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1215b말1장4절(초과)-이 근호 목사
안양20221215b말1장4절(초과)-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한 것은 망상의 세계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했고요. 왜 이 세상이 망상적인가. 세상의 모든 변화에 대해서 그 세상에서 만들어진 내가 모조리 그 원칙을 다 알 수가 없어요. 상하이에 있는 어느 지하실에 아저씨가 지금 요리를 하는데 라면을 끓이는지, 밥을 끓이는지 모르잖아요. 그거 모르면 망상이에요. 전부를 모르니까. 아는 것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한 것만 알지요.
그러면 그 상하이 그 지하실에 있는 그 사람의 노동이 지금 나에게 환경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고 있다는 그 요소는 우리가 알 수 없으니까 빼는 거예요. 빼고 우리가 아는 것만 수집해서 나라고 우기니까 그게 바로 망상의 세계에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다 모른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4절에 보면, 에돔이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짐을 당하였으나, 이리 되어있지요. 피동적입니다. 스스로 무너진 건 아니고. 환경이 에서를 무너뜨린 거예요. 무너뜨렸으나 황폐한 곳을 다시 쌓으리라. 되어있어요.
에서는 안 죽으려하는 거예요. 에서가 안 죽겠다는 말은 에서의 반대쪽은 뭡니까? 야곱이지요. 야곱은 내가 나를 죽인 세계가 영생이다. 이걸 알고 있는 거예요. 나를 죽인 세계가 영생이다.
그러니까 야곱은 벌써 죽었어요. 야곱을 벌써 죽였던 그것만이 이게 실제로 있는 세계고, 내가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내가 자꾸 망상을 배출해요. 망상을 배출한다고요. 그러면 이 야곱에서 신기한 것은 뭐냐 하면, 나를 죽인 세계잖아요. 그러면 나는 나를 죽였으니까 나는 그 세계 앞에서 나는 죽었고, 나를 죽였다는 그 사실이 유일하게 생명이 영생의 세계, 살아있는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에서는 본인이 안 죽으려고 하니까 계속 초과적인 세계가 배제당하는 거예요. 초과적인 세계를 본인이 극구 밀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 되신 세계 이외에는 필요치 않습니다. 이런 거예요. 나는 기어이 살아야 되겠습니다. 내게 쏟아진 타인의 망상을 이미 내가 되었으니까 망상의 세계를 포기 못하겠습니다. 계속 살리는 거예요.
그리고 에돔에게는 에서에게는 초과가 없어요. 여러분들도 성도의 삶이 뭐냐, 목사님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궁금했을 건데,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거 말고, 초과적인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미 성도고, 생명에 속한 사람이고, 야곱 계열에 속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거 말고.
에서의 특징은 매사가 상투적입니다. 상투적이고 상식선에 머문다. 자, 상투적이고 상식이라 하는데, 상식은 뭐냐, 여기에 에서가 있으면 에서를 동그라미 치면 에서가 동그라미 친 그 안에서 들어왔던 그 범주, 범위, 범위 내에서 집중되어있습니다. 집중되어 있는 것. 집중되어있는 거예요. 집중되는.
집중되니까 여기는 뭐가 없느냐, 초과가 없다. 내가 납득 되는 것만 다 끌어모았어요. 이해 되는 것만. 이해되려면 그 결과는 뭐냐, 나는 이해했다. 나는 믿었다. 나는 소망한다. 나는 사랑했다. 전부 다 앞에 나가 들어있으니까 초과적인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교회가 몇 개 있습니까? 일곱교회. 그 일곱교회를 누가 붙드는가, 초과적인 분이 붙들지요. 그게 요한계시록1장에 보면, 주님은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분이 아니었어요. 사도요한에게 밧모섬에서 나타나신 예수님은 전혀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 초과적 인물로 등장했고, 그 초과적 인물의 오른손에 붙잡혀있는 교회가 일곱 교회입니다. 초과적인 것에 안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은 일곱 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지요.
야곱의 입장에서는 벌써 죽었다는 흔적을 초과 앞에서 나의 시선, 나의 평가, 나의 의, 나의 행함, 나의 미래, 이 모든 것은 다 죽었다. 어떤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거죠. 영향력을. 초과에서 확정된 운명에 대해서 내가 흔들기가 실패하는 거예요. 이런 짓해도 나의 구원에 대해서 변함이 없어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로마서8장 나오지요.
다시 합니다. 초과라 하는 것은 로마서5장처럼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흘러넘치는 거예요. 되말 옆으로 흘러넘치는 거예요. 자꾸 흘러넘쳐요. 분수 같아요. 분수. 분수 보면 물이 물방울이 분수대밖으로 마구 튀어나오잖아요. 그렇게 자기가 설정한 나라는 범주 바깥으로 마구 튀어나오는 것이 용솟음치는 것. 분출되는 것. 자연적인 원천수 우리나라에는 딱 한 군데밖에 없어요. 우리나라에는 딱 한군데 밖에 없어요. 울진에 있는 덕구 온천. 그것만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분출되는 거예요. 말려도 안돼요. 눌러도 안돼요. 계속 나와요.
그래서 내 인생을 “초과야! 나오지 마라.” 누른다고 해서 초과가 안 나오는 게 아닙니다. 왜냐 하면 초과는 우리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주께서 마음대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천국은 뭐냐 하면, ‘천국은 죄인을 영입해서 백성 만드는 곳’이 천국입니다. 죄인을 영입하는 거예요. 손흥민 영입해 볼까요. 죄인을 영입해서 스카웃해서 백성을 만든다 말이죠. 그래서 누가 나보고 죄인이라고 한다면 이건 영광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하는 것처럼 너무 영광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에게 죄인 하면, 이건 욕한다고 여기고 이거 뭐 공격하고 내빼고 난리도 아니에요. 내가 뭐가 죄인 인데? 내가 뭐가 죄인 인데? 지금 주님의 초과라 하는 그 취지를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 거예요. 취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 취지를.
본인이 안다는 한계 내에 머물러있는 거예요.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이게 조선의 26대 왕이거든요. 질문 할께요. 임금 가운데서 가장 가난한 임금은? 최저임금이에요. 인조인가? 철종인가? 이건 인간들이 초과를 모르는 겁니다. 기껏 아는 거잖아요. 기껏 아는 것. 주께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초과를 향하여 질문을 던졌는데 인간은 뭘로 마중을 나가는가 하면 내가 이거 해드리겠습니다. 이리 나온 거예요. 아이고, 70대 늙은 개그하려니...아, 그 말도 알아듣네요.
인간이 스스로 초월하려고 애쓰는 그러한 시도가 인류의 역사 가운데 있었어요.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볼게요. 로마시대 때 유명한 두 화가가 있었어요. 한 사람은 제육볶음과 비숫한 제욱시스, 또는 파르라시오스, 둘 다 화가로 자존감이 대단했어요. 이 제욱시스가 먼저 선방 날렸지요. 내가 어느 정도로 그림을 잘그리나 보라 해가지고 포도송이를 그렸는데 그리고 딱 보니까 새들이 와서 “와! 포도다!” 하고 달려들다가 그 뽀족한 부리가 벽에 부딪혀서 이게 상했어요. 막 떨어졌거든요. 사람들이 “와! 정말 얼마나 잘 그렸으면 새들이 진짜 포도송이인줄 알고 달려들다가 몸을 상했겠는가.”
제욱시스가 자신만만해가지고 파르라시오스한테 “야, 너 한 번 그려봐. 저 커텐 제치고 니가 그린 그림 내놓아봐. 커텐 덮어서 감추지 말고 니가 뭘 그렸나 한 번 보자.” 이렇게 하니까 파르라시오스가 하는 말이 “그 커텐이 그림인데.” 커텐이 그림이었어요. 그러니까 제욱시스는 새의 시선을 속였지만, 파르라시오스는 인간의 시선을 속인 겁니다. 이건 인간이 제욱시스의 주체를 초과한 거예요. 파르라시오스가.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사실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세상은 그림이다.’ 세상은 그림이에요. 그리고 인간이 세상을 볼 때에 타일조각을 이렇게 큰 그림 하나를 할 때는 타일 조각을 여러 부분 나눠서 부분의 타일을 그려가지고 붙이잖아요. 세상은 인간이 체험하고 경험하고 감각한 그 모자이크 된 한 조각의 타일들을 임의로 지가 지 맘대로 다닥 다닥 지가 조각 붙여서 나의 월드, 나의 세계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순화하는 겁니다. 그건 초과가 아니에요. 그건 분투 노력하는 거예요. 억지로. 이걸 그들은 현실이라고 보는 거예요. 현실이라고.
우크라이나 청년들도 팝 좋아하고, 방탄소년단 좋아하고, 유튜브 다 보기 때문에 우리나라 드라마 다 좋아하고 그렇게 되길 다 원해요. 하지만 그들에게는 뭐가 없습니까? 푸틴이 자기 나라를 친다는 그 조각은 생각 못한 거예요. 우리네 인생은 이렇게 허점이 많아요.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자기 즐거움과 자기 쾌락이 그게 전부에요. 그러니까 아까 했잖아요. 상상계가 망상계라고요. 인간이 상상하는 것은 망상이에요. 그 인간에게 지시하는 그것도 망상이에요.
그렇다면 아까 누가복음 6장을 다시 보게 되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일어나서 한가운데 서라 하시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이 손 마른 자는 주님 앞에서 자기 계획, 자기 상상계, 망상계, 자기의 상징계 전부 다 일거에 날아간 거예요. 전부 다 일거에 다 날아간 거예요. 주님이 그리는 하나의 화폭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손 마른 자에게 그림을 그리는데 그 그림의 제목이 ‘안식일’이에요. 내가 안식일의 주인공이다. 주체다.
그러면 안식일의 주인공 주체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안식일이 그 유대 백성에게 덮쳤다는 말은 예수님이 그들을 덮쳤다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들을 덮친 거예요. 이게 언약의 세계입니다. 이게 초과의 세계에요. 초과의 세계에서 인간들은 그냥 덮쳐버리면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오지요. 하나는 야곱, 한쪽은 에돔. 이게 말라기1장4절.
에돔의 특징을 다시 하면, 하나님이 나를 운명의 나를 배반할지라도 내가 슬퍼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푸시킨의 시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우울한 날에는 참아라
기쁜 날은 반드시 올 터이니
마음은 미래에 사니
현재는 항상 어두운 법
모든 것 한순간에 사라지나
지나간 것 모두 소중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에돔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힘들게 해도 내가 다시 내 것을 키우겠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지역이라 했습니까? 그게 악한 지역이고 그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러니까 언약을 통해서 언약은 외부성이지요. 언약을 통해서 여기서 사랑과 미움. 미움은 진노,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자비를 두 요소가 다 나오는 기능이 언약적 기능이 이게 진짜 실제하는 세계. 실제하는 세계 언약의 세계입니다. 이게 초과. 초과로 등장해요. 초과.
손 마른 사람은 그냥 주님한테 당했어요. 마치 강간당하듯이. 성폭행당했어요. 그냥 당했어요. 야곱도 마찬가지고요. 에돔은 사전에 무너뜨림을 당했다 했지요. 당했지만, 그 초과를 생각 안하고 잃어버린 자신의 손상 난 흠집 난 그것에 미련이 있어가지고 다시 전에 내가 알던 나로 재구성하겠다고 설치는 거예요.
자, 이러한 언약 안에서의 에돔의 이런 짓이 우리가 잊어야 됩니까? 아니면 우리가 매 일상입니까? 우리의 일상이지요. 일상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있어줘야 그런 죄성이 나타나 줘야 그것을 영입하여 천국을 만드시는 주님의 초과의 가치가 은혜가 더욱 더 빛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에서 두 가지 일이 상반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창조론, 내 안에 들어있는 원인이 일관되게 계속해서 바깥 변화를 일으킵니다. 창조론은 안에 들어있는 원인이 또는 원칙이 바깥에 뭘 일으킨다? 변화를 일으킨다. 이게 창조론입니다.
창조론 반대는 뭡니까? 흔히 세상에서 창조론 반대는 진화론하지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진화론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퇴화론. 점차 니가 썩어빠졌다는 것을 점차 점차 드러내는 거예요. 퇴화되어 가는 이 일도 성도가 매 일상 가운데 즐겁게. 문자로 ㅎㅎ ㅋㅋ 하면서 즐기면서 우리는 이 퇴화론 대로 살아가면 되죠. ㅎㅎ 이건 초과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은 내가 퇴화되는 것 밖에 남아있지 않아요.
누가복음 6장에서 안식이라는 율법을 위하여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율법을 위하여. 안식일 율법이죠. 그런데 안식일 율법은 말라기에도 나오고요. 누가복음 6장 6절에 보면 제사법을 중심으로 잡아서 여기에 안식일도 나오고 하는데. 말라기2장4, 5절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4절과 5절 사이에 제사법이 들어가 있습니다.
제사법이 뭐냐, 제사법은 이 한가지만 알면 다 아는 거예요. 나 상실. 제사법의 취지는 에돔의 위치에 있는 나를 늘 반복적으로 상실시키는 거예요. 상실된 게 뭐다? 나다. 이 역은 누가 잘했는가, 한예슬이가 잘했어요. 옛날에 20년 더 되는 남해에서 남자 주인공 이름은 장철수, 여자 이름은 나 상실. 재벌집 여자가 돈을 노리는 남편 때문에 당하고 물에 부딪혀가지고 기억 상실증 걸려가지고 이름도 없어서 장철수가 이름을 지었어요. 나 상실로 지은 거예요. 얼마나 은혜 받았는지 몰라요. 나 상실.
이게 반복해서 상실시키는 겁니다. 반복해서. 왜 내가 상실되느냐 하면, 나의 우수함과 나의 정결함을 나는 그것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이게 계속 상실되어야 합니다. 첫째 시간에 한 것을 덧붙여서 해보겠어요.
인간은 부모 밑에서 부모의 지시와 명령 따라 산다. 그랬던 아이가 거기서 인간은 자아성이 형성되는데, 자아성, 신체와 자아는 다릅니다. 신체는 우리가 몰라요. 세포 몇 개입니까? 몰라요. 대략60개조, 100개조하는 사람이 있는데 세포 하나 하나를 모른다고요. 모르지만, 뭉뚱그려서 이걸 그만 나라고 하자. 라고 모호하게 일방적으로 그렇게 정해버린 그걸 가지고 자아라고 해요.
인간은 신체에서 비롯되지만 본인 신체도 잘 몰라요. 모른다는 말은 망상으로 덮어씌우는 방법 외에는 자기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망상을 할 때 부모의 갖고 있는 지시가 부모가 그걸 도와줘요. 내 자아를 상실이 아니고 나를 굳히기, 형성시키는데 부모가 도와줍니다.
부모가 지시와 명령을 해서 “너는 이런 인간이 되어야 돼!” 라고 이렇게 굳혀주지요. 그런데 이들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부모 곁에서 성장을 하게 되면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 이것도 망상입니다. 그걸 흔히 뭐냐, 세상입니다. 세상.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있다 하니까 여기서 부모보다 더 많은 타인들이 있어요. 타인들이. 부모는 두 명이지만, 학급의 친구들은 삼십명이 넘잖아요. 선생님까지 합하면. 학교가면서, 교회 교인들 보면서 그 타인들이 내 자아에게 마구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너는 이렇게 되어야 된다고.” 그렇게 되어줄 때 이걸 뭐냐 하면, 호명이라고 합니다.
호명, 이건 자아다. 이건 자아고 이걸 주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 주체 이야기. 주체 이야기 이렇게 됩니다. 데카르트의 좌표가 나와요. x축, y축할 때,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x좌표와 y좌표의 지점으로 보는 거예요. 여기가 A지점이라 하면 친구가 B점. 친구는 뭐냐 하면 x1, y1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x1, y1으로.
이게 나는 내 자리 확보 되어있고, 너는 니 자리 확보되어있구나. 친구 사이기 때문에 스스로 대화할 때 같이 니도 양보하고, 나도 양보해서 적당한 이 지점에서 만나자. 어떤 지점? x3,y3로 만나자. 이렇게 인생은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의 좌표의 지점. 이걸 주체라고 합니다. 내 주체와 너 주체가 양보해서 이런 주체로 형성하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결혼이지요. 결혼.
라는 늙으스레한 총각과 늙으스레한 처녀들 만나서 맺어주는 그 프로그램이 있어요. 맺지도 못하는데 괜히 지 유튜브에 지 얼굴보이려고 하는 그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전부 다 선이에요. 선. 획일화된 선의 지점만 고집한다고요. 그런데 그들이 기어이 가지 않는 지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x0, y0, 0점은 안 가요. 이게 뭐냐 하면 공백입니다. 공백. 빈자리에요. 빈자리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요.
왜? 0이니까 위치가 정해지지 않아요. 죽은 자리지요. 여기서부터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출현해요. 예수님이 여기서 출현해서 사람들이 미워해서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 0점으로 사라졌어요. 이 세상 자체가 예수님이 보기에 뭐냐 하면 망상의 세계라는 것을 예수님이 증명해 주시는 겁니다.
지금 그건 예수님이고, 오늘 본문의 말라기는 요 지점이 뭐냐 하면 바로 제사하는 사건의 지점입니다. 사건의 지점. 또는 사건이라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제사라는 율법. 레위인과 맺었던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다. 그 역할을 누가 해야 되는가, 야곱이 되는 이스라엘이 해야 돼요. 왜 이걸 에돔이 못하고 왜 이스라엘이 하느냐, 야곱은 벌써 죽은 자기 때문에.
야곱이 죽어야 초과만 나와요. 그 초과가 나와야 제사법이 번져요. 요 x,y의 지점이 제사법이 번져나간다고요. 번져나가니까 이들은 여기에 끌려들어가지요. 그렇다면 이 원점을 가지고 이걸 한 번 그려봅시다. 처음에 우리 인간들은 직선을 생각해요. “야, 너희 집 가는데 차로 몇 시간 걸리는데? 어느 길로 가는데?” 거리, 어떤 좌표가 되지요. 동그라미 아니고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가면 돼요. 선 따라, 직선 따라 가면 돼요.
그러나 여기는 직선이 아니고 원이에요. 원은 포함되는 겁니다. 이 직선을 가게 되면 아무리 멀리 가도 그 주인공은 누굽니까? 내가 주체가 된다니까요. 주체는 뭐냐, 이 사회에 지도를 펴 놓고 있는 어느 지점을 확보한 나. 이게 주체가 되는 겁니다. 서산? 좋아요. 대구? 좋아요. 지점이 있어요. 끝나면 어디 갑니까? 대구간다고요. 서산간다고요. 돌아갈 곳은 있거니와 이런 것처럼. 돌아갈 곳이 있지요. 돌아갈 곳이 있는 세계는 뭐냐, 망상의 세계에요. 자기 중심의 망상의 세계에요. 타일 붙여놓은 것처럼.
그런데 이 0점은 돌아가면 내가 없어지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어져요. 그냥 포함이 된다니까요. 내가 아예 없다는 게 아니라 누구의 영역에 포함이 되지요. 그게 선한 지역이고. 그렇지 않으면 여기 1장 4절에 악한 지역이 되는 겁니다. 또는 포지션. 지역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환경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나의 운명은 환경이지, 내가 이 자리에서 x, y이 지점에서 내가 얼마나 훌륭하다. 해봐야 그건 망상 속을 점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망상의 포지션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이 원을 키우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야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미 확정된 야곱이기 때문에 야곱에서는 야곱이 죽어야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잖아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중심에 죽음의 자리가 있어요. 요 죽음의 자리가 양이나 염소나 소가 죽는 자리에요. 죽음을 중심으로 형성된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죽음으로 끌려온다면 죄인이 되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죄인을 영입해서 천국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를 아느냐, 율법이 도와주지요. 율법이 바로 1장6절에 나오는 제사장과 백성들의 죄에 대한 테마하에 그런 주제하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리 되어있지요. 6절에. 아~ 이게, 참.
이야기할 게 많습니다. 0안에 원 안에 써클 안에 들어와야 되는데 따로 선, 획일적인 이 좌표. 데카르트가 처음 만들어서 데카르트 좌표라고 해요. 자기 지점에서 계속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선 지점에서 인간들은 “내가 뭐 잘못되었습니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나의 나됨이 타자 또는 타인과 견주어서 파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강남강의에서 했는데 전에 한 내용이 상당히 어려웠는데 그 점을 다시 하겠어요. 인간이 태어나면서 인간의 자아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타인이 들어있어요. 타인이. 가까운 부모, 형제들 들어있어요. 부모, 형제 자꾸 눈치를 보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집에 들어올 때 신발 놓을 때 신은 채로 들어오지 말고, 신발 벗었으면 한 번 뒤 돌아봐가지고 신발을 나란히 나갈 때를 생각해서 반대로 해가지고 나갈 때 바로 신고 나갈 수 있도록 그리 놓아라. 그 교육 받은 집안 애와 후닥닥 들어와서 양말 거꾸로 뒤집어서 세탁기에 넣을 때 얼마나 이게 불편한 작업인지 모르고 그 양말을 그냥 뒤집은 채로 벗어놓고 게임하러 가는 애들. 그 두 애들의 자아는 동일해요. 주체가 달라요. 그 집안의 주체가 달라요.
엄마가 와서 “게임 또 이겼나? 잘했어. 내 아들!” 이거하고, “니 신발 어떻게 벗어놨는지 봐봐.” 귀 잡고 “이리와. 이리와. 내가 몇 번 이야기하더노. 신발 나란히 하라고. 신발 한 번 봐봐!” “나란히 했는데” “아니지. 직각으로 해야지. 니는 17.5도 빗나가고 있어. 니 이렇게 하면 니 행세는 우리집이니까 귀 잡아당기는 것으로 끝나지만 다른 집에 가면 너만 욕하는 게 아니라 느 아버지 뭐하시노? 니 엄마 가정교육 어떻게 하노?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니는 우리 집안에 아버지, 어머니 먹칠 할래? 안할래? 다음에 잡채하려고 했는데 잡채 안해준다.” 협박공갈 나오지요. “엄마, 할게” 이게 한 두 번이 아니고 계속 해보세요. 신발 나란히 한 게 마땅한 줄 알고 있어요. 이게.
이게 뭐냐 하면 내 안에 타인이 있어요. 그런데 이 0의 세계는 뭐가 없느냐 하면 타인이 없어요. 찾아볼래야 예수님 믿고 싶어도 예수님 이 땅에 없어요. 왜? 제로지점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했잖아요.
주님 부활했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만지려고 했어요. 만지지 말라. 했어요. 만지지 말라하면서 그 뒤에 하는 말이 그 근처에 나오는 중요한 말이 있어요.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우리 속에 뭐로 영입하느냐, 여기에다가 죄인을 영입해버리면 너희 하나님 되어버려요. 조건이 있어요. 사라진 그 곳과 관련성을 지어줘야 돼요. 예수님이 사라진 곳. 육체로서 만지면 안되는 곳. 만지면 안돼요.
사람이 뭘 만진다는 것은 자기 세계에 포함됐다는 조건하에 만지거든요. 볼펜 만지면 “왜 남의 물건 만집니까?” 이리 된다고요. “내 볼펜인데요.” 내 볼펜이기 때문에 만지는 거예요. 누구를 파악하고 탐구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내 것 되기 위한 시도입니다. 내 것 만들기 위해서. 보통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 사이에서는 관심 없어요. 보통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식사 뭐하십니까? 지난날 뭐 했어요? 자꾸 관심을 두는 것은 자기 영역 속에 끌어당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내 것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것.
주님께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데, 주께서 뭐냐, 지금 구원받지 못한 이유가 니가 망상의 세계 속에 본래 너의 속한 나만의 좌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구원이 안되는 거예요. 그건 지옥에서나 가능하지요.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수요일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자들이 누굽니까? 귀신들이에요. 귀신들. 왜 귀신들이 고백하고 인간은 고백을 안 하느냐 하면 인간들은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하나님이 절대로 폭력적이지 않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래요. 폭력적이지 않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는 게 인간인 일 때는 덮어주고 용납하는 게 하나님이다.’ 이리 생각하는 거예요.
불로서 태운다든지 저주한다든지 이런 하나님은 도저히 우리네 갖고 있는 상식에 입각해서 그건 옳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판 이야기라든지 예수님의 하는 모든, 모든 게 부정적인. 이 성전 헐어버려라. 이런 부정적인 것. 너희 애비는 악마다. 이런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강남강의에서 했지요. 그들에게 들어올 자리가 없다고요. 요한복음8장37절. 그들에게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는 마귀는 단박에 알아봤어요.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이건 뭐 인간들에게 치이고, 악마에게 들통 다 나버리고. “입 다물라. 나는 너희들과 상대 안 한다. 내가 구원할 거 같으면 너희들 속에 없다.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문제는 인간들이 스스로 잃어버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당했던 그 수모를 흠뻑 내용으로 담아서 그 수모를 다시 자기 백성에게 되돌려 줘버려요. 자기 백성 될 사람에게 되돌려 줘버린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야곱을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야곱에게 씨름해야 될 야곱을 붙들고 야곱의 상대자가 되어줘서 야곱으로 하여금 더욱 더 야곱의 본색이 드러나는 그러한 시츄에이션을 연출을 하는데 하나님이 가담해줬던 겁니다.
“나를 물리쳐봐라. 나를 이겨봐라. 이게 니 본색이야. 너는 왜 이기고 싶어하느냐.” 이겨야 내 자리가 확보되기 때문에. 남에게 지기는 싫은 것이 야곱이었어요. 그 야곱이 제로가 되면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은 뭐냐, 야곱이 했던 야곱 같은 그 행세, 더러운 행세, 나밖에 모르는 행세가 그대로 다 살아나면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공로, 초과적인 것을 드러내는 그 현장이 언약의 현장입니다.
그래서 언약은 중심적입니다. 뭐가 아니다? 중앙적이지 않아요. 중심적이지 중앙적이지 않아요. 중앙적이라는 것은 기하학적으로 딱 고정됐잖아요. 자, 보겠습니다. 기하학이란 이 세상을 평면으로 본다 말이죠. 내 위치를 내가 점을 찍었잖아요. 이 점 자체가 이게 뭐냐, 우리는 도형적으로 세상을 자르듯이 자르고 그것을 끼워 맞춘다. 그게 인간이 세상을 보는 방법 그것밖에 못 봐요.
세상을 자르고,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직각삼각형 잘라요. 잘라서 내가 있는 곳에 사각형 갖다 붙이고. 테트리스 알지요. 테트리스 하듯이. 삐링~ 삐링~ 해서 하나 갖다 붙이고. 이렇게 해서 나이가 들고 자아가 크면 클수록 자기게 점점 더 많아져요. 어릴 때 소녀들은 나는 백마 타고 온 왕자님과 결혼하겠다. 백마 탄 왕자 누구냐, 김정은이에요. 백두산 올라갈 때. 똥배 나와도 괜찮아. 이런 거.
백마 타다가 점점 더 자기가 아는 그 사각형짜리 이런 게, 남들이 이렇게 살았다. 이리 하면 나는 해외여행 가보고 싶어. 하다가 해외여행 보내주는 남자라면 내가 결혼하겠다. 이리 돼요. 그러니까 추가적으로 들어오는 자신의 욕망의 대상들을 이렇게 딱딱 쌓아놓고 하기 때문에 각 하나가 이게 뭐냐, 고정화 되어있다. 고정적인 것을 집대성하니까 자아는 뭐냐, 자아는 요지부동. 똑같아요. 변화지 않습니다. 똑같이 그대로 나다움을 고집하고, 고수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 중앙에 있어요. 기하학은 고정된 것에 중심점을 중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의 세계는 중앙에 있는 게 아니고, 중심에 있어요. 중심은 뭐냐, 에너지가 나오는 출처 이게 중심이에요. 중심. 그러면 그 중심은 한 군데에 있어요? 아니면 여러군데에 있습니까? 말씀이 떨어진 곳은 중심이 서울마다 열 군데 될 수 있고 대구만 해도 스무군데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새로운 초과적인 요소가 흘러나오면 그게 주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갔는데 데려간 곳이 도사님 변화산에 올라갔잖아요. 그러니 베드로는 있다가 “이게 뭐야? 갑자기 주님께서 체력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산꼭대기 변화산이 다골산이 변화산이라면 높이가 150m에서 200m 정도. 잘 모르겠어요. 차로 올라갔으니까요. 예배당이 두 군데인가 세군데가 있어요. 부동산을 먼저 선점해 놔야 돼요. 나중에 이스라엘이 내 땅이라고 차지 안 하니까.
처음에 중세 때 예루살렘의 땅 투기가 일어난 거예요. 각 교파끼리. 먼저 등기하는 것이 임자입니다. 아르메니아 교회에도. 1/4등기 해놨어요. 아르메니아 유대인. 기독교 그 다음에 아랍. 4등분 딱 되어있어요. 전부 등기 다 되어있어요. 성전 근처에 무덤도 등기 되어있어요. 주께서 오실 때 재림하실 때 빨리 부활 승천하려고 등기 다 되어있어요. 이게 뭐냐, 기하학적으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자기 지점을, 살아서도 자기 지점만 생각하는, 죽어서도 내가 어디 포지션하느냐, 자기 지점만 생각하는 거예요. 내 지점.
그런데 주님께서는 야곱을 갈아버렸어요. 믹서기에 콩을 집어넣으면 콩이 형태가 유지됩니까? 아니면 가루가 됩니까? 가루가 되지요. 홈쇼핑에 많이 나오잖아요. 가루가 되어버렸어요. 에너지가 와서 하나님이 야곱을 치듯이 자기 자신을 니가 하는 행색, 기하학적 힘 모으는 니 중심으로 모으는 그것에 주께서는 몸을 맡겨. “때려 봐! 때려 봐! 고집부려 봐! 내가 맞아줄 테니까 때려 봐!” 그러면 고집 부리겠지요. 에돔처럼 우리가 고집부릴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내 인생 조저도 내 인생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처분할 겁니다.” 그걸 하나님이 이렇게 합니다. 그게 뭐냐, 허무에요. 허무. 이겼는데, 분명히 성공했는데, 분명히 가졌는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간이 되었는데, 왜 그 뒤에 짙은 허무가 안개처럼 쌓이는지. 도대체 아무리 얻었는데 그거 지킨다고 초조해. 전보다도 못할까 싶어서 불안해. 나는 x좌표에서 x1, x2 이만하면 됐다고 했는데.
저 뒤에 동창생이 왔는데 x4에서 y4가 너무 잘살아. 그 다음부터는 여기서 뭘 느껴요? 결핍을 느끼지요. 지리적 결핍을 느껴가지고 “니, 어느 미용실 갔는데?” 또 갑자기 중간에 있는 미용실까지 찾아가. ‘아, 이 동네는 이렇게 머리하고 이렇게 하는구나!’ 또 골프 모임에 간다든지 해가지고. 지형적으로 자기 영역을 확대하려고 한다 말이죠.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니 원대로 해봐!” 언제까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됨의 끝판왕. 헛됨의 극치를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매일같이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승리했는데, 그게 잠깐 좋았는데 한 시간 뒤에 “어머, 어머, 이거 말고 또 없어요? 월드컵보다 더 재미있는 거 없어요?” 치킨 사달라, 치킨 사달라, 자식들이 해가지고 치킨 사줬는데 치킨 연이틀 월드컵한다고 사주니까 치킨 캑! “치킨 개 주세요. 뽀삐 주세요.” 이렇고 있다 말이죠. “왜? 많이 먹었나? 맛이 별로 없네요.” “그럼 어떻게 해.” “더 맛있는 치킨 없어요?” 이러고 있다고요.
말하자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욕망에 허무에 있는 거예요. 허무. 그 허무라는 애굽에서 강제로 뽑아내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를 원안에 집어넣는 겁니다. 니가 구성한 환경 말고, 이미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확정된 세계에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그거 하면서 모든 제사법의 완성은 이미 예수님을 위해서 주체로서 일방적으로 다 이룬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뭐냐, 손 마른 자에요. 손 마른 자입니다. 손 마른 자는 손 말라진 채로 주님을 증거하는 용도기 때문에 너무나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손 말라져야 돼요.
치킨 먹어야 되고, 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야 돼요. 이것이 너무나 소중해요. 전에는 나한테 안 소중했는데, 지금은 주님의 초과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재료가 되고, 자료가 되고, 이게 원료가 돼요. 죄인을 부르러 와야 되니까. 죄인을 영입해야 되니까. 샌비 오지 말라는 거예요. 천하에 죄인 오라. 죄 많을수록 은혜가 더 넘치니까. 계속 중고, 중고를 찾는 거예요. 물론 중고 오라 하지 않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중고라 하지만.
그럴 때 우리는 바로 내가 보는 나의 시선에서, 주님의 시선으로 바꿔버리지요. 주님의 시선으로 바꿔버리면 나는 잘났다. 나는 그림 최고 잘 그린다. 새들도 속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바로 나 자신마저 속이는 자이어야 하고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시선을 못 속인다는 점을 안심해도 좋습니다. 기뻐해도 좋습니다. 주께서는 지켜보고 계십니다.
너 같은 죄인, 내가 건졌다. 내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사는 대로 그냥 살면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쁘고 가벼운지요. 고칠 필요도 없고, 수정할 필요도 없고, 계산할 필요 없고, 모든 것이 주께서 의도한 대로 죄인으로 사는 이 낙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