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4장 2절 (고창병) 221220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4장 2절 (고창병) 221220b-이근호 목사
자,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고창병자를 고쳐주니까 권력을 쥐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날 왜 하지 않아야 될 일을 왜 하느냐 그렇게 이야기했고 예수님께서는 이게 바로 안식일 날 너희들이 다시 말해서 고창병자를 너희들이 못 고쳤잖아. 너희들 안식일 지키는 것이 이게 아무 효과가 없었잖아. 개인적으로 안식일 지키는 것이 고창병을 고치지 못하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은 이렇게 지킨다는 하나의 표준으로 오신거죠. ‘표준’.
그런데 그 표준이 인간이 해낼 수 있는 표준입니까? 불가능한 겁니까? 불가능하죠. 주님이 하신 일이 내 쪽에서 불가능하면 불가능할수록 이게 기쁜 소식이 돼요. 왜? 자기를 점점 제대로 아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아 내가 돈 버는 것은 가능한 것 같은데 그 나라 의하고는 전혀 무관한 일을 하는구나. 내 의미를 채우는 데는 내가 좀 이렇게 보탬이 될 수 있는데 내가 고창병자였고 무의미한 존재라고 깨닫는 일에 지금 내 일이 하등 도움이 안되는 거에요. 점점 교만해지고 잘난 척하게 되고. 갈수록 오히려 분노만 유발시키는 일을 하는 거에요.
그러면 고창병자를 주고난 뒤 그 다음에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그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는 바로 혜택 받은 자를 통해서 그 다음에 뭐냐 하면은 해석하는 자로 등장해요. 혜택 받은 자를 딱 등장시켜 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기존의 인간 세계에서 해석하지 못한 새로운 해석, 새로운 율법 완성의 해석이 드디어 주어지는 겁니다. 그 해석의 핵심은 뭐냐? ‘없는 자가 구원되고 있는 자는 제거된다’ 이 원리. 없는 자가 구원되고 있는 자는 구원되지 못하고 제거가 되는 방법을 쓰는 거에요.
이 점에 대해서 대구 강의에서 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만나할 때 만나는 뭐냐 하면 바로 외부성이다. 대구강의 초반에 나와요. 만나가 어느 공장에서 만듭니까? 인간의 손에서 못 만들지요. 만나는 외부성이에요. 듣도 보도 못한 그걸 듣보잡이라고 하는데. 하여튼 듣도 보도 못한 게 등장하는 거에요. 듣도 보도 못한 것은 없는 거에요. 있다고 자부해서 여기에 의미를 두고 평생을 여기에다가 몰두하는 인간에게는 만나는 듣도 보도 못한 거에요. 외부성이에요.
그 외부성이 이미 창세기 3장 15절에 이미 일관된 원칙으로 나와 있습니다. 주님의 일관성이 바리새인의 일관성을 공격하고 있는 거에요. 그걸 무너뜨리고 주님의 일관성이 뭐냐? 여성의 세계. 여성의 세계를 펼치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의 세계. 남자의 세계가 날라가고 여자의 세계가 도래하는 거에요. ‘여성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거는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괴테가 파우스트 마지막 그 대목에서 나와요. 독일의 철학가죠.
여성성 또는 여성이 한다 이 말은 이 세상이 가부장적 제도, 남성화된 세계로 굳혔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어요. 뱀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배후에 뱀이 있다는 증거가 이 세상이 여성이 주도하지 않고 남성이 주도하는 세계로 완전히 일반화시켰습니다. 뱀이 배후에 있다는 것. 뱀의 자손을 하나님께서 뱀의 자손의 그 실제성, 실제로 이 세상은 뱀이 지배한다는 그 실제성을 보기 위해서 이 현실에 구체화된 것이 뭐냐? 남성 위주의 세상관이 흐르고 있어요.
그게 창세기 4장에 보면 라멕이라는 사람이 아내 보고 남성의 폭력성을 자랑하는 대목이 나와요. 아까 동영상할 때 그 대목을 했거든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는 둘 다를 알아아죠. 남성성의 세계가 어떤 세계며 그럼 여성성의 세계가 어떤 세계냐? 그 세계에 대해서 함축해서 보여준 도표가 있습니다. 그 도표를 제가 한번 그려볼게요. 자크 라캉이라는 사람이 고안해낸 도표인데
대표 기표의 X, 대표 존재하는 E. 존재한다는 뜻의 Exist 존재하는, 대표 기표의 존재하는, 존재하지 않은 그 누가 있다. 그리고 All, A 거꾸로 한 이게 All인데 All은 모든 X는 대표 기표에 다 종속된다. 이게 뭐냐 하면은 남성이다. 여성은 대표 기표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존재하지 않는 여성은 한명도 없다. 그리고 대표 기표에 모두 속한 것은 아니다. 이런 뜻이에요. S가 타자인데 대타자의 기표를 La, 여성이라는 표기가 이걸 지향하고 이걸 바라보고 있고 또 한쪽은 팰러스, 대표 기표를 바라본다. 이게 여성이 하는 쪽이고 남성의 S, 분열된 남성의 주체는 뭐를 지향하는가? 내 자신의 미흡한 욕망에 소타자의 욕망을 추구한다. 이게 남성의 기능, 여성의 기능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남성은 전체를 항상 주시하는 거에요. 남성은 모든 것을 다 포괄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세상을 누락 없이 전부 다를 전체를 가지는 게 남성의 세계에요. 창세기 3장에서.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거에요.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지배해버리면 여성은 있느냐? 여성은 없어요. 있음을 누가 대신 뺏어가느냐? 남성 있으면 됐다는 거에요. 여성이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여성은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은 없는 거에요. 남성의 보조자만 있죠. 남성의 보조자. 그리고 여자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남성의 이러한 권력 체제에 모조리 다 종속되는 거에요. 모조리 다. 그런데 그 남성 가운데서 딱 하나의 남성만 그 남성 세계에 포함되지 않고 초월해있다 이렇게 보는 거에요. 남성을 대변하는 남성을 다스리는 최고의 남성, 누구겠어요? 하나님 아버지요. 신이죠. 하나님이죠.
여성이 아니라 남성 신이 남성의 세계를 지배하면서 모든 남성들은 그 신에게 전적으로 복종하는 통합된 신의 세계를 체제를 추구하는 겁니다. 그걸 유일한 현실로 보고. 모든 것이 통합되었으니까 여기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뭐가 나오겠어요? 무슨 권력? 남성 권력. 남성 권력이 전부 다에요. 그럼 여성은 어디 있는가? 여성은 있다는 말 하지 말라. 그 집안에 남성 있으면 됐지 여성 있다는 말 할 이유가 없다는 거에요.
있다는 것은 남자한테만 대표해서 있다는 말 해주고 그 집에 강아지가 있든 소가 있든 여자가 있든 전부 다 똑같이 취급하는 거에요. 남자만 있으면 그 집은 제대로 있는 거고 남자가 있음을 다 가져가는 거에요. 있음의 기호 의미를 다 가져가는 거에요. 그래서 옛날에 순장 제도 있잖아요. 왕 죽으면 누구도 같이 죽습니까? 왕비들뿐만 아니라 여자 종들 무덤에다 다 같이 한 100일 쯤 집어넣어서 양식 떨어지면 같이 죽도록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너는 남성에게 예속되고 종속된 팔자이기 때문에 남자 없는 여자는 존재할 수 없어요. 남성의 세계에서. 남자 없으면 그건 살아도 산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구약 성경에 보면 특이하게 누가 등장합니까? 한때 남자가 있었던 여자가 등장해요. 그게 누굽니까? 과부 등장하죠. 이 과부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결혼하기 싫어서 이혼한 그 과부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남성을 잘라버린 거에요. 자, 남성의 세계에서 남성이 없으니까 여자는 과부는 어떤 이미지를 보여줘요? 나는 있어도 무슨 존재? 없는 존재. 있어도 없는 존재. 이게 바로 여자의 후손의 계열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거에요.
남성은 힘이에요. 남성이 힘인데 어떤 여자가 과부 되서 남자를 잃어 버렸습니까? 뭘 잃어버린 거에요? 힘을 잃어버린 거에요. 힘을 잃어버리니까 이거는 있어도 없게 되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무시해도 되는 존재가 되겠지요. 그게 바로 남성 세계에서 등장하는 가끔 출몰하는 바로 무능력한 존재. 있어도 있음의 간주해주지 않는 있음을 인정해 주지 않는 대상. 그게 여성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 권력이죠.
권력을 표기할 때는 뭐냐 하면은 언어로 표기를 해요. 말로. 언어로 표기를 하는데 여성은 이 세상에 없는 존재죠. 여성이라는 단어는 누가 만들어냅니까? 남성이 자기 필요에 의해서 다른 말로 해서 자기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단어이기 때문에 여성이 여성을 쟁취하는 여성은 이 땅에 없다 이 말이죠. 남성 없는 세계가 형성돼야 거기서 나오는 언어를 붙여야 되는데 언어 자체가 인류 역사의 전통상 남성 위주의 세계에서 언어를 교환하면서 권력을 주고받거든요. 모든 게.
그래서 여성을 위한 언어는 없어요. 여성에게 지시하고 명령한다는 그것은 네가 남자한테 이렇게 봉사하라는 필요에 따라서만 지시 명령이 주어지는 거에요. 너를 위해서 하라는 게 없고요. 여자가 좀 머리 좀 다듬고 옷 좀 단정히 입어야 될게 아니냐. 남성이 여성답게 하라는 그 여성답다는 그 것은 누굴 위해서 종을 울리는 여성입니까? 남성이 원하고 있는 이미지에 부합하라고 여성에게 그 지시를 명령을 내리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점에 대해서 어떤 여성이 만약에 남자 자기들끼리 놀고 여성은 개무시하냐 이렇게 화를 낸다면 그것은 뭐냐? 여성의 세계가 아니고 이미 남성화된 권력의 맛을 본 가짜 여성, 여자 모습을 지녔지만 속에는 남성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남성화된 여성의 말이기 때문에 역시 권력과 동일한 거에요. 꼭 남성의 세계에요.
여성이 입을 뻥긋해봐야 그거는 남성한테 들은 거고 어릴 때 아버지한테 받은 말을 내뱉는 되돌려주는 식으로 하거든요. 그래서 소통되는 어떤 의미든 어떤 단어든 그건 남성이 유용하기 때문에 활용되는 개념들이에요. 여성을 위한 여성 개념은 애초부터 인류에 없어요. 여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자, 그렇다면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기분 나쁘게 들립니까? 기분 좋게 들립니까? 어떻습니까? 기분 나쁩니까? 기분 좋습니까?
이것은 기분 나쁘고 좋고가 아니라 이것은 신비에 속합니다. 여성은 신비에 속해요. 남성은 전체를 만들지만 여성은 비전체를 만듭니다. 비전체, 전체 아닌 것은 전체의 일부가 아니라는 거에요. 전체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 여성은. 여러분 지금 제 말이 문맥이 맞는지 지금 막 헷갈리지요. 여성이 없다면서? 이렇게 나오겠지요. 여성이라고 있는 것은 남성의 일부로서 있는 것만 여성이라고 남성이 단어를 정하고 너는 남성이 아니고 여성이야. 너는 아들이 아니고 딸이야 라고 남성 세계에서 명명해 주는 거에요. 지명해줄 때 그 주체가 되는 거에요. 지명해줄 때.
A라는 것은 남성 세계가 전체에서 다 꽉 잡고 있어요. 그런데 빠진 게 나와요. 그 빠진 게 A에요. 인간은 남성들은 빠진걸 욕망하는데 이 빠진 게 어느 부분이냐? 여성 쪽에 빠진 게 있어요. 여성 쪽에. 남자는 여성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신비를 원하고 있어요. 그 신비가 여성 요소에요. 이 말은 뭐냐? 남성들이 여성을 원할 때 키는 얼마고 웃을 때 보조개가 있고 뭐 이런걸 원할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점점 더 여성을 탐욕하게 되면 있어도 없는 존재를 남성은 그런 여성을 원해요. 미쳤지요.
제발 이 땅에 어떤 여성과 유사하지 않는 여성이 되어줘. 이걸 원하는 거에요. 왜? 남성의 욕망은 그 정도까지 가버려요. 이게 뭐냐? A입니다. A는 없는 거에요. 있기 때문에 빠져버린 거에요. 있기 때문에 빠진 거에요. 이것저것 다 있는데 키 큰 여자 키 작은 여자 다 있는데 여기 있기 때문에 그걸 원하지 않아요. 여기 있기 때문에 그것 말고 다른 어떤 것. 이 있는 것이 전체거든요. 전체 말고 다른 어떤 것. 비전체. 그걸 원하는 거에요.
이 말은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의 욕망은 채워질 수가 없다는 거에요. 미흡한 거에요. 결함을 느끼는 거에요. 결함을. 결함을 느끼는 만큼 인간은 욕망을 하는데 문제는 본인이 뭘 욕망하는지를 본인이 지금 모르고 욕망한다는 거에요. ‘이걸 한번 해볼까. 저걸 한번 해볼까.’ 그냥 ‘해볼까’지 뭘 욕망하는지를 몰라요. 이게 지금 바리새인들이에요.
가질 것 다 가졌어요. 권력 다 가졌어요. 권력 다 가졌는데 그들이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은 그 다음 차례 내가 뭘 가질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다 이루었다가 되지를 못해요. 다 이루었다를. 어느 누가 다 이루었다를 제시를 해줘야 돼요. 인간들은 현재 있는 것도 의미 있고 거기에다가 추가해서 다 이루었다 하고 싶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현재 있는 것들이 다 이루었다를 적대하고 방해하고 훼방하는 장애요소라는 사실을 주께서 이야기해버려요.
그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그거에요. 오늘 본문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거에요.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말은 뭡니까? 그게 자기 욕망에 부합되거든요. 높은 자리 앉았는데 다 이룬 제일 높은 자리에요. 옛날에 유대인들이 U자로 자리를 했기 때문에 제일 높은 자리 이렇게 이렇게 앉는 식이에요. 서열이.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재벌 총수들 이렇게 앉아버리니까 다른 게 없어요. 다른 게 없으니까 남성들은 미치는 거에요. 왜 다른 게 없어? 내 욕망은 아직도 배고픈데. 왜 다른 게 없어. 골프치고 벤츠타고 다니고 까불고 다 하는데 그 다음 차례에 뭘 욕망해야 될지를 몰라요. 그 다음 차례에.
그게 자꾸 오해하기를 자기가 미흡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왜냐? 지금까지는 괜찮게 살았는데 미흡한 게 아니고 처음부터 place 또는 영역, 공간이 지금 엉뚱한 공간에 가있는 거에요. 본인 자체가 자폐증, 폐쇄된 공간에 있었어요. 폐쇄된 공간. 백날 거기서 까불어봐도 빠져나올 수 없는 폐쇄된 공간. 특혜는 받았는데 혜택은 받았는데 해석이 안 되는 공간.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특혜는 받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해석 문제에 대해서 받은 본인이 해석을 못해요. 주님은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그 해석을 받은 자가 그 해석을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9절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이 점을 인간들은 이점으로 세상을 해석을 못해요. 왜냐 하면은 말석 갈 거 같으면 처음부터 상석에 안보내면 될 거 아니냐 인간의 해석은 그렇게 해석해요. 인간은. 처음부터 말석 갈 거 같으면 처음부터 상석 거칠 필요 없어요. “너는 말석 가” 이러면 되거든요. 야곱에게 복이 올 거 같으면 에서를 나중에 태어나게 하면 문제 아주 깔끔하게 처리됩니다. 먼저 낳은 자에게 복을 주고 차자에게 나중주고 뭐, 그러면 되잖아요.
왜 순서 왜 바꿉니까? 순서 왜 바꿨지요? 왜 나중에 복 받을 자를 두 번째 태어나게 한 이유가 뭐죠? 왜 그렇게 합니까? 아 왜 그렇게 했어요 주님이. 인간이 지금 갇혀있다는 거에요. 어디에? 악마의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말고 여자의 후손 남자의 후손입니까? 아니지요. 여자의 후손 다음에 누구의 후손입니까? 대결 구조가. 뱀의 후손이잖아요. 악마는 인간이 아니에요. 영적 존재잖아요. 영적 존재. 그런데 인간은 인간에서 인간으로서 마감이 돼요. 못 빠져나가요.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그 빠져나가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현재에 갇힌 네가 그 구조에서 해석불가를 주께서 선언해버리는 거에요.
야곱이 둘째가 되가지고 복을 따낼라고 거짓말을 했지요. 그때 야곱이 제대로 하나님의 복을 해석을 했습니까? 복을 해석을 못했습니까? 해석 했어요? 못했어요? 못했어요. 뺏어오면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해서라도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뺏었는데 그게 복이었습니까? 야곱은 뭘 몰랐습니까? 복을 가지는 내가 이게 복을 가져서는 안 되는 자인 것을 몰랐던 겁니다. 그때 이 땅에 없는 요소가 등장하지요. 얍복 강가에.
누가? 야곱은 에서와 상대하는데 있는 존재만 상대했는데 거기 누가 등장하지요? 밤에. 하나님의 천사가 등장하지요. 천사가 등장해서 야곱으로 하여금 에서와 상대하지 않고 바깥의 전체가 속한 게 아니라 비전체, 에서도 남자고 야곱도 남자잖아요. 남성의 세계가 아니라 남성의 세계도 아니고 남성 세계에 없는 것. 남성 세계에 속한 여성이 아니고 남성 세계에 없는 여성, 그건 바로 비존재에요. 예수님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해석을 인간이 할 수 있는 해석의 한계를 넘어버립니다.
여러분 아까 한 것 다시 써 볼께요. 팰러스 함수 이거는 뭐냐 하면은 기표 또는 주인. 항상 인간 집단에서는 주인이 있잖아요. 아버지는 날 낳으시고 어머니는 날 기르시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아요. 그 부인들이 낳는 게 아니에요. 대표는 남자가 되는 거에요. 왜냐고 물으시면 창세기 3장 16절 17절. 뱀의 개입에서 일어난 인간 세계에 정리정돈, 그것은 바로 여성을 뒤로 돌리고 남성을 대표로해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됨으로서 여성은 없고 1/2 남자. 남성의 보조역할로 전락시키는 겁니다. 남성의 부분이죠. 남성의 일부로서.
그렇다면 여성은 자기들끼리 남성 치우고 우리끼리 여성의 세계하자 이렇게 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여성을 표기하는 기호도 없는 주제에 그어버리는 거에요. 기호. 여성을 표현하는 기호도 없는 주제에 뭘 추구하느냐? 바로 남성의 기표를 남성의 대타자를 추구하는 거에요. 그리고 뭘 추구하느냐? 남성의 대표 기표의 주인. 주인 기표가 왜 중요하느냐 하면은 여기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겠어요? 모든 권력이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를 갖고 싶은 이유가 세상에 유동하는 권력에 뛰어드는 방식이 그거에요. 아무리 여자가 돈이 많아도 그럴싸한 남자가 있어줘야 보디가드든 백수든 관계없어요. 있어줘야 이 사회에서 인정을 받게 돼요. 그래서 성경에서 과부라는 게 결함요소가 되어버리는 거에요. 힘이 없는 요소가 되는 거에요. 고아와 과부와 그 다음에 이 땅이 없는 나그네. 땅 이야기 조금만 더 해볼게요. 땅에서 인간이 쫓겨나서 땅을 차지할려고 했어요. 문제는 땅을 차지할 때 그냥 차지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아닙니다. 땅의 주인이 따로 있고요 그 주인의 원칙이 맞지 않으면 땅을 점유한다는 그 이유로 땅으로부터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가인 같은 경우에.
그럼 땅의 주인은 누구죠? 약속의 땅에서 땅 주인은 누굽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땅 주인이죠. 땅 주인인데 거기서 우상 섬기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됩니까? 꺼져라! 나가라 해가지고 완전히 땅 없는 나그네 신세처럼 뿔뿔이 다 헤어지고 말았잖아요. 왜? 땅은 그냥 땅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이 살기위한 땅이었단 말이죠. 그 땅에 하나님의 이름을 추구하지 않는 자가 끼어들 때 이거는 뭐냐? 이거는 이질적인 요소지요. 이거는 내쳐야 될 대상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 인간은 땅도 잃고 하늘도 잃어버리고 그게 바로 지옥이잖아요. 지옥은 뭐가 지옥이냐 하면은 남을 원망하는 게 지옥이에요. 남을 원망하는 게.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운 경우가 남을 원망할 수밖에 없을 때 가장 고통스러워요. 너 때문에 나 망했다. 남 탓할 때 가장 고통스러워요. 그 사람은 지금 자기가 저주하는 사람은 지금 잠 잘 자고 있어요. 본인만 고통스러워요. 본인만. 네가 뭔데 내 의미를 박살내놨느냐. 지금 혼자 발작하고 있어요. 혼자.
정신분석에서 인간의 신경증 또는 정신병 원인을 어디다 두고 있느냐 하면은 바로 권력 문제로 해결해버려요. 내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냥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존재하게 되어있어요. 권력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그럼 권력은 어디서 옵니까? 이 세상의 일부를 내가 점유해야 내가 주체가 되고 사람이 사람 구실하고 사람답게 사는 게 돼요. 권력이.
그런데 이 권력에 내가 권력을 가졌잖아요. 더 쎈 권력 오게 되면 어떻게 돼요? 더 쎈 권력이 오게 되면 억압을 받고 빼앗기게 되겠지요. 눈치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나’라는 이 자존감이 파손되겠지요. 파손된 만큼 빨리 보상해서 나머지 파손된 부분을 빨리 다른 걸로 채워야 이걸 치료라고 해요. 치료. 이걸 치료라고 하는 거에요. 빨리 보상을 하는 것을 치료라고 해요. 치료. 빨리 보상해야.
보상이 안 되면 치료가 안 된 상태에서는 치료 안 된 증상을 보이겠죠. 동네방네 누구 욕하고 돌아다니고 난리에요. 내 뒷집에 사는 그 인간 말야. 나한테 이런 짓했어. 치료 안 된 만큼 계속해서 발작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걸 히스테리라고 해요. 히스테리. 계속 발작을 일으키는데 히스테리는 신체적인 변화까지 유발해요. 소화도 안 될뿐더러 이상하게 병명은 없는데 이상하게 주눅 들어있어.
도대체 이게 지금 어느 게임에 놀아나는 게임이에요. 남성의 세계에 놀아나는 게임이고 악마의 놀아나는 게임이에요. 악마에. 의미의 놀이판에서 자기가 패배자가 되는 거에요. 의미의 놀이판에서. 나도 사람대우 받고 싶은데 의미의 놀이판에서 자기가 패배자된 거에요. 원인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은 내가 힘이 모자라서 그렇다는 거에요. 힘이 모자라서. 힘이 모자랐으면 그럼 힘을 가진 자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 아버지 같은 분이죠.
사회에서 아버지 같은 분은 누굽니까? 순양그룹 회장. 재벌총수. 그럼 교회에서 아버지 같은 분은 누굽니까? 하나님 아버지. 간절히 기도하는 거에요. 아버지~~~. 주여~~~주여~~~~~~주시옵소서. 뭐!! 나에게 의미를 주시옵소서. 내가 남한테 사람으로 인정받게 하옵소서. 나도 사람대우 받게 하옵소서. 고창병 날라가버렸어요. 벌써 고창병 날라가버렸어요. 무의미한 존재 이거 날라가버렸어요. 내가 구원의 기준인 것은 다 날라가버렸어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구원의 기준인 것 다 날라가버렸어요.
어떻게 하면 저렇게 대우 받는 사람 되는가. 이 잘못, 이 폐쇄된 구조. 12제자가 그대로 그걸 밟아갑니다. 예수 3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나에게 돌아올 건 뭐냐? “예수님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높습니까?” 권력을 추구하죠. 남성의 세계에요. 눈에 보이는 게 전부에요. 예수님도 이 남성의 세계 키우기 위해서 오신 분인 줄 알고 있어요. 우리 교회 부흥하기 위해서 예수님 오신 줄 알고 있어요.
11절에 봅시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거는 바로 예수님 본인이 예수님에 대해서 해석을 내린 거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나 낮아지면서 죽기까지 복종했잖아요. 그러면 오늘 성경해석의 해답은 이미 나왔어요. 간단합니다. 내 죽음에 동참하여 나랑 같이 여성이 되자. 또는 여자의 후손이 되자. 여성이 되자. 여자의 후손이 되자.
여자의 후손은 여자가 여자를 낳고 여자가 여자를 낳고 여자가 여자를 낳는 게 여자의 후손이죠. 뱀의 후손은 뱀이 뱀 낳고 뱀이 뱀 낳죠. 그런데 여자의 후손은 이 전체에 포함이 안 되어 있어요. 비전체이기 때문에. 전체는 항상 누가 가져갑니까? 뱀이 가져가고 남성이 가져가지요. 그 남성의 세계, 뱀의 세계 구멍을 뚫듯이 사건으로 출몰하는 것이 뭐다? 그게 바로 언약 사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만나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노아의 방주. 인간들이 구상하지 못한 거에요. 생소해요. 새로워요.
“십자가 피로 내 살과 내 피로 너는 영생을 얻으리라” 이거는 너무나 생소한 거에요. 구약성경에 그런 거 없어요. 구약성경에 율법을 지켜야 영생이 있어요. 잠언서 나와요 말씀을 지키는 자가 생명나무다. 나오거든요. 잠언에는 그렇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은 그걸 뭐로 해석해버립니까? 말씀이라는 혜택을 입었는데 혜택을 입은 말씀을 해석할 자가 아무도 없어요. 왜? 모든 인간이 어디에 속하기 때문에? 전체에 속했기 때문에. 남성의 세계에 속했기 때문에. 뱀의 세계에 속했기 때문에. 그래서 못 빠져나오기 때문에. 해석력이 전혀 없어요. 해석할 수가 없어요. 전혀.
사울이라는 사람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뭐였는가 하면은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해서 죽이는 거에요. 그리고 스데반 집사 죽을 때 참관자로 누가 주도자로 등장했는가? 사울이라는 사람이죠. 자, 그 순간에 사도행전에 그 이야기 나오잖아요. 그 스데반 집사 이야기 나올 때 그 때 어느 누구도 그 대목 읽으면서 어느 누구도 이 사울이 사도가 된다는 낌새라도 있었습니까? 없지요. 이게 바로 생소한 거에요. 네가 천당 가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너같이 악독하게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체포해서 죽이라고 넘기는 인간은 진짜 너는 지옥 간다. 그 당시 교인들이 수근 대지 않겠습니까? 사울이 악독하다는 것을 아니까.
그런데 주님은 누굴 찾아갔습니까? 바로 그 사울을 찾아가서 사울을 바울 되게 만들었습니다. 똑같은 변화가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야 한다는 거에요. 계속해서 결핍을 느끼면서 뭔가 채워야 되고 더 의미를 계속 쌓아야 된다고 하는 이 배고픔. 4강 올라가도 아직 배고프다는 거에요. 히딩크. 그런데 배불러서 뭐할 건데? 우리는 그 질문이 중요한 질문이에요. 내가 배부른다 하자. 그래서 뭐? 배부름이 그 나라 의입니까? 아니잖아요.
주께서는 이미 “내 살과 내 피 마셔라. 영생이다.” 이미 먹고 아주 단촐해요. 복잡한 거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내 살과 내 피를 무슨 수로 먹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걸 먹을 생각이 없지요. 왜? 탕수육 먹는다고 바빠가지고. 지금 내가 당장 배불러야 에너지 찾아가지고 또 노력해서 내가 의미 있는 인간 되기에 분주한데 그 딴 거 예수님의 살과 피 먹어서 뭐하는데.
주께서는 바로 해석을 해버리는 거에요. 해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은 네 살과 네 피를 먹는 그것이 바로 너로 하여금 너를 더욱 더 썩어문드러지게 만드는 거에요. 우리를. 집에 있는 돈이 나를 썩어문드러지게 만드는 거에요. 그럼 그 돈을 교회에 갖다 바치면 우리는 안 썩습니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교회에 갖다내도 그거는 잊을 수가 없어요. Oh I believe in yesterday. 제가 지난번에 얘기했지요. 나는 과거를 믿는다. 인간은 자기 한 일을 잊을 수가 없어요.
이래도 안돼요. 저래도 안돼요. 인간은 어떻게 자기에게 시도를 해도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영향력은 없습니다 라는 해석을 본인에게 내리면 돼요. 그 해석을. 참 쉽죠잉. 본인 보고 그 해석만 내리면 돼요. 본인 보고 그 해석만. 그게 본인도 놀라는 생소함이에요. 내가 미쳤지. 내가 왜. 내가 미쳤지 그런 해석을 내가 왜 내리는데. 우리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 하면 우리는 이걸 지킬려고 해요. 이걸. 이걸 지킬려고 하는데 이걸 지킬려고 노력하는 자가 바리새인들이에요.
이거는 지키는 게 아닙니다. 왜 지키는 게 아니냐 하면은 이걸 지키면 생소하지 않아요. 지켰다 할 수 있는 자가 내가 기존에 의미 있는 내가 되는 거에요. 나를 무의미로 바꿀 수 있는 해석이 나한테 주어져야 돼요. 내가 고창병이라는 아픈 데는 없지만 고창병이고 나는 무능한자라는 해석이 주어질려면 내가 직살 나게 고생을 하는 게 아니고 고생 받았다고 구원받을 거 같으면요 이 세상에 고생한 사람들 많습니다. 참 세상사 들어보면 서글픈 사람들 많아요.
그게 아니고 생소하게 내 이야기, 내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 이야기가 쓱 들어온다니까 SSG. 그냥 쓱 들어온다니까요. 그냥. 이거는 내가 훅 들어오기 때문에 나한테 들어오기 전에 나한테 검사받아 이게 안돼요. 이게 되지를 안 된다니까요. 그리고 훅 들어왔다가 날라가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수시로 생소하게 내 욕망과 욕구를 쟁취하기 위해서 남한테 안질라고 애쓰는 가운데서도 이건 눈치코치도 없이 쓱 들어와버려요. 그래 이겨서 뭐하는데? 해서 무슨 낙이 있는데? 그 나라 의와 무슨 관계있나? 훅 들어온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남하고 경쟁하다가 피식 웃어버리죠. 아 이 경쟁의 헛됨. 비교하는데 이게 무의미함. 피식 웃어버리죠. 자유가 사악 찾아옵니다. 자유가 찾아와요. 자유가. 아 내 일 없고 주의 일로 바꾸는 교체되는 과정 속에 주님이 나를 거기에 집어넣었구나 네가 바로 고창병이고 나는 안식일을 지켜야 되고 너 같은 인간이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에 딱 적합한 존재가 되는 거에요. 네가 무능하고 무의미함으로서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이 유일하게 예수님이 살과 피가 하나님 앞에 받아지는 의미 있는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언약의 새 언약의 바탕이라는 사실을 또다시 증거하게 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증거하게 되지요.
그 뒤에 해석은 전부 다 해석이니까 쉬워요. 12절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자, 이거는 무슨 세계냐 하면은 아까 남성의 세계 그대로 보면 돼요. 남성의 세계는 전체의 세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여기서 빠져나가지를 못합니다. 모든 존재는 이 의미에 권력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의미의 지배를 받고 의미 권력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시작을 그렇게 시작하는 거에요. 남자든 여자든. 똑같은걸 추구해요.
그걸 바리새인도 마찬가지거든요.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 우리 인간들이 하는 일.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해요 왜? 해야 그 중에 너도 얻어먹었으면 너도 나 대접해야지 가 성립되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12절을 끄집어낸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이 행위에서 벗어날 자는 너희들 중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이에요. 사람에게 사람 대우 받을려고 인정하지 마시고 주의 해석의 일부에 들어가세요. 주께서 ‘이건 아니고’에 들어가세요. 들어가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안 되지만.
우리는 그걸 ‘맞습니다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인정하세요. 해놓고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이건 돼요? 안돼요? 무능하지요. 이게 그래서 우리는 고창병이에요. 그 나라에서 우리는 고창병이에요. 전혀 우리는 어떤 걸 해도 우리는 그 나라 의에서 했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이렇게 주어진다는 것은 이미 이 말씀이 성취됐다는 뜻이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료됐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할 건 뭐냐? 내가 내안에 누가복음 14장 12절, 13절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게 되면 그게 바로 주님의 의미고 우리는 주님의 의미를 담아서 전달하는 전달자의 기능이죠. 그걸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행한 게 아니고 내가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지킨 자가 되고 너는 못 지켰는데 내가 지켰어 라고 증거하게 하시라 이 말입니다. 참 쉽지요. 이 말씀에 대해서. 그러니까 누가 구원받은지 제자들은 몰라요.
제자들은 모르는데 제자들은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가는 거에요. 몰라요. 모르지만 제자들이 가서 전도하고 보니까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요. 그러면 뭐냐?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다 믿어요. 그러니까 주의 일에 우리는 아무것도 개뿔도 모르고 참여했는데 그것이 이미 하나의 주님의 해석을 위한 과정 속에 자기 백성을 집어넣은 겁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할 건 없어요. 다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투쟁은 지금도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을 벌리고 있다는 거에요.
“오직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네가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그 나라 의를 구하라” 그러면 대번에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게 그럼 굶어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굶어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게 바로 남성의 세계죠. 그래서 아까 뭐라고 썼습니까? ‘내 죽음에 동참하라’ 더 어렵게 말씀드릴께요. ‘내 죽음에 이미 동참된 것을 확인하라’
한국에서나 미국 가나 어디 가나 이미 나는 죽은 자임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확인하다가 또 하루 지나고 확인하다가 또 하루 지나고 나중에 96세 돼서 죽으면 그게 죽은 모습이 바로 원래부터 나는 고창병자고 원래 죄 짓다가 죽게 될 인간인 것을 확인됐잖아요. 주께서 성공시켰잖아요. 너 봐. 내가 죽는다고 했잖아. 너 죽었잖아. 됐잖아. 이미 죽음에 참여한 사람은 바로 이미 주님과의 해석을 주고받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일방적으로 차고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자, 이제 14절에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의인들의 부활 시, 그러니까 이미 영생을 받았으면 주님의 공로로 받은 거에요. 받은 것은 주님의 공로로 받고 우리가 이 세상에 남은 생 사는 것은 왜 그게 내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공로인가를 고창병으로 확인해가는 삶, 이게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아득한 먼 남의 일처럼 여기고 비현실적이고 실제 하지 않는 일방적인 공식인줄 알았습니다만 이게 실제 삶으로서 매일 삶으로서 또다시 구체화 되고 있는 현장에 대해서 우리가 놀랍고 감사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