거에요. 이런 자세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예를 등장인물이 많잖아요. 등장인물 많지만 사실은 구역은 두 구역으로 이렇게 나누십니다. 나누는 이유는 뭐 간단하게 말해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진리는 악함에서 나온다. 진짜 진리라는 것은. 달리하면 거룩이란 지저분한데서 나온다.
사람은 지저분한걸 하기 싫어해요. 왜? 자기가 멀쩡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기가 멀쩡한 사람이고 자기가 봐도 자기가 멀쩡하고 자기가 결정한 것과 판단한 것도 정상적이고 하자 없고 그런 거에요. 그래서 이 잔치를 베푼 사람은 소위 멀쩡하다고 자부한 사람,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초청을 해요. 초청할 때 18절에 보겠습니다. “다 일치하여 사양하여”, 그 자칭 멀쩡하다는 자들이 한결같이 생각이 같아요.
일치하여 라는 뜻이 그 뜻이거든요. 모두 다 한결같이 거절했다는 말은 이것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들을 멀쩡한 룰을 하나로 묶어버려요. 묶는다는 것을 이번에 수련회 참석한 사람은 이걸 알겁니다. 한 바구니에 담는 것, 집합이죠. ‘집합’. 하나의 집합으로 담아버려요. 이 집합의 이름은 ‘멀쩡한 자, 정상적인 자’. 자기가 대우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의 바구니. 한 세트가 되는 겁니다.
오늘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 비유를 들면서 출발점을 어디로 하냐면 자기가 멀쩡하다고 여기는 사람부터 출발점을 해요. 그 멀쩡한 사람이 어디에 참석을 안 합니까? 큰 잔치를 베푼 잔치에 참석을 안 하지요. 이것은 상당히 무서운 말인데요.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 중에 하나를 제가 쓰겠습니다. “너는 그쪽에 있고 나는 이쪽에 있구나”를 명확하게 해버려요.
너는 저쪽의 집합에 저쪽 그룹에 너희들은 하나같이 거기에 머물러 있고 못 건너온다 이 말이죠. 나는 너희들이 멀쩡하다고 여기는 그 그룹과 그룹에 속하지 않는 이쪽에 나는 여기 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요. 그래서 여기 멀쩡한 자, 밭 사서 못 간다 소 사서 못 간다 장가가서 못 간다 이 멀쩡한 자들이 뭐를 모르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이해 못해요. 예수님을 이해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계시는 세상을 이해 못해요.
그러니까 이 멀쩡한 자들의 이 경계선 있잖아요. 결국 그 잔치에 참석한 자가 누굽니까? 가난한자, 저는 자, 병신들, 소경된 자들이죠. 이 멀쩡한 자들 대신 그 자리가 채워져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큰 잔치 베푼 사람이 멀쩡한 자들이 보기에 큰 잔치 베푼 사람이 어떻게 보입니까? 참 악하지요. 마음 씀씀이가 참 못됐지요. 처음부터 잔치를 베풀 때부터 뭔가 노림수가 있었던 거에요. 너희들은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을게 이런 노림수를 예수님께서 실천에 옮겨버리는 겁니다.
너희들은 어떤 식으로도 나를 이해 못해 라는 것을 분명히 하겠다는 거에요. 분명히. 죽어도 예수님을 이해 못하는 그룹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주님께서 어떻게 규정했는가? 멀쩡한 자. 이 세상에서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자들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을 이해 못하는 식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이 말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인데 여러분 전혀 무섭지 않은 모양이다. 너무 길어요? 그럼 간단하게 할게요. ‘너는 그쪽이고 나는 이쪽이다’ 너무 길면 줄이겠습니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야’ 줄여보니까 이게 더 무섭지요. 너 어떤 사람 되고 싶어? 멀쩡한 사람 되고 싶습니다! 그래? 그쪽이 아니고 이쪽이야. 그들은 일치해서 잔치에 참석 못하겠다. 일치해서 그들은 맘이 하나같이 되어있는데 그들이 내놓는 구구절절 핑계들이 뭐냐 하면은 나는 뭐했고? 나는 밭을 샀고 나는 소 10마리 샀고 나는 장가 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 잔치에 갈수 없습니다. 이 멀쩡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멀쩡하느냐 하면은요.
19절에 보면 이래요.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청컨대 다음에 무슨 단어 나왔습니까? 나를 뭐하라? 나를 용서해라. 멀쩡한데다가 겸손하기까지 하네요. 인간이. “죄송합니다” 이런 말이거든요. “플리즈” 이런 거. 죄송합니다. 당신의 초청에 대해서 굉장히 감격하고 있지만 굉장히 감사하고 있지만 아이고 사정이 타이밍이 어쩔수가 없네요. 제가 소를 샀는데 제대로 샀는지 시험해야 하기 때문에 소 열 마리. 타이밍이 그래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일이 겹쳤다고 이야기하지요. 내 일과 당신의 일이 겹쳤네요.
일을 겹치게 의도적으로 만드시는 주님의 뜻은 뭡니까? 왜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인간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구원자를 기다리는데 왜 인간은 메시아를 그렇게 기다리는데 메시아를 못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사모해도 은혜를 못 받는 이유는 인간들이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들이 자기 계획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영생 받고 천당 가는 것이 자기 계획이에요.
그러면 인간은 자기가 구원받고자 그 의도가 뭐냐? 멀쩡하거든 자기가. 자기가 멀쩡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느 정도로 멀쩡하냐? 이번에 참석 못해서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런 말까지 할 정도로 배려심이 넓을 정도로 멀쩡해요. 이 말은 이 인간 세계는 서로 서로 누가 누가 멀쩡하냐의 시합장이고 대결장이고 보다 더 멀쩡한 사람 되기에 아주 사력을 다하는 세대에요. 이 세상이. 그런데 그 세상에서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거기 있고 나는 이쪽에 있다는 겁니다. 이미 말씀으로 뚝 떨어져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멀쩡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런 변명들을 늘어놓는 이유가 행여나 그 잔치 베푼 사람이 저 사람은 내가 성의를 다해서 초청했건만 아주 배가 불렀어. 건방지게 내 초청에 응하지 않았단 말이야?!라는 후담, 뒷담화올 것을 예비해서 어쩔 수가 없다는 것. 어쩔 수가 없다는 것. 복음을 듣고 싶은데 딸이 가지 말라고 해가지고 어쩔 수 없다. 딸이 반대하고 이래가지고.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뭔가 어미로서 노력할건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핑계를 대면서 하는데 모든 인간이 나는 이래서 못갑니다. 그 뒤에 이래서 못갑니다 서술어. 서술어에 나오는 그 모든 서술에 안에는 뭐냐? 나는 계속해온 대로 멀쩡한 사람으로서 멀쩡한 사람으로 계속 갈랍니다 하는 그런 뜻이죠.
처음도 멀쩡했고 중간도 멀쩡하고 끝도 나는 멀쩡한 사람. 누가 나 보고 나는 이런 적절한 변명거리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 뒷담화하면서 저 사람은 악하다 나쁘다 라는 소리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까지 아주 치밀하게 계산해서 변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여기 적어놨지요. 고상하고 거룩하고 하는 것은 진리는 어디서 오느냐 하면은 지저분함 속에 그 속에 들어있어요. 보물은 인간들이 버리는 쓰레기 안에 보물이 들어있어요.
이걸 하나의 문장으로 써 보겠습니다. 썩은 나무에서만 열매가 맺힙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아니하면” 뭐가 없습니까? 생명이 없지요. 썩지 아니하면. 썩은 나무를 보고 썩었다고 이야기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초청입니다. “너 멀쩡하지 않아. 너 지저분해. 너 썩었어.” “내가 왜 썩었어요?” “그럼 내가 이야기해줄까?” “네.” “내가 잔치를 베풀어서 초청할게 오면 알려줄게.” “아 그건 곤란합니다. 제가 방금 밭을 샀습니다.”“거봐 썩었잖아.”
그러니까 이게 그럴 때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뭐냐 하면은 그렇게 말한 예수님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당신 말은 터무니없고 당신은 정말 성질머리 악하다고 규정할 수밖에 없어요. 왜? 시비 거는 거니까. 멀쩡한 우리보고 모든 억지를 다 부려서 어쨌든 간에 우리를 추잡하고 더럽고 부패하고 죄인이고 악한 자로 만들기 위해서 온갖 지혜를 다 끄집어내시는 분이 누구시라고요? 예수님이죠. 예수님.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이유는 간단해요. 너희들이 죽는다. 너희들이 죽는다. 정작 죽어가는 본인들은 죽는다는 것 심각하게 생각 안 해요. 오랫동안 마지막 요양병동에도 죽은 병동이 있어요. 죽어가는 사람을 급하게 이동 옮겨가지고 마지막 가족들과 하는 그 병동이 호스피스 있던 사람이 했어요. 첫째 죽어가는 사람의 특징은 눈동자가 커지더라. 두 번째 갑자기 배려심이 많아지더라. 우리 아들 지금이라도 내가 선물 줘야지. 갑자기 배려심이 많아지고 세 번째 아무리 악한 사람도 죽을 때는 안정적이고 상당히 안정되어 가고 그리고 네 번째 이틀이고 사흘이고 계속 잠을 자요.
여러분 다 아시는 다섯 번째는 자꾸 잠을 자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지막 여섯 번째는 자기 걱정하는 게 아니고 남아 있는 사람들 자식들 걱정. 그렇게 하면서 일곱 번째 마지막 남아있는 감각인데 그것은 청각이에요. 시각 다 날라가도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은 청각이니까 손 붙잡고 유족들은 마지막까지 잘 위로해주세요. 그야말로 수백 명의 마지막 가는 모습이 공통점이 그거라는 거에요. 뭐가 빠졌지요? 죽을 때까지 멀쩡하죠. 죽을 때까지 배려심 많고 죽을 때까지 가족 생각하고. 자기 생각 안하고. 나 죽으면 쟤들 어떻게 살려나 걱정하고.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마음이 편해지면서 정작 죽을 때는 몸부림치는 게 아니고 자듯이 그렇게 죽는다는 거에요.
자, 인간이 현상적으로 뭘 관찰하고 관찰해서 인간이 악하다는 것을 거기서 뽑아낼 수 있는 재주가 있습니까? 인간이? 없지요. 죽는 사람 아무리 관찰해봐야 결국은 뭘 모릅니까. 저 분이 죽을 때 저렇게 점잖고 천사 같은 분이 왜 죽지? 왜 죽느냐에 대해서는 누가 해답을 제시해준 적 있습니까? 없지요. 왜 죽어야 되는가. 물론 살아있을 때 남들 죽는 거 보고 인간은 왜 죽는가? 철학적으로 논점을 삼아서 분석하고 연구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궁금해 하는 나는 왜 죽는가 하는 문제에요. 남들은 왜 죽느냐가 아니라 나는 왜 죽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인간은 모릅니다. 궁금해요? 500원.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까 해답 나왔어요. 너는 그쪽에 있고 나는 이쪽에 있거든요. 자리 문제에요. 자리. 사람이 죽는 이유는 내가 남보다 더 악해서가 못돼서가 아니라 아까 그 호스피스 병동 말 들으면 인간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죽을 때 다 똑같아요. 사형수가 되든 똑같아요. 똑같은데 다 점잖게 되고 온순해지고 하는데 문제는 자리문제입니다. 자리.
자리문제를 쉽게 하기 위해서 어떤 B급 영화 하나 소개해드릴게요. 그 영화에 뭐냐 하면은 어떤 사람이 세상이 어수선하니까 핵폭탄 터질 것을 생각해서 자기 집 밑에다가 지하 벙커를 만들었어요. 5식구를 한 5년간 먹을 정도로 식수부터 해서 외부 통신시설부터 해가지고 음식, 샤워기 심지어 수영장, 또 게임까지 5년 동안 심심하지 않도록 또 총도 쏴야하니까 총. 또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전쟁나면 가족 지켜야하니까 무기까지 수류탄 다 갖추어 놓고 있었죠. 남자가 취미여서 그걸 다 갖춰놓고 부인한테도 안 알려줬어요.
보니까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날 낌새가 보이니까 아내보고 여보 지하실로 가자. 자기 차 고치는 거기 말이야? 싫어 나는 놀러갈 거야 하고 애들 데리고 가버렸어요. 가고난 뒤에 뉴스 딱 보는데 세상에 폭탄이 터졌어요. 터져서 바람이 부니까 그 남자가 황급히 자기 집에서 지하로 벙커로 내려갔어요. 자기 친구도 내려가가지고 했는데. 영화에서 보면 50일 지났다. 80일 지났다. 200일 지났다. 도저히 참다못한 친구가 자기는 도저히 못 참겠다. 답답해서 올라가겠다 해서 올라가다 그 다음부터는 살려주세요 문 두드리는데 올라가면 안 열어준다.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가. 영화는 이렇게 끝났어요. 바깥에 멀쩡해요. 꽃피고 짹짹 거리고 그 가족들 잘 있습니다. 있는데 처음에 200일 전에 미군부대에서 오발 사건 일어나가지고 폭탄이 터져가지고 그게 주인공이 핵폭탄인줄알고 오해한 거에요. 터져가지고 나라에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미군부대 근처에 집이 있는데 여기서 폭탄이 폭발했거든요.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이 폭발 사고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 치고 여기에 벙커를 다 만들어줬어요. 빠져나가고 싶어도 못 빠져나가. 바깥에는 아빠! 언제 돌아와? 아빠는 돌아가셨어. 아빠의 무덤이야 엄마는 이러고 있어요. 자기 혼자 똑똑한 짓하다가 자기 무덤이 된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세상입니다. 자기 혼자 멀쩡할려다가 벙커에 갇혀서 죽어버리는 거에요. 살려고. 그러니까 예수님은 말씀에 의해서 너는 그쪽은 아니야 이쪽이야 라고 했는데 인간은 말씀은 떼버리고 사는 게 우선이에요. 어떻게 산다? 멀쩡하게. 내가 멀쩡하게 살 수 있는 이 세계, 그냥 사는 거 말고 내가 이렇게 훌륭하고 살만해서 살고 천국갈만해서 산다는 그것을 보장해주는 그런 세계를 모든 지혜와 총기를 다 동원해서 그것을 나는 천국이라고 여기고 그 세계를 갈 준비를 하겠다는 겁니다.
지하 벙커 하는 것처럼 나는 예수 믿어놓음으로서 장차 내가 예수 믿는 이 멀쩡한 짓을 칭찬하는 그 세계에 가겠다 이것을 그 당시 하나님 믿고 말씀대로 살면 된다 이게 유대인이에요. 그 당시 예수님 오신 당시의 유대사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국은 뭐와 뭐의 교체입니까? 소위 모세의 율법대로 산다고 그것이 멀쩡하다고 자부하는 사람, 그 사람들 속에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그걸 뭘로 대체했지요? 가난한 자, 병신들, 소경들, 저는 자들로 대체해버린 겁니다. 병신들, 소경들이 이들이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죠. 이 말씀하는 취지는 교체했다. 교체하는 방법은 뭐냐? 따로 마련하는 거에요. 따로 자리를 이 자리 말고 예수님 오셔서 예수님 중심으로 새로운 자리를 따로 장만하는 거에요.
젊은 엄마들이 애들 유치원 보낼 때 한번 생각해보세요. 엄마는 직장 다니고 애는 유치원에 있습니다. 유치원에 갈 때 엄마가 오후에 데리러오잖아요. 올 때 엄마가 애를 저녁먹이기 위해서 집에 데려갈 때 가방 챙기고 신발 다 챙기죠. 취지가 뭐냐? 가자. 어디? 내가 마련한 거처로 가자. 그런데 애가 엄마 저 친구하고 더 놀래. 엄마 나 장난감 더 놀고 싶어. 장난감 놔둬. 빨리 가자. 엄마가 맛있는 저녁 해놨다. 가자. 다 데려가잖아요. 일방적으로 데려가죠.
무엇을 묵살하고? 어린아이의 그 자기의 계획을 완전히 묵살하고 데려가는 거에요. 그러면 애는 낮에 살다보면 그 유치원이 밥도 주죠 잠도 재워주죠. 마치 아늑한 자기 보금자리고 특히 그 옆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친근감 있는 대화가 되는 친구들이 있어요. 친구들이지만 하루쯤은 석별의 정을 나눠야 돼요. 이별해야 돼요. 헤어져야 됩니다. 물론 다음날 유치원에 올지 안 올지 다음날 핵폭탄 터지면 못가지만. 그러나 유치원에서 애를 데려올 때는 엄마는 아주 단호하게 싹쓸이 철수하듯이 다 데려와버려요. 가방 챙기고 옷 챙기고 신발 챙기고 싹쓸이하듯이 미련두지 말고 미련 싹 자르고 오라는 거죠. 다 데려오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기존의 정들었던 우리가 여기서 이 세상에서 인정받았던 것 있잖아요. 멀쩡하다고 인정받았던 것 그것 싹 따 잘라버리고 그냥 다 데려오는 거에요. 일방적으로 데려오는 겁니다. 데려오면서 잔치를 베풀지요. 그런데 그 잔치를 베풀 때 초청할 때 사람들은 소 산사람, 밭 산사람 장가간 사람 왜 초청에 응하지 않았지요? 왜 응하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계획이 있다고 했지요. 그럼 유치원 아이는 자기 계획 없어요? 자기 계획이 있는데 엄마가 애 뺏듯이 데려가잖아요.
그들이 몰랐던 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할 때 이 썩음, 이 땅에서 썩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잖아요. 썩었잖아요. 썩음 안에 말씀 완성이 다 들어있어요. 그리고 썩는 이유는 이 자리가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누구든지 썩게 만드는 자리에 현재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기 대치동 한 평이 얼마입니까? 한 평에 몇 천만원 넘겠지요. 이거 우리를 썩게 만드는 자리에요. 우리를 부패하게 만드는 자리에요.
썩는 줄 아시면서 또 썩기 위해서 썩어버리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것을 아시면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런 말함으로서 예수 당신이 하는 말은 우리 보기에는 악하다라는 그러한 독한 평을 받을 줄 아시면서 너희들은 그쪽에 있고 예수님은, 나는 이쪽에 있다 를 분명히 합니다. 분명히 가져가요. 그럼 이 경계선에 저쪽에 있는 것과 예수님 이쪽의 경계선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멀쩡한 자와 예수님 이 자리에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말씀이 있어요. 말씀이 이 경계선으로 그어 있습니다.
멀쩡한 자도 말씀을 지키되 말씀을 지키는 취지는 내가 어째서 이렇게 잘났느냐를 증명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죠. 성경 말씀을 보면서 이방인들보고 독하게 욕해요. 저 이방인들 여호와를 모르고. 이 말은 무슨 뜻이에요? 여호와 아는 우리는 멀쩡하다는 뜻이에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하고 믿음 좋은가를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말씀을 대하는 겁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온갖 교리를 하는 것은 말씀 보고 있는 자신의 대견함을 지켜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에요. 내가 나에게 하는 덕담. 자기가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덕담을 뽑아내요. 이걸 영어로 말해서 QT라고 합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덕담하기.
아버님 세배 받으세요. 그래. 올해는 아들 낳고 알겠지?! 너는 오늘 시집가고 알겠지?! 큰아들 올해 사업을 잘 되고. 큰며느리는 비실비실 아프지 말고. 허약체질 자랑하지 말고 튼튼하고. 우리 아들 신경 안 쓰게 네가 알아서 잘해라! 아이고 저 비실비실 어째 우리 집에 시집와가지고 골치 썩이고. 덕담인지 비난인지. 덕담 같은데 이상하게 비난 같고 자기 아들은 무조건 싸고 돌고. 그렇게 하지요.
말씀이 없는 게 아니에요. 있어요. 있는데 나는 나에게 덕담하는 쪽으로 해석을 해버리고 주님의 말씀의 해석은 주님 옆에 붙어있는 사람 보면 아는 거잖아요. 어떤 사람입니까? 가난한 자, 저는 자. 요즘 잘 안 쓰는 말. 이 말 쓰면 나중에 국회의원도 못되는 말. 뭡니까? 병신 된 자, 소경된 자. 주님께서 베푸는 자리에 이쪽 멀쩡한 자 보기엔 전혀 멀쩡하지 않고 오히려 멀쩡한 자를 멀쩡하다고 강요의 대상이 되는 자들을 여기에다 배치를 한 거에요.
이것을 20세기 초에 나오는 과학 이론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상대성 이론. 상대성 이론은 속도라는 것은 이것은 뉴턴부터 시작됐는데 뉴턴은 그 이유를 몰랐고 아인슈타인이 그걸 밝혀냈어요. 속도라는 것은 자체적 속도는 측정되지 않는다. 이게 상대성 이론입니다. 속도라는 것은 비교되는 대상이 있어야 속도라는 게 나와요. 나는 빠르고 너는 늦고. 이 말은 너는 늦고 나는 빠르고 이 말입니다. 비교되는 대상이 있어줘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상대성 이론은 모르고 자기가 빛이래. 빛의 속도가 얼마냐 하면은 29999999...km거든요. 거의 30만km인데. 이 빛의 속도가 이게 절대속도가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아니야 아니야 뭐든지 속도라는 것은 상대성 있는데 빛의 상대적 속도가 없어요. 이게 너무 신기한 거에요. 오히려 빛이 절대적이고 나머지 시간과 공간, 3차원 시간과 공간이 빛의 속도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휘어지고 늘어졌다 빨라졌다 하는 거에요.
높은 곳은 시간이 빨리 가고 낮은 쪽은 시간이 늦게 가는 거에요. 아들 둘이 있는데 하나는 산에 살고 하나는 바닷가에 살면 산 위에 사는 애가 늙어요. 빨리 늙어요. 진짜에요. 요새 아주 세밀한 시계 조사해보면 나와요. 달라요. 공이 위에 갔다 떨어지는 이유가 뭐냐? 위에 가면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에 공은 최적의 코스를 잡아서 위에 올라갔다 내려가는 거거든요.
예수님께서 밝힌 것은 말씀이라는 그 절대적인 것. 유대인들에게 말씀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내가 지키기만 하면 말씀의 의로움이 내 의로움이 된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하나님도 같이 지켰다는 생각을 못한 거에요. 인간들 머리에는 그게 없는 거에요. 말씀을 주신 분은 지키라고 줬지 말씀을 주신 당사자가 말씀 지키기 위해서 왔다는 생각을 생각도 못한 거에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겁니다. 말씀은 말씀만 달랑 오는 게 아니고 말씀 지킬 수 있는 능력자 또는 능력까지 말씀 안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자, 그럼 그 당시에 하나님 말씀을 못 지켜서 저주 받았다는 그 상대자들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병신들이고 가난한 자들 저주받은 자에요.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모세의 말씀대로 살면 부자 되게 되어있어요. 가난한 것은 말씀을 못 지켜서 가난하게 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못 지키기 때문에 부자가 됐다고 보는 겁니다. 아예 하나님께서 천국을 안 넣어줄려고 작심을 했기 때문에 부자 되게 한 거에요.
아이고 인간아 이왕 천국 못가는 거 부자나 돼라. 이래서 부자 되게 하신 거에요. 주일날 그런 이야기했지요. 낙타가 바늘구멍 가는 그런 경우가 있을지라도 부자가 천국 가는 경우는 없다. 주님께서 낙타와 바늘 이야기하는 것은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그보다 더 수월한 것을 제시한 것이 바로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거에요. 낙타가 바늘구멍. 모르죠. 낙타를 바늘구멍에 집어넣으면 한 이만오천 명 따라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다 할지라도 그게 돼?! 돼. 부자는 안돼. 만약 그게 된다고 할지라도 부자는 안돼.
그러면 그 이야기할 때 누가 놀라느냐 하면은 옆에 있는 제자들이 놀랬어요.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유대 신학에 의해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에요. 부자 된 사람의 특징은 말씀을 잘 지켰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합리적인 바탕이 구성되어있어요. 부자들이 하는 말이 뭡니까? “뭐 하다 보니 부자 됐어요. 하나님의 은혜죠 뭐.” 이걸 듣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건 특별한 복을 받아서 부자 됐다는 거에요. 특히 로또 당첨되는 거요.
한번 적어볼게요. 로또 당첨되어서 행운이죠. 부자 됐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부자는 어디를 못 간다? 천국에 어림도 없지요. 못가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로또 당첨됐다 부자 이 자체를 너는 부자 되자마자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의 내용으로 집어넣어버리는 거에요. 나의 내용으로. 제가 말씀을 좀 어렵게 하겠어요. 말씀 안에는 말씀을 지키는 분이 함께 따라오잖아요. 오지요.
그런데 인간은 말씀을 지키면서 말씀에 대한 혜택이 부자 되는 것, 이 말씀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아서 부자 되는 거잖아요. 이 부자 되는 것을 누구로 봤다? 내 자신으로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를 가리는 거에요? 말씀의 주인공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그들은 지금 가리고 있으니까 자기를 가린 자를 천국에 넣어줄리 만무하지요. 말씀의 훼방자를 천국에 넣어주겠어요? 천국의 훼방자를 천국에 넣어주겠습니까? 영생의 훼방자를 영생에 넣어주겠습니까? 안 넣어주잖아요. 넣고 싶어도 못 넣어줘요.
말씀 완성이 흠집이 나기 때문에 넣어줄 수가 없어요. 그걸 족집게로 빼내야 되지요. 부자냐? 예. 썩어버려라. 이게 빼는 방법이에요. 출세했습니다. 그럼 지옥에나 가라. 이게 빼는 방법이에요. 이게. 이게 뽑아내는 방법이에요. 제가 주일날 설교할 때 이런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모방이다’ 했어요. 인간은 모방. 인간은 모방이기 때문에 자존감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다들 뺏겼다 했잖아요. 김건희처럼 베끼고 했다 했지요. 다들 논문 다 베끼고 온 거에요. 베끼고. 어느 아파트 좋으냐? 그 아파트 다 베꼈잖아요. 모방했잖아요.
나는 출세도 못하고 엉엉 운다. 왜 웁니까? 베꼈는데 실패해서 우는 거죠. 베꼈는데 실패해서. 베꼈다는 것은 집합이라는 뜻이에요. ‘집합’. 이 세상 감옥에서 나만의 것을 일체 용납해준 적이 없어요. 이것도 베끼고 이것도 베끼면 출세한다고 쳐줘. 이거면 인생 성공이라고 해줘. 너것 베끼고 내것 베끼고 베끼고 베끼는 세계에요. 복사의 물결이에요. 복사의 물결. 전부 복사판이에요. 복사판. 교육은 베끼는 기술이 교육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교육의 시작은 모방이다 라고. 그냥 베끼는 거에요. 선생님 이거 어떻게 합니까? 군말하지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특히 판소리 교육할 때 하잖아요. 어흐~~~~~~~. 목소리 하고, 얼쑤 치고 애들은 그거 그대로 따라하게 되면 나중에 우수상 받고. 상 받는 겁니다. 그대로 베끼는 거에요. 많이 베끼는 사람에게 창의성과 융통성이 있다 해서 그 사람은 좋은 대학 가고 베끼는데 어설프면 안 되고.
요새 대학은 원서만 내면 다 들어가는데. 경북에 있는 경주대학교는 276명 뽑는 과에 응시자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한명도 없어요. 학생 수가 모자라니까. 좋은 대학은 베끼는 기술에 능한 교수들이 많아가지고 회사에서 뽑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니까 나만의 개성을 인정해다오! 개성 같은 소리하고 있습니다. 그런 개성은 없어요. 이 세상은 전부 다 한통속입니다. 거기서 거기에요. 똑같아요.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뭐냐? 멀쩡하게 되기. 사람 대우받으면서 세상 살기. 그거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가 주님 보시기에 그쪽입니다. 그쪽. 말씀에 넘어설 수 없는 그쪽세계에요. 유대교의 특징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종교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인간이 마음 굳게 먹고 열심히 하게 되면 유대교인이 될 수가 있어요. 십계명 지키고 할례 행하고 안식일 지키고 그리고 지킬 수 있도록 또 회칙이 주어져요. 못 지키는 게 아니고 지킬 수 있도록 해요.
담요는 들고 가지마시고 이런 거 있잖아요 안식일 날. 요한복음 5장에 말씀처럼. 불 피우지 마시고요 이런 거요. 불 안 피우면 되지 뭐. 그럼 지킨 거잖아요. 불 안 피우면 되잖아요. 그날만큼은 회당에 가시고. 가면되지 두 다리 있겠다. 갔다 오면 되지요. 예배시간에 졸지 말고. 안조는 척 하면 되고. 이건 해낼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단은 병신 되시고 일단 저시고 일단 가난한 자 되시고 또 뭐가 있어요? 소경되시고. 자기 눈 자기가 찌르기 시작! 이게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할 수 없는 쪽을 주님은 주님 쪽으로 삼은 거에요. 내가 다할게. 주님 자신이 다해주는 겁니다. 이 누가복음 14장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누가 이 말씀 지킵니까. 지킬 수가 없습니다. 저는 자, 가난한 자 이들은 좋겠다. 안 좋아해요. 그들의 소망은 빨리 병신에서 벗어나고 가난에서 벗어나는 거에요 그 사람들은.
제가 주일날 설교했잖아요. 주머니에 돈 한 푼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1번 돈. 2번 영생. 물어보나마나죠. 돈이 없을 때 돈을 원하지 영생을 왜. 돈도 안 되는 영생을 영생은 나중 문제지요. 죽음이라는 것은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고 죽음이라는 것은 예수님과 한편이 될 때 그게 사는 것이고요.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은 저쪽 자리를 통째로 그걸 죽음의 세계라고 해요. 상대성 원리입니다. 상대적인 거에요. 인간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은 빛의 절대성에 의해서 전부 다 절대속도는 없고 상대적 속도에 있다. 상대적 속도에요. 시간도 마찬가지고요.
이쪽 지구에서의 현재는 저쪽 안드로메다에서는 과거가 돼요. 그걸 물리학에서 ‘연장된 편지’라고 하는데 이건 어려운 용어인데요. 과거와 미래 사이에 현재가 거의 없다시피 인데 연속된 현재가 생기는데 이게 뭐냐? 사건에 의해서 현재가 끼어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건 너머에 따라서 재편성된다는 겁니다. 사건 여부에 의해서. 이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논리에 의해서 이걸 정리해놨어요.
그러니까 상대성 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빛의 속도가 절대적인 이 세상에서 모든 사건과 모든 현상은 하나의 굴곡진 그러한 중력의 골짜기와 봉우리에 의해서 자리가 이미 배정되어 있고 결정되어있다는 거에요. 사건에 의해서 결정됐다는 말은 인간의 운명도 운명 당사자인 내가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게 아니고 이미 결정되어있다는 겁니다. 철학 쪽 물리학으로 표현하면 그런 거에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