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17"16-21(우상의 도시)
Re..행 17:16-21(우상의 도시)
이름 : 이근호(IP:)
우상의 도시
2005년 2월 16일본문 말씀: 사도행전 17:16-21
17: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7: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7: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17: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17: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우상이 그득한 것을 보고 화가 납니까? 아마 그저 자신의 취향이겠지 하고 그냥 무심코 넘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우상이 그득한 도시를 보고서 화를 냅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이미 세상을 훤히 읽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세상을 훤히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단순한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거리에 나가 철모르는 아이들이 나쁜 짓을 하면 정의감이 불끈 쏫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그런 정의감을 가지고 우상의 도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 우상을 섬기는 것이 나쁜 짓이 되는 걸까요? 그들은 새로운 현실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끝에 보면, 어떤 이들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 내용에 대해서 새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이처럼 늘 새로움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흔히 말하는 이 인간 사회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가지고 흥미로워야 합니다. 사실 이야기가 흥미롭다는 말은 인간의 힘이나 능력으로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내용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가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웃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의 머리로서 창안하거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열심히 해내면 누구나 달성할 수 있는 그런 목표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우상과는 달리 인간들이 아무리 하려고해도 달성할 수 있는 그런 현실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유일한 참된 현실이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하면서, 이런 현실을 부합되지 못한 우상 천지에 격분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란 올바른 현실만 감잡으면 그 사람은 용감하게 살아갑니다. 그 누구 앞에서도 꿇릴 것이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좋고 탐낼 만한 것을 가지고 앞에서 겁주고, 때로는 미혹해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가짜 현실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올바른 현실을 모르니 확률상 많은 신들을 창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신들이 참으로 많아졌습니다. 이사야 44:6-9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내가 옛날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고하며 진술할 자가 누구뇨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고할찌어다 너희는 두려워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느냐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이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노라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 우상이 지닌 허구성과 껍데기 뿐임을 폭로시키기 위해서 주님의 사자들이 활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45:6에 보면,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것은 전도를 할 때에 앞 뒤 보지 말고 용감해도 무방하다는 말입니다. 수많은 우상이 있고, 수많은 신의 수풀 속으로 지나가더라도 그런 것들은 모두 허망한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를 대하게 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인간의 모든 움직임은 다 마음의 행복과 평안을 위함이다" 즉 행복이 없이 고통스러운 쪽으로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남들보기에 어미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아품을 겪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는 편이 어미의 마음에 행복감을 주기에 그런 윤리적인 행동이 나온다는 겁니다.
따라서 마음의 행복이라야말로 최고 진리라는 행복주의를 주장한 철학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스토아 학파는 일종의 고정된 운명론으로 세상을 보는 학파입니다. 마치 불교와 같이 사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머무름이 없이 모든 것이 흐느적거리며 변함없이 움직이는 사건과 사건의 연속, 움직임과 움직임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경우에 합당하게 진행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욕심내지 말고 살라라는 겁니다. 균형과 중용의 정신으로 과도하거나 무리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을 맡기는 것이 가장 올바른 삶이라고 가르치는 학파입니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현실일까요?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그저 인간 자체를 신격화 시킨 '나쁜 짓'을 하고 있는 불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도 일으키고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을 내리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 심판을 감행하려고 하시는데 이런 현실성도 없이 자기 자신의 욕망을 내다 본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간주하는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에게 있어 인간들의 우상성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더욱더 유일한 현실로 강조하게 만드는 요소가 됩니다. 즉 우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리는 더욱도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 본인은 어떻게해서 이 우상을 뚫고 참된 현실을 알게 되었을까요? 찬송가 169장 5절 가사에 나오는 가사가 이런데 적절합니다. "놀라우신 은혜로 주의 낯을 보겠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얻을 수 없는 은혜이기에 '놀라우신' 은총입니다. 우상을 보고 화를 내고 바른 현실관의 입장에서 과감하게 두려울 것이 없이 용감할 수 있는 것도 다 놀라우신 은혜 덕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있는 현실 그대로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눈 앞에, 코 앞에 있는 작은 현실에 주눅드는 생활을 하지 맙시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전체를 보고, 그리고 알고 있는 그런 현실성이 있는 생활을 하여 죄에 양보하고 미혹됨이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