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1215a말1장4절(초과)-이 근호 목사
안양20221215a말1장4절(초과)-이 근호 목사
오늘은 말라기1장4절부터 하겠습니다.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그렇게 되어있지요. 한 구절인데요. 한 구절에 엄청나게 이야기할 게 굉장히 많습니다. 몇 시간 짜리로 나올 수 있어요.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place. 장소. 장소 문제로 나온다고요. 악한 지역이다. 악한 지역. 장소거든요. 장소.
악한 지역인데, 장소를 통해서 운명을 결정한다. 상당히 이어지기가 곤란하겠지요. 보통 운명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두고 니가 나쁘니까, “니 미래는 끝났어!” 이리 되어야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뭐가 빠지는가 하면, 장소라는 게 빠져요. 예를 들어서 “너, 편의점에 도둑질했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악한 짓을 했으니까 교도소 가거라.” 지금 뭐를 지적하는가, 그 인간을 지적하잖아요. 인간을.
“니 편의점에서 뭐했어?” “물건을 훔쳤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너의 가정을 몽땅 교도소로 옮겨라. 니가 살던 집을 몽땅 교도소로 옮겨라.”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지역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인간이 잘못됐지, 지역이 무슨 잘못입니까.’ 라고 생각을 할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운명이라는 것. 말라기1장부터 나오는 게 운명인데, 결정된 운명인데. 이 결정된 운명은 그 사사로운 개인적인 그 사람의 팔자와 관련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치와 관련되어 있어요. 배정받은 위치. 배정받은 위치입니다. 악한 지역이잖아요. 악한 지역이 있다면 선한 지역이 있는 겁니다. 선한 지역.
악한 지역이 있다는 것은 선한 지역이 있고, 이 지역과 지역에서 인간이 있으면, 그 사람의 개개인의 행동이나 행함은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선한 지역에는 율법의 완성이 여기에 선한 지역을 형성하고 있고, 악한 지역에서는 반(反)율법적 경향을 보여주는 겁니다. 경향을 보여 준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개인적인 운명을 갈굴 대상도 안 돼요. 안되고, 천국과 지옥을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천국 장소지요. 지옥 장소지요. 천국과 지옥의 장소를 정해버리면, 이 장소는 뭐가 되느냐 하면 환경이 됩니다. 환경. 환경 우선주의지요. 환경이 결정되어버리면 그 환경에 속한 사람은 배정받은 사람은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어떤 짓을 하고, 어떻게 생각을 하고는 일체 묻지를 않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습니다.
니가 어디 안에 있느냐, 그것만 주께서 보시지요. 지금 하는 게 말라기잖아요. 말라기 이후에는 뭐가 되느냐 하면, 말라기 이후로 역사가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이후에는 종말이라는 것이 신약시대에 종말이 되어집니다. 종말이라 하는 것은 결정된 것을 결정된 채로 그냥 덮치는 거예요. 결정된 것을 결정된 채로.
예를 들어서 그런 겁니다. 식당에서 해물탕을 하는데 주문하고 나니 해물탕이 왔어요. 해물탕이 냄비채로 왔어요. 손님이 묻습니다. “이거 얼마 끓이면 먹을 수 있습니까?”하니까 주인이 “그냥 드셔도 됩니다. 저 방에서 다 끓여서 왔으니까 그냥 드셔도 됩니다. 기다릴 필요 없이 그냥 드셔도 됩니다.” 기다릴 필요 없다는 것은 시간 요소에 대해서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50년 동안 교회 다녔다. 그런 거 빼세요. 시간 요소를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당장 드셔도 됩니다.
앞으로 20년 동안 잘할게요. 그런 거 이야기하지 말고. 앞으로 10년 뒤에 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 거 하지 말고. 자기에서 시간 요소를 빼는 거예요. 남는 것은 환경 요소밖에 안 남습니다. 이게 바로 이방민족인 우리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지요.
그것을 구약 이스라엘에게도 이미 그러한 원칙들이 계속해서 살아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원칙 제가 문장 하나 쓰겠습니다. ‘변화를 겪는 것이 내부에 요인에 있다.’ 내부에 요인이 있다는 틀 또는 구조 모델. 변화를 겪는 것이 내부에 요인이 있다는 거예요. 외부의 요인이 아니고 내부에 요인이 있다. 내부의 요인은 말라기에서는 뭐냐, 율법. 구체적으로는 뭐냐, 제사법. 제가 말라기1장 끝까지 읽어보라 했지요. 끝까지 읽으면서 하나님의 의중이 무언가를 여러분이 나름대로 생각해보라 했지요.
하나님의 의중이 뭐냐 하면, 내부의 요인으로 인하여 바깥 변화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바깥의 변화로. 그러면 여기서 반대말, 내부의 요인으로 변화를 겪는 것. 이 반대말이 뭐냐 하면, 외부의 것으로 내 내부의 변화를 요청하는 게 반대가 되겠지요. 변화를 겪는 것이 내부의 요인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고, 인간들의 방식은 뭐냐, 외부의 것에 의해서 내가 좀 달라져 볼까, 하는 것이 인간들의 방식입니다.
인간들이 외부의 것을 내부로 반대말로 하는 제일 근본적인 흔히 보여주는 일상적인 생각이 뭐냐 하면, 매사에 나에게 돌아올 이득 또는 이윤. 이윤을 생각하는 거예요. 매사에. 어떤 행동을 하든지 눈 오는날 사진을 찍는다든지, 모든 행동하든지 하나 하나가 ‘이거 해서 나한테 이익이 뭐지.’ 생각하는 거예요.
왜 이익을 생각하느냐 하면, 매사에 나에게 이익을 생각하는 것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가 이걸 나라고 이미 규정지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인간이 평생 스트레스 받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요거 하나에요. 요거 하나입니다.
그러면 남들이 나를 좋게 보게 되면 내가 은근히 노렸던 나의 이득이 돼요. 아휴, 부럽다. 아이고, 애들하고 해외여행 갔다 왔다면서. 나는 뭐 요새 살기 바빠가지고 나 옛날 처녀 때 꿈은 그건데 요즘은 뭐 나는 영 물건너갔어. 아이고, 요놈의 팔자 남자 잘못 만나가지고...., 왜 그리 생각하느냐 하면, 해외여행을 갔다 와서 행복한 모습을 보일 때, 남들이 행복하다고 해주는 그 모습에 대해서 스스로 대만족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겁니다.
손해는 뭐냐, 손해는 남들이 나를 가련하게 여기고 안됐다고 측은하게 여기면서 나라면 나 같은 인생 안 산다고 그렇게 평가할 때, 그게 나한테 손해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외부의 눈치 보는 인생입니다. 외부로부터 눈치 보는 인생.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뭡니까. 외부로부터 눈치 볼 거 없이 내부에 있는 원인에 의해서 니가 이미 운명이 결정됐다는 사실이에요. A(Ap)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데.
A(Ap). A는 외부성. 괄호는 내부성. 괄호 안에 외부성이 place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place니까 p로. “내 안에 외부 있다!” 이 말이에요. 내 안에 외부 있다. 내 안에 외부 있으니까 이건 외부가 나의 긍정을 내가 허락을 맞고 나에게 검증받고 내 것으로 전환될 때에 내 것이 된다는 것이 일반 상식이거든요.
그런데 쓱~, 나의 허락도 없이 그냥 침투한 거예요. 이걸 오늘 강의 제목으로 정해도 괜찮아요. 이게 뭐냐 하면, 초과. 밤이나 쌀전에 쌀 팔 때, 인심 쓰는 척 하면서 되말에다가 넘치도록 주지요. 그 흘러넘치는 걸 뭐라고 합니까? 초과된 거예요. 초과된 것. 내 예상, 내 이익이냐, 내 손해냐를 능가하는 그 무엇. 그 썸씽. 초과하는 것. 흘러넘치는 것. 이걸 로마서5장에서 또는 로마서3장에서 초과된 그 외부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
복음은 복음 안에 뭐가 있다? 의가 들어있어요. 무슨 의? 인간이 만든 율법에 의한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십자가로 주어진 하나님의 죄사함에서 오는 거룩에서 오는 의. 외부적인 의. 외부적 의가 뭐라고요? 초과된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 초과를 알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되말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초과는 그거 빼고 여분의 것이니까. 이 말은 우리 인생에 대해서, 현실에 대해서 정확하게 읽는 노력이 필요해요. 정확하게. 우리가 사는 삶이 대충 어렴풋이 아는 게 아니고 정확하게 나는 뭘 믿고, 나는 뭘 위해서 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확한 규정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그건 나의 내부성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내가 할 수 없는 외부성을 알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철저히 완벽하게 다 파악해야 돼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종교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열성과 열심. 바리새인이 대대로 했던 거예요. 로마서10장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지요. 열심히 믿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초과 된 게 아니고, 해내면 해낼 수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시험 치는데 경찰시험이라든지 시험칠 때 남자 같으면 턱걸이 한다 말이죠. 딴 건 필기시험, 면접시험은 다 됐는데 문제는 턱걸이가 안되는 거예요. 특히 경찰시험에서는 딱 범인을 잡을 때 손에 압력이 있어야 돼요. 이 압력으로 해서 어떤 사람은 세 번 떨어진 사람이 있어요. 순경되려고 삼천만원 들여서 노량진 학원에서 했었는데 맨날 떨어져요. 이 손. 열심히 노력하는 거예요. 이것만 하면 합격이니까.
그러니까 그 청년은 경찰된 자기의 모습을 보지요. 경찰이 왜 되어야 되는가, 남들보기에 남들이 나를 경찰이라고 해서 젊은이가 착실해서 자기 앞가림은 하네. 라는 평. 그게 나의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남들이 뭐라고 하는 그것이 그것에 내가 맞춰 살아가는 인생이거든요. 남들이 뭘 요구하는지 맞춰 살아야 그것이 남들이 나를 좋게 보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되고, 보람이 되는 겁니다.
경찰 제복을 늘 그리면서 힘들게 경찰공무원 준비를 하는데 이게 딱 잡을 때 손 압력이 안되는 거예요. 턱걸이 할 때 분명히 자기는 일곱 개를 해야 되는데, 다섯 개 밖에 못했어요. 요번에 떨어졌나 싶어서 보니까 나중에 채점을 보니까 열 두 개로 되어있어요. 분명히 다섯 개 했는데. 지가 한 다섯 개 빼니까 칠이 뭡니까? 칠이 뭐예요? 초과성이지요. 초과성.
다시 묻습니다. 칠이 뭐라고요? 초과성이지요. 요한계시록에 교회가 몇 개입니까? 일곱교회. 이 교회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종교를 넘어선 초과성. 인간의 교회 빼고 주께서 친히 내부적인 원칙에 의해서 결정된 교회. 그 교회가 초과적 교회에요. 성도의 삶은 뭐냐 하면, 날마다 그 초과 때문에 살아가는 거예요. 초과의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내 도리를 찾는 게 아니에요. 내가 할 수 있는 내 도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런 삶이지요. 타인의 시선하는 것은 타인을 좋아하는 게 아니고 타인에게 칭찬받는 내가 좋은 거예요. 타인에게 칭찬받는 내가. 그걸 가지고 명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명명. 개 짖는 소리가 아니고 명명.
이름을 더 붙이는 거예요. 명명 중에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올케, 조카. 이런 것. 어릴 때부터 붙이는 거예요. 외부에서 “아버지!” 하면 외부에서 붙인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기는 아버지다운 노력을 해야 돼요. 어머니도 마찬가지고 딸도 마찬가지고 아들도 마찬가지고. 조카도 마찬가지에요. “니는 내 조카야.” 제대로 해야 돼요. “니는 내 손자야.” 손자답게 해야 됩니다.
재벌집 할아버지의 아들들하고 어떤 아들의 아들하고 재벌 상속권을 가지고 투쟁을 한다면, 이건 삼촌 고모 대 조카의 치열한 투쟁. 투쟁을 하지요. 온 식구가 송중기 하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 드라마. 누가 외부에서 이름을 줬고, 그것이 자기한테 꽂혀서 자기는 그 이름에 걸맞는 합당한 인생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이 환경.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망상의 세계에요. 망상의 세계. 야~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잘 들어야 돼요.
망상의 세계. 자, 망상이라는 게 뭐냐, 망상은 둘이 있어요. 하나는 뭐냐, 상상의 세계와 망상의 세계.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이 용어는 너무 어려워서 내가 이 용어를 안 쓰려하는데 상징의 세계 있어요. 상징의 세계. 상징계. 이 용어 너무 어려워서 상징계 자체가 영어로 symbol이거든요. 상징계라는 말을 저는 쓰고 싶지 않아요. 그냥 꾸며낸 세계. 요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상징이라는 말이 더 어려워요. 설명하기 힘드니까.
상상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깥에 있는 거하고 나하고 일치시키는 것. 나와 it 그것과 동일시하는 걸 상상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계라고요? 망상이라 했지요. 망상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는 아는데, 나는 나에 대해서 아는데 저쪽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만큼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될 때 망상이 되어버려요.
이게 볼펜이지요. 볼펜을 볼펜이라 할 때 이게 왜 망상이냐, 이건 내가 아는 지식 범위 안에서 들어온 볼펜이지만, 볼펜 공장에서 만드는 그 기술자 아는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하지요. 제대로 모르는 거예요. 기술자가 보기에 모르는 거죠. 나는 ‘이게 볼펜 아닌가’ 내가 일방적으로 망상적으로 내가 필요하다고 볼펜이라고 사용한 거예요. 그런 갭이 있겠지요. 그러니까 망상이 되는 겁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이게 망상 중에 망상이지요. “니는 나에 대해서 뭘 알아?” “아이고 친절하고 착하고..., 나를 몰라도 너무 몰라.” “니는 나를 몰라.” “몰라도 좋아.” 이렇게 하거든요. 내게 기쁨을 준다면 그걸로 족하다 이 말이에요. “그럼 내가 니 기쁨조야 뭐야?” 그러니까 상대를 볼 때에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지식만 가지고 상대를 함부로 안다고 하니까 망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망상.
망상 중에서 아주 대표적인 것이 뭐냐, 집안에 개 키우는 사람들이에요. “우리 집 개는 물지를 않습니다. 내가 너무 잘 압니다.” 모든 물었던 개는 다 물지 않은 개였어요. 저희 집에서만. 저희 집에서만 안 물었고, 바깥에서는 무는 개였어요. 주인이 몰랐지요. 왜? 물지 않는 개라는 자기의 단어적 개념과 그 개를 일방적으로 일치시켰기 때문에 그게 망상이 되는 겁니다. 그게 망상이 돼요.
그래서 괜찮은 옷이 있으면, 저 옷 내 옷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자기가 동일시하는 이것이 상상의 세계라면, 그냥 주어진 세계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쪽 세계가 망상인데, 이것도 망상이에요. 망상인데 어떤 망상이냐 하면, 나한테 압력을 주고 호명을 하고,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명명을 하는 그런 식으로 “니 내 안에 내 세계에 들어와서 내 시키는 대로 해!” 요구하는 세계. 그게 바로 망상의 세계 가운데서 또 하나의 세계가 있는 겁니다.
상상의 세계는 자기도취적 세계에요. 소주 까먹고 저녁에 뜨슨방 해가지고 상상하는 것. 이 상상계의 대표중에 하나가 스토커. 집착하는 것. 요새 스토커 강화된 거 아시지요. 그냥 꾸며낸 세계의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누구 회사에 취직하는 것. 그리고 군에서 입영통지서 내는 것. 군대 망상의 세계입니다. 국가가 부른다. 하지요. 망상의 세계에요. 왜? 가까이 하기에는 우리는 나는 국가에 대해서 모르니까. 군대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까.
알지 못하는 망상의 세계에서 입영통지서가 날아왔어요. 대표적인 것이 유성준. 군에 가기 전에 여행 갔다 온다고 해놓고는. 군에 가는데 미국 여행 갔다 와서 가겠다고 해놓고서는 미국에서는 군에 안 가겠다고 한 거예요. 제 생각인데. 유성준이가 나이 사십이 넘었잖아요. 유성준하고 방탄소년단 진 요번에 군에 들어갔지요. 5사단에. 같이 넣었으면 좋겠어요.
입영통지서가 왜 망상이고 이게 실제가 아니냐 하면, 본인이 통지서를 그 내용이 되든 쪽지가 되든 본인이 거부할 수 있잖아요. 인간에 자유의지가 있다며. 자유의지 주장해 놓고는 군에 안 간 사람 못 봤어요. 자유의지 있다며? 거부하게 되면 망상의 세계에서 경찰이나 고소 당하겠지요. 이란 같은 경우는 고소가 아니고 사형당해서 크레인에 공개적으로 매달겠지요. 어떻게 됩니까. 이건 그 법을 내가 만들었습니까. 남자 20세 되면 군에 가야 된다. 내가 만들었습니까? 아니지요. 내가 안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거부하면 돼요. 거부하게 되면 깡패가 왔던 형사들이 와서 나를 체포하겠지요.
지금 이 이야기가 까뮈의 부조리이론이에요. 까뮈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체포하겠지요. 체포해서 교수형도 그것도 망상이잖아요. 내가 교도소 터잡을 때 몇 미터 파는지 나는 모르니까. 창살을 몇 개로 할 것이냐, 관여한 적 없어요. 까뮈라는 사람이 프랑스 문학작가 을 쓸 때에 그 창살 사이에 별이 보였던 거예요. 까뮈는 비로소 내 자체가 망상인 줄 알았던 거예요.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 죽었구나! “니는 엄마 죽었는데 왜 안 울어?” 하니까 주인공이 하는 말이 “꼭 울어야 돼? 왜 울어야 돼. 엄마 죽었는데 내가 왜 울어야 돼?” “엄마가 죽으면 울어야 되는 거야.” 그게 바로 망상의 세계잖아요. 나한테 요구했던 겁니다.
그러니 군에 안 가가지고 나중에 사형당했지요. 죽으면 되잖아요. 쪽지 하나 거부해서 사형당하면 되잖아요. 왜 우리는 그 쪽지의 명령을 따라서 망상의 세계가 요구하는데 따라서 머리 깎고 군에를 왜 가느냐 말이지요. 그것은 니가 군에 가는 것이 니한테 이익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요. 그 이익이 뭐냐, 타인들이 남자가 군에 갔다 와야 남한테 그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인정하는 인정을 내가 내 삶의 내용으로 채워질 때 남들이 인정해 주는 사람. 그게 곧 나라고 그렇게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그렇게 우리는 습득 돼 왔던 겁니다.
이게 전체 다 망상이에요. 결국. 이거 전체 다 망상이에요. 군에 갔다 오면 구원받습니까? 천국 갑니까? 아니지요. 천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군에도 명령하고, 국가의 망상이고, 나에겐 자유의지가 있다. “나는 세상이 예스할 때 나는 노우라 할거야.” 백날 큰 소리 쳐봤자 그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거죠. 뭐가 안 되느냐, 초과가 본인한테 없었던 거예요. 초과되는 것.
내 할 도리는 다 하지만, 그건 초과가 아니에요. 숫자로 하면 7이 아니라고요. 7이 아닙니다. 그럼 7이 아닌 것을 표현하면 망상 속에 있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1이냐, 아니에요. 7도 아니고 1도 아니고 제로에요. 있어도 없는 것이 돼요. 살았다 이름은 있으나 실은 죽은자로다.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입니다.
1장4절에 에돔 나오지요. 에돔이 이 초과에 대해서 몰랐던 사람이에요. 이 초과에 대해서 모르면 남는 것은 자기한테 이익이냐, 손실이냐, 그것만 따지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에돔. 에서의 후손의 나라가 에돔이잖아요. 뿌리를 쫓아가면 한 쪽은 이스라엘은 야곱이고, 에돔의 뿌리는 에서가 되는 거예요. 그냥 형제가 아니고 쌍둥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하나라면 하나님이 그걸 둘로 표현하기 위해서 야곱언약이 주어진 겁니다.
의미는 둘이 있을 때 의미지. 하나 있을 때는 의미가 없어요. 둘이 있어서 그 두 개가 대비가 될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화장실 하나가 있으면 남자 화장실인지 여자 화장실인지 의미가 없어요. 그러나 치마 걸면 여자고, 신사복 걸면 남자고. 따지는 사람은 화장실 가는데 꼭 양복으로 갈아입고 가야 되나. 심하게 따지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자신을 심하게 안 따져서 문제에요. 대충 그냥 인생 남들처럼 남을 뒤따라가서 꽁무니 따라가서 살면 안돼요. 성경은 철저하게 에돔을 제시한 이유가 너 자신에게 철저하게 너 자신에 대해서 규명해 보라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에 나라에서 만든 표어가 있어요. 보통 이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실제로 한 번 해볼까요. 라이타있다. 종이 태웠다. 불 탄 적 있지요. 훅 부니까 라이타도 꺼졌고, 종이도 꺼졌어요. 그런데 표에 의하면 꺼진 불도 다시 보는 거예요. 아, 꺼졌구나! 되어있지요. 돌아섰습니다. 꺼졌구나 했기 때문에 또 봐야 돼요. 24546번 봐야 돼요.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왜 꺼진 불도 또 다시 봐야 됩니까? 나한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어떤 이익? 남들이 불 안 낼 사람이라는 그러한 칭찬이 나의 자아의 이득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그걸 바로 자기 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 의. 그게 누구냐 에돔이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에돔은 누구하고 형제간이다? 야곱과 형제간이지요. 형제간이라는 것은 둘이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그 부모의 휘하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러한 상황입니다. 둘 다 리브가와 이삭의 한 가정이에요.
동그라미로 치면, 요번 수련회 때 첫째 시간에 동그라미 이야기할 거예요. 동그라미를 치게 되면 동그라미라는 말은 나만의 세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동그라미는 원이잖아요. 포함 돼 있는 거예요. 여기에 야곱 있고, 여기에 에서 있고. 위에는 이삭 있고, 어머니 리브가 있고. 이렇게 구성되어있어요. 한꺼번에 동그라미 치는 것은 똑같은 상황 속에 있는 거예요.
2절 끝에서 3절 초반까지 읽어보세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했지요. 아버지가 그렇게 했습니까? 엄마가 그렇게 했습니까? 야곱이 그렇게 했습니까? 에서가 그렇게 했습니까?
아무도 한 적이 없어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초과. 초과라고 하지요. 초과. 성도는 초과로 사는 거예요. 초과된 것이 무엇인가를 그 초과 같은 걸 증거하는 걸 인간이 사는 겁니다. 그런데 초과를 알려면 뭐를 알아야 돼요? 자기 자신이 무엇에 굳어져서 살아가느냐를 똑똑하게 봐야 됩니다.
이 가정에 레미콘을 열 대 동원 시킨다고 봅시다. 이 가정에. 레미콘 뒤에 보면 애들이 레미콘 장난감을 좋아해요.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뒤에 엉덩이가 돌아가거든요. 그 레미콘이 계속 돌아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시멘트가 액체상태 젤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돌아가지요. 고체와 액체 사이의 중간상태를 여기다 다 이삭 가정에 다 충분하게 퍼부었다 생각합시다.
하게 되면 네 명 다 레미콘에 있는 시멘트가 굳어져 가는 것처럼 그들도 굳어져 가겠지요. 제가 아까 A라 했습니다. 외부성. 굳어져 가지요. 그러면 꼼짝 마라, 가 되지요. 운명이 굳어져 가면서 덩달아 뭐도 굳어져 간다? 자신이 생각할 여지도 함께 시멘트 굳어져 가는데 같이 굳어져 가는 거죠. 조폭도 아니고 “묻어버려!” 이러잖아요. 사채업자들.
외부성이 주어진 원칙과 함께 굳어져 가는 거예요. 이게 야곱은 뭐냐 야곱은 사랑으로 굳어져 가고, 에서는 하나님의 저주, 미움으로 굳어져 가는 겁니다. 이것이. 이것이 초과에요. 초과.
세상 사람들은 뭐가 없습니까? 여분의 초과가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밤 담아줄 때 대구 서미시장 같은데 보면 밤 담아줄 때, 쌀 담아줄 때, 되말에다 담아줄 때, 받침대로 쫙 자르는 거 없어요. 수~북하게 인심 쓰면서 수북하게 그런데 그냥 수북하면 안 돼요. 수북하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흘러내려 줘야 인심이 이만큼 후하다는 것을 보여주거든요. 흘러내리는 것이 이것이 초과라는 말이죠. 초과.
이게 로마서5장에 나오거든요. 죄가 더한 곳에 뭐다? 하나님의 은혜가 초과에요. 내 죄 지은 것을 다 덮고도 여분의 것이 계속 흘러넘치는 거예요. 그것을 한 자로 하면 뭡니까? 의. 여섯자로 하면 그리스도의 의. 다섯자로 하면 하나님의 의. 초과에요. 이 시멘트로 우리가 굳어져 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실을 알려면 누가 있어야 합니까. 이것이 초과적이고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알려면 이 사이에 누가 있어야 합니까? 에서가 있어야 돼요. 에서가. 이 에서는 뭐냐 하면, “운명아 저리 가라! 운명 내가 개척한다.” 이 주장을 하는 겁니다.
그게 4절에 나오지요.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다. 피동성이지요. 운명은 나에게 덮쳤으나 나는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개척해간다. 내게 이익되지 않으면 나는 거부할 자유가 있고 권한이 있다. 이게 에돔입니다. 이걸 무너짐을 거부했다는 말은 결국 초과를 거부한 것이고 초과를 거부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를 발로 차버렸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의는 착하게 사세요, 가 아니라 이미 결정된 거예요. 초과는 이미 결정된 거예요. 하나님의 의인 됐으니까 바르게 살아야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아까 그 공식이 안 돼요. A(Ap). 이 공식은 뭐냐 하면 외부적인 것이 내 내부 안에 이미 확정적으로 박혀버렸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다루고 자시고 어떻게 섬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내 안에 주님의 초과가 그냥 박아 놓아버린 거예요. 요지부동으로.
따라서 야곱의 주어진 것을 알기 위해서 에서가 1+1 세일하듯이 에서를 갖다 붙인 거예요. 야곱의 의미를 위해서, “에서 너는 아니야.” 라는 식으로 갖다 붙인 거예요. 에서의 그 가는 길은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야곱을 붙인 겁니다. 그래서 아까 했지요. 의미란 반드시 하나가 되면 안 되고 둘이 있어야 된다고. 둘이 있어야 의미가 생겨요. 이 세상에 지옥 가는 사람이 있어줘야 ‘내가 천국 가는 것이 맞구나!’ 라는 것이 확인되는 거예요.
아까 한 것을 다시 하면,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은 내부에 원인이 있는 구조 때문에 그렇다.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내부에 있는 원인이 따로 있어서 그렇다. 그렇다면 야곱과 에서에서 어느 쪽에서부터 시작하는 겁니까? 야곱에서부터 시작합니까? 에서부터 시작합니까? 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처음에 했던 거 다시 해봅시다. 처음에 한 게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위치.
위치가 우리의 운명을 확정 짓는다. 했습니다. 위치가 우리의 운명을 확정한다. 그런데 그 위치라 하는 것은 우리 좋아라고 위치한 게 아니고 위치 자체를 위하여 위치가 있는 거예요. 여기에 에돔의 위치가 있고, 야곱의 위치가 있는데, 합쳐서 위치가 되는데. 그 위치 자체의 효력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은 야곱으로, 어떤 사람은 에서로 위치에 끼어드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A(Ap). 외부성은 나라는 내부성 안에 외부성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공식.
그럼 성도인가 아닌가는 어떻게 아는가, 어제 수요일날 기도 제목에 나와요.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게 있는 사람. 이건 초과적인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어요? 없어요. 내 내부에 있는 것이 초과적인 것. 내가 시도하는 것은 잘남인데, 그 잘남을 빼버리고 초과적인 것. 그걸 하는 겁니다.
열 개중에서 세 개를 내가 할 수 있다면 초과가 몇 개라 했습니까? 10-3이게 초과에요. 그러니까 빼기3이지요. 주께서 성도로 하여금 빼기3을 하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착실하게 성실하게 잘했습니다. 그거 빼야 돼요. 그거 빼면 돼요. 내가 십일조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선교 많이 했습니다. 고거 빼면 돼요. 그래서 에서, 야곱 둘 다 우리 내부에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우리 위치안에 있어야 돼요.
그래서 어떤 게 에서적 요소인지, 어떤게 야곱적 요소인지를 두 개 다가 있어야 비로소 성도라는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말라기에서 에돔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에돔이야 뭐 저주 받았으니까 우리가 신경 쓸 거 없지 않느냐, 절대로 그래서는 안돼요. 에돔 요소가 있어줘야 돼요. 그래야 이 운명이 확정된 것이 위치 때문이지, 내가 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바른 결정을 해서 바르게 믿었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겁니다. 어디에도 그런 내용이 없어요.
이제부터 우리가 남은 것은 철저하게 내가 성경을 보면서 내가 믿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다 규명되어야 돼요. 내가 어디까지 바르게 살 수 있는가를 최선을 다하여 노력해야 돼요. 우리가 흔들림이 없지요. 우리가 흔들릴 필요가 없지요. 왜? 우리는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어요. 내가 얼마나 스스로 잘난 체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줄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지 않습니까.
빼기에 열중해야 돼요. 뺄 수밖에 없는 것에 열중해야 된다고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신약에 드는 예에요. 누가복음6장6절에요.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지요. 이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예수님이 고쳐줄 때까지 마른 손 사람은 계속 말아 있어야 돼요. 주님 앞에 나와가지고 옛날에는 내가 이리 했는데 오년전부터 이리 안되고 이리 되었습니다. 그건 손 마른 사람이 아니에요. 손 마른 사람은 본인에 대해서 본인이 손 마른 사람이라는 것을 유지하고 있지요. 초과적인 게 뭡니까?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펴지게 한 거예요. 안식일 의미를 주는 차원에서.
손 마른 사람이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안식일은 어떤 분이 외부에서 와서 초과적인 분이 초과적인 일을 할 때 비로소 안식일은 제대로 하나님의 의로 완성이 된다는 걸 손 마른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손 마른 사람이 손을 폈잖아요. 그러면 “내가 이제 손 핀 사람이 원래 나다.” 하면 안 돼요. 손이 안 펴야 본인다운 거예요. “나는 손을 못 펴야 돼!” 해줘야 그 사람을 통해서 뿜! 뿜! 뿜! 초과가 막 나온다고요.
“나는 예수 믿고 나는 이제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 되었어!” 이러면 안 돼요. 예수 믿었기 때문에 나는 도대체 나의 죄가 어디까지 죄지을 수 있는가를 평생동안 철저히 해줘야 비로소 그 사람은 초과를 증명할 수 있는 거예요. 녹음도 제대로 못하고 꺼져가지고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