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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강남-누가복음 14장 2절 (고창병) 221220a-이근호 목사자유게시판누가복음

강남-누가복음 14장 2절 (고창병) 221220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4장 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 말씀에 그림의 위치를 한번 잡아 보겠습니다. 예수님 계시고 바리새인이 있고요 고창병, 몸이 퉁퉁 붓는 병 고창병, 몸이 붓는 고창병, 수종병이라고 하고요. 그 다음에 그때가 안식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하나 따져보게 되면 바리새인은 그들의 존재가 권력 효과죠. ‘권력 효과’. 똑같은 인간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바리새인이 존재하는 것과 강아지가 존재하는 것과 달라요. 돌멩이와 달라요. 바리새인이 있다는 것은 바리새인이 그 당시의 권력을 꽉 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꽉 쥐고 있으니까 지도층이죠. 바리새인 밑에 고창병. 고창병은 뭐냐 하면은 전적 무능력자. 전적으로 자기가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 어찌할 수 없이 확정된 자. 확정되어 버린 자. 이 고창병이 무능력자죠. 그때가 안식일이다. 그러면 이렇게 따져볼 수 있지요. 바리새인은 권력을 갖고 있으나 전적 무능력자에게는 어떤 변화를 줄 수 없는 자이죠.

권력은 있어요. 그 당시의 권력을 쥐고 있으니까. 권력 있는데 그들이 권력 속에서 고창병든 자가 있으니까 그 권력가지고 그 고창병 걸린 사람에게 뭘 해줄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못해주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은 전적 무능력자가 여기에 권력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권력도 동일하게 무능력한 권력이 되어버려요. 무능력한 권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능력한 권력을 행사하지도 못하면서 그들은 뭘 지키느냐 하면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우기죠. 안식일을 지킨다. 안식일을 지키면 뭐 합니까. 무능력한데. 능력 없는데.

자, 이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는 안식일을 중간에 두고 지키면 옳다. 안 지키면 그르다. 이렇게 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권력으로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 그 문제를 그들은 자신의 기준점으로 쓴 거에요. 안식일을 지켜야 돼. 왜?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그럼 안식일을 안 지키면 그건 옳지 않는 일이 되는 거에요. 잘못된 일이 되어버리죠.

옳다 그르다 기준은 바리새인들이 지니고 있잖아요. 지니면 뭐합니까? 고창병에 아무런 능력이 없는데. 아무런 힘을 못 쓰는데. 그리고 고창병자도 본인이 나을려고 애를 써도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 이 전체가 안식일까지 포함해서 안식일 지킨다는 이 사람들 전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무능력자, 무능력한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 나의 어떤 시도가 나에게 전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이 소식이 기쁩니까? 슬픕니까? 이것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은 없어요. 이것보다 더. 내가 바리새인들처럼 안식일을 지켜서 옳다 옳은 게 무슨 소용 있어요? 안식일 지키는데 고창병 하나 못 고치는데 무슨 소용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나한테 착하게 사는 것. 착하게 사는 것도 없지만 착하게 산들 그게 내 인생을 변하게 해줍니까? 안 해주지요. 이게 왜 기쁜 소식되느냐 하면은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미리 땡겨서 알아버리면 이것보다 더 깔끔한 결론이 없잖아요. 이게 최후의 깔끔한 결론이잖아요. 내가 아무리 반듯하게 살고 바르게 산다 노력할지라도 내가 고창병이라면 내가 수종병이라면 뭐 그래서 뭐? 내가 반듯하게 산다고 내 병이 낫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사람들은 왜 이 기쁜 소식을 왜 놓쳐버립니까. 이걸 놓쳐버리니까 아무리 복음 알고 아무리 신앙생활 열심히 해도 그 인생 자체가 새드 무비, 슬픈 영화와 같아요. 늘 슬프고 찌질이고 우울하고 낙담하고. 낙담이라고 하는 것은 기대할 필요도 없는걸 괜히 기대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풀에 넘어진 거에요. 지가 지 풀에. 내가 용을 쓴다고 해서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안식일 율법 지켰잖아요. 그래서 뭐? 율법 지키면 용을 뺍니까? 뭐 됩니까? 율법 지킨다고 우리나라 8강에 들어갔던가요? 월드컵에. 안 들어가지요.

제가 화장실 다녀오다 보니까 학원 애들이 복도에 3층에 까불고 놀아요. 시끄럽게 장난치고 놀더란 말이죠. 쉬는 시간인지. 그런 생각했어요. 그들이 초등학교 학생이 까불고 놀고 재미나게 노래하고, 여러분들 그게 그 나라 의입니까? 그 나라 의에요? 아니지요. 그래서 제가 만약에 “얘! 너희 여기서 좀 까불지 말고 뛰지마.” 이렇게 하면 그러면 아저씨 내가 하는 것이 그릅니까? 내가 틀렸습니까? 옳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에요.

지금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대하면서 무슨 태도를 갖고 있느냐 하면은 내가 안식일을 지키니까 옳다. 안식일을 위반했으니까 그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애들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놉니다. 까불고 뛰고 쉬는 시간에 깔깔 거리고. 그게 그 나라 의입니까? 그 나라 의에요? 아니지요. 그러면 제가 만약 아이한테 “이게 그 나라 의 구하는 게 아니야” 하면 그 애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그러면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내가 안해야 될 행동을 한 겁니까” 라고 되묻겠지요. 되묻겠지요.

바리새인은 율법을 가지고 자기에게 영향력을 행사할려고 하는 거에요. 어떤 쪽으로? 내가 나쁜 나를 괜찮은 나로 그럴싸한 나로 전환시키는 기회로 삼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그게 그들이 뭘 갖고 있다고요? 그런 그들이 뭘 갖고 있다? 권력을 쥐고 있는 거에요.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누가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의견으로 거기 초점이 전부 다 모였다는 거에요. 인간은 그 나라 의를 몰라요.

다만 아는 것은 내가 어느 정도 옳을 수 있는가 생각해요. 그 나라 의가 아니고 내가 어느 정도 옳을 수 있고 어느 정도 내가 나쁜 길에서 빠지지 않고 좋은 길로 나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하면 뭐합니까? 고창병 하나 못 고치는데. 무능력한데요 그게. 고창병을 바리새인들이 못 고친다는 말은 고창병=누구다? 그들이다 이 말입니다. 그들. 오늘날 고창병이고 이 꼴 나지요. 나. 내가 까불고 뛰고 한다고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왜? 고창병자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나에게 어떤 일을 행사해도 그게 나에게 아무 영향력을 주지를 못합니다. 이게 무슨 소식이라고요?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거 모르고 복음 수십 년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이거 깔끔하게 정리해야 돼요. 깔끔하게 정리해야 됩니다. 서로가 다 나는 옳게 살고 싶어 하는 것들의 권력집단에서 고창병, 본인도 못 고치고 남도 못 고치는 고창병 환자가 하나 여기 출몰한 거죠.

출몰하는데 그들은 출몰한 것을 외면하고 기피하고 그들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안식일을 지키는데 달려가지요. 그래서 그들이 무슨 이득 봤습니까? 안식일 지켜서 무슨 이득 봤어요? 그리고 고창병 걸린 이 사람은 또 뭡니까? 이 사람은 남들은 멀쩡한데 자기는 손도 쓸 수 없는 고질병에 걸린 거에요. 그렇다면 고창병 안 걸린 다른 사람들은 자기 옳고 바르게 살고 율법 지키고 바빠가지고 그들에게 뭐가 남느냐 하면은 나는 이렇게 의롭다. 나는 이렇게 의미 있다 이렇게 되지요.

그럼 고창병자는? 고창병자가 자기한테 내세울만한 게 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의미 있습니다 내세울만한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뭐냐? 나는 이렇게 안식일도 지키고 바르게 살려고 애쓴다. 이게 구원의 기준이냐? 아니면 해볼래도 해볼게 없는 고창병자가 구원의 기준이냐를 주님께서 안식일과 연계해서 묻는 거에요. 안식일과 연계해서. 너희들은 안식일 지키라는 계명이 있다 할지라도 너희들은 고창병과 똑같이 안식일 계명과 연결되지 못하고 끊어진 상태. 단절된 상태. 그저 남들 다 동의하니까 진짜 그게 진짜 의미 있는 줄 아는 권력을 쥐고 있는 권력 효과로서 어른 행세하는 바리새인들, 그런 것들만 양산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이점을 헤쳐 나가는데 있어서 이렇게 헤쳐 나가셔야 됩니다. 옳다 나는 그르다. 나는 옳았는가 나는 그른가. 하나님께서는 뭐냐? 죄와 의 또는 의와 죄를 대비시킵니다. 의와 죄. 인간은 의와 죄는 상관없어요. 내가 옳은가 내가 그른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내가 옳은가 그른가를 생각하는 자체가 한 번도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옳지 않게 살고 옳은 쪽으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해본 적 없기 때문에 어디에다가 희망을 거느냐 하면은 내가 바르게 살면 바른 사람 되고 나쁘게 살면 나쁜 사람 된다는 생각을 계속 그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 자들이 모여서 인간 세계에 권력이라는 체제가 마련되는 겁니다. 특히 바리새인 유대인 같으면 그 권력에 바탕이 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죠. 말씀대로 살자가 이게 권력을 쥘 수 있는 토대가 되어버렸어요. 바리새인들이 말씀을 지킨다고 자부하고 그 밑에 서열화 되어서 나는 바리새인보다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돈 벌면서 열심을 한다가 쭉 뒤에 줄지어서 줄을 서는 거에요. 바리새인들은 자기는 최고라고 여기고 있고.

그런데 주님께서는 거기에 뭐를 딱 발생시켰습니까? 본인도 왜 이런 병이 걸렸는지를 모르는 사람. 그게 누구죠? 고창병 걸린 사람 딱 집어넣지요. 왜? 다른 사람은 나는 오늘도 착하게 살았어. 그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보람과 이유가 있어요. 왜? 계속 말씀대로 율법대로 살면 안식일 지키면 또 착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나는 여기서 어제도 착했는데 오늘도 착한 일하면 점점 더 착한 게 누적이 되어서 하늘나라가 저만치 가까이 보인다 뭐 이런 식으로 자부를 했던 사람인 반면에 고창병은 지금 자기 몸 하나도 간수 못해요.

그러니까 자기한테 뭘 묻습니까? 오히려 이렇게 질문하죠. 왜 나는 의미가 없습니까? 하나님이여 다 같은 인간인데. 왜 나는 내놓을 수 있는 아무런 의미가 없나요? 나도 저 사람처럼 날마다 성장했다 날마다 진보했다 날마다 더 나아졌다는 그런 바램 저도 해볼 수 있는 그런 기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소망 있을 거잖아요. 절망적이에요 이거는. 같은 인간인데. 절망적이라 이 말이죠.

착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이 고창병 걸린 사람보고 얼마나 놀리겠어요. 전생에 얼마나 죄를 지독하게 지었으면 저렇게 병 걸려가지고 바리새인 밑에 고창병 있거든요. 고창병. 우리처럼 안식일 제대로 지키면 저렇게 병은 안 걸리지. 분명히 안식일 위반했을거야. 성경에 나오잖아요. 안식일 위반했을 때 돌로 쳐 죽이라고.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은 항상 옳은 것만 보시고 다 지켜보시니까 안식일을 위반했으니까 분명히 그거는 고창병 걸려도 싼 그런 무슨 범죄 이력이 있을 거야라고 이렇게 비난하면서 스스로 자기들의 잘남을 지금 변호하고 있는 그러한 대상자가 되는 거에요. 빌미가 되는 거에요. 빌미가.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 세계의 일관성입니다. 인간 세계에 통하는 의미의 일관성. 바리새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줬고 그 말씀을 지키고자 애쓰는 만큼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가깝고 반면에 이런 고창병 걸린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에 저주받아서 고창병 걸려서 이 땅에서도 저주받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그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우리가 옳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의 기준이다라고 자부하는 그걸 뭐라고 합니까? 이게 하나의 권력화 되었다. ‘권력화’.

권력은 욕망의 대상입니다. 권력은 이 땅에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삶을 힘 있게 시련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은 권력이에요. 내 욕망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계기. 이게 권력입니다. 너도 나도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람들 어려워도 힘들어도 참고 견디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 권력에서 누락된 사람은 누굽니까? 오늘 본문에서 누구에요? 고창병 걸린 사람.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요. 아이고 지지리 복도 없는 것. 지지리 복도 없지. 나 왜 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고창병 걸린 사람이 구원의 기준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 반전이 일어나죠. 고창병 걸린 사람이 구원받은 자의 표준이라면. 이 권력은 어떻게 됩니까? 이 권력은 한꺼번에 헛것으로 완전히 와르르 다 무너지겠지요. 권력을 추구했는데 누가 와서 권력을 지탱하고 있는 짝대기를 걷어찬다면 그 권력을 추구했던 자가 짝대기 걷어찬 분을 가만 두겠어요? 안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갖고 있는 권력 가지고 그 사람을 죽이겠어요? 어떻게 합니까? 죽일려고 하겠지요. 왜냐하면 자신들의 일관성이 날라가버리니까요.

자, 일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일관성을 찾는 이유가 일관성을 해야 정서적 안전성을 보장 받아요. 안정성.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거든요. 그게 행복이죠 뭐에요. 그게 행복이잖아요. 우리에게 행복을 줬던 그 일관성이 고창병을 빼고 한 일관성이죠. 고창병자를 안 넣어준 일관성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의 기준, 우리가 나는 잘났다 옳았다 이걸 걷어차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그 나라 의에요. 그 나라 의를 이룰려면 우리가 고창병자가 돼야 돼요.

자, 다시 한번 복습해봅시다. 고창병 특징은 뭐냐? 특이점은 뭐냐? 자기가 어떤 노력을 해도 자기의 몸에 변화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줄 수 없다. 자기가 아무리 몸부림 치고 믿음 소망 사랑 별 짓을 다해도 자신의 팔자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것. 왜냐하면 이건 고질병이기 때문에. 사람 손을 댈 수가 없어요. 어지간히 해서 낫는 병 같으면 고창병 걸리지도 않습니다. 고창병 걸린 사람이 등장하지도 않아요. 손을 쓸 수 없어요.

이 인간계 권력 구조가, 권력 구조를 한꺼번에 와해시키는 그런 무능력한 그 스팟, 지점. 무능력한 장소. 그 고창병 있는 그 자리. 아 저 인간만 없으면 내가 기분 좋을 건데. 성경에도 그런 거 있잖아요. 성경에도 있고 춘향전에도 그런 거 나오지요. 자기 생일날 기쁜데 성춘향 보고 기분 확 잡치는. 기분 좋다가도 확 잡쳤잖아요. 성경에도 그런 거 나오지요. 안 나와요? 에스더 5장 9절 “그 날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나”

빼고 싶은 그 요소가 탁 끼어가지고 온전한 쾌락, 온전한 만족을 용납 못하는 요소. 그게 딱 끼어있는 거에요. 전력을 다하여 그 끼어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뺄라고 갖고 있는 권력을 거기에다가 집중 시키겠지요. 그게 누구냐 하면은 그게 바리새인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방금 누구라고 했습니까? 바리새인이라고 했지요. 그게 우리 자신 아닙니까. 우리 자신.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이게 약점이다 뭐 그런 거 없어요? 내가 다른 건 다 좋은데 여기 덧니가 나가지고 그것만 빼면 나 완벽한데 뭐 이런 것 없습니까. 눈엣가시 같은 그런 존재.

단순히 인간 세계가요 주님 보시기에 미흡한 세계가 아니에요. 반대되는 세계입니다. 반대되는 세계. 극도의 고창병자는 인간 자신들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 박혀있는 그 고창병자. 인간 누구도 그 사람의 병을 못 고치게 되어 있는 병이 박혀 있는 그 상태. 인간이 감추고자 해도 노력해도 안 되는 취약점 자리에 고창병이 있지요.

그래서 그 나라 의와 이 나라, 세상과의 단지 틀리다는 게 아니고 반대에요. 반대라는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무심코 추구하는 것과 반대로 가야 뭐가 있다? 거기 천국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총동원 다해요. 그러면 고창병자는 알아요. 어떤 능력을 총동원해도 나는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고창병 입장에서는 이게 절망입니까? 이게 당연한 거에요? 이 질문 중요합니다. 둘 중에 하납니다. 답변해보세요. 이게 절망입니까? 당연한 겁니까? 이게 절망적인 겁니까? 당연한 겁니까? 당연하지요. 그래야 반대가 됩니다.

남들은 자기가 성공 못해서 환장했잖아요. 자기는 내가 나한테 손댈 필요도 없을 정도로 나는 나한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 못한다 이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면 바로 그것이 뭐냐? 그 나라 의가 되는 거에요. 왜? 그 나라 의는 착한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이 나라와 반대되는 요소가 그 나라 의에요. 그 고창병자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셔서 제대로 안식일이 뭔가 진짜 안식일의 완성이 뭔가를 그들 권력을 쥐고 있는 그 눈앞에서 보여줘요. 눈앞에서.

그래서 이 세상과 틀리다가 아니라 이 세상은 미흡하다가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격분하게 만들었어요. 격분. 격분이 뭡니까? 비슷하게 간다는 뜻이에요? 반대라는 뜻입니까? 반대지요. 이 말은 오늘날 우리 자신이 천국 갈려는 우리 자신이 정작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격분들을 하고 살아왔는지를 우리가 봐야 된다는 거에요. 주께서는 우리를 천국 보내줄려고 하는데 누가 화를 내고 있어요? 내가 화를 내고 있다고요.

화, 분노 왜 생깁니까? 화, 분노는 간단해요. 왜 생기느냐. 나에게 의미를 쥐고 있으니까 생기는 거에요. 나에게 의미를 쥐고 있으니까. 나는 고창병자 아닙니다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거에요. 고창병자가 있는데 “어이~ 고창병자.” 고창병자보고 고창병자 하는데 뭐가 기분 나빠요? 잘 봤네 이러면 끝날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건강한 사람보고 이 고창병자라고 하면 뭐 합니까? 갑자기 벌컥 화를 내겠지요. 왜 화를 냅니까? 나는 무의미하다고 아니라고 평소에 자부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어딜 봐서 무의미해. 나는 얼마나 착하게 산다고 애를 썼는데.

제가 지금 여러 번 강조하는 것은 반대라는 겁니다. 반대. 아 내가 바르게 살아야 하는데 역시 죄가 많아서 바르게 못 사는구나. 바르게 못 사는 만큼 남아있는 죄에 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해주겠지 이런 반대가 아니에요. 미흡한 거에요. 열심히 살고 모자란 부분은 십자가 피로 채운다. 학교생활 잘하다가 모자란 부분 학원가서 배운다 뭐 이런 거. 지금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그건 바리새인의 겸손입니다 그거는. 열심히 해봐야 우리는 유한한 인간인데 하나님이 자비는 쥐고 있잖아요. 이 정도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다 믿었던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들에게 교훈을 하는 게 아니에요. 격분케 하는 거에요. 격분케. 반대기 때문에 격분하는 거에요. 반대이기 때문에. 그들이 바라보는 장소에 메시아가 온 장소에 주님 오신 게 아니고 반대, 안 올 장소에 예수님께서 거꾸로 치고 들어오신 겁니다. 이 바리새인의 격분은 우리의 격분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누가복음 14장 보면서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고창병을 고쳤다고 하니까 ‘이 교만하기 짝이 없는 바리새인을 주님 잘했습니다!’ 우리가 마치 예수님 편인 줄 알고. 우리는 바리새인과 한 통속인줄도 모르고 ‘예수님 잘 하셨습니다. 나는 영원히 예수님 딸랑딸랑, 예수님 편에 설래.’

그건 뭐냐 하면은 예수 믿는 것이 하나의 내가 예수 믿는 이 행위가 나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할려고 우리가 지금 노리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시도하는 거에요. 그거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내가 손 못 대는 내가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부분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되요. 내가 아무리 교회 다니고 애쓰고 복음 들어도 어떻게 도저히 손댈 수 없는 것이 뭘까? 그것은 바로 내가 나를 인간을 무의미하게 볼 줄 모른다는 겁니다.

‘나는 저주받아 합당합니다’라는 고백을 우리가 못한다는 겁니다. 할 수가 없어요. ‘나는 저주 받아 합당합니다.’ 할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이 권력이 주는 일관성 속에서 그 속에서 우리는 성공할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세상의 일관성을 이것을 무너지게 했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사람이 되고자 하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자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바르게 살면 하나님 도와주시고 나쁘게 살면 벌 주겠지.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뭔가 자꾸 나한테 가능성 있다고 사고방식, 이게 그 나라 의와 반대되는 사고방식이에요.

지금 제가 한 네 번째 이야기하지만 너무 중요합니다. 내가 하는 시도가 나에게 어떤 영향력을 주지를 않습니다. 마치 누구와 같이? 고창병자. 고창병자가 안식일 지킨다고 고창병자가 낫지를 않아요. 고창병자가 고창병 열심히 착한일 한다고 자기 병이 낫지를 않습니다. 그냥 그거는 고창병자의 어떤 시도가 얼마나 많은 시도를 해봤겠어요. 자기 병인데.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남의 일이 아니고 본인 일이거든요. 본인 일이기 때문에 남이 신경 안 쓰고 본인이 얼마나 신경 쓰겠습니까? 팔자 안 고쳐집니다.

팔자 안 고쳐지니까 차라리 어떻게 해요? 아 이대로 끝나는구나. 바로 그 점이에요. 이대로 끝나는구나 자포자기할 때 그 말이 뭐냐? 내가 어떤 시도도 내 인생에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이게 맞구나. 이게 틀린 말이 아니라 맞구나 에요. 나는 무능력하고 무의미한 것이 이게 그냥 겸손하게 하는 소리가 아니고 실제 이야기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주변 사람들 보세요. 난리도 아니지요. 난리도 아니죠. 천당 갈라고 천국 갈라고 난리도 아니지요. 뭘 해서 뭘 해서 했다 난리도 아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안식일 날 고창병자를 고쳐줍니다. 그러면 고창병자가 어떤 변화가 생기는데 어떤 변화가 생기느냐. 나(고창병자)를 주님이 갉아먹는다. 뭐 별 가치도 없는 나니까. 주께서 갉아먹는 거에요.

그럼 갉아먹으면 주님의 뭐냐 하면 주님의 양식. 주님의 음식. 주님의 찹쌀 탕수육. 찍먹할까요? 부먹할까요? 주님 입에 들어가는 주님의 양식이 되어서 주님의 하시는 일에 에너지로 활용되는 겁니다. 주님의 하시는 일에 재료, 소재가 되는 거에요. 그걸 가지고 성도라고 합니다. 본인의 자의해서 갉아먹혔어요. 그러면 이런 거 생각해봅시다. 반은 갉아먹혔는데 반은 자의식이 남았다. 예를 들면 사과 먹다가 애벌레 반은 입에 들어왔는데 반은 사과에 박혀있다 이런 경우처럼.

자아가 반은 먹혔는데 반은 남았다 그러면 ‘아 내 자아 반은 어디 갔어? 아깝네’ 라고 생각들겠어요? 안 그러면 마저 먹으시지 이런 생각들겠어요? 어떻겠습니까? 남겨진 만큼 고통스러워요. 왜냐하면 그 자아 가지고 그 나라 의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것을 본인이 먼저 알기 때문에. 내가 전도하고 헌금하고 뭘 해도 그 나라 의와 아무 상관없는 거에요. 왜? 내가 하는 시도가 나의 변화의 영향력에 변화를 못 주기 때문에. 줄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예가 어디 나오느냐? 마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예수님이 12제자 뽑지요. 전도 보내지요. 이 대목이 예상 밖으로 무척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은 이미 하나님께 천국 가기로 창세전에 좌석제가 되가지고 이미 정해져있지요. 요한복음 6장 39절 “나는 아버지가 보낸 자만 찾는다” 그러니까 사람이 손들고 천당 가고 싶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데리고 오는 거에요. 자기 사람 찾아오는 거에요. 잃어버린 양을 찾는다 하거든요. 자기 사람을 구분해서 골라 족집게로 골라 데리고 가는 거에요.

골라 데려가는데 전도 왜 합니까? 희한하잖아요. 골라 데려가는데 전도는 왜 해요. 그냥 자기 백성 찾아오면 되지요. 물건 분실물 될 때 자기 잃어버린 가방만 찾아가면 되지 왜 온 분실물 다 뒤집고 왜 그러겠어요. 그렇게 할 이유가 없잖아요. 전도한다는 이것이 의외로 굉장히 어려운 대목이에요. 전도하는 게. 그러면 전도를 왜 하느냐? 참 진짜 이건 너무 중요한데 특별히 여러분을 위해서.

인간은 자기가 최종 도착지점을 보고 즐거워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천국인데 천국 간다면 제가 기뻐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지요. 인간들은 그래요. 그러나 주님은 천국 가는 게 아니고 그 중간을 중간 과정을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간 과정을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에서 뭐로 바뀌기 때문에? 중간 과정이. 매순간 나에서 주님의 일로 바뀌기 때문에. 나의 일이 주의 일로 바뀌는 그 채워지는 것이 주께서 가신 그 알고리즘, 그 과정을 그렇게 다시 한번 증거하는 일이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도착지점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로마서 9장3절에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너를 위해서 희생하겠다. 중간과정에 이미 합격했기 때문에 어떤 중간 과정이든 나는 뛰어들 용의가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시고, 택하시고 뛰어들어라 이 말이죠. 택하시고 뛰어들은 거에요. 뛰어드는 것은 “내가 몇 명 건졌습니다. 몇 명 건졌습니다 그 귀신이 우리 힘에 떨어졌습니다” 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다.

그거 말고 너희들은 ‘내가 이런 성과를 얻었습니다. 전도 업적을 얻었습니다 자랑하지 말고 너희들은 이미 너희 이름은 이미 하늘나라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그런데 왜 주님께서 그 일을 시키는가. 이 중간과정은 예수님의 자신의 자신이 시킨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았다라는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요.

주께서 일하셔 구원됐다는 주님은 중간을 강조하고 있고 우리는 이러나 저러나 천당 가면 됐지 뭐. 챙길 거 챙기면 됐지 이게 우리 자아의 타고난 이기심이고 주님께서는 그 중간과정에 네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는 거에요. 내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뛰어들었는데 내 일이 아니고 그 현장에서 나보고 마귀가 물러간 게 아니고 주님 보고 물러가더라. 나는 히마리 없어요. 마귀는 나 같은 거 겁도 안내요.

주님보고 주께서 나에게 손을 빼고 나를 구원하더라 그걸 주께서 구원했다는 그걸 증거하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의 관심사가 최종점에 있는 우리를 그 자아를 주께서 갉아먹어가면서 내가 이렇게 살면 되지가 어디서 바뀌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매일같이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분이구나. 우리는 무능력한데 일은 일어나요. 그럼 이 능력은 어디서 왔어요? 주의 일이죠.

바로 내 일을 벌려놓고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고 바뀌는 그것. 그게 바로 그 나라 의입니다. ‘그 나라 의’. 그 나라 의를 위해서 매일같이 염려할 것을 줘요. 매일같이. 내일 또 여러분 기다리고 있어요. 내일 염려가 또 기다리고 있어요. 또 생깁니다. 매일같이 염려할 것을 줍니다. 그 염려할 것에 대해서 우리가 마중 나가면 안돼요. 아 염려해야 돼 할 때 마중 나갈 때 주께서 네가 시도하는 것이 어떤 것이라도 이 염려를 제거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력이 없다는 것을 그 염려 속에서 다시 한번 주의 일을 발견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결국 결론은 뭐냐 하면은 우리는 누구다? 고창병자. 고창병자가 언제 병이 나앗습니까? 안식일 날 병이 나앗지요. 그럼 안식일을 주신 분이 뭐를 책임집니까? 안식일을 주신 분이 놓치지 않고 안식일을 기어이 완수하지요. 그럼 우리는 뭐냐? 들러리 중에 들러리죠 그냥. 무능력한 아무 의미도 없는데 안식일의 완성에 우리가 참여된 거에요. 최종, 생명책 이름에 기록된 거에요. 우리는 들러리 중에 들러리에요. 그걸 투 들러리.

아무리 봐도 한 게 없어요. 무능력하다는 그거 외에는 내세울게 무능력하고 어떤 착한일해도 복 안 받고요 나쁜 일해도 벌 안 받고요. 벌 안 받는 게 더 무시당하는 거. 걔가 착한일한다고 러시아가 전쟁 그만두지 않잖아요. 우리가 어느 정도로 고창병자냐면 진리는 이미 세상에 완전히 없다를 아는 자가 진리를 아는 자 입니다. 이 세상에 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유일하게 진리를 아는 자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일관성에 대해서 안 믿죠. 이 세상의 일관성을 안 믿어요. 원인, 결과, 원인, 결과 원인, 결과 안 믿습니다. 이렇게 했더니만 이렇게 결과 나왔다 안 믿습니다. 열심히 했더니 공부 잘한다 안 믿습니다. 세상은 그걸 믿어요. ‘공부 열심히 하니까 성적 오르잖아’ 다음에 더 열심히 하면 성적 오른다 세상은 그 권력에 희망을 겁니다. ‘이게 되네?!’ 그들은 ‘이게 되네?!’ 이렇게 하거든요. 되니까 욕망이 거기 다 쏠리게 되어있어요. 욕망이. 나의 모든 혼신의 노력이 가능성 있는 곳에 다 쏠리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아까 복도에서 까불고 노는 아이들 이야기했지요. 까불고 놀고 뛰고 재미나요. 재미나게 노니까 재밌지요. 재미나가 노는 원인, 결과는 재미나다. 제가 그 아이들에게 뭐라고 묻는다고 했습니까? 그런데 그게 그 나라 의와 무슨 관계있어? 애가 재미나게 놀아서 재밌는 건 맞는데 되게 재밌어요. 월드컵이 되게 재미있거든요. 그런데 그 나라와 의와 무슨 관계있어요? 관계있습니까? 없습니까? 메시가 천당 갑니까? 천국 갑니까? 아니지요. 호날두 못가지요. 그 나라 의와 관계 없지요. 그러면 이건 일관성이 없는 거에요. 결국은.

지금 이거는 고창병자하고 다를 바가 없는 거에요. 이거는. 고창병은 자기 무능성을 알지만 이거는 지금 고창병자인지 모르고 오면서. 진리도 모르면서 그저 뛰고 까불고 잘되는 욕망 우리가 이렇게 하니까 이게 되더라 그 환상에 빠져버린 거에요. 환상에. 빠지니까 그들은 그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니까 예수님 안식일 날 병 고치니까 그들은 뭡니까? 격분한 거에요. 분노와 화가 치밀어 오른 겁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화내지 마세요. 왜냐하면 화 낼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성 낼 가치가 없습니다. 고창병자가 뭐 기대할 게 있어야 기대하지요. 백날 해봐야 그 나라와 의를 들어갈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뭐가 자기 실수에 화납니까. 아! 두 문제 틀렸다고. 두 문제 틀렸다 이번 수능에. 다 맞아봤자 어디 갑니까? 다 맞아 봤자 서울 어디 들어가거든요. 서울 어디 들어가봤자 뭐합니까? 질병대책 뭐. 그거 하면 뭐합니까. 잘됐다고 소고기 사먹고 끝나지 뭐하겠어요.

지, 지금까지 한 것 압축해서 말하면 기준점이 무언가. 도대체 이 세상의 기준점이 뭔가. 율법의 기준점은 뭔가? 정답은 고창병. 희망 없어요. 못 고칩니다. 우리 자신을 고치지 마세요. 우리 자신에게 책임감을 부여하지 마세요. 고창병 가운데서 제일 잘못된 경우가 뭐냐 하면은 자신의 무능력을 본인이 비난하는 것. 이게 최악입니다. 비난한다고 해서 자기가 나아지지 않거든요. 그런데 비난을 왜 해요? 비난은 화내는 거에요.

아까 화를 왜 낸다고 했습니까? 인간은 화를 왜 낸다? 아직 자기한테 의미가 있다고 지금 착각하는 거에요. 그 의미 있다면 또 묻고 싶어요. 그게 그 나라 의입니까? 그 나라 의는 성경에서 예수님 뿐이에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온 것은 뭐냐 하면은 인간이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의로 우리에게 주는 게 복음이에요.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네가 열심히 하는 것과 무엇과 관계없다? 그 나라 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에요. 인간이 열심히 하는 게. 뭐 복음을 공부하고 백날 해봤자 그 나라 의 아니에요. 그 나라 의는 무능력한 자 말고 유일하게 유능한 그 분이 혼자 십자가에 다 준 거에요.

그럼 우리는 그 앞에서 염치 불구하고 우리가 거기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무책임하시는 자유를 만끽해주시기 바랍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 자유를 만끽해주세요. 그게 그 나라 의에요. 그게. 안식일을 지켰나? 지켰다. 그거 왜 지켰냐? 주님 와서 그 나라 의를 주면 다 지키는 게 돼요. 그러나 주님께서 오셔서 로마서 13장 8절에 모든 율법이 있지만 “사랑이” 모든 율법을 이루지요.

그 사랑을 주일 낮 설교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은 찾기. 사랑은 찾아주는 거에요. 찾아주는 거. 여기 있네. 숨바꼭질. 사랑은 찾는 거에요. 숨바꼭질하는 거에요. 애들 숨바꼭질 하면요 엄마가 자기 찾아주잖아요. 그럼 1.아이가 기분 좋다? 2.기분 나쁘다? 몇 번입니까? 기분 되게 좋아해요. 숨기는 지가 숨어놓고 “꺄르르” 하면서 어떻게 찾았지 이러고 있다고요. 그런데 자아성이 강한 큰 애는 “아이씨. 어떻게 찾았지.” 기분 나쁘죠.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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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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