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21230b 마태복음9장 17절(정해진 길)-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태복음

광주강의20221230b 마태복음9장 17절(정해진 길)-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지금 바로 왕이 뭐가 헷갈리느냐 하면 재앙은 우발성이잖아요. 예상 못했죠. 그 우발성과 자기 코앞에 있는 모세, 아론 형제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상관성을, 모세는 상관성 있다고 이야기하고요. 바로가 알고 있는 지혜에서는 그 상관성을 연결시킬 재주가 없어요.

예수님이 여기 계신 것하고 마지막 이 지구가 불타는 것하고 어떤 상관성이 있습니까? 이걸 연결시킬 수 있는 그런 물리학자 있습니까? 그런 생물학자, 과학자 있겠어요? 없죠. 그걸 성경에서는 완악이라 해요. 이걸 강퍅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애굽이 단일적인 전체성이죠, 전체성. 이게 이렇게 되어야 돼요. 단일적인 전체성. 애굽 외에는 없어요. 이렇게 되어야 이스라엘 나와요. 따로 이스라엘이 나오는 게 아니고 애굽-전체성 안에서 이스라엘이 나온다고요. 마치 아기를 해산하듯이.

피노키오하고 일반 애들하고 차이점이 뭐에요? 피노키오는 목수가 나무를 만들어서 천사가 와서 혼을 집어넣었다 하잖아요. 그런데 일반 애들은 엄마라는 죄인 몸에서 나와요. 심지어 하나님마저. 죄인이 없으면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중요한 것좀 받아 적으세요. 죄에서 구원이 나오는 거예요. 애굽이라는 죄에서 구원이 나와요. 택한 백성이 나와요. 아, 이거는 요한복음 수련회 때 하기 때문에 지금 다 못합니다.

이솝 이야기에 이런 게 있어요. 개구리 왕국에 자기들끼리 있으니까 개구리도 아버지의 이름이 그리웠던 모양이죠. 그래서 개구리 왕국에서 뭘 원했는가? 그때 신 이름이 제우스입니다. 제우스신에게 기도했어요. 우리에게 임금을 달라, 이렇게 했어요. 사무엘상 8장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에게 임금을 주셔서 우리를 다스리게 해달라 하니까 제우스신이 뭘 줬느냐 하면 통나무 하나를 줬어요. 통나무 하나를 툭 던져준 거예요.

이 통나무에 딱 올라가보니까 통나무가 임금이에요. 물에 붕 떠서 있으니까 개구리가 거기서 연못에 빠진 통나무에 올라타기도 하고 뭐 이렇게 하죠. 통나무가 임금이라는데 임금이 재미가 없어요. 통나무가 가만히 있으니까 올라타도 뭐라 안하고 통나무 속에 치근덕대도 통나무가 아무 반응도 없고 물에 혼자서 덩그러니 떠 있으니까 재미가 없어가지고 재미있는 임금을 보내달라고, 너무 재미없다고 하니까 누굴 보내줬느냐 하면 이번에는 제우스신이 학을 보내줬어요. 학을 보내줘서 이 학이 학을 띄게 하는 거예요. 학이 개구리를 한 마리씩 다 잡아 죽였어요. 그러니까, 제발 통나무 보내주세요.

살기 위해서 왕을 찾는 것 자체가 재앙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왕을 얻었으면 왕에게 복속되고 귀속되는 조건을 각오해야 될 텐데 자기 소원 들어주는 그런 임금은 임금 자체를 모른다는 것이 이솝우화에서 이야기하는 거죠.

그만큼 왕은 폭력적이다. 폭력적이라는 말은 권력적이라는 말인데 그래야 밑의 어떤 누구보다도 낮지 아니하고 높아야 되거든요. 높다는 것은 법과 지시를 유일하게 내릴 수 있는 권한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밑에 것을 자기가 내린 법과 지시로 꽉 묶어줄 수가 있어요.

“군에서는 무조건 상관 말을 따른다. 따라하세요. 비판하지 않는다.” “비판하지 않는다.” “무조건 복종한다.” “복종한다.” 무조건 그래야 돼요, 조폭처럼. 양아치의 특징은 뭐냐? 매 점심때마다 짜장면을 먹는다는 거예요. “짬뽕”하다가는 맞아죽습니다. 꼭 짜장면. 그것도 고맙게 여기면서. 그래야 되잖아요. 조폭 영화에 보면 짜장면 먹대요.

자,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구조로 확정지어놨어요. 무슨 구조로? 왕국 구조로. ‘백성은 그럼 자존심도 없고 위신도 없고 완전히 왕의 노예가 되어가지고 이게 사는 거냐? 우리 백성을 위하는 그런 왕이면 좋겠다.’ 그렇게 하지만 그건 터무니없습니다. 왕국 속에서 왕국으로 구원되는 거예요. 왕국이라는 체제를 그대로 가져와서 구원받는 데가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 되는 겁니다.

왕국을 이해해야 돼요. 왕국의 특징은 뭐냐? 나를 위해서라는 것은 영원히 존재한 적도 없고 하나님께서 그걸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세상 왕국에도 왕에게 복종해야 되고 가정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복종하고. 아버지 말 안 듣고 가출해도 그 마음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아버지 곁을 떠나도 아버지는 자기 마음 한가운데에 박혀 있어요. 떠나도 자식이에요. 아버지 떠났다고 자식 아닌 걸 백날 입으로 선언해도 소용없어요. 아버지가 있으면 내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냐? 후손이 있으매 내가 있어요. 후손이 있으매 내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성경은 뭐를 잘라버립니까? 아버지를 잘라버린 거예요. 아버지를 안 자르면 아버지의 이름이 내 안에 계속 귀신처럼 하나의 응어리처럼 있기 때문에 현재의 육신의 아버지라는 탈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게 바로 할례 아닙니까.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린 거예요. 밑의 후손이 육신을 거꾸로 차고 오면서 잘라버릴 때는 바로 아버지의 이름을 자르고 아버지의 이름을 자르고 아버지의 이름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계속 자르고 가는 거예요.

남편 없이 애 낳은 사람이 누구냐? 마리아죠. 마리아에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남편의 이름이 남편이 아버지니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작동하는 것, 그게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그게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고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그거에요.

아버지의 이름이 날아가버리고 아버지의 이름이 날아가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을 기대함으로써...... 이건 어려우니까 한번 적어봅시다. 아버지 있음이 비로소 내가 있음이다. 그냥 육신으로 있는 것 말고요, 의미 있게 있다. 내가 나답게 있다, 를 아버지가 가르쳐 준 거예요. 아버지의 법과 아버지의 지시와 아버지의 기대와 아버지의 희망이 오늘날 나를 의미 있게 한 거예요.

아버지를 잘라버렸다는 말은 뭡니까? 아버지로부터 주어졌던 내 의미가 잘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of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가 누구겠습니까? 이게 바로 왕이죠, 이 세상 왕. 그 왕을 하나님께서 잘라버립니다. 어떻게 자르느냐? 죽인다는 말이 아니고 어떻게 바꾸느냐? 짐승으로 바꾸죠, 짐승. 그게 바로 다니엘과 느부갓네살의 만남이었습니다.

자, 둘이 만났을 때 둘 다 온전하겠어요, 안 그러면 한쪽이 깨지겠습니까? 한쪽이 깨지겠죠. 그게 이솝 이야기에 또 나와요. 두 개의 항아리 이야기인데 청동으로 만든 항아리하고 점토로 만든 항아리가 있어요. 둘이 집에 있다가 너무 집구석에만 있어서 심심하니까 둘이, 옛날 청동이나 항아리는 발이 세 개였답니다, 그래서 밖에 마실 나갔는데 점토로 만든 항아리는 안 가려고 했어요. “나는 바깥에 나가봤자니까 집에 있을래.” 그러니까 청동으로 만든 항아리가 억지로 가자 했습니다. 그러니까 흙으로 만든 항아리가 “나는 밖에 나가 걸어다닌 경험이 없다.”하니까 “내가 알려줄게. 발하나 옮기고 발하나 옮겨서 이렇게 걸으면 된다.”

그렇게 둘이 나갔어요. 나가자마자 얼마 안 가서 점토로 만든 항아리 다 깨졌습니다. 왜? 옆에 청동으로 만든 항아리가 딱딱해가지고 청동하고 붙어서 나란히 가니까 이게 성할 리가 없잖아요. 다 깨졌습니다.

그걸 요새 적용시키면 심약한 사람, 마음이 약한 사람은 상대방 배우자 때문에 완전히 정신이 진창이 되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기가 센 남편 또는 기가 센 아내 만나가지고 내 인생 숨 한번 못 쉬고 엉망진창이 되었다, 하는 그런 이야기에요. 사람이 둘이 맞는 걸 서로서로 보완하고 이렇게 만나야 되는데 한쪽이 기가 세버리니까 한쪽은 다치기만 하는 거예요. 완전 상처투성이에요. 한쪽은 여기저기 파스 붙이고 다른 한쪽은 멀쩡하니, “너는 나 때문에 행복하지 그치? 행복하다 해. 행복하다 해!” 파스 붙이고서는 “많이 행복하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다니엘하고 느부갓네살이 붙었습니다. 누가 깨지겠어요? 다니엘이 깨지는 게 아니고 소위 전체 권력을 다 쥐고 있는, 다니엘 4장 10절에 나오는 것처럼 중앙에 있는 나무, 최고의 나무가 다니엘 때문에 몸살 앓아서 결국은 자기의 본질을 드러내요.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게 뭐냐? 짐승이에요, 짐승.

참, 이게 어떤 점에서 어려운가 하면 이런 점에서 어려워요. 인간이 자신을 뒤집어씌운 껍질을 못 버립니다. 인간은 자신을 뒤집어씌운 그 껍질을 스스로 못 벗깁니다. 그 껍질이 쉬운 말 같지만 상당히 어려운 말이었어요. 그 껍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표면. 표면이라 해요. 표면=현상.

인간은 상대의 표면을 본다. 본다=인식한다. 상대를 아는 것은, 상대의 뭐든지 뭘 보는 것은 그 껍데기에 나타나는 표면을 봐요. 그러면 표면이 있다 합시다. 껍질이 있다면 상대가 이걸 보잖아요. 껍질을 상대방이 봄으로써 이걸 ‘타자’ 또는 ‘타인’이라 하면 껍질 때문에 자기가 감춰지는 ‘옹골참’을 자신의 ‘존재’라 합니다. 이 존재와 타자 사이의 껍질을 ‘자아’라 하는 거예요, 나. 껍데기.

그러니까 존재를 감추는 용도로 자아가 있는 거예요. 이 자아가 있음으로써 나는 껍질과 구별되는 바깥의 존재, ‘남’이라 이야기하고요. 껍질 자체가 ‘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현상, 현상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인식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이걸 현상학(phenomenology, 現象學)이라 해요. 철학에서 현상학이라 합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현상학이나 철학이 중요한 것은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른다는 거예요. ‘자기밖에 모른다,에서 못 벗어난다’를 철학은 지금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자아가 존재의 옹골참, 이걸 자꾸 감추고 있으니까 이 껍질이 없으면 존재가 그냥 노출되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껍질을 남들이 인정해주는 그 껍질로 강화하다보니까 껍질과 존재를 분리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요. 같이 죽는 거예요, 같이.

그러니까 이 현상학의 문제는 인간은 왜 죽는가,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인간은 왜 죽는가. 끊임없이 나 하나만을 가지고 사는데 그런데 나 하나만을 위해서 사는 내가 왜 죽어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망대가 무너져 죽은 18명 나왔죠 (눅 13:4). 그게 지금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었다는 것을 타인이 죽은 사람을 지금 보고 있잖아요. 그 현상을 보고 있잖아요. 저 사람 죽었다. 제자들이,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네가 남의 일 얘기하듯이 그렇게 하면 안돼.” 이런 뜻이에요. 네가 지금 남보고 죽었다고 말할 처지가 못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죽으면서도 평생 동안 살면서도 왜 죽는지 모르잖아요. 왜 죽는지 모르면 너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왜 죽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그렇게 60년, 50년 성경 공부해도 내가 누군지 모르면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성경이 뭔지 해독이 안 되는 거예요. 그저 이 껍데기 하나, 자기 하나 그거 정당화하는 데에 온 혼신의 노력을 다 한 거예요, 평생 동안. 내가 뭐 어때서, 그거 하나에 자기는 목매듯이 살아온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는 노래 가사에 보면 그게 나오는데 세 가지 노래 가사를 제가 말씀드릴게요. 괴테가 작사했고 베르너가 작곡한 노래에요. 라는 게 있어요.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갓 피어난 어여쁜 그 향기에 반해서
정신없이 보네 장미화야 장미화
들에 핀 장미화

여기 보면 정신없이 본다는 말은, 한 아이가 들에 핀 장미화를 정신없이 본다는 것은 보는 것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그 장미화를 볼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장미화를 제대로 껍질을 뚫고 그 사물 자체를 보려면 본인이 본다는 자체가 제거되어야 가능하다는 뜻이에요. 나는 보고 있잖아, 이게 없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믿는 내가 사라져야 예수 믿는 거다, 와 같은 원리에요. 그러니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보는 줄 몰라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보고 있는 줄 몰라야 제대로 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보고 있다는 나를 의식하는 순간 그건 제대로 보는 게 아니에요. 그건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타자가 다가온다는 것은 껍질이 자기를 의식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느부갓네살이에요. 자기가 예상 못한 꿈을 꾸었을 때 꿈이 너무나 강한 장악력으로 쳐들어오게 되면 자기의 한도가 드러나는 거예요.

왕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뭘 알아야 되지, 인식을 못하니까 내가 왕이라고 우겨도 그 꿈이 왕이에요. 내가 만인의 아버지 노릇해도 내가 너무나 무능해요. 무능력하고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그리고 자기가 꾼 꿈의 내용은 자기 제국의 미래와 관련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p.232 본문에 보게 되면 그 느부갓네살이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 계속 꿈을 알아내려 하는데 꿈이 미래의 힘으로 작동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일 밑에 보면 그건 위기를 부르는 사태이다. (“여기서 느부갓네살은 반드시 그 꿈을 알아내어 미래를 보장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지혜자를 찾게 되는데 이로서 지혜는 현재라는 시간을 너머서서 현재를 장악하는 미래의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인간들의 시간관에 잉여부분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위기를 부르는 사태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이 ‘그 꿈은 개꿈이야.’ 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넘어갈 수가 없어요. 왜? 미래와 연결이 안 되게 되면 지금 현재의 제국, 왕국은 미래한테 양도가 되어서 있어도 없음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면 현재의 있음은 소용없는 있음이 되는 겁니다.

마치 천국이 없으면 우리가 살아도 산 게 아니죠. 죽음 뒤를 모르면 지금 산 게 아니에요. 죽음 뒤는 히브리서 9장에 나오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정했다는 말은 네 죽음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쓸 자격이 없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죽이잖아요.

사람은 자아가 있잖아요. 방금 아까 현상학에서 자아가 있죠. 이 존재, 존재의 껍데기를 뭐라고 했습니까? 자아. 이 자아가 타인, 하나님이죠, 하나님을 자꾸 상대하려고 하는데 이게 틀려먹은 거예요. 이게 철학의 한계이고 인간 지혜의 한계입니다.

그럼 인간은 뭐냐? 인간은 대우 세탁기 안에 욕조 있죠. 세탁기 위에 여러 가지 작동하는 버튼 있고. 세탁기 작동하게 되면 욕조통 자체가 돌아가죠. 그러면 소용돌이 막 치잖아요. 그럼 성도는 뭐냐? 이 욕조통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을 상대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가 아니에요. 남을 자기가 판단하고 분석할 대상이 아니라 자기는 주님과 함께 같이 돌아가는 겁니다.

뭐 때로는 어지럽죠. 갑자기 눈이 40cm 온다든지 이렇게 되면 왜 와야 되는가? 갑자기 내가 초청하지도 않은 코로나가 걸렸다. 왜 걸렸는가? 상당히 자기는 필연적으로 살아가는데 코로나 걸렸다, 눈이 많이 왔다, 이건 뭡니까?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죠. 우연이니까 우연이 내 속에 들어왔으니까 우연이 나의 일부가 된 거예요. 이게 욕조 안에 있는 성도 아닙니까.

나의 일이 따로 있겠지만 주님의 일속에 어쩔 수 없이 같이 휘말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내 안에 주의 일이 나를 삼킨 거예요. 고래가 요나를 삼켜버린 겁니다. 주의 일은 그렇게 진행되는 거예요.

p.233에 밑에서 10번째 줄에 “미래란 미리”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대처하라고 알려 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대처할 수가 없어요. “미래란 미리 대처하라고 알려준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 과거란 다시 되돌아갈 수 없고 수정시킬 수 없는 불가역적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미래도 그냥 미래의 주인이 따로 있어서 인간을 미래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걸 느부갓네살에게는 꿈이라는 미래가 오고 그것이 제국의 미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미래의 사람. 미래에서 온 코난. 그럼 느부갓네살은? 그 미래에 삼킴 당해야 될 과거의 인물.

현재라 하는 것은 항상 미끌어지니까, 현재 됐다 싶으면 과거로 곧장 내려가니까 현재는 없는 거죠. 하나의 첨점, 뾰족한 첨점에 지나지 않지, 어떤 시간이라는 게 없어요. 항상 과거, 미래로 구분되는 파동 같아요. 파동의 고(高)가 있고 골짜기가 있고 높낮이가 있잖아요. 이처럼 시간이 파동치면서 가기 때문에 항상 현재도 과거로 쭉 미끌어져가요. 현재다 하는 순간 벌써 그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어디론가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길이 있는데 이 길이 ‘인간의 길은 길이 아니다’ 를 알려주는 길. 그러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는 것처럼 성경을 한마디로 말해서 길이에요. 주님이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잖아요. 길입니다.

길이란 말은 아까 포도주병에 있는 코르크 마개처럼 이게 노출되어 있어요. 인간은 닫혔죠. 왕으로 닫혔는데 아버지의 이름으로 닫혔는데, 느부갓네살 왕의 입장에서 다니엘은 그냥 부하에요, 직원이고. 그는 내가 죽인다 하면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에요. 코르크 마개인 것은 상상도 못했죠. 예수님이 왔을 때 목수의 아들이라고 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그렇고 그런 다수성 중의 하나로 본 거예요. 이 전체 속에 소속된 하나의 요소로 본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부분집합이죠. 귀속된 게 아니고 포함된 거예요.

부분집합이란 이런 겁니다. {1,2,3} 요소가 몇 개에요? 3개죠. 그럼 부분집합은 몇 개가 되겠습니까? 1 하나, 2 둘, 3 셋,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1}, {2}, {3} 요소 끝,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부분집합은 여기서 {1,2} 쌍이 있을 거고 {2,3} 있을 거고 {1,3} 있겠죠. 또 하나 더 있어요. {1,2,3} 전체가 있어요. 또 하나 더 있어요. 공집합∅이 있어요. 총 8개에요.

그래서 부분집합은 2³입니다, 공식이. 요소는 3개인데 부분집합은 8개. 어느 것이 더 많습니까? 부분집합이 더 많은 거예요. 이걸 칸토어의 역설(Cantor’s paradox)이라 합니다. 이 부분집합을 멱집합(冪集合, power set. 주어진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들을 원소로 갖는 집합)이라고 하는데, 칸토어라는 수학자가 19세기 말 이걸 발견한 거예요. 전체의 전체를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해도 만들어낼 수 없다. 불가능하다. 그래서 칸토어는 무한집합을 이게 바로 신이라 한 거예요.

아 참내, 꼭 종교인 같아. 결국 종교인데 아까 질문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이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라 할 때 지금 뭐가 문제입니까? 아까 모의고사 쳤는데 또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죠. ‘누구를 위함이냐’에요, 누구를 위함이냐.

내가 그걸 안다는 게 결국 누구를 위함이에요? 나를 위함 같으면 그것은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게 죄에요. 종교인 세 명 다 지금 죄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게 죄가 돼요. 복음 전하는 게 죄가 된다는 말이 이 부분집합을 이해 못하면서 인간들이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걸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치게 하고 죽였잖아요. 그런데 여기 이 땅에 귀속되는 것만 찾는 전체 세계에서 귀속되지 않고 포함된 분이 와버리니까 누구 다리 세 개가 다 깨지느냐 하면, 누구 항아리가 다 깨지느냐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졸지에 죄인으로 드러나고요. 언약에 의하면 언약대로 살지 않으면 뭐가 주어집니까? 저주가 주어지죠.

그러니까 다니엘을 통해서 알린 계시는 너희들 가는 길은 오직 저주만 있으리라, 그거 알려준 거예요. 이렇게 가시면 저주 있습니다. 바로 왕에게 모세가 나타났고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났죠. 그 바로 왕에게 주어졌던 결말이 뭐였습니까? 축복이었습니까, 저주였습니까? 저주죠.

자기가 저주받을지 모르는 자에게 저주를 받아야 된다고 알려주는 것이 전체를 뛰어넘는 초과적인 그런 하나님의 계시의 역할이 그겁니다. 그래서 율법을 준 것은 뭐하기 위함이다? 새삼스럽게 저주받는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너는 저주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저주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여기 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오 저 언덕 위 들소들 노닐고
노루 사슴 뛰노는 그곳
걱정 근심 없고
구름 없는 하늘
그곳에 집 짓고 살리라

오 언덕 위의 집
노루 사슴 뛰노는 그곳
걱정도 없이
구름 없는 하늘
그곳에 집 짓고 살리라

이라는 옛날 학교 때 부른 노래 아닙니까. 여기 보면 “걱정 근심 없고 구름 없는 하늘 그곳에 집 짓고 살리라 오 저 언덕 위 들소들 노닐고 노루 사슴 뛰노는 그곳” 여러분들 지금 전경이 막 펼쳐지죠. 문제는요, 축협에서 대출금리가 올랐다는 거예요. 그리고 사료 값이 인상됐어요. 그리고 막상 언덕 위에 노루 사슴 키우는 사람이 코로나 이후에 생산해봐야 판로가 막혀있어요. 시인은 그걸 바깥에서 보는 거예요. 아, 푸른 잔디에 어떻게 집을 짓고...... 한번 집 지어보죠. 민원 들어오죠, 냄새난다고. 축사를 왜 여기다 짓냐고.

차라리 이게 더 적당해요.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메기 내 사랑하는 메기야
동산 수풀은 없어지고
장미꽃은 피어 만발하였다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메기 내 사랑하는 메기야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이게 나중에 끝에 가사 보면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처음에는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하다가 나중에는,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이게 바로 죽음입니다. 메기의 추억. 죽으면 두려움도 같이 죽죠. 죽음은 인간이 원했던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성경말씀에 다니엘과 느부갓네살, 다니엘서 이 모든 것은 이겁니다. 죄를 죄 되게 자극시키는 거예요. 저주를 저주되게 더욱더 고취시키는 겁니다. 고취시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자아라는 껍질, 현상을 인간들이 본다고 하잖아요. 인간이 원했던, 인간이 자아를 통해서 봤던 그 타자 말고 주님이 타인으로 쳐들어온 거거든요.

전체 말고, 전체에 포함된 것 말고, 전체 외에 전체 바깥에 있는 비(非)-전체가 쳐들어온 거예요. 쳐들어왔을 때 여기 존재가 죄로 드러나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율법을 줌으로써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거예요 (롬 7:13).

‘나는 죄 지었다’ 성경에 이런 건 없습니다. ‘나는 죄다’ 이거죠. ‘나는 죄다’를 어떻게 하느냐하면 바로 마태복음 9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해요. 마태복음 9장 17절, 이게 뭐냐 하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되고 옛 술은 옛 부대에 담아서 절대로 옛 부대에서 바깥으로 교환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스스로 술이 빠져나와서 부대를 교체하고 이런 건 안 된다 이 말이죠. 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누가 읽어보세요. 마태복음 6장 13절, 여러분 보시면 ‘아, 이건 들어본 구절이구나.’ 생각날 거예요. 마태복음 6장 13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겁니다. 주님께서 주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 될 존재로 주께서 계시를 주느냐를 보는 거예요.

느부갓네살이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왕이에요. 그런데 짐승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거예요. 그러나 다니엘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주께서 주신 계시가, 또는 꿈을 통해서 준 계시가 너는 처음부터 뭐였다? 짐승이었다. 처음부터 짐승이었다는 거예요. 이걸 느부갓네살이 무슨 수로 압니까? 알 수가 없어요.

그래, 짐승인 것을 알았다고 해서 느부갓네살이 구원받았습니까? 아까 했죠. 하나님의 계시는 “성전에서 잠잠할지어다” 하는 것은 빼도 박도 못해요. 이것은 있는 것을 있는 대로 그냥 노출시킬 뿐이지, 그러니까 정신 차려라, 이런 건 없어요.

짐승은 짐승이니까 그냥 짐승이라고 이야기할 뿐이죠. 홍시 맛이 나는데 홍시 맛 난다고 하는 것처럼 짐승이니까 그냥 짐승이에요. 죄인이니까 그냥 죄인인 겁니다. 거기서 뭐 더는 생각하지 마세요. 더 생각해봐야 “짐승이 개과천선 노리는구나. 더욱 짐승다워라, 이 인간아.” 이런다니까요. 참, 인간이라 하면 안 되지. “짐승아, 더욱 짐승다워라.” 이렇게 되죠.

주님께서 우리대신 기도해줍니다. “주여, 저들을 악에서 마귀에서부터 건져주옵소서.”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세 차례나 했어요. 한번만 한 게 아니에요. 세 차례나 기도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주님께서 잔을 옮겨버리면 주님이 속해 있는 자리, 죄 안 지었으면서도 죄인 된 그 자리가 무효가 되면 안돼요. 옮기지 말고, 자기 백성과 함께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저주를 그냥 주께서 당겨야 돼요.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건 아버지와 아들 관계 때문에 그래요.

지난 수요일에 설교한 중에서 핵심부분은 이겁니다. 인간이 생각한 신은 전부다 우상이었습니다. 그럼 우상이 아닌 신은 뭐냐? 아버지와 아들 관계, 이게 바로 우상이 아닌 거예요. 제가 요한복음 5장을 언급했죠. 아들을 공경한 자가 아버지를 공경한다 (요 5:23).

네가 주제넘게 하나님을 거론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들이 와서 칸막이 쳐버리는 거예요. 네가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을 찾을 자격도 안 된다. 일을 해도 예수님 내가 해야 되죠. 예수님은 세탁기 욕조통이다. 세탁통 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자기 백성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마치 솜사탕 설탕 넣고 발로 페달 밟으면 통 안에서 뭔가 아우라가 피어나는 것처럼, 그 안에 작대기만 집어넣으면 부풀하게 여자들 파마한 것처럼 커다랗게 부푼 솜사탕이 생기잖아요. 주님께서 자기가 한 공로를 실으니까 여기서 이런 세탁통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자기 백성이 생기는 거예요. 그게 함께 있는 거예요, 그게. 내가 요청한 함께 있음은 허락이 되지 않습니다.

아까 바로 왕의 열 가지 재앙 다시 봅시다. 열 가지 재앙을 때렸잖아요. 열 가지 재앙을 때린다고 히브리인들이 개과천선했습니까? 아닙니다. 없어요. 빠져나온 것은 저쪽에서, 바로 쪽에서 “제발 좀 나가주세요.” 해서 빠져나오는 거예요. 끝까지 바로 왕의 권력이 작동하는 거예요.

“명령이다. 제발 천국가거라.” “우리 교회에서 십자가 이야기하지 말고 너는 제발 부탁이니까 우리 교회 그만 나와.” 이렇게 하는 것처럼요. 마귀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니까 길을 마귀가 인도해요, 마귀가. “아참, 나하고 놀지 마세요. 당신은 나하고 놀 부류가 아닌 것 같아요.” 길이 없어요. 길이 없는데 마귀가 우리를 길 가도록 유도하는 기능하라고 주께서 마귀한테 그 일을 시키는 겁니다. 고맙다, 마귀야. 세상과 같이 안 놀아줘서 고맙습니다. 너 나하고 안 놀아줘서 고마워.

이거는 이솝 이야기는 아니에요. 아닌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울서 어떤 친구 둘이 부산에 가자고 둘이 갔는데 걸어서 가거든요. 가다가 경기도까지 왔어요. 왔을 때 친구가 하는 말이 “나 부산 안 갈란다.” “왜?” “부산이 없잖아.” 부산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에요. 교회에 열심히 천국 간다고 나왔는데 “나 교회 안 다닐래.” “왜?”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어.” 그때 친구가 “내가 부산서 왔거든. 부산서 서울로 올라왔거든.”

안됩니다. 당신이 부산서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해도 내 자아가 그걸 못 받아주겠다는 거예요, 내 자아가.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 두 친구가 가는데 부산을 갑니까, 안 갑니까? 안 그러면 혼자만 갑니까? 혼자만 가겠죠, 부산을. 부산이 있다는 걸 아는 자만 가겠죠. 그럼 누가 누구를 떠민 거예요? 부산이 없는 쪽이 부산이 있는 쪽을 어디로 가게 했습니까? 부산 가게 만들었어요.

꼭 하나님은 그렇게 가게 하셔요. 친구 우르르 모아가지고 수련회 가자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꼭 그쪽에서 나의 믿음을,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천국 있다 하는 그 믿음을, 불신자 쪽에서 이것을 흔들어버려요. 흔들어버린다고요.

그러니까 느부갓네살에게 꿈이 오지 않는다면 다니엘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사람이에요. 마치 저와 여러분같이. 누가 위로해주죠? 여러분. 복음이 없이는 이 땅에 아무 쓸모짝 없는 자들이 마귀로 인하여 점점 더 길을 찾아가게 만들어버려요. 어느 길로? only one way, 오직 하나의 길. 오직 하나의 길을 가는 거예요.

길은 없어요. 없는데 다른 사람이 안가겠대. 그때 비로소 길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그럼 나도 가지 말지.’ 이건 애초부터 비-전체가 아니고 전체에 속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가짜는 마귀가 설쳐대야 가짜가 생깁니다. 가짜가 발생되는 거예요.

우리를 가만두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그 가짜를 계속해서 마귀가 와서 친절하게 다 긁어내주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스케일링이라고 해요. 우리 내부에서 계속 생기면 3만원만 주면, 65세는 1년에 한번 정도는 공짜로 해주죠, 3만원 주면 입 벌리라 해가지고 간호사가 다 해줘요. 이런 건 또 의사가 안 해요. 간호사가 다 해줍니다. 입 벌리라 해서 다 긁어내줘요. 다 긁어내면 그다음에 뭐합니까? 입 닫고 네 집에 가라 하죠. 그 네 집이 바로 천국이잖아요. 스케일링으로 긁어내고.

내 속에 계속 솟아나는 신앙이란 이름의 불신앙. 주님을 위한다는 명목하이지만 사실은 나의 미래 행복을 위해서 미래 생활의 보장을 위해서 보험 들 듯이 보람상조 하듯이 그렇게 나의 안위를 위해서 하는 그 모든 악마적인 것을 악마가 와서 그걸 긁어내주시는 그 친절함. 그 친절함 그것이 이번에 새 책 나오는데 거기 앞에 있는 머리말입니다. 그 친절함이 나와요. 여러분 못 봤죠? 곧 나올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보고 욕하지 마세요. 주님이 얼마나 친절한지. 마귀까지 동원해서 스케일링 다 해주시는 거예요. 그 스케일링하면서 빠져나온 것이 자식도 되고 아들도 되고 딸도 뽑아내고 그동안 나한테 자존감을 주었던 그것도 빠져나오게 만들어요. 나의 삶의 의미를 채워줬던 그것도 후벼내는 거예요. 합기도 이런 거. 나도 직업 있다고 큰소리쳤던 거, “입 벌려주세요. 백수죠?” 끄집어내는 거예요.

아버지 이름으로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그 노림수, 그거? 우리가 할 말은 뭐냐. 주께서 물론 대신 이야기해주십니다. “저들을 저희 죄에서 사하여주옵소서.” 이겁니다. “그들을 악에서부터 건져주옵소서.”

죄를 짓지 말라, 가 아니라 죄=나거든요. 그 나로부터 자아로부터 그 죄된 자아로부터 끄집어내소서. 왜? 새 술은 새 부대가 와야 그걸 담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순교한다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에요. 제가 지난 번 어느 강의에서 했는데, 베드로가 오해했다는 것.

p.233 봅시다. 밑에서부터 11번째 줄, “다니엘로부터 꿈 해석을 들은 후 12달 만에 느부갓네살 왕은 꿈의 내용대로 짐승이 되어버린다(단 4:25, 4:28-33).” 짐승이 되어버렸죠. 이게 되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컨닝해서 미리 알았으면 대처할 건데.’ 아니, 대처하라고 준 계시가 아니에요. 계시 준다고 대처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복음 알고 천국 간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복음은... ‘야, 복음하고 나하고는 전혀 이거 내가 복음을 믿을 위인이 아니구나.’ 그거 알려주려고 복음 준 거예요. 마치 율법적 기능의 연속성이에요. 율법을 준 것은 십계명 준 것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못 지키는 존재로 태어났음을 그걸 확인시키기 위해서 준 겁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은 우리가 믿으라고 준 게 아닙니다. 믿지 않음을 깨닫는 거예요. 믿지 않음이 뭡니까? 죄거든요. 아, 내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이미 구원받아서 천국 가게 되고 영생을 얻은 사람만 그걸 확인할 수가 있어요. 내 일이 아니라 욕조통 안에 들어있는 주의 일의 연속성 안에 내가 휘말렸다는 것을 감 잡아요. 내가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지금 죽고 사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문제에요. 죽고 사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죄와 의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기도할 때, 하나님 저들을 죽지 않고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습니까? 그 기도는 교회 권사들이 하는 기도고요. 주님이 그런 기도하지 않죠. 살고 죽고의 문제가 아니라 가난하고 부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저들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죽는 경우가 있든지 간에 그들의 악에서 죄에서 건져달라는 겁니다.

건지는 방법은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죠. 내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은 내 안에서 뭐가 나온다? 내장처럼 그리스도만 나오게 하기 위해서. 나 아니고 이 분이었습니다, 하고 내놓는 거예요. 나의 자아가 이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0)

아까 그림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그림 시작은 블랙홀부터 시작했죠. 원에서 튀어나온 선(б)은 필요 없지만 하나 그어줘야 이게 강조가 돼요. 시커먼 블랙홀, 아무것도 없죠. 복음 40년 들어도 쑥 빠졌어요. 복음이 뭐꼬? ‘하나님이 함께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비판했어요. 몰라, 듣기는 들었는데......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이러면서 다 빠졌어요.

그럼 그동안 이걸 안 빠뜨리기 위해서 막아놓은 것은 뭐냐 하면 이성의 판때기가 들어갔죠. 이성의 판때기는 누구 결정이었고 누구 판단이었고 해석이었습니까? 나. 나의 나 잘되기 위해서, 나한테 미래에 유리하기 위해서 이성의 판때기를 해서 복음도 담고 성경지식에 다니엘, 뭐 창세기부터 요한복음 수련회까지 다 담았어요. 이거 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뭘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천국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 이런 짓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갑자기 기와집이라 해도 좋고 초가집 지붕에서 눈덩이가 40cm와서 굴러와가지고 와장창 이걸 부숴버리니까 이 판때기를 쫙 찢었어요. 남는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 사랑의 반대말은 행함. 행함의 반대말은 사랑.

사랑만이 원함이 되는 거예요.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사랑이 저만치서 온 거예요. 가는 게 아니고 사랑이 왔어요. 사랑이 오게 되면 뭐냐? 나는 이렇고 저 사람은 어떻고 이야기합니까, 안 합니까? 내가 박살나버렸는데 무슨 남 이야기할 게 있어요. 자아 타일이 어디 있어요. 그냥 사랑 이야기만...... 사랑이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계명이 사랑뿐인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사랑이었고 우리의 신랑이었고 사랑이 찾아왔고 우리는 찾아옴을 당했고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 세계가 없고 그냥 사랑의 세계만 있게 하옵소서. 그 안에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 이제는 매일같이 느껴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8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9,467 자유게시판 수련회 소감(타인의 마을) - 최고관리자 23-01-17
19,466 자유게시판 27강-디모데전서 6장 11-12절(책임없는 삶)230115 - 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최고관리자 23-01-16
19,465 자유게시판 34강-예레미야 5장 20~25절(우연과 우연)230115 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3-01-15
19,464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노아심판 / 230115 - 최고관리자 23-01-15
19,463 묻고답하기 본디오 빌라도 - 최고관리자 23-01-15
19,462 자유게시판 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9강-요한복음: 타인의 마을-부활의 여분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3-01-14
19,461 자유게시판 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8강-요한복음: 타인의 마을-성령의 역할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3-01-14
19,460 자유게시판 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7강-요한복음: 타인의 마을-빠진 흔적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3-01-14
19,459 자유게시판 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6강-요한복음: 타인의 마을-기적과 표적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3-01-14
19,458 자유게시판 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5강-요한복음: 타인의 마을-사건과 설명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3-01-14
19,457 자유게시판 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4강-요한복음: 타인의 마을-육이 되신 영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3-01-14
19,456 자유게시판 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3강-요한복음: 타인의 마을-부정성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3-01-14
19,455 자유게시판 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2강-요한복음: 타인의 마을-최소값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3-01-14
19,454 자유게시판 2023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1강-요한복음: 타인의 마을-접점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3-01-14
19,453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뱀의 마음 / 230108 - 최고관리자 23-01-11
19,452 자유게시판 겨울수련회 정산보고 - 최고관리자 23-01-10
19,451 자유게시판 26강-디모데전서 6장 9-10절(갈라진 내부)-230108-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최고관리자 23-01-09
19,450 자유게시판 33강-예레미야 5장 19절(맞대)230108 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3-01-08
19,449 묻고답하기 영생을 취하라 - 최고관리자 23-01-08
19,448 자유게시판 수련회 방 배정표 - 최고관리자 23-01-07
19,447 자유게시판 12강-하박국 3장 1-2절(진노와 긍휼)230104-이 근호 목사 하박국 최고관리자 23-01-05
열람 ➜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21230b 마태복음9장 17절(정해진 길)-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3-01-02
19,445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21230a 마태복음9장 17절(정해진 길)-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3-01-02
19,444 자유게시판 32강-예레미야 5장 14~18절(불탄 막대기)230101 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3-01-01
19,443 자유게시판 25강-디모데전서 6장 6-8절(말씀의 막)-230101-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최고관리자 23-01-01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