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30216b 베드로후서 3장 13절(새 땅의 중심)-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230216b 베드로후서 3장 13절(새 땅의 중심)-이 근호 목사
다윗이 왕이죠. 왕인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했던 일이 뭐냐 하면 전쟁이었습니다. 전쟁할 때 명분이 뭐냐 하면 더럽다고 전쟁했거든요. 이방민족은 더럽다고. 왜 더러우냐?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언약이 없으니까.
그래서 성경에 보면 다윗이 가는 곳마다 이겼다고 되어 있어요. 다윗이 실력이 좋은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셨어요.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니까 다윗은 암몬과 전쟁할 때도 하나님께서 늘 이기게 하시니까요. 그래서 다윗이 전쟁할 때 우리아 장군이 나가고 언약궤도 거기 있죠. 다윗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어슬렁거리고. 어쨌든 다윗이 왕으로 있는 한 전쟁은 계속 승리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룩한 내 백성이라 해요. ‘내 백성’ 앞에 ‘거룩한’ 거예요. 거룩하다는 것은 맑고 깨끗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맑고 깨끗한 백성 이스라엘. 그러면 주변 이방민족은 하나님께서 거부하는 거예요. 우상을 섬기는 것은 기본이고 추잡하고 더럽다고 본 거예요. 추잡하고 더럽다.
자, 인간이 추잡하고 더럽다 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이냐? 무슨 기준이어야 한다는 거냐 하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된 요건이 ‘더럽다’와 ‘깨끗하다’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된 것.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이 말이 맞는가, 틀린가 한번 보세요. ‘율법대로 살면 깨끗하다’ 맞아요, 틀려요? 율법대로 살면 깨끗하다. 이거 틀린 말입니다. 이거 틀린 말이에요. 율법대로 살면 깨끗한 것이 아니고 율법이 드러나면 깨끗해지는 거예요. 율법이 드러나게 되면 깨끗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이 드러난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여기 있다. 여기 계시다.’를 드러내는 게 깨끗함이에요. 이게 성스러운 것이고. 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아까 고린도후서 4장 봤죠?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드러난다? 그리스도가 드러나면 그걸 가지고, 성도(聖徒), 거룩한 사람. 깨끗한 사람. 12월달에 안 태어나도 맑고 깨끗한 사람 되는 거예요. 눈처럼 맑고 깨끗한.
전쟁의 기준이 윤리 도덕이 아니에요. 윤리 도덕이 아니고 ‘내 안에 하나님 있다’ 이 전쟁이에요. 내 안에 하나님 있다, 이 전쟁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 있다’ 하면 승리 주는데 여기 ‘나’가 문제에요. ‘내 안에 하나님 있다’ 할 때 이 ‘내’가 어떤 ‘내’냐 하면 쓰레기죠. 쓰레기이고 상한 심령. 상한 심령 안에 하나님 계시면 그게 승리가 되는 겁니다. 이게 다윗 언약이에요.
그 다윗 언약에 그러한 내용이 사사기부터 나와 있으니까 다윗 언약 이전에 사사기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사사기 6장 13절요. 여기 사사 기드온이 등장합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방금 제가 설명한 게 그대로 나오죠. 기드온이, 하나님은 우리 편에 속한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고 적들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승리는 누가 승리해야 되고 누가 강건해야 돼요?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스라엘은 이겨야 되고 적들은 망해야 되는데 그 당시에 기드온이 보니까 미디안이 오히려 이스라엘을 이겨버렸어요.
그러니까 기드온이 도대체 자기가 알던 하나님의 법칙과 틀려지니까 의문을 제시하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와 함께 있는데 어찌하여 미디안이 우리를 이렇게 공격합니까?” 뒤에 붙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렇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냈을 때 그 기적이 우리는 지금도 그것이 유효하고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말은, 옛날 애굽에서 나오게 한 기적이 지금도 계속 이어져 나오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라고 기드온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기드온의 뭐가 문제가 되겠죠? 기드온은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 하나님의 기적을 누가 방해하느냐? 이방민족이 방해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함께 있는 이스라엘이 함께 있는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생각을 기드온은 지금 상상도 못합니다.
전쟁을 해야 되는데, 이스라엘이 전쟁을 승리하잖아요. 하나님이 누구한테 질 리는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스라엘은 져버린 거예요. 도대체 어디서 사달난 거예요? 하나님을 이길 신은 없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와 붙어도 진다. 뭐가 문제입니까?
‘이스라엘이 한 전쟁은 이스라엘 바깥과 한 전쟁이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이다’, 그 사실을 말해주는 거예요. ‘뭐 교회 다녔는데. 교회 다니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해서 구원하겠지.’ 이런 사고방식이 뭐가 문제에요? ‘내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은 나와 함께 있으니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겠지.’ 자, 이게 기드온 생각이에요. 뭐가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싸운다는 생각을 그 사람은 못하는 거예요. 자꾸 자기가 신자라고 우기면서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싸운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구약을 보면 하나님이 분노하는 경우가 있어요. 분노하는 경우가 뭐냐? 우상을 섬길 때 분노합니다. 우상을 누가 섬깁니까? 우상 믿는 사람이 섬겨요? 그건 기본이고요. 우상밖에 없으니까 우상 섬기죠. 우상을 섬긴다고 화내는 그 자리는 이방민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예레미야 44장. 여기 분노가 너무 많이 나와요. 찾지 마세요. 찾는다고 시간 더 가니까. 6절부터, “나의 분과 나의 노를 쏟아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를 살랐더니” 하나님의 분노를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하는 예루살렘에다가 터트려버린 거예요. 예루살렘에 지진이 일어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여기 예레미야 44장에 여인들이 나오는데 24절, 25절.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이 분노해요. 여러분들이 그 점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상 좀 섬기면 어때요? 돈 번다고 일한다고 피곤한데… “아이고, 재민데 올해 운세나 한번 보자.”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집사님이 그런 거 봐도 됩니까? 점 봐도 됩니까?” “좀 보자. 왜? 응? 좀 보면 어때?” 아니, 안 그래도 지금 사는 게 스트레스 받아 힘들어 죽겠는데. 멀미도 나고 지하철도 못 타고. 그 가운데 돈벌이하려고 지금 애쓰고 있는데 좀 보자, 좀. 속 터져서…. 우리 애는 어떻게 되고 취직 할 건지, 결혼은 할 건지 뭐 속 터져서 한번 보면 어때? 그것도 못 보냐? 하나님이 용서해준다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한다면서? 예수 믿어줄게. 주여, 믿습니다. 됐습니까? 믿습니다, 믿습니다. 좀 봅시다, 점.
지금 여기 그게 나와요. 24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다시 모든 백성과 모든 여인에게 말하되 애굽 땅에서 사는 모든 유다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와 너희 아내들이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이루려 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서원한 대로 반드시 이행하여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전제를 드리리라 하였은즉 너희 서원을 성립하며 너희 서원을 이행하라 하시느니라”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할 때는 만사가 형통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 말 듣고 하늘 여신을 안 섬기고 여호와를 섬기니까 그날부터 조져놨다는 거예요. 사는 게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래도 우상 안 섬기게 돼 있나, 이 말이에요.
결국 결론이 뭐냐? 하나님 뜻대로 믿어봤는데 되는 일이 없어. 그래서 다시 우상을 섬기니까 만사형통해. 하나님이 좀 말리지 그래. 왜 안 말렸어? 우리가 신도 아니고 뭐 연약한 인간인데 연약하고 유약한 인간이 우상 섬기면서 뭔가 살아보려고 애쓰는 거 그거 가련하지도 않나? 그럼 하나님이 그렇게 보기 싫으면 좀 도와주던지. 우상 섬기기 전에 팍팍 돈을 주던지. 어렵게 해놓고는 우상 섬기지 말라. 어떤 이익도 없고 보상도 없으면서 우상 섬기지 말라 하면 이게 통하냔 말이죠.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거 우상 섬기고 망하자. 이렇게 배짱으로 나올 게 뻔한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분노한다. 그 태도에 대해서 분노한다는 거예요. 이게 어제 설교에 나온 내용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우상 안 섬기면 복 주고 우상 섬기면 저주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우상 안 섬길 위인이 없다는 것을 확인차 주님께서는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을 준 이유는 ‘모든 인간은, 이방이든 이스라엘이든 관계없이 다 예외없이 모든 인간은 전부다 우상숭배자가 되어서 마땅히 저주받아도 할 말이 없는 작자들이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하나님하고 노닥거리고 거래하라고 준 게 아닙니다. ‘하나님, 잘하면 복 줄 거죠?’ 지금 하나님은 우리의 거래대상이 아니에요. 우리 주제파악을 못해서 그래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다행한 점은 인간의 바닥까지 다 뜯어냅니다, 바닥까지. 세무서에서 와가지고 분명히 저 집 세금 안 냈는데 잘 먹고 살더라. 뭔가 있다. 그래서 출동해가지고 뜯어, 바닥! 바닥 뜯으니까 바닥에서 막 금괴가 나오듯이. 주님께선 우리의 바닥까지 다 뜯어버려요.
도대체 인간은 뭘 믿고 그토록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도 안 믿고 지독하게 안 믿는 이유가 뭐냐? 인간은 참 징글징글하다. 독하다, 독해.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을 안 믿기로 아주 독하게 마음먹는 그 근거가 뭐냐? 그게 이스라엘 내에 하나님의 적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여자의 후손의 적은 누구입니까? 뱀의 후손이죠. 뱀이 들어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악마가 하나님을 거부하도록 뒤에서 부추긴 거예요. 그 악마가 광야에 약속의 땅에 등장하잖아요. 그래서 성령께서, 악마가 예수님을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하도록 정면으로 만나도록 주선을 해준 거죠. 마귀가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마귀의 자식이 바로 바리새인이고요.
자, 사사기 한번 봅시다. 기드온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같이 이야기하니까 미디안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맞아도 싸다 이 말이에요. 그다음에 사사기 7장 2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계속 떠나지 않습니다. 기드온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한계를 보여주고 문제점을 보여주면서 떠나는데 7장 2절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 보면 이스라엘이 누구를 거스른다고요? 여호와를 거스르죠.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가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이에요. 미디안 그거는 보조 엑스트라들이에요. 지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만나죠. 미디안 백성 구원하려고 하나님이 일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백성을 자기 백성답게 다루기 위해서 미디안 군사를 뒤에 그냥 잡아당겼다 집어넣었다 이렇게 보조 맞추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는 거예요. 구약의 모든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무대장치니까요.
기드온이 모집을 했는데 몇 명 왔느냐? 삼만 이천 명 왔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삼만 이천 명 중 이만 이천 명을 돌려보냈어요 (삿 7:3). 왜? 숫자가 많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숫자가 많다는 건 도대체 얼마가 되어야 하나님의 적정 숫자에 해당되느냐.
7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삼백 명이라 하는 것은, 거기에 남은 자가 만 명이었는데 만 명 중에서 가장 적은 숫자의 행동을 하는 무리가 뭐냐. 물을 핥아먹는 사람, 이 사람이 가장 적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개처럼 물을 핥아먹는 자체가 흔한 행동이 아니거든요. 드문 행동이에요. 가장 숫자가 적은 것.
그러니까 여러분, 처음부터 300명을 모집했습니까, 아니면 32,000명 왔습니까? 처음에 300명이 아니고 32,000명이었습니다. 32,000명이죠. 32,000명 중에서 22,000명 달아나고 10,000명 남았죠. 그럼 300하고 10,000 비교할 때 뒤에 동그라미 두 개 뗍시다. 떼면 3 남고 여기 100 남았죠. 그러면 100-3=97명이죠.
그러니까 100명 중에서 97명 돌려보낸 거예요. 달랑 몇 명 남았어요? 3명 남았어요. 일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3명 남고 97명이 집에 갔다는 말은 인간들끼리 결집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거예요. 이걸 무슨 전쟁이라 하느냐 하면 사람이 할 수 없는 전쟁을 하나님께서는, 7장 7절에 나와 있는데 그걸 ‘붙이심의 전쟁’이라 해요. 붙여주시는 전쟁. 붙이시매 전쟁.
오늘 베드로후서 3장 본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언급했어요.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하면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들어갈 수 있느냐. 지금 우리가 그 문제를 계속 구약의 하늘과 땅을 가지고 하는 겁니다. 구약의 하늘과 땅에서 그 약속의 땅은 그냥 가만히 있는 고정된 땅이 아니고 거기서 쉴 새 없이 뭐가 일어나는 땅입니까? 붙여주는 전쟁이 일어나는 땅이에요.
약속이라는 것이 이 땅에 와서 ‘자, 여기 약속의 땅이다. 들어가라.’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그 땅이 전쟁터에요. 왜? 기존에 무슨 세력이 있기 때문에? 뱀의 후손, 악마가 그 땅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악마의 족쇄에서 못 벗어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모집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뭐를 치고 뽑아내야 돼요? 그 악마의 힘 아래 있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하여금 그걸 뽑아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만나고 그 백성을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뽑아 나올 때에, 그 뽑히는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단결하면 돼요, 안돼요? 단결하면 안 되죠. 모세가 처음에 독립운동 실패한 게 그거잖아요. 애굽의 힘에 힘으로 대항하다가 실패했잖아요. 실패했어요. 그 힘에서 뽑혀 나오는 것은 우리 개인이 하질 못합니다. 단체가 하질 못해요. 이것은 주님만 하십니다.
주님이 어떤 차원에서 하느냐 하면 “이 추잡하고 더러운 것들아, 나가!” 이런 방식으로 뽑아내는 거예요. 그러면 “아, 추잡하고 더러운 거? 그럼 나네. 나도 지옥 가겠네.” “너는 잠깐 거기 서 있고. 잠깐 스톱! 서!” “저 더러워요. 저 상한 심령입니다.” “그러니까 이리 와. 너는 합격이야. 너는 카투사로 빠져. 전방 가지 말고.” 카투사 들어가니까, “너 누구 빽으로 왔나?” 주님 빽으로 왔지 뭐. 누구 빽으로 왔겠어요.
전쟁하는 것은, 미디안하고 전쟁하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내부전쟁이 중요해요. 기드온과 그리고 하나님과의 전쟁. 하나님의 방식은 붙여주는 전쟁이에요. 붙여주는 전쟁은 내가 가진 힘으로 내가 구원될 수 없음을 그대로 인정하는 겁니다. 그대로.
100명 가운데 97명은 집에 가버리고 3명 남았죠. 그럼 320명 가운데서 3명 남았잖아요. 그렇죠? 동그라미 2개 뗐으니까. 처음부터 3명 뽑았으면, “어이, 삼총사. 우리는 하나님의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삼형제다. 크로스!” 이래가지고 자기끼리 힘을 단결하겠는데 처음에는 320명 왔는데 차 빼고 포 빼고 다 빼버리고 덜렁 3명 남아있으니까 그들의 느낌은 무슨 느낌이겠습니까? 이 전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겠죠.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간의 마음 상태로 집어 넣어봅시다. 그러면 다윗의 고백이 나오죠. 나는 상한 심령이다. 썩을 대로 썩은 상한 심령이라는 그 상태가 바로 하나의 외부적인 전쟁 형태로 나타난 게 달랑 남은 300명이에요.
300명 용사요? 그게 용사입니까? 무슨 그런 용사가 있어요. 300명 용사 아닙니다. 300명 찌꺼기죠. 300명 찌꺼기에요, 찌꺼기. 찌끼 같은 거예요. 자체적인 아무 능력이 없어요.
그러면 300명이 적들을 어떻게 하느냐? 135,000명이 300명하고 붙어요. 32,000명 정도가 아닙니다. 미디안 적들은 135,000명이 있어요. 135,000명 대 300명. 이것도 숫자 헤아려봅시다. 135,000명 대 300명. 뒤에 동그라미 2개 뗍니다. 그럼 몇 대 몇입니까? 1350 대 3. 3으로 1350을 나누면, 460대 1.
이게 지금 싸우자는 이야기에요? 만나서 어디 미팅합니까? 노닥거리는 거예요? 이게 뭐에요, 이게? 아니, 누가 누구를 죽입니까? 나중에 손목에 힘이 없어서 못 죽이겠다. 무슨 힘으로 죽입니까? 죽이는데 어떻게 죽이느냐. 미디안 군사가 자기들끼리 자기들 칼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죽이는 방법을 썼죠.
이런 방법을 사전에 300명한테 기드온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적들은 자체적으로 폭파되게 되어 있어요. 지진이 일어나서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이 미디안 군사야, 너희들 저주받아라. 퉤퉤, 침 뱉고 돌 던지고 이런 거 없어요. 그냥 놔둬. 하나님이 안 만나주는 민족은 자체적으로 폭파 중입니다. 폭파해도 안 무너져요? 3,000회 여진이 일어나죠. 7.2, 7.5 여진으로 흔들어서 완전히 다 무너뜨립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은 무너지기 위해서 운영되는 세계에요. 무너지기 위해서. 이유가 뭐냐? 그들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요령 부린다고 해요. 삶의 요령을 부리는 거예요.
사사기 7장 12절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衆多)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 미디안 사람의 숫자가 많은 것, 거기다가 아말렉 사람까지 동원해서 아말렉, 미디안 사람의 그 연합체 숫자가 뭐 같다고 했습니까? 무엇의 중다함 같다고 했습니까? 메뚜기. 그냥 메뚜기에요. 그들은 그냥 메뚜기로 보시면 됩니다. 지금 이 세상 사람을 그냥 메뚜기로 보세요. 메뚜기는 볶으면 맛이나 있지.
그러니까 이 세상은 체로 걸러내면 삼백 명만 달랑 남고, 참, 삼백 명+1이죠, 기드온도 있으니까. 삼백 명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다 저주의 독약을 마시고 같이 지옥 갈 자들이에요. 이게 함께 섞여 있으니까 대단해 보이지만 주께서 복음의 언약의 체로 떠내게 되면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복음 안에 들어온 귀한 신분은. 어디 개돼지하고 비교해요? 비교가 안 되죠.
삼백 명에게는 어떤 무기가 없습니다.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게 한 거예요. 이것은 횃불 들고 항아리 들고 나팔 분 본인들도 납득이 안 되는, 오늘 납득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게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이게. 미쳤지, 이걸 왜 들고 있어.
하나님의 붙이시는 그 전쟁에 참여 된 하나님 백성의 특징은 내 인생을 내가 평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내가 괜찮은 인생이다, 못한 인생이다 라는 평 자체에서 벗어나게 만들어버립니다. 다만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본인도 납득이 안 될 정도에요.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오히려 그게 의심이 될 정도에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계속 그거에요. 새 하늘과 새 땅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전쟁 없이는 못 들어가요. 누구하고 전쟁이냐? 마귀하고의 전쟁이죠. 마귀가 어디 있는데? 마귀는 바로 인간 스스로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살도록 부추기기 때문에 내 힘으로 열심히 한번 살아보자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마귀에 속한 자들이죠, 그게.
여기서 나온 결론은 뭐냐? 성도란 자기를 위한 전쟁을 못하는 사람. 이미 상한 심령인데 무슨 전쟁을 해요? 상한 심령이 전쟁한다고 인생살이 나아지겠어요? 아니에요. 자기 전쟁을 못하는 사람이에요. 아니, 할 필요 없는 사람. 그러고 보니까 오늘 안 온 사람들 많네요. 뭐 자기 전쟁 때문에 참석 못하시는가.
나를 위한 하나님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걸 알아요. 나를 위한 하나님은 없어요. 나를 사용하는 하나님은 있어요. 그러나 나를 사용한다고 내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나를 지켜주지도 않고 나를 위하지도 않고. 오히려 기존에 있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우리보고 촉구합니다. 이 땅의 삶을 네가 접어라. 포기하라.
주께서 우리를 이끄시는데, 우리를 통해서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를 이끄시거든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하나님이 벌이는 전쟁을 경험케 하는 거예요. 그걸 느끼면서 살게 만들어요. 우리를 조용하게 살게 하지 않습니다. 느끼면서 살게 하죠. 느끼면서 살게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포기하게 만들죠. 이 세상에서 승리자 되지 않게 하죠.
그럴 때 우리가 육신적으로 느끼는 것은 뭐냐? 뭘 느끼는가? 수치감을 느낍니다. 남보다 약하고 남보다 건강하지 못하고 돈 없고 가난하고 출세 못하고 권력 없는 것을 우리는 그걸 수치라고 여깁니다. 이게 바로 악마에 길들여진 자녀 모습이죠. 우리의 모습이죠.
그런데 제가 아까 새 하늘과 새 땅을 뭐라 했습니까? 맑고 깨끗하죠. 수치가 없죠.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의를 아나니 하나님의 의를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의 가난과 이런 것들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더 큰 부끄럽지 않은 것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느끼지 않는 그 틈새에 그런 것들을 느끼기 마련이에요. 아이고, 지금까지 내가 이 나이 되도록 뭐했노.
결국 전쟁은 뭐냐? 자기가 자기를 수치스러운 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수치의 대상으로 보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하는 거죠. 부끄럽사옵나이다. 뭐가 부끄러운데? 너 복음 없나? 하나님의 의 없어?
네가 네 수치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전쟁 기준이 아니고 마귀가 준 그 기준을 계속 쥐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세상의 기준을 계속 쥐고 있으니까 버젓이 내세울 게 없다는 게 부끄러운 요소가 돼버린 거예요.
주님께서는 너한테 천하의 뭐가 와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세상적으로 부끄러운 사태에 우리를 푹 젖게 만드는 거예요. 적시게 만들어버려요. 남들이 와서 “너 같으면 벌써 난 자살했다. 우에 그리 사노.” 이런 식으로.
어떤 정신과 의사가 이런 이야기했답니다. 자기가 14년 동안 정신과 공부하면서 자살 시도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한테 왔는데 자살 직전에 되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 자기가 물었대요. “자살하려다 되살아나니까 기분 어떻습니까?” “아이고, 사는 게 이렇게 좋고 다행스러운지 몰랐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새 하늘과 새 땅에 가려 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이에요.
왜 죽느냐? 부끄러워서 죽는 거예요. 부끄러움 없이 그냥 이 땅에 살면 되는데 부끄럽다고 자아를 도피하는 거예요. 자기를 마지막 숨기는 방법이 마포대교, 번개탄. 남들한테도 부끄럽지만 내가 나 보기에도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느냐 뭐 이런 식으로.
그러나 그 사람은 굳이 자살해야 죽은 자가 아니라 죽기 전부터 이미 죽은 자에요. 하나님이 악수를 내민 쪽이 아니라 이 말이죠. 자, 또 다 잊어버렸죠. 하나님께서 악수를 내밀 때 뭘 내밀었다 했습니까? 희생이죠, 희생. 하나님 쪽에서 내민 건 희생입니다. 희생에 담긴 의미가 뭡니까? 대신 죽으심이잖아요, 대신.
부끄럽냐? 나도 부끄럽다! 이런 거요. 주님도 부끄러운 죽음을 죽었잖아요. 주님을 믿는다는 말은 주님의 부끄러움을 믿는다는 뜻이거든요. ‘저 부끄러움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그게 성도의 소원 아닙니까? 저 부끄러움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주님의 당당함에 같이 참여하고 싶다. 그게 아버지의 뜻이니까요. 성령의 뜻이니까요.
뭐 성경에 새 하늘과 새 땅 나오니까 뭐 하여튼 신났어. 우리가 뭐 키즈카페 왔습니까? 이제는 뭐 둥둥 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심판. 부산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저주가 가득 차 있어요, 이 세상은.
저주가 가득 차 있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성도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희생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데 그들은 마치 돈이 없어서 부끄럽고 이 땅에서 성공 못해서 부끄럽다고 여기는 것, 세상은 그게 전부입니다. 남한테 내세울 만한 버젓한 게 없다고 좌절하고 그것도 있으면 자랑질하는 거예요.
검찰, 검사들? 몽골에 땅 사서 돈 벌어가지고 검찰청 전부 다 완전히 날려버렸죠. 이라는 드라마 끝났어요, 12회로. 몽골에 땅 투기하는 사람이 검찰을 완전히 쇄신하는 그런 드라마 내용입니다.
썩어빠진 검찰. 썩어빠졌다니, 누가 누구를 썩었다고 한단 말입니까? 이 땅에는 안 썩은 자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희생하신 겁니다. 십자가 죽으신 거예요. 인간다운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 앞에서 너무 기죽지 마세요.
주님이 이 땅에서 수치스럽게 떠났잖아요. 이건 뭐냐? 사람이 살던 땅을 내가 기피하노라, 이 뜻이에요. 사람이 살던 땅을 내가 기피한다. 더러워서 못 살겠다. 인간 사는 동네를 내가 기피한다. 이게 왕의 땅입니다.
자, 방금 이야기한 것을 성경으로 근거를 찾아봐야겠죠. 에스겔 46장 16절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왕이 만일 한 아들에게 선물을 준즉 그의 기업이 되어 그 자손에게 속하나니 이는 그 기업을 이어받음이어니와”
하나님에 의해 새 성전이 마련되게 되면 그 새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그 양쪽에 무슨 특정 토지가 주어지느냐 하면 왕의 토지가 주어집니다. 그 왕을 에스겔에서는 다윗이라 해요, 다윗. 다윗으로 오신 왕이, 왕이 오셔서 성전을 일으킨다.
아까 우리가 강의 들어보면 대충 윤곽이 드러나죠. 성전은 뭡니까? 하나님이 안식했다는 것을 완성했다는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로 만든 것이 성전이라 했죠. 주의 이름이 있는 곳에.
그런데 그 율법의 완성, 주의 이름으로 완성된 것을 보니까 그게 다윗이 알고 있던 바, 누가 왕이에요? 다윗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새로운 왕이 아니고 율법 안에 계신 분이 다윗 같은 진정한 왕이 되는 겁니다.
다윗 같이 왕이 된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다시 또 정리해드리면, 왕이 된다는 것은 백성을 새롭게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이 왕에게 있다는 말이에요. 세상에서 백성의 대표자가 왕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한테는 백성은 없고 왕만 있어요. 왕이 백성을 새롭게 모집해나가는데 그 모집 방식은 왕에게 구성된 모든 것 다 이루었음을 이렇게 적용시켜서 왕이 백성 되게 하는 거예요. 적용시켜서 백성 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약속하기를, 내가 다윗을 너희 왕으로 보내겠다고 했거든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나와요. 37장 24절,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이게.
백성보고 닦달 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 안에 준비된 왕을 주면서 그 율법을 다 이루신 왕이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데 그 모집하는 방법이, 다윗이 하나님의 왕 앞에서 뭐라 했습니까? 자기가 상한 심령이라 했죠. 하나님은 번제와 제사를 원하지 않아요. 상한 심령을 원한다고요. 그 상한 심령 되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래서 멀쩡하게 따라오는 사람 놔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잃어버린 양 모집할 때 그 모집하는 방식이 뭐냐? 전쟁이에요. 치열한 전쟁입니다. 뭐 양들은 그것도 모르죠. 그런데 목자는 전쟁 벌이고 있는 거예요. 가짜들과. 아이고, 예수님이 뜨면요. 악마가 모든 역량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못 듣도록 저지하잖아요.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고 복음 못 전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권세를 다 동원해서 저지합니다.
왜 저지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 세상은 이미 저주받도록 확정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8장 13절의 말씀인데 그냥 제가 말씀드릴게요.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땅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거 뭐 세 번씩이나 저주를 해버리면 끝난 거죠. 땅에 있는 자에게.
그럼 하늘은 멀쩡하지 않느냐. 12절에 보면 “네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하늘에 있는 해 삼분의 일, 달 삼분의 일, 별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땅으로 떨어져버리죠.
옛 땅과 옛 하늘은 다 찌그러져요. 뭉개져 버리고 찌그러져 버려요. 여기에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예요. 지진도 일어나고 구호물자 보내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공격하고. 우리는 그걸 매일 뉴스로 보고 있죠. 이재명 영장 받냐 안 받냐 지금 그거 하고 있고. 윤석열은 지금 기름값 보조해준다 하고.
우리가 일상으로 대하는 거. 아니, 사는 게 그렇지 뭐. 사는 게. 이 땅에 태어나가지고 살만큼 살다가 늙어서 요양병원에서 늙어 죽으면 그만이지. 이게 지금 하나님의 분노를 완전히 배제해버리는 거예요. 구약에 있는, 구약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무대장치로 만들어준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완전히 배제해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백성 만나러 온다니까요.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거기서 자기 백성을 만나요. 그러나 사람은 그런 건 안중에 없어요. 왜? 마귀가 그런 소리를 못 듣게 만들어버렸거든요. 못 듣도록.
나 하나 건사해서 밥 먹고 살만큼은 이렇게… 연금? 연금 뭐 꼭 필요한가. 한 달에 연금 500만원만 주면 되지. 그런 식으로 인생 살아가고 나머지 할 일 없으면 크루즈 여행이나 어디 놀러 다니며 사는 그게 인생이지. 이게 마이웨이지 뭐. 내 인생 이렇게 살았다, 내 방식대로.
그것도 뭐 상담해준다고, 그러지 말고 착실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착실하게 살라고 하는 그게 상담이 되겠어요? 자살하지 마시고 다시 돌아오세요. 자살 실패한 것도 죽음이고요. 자살 성공한 것도 죽음이에요. 아이고, 큰일 날 뻔했습니다. 뭘 큰일 날 뻔했어. 그냥 살아있어도 큰일이고 죽어도 큰일인데. 자살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안식의 때에 참여 못하는 게 자살보다 더 무서운 일이죠.
궁극적으로 주님이 하시는 전쟁의 방식을 몰라서 그래요. 전쟁의 방식은 우리보고 전쟁하라 하지 않고 예수님 한분의 전쟁에서 이미 확정되었어요. 이걸 다시 쓰겠습니다. 자,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 생애의 자기 확장이에요. 예수님 생애의 자기 확장.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번듯하게 오신 게 아니에요. 죄인의 모습으로 왔잖아요. 죄인의 모습으로 와서 죽으시고 부활해서 영광 받았죠. 그 영광스러운 나라, 그게 새 하늘과 새 땅이에요.
그 안에 뭐만 남겨져 있습니까? 예수님의 일대기가 남겨졌고 그 일대기가 누구를 이겼기 때문에? 누구 때문에 고난받고 누구를 이겼습니까? 마귀 때문에 고난받았고 그 마귀가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그 죽음이 사흘 만에 성령에 의해서 다시 살아남으로써 그야말로 ‘승리했다. 다 이루었다’가 성립되도록 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분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왕이죠. 왕만 덜렁 있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에스겔에 의하면 왕은 백성의 모집에 나서죠. 그래서 에스겔 46장에 보면 왕의 처소, 영토가 있어요. 중간에.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생명의 물이 나오고요. 에덴동산처럼 물이 나오고 48장에 보면 각 지파마다 왕 중심의, 왕에게 배정받고 할당받은 그 땅 중심으로 해서 열두 지파가 거기에 같이 모여 사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 제일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여호와 삼마 (겔 48:35).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다는 거예요. 자기 백성들 가운데 계시는 거예요. 이걸 처소 또는 성전이라 하는 거예요. 그게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거기에 주님의 빛 된 영광성이 나오니까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거기서 물이 흘러요. 22장에 보면 생명수가 흘러요, 에스겔 47장처럼. 흐르고 거기서 가로수로 생명 나무가 환하게 펼쳐집니다.
그렇게 따먹지 말라고 쫓아내놓고 이제 와서 생명 나무가 열렸다는 말은 우리가 따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아니라 왕 되시는 분의 동네이기 때문에 그 왕이 초청한 백성만이 그 생명 나무 과실을 따먹으면서 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되어 있어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참, 소설치고는 아주 대단한 소설이라 하는데 이게 소설이 아니고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실제적 사건에 근거한 거예요. 이게 소설 같으면 제가 여기서 이야기할 필요 없습니다. 소설책 소개하려고 돌아다닐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게 소설 같으면 재미로 보지, 믿을 필요 없어요.
소설이 아니고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실제로 삼 일 만에 살아났죠. 주님이 살아났으면 내가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다’는 말에서 빼주세요. 내가 살아있다, 죽어있다는 주님이 살아있는 이상 그건 무의미한 이야기입니다.
날마다 죽어도 괜찮고 날마다 살아있어도 괜찮고. 그러나 저러나 그게 무슨 대수냐 이 말이죠. 내가 살아있다, 부자 되었다, 출세했다 그게 뭔 대수입니까? 주님이 번듯하게 살아있으면 네가 가난하게 살거나 부하게 살거나 그런 다른 이방 민족, 우상 섬기는 자들의 이야기는 듣지도 마세요.
너나 잘하세요, 너나. 당신 죽었어. 십자가 부활도 모르면서. 그건 인간도 아니죠. 복음이 나오지 않으면 십자가 나오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같이 사는 것. 끝으로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세를 어떻게 하느냐. 내세가 아니에요. 왕과 지금 같이 동거하고 있습니다. 죽고 나면 내세에 어떻게 하느냐, 그건 보람 상조한테 찾으라 하세요. 우리는 죽고 난 뒤가 아니라, 지금 주님은 살았고 나는 사나 죽으나 그건 주의 것이 되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사람이 지어내고 아이디어를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재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서 알아봤사오니 이제는 세상에 어떤 일을 당해도 꿀릴 것 없이 담대하게 당당하고 신나게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