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1117b말1장2절(선지자의 이중성)-이 근호 목사
안양20221117b말1장2절(선지자의 이중성)-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인간들은 지옥 가는데 굉장히 성실해요. 그리고 멈추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사님,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하는 것은 본인이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계속해오고 있었어요. 뭘 새삼스럽게,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 자체가 나를 타인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여전히 자기가 자기에게 주인이라는 것을 행색깨나 하고 있는 거예요. 잔소리 하신다면 잔소리대로 한 번 해볼게요. 선지자가 잔소리가 한 두 마디가 아닙니다.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종말이 와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망하도록 되어있어요.
그래서 선지자에게 대든다. 말라기는 선지자에게 대들었어요. 대든 이유가 이건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 종말과 싸우기 때문에. 나는 나의 종말을 내가 내쪽에서 강력하게 나는 거부합니다. 반대합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었어요. 하나님은 니가 종말을 맞이하지 아니하면 메시아와 연결이 안 된다 하는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는 내가 산채로 있으면서 메시아를 내가 모시고 싶습니다. 이게 인간의 종교성이에요. 뭐가 모자르고 뭐가 죄인이라서? 내가 뭐가 잘못되어서 내가 눈 뜬 산채로 메시아를 못 맞이합니까. 내가 뭐 어때서? 이런 식으로 대드는 거예요. 그 반발하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예를 들면요, 사사기11장에 입다라는 사사가 등장하지요. 입다 사사가 자기가 압몬이라는 나라와 전쟁해서 승리해요. 승리를 자가가 살아있는 채로 목격하고 싶었던 겁니다. 살아있고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승리로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승리했습니다,를 표현하는 방법이 희생물을 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번 승리하게 되면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것을, 튀어나오는 짐승이지요. 짐승. “짐승을 하나님께 이 전쟁은 하나님이 그냥 은혜로 승리하게 한 표현으로서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 아낌없이 내 희생물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입다가 이야기하지요.
그렇게 이야기할 때 입다 마음속에는 내가 엄연히 살아있다는 조건을, 나는 그걸 포기 못하겠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제일 먼저 튀어나온 게 뭐냐 하면 자기 죽음보다 더 싫어버린 죽음. 자기 죽음보다 더 귀한 것의 죽음. 사랑하는 그것도 시집도 안 간 딸이 뛰어 나올 때, ‘아, 하나님은 하나님의 승리에 내가 산채로 거기에 구경하거나 가담되지 못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되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겁니다.
일부 죄 지은 게 아니고, 의가 하나도 없는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내 의가 없다는 조건하에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가 완전히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탕자라는 조건하에 하나님은 합격 반지를 끼워주는 거예요. 앞으로 천국 가서 니가 두 번 다시 내가 잘했다. 소리 안 나오니까. 나올 수가 없지요. 아버지 재산 다 날렸으니까요. 허랑방탕 날렸으니까. 귀한 반지를 끼워주고 귀한 한우고기로 잔치를 베풀고 동네방네 제대로 된 내 아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돌아왔다는 거예요.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로 간 거예요. 도저히 갈 수 없는데, 갈 수 없는데 왔다는 거예요. 돌아온 거예요.
터미네이터 그 사람이 마지막 손가락을 보였잖아요. I will come back! 아직도 나에게 배 12척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 했던 것처럼. 그 12척 없애버린 거예요. 그 손가락마저 없애버린 거예요. 그래야 내가 생각해둔 다른 자아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예수님 나무에만 맺히는 열매로서의 나. 그걸 로마서에서는 뭐냐, 기존에 아담에 속한 아담의 일부로서의 나가 아니라 새로운 아담. 아담에서 배척받은, 아담에서 죽음을 당한 그래서 아담세계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아담. 그 아담의 열매로서의 포함된 새로운 나가 준비돼 있습니다. 새로운 나만이 천국에 합류할 수 있어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 가지에 열매가 없으면 잘리는 거지요. 그 이야기가 말라기1장에 초반에 그게 나와요.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그 다음에 뭐예요? 경고. 벌써 말씀 자체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경고. 너희들 이미 잘못되어있다는 거죠. 경고라는 말은 잘못되어있다는 말을 주께서 돌아오라, 또는 제대로 하라. 이렇게 이야기 하신다는 것도 그것도 마지막 선지자에게 그렇게 마지막 선지자가 한다는 말은, 그들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게 말라기 마지막에 나오니까요. 엘리야를 보낼 때에 엘리야가 하는 일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에게도, 아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그 역할 전부를 누가 하는가, 엘리야 혼자 해요. 엘리야 혼자. 그래서 세례요한은 엘리야가 아니지요. 이 세대의 엘리야지요. 오는 세대, 이 세대 다 갖고 있는 엘리야는 주님밖에 없지요.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그냥 소리. 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앞서 소리부터 먼저 나오지요. 옛날에 조선시대 때 관료들이 가마 타고 행차하게 되면 사거리에 물렀거라! 하지요. 그거 누가 이야기합니까. 관료가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그 밑에 있는 하인들이 이야기해요? 하인들이 이야기하지요. 하인들은 그 오실 관료의 소리. 광야의 소리. 물렀거라! 거기 키 큰 거 엎드려! 고개 숙여! 그럼 허험! 해가지고 흔들 흔들 멀리나겠어. 가마가 그렇게 멀리 난답니다. 속도도 느리고. 폼 잡는데 그만큼 애를 써야 폼을 잡지.
가마를 타는 이유가 다리가 아프다던지, 걷기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지위를 각인시키기 위해서. 너는 백성이고, 나는 너희를 통치하는 자야.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법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예요. 법이라는 것은. 각자 자기의 위치를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하는 법이에요. 말라기에서도 경고하신 거예요. 말라기의 경고는 뭐냐, 너희들은 이미 끝났다.
그럼에도 너희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서 이렇게 경고하는 이유는 뭐를 살리기 위함이냐 하면, 이스라엘은 끝났어요. 이스라엘은 이미 끝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속에 레위언약을 집어넣습니다. 이스라엘 죽이고 레위언약 살리고.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의 언약으로 우리가 산다 하는데, 우리가 사는 게 아니에요. 레위언약이 살아요. 레위언약 살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멸망시켜야 되는 겁니다. 나를 멸망시켜야 내가 구원 받아요.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어야 나사로가 나흘만에 살아나요. 나사로가 예수님한테 나 죽여 달라고 요청한 적 있습니까. 나사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 평소에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나를 시험 삼아서 일단 저를 한 번 죽여주시고 다시 살려주세요.” 나사로가 그렇게 요청했습니까. 그렇게 안 했지요.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온 집안이 난리도 아니었어요. 끝났어! 끝났어! 예수고 뭐고 이게 뭐고? 예수 믿은 효과 없어. 이젠 효과 없고 예수님이 나를 배신했어. 예수님은 우리 집안을 배신했고 우리에게 맛있는 탕수육, 잡채, 다 시켜 먹고 이제 와서 우리 뒤통수 쳐가지고 이용할 때로 이용해 먹고 이제 와서 우리를 버렸어. 그렇게 해놓고 그럴싸한 말, 죽고 난 뒤에 너희들이 부활하리라. 이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데. 마지막 재림 때 다시 살 줄로 믿습니다. 믿씁니다. 하고 말에 막 마르다가 힘이 들어가 있어요.
그런 거 내가 다 백번 천번 들었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건 그거고 우리 오빠 왜 죽입니까? 우리 오빠 왜 죽입니까? 서울 가서 비단구두 사주는 우리 오빠 왜 죽입니까? 우리 오빠 기둥인데. 우리 오빠 왜 죽이느냐고? 그건 그거고 내가 노트 정리 다 했잖아요. 시키는대로 노트에 다 적어놨는데. 그건 그건데 왜 우리 집안을 거덜 내느냐, 우리 집안을. 그 착실하게 다 했는데. 집안을 왜 거덜 냈느냐 이 말입니다.
주님하시는 말씀이 그러니까 니가 안 믿는다는 것을 내가 니 오빠를 죽여서 너희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까발린 거예요. 말라기가 그 원칙입니다. 언약이 성취하려면 인간이 언약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을 같이 수반해서 그게 들통 나야 돼요. 매일 우리가 불신자가 되는 게 매일 우리를 백성으로서 확인하는 방법이 그 방법 외에는 없어요. 매일같이 불신자로 들추어주는 것. 또 지가 알아서 불신자라고 우기지 말고요. 그건 타자를 의식해서 지 믿음 좋은 걸 자랑질하는데 그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보세요. 여러분, 불신자로 만들어냅니다. 빈틈없이 불신자로 만들어줘요.
불신자가 뭐냐 하면 우리가 행했는데 주께서 돌아오는 그것이 내 행한 것하고 균형이 안 맞는다는 거예요. 저울질이 안 된다는 거죠. 바나나 오천원치 달라고 했는데 바나나 달랑 하나만 달랑 줬을 때 이게 멱살 쥘 만하잖아요. 속았어요. 속았어요. 내가 주님한테 속았어요. 주님은 니가 가상해서 만든 예수한테 니가 속았다. 진짜 예수님은 말로 거래하는 분이 아니에요. 말로 주고 받는 분이 아니고 우리를 사로잡는 분이고, 우리의 모든 일상을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모든 일을 유발시키는 일을 하는 겁니다. 오늘도 김장할 때 어떤 죄가 유발되는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말라기는 이스라엘을 버리려고 합니다. 그 버림받은 자가 언약과 유일하게 만남의 장소에요. 만남의 장소. 국도에 만남의 장소 있잖아요. 고속도로 휴게소에 쓰레기 비우는 게 아니고 만남의 장소. 만남의 장소를 할 때 만남의 장소의 혜택은 누구한테 돌아오는가, 야곱에게 돌아갑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따지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갑니까. 그 당시에 바사, 파르사 나라에서 힘들게 살아갔어요. 바사나라가 전쟁하기 좋아하니까 그 전쟁 비용이 있을 게 아닙니까. 전쟁비용을 어떻게 각출해요? 자기한테 통치 받는 나라한테 강제로 다 뜯어가는 겁니다. 말이 세금이지 도둑질이지요. 도둑질해가는 거예요.
일제시대 때 도둑질해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일제시대 하지 말고 일제 강점기라고 바꾼 지가 언제인데 일제시대라고 하느냐 하는데. 일제강점기를 바꾼 이유는 우리 한국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일제시대 때는 그 때는 한국이 없었고 조선시대 구한말이에요. 구한말 때는 구한말의 그 치욕스러움을 그대로 유지해주는 용어가 필요해요. 일제시대. 일제통치할 때 이 말은 뭐냐, 우리가 당해도 싸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는 조선은 개판이었다. 그걸 인정하고 들어가야 돼요. 그걸 인정하고.
지금 입장에서 과거를 하게 되면 이건 뭐냐 하면 전에 했지요. 그건 가설이라고. 가설. 엉터리 이론이에요. 가설에 불과해요. 지금 내가 어릴 때 생각하면, 어릴 때 그 마음이 아니고 지금 현재에서 내세운 가설에 불과해요. 인간의 역사라 하는 것은 그런 허점이 있어요. 우리는 그 때 그 시절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렇게 그 식언덩어리 그것밖에 안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은 식언이 있어서 내가 그런 남자 같으면 그런 남자 만나지 않겠지만, 그 당시 그 식언이 없었잖아요. 같이 까불고 깐족대고 논다고 정신없이 놀았잖아요. 그저 신났지 뭐. 할로인데이 돌아다니고.
주님께서는 이 언약을 위해서,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없앱니다. 언약으로 이스라엘을 없애요. 그게 주의 복이에요. 내가 없는 세상은 없는 세상이다. 이게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이야기인지 몰라요. 내가 가지 않는 길은 나에게 없는 길이에요. 그런 길이 있는 줄 몰라요. 내가 안 갔으니까. 안 갔어요. 그래서 성도는 자기가 가는 길을 기억하는 게 아니고, 나의 길을 없애주는 그 길이 좁은 길이고 생명의 길이에요.
내가 자꾸 꾸역 꾸역 끄집어내는 나만의 길을 계속 삭제시켜주는 그 작업을 주님이 동행하기 때문에 벌어진 희한한 현상입니다. 주님 제가 과거에 주일학교했고, 성가대 봉사 다했습니다.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지금 니 주머니에 얼마있노?” 지금 이리 물어요. 과거에 뭘했느냐를 묻는게 아니고 지금 니 주머니에 돈 오만원있고, 오늘 저녁 반찬은 뭐야? 그거 생각하지 말고 지금 생각해. 지금. 지금 내가 준 거 생각해. 자꾸 과거의 내가 이렇게 잘났다는 그거 따지지 말고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간 거예요. 나름대로의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있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지만 의미가 없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everybody.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미를 두는 것은 지금의 내세운 가설이에요. 엉터리이론이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의 나를 긍정하기 위해서 과거를 지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고 지금 조작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없는 세계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일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마음 휘둘 일 이유 없습니다. 내가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주께서 세상에 휘둘일 필요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휘둘리게 하게 만들어요. 어서오이소. 어서오이소. 시장에 앉아가지고 하나라도 팔려고. 오늘 수능 잘쳤지요. 바지 하나 더 팔려고. 왜냐하면 우리를 없애는 방법이 그 방법밖에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아직도 우리가 복음 생각하게 되면, 덜 뻔뻔스럽구나! 더 뻔뻔하게. 채찍질해요. 더 뻔뻔하게. 오직 복음뿐이야. 알았지. 정신 차려! 돈 이외에는 아무 의미 없는 거야. 그래야 우리가 탕자가 될 게 아니겠습니까. 떠난 우리가 우리의 막장을 우리가 값을 해줘야 돼요. 나의 막장을. 막장 아직 멀었어요. 한참 더 들어가야 돼요.
나의 마지막 모습을 독촉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이끄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직까지 마지막이 안 된 이유가 아직도 반발을 덜해요. 반발을 더 심하게 할 때가 있어야 돼요. 어느 정도로? 말라기1장2절의 말씀처럼.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런 말이 하나님 앞에서 서슴없이 튀어 나와야 돼요. 그 자리에. 말라기 말씀이 우리한테 다시 재탕되고 반복해서 적용되는 순간입니다. 말라기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서 활동하게 되지요. 말라기를 한 번 읽고 치우는 게 아니고, 매일같이 접해야 될 말씀으로 다가오지요.
여기에 대해서 2절 끝과 3절에 사람들이 제일 어려워하는 게 나오지요. 바로 선택설. 예정론이 나와요. 예정하사 선택. 선택할 때 선택과 예정선택이 달라요. 선택을 해버리면 이 순간 주님이 나를 선택했다. 이리 되는 거죠. 예정선택은 이 선택은 어떤 예정된 것에 대한 결과뿐이다. 이게 예정선택이고. 예정선택입니다. 여기서 그냥 너를 선택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사람들은 주님이 나를 선택했다를 본인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소유하려고 하는데 나중에 나이 좀 들어가지고 치매 걸리면 이 소유성이 날아가버려요.
선택을 내가 소유하는 조건하에 선택되어버리면 치매에 걸려버리면 예수님이 누군지 나중에 뭐 치매 걸리고 나니까 예수 찾다가 부처 찾고 난리가 아니지요. 정신 있을 때는 예수님하다가 나중에는 오락가락할 때는 가까운 자식들이 “어머니, 우리 집안이 다 불교에다가 다했는데 어머니 혼자 천당가고 자식버리고 혼자 천당가면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그렇게 천국가도.” 합리적 의심을 하면서 논리를 내세워가지고.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가족이기 때문에 종교를 하나로 모읍시다. 그동안 부처 떠난 거 회개하고 부처 믿읍시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반성하고 회개한다. 이렇게 됐잖아요. 말씀에 나오지요. 사실은 이게 뭐냐 하면 우리 집착성을 까발리는 이야기에요. 반성하고 회개하고 특히 이 점. 제발 남한테 사과하지 마세요. 사과하게 되게 되면 자신의 의가 그만큼 사과한 만큼 증감해요. 타인에게 이용해서 내 의로움을 챙기는 방법은 남에게 두 번 세 번 사과하는 방법이에요. 사과는 지나간 거예요. 사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때는 미안했는데, 지금은 안 미안해.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려. 사과하라하면 사과하지요. 자기의 의로움은 점점 더 하늘같이 높아지는 거예요. ‘아, 내가 남한테 사과할 정도로 겸손하구나!’ 이리 되어버린다고요.
누가 와서 “사과해. 미안하다고 해.” 해줘버리세요. 그거 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왜 진심은 없어.” “진심을 다해서 미안합니다.” 까짓거 원하는 대로 다해줘. 다해줘요. 인간은 누구하고 싸우기 때문에. 자기의 종말과 싸우거든요. 내가 의로워야 아직까지는 종말까지는 내가 이를 때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리 되거든요.
그러니까 사과를 하게 되면 종말을 자꾸 지연시키게 돼가지고 힘들어요. “니 같이 사과하는 건 지금 당장 죽어버려!” “내가 바로 원했던 바야. 내가 원했던 거야. 그게.” 여러분들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산만큼 사람이 힘들어요. 살아있는 만큼. 살아있는 만큼 이것 저것 챙길 게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김장 더 해야 되고. 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라고요. 살아있는 게. 굴을 넣는가, 갈치를 넣는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그게 왜 그런 고민을 하느냐 하면 내가 안 죽고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하는 거예요.
왜 살게 하시는가, 바닥을 드러내야 죽이지요. 우리의 바닥을. 아직 바닥이 덜 나왔어요. 매일 돌아서면 주께 감사고 영광돌리는데 그게 바닥입니까? 인간은 사과하고 반성하고 주님께 회개하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어떤 뭐가 있느냐, 인간은 오직 그것밖에 없어요. 가능성. 인간 가능성이에요. 인간의 존재는 가능성이에요. 존재=가능성. 가능성의 덩어리가 존재에요. 아직도 나에게 배 열두척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전에는 20척인데 12척이 남아있는 것.
그래서 자기의 가능성을 위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지가 잘 할 수 있는 거 취미생활을 합니다. 취미생활한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감을, 존재감은 가능성이니까. 나는 돈은 못 벌어도 팔씨름 하나는 잘한다. 팔씨름. 팔씨름할 때 보면 상대방의 팔을 잡고 같이 힘을 겨루는 거잖아요. 팔씨름 하는 것이 손이 미끄러워서 힘주다 빠졌다. 그러면 끈으로 묶어요. 그걸 스트랩 매치이라 합니다. 요 근래 TV보고 처음 알았어요. 1억걸고 팔씨름하거든요. 스트랩 매치해가지고 끈으로 묶어가지고 공동운명체에요. 빼도 빠지지를 못해요. 그 시합에 둘이 강제로 빠져버렸어요. 시합에 사로잡힌 바 된 거예요. 거기서 나오던지, 풀던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이게 뭐냐, 이게 선택이고, 이게 예정선택이고, 이게 주님의 사랑입니다.
니는 니하고 나하고 스트랩 매치. 끈으로 묶어가지고 사랑으로 야곱을 사랑으로 진짜 이스라엘을 꽁꽁 묶었다는 것이 레위언약입니다. 레위언약으로 꽁꽁 묶었어요. 레위언약으로. 사랑이에요. 인간은 범죄한 인간의 본심은 뭐냐,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사는 거예요.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사는 거예요. 이게 느브갓네살이에요. 모든 것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거죠. 자기중심. 이게 뭐냐 하면 자칭 신으로 사는 거예요. 자기가 신이 될 때까지 자기 욕망은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의 만족이라 하는 것은 향유, 희열 또는 자기가 신이 되기 전까지는 항상 미흡함을 느껴요.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 뜻은 뭡니까? 끈으로 언약으로 자기를 묶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랑의 밧줄로 나를 꽁꽁 묶어라, 하는 노래에요.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이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범죄 했으니까 뭘 느끼느냐 하면 답답함. 내 존재의 답답함으로 느껴질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말라기 선지자의 말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본성이 모든 선지자를 다 거부하잖아요. 그 선지자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다가서기 때문에 선지자 앞에 서 있는 모든 인간은 선지자를 필히 배척할 수밖에 없어요.
미가야 선지자는 400:1로 붙었고, 엘리야 선지자는 850:1로 붙었어요. 숫자는 간단하게 써요. 850:1 숫자는 간단하잖아요. 그걸 점으로 찍어봅시다. 학교 운동장해가지고 여기에 850개 점을 찍어가지고 포위시켜볼게요. 시간관계상 다 못하지만 하나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고 이건 무시대상이지요. 850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확률이 몇퍼센트에요? 0.0011%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세상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어요. 우리가. 수요일도 이야기했지만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묵시를 최고로 해봐야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새벽에 지 혼자 지껄이고 있는 버스 정류장 안내양, 401번 버스가 전 정류장을 출발했습니다. 뭐 듣는 사람이 있어야지. 그냥 외치는 거예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외친다는 것은 말로 하는 것도 있지만 모든 행위가 외침이에요. 복음의 외침으로서 행동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어서 오세요. 이렇게 하는 모든 행위가, 설거지하는 모든 행위가, 복음의 외침으로서 설거지나 행동 또는 애들 세탁하는 행동 모든 행위가 주께서 외치게 만드는 거예요. 백날 해봐야 소용없는 이 세대 속에 하나의 롯처럼 살아가는 거예요. 욥처럼 살아가고, 룻처럼 살아가고. 아무도 이해 못해요. 이걸 제목으로 삼고 싶어요. 좀 길지만. 제목으로 삼을 건 아니지만. 기니까. ‘점점 미쳐간다.’ 거기에 문자 하나 넣으세요. ㅎㅎ 내가 생각해도 점점 미쳐간다. 그런데 신난다. 이중성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주님의 경험했던 체험을 본의 아니게 그걸 같이 체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예정론. 예정했다는 것은 시선이 오는 세대에 오는 분이 선택한 거예요. 이 세대에서 내가 미리 생각했던 선택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선택하면 구원받고 고맙겠습니다. 저를 선택해주세요.” 그 선택은 오는 세대하고는 인간들이 고안해 낸 신이 자비로 우리를 선택할 때 선택이 그건 가짜 선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진짜 선택은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숨이 막히는 그것을 아가서에 보면 그걸 사랑으로 했어요. 그래서 아가서에 보면 남자가 오른손에다가 여자를 이렇게 안았거든요. 헤드락에 들어가보세요. 락. 꽉 조는 것. 옛날에 허재라는 감독이 블록이라는 말을 못해가지고 불낙이라 해가지고 유명하거든요. “이게 불낙이야?” 블록이라는 말을 불낙이라고. 락. 조는 거예요. 오른손으로 조을 때는 빠져나오지 말라고 꽉 조는 거예요. 그이가 나를 오른손으로 꽉 조였다. 나는 거기서 못 빠져나오게 된 이 상태를 너무 감사하다.
이건 세상에서는 뭡니까. 점점 더 멀어져가네. 미쳐가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5장에 보면 내가 미쳤는데 무엇에 미쳤는가, 주님의 사랑에 미쳐버렸다. 어느 정도냐,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스스럼없이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정도로 미쳐버린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의 자랑을 못해가지고 환장하거든요. 신은 자랑거리중에 최고의 자랑거리가 신인데, 그쪽 방향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나로 하여금 천국가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내가 아무리 중력을 거스려 지옥가려고 애써도 운동장 자체가 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자체가 기울졌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이 천국가는 방향으로 쏟아지게 만드는 행위만 나오게 되어있어요. 어떤 짓을 해도. 이재명이 욕해도 천국가는 거고, 윤석열 욕해도 그게 천국가는 길이고,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게 바로 사랑은 “나를 사랑해줘” 이게 아니고, 꽉 조여버리는 거예요. 못 빠져나오는 것. 내가 에서는 지 마음대로 하도록 사랑안에 안 들어갔으니까. 그냥 내버려 뒀지만, 나는 이스라엘을 사랑으로 꽉 조였다. 2절에 봅시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했다. 자, 이것이 왜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 레위언약을 살리는 것. 레위언약을 완성하는 것이 말라기 선지자의 주제입니다. 할 때, 언약은 한 쪽 축복만 이야기 하는 언약이 아니고, 반드시 뭐를 대동하느냐, 저주를 대동하는 거예요. 저주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을 버려야 돼요. 모든 아담에 속한 자를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 한 분만 건지는 거예요. 버림받을 때, 주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이름을 가져온다고요. 이름이 뭡니까? 예수지요. 이름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 이름은 평범한 모든 인간의 이름들과 동등한 이름이에요. 이름 중에서 누구 이름만 높였다? 예수님 이름만 택해서 사랑해 버리면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로 올려버리면 자동적으로 나머지 이름 가진 모든 자들은 버려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정 선택에 시발점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내 이름을 선택하는 게 선택의 시작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높이는 거예요. 내 이름은 선택됩니까? 안 됩니까? 내 이름은 선택되지 않았어요. 저주받아요. 반드시 축복은 저주를 동반하니까 저주받아요. 저주받는 내 이름을 축복받는 예수 이름으로 살게 만드는 게 이것이 예정 선택입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그래서 기도할 때만 주의 이름이 아닙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잠자든지 아니면 뭐 화장실에서 변을 보는 것까지 모든 것이 다 주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배가 꾸르륵 아프게 만들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입이 텁텁할 때는 사탕을 잡숩도록 주의 이름께서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그래서 성경에 보면 니가 너를 선택하지 말라. 범사에 감사히 받으면 버릴 게 하나도 없느니라.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버릴 게 없다는 말은 니 인생 니가 꾸려나가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안 만나고 결정할 그건 없고, 하나님께서 계획은 우리가 할지라도 잠언서16장1절,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가 주의 이름이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깊숙하게 우리에게 개입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거 있잖아요. 하나님은 목자시니 우리는 그의 양이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23편1절에 그렇게 시작하잖아요. 거기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찾아봅시다. 시편23편. 사실인가.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자기 이름. 우리 이름이 아니고 이 말은 뭐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내 이름을 폐기처분시키기 위해서 인도한다.
내 이름이 폐기 됐다는 말은 내가 그동안 모아놓은 나의 저축해놓은 의. 나의 자존감도 같이 폐기되는 거예요. 어느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품성을 악마로부터 부여받은 상태에서 자진해서 자기 이름과 자기 의를 포기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건 불가능성인 거예요.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치매에 걸리나 안 걸리나 이건 불가능한 거예요. 이건. 치매에 걸려서부터 난 딴소리해서 지옥 간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애초부터 치매 안 걸린 부터도 이미 우리를 치매 걸린 걸로 간주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줘버리거든요. 치매 걸리나 안 걸리나 이미 환자에요. 차이 별로 안 나요.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준 것은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버리기 위함입니다. 버릴 때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 버리는 이유를 낱낱이 끄집어내 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몰라요. 멈추지 말라. 니가 버림 받는 것 니가 멈추지 말라. 너의 종말은 이미 정해졌어요. 그건 말씀이 우리보다 발걸음이 빨라요. 어떤 사람은 같이 가는데 성질이 급해서 빨리 가는 사람이 있지요. 여러분 가까이 가는 사람은 알아요. 혼자 바쁘게 지 생각만 해가지고 앞에 죽 죽 가는 사람이 있어요. 로케트처럼 가는 사람. 수근둥해가지고 땀 뻘뻘 흘리며 가는 사람 있잖아요. 가봤자 나중에 같이 만나잖아요.
우리는 어떤 것도 우리의 본성의 행위를 강제해서 멈출 수가 없습니다. 멈추는 존재가 아닙니다. 뭐라도 해요. 뭐라도. 백수가 돼서 누워 있어도 그 누워있는 것도 일이에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또 뭐하며 떼울까. 이것만 생각하거든요. 그것마저 주께서 우리의 종말을 우리가 느끼도록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언약 안에서 우리가 질책을 당하고, 사과 회개 반성마저 주께서는 하지 마라, 나 안 들을란다. 해버립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말씀 안에 계신 분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로 등장합니다. 이 언약을 완성하시는 분이 진정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이 버려지면서 그 이스라엘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레위기4장에서는 선지자니까 엘리야라고 이야기합니다. 장차 엘리야가 올 터이다. 왜 엘리야로 했을까요? 엘리야가 죽을 때 시체로 이 세상에 누워있는 상태였어요? 아니면 이 땅에 시체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시체가 없지요.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할 때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잖아요. 더 제대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를 깊이 있게 내용을 제공해 줄 수 있어요. 빈 무덤이다. 빈 무덤으로 해야 죽었다는 것이 분명해지지요. 무덤은 죽은 거지요. 죽은 자만 가지요. 죽었는데 비어있다. 뭐냐, 죽었는데 비어있으니까 빈 무덤을 주께서는 계속 부활의 표현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게 아니고 예수님 죽음이 살아있는 거예요. 너희들이 아는 죽음과는 질이 다른 죽음이 계속 살아있어요. 죽음이 살아있어야 그 죽을 때 나온 피, 그 살점, 피살점이 살아있어 줘야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에로 가는 죄사함의 능력이 여기서 나오는 거예요. 주님의 죽음에서 죄사함이 나와요. 주님의 죽음이 모든 언약의 레위언약이든, 다윗언약이든, 모든 죽음에 완성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새언약이라 해요.
예수님이 살아서 설치는 것은 언약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꼭 죽으셔야 돼요. 이 잔을 마시고 죽어야 돼요. 그건 독약입니다. 독약 마시고 죽어야 돼요. 우리가 지은 죄가 독이에요. 우리는 독가지고 살려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 독은 위험한 것이라고 몸소 시범을 보인 겁니다. “봐! 내가 너희들이 하는 그 귀한 그것을 내가 마시니까 봐! 아버지가 나를 버렸잖아. 너희들도 이렇게 나처럼 버림받는 거야.” 그걸 십자가 반복을 통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확인해야 되지요. ‘아, 내가 하는 것이 나를 죽이는 행위구나!’ 그런데 우리가 그 행위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어요.
내가 죽는 거 외에는 이 땅에서 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에 전부다 취업된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애부터 이미 취직한 거예요. 별 수 없습니다. 전부 다. 자기 죽는 일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어요. 9.5까지 아침 9시부터 저녁5시까지 퇴근 시간까지 나를 죽이는 일에 열심히 종사합니다. 죽기 위해서 그렇게 골머리를 앓지요. 실적 올리고.
그러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뭐냐, 이스라엘을 뭐로 봅니까? 에돔으로 보고, 지금 에돔이야기를 끄집어낸 거예요. 너희들은 말은 이스라엘이지만, 사실은 에돔이 하는 짓거리를 한다. 에돔이 무슨 짓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헐었던 것을 다시 쌓으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방법으로. 쌓으려고 하는 그것이 뭐냐, 8절에 보면, 희생제물을 드리는데 그럼 어떻게 하는가, 흠 있는 것, 흉한 것, 병든 것, 1장13절. 이런 것을 드리는 거예요. 구색 맞추는 겁니다. 이 심보를 한 번 보세요.
레위언약이 뭐냐 하면 제사 드리는 거예요. 제사 드리는 것. 제사드릴 때, 지금 일반 불신자들이 제삿날 있잖아요. 제삿날. 제삿날 무슨 음식 드릴까요? 물어보고 드립니까? 아니면 저희들이 알아서 드리는 거예요. 제사를 누구한테 하는 거예요? 귀신한테 하는 것이 아니고 잘난 본인에게 절하는 게 제삿날이에요. 평소에 술 먹고 온갖 짓 다해놓고는 그 날만큼은 술 반짝하고 동네 목욕탕 갔다와서 12시에 갔다와가지고 그 날 만큼은 한복 두루마기 떡 해가지고 온 폼은 다 내세우고요, 평소에는 깐쪽거리다가 그날만은 점잖게 목소리 깔아앉아가지고 댕~ 댕~ 12시까지 못 자게 만들고, 못 자게 하는 것은 12시까지 텔레비켜놓고 그날만큼 제사장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호기심 많은, 뭔가 호기심 많은 어느 아는 뒤에 뭐가 있는가 싶어서 가보고 조상님이 있다 하니까 진짜 조상님이 있는가하여 눈으로 목격하려고 들어가 보고, 노골적으로 제사드리고 있는데, 없네! 눈치코치도 없이. 여자는 저 서있고, 장손 이리 와! 장손은 벌써 백수된지 5년됐는데 그 때는 또 장손이 옷입고 와가지고 술해가지고 돌리고. 음복해라. 오늘 만큼은 술 허용한다. 마시고. 향피우고. 향 피워놓고 앉아서 평소에 듣도 못한 기도도 못하면서 중얼중얼... 중얼중얼하면서 다 들리게 하는 거예요.
우리자식하고 그저 말 잘 듣고 다 취직하고 우리 딸래미 35살인데 보내시고..., 아버지 기도 끝나면 잔 올리려하는데. 조용히 해라! 내가 지금 기도하는데. 쓸데없이 어디 여편네가 잔소리하느냐. 치워. 다른 아들은 저 배 깍은 거 누가 먼저 먹나. 저 밤 깍아놓은 거 좋아하는데. 제사를 지금 누구한테 폼내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폼 다 내는 거예요.
숨겨진 자기의 심성을 다 제사라는 그 찬스를 해가지고 드러내는. 권위를 유지하는 방법이 일년에 제사8번 드리는 거예요. 3대까지, 4대까지 다 끄집어내가지고. 맏이는 별로 수입도 없는 맏이는 그날 만큼은 둘째, 셋째한테 봉투 가져오라고 전화해가지고 참석 안하거든 돈이라도 빨리 계좌번호 다 불러내서 목돈 챙겨가지고 남은 제사까지 용돈 쓰고. 아버지 내가 모신다. 아버지 없는데. 아버지 소원이었다. 지 소원이었겠지. 지 소원. 보험금 지가 다 뺏어가지고. 보람상조까지 다 걷어내고요. 보람상조 한오십만원하는데 백만원 받아서 오십만원 지가 쓰고.
뭐냐, 내가 이렇게 행했지않습니까. 주님. 바쁜대도 이렇게 믿어주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부정할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괜찮은 자기 의로운 행위만 자기가 기억해요. 자기 자존감 때문에. 인간은 말라기를 통해서 왜 우리가 이미 멸망했어야 되는가를 확인하는 책이 말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동시에 우리가 왜 예수님이 될 수 없고, 메시아가 될 수 없고 우리 행함으로 구원이 되지 않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면서 낱낱이 밝혀지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