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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의존강의20221215b 베드로후서 3장 10절(불의 심판)-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베드로후서

서울의존강의20221215b 베드로후서 3장 10절(불의 심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등장하죠. 2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자, 아기 예수가 방주입니다. 아기 예수가 방주라는 말은 예수님이 언약이라는 말이고, 그렇게 되어버리면 노아가 방주 만들 때는 방주가 노아를 대신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방주는 사물체이기 때문에. 물체거든요. 노아는 그 물체를 만들었어요. 잣나무로 만든 물체입니다. 사물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사물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말은 기존의 모든 사람을 대체하는 사람이 돼요. 이 말은 기존의 모든 인간은 불을 통과할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노아는 방주 안에 살아서 물 심판을 버텨내고 그걸 지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방주라면 모든 인간은 예수 안에 들어와야 되거든요.

사람이 새 집안에 들어간다, 그건 가능하죠. 집이니까. 딴 따다 단~ 새 집이면 보통 음악 나오잖아요. 딴 따단 딴~ 새 집에는 들어갈 수 있는데 내가 타인한테 들어갈 수 있습니까? 방주 만들면 들어가죠. 그것도 줄 서가지고 티켓 끊어가지고.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도 들어가는데 그걸 못 들어가겠어요? 그러나 아기 예수 속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못 들어가죠.

그러면 방법은 뭐냐 하면 아기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되는 겁니다. 그게 임신이에요. 그걸 마리아가 처음 한 거예요. 요한계시록 아까 언급했는데 그 대목을 한번 보면 12장 1-2절,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자가 아들을 임신했는데 여기에 누가 도와줬느냐 하면 하늘의 해와 달, 열두 별 면류관들이 거기에 포진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대자연이 스스로의 자체적인 그들의 운명의 끝, 그들의 최후를 몽땅 어디에다 거는가? 여자가 임신한 아기 예수한테 모든 걸 다 걸었다 이 말입니다. 도 아니면 모다 이 말이죠.

마귀도 마찬가지에요. 자신의 모든 힘과 능력을 어떻게 하면 아기 예수를 제거할까에 모든 능력을 다 쏟은 거예요. 인간만 바보같이 그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인간만 과외 받고 수능보고 서울대학에 올인하려고 이렇게 하지......

진짜 올인할 것은 어떻게 하면 아기 예수 안에 내가 들어설 수 있느냐, 같은 말, 어떻게 하면 내 안에 아기 예수가 들어서느냐. 똑같은 말이에요.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가야 되듯이 우리는 아기 예수 속에 들어가든지 아기 예수가 우리 속에 들어오든지 해야 돼요.

이걸 안양강의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거 알려면 나중에 안양강의 올려놓을 테니까 그거보시면 돼요. A(Ap) 공식. 외부성이 내 안에 외부성으로 place, 자리잡는다. 바깥에 있는 외부성이 내 안에서 외부성으로 자리 잡는 거예요. 괄호()가 내부이고, 내 안에 외부성(Ap)이 턱하니 place, 자리 잡는 것, 이게 성도입니다.

방주 안에는 노아가 들어갔잖아요.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기는 들어오는데 어느 지점에, 심장에? 가슴에? 콩팥에? 어디에 들어오느냐? 우리 안에 우리의 영원한 타자, 타인의 힘, 악마죠, 악마가 있는 곳에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께서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말은 우리 안에 이미 우리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의식해서 들어오는 겁니다. 자,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요한일서에 보면 아주 분명하게 명쾌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뭐하러 이 땅에 오셨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악마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고 되어 있어요.

요한일서 3장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그러니까 죄를 짓는 클래스, 계단에서 인간을 제키고 인간 위에 다른, 위상이 더 높은 계급으로 옮겨갑니다. 그게 뭐냐? 악마에요. 인간을 문제 삼는 게 아니고 인간을 죄짓게 만드는 악마를 문제 삼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인간을 닦달내야 돼요, 악마를 멸해야 됩니까? 악마를 멸해야죠. 악마가 있던 자리에 주님이 들어오시는 거예요, 악마가 있던 자리에. 그 악마가 우리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으라 하면서 선악체계를 줬잖아요. 선악체계 안에서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시도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선과 악을 아니까 인간들은 악을 원하겠어요, 선을 원하겠어요? 선을 원하죠. 그게 바로 자기 의잖아요. 악마는 인간에게 자기 의를 긍정하고 인정하게 했고 주님은 바로 그 자기 의를 공격하러 오시는 거예요.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은 “내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간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그거는 땡 탈락이고 옆에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리죠. 주여, 저는 고개를 못 들겠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눅 18:11-13) 다시 말해서 자기 의가 없는 거예요, 자기 의가.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뭐라고 합니까? 주님은 뭐를 보면서 옵니까? 네가 인물이 예쁘구나, 뭐 그런 거 봐요? 키가 크구나, 그거 안 보죠. 나는 너의 죄를 사하노라. 죄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을 정도의 요소가 없다는 뜻이거든요. 불을 통과해야 된다고요, 불을.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기 예수로 왔다는 것은 아기 예수가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그럼 아기 예수님이 뭐를 통과하겠어요? 불을 통과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이 이야기했듯이 저 분은 장차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 하잖아요. (마 3:11)

그 불세례주실 분이 본인이 그 불 속에, 불세례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누가복음 12장 49-50절에 나와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받을 세례가 있는데 이 세례가 바로 내가 불을 던지는, 그 불 속에 들어오는 세례. 십자가 세례거든요. 십자가입니다. 심판이에요, 심판. 최후의 심판에 스스로 주께서 들어가시는 거예요.

주님 내부에서 주님이 통과했던 그 심판의 불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부에서 분출되는 거예요.【불을 뿜는 우리 주님】. 그냥 주님 말고 우리 주님. 심형래 감독이 만든 영화, 꼬마들 보는 영화, 조잡하게 만든 공룡 속에서 뭐가 나옵니까? 적과 싸울 때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뭐가 나옵니까? 불이 막 나오죠. 용가리 같은 거요.

불을 뿜는 우리 주님, 이게 주님 보시기에 사랑의 극치, 최고의 사랑이에요. 최고의 사랑은 불을 뿜어서 심판의 불을 뿜어서 상대를 죽이게 만드는 거고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느니라. 우리를 심판으로 불에 태워 죽이는 거예요.

예수님이 뿜어내는 불은 이미 주의 심판을 통과하신 분이 내뿜는 불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이미 불의 공력을 감당하게 된 그 효과, 그 힘이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지키거나 실천하는 게 아니고 그냥 주의 말씀이 불덩이가 돼서 우리를 완전히 삼켜가지고 우리 속에 있는 자아 요소, 또는 우리 속에 있는 자기 의 요소, 또 우리 속에 자리 잡은 악마가 우리를 부추겨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긍정하고 너 잘한다, 훌륭하다, 더 완벽하고 철저하고 네 가치를 더 키워라. 넌 의미 있는 존재야, 이걸 주님의 십자가 불로써, 십자가 자체가 불세례니까, 심판의 세례니까 십자가 와서 우리를 홀라당 태울 때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부부 사랑? 부부 사랑 같은 소리하고 있네. 자기 나 사랑해? 하여튼 되지도 않는 그 사랑. 그런 건 개보고 사랑하라 하세요. 십자가에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그리스도만 살리는 이 사랑만을 사도 바울은 사랑이라 규정하고 전한 거예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주님이 불까지 감당할 수 있는 이 사랑을 줬기 때문에...... 불이 마지막 심판이거든요. 왜? 두루 도는 화염검이니까. 생명나무 못 따먹으면 무조건 심판이에요. 생명나무 없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도 그건 행복이 아니죠. 생명나무가 없는데... 그건 저주죠.

불보다 더 센 게 없잖아요. 그럼 불보다 더 센 게 성경에 없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서 이르기를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롬 8:35) 불을 이긴 그 사랑보다 더 세고 큰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이 땅에서 환난을 당하나 걱정하지 마라. 장차 올 영광과는 족히 비교되지 않기 때문에. (롬 8:18)

적당하게 교회 다녀가지고 ‘하나님 약속 믿습니다.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 가겠습니까?’ 안 돼! 그건 있을 수 없어요. 중간에 불이 개재되어야 돼요. 불이 개입돼야 돼요. 불은 우리 죄를 태운다.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태우죠. 그걸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불로 연단된 신앙이라 했어요.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오죠.

그러면 이 말은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불로 연단된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 거예요. 불로 연단된 믿음이 되어 버리면 우리가 어떤 것을 알 수 있는가?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다음 나오는 말, “그리스도의 피 뿌림”입니다.

내가 극렬하다, 를 내세우는 게 아니고 뭐를 내세웁니까? 예수님의 피 뿌림을 내세우는 거예요. 피 뿌림. 우리가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임신하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셨다, 그런 뜻입니다. 들어오셨고 그럼으로써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올 때에 하나님의 언약을 앞장세워 들어오시거든요.

마태복음 26장에서 제자들에게 주께서 최후의 결정적 선물을 줍니다.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마시라. (마 26:26-28) 이걸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피 뿌림이라 했다 이 말이죠. 피를 그 사람한테 뿌린다는 말은 예수님의 거룩한 죽음에 같이 동참하는 거예요. 불 심판에 같이 동참시키는 겁니다.

임신이라는 걸 한번 생각해봅시다. 누가복음 1장에서 마리아에게 천사가 오죠. 그러면 오늘 낮에 했던 안양강의의 제목이 입니다. 마리아는 초과적인 현상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에요. 초과적 현상.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 인간을 넘어서는 초과적인 현상. 천사가 관여하는 거예요.

31절에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름까지 다 지어줍니다. 보통 이름은 부모가 짓게 되어있거든요. 초과적인 임신은 부모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그 부모자리에 주님의 약속 또는 주님의 초과적인 영역이 들어갑니다.

마치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람이 아닌 것처럼. 아브람 시절 때는 아브라함은 없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오게 되면 아브람이 없어요. 그렇게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결정적 요인을 집어넣는 것은 뭐냐? 아브람이 생각지도 못한 자식이 발생될 때 가능해요. 이삭을 딱 낳으니까 그때는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실질적으로 바뀌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전에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지만 실질적이 아니에요. 실질적으로 근거를 갖고 있는 아브라함이 되는 거예요. 그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온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아브라함보고 하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함께 임신되어 있고 동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마리아의 임신이라는 말은 동행이요 동거입니다. 동행이고 동거에요. 누가 나와 함께 하겠느냐? 최성수? 아니죠 아니죠. 주님이 함께하는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해요. 함께 동행하니까 두 인격이 있으니까 이름이 두 개 되어야 되잖아요. 주께서는 이름을 하나로 몰아쳐버립니다.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받게 만들어요.

그러면 내 이름은? 내 이름은 히마리 없지 뭐. 이거는 부지깽이지 뭐요. 이사야 7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냥 부지깽이에요.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찌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사 7:4) 아무 쓸모가 없어요, 나는. 쓸모없는 인간 속에 아기 예수가 주님이 그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아무 쓸모없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아무 쓸모없습니다. 자체적으로 본인의 위치와 가치, 의미를 내세우는 시절은 끝나버려요. 그때부터 주님 들어가면 그 사람은 자기 증인이 아니고 자기에게 들어와 있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되도록 노력하라, 이 말이 아니에요. 필히 그렇게 된다. 다시 말해서 내부적으로 나는 네가 네 이름을 내세우고 네 자랑하는 것을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야무진 그런 사전조치입니다.

걸어가도 주의 이름으로 걷고 짬뽕 먹더라도 주의 이름으로 먹고. 굴짬뽕도 마찬가지에요. 주의 이름으로 먹게 하는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할 때 사나 죽으나 주의 이름으로 할 때만 영광이 되고 다른 경우로 영광되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이 지구를 사정없이 완전히 극단적인 파멸로 몰아세우기 위해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 것에 대해서 그들은 간곡하게 기다렸던 바였습니다. 하, 그거지 그거! 그래, 이거야! 왔다, 장보리 아니고 왔다, 주님. 바로 이거지, 바로. 이게 주님답지. 구름 타고 와서 작살내는 거.

왜? 왜 그걸 그렇게 고대합니까? 본인이 미리 당했거든요, 본인이. 본인이 미리 당했어요. 하는 일 족족 내 뜻대로 안되게 해주는 그것을 네 자로 ‘기쁜 소식’이라 해요. 주님 속에서 불이 나오는 그것이 뭐라고요? 사랑이고.

“네가 생각하고 한 것, 내가 불로 확 싸지를 거야.” “고마워요, 주님.” “너의 의미, 너의 의, 너의 가치, 무시무시한 심판의 불로 십자가 불로 내가 다 태워버릴 거야.” “주여, 미리 나를 사라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사라짐이 주의 능력으로 이름으로 매순간 내가 누군지를 잊어버리게 하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갔을 때에요. 뭐 여행을 갔는데 걸어서 세상 속으로, 그런 여행 아니고 비행기 타고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비행기 타고, 줄여서 뱅기 타고 갔는데 거기에 도착해보니까 거기 도착한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겠어요. 분명히 자기 자신인데.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모르는 어떤 사람이 삼층천에 올라갔다는 거예요. 이런 환상을 봤다는 겁니다. (고후 12:1-4)

그런데 지상으로 다시 내려와서는 네가 너무 자만하지 않기 위해서 자고하지 않기 위해서 사탄의 가시를 주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집어넣죠. 사도 바울은 괴로워서 빼달라고 세 번, 가시 빼달라고 사탄 물러가라고 세 번 기도했고 주님은 “됐네, 이 사람아.” 끝나버리죠. 그게 네 은혜야. 네가 약한 데서 강함이라. 제발 좀 약해줘. 가장 강한 것은 네가 약해질 때야. 그런 역설적인 말씀을 고린도후서 12장에서 하고 있죠. (고후 12: 7-10)

주님을 임신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복음 1장에서 천사가 오고난 뒤에 마리아가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해요. 거기서 천사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친족 엘리사벳도 임신했다. 엘리사벳도 임신했어. 하나님께서 임신케 했고 마리아 너도 임신케 했다. 임신한 지 벌써 6개월 됐다고 36절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천사가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보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했어요. 이 말씀이 목표하는 게 뭡니까? 우리가 역시 못하는 게 없어, 우리를 향하여 그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우리 안에 계신 분을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우리 안에 계신 분이, 동행하고자 쓱 들어왔던 그분이 모든 말씀을 다 유일하게 이룰 수 있는 분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누가복음 2장 26절에서 시므온이 성령의 지시를 받고 네가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볼 때가 올 것이라고 계시 받고 그러고 난 뒤에 27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마침. 마침 뒤에 한 자 더 붙입시다. 마침내 finally.

마침내 탕웨이는 웃었다, 에서. 저 웃는 거 봐. 웃는 거 봐. 자기 남편 죽었는데 웃는 것 봐. 마침내, 여자는 본색을 드러내대. 매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해서 주님 자신의 마침내를 매일같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를 작살내는데 매일같이 성공하시는 주님.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해주시는 이 사랑의 극치. 기다려. 내가 너 태워버릴 테니까. 저 불로 태워주세요. 그래서 주님의 공로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주께서 일하고 있음을 나타나게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자기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요한복음 21장에 나온 말씀이죠. 자기의 어떠한 죽음으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요 21:19)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거 베드로 손해잖아요. 손해 아닙니다. 군 제대하는 날이죠. 아니, 제대하는 사람보고 “아휴, 이제 세상에 나가서 뭐 할래? 군에 고만 말뚝 박지.” 이런 소리는 하는 게 아니에요. 제대 날짜는 지금 캘린더에 줄 그어놓은 게 석장 넉장 벌써 되는데... 요새 군대는요, 가자마자 그어요. 3년이 아니고 1년 6개월밖에 안되니까 가자마자 그을 수 있어요. 얼마나 부대 생활 그만하고 싶었겠어요, 얼마나. 그런 베드로 병장을 향하여 “고만 말뚝 박지.” 이거는... 베드로한테 욕을 해요, 욕을 차라리.

“어머님, 어머니 더 오래 사셔야 돼요. 제가 코에다 콧줄 꽂아드릴까요?” 거의 실성한 엄마가 벌떡 일어나가지고 “내가 분명히 이야기했지, 콧줄 꽂지 말라고. 그냥 죽도록 놔두라 했지? 병원 돈 벌게 해주지 말고. 너희들 다 골병든다. 뒤늦게 효도 코스프레 좀 하지 마라.” 이거 자기 의잖아요. 부모 생각 안하고 자기 잘남 생각하는 거예요. 누구한테 불효자라고 욕 얻어먹을까봐 자기 걱정부터 하는 거예요.

베드로에게 죽는다는 것은요.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에요. 지긋지긋하지 않습니까? 지긋지긋해요, 이 세상이. 물론 짬뽕이 맛있어요. 하지만 그것도 한 두 그릇이지. 물론 대게가 맛있는데 그것도 이틀치 먹어보세요. 대게 이틀은 먹겠다, 사흘치는 못 먹어요.

생각 없는 주부들이 남편이 우연히 배고파서 미역국 하나 해줬는데 맛있다 하니까 두 달 내내 연속 미역국해보세요. 그다음부터 미역국 바이바이입니다. 제발 살려줘. 당신 맛있게 먹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거든요, 그게.

주님께서 매일같이 오늘이 그날이다. 매일같이 오늘이 불타는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성도한테는 미리, 아침 7시부터 아침 눈뜰 때부터 그걸 미리 체험하게 해요. 그러니까 성도는 매일같이 그 하늘과 그 땅을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안 믿는 사람에게는 도적같이 오지만 성도는 그 도적하고 같이 동행하고 있는데? 늘 도둑이라. 자기 안에 계신 주님이 도둑이니까 누가 도둑 같아요? 성도 자체가 이 세상에서 도둑놈입니다. 대화가 안 통해요. 다른 사람하고 대화가 통할 수가 없어요. 세상 뭐 다 산 것처럼 이야기하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님 속에 있는 불이 성도한테는 미리 올라오죠. 계속 봅시다. 베드로후서 3장 11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경건 나오죠. 여기에 대해서 제가 언급했는데 다시 한번 언급해드리겠습니다.

이 경건한 사람이 누구냐? 아까 시므온 이야기했죠. 한 사람 더 나옵니다. 시므온 밑에 또 나와요. 이름이 한나가 아니고 안나. 과부된 지 84년. 성전을 떠나지 않으면서 누구를 기다렸던 거예요. 이스라엘이 기다려야 될 분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죠.

아까 공부했던 것 돌아서면 잊어버리니까 제가 또 복습 겸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안나 이야기. 누가복음 2장 보게 되면 36절에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하려고 했느냐 하면 이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노아 때 노아와 방주의 관계입니다. 방주 자체가 언약이죠, 언약. 그럼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언약을 맺었잖아요. 이삭을 바치면서.

그렇다면 언약이 그다음 언약, 그다음 언약으로 언약의 내용을 전달하는 거예요. 그럼 방주와 노아가 있다는 말은 방주 안에 노아가 들어있다, 동행을 의미합니다. 동행, 동거. 이스라엘은 언약과 동행을 해야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누구와 함께 동행해야 되는가? 사가랴, 사가랴가 누구냐 하면 바로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데 사가랴가 예언을 합니다. 1장 69절,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여기 다윗이 등장해요. 다윗의 집이 등장해요. 다윗의 집이 이게 인물이에요. 어떤 건물이 아니고 건축 구조물이 아니고 인물이 돼요, 인물.

그리고 이 다윗의 집이 성전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인물이고 이 인물을 시므온은 성령에 의해서 다윗의 집이 구원의 뿔이거든요, 구원의 뿔을 만난다는 거예요. 구원의 뿔이 두 개입니까, 세 개입니까? 단 하나에요.

그러니까 시므온 입장에서는 한분만 보면 돼요, 한 사람만. 거울 속에 비친 나는 볼 필요도 없고 봐도 점점 늙어가고 비쩍 말라가는 그건 볼 필요도 없고 딱 한 사람만 만나면 돼요. 그런데 성령께서 만날 거라고 예언까지 해줬어요.

그러면 시므온과 비교해서 오늘날 우리를 봅시다. 오늘날 우리가 고대하는 내 인생의 의미, 목표, 계획 그것은 뭐로 축약되어야 됩니까? 딱 한분만 만나면 되죠. 죽어서 만나면 안 되고 살아서 만나야 돼요, 살아서. 시므온이 살아서 만났거든요.

안나라는 사람이 과부된 지 84년이라는 말이 있죠. (눅 2:36-37) 왜 84년이라는 말을 했는가? 살아 생전에 누구를 만난다는 거예요. 살아 생전에. 죽은 다음에 만나는 게 아니고. 쉽게 말해서 아기 예수 만날 때까지 안나는 늙어죽을 수가 없어요. 과부된 지 1년, 2년, 3년 하다가 84년까지 끌고 가게 된 거예요. 기어이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그러니까 과부된 지 84년의 안나,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네가 구원의 뿔을 만난다는 시므온. 그래서 안나가 아기 예수를 만났고 시므온도 아기 예수를 만났다는 말은 아기 예수님의 언약을 위해서 아기 예수 쪽에서 먼저 시므온과 안나 이들을 섭외했다고 보면 됩니다. 섭외했다, 를 영어로 하면 캐스팅했다. 캐스팅한 거예요.

여러분들을 캐스팅하기를 바랍니다. 또 주님한테 ‘나는 너를 캐스팅하길 원치 않는다.’ 뭐 이렇게 예능프로처럼 ‘나는 당신을 캐스팅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보통 문제 아니죠. 특히 오디션 나간 예비 가수들은 그 소리에 가슴이 제일 덜렁해요. ‘나는 너를 캐스팅하지 않겠습니다.’ 집에 가라 이 말이죠.

캐스팅했다는 증거가 뭐냐? 성령께서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보통 누가복음을 성령의 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의 저자가 사도행전까지 지었기 때문에.

그런데 2장 29절 보겠습니다. 2장 29절에서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것은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죠. 그 뒤에 말을 보세요. “내 눈이” 뭘 보았습니까? “주의 구원”. 주님이 하시는 구원을 보았사오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그 구원이 이렇게 인물화 되어서 인물이 되어서 구체적인...... 아기를 안았으니까 이게 감각적으로 오잖아요. 아기를 한 손으로 덜렁 이렇게 안은 게 아니잖아요. 두 팔로 감싸서 안았잖아요. 아기를 안고 이게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이게 다윗에게 약속한, 언약대로 한 노아에게 방주 같은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안에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 오는 거예요. 구원의 뿔이 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가 접수하는 게 되느냐 하면 메시야가 이스라엘을 접수하는 그날이 오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를 쳐다볼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를 쳐다보면 안 되죠. 자기도 자기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을 감당 못해요. 인간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노아가 방주 바깥에서 창문 열고 바케스로 물 퍼내는 것과 똑같아요. 땅아 땅아, 빨리 땅이 열려라. 물을 줄이면 땅이 떠오르겠지. 쓸데없는 짓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노아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말씀대로 아까 얘기한 것처럼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할 게 없어요. 엘리사벳이나 마리아는 캐스팅된 겁니다. 섭외된 거예요, 그냥. 이게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면 이말 알아듣고요. 주님 안 계시면 이게 뭐꼬? 무슨 말이야? 못 알아듣습니다.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것은 경건이 뭐냐 하는 거예요, 경건. 누가복음 2장 36절에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과부로 84세인지 아니면 84년째 과부로 지냈다는 뜻인지 하여튼 나이 많은 건 확실하고 이 사람이 여자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과부니까.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아까도 했듯이 마침내. 27절에 시므온도 아기 예수 만날 때 “마침” 마침내. 여기 38절에도 “마침” 아기 예수를 만났다는 거예요. 그럼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은 한결같이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마침내.

‘마침내’라 하는 것은 죽지 않더라도 내가 인생을 다 살지 않더라도 나의 마지막 모습을 아기 예수 쪽에서 아기 예수께서 나한테 가져다주었고 알려주었다는 겁니다. 나의 마침, 나의 최후는 미리 당겨서 아기 예수님 혹은 예수님이 이미 다 우리한테 가져다 준 겁니다.

마침내 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디서? 십자가에서. 마침내. 그게 십자가에 마침내 들어간 상태의 사람이죠. 내가 커서 나중에 무엇이 될고?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라는 노래도 있지만 내가 무엇이 될고? 무엇이 되기는, 십자가의 강도가 되면 천만다행이죠. 십자가의 그것이 마침내 내 모습이에요. 오늘 제목은 ‘마침내’. 아까 ‘땡’은 너무하고 ‘마침내’.

그러니까 눈길에 걷는 것도,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도 마침내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고 모든 매 순간이 최후라는 그 그림을 장식하는 작은 타일 조각 하나 하나를 지금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타일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불신자한테는 ‘언제 오는데?’가 되지만 신자한테는 이미 “주의 날이 도적같이”라는 그 말씀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현재 우리 성도와 함께 살고 있어요. 이 말씀이. 베드로후서 3장이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도 안에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게 거룩한 행실이고 경건이에요. 최후 너머에 마지막 너머의 삶이 일찍부터 시작한 걸 가지고 거룩이라 하고 그리고 경건이라 합니다. 주와 함께 동행했을 때나 가능하죠.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그다음에 뭡니까? “간절히 사모하라” 끝으로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노아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다 했어요. 안 한 게 아니에요. 그러나 노아가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제공된 언약과 함께 물 심판을 받게 될 때에 노아는 더 이상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을, 나의 행함을 사모하지 않게 됩니다.

그 일을 안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벤츠 타라고 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받으면 되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렇게 살면 안 돼, 가 아니고. 나의 행함, 나의 계획, 기대, 나의 의는 유일하게 불 심판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영, 성령께서 캐스팅하심으로써 미리 보게 하신 나의 최후, 십자가 안에서 이미 끝난 거예요,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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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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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