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4:18-25 (제 자 됨)
Re..마 4:18-25 (제 자 됨)
이름 : 이근호(IP:)
제자됨
2002년 11월 10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4:18-25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4: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4: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4: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예수님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이러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으로 충분한 사회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모세의 법이 있기에 그 법대로 준수하면 그것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은 구현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난데없이 예수님이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외치기를,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천국은 이런 회개하는 자들의 차지가 된다는 겁니다. 자, 무엇을 기준삼아 회개를 해야할까요?
그 분은 다른 기준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을 믿는 자는 영생이 주어지지만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돌아가게 되면 그동안 철떡같이 믿었던 율법 준수의 의미는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하라"의 뜻은, 그냥 바르게 살아라가 아니라 이 시대를 제대로 분별해서 심판받지 말고 자신을 따라와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좁은 길= 생명의 길'의 공식은 예수님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다.
사실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고민거리와 고통과는 무관하게 건재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들이 섭섭해 할 필요가 없이 고마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하루에도 12번이나 변하기 마련이니 우리 자신이 행하는 것조차 우리가 믿을 수 없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의지가 단호하고 복음이 튼튼하다면 사실 우리들은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율법 체제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자들에게는 황당한 일입니다. 구원과 축복은 오로지 율법의 준해서 결정지었던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율법을 신봉하고 잘 지켜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헛수고 한 셈이 됩니다. 사실 사람들의 율법 지키기는 상대적인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율법의 내막을 잘 알아서 충실하게 지키고 실천에 옮기는 자는 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간주되었고 반대로 무식하고 여러 가지 형편상 율법 준수에 매진할 수 없는 사람들은 악한 사람으로 분류되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준비를 해야 될 처지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등장한 인물인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생명이 주어진다고 한다면 소위 거룩한 자라고 칭하는 사람이나 세리와 창기도 하늘에서 보기에 다 똑같은 입장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회개하라"라는 것은 이런 전제가 깔려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다 똑같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으면 저주만 주어질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셨다는 율법은 존재할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율법이 있어 그 율법을 지상에서 지켜내는 식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왜 하나님께서 구태여 율법을 주었겠습니까?
여기서 기존의 성직자들은 당연히 반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존의 성직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도 거부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아 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뽑기는 제자들의 가진 능력을 잘 활용해서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되고자 하는 취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일반 민중들의 대표자로서 그들이 어떠한 본심이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뽑힌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단호한 결단을 대단히 칭찬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쫓아간 그 최후의 결말은 무엇이었습니까?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을 버림'입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같이 하면서 보낸 세월은, 과연 예수가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인가 아니가를 점검하는 기간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한 번 믿어보겠다고 나서지만 교회 다니는 도중에도 항상 꺼름칙 할 수 밖에 없는 점은, "과연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다 헛짓이 아닐까?"라는 점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노골적으로 예수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도 없이 아예 교회에서 가짜 예수를 신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처럼 청춘과 재산과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나중에 "공연한 세월을 보내었구나."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필요한 예수상으로 변경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 방식은 이러합니다. 예수님께 대우한만큼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예수상을 심어주는 겁니다. 기존의 율법 체제가 그러합니다. 율법 체제의 특징은 인간쪽에서 해대는 정도에 따라 축복이 유동성있게 제공된다는 겁니다.
이런 율법체제의 습성을 그대로 예수님쪽에서 적용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향해 인간이 해대는 정성에 따라 축복이 차이나게 주어진다는 교리를 수립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는 율법체제나 예수님 체제나 다를 게 없이 되어 버린 겁니다. 성직자와 세리에 있어 차이를 나게 만든 그 율법의 역할을 이제는 예수님이 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세상을 이런 식으로 꾸미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23절-25절에 나온 바와 같이 각색 병든 자와 세리와 창기에게도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가 쏟아집니다. 이것은 바로 창세기에 행사했던 그 하나님의 창조력이 예수님을 통해서 개시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베드로가 제자될 때입니다. 누가복음 5:4-8절에 보면, "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왜 베드로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평범한 보통 위인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받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력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체제는 기껏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생산하고 조립하고 재배치하는 수준이지만 예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능력으로 일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우리의 심령을 거듭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인간들끼리 아무리 상호 비교해봤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없고 오로지 악 밖에 나올 게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봅니다. 단지 예수님이 지니신 그 창조력으로 던져준 자비만이 도달되는 자라면 그 사람이 세리이든 창기이든 상관없이 영생을 얻는 겁니다.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게 되지만 결국 돌아오게 된 것도 제자들이 그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들어왔던 교육 내용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일방적인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말입니다.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평소에 늘 만나면서 "천국에서 누가 제일 높으겠느냐?"하고 논쟁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들의 생각에 호응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쓴 잔을 마셔야 되고 또한 마실 수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같이 합류해야 될 자로서 뽑힌 것입니다. 그들이 증거해야 될 중앙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 의로운 죽음의 의미를 선포해야 될 자입니다.
과연 이들 제자들이 자기네들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이것은 도저히 가당치 않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든, 예수님을 생각하든 마귀가 던져놓은 덫에서 못 빠져나오는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마귀가 만날 때, 마귀는 주장은 이것였습니다. "예수여,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나도 알지만 그래도 떡을 먹어야 그 일을 할 수 있는게 아니겠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나도 알지만 그래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야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지만 세상의 모든 영광을 제공할 수 있어야 사람들의 부러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입니다.
마귀가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유혹한 것은 모든 인간들은 이미 이런 굴레에 못벗어 난채 무슨 행위를 해도 이런 목표를 겨냥하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책은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포기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흔적으로 가지고 또한 부활의 흔적이기도 한 창자국과 못자국을 가지고 다시 제자들에게 찾아들었습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이란 예수님을 크게 보고 크게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광 전부보다 더욱 더 크게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일은다 사소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력이 사람을 이런 식으로 몰아갈 때,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불신자와 다를 바 없지만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위력 덕분으로 예수님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큰 존재인 것을 늘 유지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