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2b 부산강의 : [시편]54(38:11)-3자 관계
20221212b 부산강의 : [시편]54(38:11)-3자 관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끝날 때에 한 것이 2자 관계, 3자 관계의 관계지요. 2자 관계부터 그림 그리면 이렇습니다. 2자(者)를 가장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카페의 커다란 창 너머로 사람들이 걷기도 하고 차도 다니고 있어요. 거기 공간이 둘로 나눠지는 거예요. 이쪽 공간(카페 안)과 이쪽 공간(카페 밖)이 무관하다는 거예요.
무관한 두 공간을 언급한 영화감독이 있는데 홍상수 감독이에요. 홍상수 감독은 영화에서 프레임을 둘로 쪼개버려요. 이번에 요한복음 수련회할 때 첫째 시간, 둘째 시간에 제가 프레임 이야기 많이 할 겁니다. 특별히 여러분한테는 미리 말씀드려요, 특별히. 요한복음을 열두 개의 단락으로 쪼개져 있어요. 단락이 전부 다 두 개의 프레임이 중첩이 돼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그때 들어보고요.
홍상수 감독의 에 보면 여기에 여자와 남자가 앉아 있는데 소설 초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 장면에서 옆에 있는 길거리의 사람들은 무심코 여기 카페 안에 있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전혀 관심 없이 갑니다. 따로 놀지요, 공간이. 2자 관계에요.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또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이 있어요. 마찬가지에요. 카페에 또 앉아 있는데 두 남자가 주인공의 옛날 여자이야기하면서 있을 때에 옆에 지나가는 차들이나 무심코 아무 상관없어요. 그 장면을 길게 보냅니다. 아무 관계없는 거예요. 관객들은 눈치 못 채지요. 영화가 특별한 특징이 없네.
홍상수 감독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세상에는 특징을 찾는 게 잘못이라는 거예요. 너는 너고 나는 난데 그게 이 세상을 구성하는 조건이 돼버렸는데 거기서 무슨 특징이 있어요. 내가 아무리 월드컵을 좋아해도 나는 축구 싫어요, 하면 끝난 문제에요. 아까 했지요. 자기만의 폐쇄된 공간으로 모든 것이 집중화되는 거예요. 계속 집중화되는 겁니다. 나중에 치매 현상까지 나가는데. 자기가 있는 세계와 그 외의 자기 공간 말고 모든 공간, 그걸로 날카롭게 현대에는 구분되는 겁니다. 2자 관계에요.
이렇데 되다보니까 뭐냐 하면 문제점이 모든 것이 획일화된다. 획일화된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기하학적으로 세상을 구분할 수 있고 그걸 묘사할 수 있는 세계에요. 뭔 뜻이냐 하면 제가 질문을 던질 테니 답변을 해보세요. 아주 쉬운 질문입니다. 남녀가 방금 결혼을 했어요. 살림집을 차립니다.
아파트에 살고 싶어요, 아니면 옛날 대학교 때 6~70년대 하숙집에 살고 싶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하숙집 아줌마 내가 나중에 성공해서 결혼하게 되면 이 집에 정이 들었으니까 다시 살겠습니다, 하고 다시 들어옵니까? 여자 쪽에서 가만두지 않지요. 자기 추억을 따라서 못 들어와요. 그러면 옛날 하숙집이 아니고 아파트에 살고 싶다. 그것도 신축된 새 아파트에, 인테리어 잘 돼 있는 아파트에.
그렇다면 아파트의 구조를 보세요. 선으로 돼 있지요. 획일화된 거예요. 쭉쭉 그으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공간 하나하나가 각각 절단된 따로 설정된 공간들이에요. 영어로 하면 cell처럼 작은 세포처럼 나만의 공간을 생성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너 어디 사노, 하면 몇 동, 몇 호라고 숫자로 표시가 가능해요. 나는 강원도 하숙집에 살아, 이게 안 돼요. 몇 동, 몇 호로 끝나버립니다.
획일화됐다는 말은 셀이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틀에 갇힌 생활을 중요한 것은 이걸 자처한다는 겁니다. 획일화된 틀에 갇힌 생활을 스스로 원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기하학적 공간이잖아요. 수학에 도형 있잖아요. 도형으로 묘사되는 그런 생활이죠. 기하학적 세상이죠. 기하학적 세상은 뭐가 문제냐 하면 이것과 이것이 구분이 안 돼요. 뭐냐 하면 중앙과 중심이 구분이 안 됩니다. 기하학적 공간에서는 중앙과 중심이 똑같은 말이에요. 왜? 기하학적은 움직이지 않으니까 고정돼 있으니까.
기하학적 공간을 다른 묘사로 하면 이렇습니다. 서울에 한강 흐르고 남쪽에 관악산 있고 북쪽에 북악산 있지요. 그 사이에 서울 시가지 형성돼 있지 않습니까. 그럼 서울의 획일화하면 어떻게 돼요? 강남 쪽 한 덩어리 떼어낼 수 있지요. 그다음에 이쪽은 강서, 강북에 구파발.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줄기에 사는 옛날 동네, 허름한 동네. 이렇게 구획되어서 땅 값이 결정되지요. 인천 쪽으로 가면 일산, 이쪽은 서울에서 제일 못 사는 동네, 의존교회 있는 제일 시끄러운데 김포공항 가까워서. 요새 그곳도 재개발한다고. 봉천동, 더 나가면 높은 데 힘들면 전부 다 못 사는 데에요.
(부산이 아니라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제가 부산에 안 살아봐서. 그럼 부산도 하지요. 부산에서 제일 못 사는 반송, 좀 사는 해운대, 남일동, 초등학교 있는 서면 로터리 근처. 자, 이렇게 구획이 되게 되면 여기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중앙을 이미 고정된 기하학적 세계에서 중심을 뭐로 보겠습니까? 중심과 중앙이 같은 말이니까 뭐로 보겠어요? 빨리 돈 벌어서 강남에 살고 싶다는 거예요.
강남에 못 살면 어디로 튀느냐? 부천, 부평이나 아니면 저 남쪽에 동탄, 자꾸 남쪽으로 밀려요. 안양, 안산, 용인 그쪽으로. 경기도 쪽으로 밀리는 거예요. 집값이 상대적으로 싸니까. 돈 20억으로 어딜 건방지게 강남을, 아파트 한 채도 못 사는 그것도 돈이야? 들어올 수 없어요. 이미 기학학적으로 중심과 중앙이 확정돼 있습니다.
중심과 중앙이 기하학적으로 확정됐다면 이 세상을 뭐로 본다? 고정적으로 보는 거예요. 그 고정적 속에 하나의 기획된 나 하나 산다면 그 인생의 삶의 목표도 고정적이 돼 있어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의 중심지에서 사느냐. 재벌들처럼 살고 싶다. 그냥 서재에서 오천 억, 육천 억을 그냥 벌고 그냥 날리고 2주째 4조를 버는 사람 있어요. 은 2주에 4조를 벌었습니다. 송중기가. 금융지주회사 상속 받아서 중간에 교통사고 나면서 10회가 끝나요. 이건 여러분 관계없는 드라마 이야기에요.
그러니 이미 악마에 속한 인간들은 별 것 없어요. 똑같이 생활합니다. 이 세상의 중심에 살고 싶다. 미국의 잘 사는 동네에 합류하고 싶다. 쉽게 하는 것 없느냐? 유튜브하면 된다. 이미 니 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차이점이 없어요. 거기에 도달하지 못해서 문제지. 그러면 그러한 자세로 그것을 대물림합니다. 자식을 닦달내지요. 너 변두리에서 빌어먹을래, 중심에서 살래? 자식 정신을 세뇌시키지요. 조종을 하게 됩니다.
아빠의 이름으로 악마의 일을 계속 하게 되는 겁니다. 아빠, 엄마 이름이지만 그 안에 악마가 다스리고 지배하는 거예요. 그럼 자식은 교회 언제 나오고 예수 언제 믿느냐? 그건 고2로 끝났어요. 고3은 수능 준비해야 되기 때문에 빠이빠이하는 거예요. “아아, 아빠, 엄마한테는 교회 복음이란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구나.” 그럴 때 아이들은 어떤 마음의 기쁨을 얻습니다. 왜냐? 평소 악마의 마음을 부모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 없는 세계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 없으면 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간섭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2자 관계에 있어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처럼 카페에 있는 것은 주인공, 바깥에 비추는 것은 행인, 완전히 구분돼 있습니다. 그런데 유리창 밖 이것이 흐릿하다. 또는 뿌옇다. 인간은 자기 생각이 있으면 남들 생각은 뿌옇고 흐릿해요. 희미하게 보입니다. 안갠 낀 것처럼. 모든 것이 자기 빼놓고 모호한 세계에요. 모호한 세계니까 꿈처럼 여겨지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가진 이 꿈이 주님의 언약의 특수성에 의하면 이 꿈을 예수님의 상처로 박살내버려요. 예수의 십자가 상처는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꿈을 다 차단시켜버립니다. 꿈은 그냥 꿈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허망한 꿈이죠. 그러면 이게 신약의 십자가만 그런가, 구약에도 있나? 구약에도 있습니다. 전도서에 있습니다.
전도서 7장 1절에서 3절까지 누가 읽어보세요.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어디 있고요?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어디 있다? 연락하는 잔칫집에 가 있느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4절) 이미 솔로몬은 상처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에 상처가 들어온 것을 굉장히 다행스럽게 여기고 그걸 지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세상 사람들이 다 도망칠 수밖에 없는 지혜인데 어떻게 이 지혜가 내 속에 들어왔느냐? 그건 아버지 다윗에 준 언약의 효과지요. 다윗 개인에게 있던 효과가 솔로몬에게 주어진 겁니다.
이렇게 되면 솔로몬 본인에게는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공부한 대로 언약이 들어오면 본인에 관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전도서가 처음에 뭐로 시작됐습니까?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신났어, 아주 신났어.
꿈이란 나의 계획을 꿈이라 합니다. 그런데 전도서 3장에 보면 뭐로 돼 있습니까? 계획이란 게 내 손을 떠났어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1~3절) 놀라운 사실은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다는, 이별할 때가 있다는 거예요.
이거는 내 계획, 내 꿈을 비껴가는 거예요. 뭐가요? 새로운 공간이. 무슨 공간? 언약의 공간, 다윗의 공간, 특수한 상처가 있는 공간은 철저하게 나를 도회시하는 겁니다. 나와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는 거예요. 나의 영향력을 전혀 관계없는 그 세계, 그러면 2자 관계가 아니지요. 유리창이 깨져버렸지요.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보기에 남은 타인이고 행인인 그런 관계가 아니지요. 나는 나한테 주인공이고 나 외의 모든 사람은 나한테 타인이라는 그 2자 관계는 지옥입니다. 내가 주인공 되면 나를 힘들게 한 모든 자는 나의 복수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건 지옥이에요. 복수가 남아있는 한 그거는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이를 가니까. 어떤 사람은 잘 때 이를 가는 사람 있어요. 어릴 때 욕구불만 때문에 이를 가는데, 커서는 그런 게 없다가 나이 들면 또 생기고 그런데.
나 빼놓고는 다 적이다. 토마스 홉스란 사람이 이 세상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하는 투견장이에요. 인간은 없고 뭐만 있다? 개들만 있다. 심리상담, 정신상담 요령은 단 하나에요. 오은영 박사의 심리상담은 딱 하나만 알면 누구도 오은영 박사처럼 심리상담할 수 있습니다. 뭐냐 하면 사람을 개로 보는 거예요. 개는 위선은 없어요. 본능만 있어요. 자기 것만 챙기는 본능, 개지요.
문제는 인간세계에서 인간이 왜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가? 개를 뭐로 간주한 거예요? 사람으로 간주한 게 문제가 된 겁니다. 개보다 더 못한 게 인간인데 마치 개 위의 사람인양 여겼던 것이 모든 정신구조가 완전히 부셔진 거예요. 본인을 I'm a dog, 나를 개로 보면 되는데 자기를 사람으로 보는 순간 정신병 걸린 거예요.
모든 정신병이 뭐냐? 본래 자기 모습을 찾아가지 못하는 그게 정신병입니다. 자기는 사람이고 싶은데 실제 육신은 뭡니까? 개 같은 본성만 튀어나오는데 이걸 억지로 억압하니까 프로이트 이론에 의하면 억압이 참지 못하고 꿈으로 튀어나오고, 평소에 튀어나오면 남에서 피해를 주는 정신병자 되는 거예요. 대낮에 칼 들고 달려드는 것.
개는 몽둥이가 약이죠. 몽동이로 안 되는 것은 그냥 그 자체로 이미 죽은 거예요. 인간은 이미 개가 됐다는 말은 인간성 없다는 뜻이고, 인간성 없다는 것은 사고로 죽으나 날씨 추워서 죽으나 코로나로 죽으나 죽을 만해서 죽은 거예요. 인간이 죽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조치입니다. 인간도 아닌 게 왜 살라해.
성경에 보면 산 자의 땅이 있잖아요. 나머지는 뭐가 되겠어요? 언약 안에는 산 자의 땅이라지만 언약 밖은 무슨 자의 세곕니까? 죽은 자의 세계지요. 전도서는 그걸 알라는 거예요. 네 본성을 찾아가라. 초상집에 네 본 모습이 거기 있다는 거예요. 초상집에 걸려있는 영정사진이나 그걸 조문하러 간 내 얼굴이나 결코 그것은 분리돼 있지 않다는 거예요. 동일한 것. 죽은 자와 산 자가 동일한 거예요, 언약에서.
교회 와서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성경 보면서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성경을 볼 때 자기 거울 보듯이 봐요. 뭐 좋은 것 없나 싶어서. 내가 사람답게 살려면 뭘 하느냐? 사람이 아닌데 무슨 사람다운 게 돼요. 식구가 몇 식구다. 엄마 개 두 마리와 자식 개 두 마리에요. 네 마리에요. 자꾸 사람이라 하니까 교회 목사가 사기를 치는데 딱 적합한 거예요. “존귀합니다.” 뭘 개코나 존귀해. 존귀할 것 같으면 지옥이나 만들지 말지요.
논리로 따져보세요. 그렇게 하나님이 인간을 존귀하고 사랑한다면 지옥을 만들지 말아야지요. 차라리 여호와증인한테 가세요. 지옥 없다고 주장하는 교파, 여호와증인. 그게 우리 논리에 맞잖아요. 주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오셨다고요? 그럼 주님 십자가는 왜 생겼는데요?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주님은 공간을 생각합니다. “나는 나다.” 인간이에요. “너는 갇혔다.” 주님입니다. 주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밖에 모르는 그런 종자들이 모인 그곳에 우리는 악마로부터 지배당하고 통치 받고 있다는 거예요.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못 빠져나옵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못 빠져나오는 곳을 어떻게 빠져나오는 그 문제를 보겠습니다. 2자 관계 분명히 알았지요. 뿌옇다, 희미하게 보인다. 나만 몰두한다. 내 인생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생각, 타인에 대해선 아무것도 없어 나만 알면 되니까요. 그리고 남을 안다고 해서 뿌연 유리창 너머 해봐야 몰라요. 자기도 모르면서 남까지, 더 노골적으로 지가 개라는 것도 모르면서 남 개만 보이면 안 되겠지요. 2자 관계 됐지요. 3자 관계입니다.
3자 관계는 2자 관계 세계에 존재하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예수님 아는 친척들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라고 했지요. 왜 이런 평가를 했습니까? 이게 3자 관계가 아니고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논리로 동일하게 예수님에게 적용했기 때문에. 예수님=목수의 아들.
모든 철학가들과 소설가들이 예수님을 뭐로 봅니까? 목수의 아들로 봐요. 철학했다고 개 아니에요? 소설 쓰면 개 아닙니까? 학문하는 과학자는 개 아닙니까? 본인이 하는 일이 뿌듯하게 봐요. 자기가 악마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자꾸 모르는 방향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겁니다. 소설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전부 다 어디서 나오느냐? 관찰에서 나오거든요.
이게 아까 도마이야기와 마찬가지에요. 내가 손으로 만지고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본인 자체가 그렇게 하는 자체가 어떤 공간에 사로잡혀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보세요. 복이란 말은 기분 좋지만 문제는 조건이 있어요. 보지 않고 뭐다? 믿는다면 지금 본다는 하는 누가 문제에요? 보인다는 내가 고질병 걸린 거예요. 보고 판단하겠다는 이게 문젯거리에요. 나라는 자체가 나한테 장애요소에요.
이걸 제가 어제 낮 설교에도 언급했지만 이 말이에요. 그 누구로부터 속지 않으려고 하니까 이미 속은 자입니다. 본인의 의미와 가치를 계속 고수하는 거예요. 나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하면서 살고 싶다. 이 자체가 속아 넘어간 거예요. 우리는 판단할 자격도 없어요. 어제 낮 설교 마지막에 뭐했느냐 하면 바로 강도 맞은 사람 이야기했지요.
강도 만난 사람이 그냥 죽도록 맞았어요. 곧 죽어가고 있어요. 끝이에요. 그냥 지나가도 괜찮아요.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인이 어떻게 합니까? 그냥 지나가지 않고 건지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기대하지 않고 예상 못한 이웃사랑에 적용이 돼버린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는 겁니다. 그 이웃이 누굽니까?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래서 자기를 건져주는 예수님에 종속된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겁니다. 왜? 자기는 항상 강도 만난 사람으로서 그냥 죽은 자, 거반 죽었다는 말은 그냥 죽었다는 뜻이에요. 내가 스스로 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을 흔쾌히 새로운 자아상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내가 나한테 할 수 있는 것은 전무하다, 없다는 것.
그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 주머니에서 자기 돈 해서 필요한 비용 대겠다고 나오지요. 이게 뭐냐? 자기희생이죠. 자기희생은 인간들 입장에선 자기 손해잖아요. 손해의 끝은 뭡니까? 자기 말소에요. 주께서 이 길을 자진해서 가신 거예요. ‘말소’란 말이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자기가 없어지는 거예요. 말소, 등기말소란 말이 있잖아요. 부동산으로 해야 이해 잘 되는……. 자기 말소, 다른 말로 하면 추방된 신체, 같이 안 놀아주는 추방된 신체, 주민등록말소처럼 추방된 신체. 이게 주님 가신 길 그겁니다. 누구도 흉내 낼 수도 없고 따라 할 수도 없는 거예요.
자, 남아 있는 것, 어떻게 해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 또는 다윗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 영향력이 행사할 수 있고 우리가 빠져나올 수도 없는 2자 관계에서 어떻게 3자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3자 관계는 아까 언급했습니다. 삼각형구도를 갖고 있어요. 어떤 지점이든 괜찮아요. 구체적 공간이 등장해요.
A, B, C 지점에서 그냥 아무데나 A 해보세요. A에 다윗이 등장했고 다윗이 자기 죄를 이야기하고, 다윗 등장, 죄 등장, 그다음에 하나님의 진노 등장하지요. 그다음에 등장한 게 뭐냐? 상처입니다. 그게 시편 38편 1절부터 3절까지 나와 있지요.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나의 죄로 인하여.
여기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시편에 나오는 다윗은 실은 그 안에 누가 계시다? 예수님이 계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죄가 없어요. 죄가 없는데 어떻게 아버지의 진노를 받느냐는 거예요. 예수님은 죄가 없는데 아버지의 진노를 받는다. 어떻게 그게 성립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다윗은 지금 죄가 있어서, 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왔고 그로 인하여 상처가 주어졌다는 거예요.
이러한 질문의 취지, 무슨 질문인지 아시겠지요. 죄 없으신 분이 어떻게 진노를 받는가? 그 질문을 이렇게 바꿀 수 있어요. 죄가 있다고 해서 다 아프고 죽는가, 하는 그 문제. 사람이 죄가 있다고 해서 아픕니까? 몇 번째 언급했지만 또 이 자리에 또 언급하겠어요. 산상설교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했지요. 여러분에게 똑같이 질문합니다. 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게 하면 어디 갑니까? 지옥 가지요.
이걸 평소에 우리가 습득하고 있습니까? 일점일획이라도 말씀을 위배되면 반드시 주께서 추궁을 다 해요. 주의 말씀은 농담이 아닙니다. 네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뭐라 했습니까? 빼버리라 했지요. 인간이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는 나중 문제에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지킬 수 있으니까 명령한 게 아니에요.
아버지의 명령을 그냥 주는 거고 그 명령에 대해서 책임을 누가 지느냐? 예수님 홀로 져요. 우리한테 책임을 묻는 게 아니에요. 왜? 명령해봐야 책임질 수 없는 대상들이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가 없어요. 이미 죽은 자들이에요. 다만 그들은 말씀에 입각해볼 때 어느 인간도 살 권한이 없다는 것을 개 같은 인간들은 받아들여야 돼요.
개, 개 하는데 산상설교에 나오잖아요. 개한테 진주나 보석을 던지지 말라. 문제는 누가 개인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때는 복음을 들어보면 알지요. 웽웽 달려들 때는 개구나, 이렇고. 죄가 있다고 해서 다 아프고 죽습니까? 이게 바로 다윗의 특수성이에요. 다윗의 언약적 특수성이 뭐냐? 죄 졌는데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고 다윗을 쳤다는 사실, 그게 놀라운 기적이에요. 아직 기적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는 기적이 바로 시편 38편 18절에서 20절에 나옵니다. 이거는 특수한 사람한테 일어난 현상인데 뭐냐 하면 내가 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요. 누가? 다윗이. 그래서 다윗이 상처를 했잖아요. 38편 17절에서 마지막 22절까지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됩니다. 빨간 걸로 쓸게요. 이걸 해야 오늘 강의가 마무리가 돼요. 정답이 된다고요.
이게 뭐냐? ‘선’입니다. 갑자기 죄가 중간에 끼어들었는데 죄가 포함되는 선이 주어지는 거예요. 이거는 선악과 따먹은 인간세계 지식으로선 상상이 없습니다. 인간세계에는 악이 죄가 빠져야 선이 되고 의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세계에는 죄가 들어가야 이게 선이 돼요. 죄와 선은 대척관계로 같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의 상식입니다. 그 상식을 엎어버리죠. 상식을 뒤엎는 겁니다.
그 알기 쉬운 이야기가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것,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은 죄가 없는 곳에는 뭐가 없다? 의가 없다. 죄가 없는 곳에는 영생도 없고,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습니다. 죄 속에서 천국이 오지 죄 피하고 천국 오지 않아요. 인간들의 선악체계는 뭐냐? 악을 피하면 뭐가 된다? 복 받아서 천국 간다잖아요. 이게 아니고 죄 속에 들어가야 거기서 하나님의 영생과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이 대목을 로마서 8장 3절과 9장 3절을 보면서 연결시켜보겠습니다. 우리가 이걸 알아야 할 이유가 뭐냐 하면 어떻게 해서 마귀에 속한 우리가 개 같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서 영생을 얻느냐? 그걸 우리가 발견해야 알아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3절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맞지요. 그러면 죄가 없다면 주님이 오십니까, 안 오십니까? 오시지 않지요. 천국이 이 땅에 지옥 속에 밀려들지 않지요. 아들이 오지 않으면 천국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천국을 이룹니까? 이 지옥 속에서 천국을 이루는 거예요.
지옥 버리고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지옥 속에서. 왜? 죄가 없는 곳에는 은혜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로마서 5장에 사도 바울이 발견한 복음이 이거에요. 은혜만 따로 챙길 수 없다는 거예요. 죄 속에서만 은혜가 나오니까요. 죄 없는 은혜는 은혜가 가짭니다. 그런 은혜는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걸 알았던 사도 바울이 9장 3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9장 2절에 보면 자기가 알게 된 것이 자기 지혜가 아니고 성령이랍니다. 성령 안에서 내가 증거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공부 잘해서 똑똑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머리 좋아서 하는 게 아니에요. 성령께서 알려준 바에 의하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겁니다.
저주 속으로 들어가기를 본인이 원하고 있는 거예요. 왜? 격렬하게 저돌적으로 사고 난 차량 속에서 누굴 끄집어낸다? 하나님의 가족을, 하나님에 속한 사람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끄집어낼 수 있다면 내가 그 사고 난 차량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무엇의 반복이에요? 9장 3절의 이야기는 8장 3절의 연속이죠. 반복이고 적용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죠. 하나님께서 무슨 명령을 했습니까? 이제부터 죄 있는 육신으로 갔고 네가 죄만 있는 곳에 들어가서 거기서 뭘 이뤄라? 모든 율법을 다 이뤄서 의와 영생을 거기서 천국을 만들어내라, 이게 예수님께서 아버지한테 받은 사명입니다. 아까 적었던 것 다시 봅시다.
다윗 있었지요. 풍성한 사람이죠. 언약의 사람 다윗이 뭘 지었습니까? 죄를 지었습니다. 그다음에 진노 오지요. 이 관계, 죄에서 진노, 이게 아무나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죄 지었다고 다 진노 받는 게 아닙니다. 죄와 진노란 이 코스가 언약적 특수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윗을 통해서 마련돼 있는 거예요.
진노 다음에 이건 관념적이죠. 구체적인 공간이 뭡니까? 상처 입었다는 거예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의 뜻은 완전한 걸로 나타나는 거예요. 십자가 창 자국과 못 자국은 너무나 명확한 구체적이에요. 실제로 그걸 마주본 사람이 있습니다. 도마지요. 이 세상은 어떻게 구성돼 있는가? 양자물리학을 공부하는 게 아니에요. 세상의 모든 철학을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딱 하나만 알면 돼요. 뭐지요? 십자가. 그래서 고린도후서 10장에 보면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철학과 모든 이론이 십자가 앞에서 전부 다 허물어져야 돼요.
제가 어제 낮 설교에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가정에 자식이 문제가 있으면 오늘날 어디 간다 했습니까? 오은영 박사 찾아가지요. 그런데 옛날 구약 때는 자식이 문제 있으면 누굴 찾아간다 했습니까? 마을의 장로를 찾아가지요. 장로는 뭘 쥐고 있습니까? 짱돌을 갖고 있지요. 그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돌로 쳐 죽여 버립니다.
그러면 부모는 누구한테 감사해야 돼요? 자기 자식을 죽인 장로에게 고맙다고 해줘야 되지요. 왜? 자식은 애초부터 내 자식이란 성립하지 않고 계시를 보여주는 기능자로서의 자식이니까. 그게 전체가 율법의 공간이죠. 율법은 언약이니까 언약의 공간이 밀려온 겁니다. 언약 안의 원칙은 뭐냐? 죄 있는 곳에 돌로 쳐 죽이라. 죄가 있는 곳에 뭐가 있다? 진노.
진노가 엄포 놓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지금 겁박하는 게 아니에요. 구체적인 사례로서 다윗에게 상처가 주어집니다. 상처가 주어지니까 그전에 다윗과 친구들과 다윗 아는 사람이 함께 같은 공간이라고 하면서 있었지요. 아까 첫째 시간에 했잖아요. 그럴 때 다윗과 함께 있던 사람들의 의식과 사고방식과 삶의 원칙은 뭐였습니까?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저주 받고, 이 선악체제에 있었지요.
제가 아까 문제가 뭐냐? 어떻게 하면 지옥에 빠진 우리가 천국을 가느냐? 그 문제잖아요.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어떻게 나에게 뒤집어씌운 선악체제에서 어떻게 우리가 돌파할 수 있고 빠져나갈 수 있느냐, 그 문제에요. 못 빠져나가지요. 빠져나갈 수가 없지요. 그런데 다윗이 하나의 특수한 사람으로서 상처를 했단 말이죠. 상처 다음에 뭐가 생겼습니까? 기존의 인간 공간에서는 상상도 못할 뭐가 생겼느냐? 선이 나온 거예요.
그 대목을 시편 38편에 마지막이니까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다시 당부합니다. 분명히 다윗을 죄 지었지요. 죄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받았잖아요. 그런데 여기 38편 20절에 뭐라 합니까? “또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뭐한다? 대적한다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그들은 나를 떠났다는 겁니다.
떠난 이유가 뭐냐? 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구체적인 현상을 만들었고, 그것이 나에게 상처가 생겼으니까 그로 인하여 그들이 나를 떠나버렸는데 이로써 공간이 구체적 공간에서 상상적 공간으로 분리된 거예요. 분리되면서 다윗은 삼각형이 남아 있는 거예요. 사람은 떠났으니까 이 자리가 뭡니까? 비어있지요. 그리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가짜였지요.
다윗을 떠나놓고 하나님 믿는다, 예수님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 믿는다? 이건 완전히 사기입니다. 이거는 사도 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사울로 있을 때 그 사기에요. 거짓이었습니다. 인간이 자기한테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는 그게 사기거든요. 자기가 똑똑하게 살겠다는 게 사깁니다. 자기 본인을 몰라서 그래요. 개 같은 존재인 걸 몰라서 그래요. 혼자 똑똑하고 그런 거예요. 현명하고 지혜롭고. 그런 사람은 초상집에 안 갑니다. 왜? 자기가 죽기 싫기 때문에.
사람들은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이유가 이와 같은 말 듣기 싫은 거예요. “그만 살아라. 됐다. 오늘부로 네 인생 끝낼게. 어찌 기쁘지 아니하냐.” 그리 될까봐 흑염소 먹고 개소주 먹고 안 되질려고 계속 살려고. 어제 낮에 했지요. 인간이 계속 살고 우리가 있는 이유, 거기에 대해서 답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요. 내가 왜 있지, 질문을 안 해요.
정답은 뭐냐? 내가 악마의 일을 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그것이 들키지 않기 위해 사는 거예요. 악마와 내가 한 통속이라는 것을 내가 부정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 사는 이유는 악마가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거예요. 악마가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인간을 만들고 살게 하신 거예요. 그걸 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뭡니까? 의인이죠. 예수님이 의인인데 죄인 되셨잖아요. 하도 인간들 의식이 반대가 되기 때문에. 하늘나라 천국과 지옥이 반대잖아요. 반대기 때문에 인간은 반대인 걸 몰라요. 어디서 틀어진 것도 몰라요. 옳다고 너도 옳고 나도 옳고 2자 관계기 때문에 그냥 거울 보듯이 옳아, 옳아 다 옳은 줄 알고 있어요. 2자 관계에서 헤어나질 못해요.
2자 관계가 뭐냐? 선과 악이에요. 여기는 뭐냐?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에요. 상처 받은 곳 이걸로 선악을 반대로 뒤집어버립니다. 선이 악이고 악이 선 되는 완전히 뒤집어버린 거예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어디 갑니까? 강도가 주님의 식구라면 주님의 언약 있다면 지옥 갑니까, 천국 갑니까? 천국이죠. 세리 있잖아요. 바리새인이 저 사람 같이 되지 않은 걸 영광으로 여긴 세리, “주여 나는 죄인 맞습니다.” 이래서 합격했다니까, 합격.
2자 관계 아니에요. 제3으로 등장하는 십자가 상처 앞에서 나는 죄인인 것을 인정하니까 합격이에요. 너, 내 식구란 말이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뭐했습니까? 돈 벌었습니까, 기업 활동했어요, 사도들이 농사지었습니까? 십자가 증거 했어요. 그것도 어떻게 증거 했어요? “네가 내 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왜? 지옥이니까. 2자 관계 지옥, 선악체계 지옥, 마귀가 꽉 쥐고 있는 지옥.
홀연히 등장한 십자가로서 우리나라 새로 만들자.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에 의해서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람, 예수님과 창세전부터 한 식구였습니다. 여기 인간 자리에 사도 바울 집어넣고 사도 베드로 집어넣으면 되지요. 오늘날 우리 집어넣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랐던 하나님, 예수님한테는 아버지, 이래서 아버지와 예수님과 우리 모두가 이 안에서 one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되고, 너희들이 하나된 것처럼 요한복음 14장에 성령이 오게 되면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 것처럼 너희도 고아 같이 버려두지 않고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거는 2자 관계가 아니고 3자 관계입니다. 십자가 중심의 세계에요. 어린양 중심이에요. 어린양의 보좌가 보인다고 돼 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요한계시록 보고 그다음에 예레미야 보고 마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전에 설교시간에 언급했는데 다시 언급하고 싶네요. 7장 13절에 장로 나오지요. 순교자들입니다. 최종점 넘어가는 순교자들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자들이에요. 장로는 네 생물과 더불어서 어린양의 보좌를 섬기다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 신입이, 신참이 들어오거든요.
장로들이 묻는 거예요.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너 어디서 왔으면 어느 자리냐고 어떻게 왔느냐, 라고 하니까 신참들이 똑같은 고백을 하는데 뭐라고 돼 있어요?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이 희어졌다. 누구의 영향력입니까? 본인의 영향력입니까, 한분의 영향력이에요? 3자 관계에서 언약을 이루신 예수님의 영향력이죠. 그래서 내가 어떻게 구원 받는가? 정답은 뭐냐? 예수님 개인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언약을 개인이 아니고 우리를 공간화 시키는 거예요. 예수님의 공간, 그걸 예수 안이라 해요. 예수 안에 공간화 시켜서 예수님의 개인적인 언약이 새로운 나라로 확장되면서 성령을 줬기 때문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개인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네가 누가 이룬 공간에 속했느냐를 묻는 거죠. 그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고난 받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예레미야 30장 15절과 31장 15절을 같이 보면서 마치겠습니다. 30장 15절 보게 되면, “어찌하여 네 상처를 인하여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으니까 주께서 때려버린 거예요. 왜? 언약이니까, 특수한 민족이니까. 죄 지으니까 때린 거예요. 다른 민족은 죄 지어도 안 때려요. 그냥 내버려두는 거예요. 죄 지어서 때렸으니까 거기에 뭐가 생겼습니까? 상처가 생겼지요.
이 상처가 어떤 상처인지 31장 15절에 나옵니다. 크리스마스 때 등장하는 유명한 말씀이죠.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이게 마태복음 2장에서 무슨 대목입니까? 베들레헴에 두 살 밑에 다 죽었을 때 이 본문 등장하지요.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 세상의 지옥의 사고방식에 따르지 않는 사람, 세상에 많은 선악체제를 따르지 않고 빠져나온 사람, 십자가 중심으로서 죄 속에서 천국을 발견하고 죄 속에서 비로소 예수님 혼자만의 공로와 은혜를 아는 사람, 이 사람이 고난 받는 오늘날의 이스라엘, 천국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이루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 혼자 인 것을 이제야 깨닫고 그 주님을 위하여 준미 중심으로 주님의 식구를 지옥에서 빼내는 일에 참여한 것을 영광으로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