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3장 33절 (유령) 221206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3장 33절 (유령) 221206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3장 26절부터 보겠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인간이 대화를 시도합니다. 대화 시도.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서로의 의견이 일치되는지를 점검하는 거죠. 일치되는지를 점검하고 공통점 확인하는 것이고 공통점 확인을 거쳐서 이거는 뭐냐 하면은 분쟁을 키우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오셔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시지요. 대화를 하시잖아요. 말씀을.
말씀을 하게 되면 말씀은 새로운 공간 확장으로 이어져요. 주님께서는 인간하고 대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말씀의 공간을 확장시켜나갑니다. 그럼 그 말씀에 대해서 인간이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알아듣지를 못하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잖아요. 알아들었으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이유 없지요. 못 알아듣지요.
못 알아들었으니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분쟁을 키우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화평을 주려함이 아니고 분쟁하려 함이라” 사람들의 분쟁은 술 한잔 하고 나중에 좋은게 좋고 뒷주머니에 돈 좀 주면 쉬쉬하고 넘어갈 문제인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말씀을 던진다는 것은 분쟁을 더욱 더 키우는 거에요. 분쟁을.
분쟁을 키운다는 말은 공통점이 있다? 없다? 공통점 자체가 하나님과의 그 나라의 본질과 인간 세계의 본질 사이에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계속 분명해져요. 명확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사용하는 대화의 개념과 하나님이 생각해놓은 그 내용이 같은 점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돼요. 그럼 인간들은 남과 타인과 대화할 때 그 인간들은 무엇을 의도하면서 대화를 하느냐? 인간이 대화하는 이유부터 살펴야 되겠지요.
인간은 어릴 때부터 몸짓을 하게 되는데 그 몸짓은 딱 두 가지입니다. 인간은 자기 의견을 몸짓 이런 것을 표현하는데 나중에 그것이 말이 되고 어린애는 울음이 되고 고함이 되고 그렇겠죠. 앙앙 거리면서 자기 의사 표현을 하는 거에요. 아주 어린아이가 느껴지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나타남과 사라짐. 인간 어린아이의 의미는 이 둘밖에 없어요.
어린아이가 있는데 엄마가 장에 갔다. 엄마가 있는데 있죠. 엄마가 있을 때는 안 울어요. 엄마가 잠시 화장실에 간다든지 자기 눈앞에 사라지게 되면 애가 엄마를 찾으면서 그냥 찾지 않아요. 자기 의사 표시를 하면서 찾지요. 울지요. 울면서 찾습니다. 왜 울지요? 엄마 없는데 왜 울지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내뱉는 모든 말 속에 그 의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제가 말씀드리는 거에요.
엄마가 한 2분 뒤에 나타났다. 울음이 어떻게 됩니까? 환희로 바뀌지요. 기쁘지요. 인간은 있다 나하고 동질의 존재가 있다 없다. 나 같은 사람이 있다 없다가 의미의 시작입니다. 시계로 보면 똑.딱.똑.딱 이렇게 돼요. 나란 어린아이는 엄마와 일치화시키면서 자기 존재를 이해하거든요. 어릴 때는. 독립적이지 못할 때. 자아가 없을 때는. 엄마 없으면 본인이 없는 거에요. 엄마 있으면 본인이 안심이 되는 겁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신적으로 분리가 덜 된 거에요. 이것부터해서 언어가 시작되는 겁니다. 나와 똑같은 존재가 있으면 기쁘고 똑같은 존재가 없으면 애는 불안을 느끼는 겁니다.
그러면 나한테 의미 있다는 것은 나중에 커서는 엄마가 타인이죠. 나와 동질의 타인이 생겨버리면 인간은 즐겁고, 즐겁다는 말은 내가 누구냐를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즐겁고 나하고 동질의 것이 없어버리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무의미라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인간의 언어는 뭐냐 하면은 부재죠. 부재. 나타남은 존재죠. 존재냐 부재냐 따라서 인간의 의미가 결정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 유일한 의미거든요. 무엇이 옳으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옳아요. 정의가 옳은 게 아니고 착한 게 옳은 게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이것이 무조건 의미 있는 거에요.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있던 말던 내가 있어줘야 돼요. 그게 인간에게 의미에요. 그 어린애가 달라지지 않았어요. 나중에 어른이 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은 어떤 숙제 같은 것, 압력을 가해요. 너희들은 그냥 내 곁에 있지 말고 내가 여기 의미 있게 가치 있게 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이야기를 해줄 책임을 가지고 너희들은 내 옆에 있다는 거에요. 그게 인간의 단어 선정에 거기 다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런 노래 있어요.
사랑한다는 말은 뭡니까? 내 곁에 있어 달라는 곁에 있으면서 뭡니까? 서비스. “물 드릴까요?” 서비스. 호텔 서비스맨으로 있는 겁니까? 아니지요. “이뻐요 대단해요 착해요 굿! 우수해요 왜 이렇게 멋있어요” 라는 그러한 시선을 보내면서 내 곁에 있어줄 때 비로소 내가 원하는 나의 존재는 충만해지는 겁니다. 내 존재가 충만할 때 그 인간은 비로소 나는 의미를 느낀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의미를 느낀다.
어제부터 서울 날씨 추웠지요? 추웠다. 자, 날씨가 춥다. 자, 날씨가 추울 때 우리나라 8강 못 들어갔다. 지금 날씨가 추운 게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날씨가 추운데 브라질이 이겼다. 지금 그거 맞는데 지금 나한테 의미가 아니에요. 나한테 의미가. 날씨가 춥다. 당장 의미 있는 것은 뭐냐? 두꺼운 외투 갖다 줘 이게 의미 있는 거에요. 왜?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내가 여기 있으니까 추운 날씨에 안전하게 보존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춰야 그게 내가 의미 있는 거에요. 추워서 외투가 필요한데 옆집에서 와가지고 오늘 김장 100포기 했다. 김장 100포기 한 것 나한테 의미가 없어요. 김치 좀 맛 좀 볼래요? 지금 김치가 문제가 아니고 추울 때는 외투가 필요하다고요. 외투가. 좀 눈치 있어서 내가 떨고 있는걸 알아채야지. 왜 내 옆에 있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시골에서 시어머니가 전화를 합니다. 잘 있냐? 네 잘 있습니다. 끝. 끊자. 끊었습니다. 시어머니가 갑자기 전화 왜 했겠어요? 시골집에 보일러 놔달라는 거에요. 날씨가 추워서. 괜히 대화를 시도하는 게 아니에요. 대화를 시도할 때는 본전을 뽑고 되돌아와야 돼요. 대화라는 것은.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본인이 생각해서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날라다니는 기성권력의 단어들이 있어요. 기성세대의 권력들이 지배하는 단어가 있어요. 그 단어들을 이렇게 마트에서 물건 뽑듯이 그걸 하나 당겨서 내 것으로 꽃다발 만들듯이 만드는 식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쓰는 단어는 이미 기존에 나왔던 단어에요. 본인이 생각해서 만드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은 그동안 내가 커오면서 ‘나’라는 것을 어떻게 구축했는가 그것은 나한테 저런 거 있었으면 좋겠다. 공기청정기 있었으면 좋겠다. TV, 냉장고 그런 거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 집에 이건 있고 그건 없고 이건 있고 그건 없고 태블릿PC 사줘요. 이번 성적 90점 이상 되면 태블릿PC 사달라고 인간극장에서 이야기해요. 아버지가 92점. 그 딸은 90점. 그럼 91점 OK. 협상을 봐가지고 평균 91.5 되면 테블릿PC 사주기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 애가 했던 그동안의 모든 몸짓들은 기존의 욕망에서 괜찮은 태블릿PC라든지 공기 청정기 또는 나중에 어른 되면 차. 괜찮은 것을 내 것으로 장착시킴으로서 비로소 나는 새로운 업그레이드된 의미를 구축하는 거에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괜찮은 나로 계속해서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는 것들의 것으로 채워지면서 나는 계속해서 그 자체로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 겁니다.
여러분 택배에 여름철에 상하기 쉬운 것에 뭘 집어넣습니까? 냉기를 집어넣지요. 쉬지 않도록. 인간이 이렇게 있으면 수시로 집어넣는 거에요. ‘나’라는 프레임. 상자. ‘나’라는 상자에다가 수시로 내게 적당한 것들을 이렇게 채워넣는데 그것은 기존에 이미 있던 거에요. 그럼 그걸 채택해서 내 것 만들 때 그것을 만드는 모션과 태도는 무엇에 의해서 선택하고 결정했는가. 남들 보기에 남한테 인정받는 조건을 받는 갖춘 내 존재라는 것을 구축하기 위해서 그런 욕망이나 그런 단어에 집중하는 겁니다. 태블릿PC라든지 이런 것. 다른 거 필요 없어요. 배추 50포기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나한테 태블릿PC가 중요한 거에요. 그렇게 골라 담는 거에요 인간은. 골라 담는 것.
결국 제 이야기의 끝은 뭐에요? 마지막 남는 의미는 뭡니까? 내가 여기 존재한다 에요.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그 외에는 다른 의미는 전부 다 2차적이고 3차적이고 이거는 꼬리 같은 거에요. 꼬리곰탕. 이건 겉절이들이에요. 겉절이. 악세사리들. 그게 인간들이 다들 그렇게 살거든요. 인간들의 대화는 뭡니까? 각자 도생하면서 각자 자기 존재의 챙길 것 챙기는 대화 주고받는 그런 미세하게 주고받는 세계가 무슨 세계다? 인간 세계죠. 인간 세계.
그런데 거기에다가 오늘 누가복음 13장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향하여 무엇을 시도합니까? 대화를 시도하는 거에요. 대화. 대화를 시도하니까 그 대화와 예수님의 대화와 인간의 대화와 소통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안 된 증거가 뭐냐 하면은 26절에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자기 딴에 변명조를 늘어놓는 거에요. 제가 주님 앞에서 주님 말씀을 가르쳤고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뭔가 함께 있었잖아요 라고 제시하는 것.
제시할 때 27절에 보면 “나는 너희들을” 그 다음에 뭡니까? “나는 너희들을 모른다.” 이게 바로 주님 쪽에서 대화를 시도한 이유입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나는 너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이게 남의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우리 보고 하는 이야기 아니에요? 평소 우리 자신의 존재, 내가 여기 있음을 중심으로서 내가 생각하고 또는 이렇게 대화를 하고 하는 그것이 이런 모든 행위들이 주님과의 소통을 차단하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가 감안했습니까?
나 위주로 살아가는 이 짓이 하나님께 통할 거라고 여러분 생각했어요? 안 통합니다. 통할 수가 없어요. 내 위주로 사는 인간을 천국에 넣어주지를 않지요. 천국은 인간 개인을 옹호하는 데가 아니고 예수님만을 위한 곳이기 때문에 이것은 대화의 내용 자체가 다릅니다. 요한복음 8장 3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이런 예수님의 훅 들어오는 이 대화에 대해서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왜냐 하면은 인간 세계에서 남의 말을 못 알아들으면 결별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헤어지면 되지 상대방을 죽일 이유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 말을 듣고 너하고 나하고 생각이 다르다 그럼 되지. 그 생각 다른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제 본격적으로 너희들이 나를 죽일 것이다 하니까 어느 쪽에서 의아해 하느냐 하면은 유대인들이 의아해하는 거에요.
당신이 뭔데 우리가 당신을 왜 죽여 하는 거에요. 주님께서 두고 봐 너희들이 나를 죽이게 돼있어. 이유는 단 한가지 너희 마음에 내 말이 있을 곳이 없다는 그 결과로 너희는 나를 죽이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이 알기 쉬운지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만은 다시 한번 제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대화를 할 때는 그냥 대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대화를 통해서 소위 있다는 것으로 충만한 이 세상에서 인간들을 부재의 존재로 만드는 새로운 공간을 넓히는 확장하는 작업을 주님께서는 계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세계에 예수님이 나타났잖아요. 그러면 인간들은 예수님을 옛날 없는 식으로 그냥 돌아가세요 하잖아요.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너희들이 내 앞에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너희들이 있다는 그 곳에 내가 있다로 바꾸겠다는 겁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대화하는 거에요. 그 바꿀 때 뭐가 있느냐 하면은 너희들이 나를 죽였다는 것, 그 사실로서 이 세상에 있게 하겠다는 주님의 본래 뜻이 담겨있어요.
우리 말 안 통하니까 우리 서로 대화하지 말고 각자 헤어집시다가 안되고요 잠깐, Just Moment 기다려 그게 네 맘대로 안돼. 나는 너를, 네가 나를 죽였다는 인간으로 기어이 만들고 말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화 하나하나에 다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게 확장이에요. 나는 예수님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겠어 가자 가자. 가자 가자가 아니라 그들은 갈 데가 없어요.
28절에 보겠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절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여기에 누가 부재합니까? 예수님을 처음 대했던 유대인들이 여기에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이 천국에. 존재하지 않지요. 부재해버리죠.
이 세상의 운명은 예수님의 말씀의 효과입니다. 말씀이 그냥 말씀으로 공기로 흩어지는 게 아니라 반드시 이 세상에 있는 자는 없게 하고 없는 자로 소위 천국에 우리만 있다고 여기고 너희는 없다고 여기는 자들을 동서남북에서 있게 만드는 작업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의도적으로 뒤집기가 가능한 말씀을 주께서 해오신 거에요.
그렇다면 제가 아까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언어에 담긴 의미, 말에 담긴 의미 또는 문자에 담긴 의미는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을 사용한다고 했지요. 내가 여기 있다. 처음에는 있다 그 다음에 내가 여기 있는 것에 대해서 주목 좀 해주고 그걸 인정해달라 계속 추가하지요. 그 다음에 더 나아가면 노골적으로 친구들아 내가 참 인생 잘 살았다는 것을 너희들 통해서 좀 증명해줘. 계속 나가는 거에요. 그게 인간이 말 사용할 때 원하는 바에요. 그런 의도가 그런 요구가 담겨있는 말을 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 내용을 그대로 교회에서 새벽제단에 차가운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기도를 한다. 기도를 한 5분 동안 한다. 5분 내용이 뭐겠어요? 하나님 나 여기 있습니다. 인생 참 잘 살았다고 하나님 쪽에서 인정해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죠.
인간은 처음부터 자아가 먼저 있는 게 아니고 타인이 먼저 있어요. 왜냐하면 자아가 형성되는 것은 타인 아빠 엄마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에. 그 아빠 엄마 타인 부모가 그냥 가만히 짝대기처럼 서있지 않지요. 뭐하느냐 하면은 지시와 명령을 합니다. 지시와 명령을 하지요. 그럼 아빠의 지시와 명령이 아이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겁니다.
조건부로 아빠의 지시와 명령을 들어줄 때 나에게 맛있는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이 주어지더라는 그 원칙들이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내가 있기 전에는 먼저 뭐가 있다? 나에게 타인이 있을 경우에만 내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어린 아이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아빠 엄마에요. 주위에 가족들. 그 가족들을 악착같이 아이는 붙들려고 합니다. 엄마 치맛자락을 붙들어서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생기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이걸 가족연대성. 거기서 아이는 가족을 위해서 내가 희생할 수도 있고 양보할 수도 있고 내가 하기 싫지만 노력해야 된다. 그래야 뭘 유지할 수가 있다? 가족이라는 나보다 약간 더 큰 범주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다고 그걸 배우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가정교육 잘 받았다고 하는 거에요. 윤리와 도덕의 시작이죠. 가정교육 잘 받은 거에요. 가정교육 잘 받은 것을 한자로 뭐라고 하느냐? ‘의’. 이걸 세자로 이야기하면 뭐냐 하면은 자기 의. ‘자기 의’가 되요.
그러면 이 과정에서 인간의 마음은 둘로 갈라집니다. 의식과 하나는 또 무의식이 있는데 방이 두 개 있어요. 인간의 마음에 방이 두 개 있는데 두 개 있고 그 가운데 지킴이가 있어요. 지킴이. 지킴이가 있어가지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이 의식적으로 내 존재를 인정해줄 거 같으면 의식의 방에. 그런데 뭔가 내 맘에 안 들면 어디로 집어넣는가. 무의식 방에 들어가서 꿈에 나타나요. 꿈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지킴이가 뭐를 하느냐? 억압을 해요. 억압을. 억압을 제대로 하게 되면 윤리적 사람이죠. 정상적인 사람인데 이 억압하는 기계가 고장나버리면 이건 미친 사람 되죠. 이 억압이 깨질 때가 주로 뭐냐 하면은 술 먹을 때. 술 먹고 난 뒤에 취중진담해가지고 술 핑계대고 자기 본심 이야기할 때. 평소에는 점잖게 프로포즈하다가 술 한잔 먹고는 여자 집 창문아래에서 딜라일라 노래 부르면서. 딜라일라 노래 알아요? 불 꺼진 창문 앞에서 하는 조영남이 불렀던. 너 나와! 술 먹고 너 나와!
여자 아빠가 너 뭐야! 너! 나 저 여자 좋아합니다. 스토커 신고. 요새 스토커 강화됐습니다. 여기 행패부립니다 신고해가지 사윗감이고 뭐고 쫑 났지요. 용기가 없어서 술 먹고 지킴이를 약간 술 취하게 만들어가지고 무의식이 튀어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교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 임직식할 때 참아요. 점잖게 하고 안 입던 한복 끄집어내고 이렇게 하는데 막상 장로 집사 되서 교회 제직회 한바탕 할 때는 이건 뭐 국회 민주당 국민의 당. 자기의 의, 자기의 가치 지키는데 목숨을 다해 지킵니다.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은 인간 세계는 뭐만 흐른다? 자기의 소리, 자기의 목소리만 계속 이렇게 난류 한류 이렇게 대류처럼 흐르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에스겔 37장에 보면 그걸 죽은 자의 세계로 봐요. 죽은 자의 세계. 에스겔 37장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뼈 골짜기에 집어넣습니다. 뼈 골짜기에 집어넣고 이렇게 하나님의 시선으로 대화합니다.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뼈들은 이미 죽었다는 거죠. 죽었을 때 이 뼈들이 죽었는데 이 뼈들이 어떻게 살겠느냐 라고 하나님이 묻지요. 인자한테.
그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해답을 줍니다. 이 뼈들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를 들으면 그들은 삽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소리가 죽은 자도 삽니다. 살 때 조건이 있어요. 그 말씀이 그들 맘속에 들어갈 자리가 있어야 돼요. 아까 요한복음 8장 37절에 뭡니까?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한 이유는 너희들 속에 내 말이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를 죽이려 한다.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자리가 없으면 자기의 주님이 이미 계시한 말씀의 자기 자체적인 공간 때문에 그들은 주님이 새로 만든 공간 안에 새로운 백성들이 주님의 소리에 의해서 죽은 데서 부활된 자들이 그 속에 들어가거든요.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천국에 들어가다 보면 기존의 인간들은 어떻게 됩니까? 주변으로 추방될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건 아까 처음에 얘기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뭐를 일으킨다 했습니까? 분쟁을 일으킨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오늘날 성도의 말씀은 이 모든 말씀은 이 세상 안에서 분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돼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것처럼 “내 말과 내 의로 인하여 핍박받거든 오히려 기뻐하라. 선지자들이 이와 같이 고난을 받았느니라” “선지자들이 이와 같이 고난을 받았느니라”
인간의 비극은 지옥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인간의 비극은 지옥에서 못 벗어난다. 왜 못 벗어나느냐 하면은 누가 불러줘야 되지요. 불러줄 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데 아무 소용없어요. 불러줄 때 그 소리가 박혀야 돼요. 마치 고래 잡을 때 작살이 날라와서 꽂혀버리면 고래한테 작살 꽂혀버리면 작살은 고래의 외부의 요소니까 나한테 없던 외부 요소가 꽂혔지요. 외부요소가 그 고래를 잡아당기니까 고래는 본래 살던 바다에서 살지 못하고 육지로 끌려 나올 수밖에 없지요.
말씀이 꽂혀버리면 우리는 지옥에서 살지 못하고 어디로 가느냐? 천국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많이 섭섭합니까? 그게 많이 섭섭해요? 정든 친구들 사랑했던 오빠 언니하고 헤어지니까 그게 많이 섭섭합니까? 많이 아파요? 자, 꽂힌 작살을 내 힘으로 뽑아낼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뽑아냅니다. 우리는 앙탈부리죠. 왜? 그리우니까.
그동안 내가 정답게 지냈던 사람들 있잖아요. 그들은 나에게 뭐를 주느냐 하면은 너 잘났어. 훌륭했어. 너는 착해. 너는 대단한 존재야. 네 인생 그동안 참 실수 없이, 하자 없이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게 바르게 살아왔나 계속 사랑과 칭찬과 보호와 격려와 나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던 그들이에요. 그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곧 뭐냐?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자기의 죽음을 의미하는 거에요. 우리는 그들의 소리에 의해서 우리는 정당하게 제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들을 해온 거에요. 내가 못 나가도 내 친구들은 잘 나간다. 지금 우리는 그 덕에 우리는 뭔가 희망을 갖고 사는 거에요.
보통 중매할 때 보면 남자 중매할 때 중매자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남자보고 아가씨 어때? 아가씨가 인물이 좀 내 예상보다 영 못하다. 그 분 오빠가 판사래. 그 오빠가 판사인 거하고 마음에 드는 거하고 무슨 상관있겠어요. 그 오빠가 판사고 아버지가 빌딩 두 채 있대. 그건 좀 맘에 들지요. 그 여자를 둘러싼 그 주변의 환경, 삶의 환경에서 우리가 무슨 수로 탈출합니까. 탈출은 커녕 탈출 안 할려고 애를 쓰잖아요. 어떻게 일구어낸 그 환경인데 그걸 마다해요. 안되지요.
그래서 절대로 인간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력으로. 자기 힘으로. 왜냐 하면은 그 안에는 나의 의가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나의 의. 내가 합당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의입니다. 나는 존재할 만해서 존재한다. 존재할 만한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 자기 의에요. 당장 죽어 하면 화냅니다. 왜? 살 권리가 있는데 나보고 죽으라고 하고 하면 그거는 나한테 합당하지 않다고 화내지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어릴 때 내 속에 누가 있다? 타인의 시선이 있다. 타인의 시선. 타인의 시선이 내 안에 들어와요. 나라는 것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기대에 부응해서 이렇게 합쳐있는 겁니다. 자아가 있더라도 타인이 나와 함께 있어요. 이게 내부 타인이고 바깥에 우리가 눈에 띄는 사람을 외부 타인이라고 합니다. 인간 속에 내부 타인이 들어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 내부 타인을 끄집어내버리고 주님이라는 타인을 집어넣는 거에요. 어릴 때부터 나를 키워온 외부 타인을 제거해버리고 그 빈 공백이 생기지요. 그 빈 공백에다가 예수님의 시선을 그 안에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그 일은 주님만이 할 수 있지 우리 인간은 해내지를 못해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까 인간 속에 방 두 개 있지요. 하나의 의식의 방과 지하실에 뭡니까? 무의식의 방이 있지요. 그 중간에 뭐 있다? 지킴이 있다. 경계선. 가만 있어 입 다물고 너 낮에 튀어 나오면 안돼. 밤에는 인정해줄테니까 낮에는 함부로 난동부리면 안돼. 딱 지키는 것. 흔히 말하는 양심 또는 윤리 도덕. 그것을 주의 말씀이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려요. 그것 때문에 자기 의가 형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의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남들이 의라고 인정해주는 것들의 집합체가 나의 의가 돼요. 남들이 그건 잘한다 훌륭하다 인정해줄 때 우리는 그 공동체에서 왕따 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올 때 타인의 시선, 외부 타인이죠. 외부타인의 층을 피해서 오겠습니까? 그걸 통과하고 오겠습니까? 통과하고 오겠지요. 통과하고 오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기성세대의 지배권력.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는 지배권력.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31절 32절 한번 봅시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여기 헤롯에 대해서 뭐하고 평했습니까? ‘여우’.
이 헤롯은 안티파스라는 헤롯입니다. 헤롯이 있고요 헤롯대왕인데 헤롯대왕은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나오는 사람이 헤롯대왕이에요. 그 아들들이 안티파스 헤롯, 헤롯 빌립1세 빌립2세. 빌립1세는 안티파스의 동생인데 죽었어요. 안티파스 빌립2세 이 사람은 좀 착한데 들고 안티파스가 빌립1세의 아내를 뺏어가지고 자기 아내 삼은 것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기성세대의 지배권력에 대해서 충고하니까 그 딸의 이름이 살로메인데 살로메한테 안티파스 부인이 주동질해가지고 아버지가 소원이 뭐냐? 하니까 태블릿PC 이런 거 말고 세례 요한의 모가지 달라고 해라. 그래서 배후 조종해서 세례 요한이 죽습니다.
세례 요한이 죽을 때 사람들이 전부 안타까워하겠지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렇게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무엇이기 때문에? 소리이기 때문에. 소리. 어떤 소리? 기쁜 소리. 소리였어요 소리. 소리인데 요한복음에서는 뭐냐? 어두움에서 비취는 빛이 있었으니 그게 소리. 빛을 말하는 소리에요. 그게 세례 요한이에요.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뭐냐 하면은 소리잖아요. 소리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다른 말로 하면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존재에요. 실체 없는 유령 같은 존재. 이게 세례 요한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을 뭐로만 사용하느냐? 소리로만 사용합니다. 소리로만 사용하는데 소리가 계속 소리, 소리, 소리로만 나가야 되는데 갑자기 소리가 “나는 소리다” 하면 그거 죽여버립니다. 소리가 돼야 될 텐데 갑자기 “나는 나”가 되어버리면 유령에서 벗어나서 실제 기존에 있는 인간들과 똑같이 되니까요 “나 소리 맞지? 나 소리라고 인정해줘. 나 소리니까 날 위해 사랑해줘” 이렇게 되어버리면 안돼요. 소리는 그냥 기능으로만 이야기해요. 그 기능. 스피커로만 기능하고 그걸로 된 거에요.
실체는 예수님 한 분으로 끝났어요. 다른 사람 실체 되면 안돼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은 죽은 자여야 되는 겁니다. 자, 방금 제가 세례 요한을 유령 같은 존재라고 했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후손들은 아까 요한복음 8장 37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있을 자리가 없으므로”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한다? “죽이려한다” 라고 되어있지요.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인간들은 뭐냐 하면은 이미 죽은 자들이에요. 이미 죽은 자들. 세례 요한도 죽은 자인데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찾아와서 뭘로 기능했다? 소리로 기능했다는 주님과의 연관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세례 요한은 구원받는 거죠. 갑자기 인간은 누구 밖에 없는가? 인간다운 인간은 예수님 밖에 없고 인간은 다 날라가버리는 겁니다. 갑자기 시원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없어요. 주위에 귀신밖에 없어요.
2001년도에 디 아더스(The Others)라는 영화가 있어요. 디 아더스. 남들. 거기에 여자주인공이 니콜 키드먼이라는 사람인데요. 그 사람의 그 영화가 뭐냐 하면은 애 셋 데리고 큰 저택에 사는데 그 여자와 네 명이 사는데 일할 사람이 필요해가지고 하인 세 명을 구하려 광고를 냈는데 광고를 신문에 못 냈는데도 불구하고 세 명이 남자 하나 여자 둘 일꾼들이 왔어요. 그때부터 그 저택에서 음산한 일들이 퍼졌는데 결론적으로 그 영화가 뭐냐?
그 주인공 니콜 키드먼과 세 아이는 이미 다 옛날에 엄마가 애들 세 명을 권총으로 쏴죽였던 유령들이 살고 있는 집이에요. 그 영화가 뭐냐? 전부 다 그 집 6명 모조리 유령들이에요. 하인들까지 유령들이에요. 유령들만 있었던 거에요. 그걸 본 당사자들은 그걸 모르는 거에요. 자기가 죽은 자 자체를 모르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산 자는 없어요. 전부 다 죽은 자에요. 전부 다 디 아더스에요 전부 다.
그런데 유일하게 사신 분이 오셔가지고 죽은 것을 기정 사실로 해서 예수님의 자신의 말씀으로만 던지니까 그 죽은 바짝 마른 뼈들이 그 말씀이 인간 속에 계속 유지하면 그 말씀으로 인하여 에스겔 37장에 보면 죽은 자가 비로소 산다는 말을 최초로 할 수 있는 거에요. 말씀과 엮어서만 이게 산다가 돼요. 안 그러면 산다가 아니에요.
그냥 세월 96세 살다가 죽으면 그냥 흙 되는 거죠. 96세도 운 좋아서 96세지 80, 90. 요새는 90까지 많이 살잖아요. 살아봤자 뭡니까? 살아봤자 죽는데요. 지금 인간들은 모르는데 성경에 의하면 인간들의 형편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에요. 경사로가 있어요. 경사로. 있어가지고 인간이 여기서 아무리 많이 태어나도 아담의 후손이 많이 태어나도 이거는 뒹굴고 구르고 난리도 아니에요. 매일같이. 2022년 12월 3일 4일 5일 뒹굴어서 어디로 가느냐? 지옥으로 지금 뒹굴고 가고 있는 거에요.
여기서 엄마 나 100점 받았어 라는 소리도 가끔 들리고 엄마 나 취직했어. 지난 토요일날도 결혼한다고 결혼식에 참석했거든요. 주례도 없이 자기들끼리 깐족대면서 축하 파티를 열고 그래서 그들은 어디로 가느냐? 그 순간 그들은 어디로 굴러가는가? 지옥으로 가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경사가 이렇게 되어있는 게 아니고 경사가 기울어졌기 때문에 거꾸로 중력을 거슬러 올라올 수가 없어요. 말릴 수가 없어요. 말릴 수가. 지옥 가는 것을 말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 쪽에서 이 가운데 얼마에게 주의 말씀이 꽂히게 해가지고 이 쪽도 경사로인데 이쪽은 어디로 구르냐 하면은 천국으로 구르는데 말릴 수가 없어요 이거는. 뭘 해도 매일 매일이 천국에 가까운 쪽으로 계속 굴러가는 거에요. 계속 굴러가면서 이상하게 저쪽을 부러워하네. 아 부럽다 참. 그래서 성도가 뭐냐? 주님께서 손 댄 사람만 성도에요. 그게 성령이 임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 직접 손대서 그 사람을 강제 조치하는 사람만이 성도고 그 외에는 성도 아닙니다.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에요. 천국 사람이 아닙니다.
한 40년 50년 복음 연구하고 성경 연구 따라다니고 그거 소용없어요. 직접 그 가정을 아주 작살을 내줘야 돼요. 작살낸다고 하는 것은 어렵게 살고 가난하게 살고 처절하게 사는 거 말하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이 갖고 있던 모든 의를 다 강탈하는 거에요. 집에 열 채 있고 하더라도 이건 뭐 내거 아닌데. 이렇게 살게 되면 주의 사람이죠. 하여튼 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집 한 열 채 있고. 이왕 주의 사람 되는 거 그렇게 한번 살고 싶어.
집이 있고 땅이 몇 만 평 있어도 이건 뭐 내 가치를 인정해주는 토대가 못됨을 알잖아요. 대저택에 사는 유령 같은 존재지요. 천국 가는데 이런 넓은 집을 왜 줬는지 모르겠어. 나도 이상해. 뭐 이런 거. 인간은 말을 합니다. 대화합니다. 그 대화는 인간의 말의 의미는 자기 속에 담긴 의도를 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타인의 말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무의식이에요. 인간의 속셈, 인간의 본심. 타인들이 웅성웅성하고 말하는 그것이 내속에 들어있어요. 이 타인들.
이 타인은 뭐냐? 헤롯이죠. 집의 기성세대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거기 형성되어 있는 기성세대에요. 내가 만든 정치세력 아닙니다. 내가 어쩔 수가 없어요. 어쩔 수가 없어요. 내가 태어날 때 거기에 이미 다 이렇게 압력을 저기압처럼 누르고 있던 그 모든 경량들이에요 경량들. 그런 이데올로기, 의식들 사고방식이고 선입견들이에요. 고정관념.
거기서 어린애들이 무슨 수로 탈출합니까? 자기가 아는 게 있어야 탈출하지. 그냥 받아들여야죠. 그래서 인생을 그런 맘이 들어오면서 그 타인의 요구와 거기서 어린 아이의 의식 속에 내부에 지하실에 차면서 인간은 성장하는 거에요. 인간은 살아가는 겁니다. 무슨 수로 여기서 도피를 해요. 자기가 뭘 안다고 도피를 해요. 아버지 가는 길 자기가 따라가고 뭐 하나 잘되면 엄마한테 자랑하고 아버지한테 자랑하고. 아빠 엄마가 기뻐하는 것이 곧 나의 기쁨이다. 이런 가족 연대감 속에서 헤어날 수가 없어요.
가족 연대감에서 순종을 배우고 충성을 배우고 가족이 모이면 공동체가 모이면 내가 무엇에 대해서 양보해야 되고 무엇에 대해 행동에 조심해야 되는 것을 자기 집구석에서 다 배우는 거에요. 집구석이 엉망 같으면 엉망 다 배우는 거에요. 가정 교육이 엉망이구만 이런 평가를 받지요. 왜? 옆집에 있는 다른 공동체와 비교해서.
그러나 주님 나라에서는 비교라는 것을 주께서는 없애버렸어요. 네가 너 되는 것에 어떤 것도 비교할 필요 없다. 어떤 것도. 내가 꽂혀서 내가 동서남북으로 뽑아서 천국 집어넣는데 뭘 그렇게 두리번 두리번 할 이유 없다. 그냥 말씀이 들리면 들리는 대로 해야 되는데 우리도 만만치 않잖아요. 이쪽에 있으면 이쪽 부러워하잖아요.
여기서 강제 조치로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관여하지요. 인생을 관여해서 인생을 내 뜻대로 쉽게 말해서 내가 의로운 쪽으로 주께서는 이끌지 않고 반대로 내가 아무것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이끌어주시는 거에요. 자기 부인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주님 가신 그길, 말씀의 길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